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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茶의 개념과 기원,유래 (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5. 08:16
차나무의 종류
 
 
학명은 Thea Sinensis(L) - (현재 이 속(屬)은 1753년 C.V.Linne가
 
처음으로 'Thea sinensis'로 명명하여 사용되어 오다가 1950년
 
Kitamura와 1958년 Sealy에 의해 'Camellia sinensis(L) O.
 
KUNTZE'로 바꾸어 사용되고 있는 추세이다)로서 린네의 분류법에
 
의하면 쌍떡잎식물 측막태좌목(側膜胎座目, Parietales) 차나무과
 
(茶科=山茶科, Ternstroemiaceae, Theaceae) 차나무속(茶屬,
 
Thea)의 상록교목 또는 관목이다. 차나무는 사철 푸른 다년생 종자
 
식물로서 잎은 약간 두터우며 윤기가 있고 긴 타원형으로 질기다.
 
음료로 마시는 차는 봄에 나오는 차나무의 연한 새싹을 따서 만든
 
것이다. 9-11월 사이에 꽃이 피고 5-8개의 꽃잎이 있다. 이때 맺힌
 
열매는 이듬해 겨울에 익어 터져서 씨가 떨어진다. 다갈색 씨의 지
 
름은 약 1cm 정도의 공모양이고 기름을 짜서 쓰기도 한다(일반 콩
 
기름과 같이 사용하면 된다). 차나무는 교잡이 쉬워 잡종과 변종이
 
많다.   (사진은 Gallery 참조)
 
 
 1. 중국종(var. sinensis)
 
 
여러 개의 줄기로 된 떨기나무(관목)이며 높이는 약 2.8m까지 자라
 
나는데 재배할 때에는 수익성 때문에 줄기와 가지를 잘라 1m 정도
 
로 키운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대부분의 차나무가 이 종류로 추위에
 
잘 견딘다. 수명도 100년 정도까지 되므로 경제성도 있다. 현재 우리
 
나라(보성, 제주도 등)와 일본에서의 차나무는 대부분 변종이 된 야
 
부키타(藪北 やぶきた, 일본 시즈오카현의 재배종 중에서 선발한 품
 
종으로 찐차 제조에 적합)종으로 경제성은 좋으나, 차의 맛이 떨어
 
진다(왜냐하면 뿌리가 재래종은 직근성인데 비해 야부키타는 직근
 
성이 아니기 때문에 땅의 양분은 흡수하는데 한계가 있어 지금은 비
 
료와 농약을 많이 사용한다. 그래서 해가 갈수록 차의 맛이 떨어진
 
다. 슬픈 일이다). 잎의 크기는 4-6cm이나 12-15cm인 것도 있다. 소
 
엽종이라고 부른다.
 
 
 2. 아샘종(var. assamica)과 캄보디아종
 
 
아샘종은 높이가 6-18m까지 자라며 줄기가 하나인 큰키나무(교목)
 
와 여러가지 변종이 있고 수명은 40년 정도이다. 잎이 몹시 커서
 
20-25cm인 것도 있다. 대엽종이라고 부른다. 영국, 프랑스 브랜드
 
의 홍차가 대부분 이 종류이다. 캄보디아종은 따로 재배를 하지 않
 
으며 다른 종류와 섞여 자란다.
 
 
 
 
 
중국차(中國茶)의 개관(槪觀)
 
 
차를 일상에서 음용하는 습관은 세계에서 중국이 가장 오래되었고
 
종류도 많다. 차나무가 350여종에 이르고, 찻잎 1000여종을 생산되
 
며 최근에도 새로운 품종이 계속하여 늘어나고 있다. 이 중에서도
 
녹차(綠茶, 1998년을 기준해서 중국에서 생산되는 차중 녹차가
 
71%, 세계 녹차생산의 85% 차지), 홍차(紅茶), 오룡차(烏龍茶), 화
 
차(花茶) 등이 풍부하게 재배 생산되고 있다. 차는 전차(煎茶 : 조리
 
다), 충차(沖茶 : 和하다), 포차(泡茶 : 거품나다), 엄차(淹茶 : 우리
 
다), 말차(末茶 : 가루내다), 초유차(醋油茶), 내차(우유를 타다) 등
 
의 방법으로 마시고, 찻잔에 직접 찻잎을 넣고 열탕을 부어 뚜껑을
 
덮은 후 얼마 동안 두었다 마시는 것도 있다.
 
