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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녹차_ 차를 마신다는 것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5. 00:01


 



오래전, 모 일행을 따라 지리산 아래 하동을 지나며 차 두 봉지를 샀던 기억이 있다. 지금은 그 노스님의 법명도 절의 위치도 가물가물하지만 아무래도 지리산으로 향하는 기분은 남달랐다.
거기에는 분명, 인공의 페인트에 묻혀버린 은은한 삶의 빛깔들이 남아 있었다. 섬진강을 따라 오르던 매화의 흐드러진 빛깔과 구례 산동 산수유의 아득함, 쌍계사 골을 부풀어오르게 하는 벚꽃들이며, 무엇보다도 지리산 깊은 폭포의 깊이를 작은 찻잔에 옮긴 듯한 빛깔과, 태고부터 달여온 듯한 향을 지닌 녹차를 만날 수 있다는 것.
그것들이라면 도회에서 올린 마음의 때와 사랑을 잃은 상처도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은가. 다기(茶器)를 가지런히 놓고 차를 달이는 동안만큼은 삐걱이는 툇마루도 숨을 고르고 하늘에서 숨은 별들도 걸음을 늦출 것 같다. 그 시간은 마른 찻잎들이 고요하게 다시 새잎으로 피어나는 순간이니. 그래서 찻잔 앞의 시간은 마음의 뿌리를 만지는 시간이며 아무렇게나 뒤엉키고 헝클어진 생각을 가지런히 하는 시간일 것이다.

그래서 웰빙이라고? 녹색이 웰빙의 상징처럼 통용될진대 녹차를 두고 무슨 덧말이 필요할까. 따져보면 자연의 일부로 사는 인간에게 자연과 더불어진 것 중에 웰빙 아닌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역시 녹차는 단순히 ‘웰빙’이라는 외래어로 일괄하기에는 아쉬움이 많다. 햇살 따신 봄날 저 남도의 차밭에 들어 어린 찻잎을 손으로 만져보면 안다. 햇살에 색을 입혔던 것일까? 아니면 햇살이 데리고 놀다 깜빡 손을 놓친, 그 어린 자식들일까? 왜 모르겠는가. 그것을 따고 덖고 달이고 마시는 일이 자연에 절하는 일임을.






“다도(茶道)는 가장 편안한 자세로, 가장 편안하게 차를 마시는 겁니다. 더불어 함께 드는 사람의 마음을 평온하게 하는 것이 다도지요.”
노스님의 말에 일행의 눈빛은 미묘하게 동요했다. 그도 그럴 것이 친목 삼아 다도회 모임을 가지며, 녹차 한 잔 대하길 우리가 잃고 온 대자연에 혹은 우리가 잊고 산 대우주에 제를 올리듯 해야 한다고 서로가 서로를 격려하는 것이 일상이었던 것이다. 이 지리산 부근까지 왔던 것도 노스님의 가르침을 통해 그런 일상을 더 공고히 하자는 것이었는데, 정작 노스님은 딴소리다. 그래서 ‘자, 듭시다’ 라는 말이 나왔을 땐 순간 어떻게 찻잔을 들어야 할지 몰라 당황스럽기까지 했다.

그랬다. 우리에겐 지나칠 만큼 지켜야 할 것이 많고 해서는 안 될 일이 많았던 것이다. 녹차라. 그건 점잖은 우리 조상들이 대대로 체통을 지키며 마셔왔던 것이니, 어두운 다방에 불량스럽게 앉아 홀짝거리는 커피와는 분명 다를 것이고, 차를 나누는 일 또한 다른 격식이 필요하다고 다도회 전체 일행들이 일말의 의심도 없이 받아들이던 것이었다. 허허, 그런데 점입가경이다.

“본래 다도니 주도니 하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닙니다. 주로 왜에서 건너온 것이지요. 본디 왜나라가 내용으로 가지지 못한 것을 형식으로 채우는 일이 얼마나 많았습니까? 그걸 우리나라 일부 양반들이 마치 당연한 것인 양 받아들였던 것이지요.”

서민들에게 차는 그저 오래 우리며 마음을 누그러뜨리고, 그리하여 자신과 상대를 평온하게 하는 것이니, 굳이 다도가 있다면 누군가 정성을 기울여 만든 차로 더 좋은 차 맛을 내기 위해 물의 양과 시간을 조절하는 것 정도라고…. 이야기가 이쯤 흐르자 일행들도 하나 둘 씩 고개를 끄덕였다.







늘 하는 이야기지만, 녹차 한 잔이 우리에게 그러한 위안이 되어주기까지, 쉬운 과정일리 만무하다. 얼마 전 한 광고의 배경이 되어 유명해진 보성차밭에 가본 사람은 눈어림으로라도 짐작할 수있을 것이다. 무슨 일이 그렇지 않을까마는, 키 낮은 차나무를 정성을 다해 가꾸고 적당한 시기에 찻잎을 따며 적당한 불에 덖고 비비기까지 일일이 사람의 손이 안 가는 구석이 없다. 그것도 막무가내로 일궈내는 일이 아니라 아주 섬세한 작업이 이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서둘러 그러한 노고를 말하기엔 이르다. 혹자는 차 맛을 햇살의 맛이라 하고, 혹자는 물맛이라고 하며, 혹자는 공기의 맛이라고 한다. 다 맞는 말이다. 좋은 볕에서 자란 잎을 좋은 물로 우려내서 공기 좋은 곳에서 마셔야 차 맛을 제대로 알 수 있으니. 그래서 좋은 잎을 고르는 것만큼 좋은 물로 달여야 하고 좋은 곳에서 마셔야 한다. 그럼에도 왜 보성차밭이 그렇게 유명한지, 지리산 하동이 왜 차로 유명한지 휙 한 번의 관광으로 마무리될 수 없는 의문들이 있다. 그 이유를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들은 없다. 기껏, 이곳의 풍광을 거론하는 것일 뿐. 역시 자연만이 해줄 수 있는 답변이다.

