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 역사 불교와 一脈..고려 때는 평민도 즐겼다
웰빙 붐과 맞물려 차문화 보급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저변인구와 차 시장 규모가 폭발적으로 커지면서 개인의 수양차원에 머물던 음다습속(飮茶習俗)이 대중적인 사교문화로 번져가는 양상이다. 최근 들어서는 비싸고 질 좋은 차를 구하기 위해 외국행도 마다않는 차인들이 적지않아 고려 때 귀족들의 사치스러운 차문화를 상소로 나무란 중신(重臣) 최승로의 목소리가 새삼스럽다. 그러나 한켠에서는 우리 차를 제대로 가르치려는 다례원들이 전국 규모로 번져가고 있고, 규모는 작지만 중국 발효차나 일본 말차에 맞선 국산품이 선보이기 시작해 그나마 다행이라 하겠다. 영남일보는 부흥기를 맞은 우리 차의 우수성과 다례문화습속을 제대로 알리기 위한 기획물을 연재한다. <편집자 주> 사람들이 차를 마신 기록은 기원전 2700년 중국전설의 삼황오제의 한 사람인 신농씨(神農氏)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중국에서 다성(茶聖)으로 추앙받는 육우(陸羽)가 760년경 지은 다경(茶經)에는 "신농씨가 산천을 누비며 병자에게 좋은 약재를 구하려고 시험하던 중 백가지 약초를 맛보고 수십 가지 독초에 중독되고 말았다. 휴식을 위해 큰 나무 그늘에 앉았던 그의 앞으로 나뭇잎 몇 장이 떨어졌고, 그것을 입에 넣고 씹어보니 정신이 맑아지고 기력을 되찾게 됐다. 이때부터 차에 약효가 있음이 사람들에게 알려져 차를 즐겨 마시게 됐다"고 돼있다. 이같은 주장은 상상적 요소가 강하다. 굳이 기록으로 따지자면 기원전 1066년 주나라 무왕이 은(殷)을 정복했을 때, 파촉지방에서 나는 차를 공납의 진품으로 여긴 기록이 화양국지(華陽國志)에 들어있다. 기원전 59년 서한의 왕포가 쓴 노비매매문서에는 '차를 사다' '차를 끓이다'는 구절들이 있어 차문화를 엿볼 수 있다. 다경에는 또한 동진(東晋 317~420)의 유곤이라는 사람이 "나는 어수선하고 번민이 생길 때에는 항상 진다(眞茶)를 마신다네. 자네가 그것을 준비해 두게"라고 말한 부분이 있어 차가 마음이나 정신을 성찰하는 정신문화적 산물로 성장했음을 알게 한다. 중국의 차문화 발달시기가 한국에 한발 앞선 것은 여러 가지로 명확해 보인다. 기후 탓도 있고, 차문화가 일찍이 발달한 인도에 접경한 탓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차는 다른 문화분야가 그렇듯 출발은 다소 늦지만 나름의 특징을 가진 문화로 발달했다. '중국차는 향, 일본 차는 빛깔, 한국 차는 맛'이라는 말에서 보듯, 한국 차는 우수성에 관한한 독특한 위치에 있다. 차의 체(體)라고 할 수 있는 지표수의 질이 뛰어 나기 때문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좋은 물맛 때문에 한·중·일 동양삼국 중 한국의 차문화가 역사 중간에 한참 뒤처지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그냥 마실 수 있는 생수, 구수한 숭늉과 담배, 술 같은 기호품이 발달한 것도 원인이 됐다. 무엇보다 고려 때까지 그처럼 융성했던 차문화가 조선시대 들어 급격히 퇴조한 것은 조선조의 불교탄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사찰문화와 더불어 발달한 차가 억불숭유(抑佛崇儒)의 사회에서 퇴조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식물군으로서의 차나무가 아닌 정신문화적 형태로서의 차가 한반도에 등장한 것은 실제 언제쯤일까. 한국 차와 관련한 최초의 문헌기록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흥덕왕 3년조에 적힌 내용이다. "흥덕왕 3년(828) 12월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온 대렴(大廉)이 차종자를 가지고 왔으므로 왕은 지리산에 심게 했다. 차는 선덕왕(재위 632~647) 때부터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서 성하였다"는 부분이다. 대렴이 중국에서 차종자를 가져오기 200년 가량 앞서 이미 한반도에 불공에 쓰이고 왕실의 예·패물로 다뤄질 정도의 차문화가 형성돼 있었다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기후상 한반도에서 차나무 입지조건이 가장 좋은 지리산일대에 차종자를