 
 1. 역사
 
 
중국차의 음용은 신농씨(神農氏) 때부터 시작되어 5,000년의 역사를
 
가졌으며, 현재도 광동어(廣東語)의 '차[cha]', 복건어(福建語)의
 
'테[te(tay)]'가 세계적으로 차(tea)란 말로 쓰이고 있다([cha]와
 
[te(tay)]의 관계는 뒤에서 설명). 근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차는 세계
 
에서 가장 질이 좋은 차의 하나였으나, 최근에는 인도, 스리랑카의
 
홍차에 그 명성을 빼앗기고 있다. 현재 다시 부흥되고 있으며, 특히
 
광동의 영덕(英德)홍차는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 중국차는 약차(藥
 
茶)로 마시기 시작해 점차 기호차(嗜好茶)가 되었다. 중국차가 일반
 
화하고 세계에 널리 퍼진 것은 명(明)나라 때의 전차(煎茶)법이고,
 
말차(末茶)나 다례(茶禮)같은 것은 송(宋)나라가 멸망하면서 사라져
 
갔다. 또 중국에서는 수십 년 묵은 차를 약차로 하여 거기에 여러가
 
지 한약을 넣어 민간약으로 많이 쓰고 있다.   (자세한 것은 뒤에 설
 
명)
 
 
 2. 종류
 
 
중국 녹차의 햇차는 4월 1일을 전후하여 따는데, 명전차(明前茶, 청
 
명(淸明, 양력 4/5일경) 전에 따는 차)라 부른다. 벽라춘(碧螺春)은
 
잘고 군산은침(君山銀針)은 커다란 새싹인데 하얀 털로 싸여 있다.
 
대표적인 녹차는 용정차(龍井茶)이며 평수주차(平水珠茶), 진미차
 
(珍眉茶)는 외국인들도 즐겨 마신다. 중국 홍차는 안휘(安徽)의 기
 
문홍차(祁門紅茶=祁紅ㆍ祁門工夫紅茶)와 운남(雲南)의 전홍공부
 
차(전紅工夫茶)가 향기로워 최상품으로 인정받으며, 특히 영국에서
 
호평받는다. 오룡차는 반발효차로서 녹차와 홍차의 특징을 함께 지
 
닌 중국 특유의 차이다. 복건의 무이산(武夷山)에서 나는 암차(岩
 
茶)는 차에 대해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으며, 미국
 
인들이 좋아한다. 북경 등 중국의 북방에서 향편(香片)이라 하여 많
 
이 마시는 화차(花茶)에는 그 대표적인 것으로 말리화차(茉莉花茶,
 
쟈스민차)가 있다. 말리화차는 차(녹차, 포종차, 홍차 등)에 말리화
 
의 꽃봉오리를 몇 번이고 바꿔가며 만든 화차로서, 고기나 마늘 냄
 
새를 없애는 작용을 한다. 전차(전茶)는 차부스러기를 눌러 벽돌 모
 
양으로 만든 차로서 신선한 음식이 없는 몽골과 티베트 사람들이 필
 
수품으로 지닌다. 러시아인들은 홍전차(紅전茶)를 즐긴다. 운남(雲
 
南)의 보이차(普이茶)나 보이긴압차(普이緊壓茶)는 약차로서 덩어
 
리 형태로 되어 있으나 열탕하면 간단히 풀어지고 본래의 차 형태로
 
된다.   (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
 
 
 3. 중국의 차 생산지
 
 
중국은 크게 네 지역으로 차 생산지를 구분하는데, 강남(江南)지역,
 
강북(江北)지역, 화남(華南)지역, 서남(西南)지역이 있다.   (자세한
 
것은 뒤에 설명)
 
 
 
 
 
강남지역 - 호남성, 호북성, 강서성, 안휘성, 절강성, 강소성 일부 등
 
이 포함된다. 녹차, 황차가 주로 생산된다.
 
강북지역 - 섬서성, 하남성, 산동성, 산서, 감숙, 강소성 일부 등이
 
포함되는데 녹차가 주로 생산된다.
 
화남지역 - 광서성, 광동성, 복건성, 대만, 해남성 등이 포함되고 녹
 
차, 홍차, 오룡차, 백차, 화차 등이 생산된다.
 
서남지역 -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등이 포함되는데 녹차, 홍차, 흑
 
차 등이 생산된다.
 
 
 4. 중국차의 분류에 따른 각 인체 건강에 대한 역할
 
 
차에 대한 사람들의 기호도 지역에 따라 다른다. 일반적으로 중국
 
북방에서는 화차를 즐겨 마시고, 남방에서는 녹차를 즐겨 마신다.
 