옛 사람들은 시절마다 마디를 두어 절기(節氣)라 불렀다. 냉온방이 넘치는 지금에사 그것은 우리와 상관없는 이치인 듯하나 절기라는 우주의 마디가 풀어놓는 세계의 비밀은, 녹차만 보더라도 기막히게 일치한다. 그중 곡우(穀雨)는, 첫 찻잎을 결정하는 시기이다. 곡식에 필요한 비가 내린다는 절기 이전에 따는 차가 우전차이며 곡우에 따는 차를 곡우차라 부른다.

생김새가 참새 혓바닥을 닮았다고 해서 작설차(雀舌茶)로도 불리는 세작은 생엽을 솥 위에 놓고 손으로 덖고 비비는 과정을 거치면, 쓴 맛이 덜하고 맑은 향이 난다 하여 최상품으로 친다. 향이 깊되 진하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녹차는 곡식 이전의 것?

 



돌을 깨는 사람은 돌을 깨는 일로 우주를 읽고, 물을 긷는 사람은 물을 긷는 일로 세상의 이치를 깨닫는다. 차를 덖는 사람들이 차곡차곡 늘어놓는 이야
기들, 대놓고 묻지 않았지만 자신들도 모르는 사이에 그들의 말은 그대로 우리 삶의 어떤 근원과 맞닿아 있는 듯했다.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가 처음부터 따로 있었던 것은 아닐 게다. 그러나 차를 마시는 순간에만 나오는 이야기의 무늬는 있을 수 있다. 아니, 차를 아는 사람들이 차를 마시며 나누는 이야기는 분명 그 결이 다를 테다.



얼마나 차를 좋아했으면 호마저 다산(茶山)일까. 정약용 선생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저서를 쓴 사람으로 유명하다. 그것이 차를 즐겼기에 가능하다 했으니 차의 효험은 이미 증명된 셈이다. 아쉽게도 이번 방문에서 포함되진 않았지만 전남 해남 두륜산 대흥사와 강진의 다산초당 역시 차밭 기행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곳이다. 특히 두륜산 대흥사 일지암의 뒤뜰엔 몇 개의 돌받침으로 받아내는 약수가 있는데, 방송과 잡지에서 어렵지 않게 사진으로 볼 수 있는 그 물이 일지암의 차 맛을 일품으로 만드는 숨은 공신이라고 한다. 다성(茶聖) 초의선사가 그곳에 묵으며 정약용이 유배중인 다산초당을 오가며 다담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윽해지는 그곳. 지금도 스님들이 우리 차 전통의 맥을 잇고 있다는 그곳에서 차를 나누며 혹은 차가 식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세상의 일들을 한 땀 한 땀 바느질하듯 내어놓으면, 바람 많은 밤에도 포근히 덮고 잘 이불 한 채 지을 수 있지 않을까. ‘다담(茶談)’이 그립다.




우유 한 잔에 가루녹차 한 스푼을 떠 넣고 잘 흔들어 바쁜 아침, 마셔볼까. 크림과 설탕으로 범벅이 된 커피믹스보다는 누룽지 향이 구수한 현미녹차가 사무실에서의 졸음을 쫓기에는 훨씬 수월하다.편의점 냉장고에는 음료회사마다 갖가지 이름으로 내놓는 녹차 캔들이 즐비하니, 무심코 집어드는 콜라 한 캔보다야 여러모로 나을 것 같다. 우전차, 세작, 중작, 대작도 있지만 큼직한 비닐에 넣어 파는 엽찻잎도 있으니 생수 한 병 대신 찻잎 한 줌 넣어 오래 끓인 엽차를 냉장고에 넣어두고 틈틈이 마시는 것도 좋겠다.
 
외국 브랜드 커피전문점에도 녹차라떼는 쉽게 볼 수 있다. 이것 역시 일회용으로 먹기 좋게 포장되어 나오니 집에서도 충분히 저렴하게 마실 수 있다. 녹차에 재웠다가 구워내는 녹차 삼겹살은 요즘 인기만점의 외식 메뉴란다. 녹차 향을 더한 장어구이도 마찬가지. 하기는 된장과 고추장에도, 청국장에도 녹차가 듬뿍 들었다. 이왕이면 조금 더 건강에 나은 것을 먹고 싶은 것은 당연지사다.
 
저녁에는 화장을 지우고 난 뒤, 세면대에다 물을 적당히 받아 가루녹차를 솔솔 뿌려 그 물로 마지막 헹굼을 해도 좋을 일이다. 봄철, 자외선에 얼굴이 주눅들만한 요즘, 피부 미백엔 그만이란다. 때로는 떠먹는 요구르트에다 가루녹차를 섞어서 팩을 해도 좋다 하니, 이쯤 되면 나도 웰빙 건강인의 면모를 확실히 갖춘 셈. 어려울 것 없이 일상에 녹차를 조목조목 섞어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취재협조 ● 대한다업주식회사 보성다원 T. 061-853-2595 | 02-2267-0982
중정다원 김용희, 이창수 T. 011-214-2624





취재 및 글 김서령 포항에서 태어나 바다를 벗하며 자랐다. 2003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2005년 대산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상, 올해 첫 소설집을 낼 예정이다.

취재 및 사진 이영균 대학에서 사진학을 전공하고 두어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잡지사 사진기자 등을 거쳐 지금은 프리랜서 사진가로 활동 중이다.

 

 

 

 <출처;tong.nate.com/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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