차가 '문화'라는 이름을 사용할 수 있게 된 것은 행다(行茶-차를 부어 마시는 일체의 행위)와 팽다(烹茶-차를 끓임)의 의식과 정신문화적 요소를 갖춘 때라고 볼 때, 신라 차문화와 관련한 보다 구체적인 기록은 삼국유사 경덕왕 23년(765) 삼짇날 차회(茶會)기록에서 찾아 볼 수 있다. 다회의 주인공은 '찬기파랑가'를 지은 것으로 유명한 충담 스님. 남쪽에서 걸어오는 스님은 어디서 오는 길이냐는 왕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다. "소승은 삼짇날과 중구일(重九日 9월9일)이 되면 언제나 삼화령(三花嶺)의 미륵세존께 차를 공양합니다. 오늘도 차를 공양하고 돌아오는 길입니다." 왕이 자신에게도 차를 한 잔 나눠줄 수 있느냐고 묻자, 스님은 정성껏 차를 달여 주었다. 왕은 그 맛의 훌륭함과 찻잔에서 나는 기이한 향기를 극찬했다. 충담은 주위의 신하들에게도 차를 나누어 주었다. 학자들은 북방에서 차가 전래됐다면 불교전파 경로와 마찬가지로 중국과 한 층 가까운 고구려나 백제에도 전파됐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단지 당시 역사기록이 승자(신라)중심기록인 만큼 누락됐을 것으로 보는 것. 이귀례 한국차문화협회 이사장은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뤄볼 때 백제에 먼저 차나무가 전래됐다고 보는 견해가 맞다. 당시 차나무는 중국 양쯔(揚子)강 이남에 널리 분포돼 있었으며 양쯔강 이남과의 교류는 해로를 통한 백제쪽이 활발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백제에 불교를 처음 전한 마라난타가 영광 불갑사와 나주 불회사를 세울 때(384) 그 곳에 차나무를 심었다는 설이 전하며, 인도승 연기(緣起)가 구례 화엄사를 세울 때(544) 차씨를 지리산에 심었다는 화엄사의 전설이 있기도 하다. 한국다문화연구소 정영선 박사는 실제로 6세기 초의 백제 무령왕릉에서 은으로 된 찻잔이 발견되고 고구려 무덤에서도 비슷한 시기에 유물과 함께 전차(錢茶-돈처럼 생긴 차로, 고급 단차(團茶)의 일종)가 발견된 사실을 내세우며 이같은 주장에 손을 들어주고 있다. 무덤에는 망자가 평소에 즐겼거나 갖고 싶어했던 것들을 함께 넣어주는 풍습으로 볼 때 고구려의 차문화를 추정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종자로 번식하는 차나무는 이처럼 중국을 통해 전래됐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학설이지만, 현대 한국차문화 정립에 기여한 성우 스님(파계사 주지)과 같은 차인은 불교의 남방전래설과 더불어 인도에서 차가 직접 전래됐을 것으로 본다. 이 주장이 맞다면 한국 차문화의 원류는 기원 1세기로 껑충 거슬러, 2천년 역사가 되는 셈이다. 성우 스님은 "인도에서 건너온 허황옥 황후의 오빠 장유화상 이름이 김해지역에 남아있고, 허 황후와 김수로왕의 10왕자 중 7명이 수도 후 성불했다는 지리산 칠불암 유적 등으로 볼 때 불교남방전래설의 근거는 충분하다"며 "만약 그렇다면 불교의 특성상 제례의식도 함께 전파됐을 것이고, 차종자도 당연히 갖고 왔음을 의심할 것이 없다"는 논리를 편다. 허 황후와 관련해서는 삼국유사 가락국기에 삼국을 통일한 문무왕이 즉위년(661)에 금관가야의 김수로왕이 자신의 외가쪽 시조이므로 종묘제사를 합해서 계속 지내라고 명한 사실에서도 찾을 수 있다. 문무왕의 명령에 수로왕의 17대 후손인 갱세급간(世級干)이 661년부터 매년 세시(歲時)에 술을 빚고 차와 떡, 밥, 과일 등을 차려 수로왕묘에 제향을 올렸던 것으로 기록돼있다. 왕실 제물에 차가 쓰였다는 말은 차가 고급문화를 형성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차가 일반 평민사회에까지 전파된 것은 고려시대에 들어서 였다 |
<출처;yahoo akwaltz03 (akwaltz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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