찻잎이 다름에 따라 함유된 영양분과 약리적 효능도 다르다. 녹차는
 
비타민C와 탄닌 함량이 홍차보다 훨씬 더 많이 함유되어 있다. 질병
 
에 대한 약리적 효능을 보면 항균, 항복사(抗福射), 동맥경화 예방
 
등에 있어서 모두 녹차의 효능이 높다. 연구에 의하면 녹차는 인체
 
내의 아질산암모늄의 형성을 효과적으로 제지시키므로 항암 역할이
 
홍차보다 높다. 그러므로 보건효능면에서 녹차를 마시는 것이 홍차
 
를 마시는 것보다 좋다. 화차는 일반적으로 녹차에 꽃을 넣어 제조
 
한 것이므로 녹차와 같은 효능을 갖고 있다.
 
차의 종류와 산지가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차의 질도 구별이 된다.
 
차를 마시는 대상으로부터 보면 남녀노소의 구별, 체질강약의 구별,
 
일의 성질과 생활습관의 구별, 개인기호의 구별이 있다. 그러므로
 
차를 마실 때에는 필요한 용도에 따라 일정한 분석을 한 후에 사용
 
하여야 한다. 일반적으로 말하면 청소년과 아동은 찻물로써 양치질
 
하거나 연한 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사춘기의 발육이 왕성한 시기
 
에는 녹차를 위주로 마시는 것이 적당하고 더운 홍차를 마실 때에는
 
농도를 낮추어야 한다. 초경(初經)을 전후한 여성과 갱년기조경에도
 
이롭다. 또한 전립선염(前立腺炎)이 있거나 전립선이 비대한 사람은
 
화차를 마시는 것이 좋다. 이 화차는 간장병을 앓는 환자에게도 좋
 
다. 해산 후의 부녀자는 홍당(紅糖, 흑설탕)을 넣은 홍차를 마시면
 
좋다. 육체노동을 할 때에는 우선 홍차를 선택하는 것이 이롭고, 정
 
신노동을 하는 사람은 녹차가 적합하다. 체중을 줄이거나 지방을 제
 
거하려면 오룡차와 보이차를 마시면 효과를 볼 수 있다. 이는 일본
 
사람들이 오룡차를 '미용과 건강의 묘약'이라고 인정하고 있는 것에
 
서 효능이 입증된다. 뿐만 아니라, 특히 젊은 여성들은 체형미에 대
 
해 예민한데 그들은 운남의 보이차를 '지방 제거차(괄유차, 刮油
 
茶)', '날씬해지게 하는 차'라고 한다. 프랑스 여성들은 또한 '외형적
 
미를 요구하려면 보이차를 마시면 좋다'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 밖
 
에 보이차는 위장을 상하게 하지 않고 오룡차는 이뇨작용을 하며 카
 
페인을 적게 함유하고 있으므로 남녀노소에게 모두 적합하다. 간추
 
려 말하면 차는 품종이 여러 가지고 효능이 각기 다르므로 사람에
 
따라 선택하여 써야 한다. 이렇게 하면 차의 보건작용을 더욱 잘 발
 
휘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차는 약품이 아니고 식품이므로 어떤 종
 
류의 차를 마신다고 해서 반드시 특정 효과가 나타난다고 할 수 없
 
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중국차(中國茶)의 역사
 
 
중국에서 언제부터 차를 마셨는가에 대해서 분명하게 말할 수 없지
 
만(신농 때부터라고 하지만), 중국 최고(最古)의 사서(史書)인 <이
 
아(爾雅)>의 '석초편(釋草篇)'에 '도'(艸+余 : 이견은 있으나 茶의
 
뜻으로 해석하는 견해가 많다)가 나오므로 적어도 3,000년 전에 차
 
가 있었다고 본다. 그러나 문헌상 차 마시기를 즐기는 실제 인물이
 
등장하는 것은 BC 59년의 일이다. 한(前漢)의 선제(宣帝) 때의 명문
 
장가인 왕포(王褒, 사천성 익주 사람)가 어떤 과부로부터 전남편이
 
거느리던 양혜(楊惠)라는 편료(便了, 차를 다루는 노비)를 1만 5천
 
냥에 사들이면서 <동약>이라는 노비매매문서를 작성하였는데, 이
 
계약서에는 편료가 할 일이 적혀 있고, 무도(武都)에 가서 차를 사오
 
는 일과 손님이 오면 차를 달여서 대접하는 일도 포함하고 있다. 이
 
로써 차 마시는 풍습이 전한 시대에 있었음을 알 수 있으므로 이를
 
실제 차 마시기의 기원으로 본다.
 
 
그 후 위진(魏晉) 시대에 접어들기 직전에 유비(劉備) 현덕(玄德)이
 
아직 돗자리를 짜고 있을 때 그의 어머니는 현덕에게 낙양(洛陽)의
 
명차를 죽기 전에 한 번 맛보고 싶다고 하였다. 이를 후세 사람들은
 
그의 어머니가 돗자리나 짜서 먹고 사는 아들에게 넓은 세상을 구경
 
시켜 뜻을 키워주려 했던 것이라고 좋게 설명을 붙이고 있다. 그러
 
나 이같은 이야기의 사실 여부를 떠나서 효자 현덕은 곧 짐을 싸들
 
고 천리길을 떠나 낙양에서 온 상인들에게 지니고 있던 돈을 모두
 
바치고 얼마큼의 차를 달라고 사정하였다. 당시의 차값은 오늘날로
 
치면 보석과 같은 정도였으므로 시골 청년의 푼돈이 차값을 치룰 만
 
큼은 되지 않았지만 상인들은 현덕의 효성에 감탄하여 한줌 쥐어 주
 
었다고 전하고 있다(돌아가는 길에 황건적에게 차는 물론이고 허리
 
춤에 차고 있던 보검까지 뺏겼지만 후에 장비의 도움으로 되찾았다
 
고 한다). 즉 당시의 차는 그만큼 대중들과는 거리가 있던 사치품이
 
었던 것이다.
 
삼국시대의 말기 오(吳)의 황제 손호(孫皓)는 신하들과 더불어 술을
 
즐겼는데 일곱 승(당시 1승은 0.2ℓ)을 한도로 정하였다 한다(주량이
 
그에 못미면 입에 대롱을 대고서라도 부어서 다 마시게 했다). 그러
 
나 아끼는 신하 중의 위요(韋曜)는 주량이 그에 미치지 못했으므로
 
나머지는 은밀히 차를 주어 대신 채웠다고 <삼국지>의 '오지(吳
 
志)'에는 전하고 있다. 그리고 삼국이 끝난 후 서진(西晋) 때 초의 사
 
람인 장재(張載)는 '등루시(登樓詩)'에 "차향기가 육정(六情 : 여섯
 
가지 음료)에 으뜸이다" 라고 읊었다. 이어 동진(東晋)이 들어섰는
 
데, <진중흥서(晋中興書)>에 의하면 사안증(謝安曾)은 손님을 초청
 
하여 다과(茶果)를 내놓았다고 한다. 이런 사실들로 보면 이때쯤 왕
 
실이나 귀족사회에서는 차를 마시는 습관이 상당히 보편화되었음을
 
알 수가 있다. 동진까지 망하고 남북조(南北朝)시대가 열린다.
 
 
남북조(南北朝) 시대의 남조란 동진을 멸망시킨 뒤 세운 송(宋), 제
 
(齊), 양(梁), 진(陳)을 거쳐 수(隋)에 이르는 170년간, 장강(長江) 유
 
역을 포함한 중국의 중부 지방을 지배한 한족들의 왕조를 말하며,
 
북조란 북위(北魏)로부터 시작하여 북제(北齊), 북주(北周)를 거쳐
 
수에 통일되는 150여년간, 황하(黃河)로부터 장안(長安), 낙양(洛陽)
 
남쪽까지의 화북지방을 다스린 선비(鮮卑)족의 왕조를 말한다. 다시
 
말해서 중국의 북쪽은 오랑캐인 선비족이 다스렸고 남쪽은 한족이
 
다스린 대립의 시기였다. 이때 북위(北魏)의 팽성왕(彭城王)은 유호
 
(劉鎬)가 남제(南齊)에서 귀순한 왕숙(王肅)에게서 차 마시기를 배
 
워 즐기자, "임금이나 재상이 진미 요리를 마다하고 하인들처럼 물
 
이나 마시다니.." 하면서 비웃었다 전해진다. 그러니까 5세기 무렵까
 
지만 해도 중국의 북쪽에서는 아직 차 마시는 것을 그다지 좋게 생
 
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북조시대를 마감하고 중국을 통일한 수(隋) 때는 문제(文帝)가 그
 
를 괴롭힌 두통을 차를 마셔 해결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수나
 
라가 차 문화의 보급에 공헌을 하게 된 것은 운하를 대대적으로 건
 
설하여 남쪽 지방의 차를 북쪽으로 손쉽게 운반할 수 있도록 만든데
 
있다고 하겠다.
 
 
당(唐) 때에는 차 마시는 습관이 장안(長安)의 시중까지 퍼지게 되
 
었다. 현종 때 봉연(封演)이라는 진사가 있었는데 그가 쓴 견문기에
 
는 이런 글이 실려 있다. "태산(泰山)의 영엄사(靈嚴寺)에는 강마대
 
사(降魔大師)라는 스님이 있는데 좌선을 할 때면 차를 즐겨 마셔 모
 
든 이들이 그를 본받았기 때문에 차 마시는 것이 하나의 풍속이 되
 
었다." 이 풍속은 산동(山東)으로부터 장안(長安)에 전해져 장안에
 
는 곧 다관(茶館)이 생겼고 돈만 있으면 모든 이들이 차를 즐겼다고
 
한다.
 
이 무렵의 차는 녹차로 만든 고형차(固形茶)가 위주였다. 찻잎을 따
 
서 찐 다음 쌀과 함께 절구에 넣고 빻아 빈대떡 모양으로 굳힌 병차
 
(餠茶, 용어는 차의 분류 참조)인 고형차를 다시 약연(藥硏)에다 넣
 
고 갈아 가루로 만들어 따뜻한 물에 타서 마셨다. 이 무렵 차를 마실
 
때는 감초나, 파, 생강, 매실, 감귤, 사향 따위를 첨가하여 죽처럼 걸
 
쭉하게 만들어 먹는 습관이 있었는데 다성(茶聖)으로 일컬어지는 육
 
우(陸羽, 쉼터 참조)는 소금을 넣어 마셨고 그 외의 것들을 넣는 것
 
은 중정(中正)을 잃는 좋지 않은 습관으로 쳤다고 한다. 육우가 <다
 
경(茶經)>을 짓고, 글씨로도 유명한 안진경(顔眞卿)이 삼계정(三癸
 
亭)을 지어 차 마시는 옳은 법도를 세상에 펴낸 8세기 중엽, 중국의
 
다도(茶道)는 하나의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다도의 의미에서 설명).
 
당 시대에 있어 다기(茶器)는 다완(茶碗, 말차를 마시는 그릇)이 주
 
로 쓰였지만 급수(急須, 茶壺와 비슷한 용도의 다기)나 다탁(茶托)
 
도 등장하였다. 육우는 월주요(越州窯)의 다완을 최고로 쳤다. 이 때
 
의 주요 차 생산지로는 절강(浙江), 사천(四川), 호남(湖南)이 꼽힌
 
다.
 
차에 대한 세금은 당나라 때부터 생겼다. 당나라는 차값의 1할을 세
 
금으로 거두어 들였으나 차츰 이 비율을 높였을 뿐만 아니라 차를
 
취급하는 상인이 지나는 길목에서 또다시 세를 징수하였기 때문에
 
밀거래가 늘었다고 한다. 우리나라 문헌에 차가 처음으로 등장하는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송(宋) 때에는 차에 대한 세금을 다세(茶稅)라 하지 않고 다과(茶課)
 
라 하였다. 송나라는 북쪽으로 요(遼)와 금(金)에 힘겹게 대항하고
 
있었으므로 국경지대의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한 군수물자의 보급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여기서 나온 아이디어가 일부 상인들에게 차
 
의 전매특권을 부여하는 것이었다. 이 방법은 단기적으로는 효과를
 
보았으나 후에 더 큰 문제를 낳게 되었다. 송은 또한 차의 생산지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그 생산량의 일부는 조세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정부가 사들여 고가로 판매케 하였다. 이때는 이미 차가 일반인들에
 
게도 널리 보급되어 생활필수품화되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송의 재
 
정수입의 1/4이 차의 전매수입에서 들어올 정도였다.
 
차의 대중화와 더불어 차의 제조법도 개량되어 당나라 때의 병차(餠
 
茶)는 사라지고 단차(團茶)가 등장하고 연고차ㆍ연말차(硏膏茶ㆍ硏
 
末茶 - 지금 일본에서 많이 마시는 말차는 이 방법이 전해져 내려온
 
것이라 하겠다)로 발전하였다. 연고차에는 용뇌(龍腦), 사향(麝香)
 
따위의 고급 향료가 첨가되어 궁중으로 들어가는 공물로 귀중하게
 
다루어졌는데 복건(福建), 건안(建安)의 연고차가 특히 유명하였다.
 
한편 송나라 때에는 세계 역사상 전무후무한 차 장사꾼으로 편성된
 
군대가 구성되었다. 북송 때 차와 소금의 전매법을 어기고 이를 몰
 
래 파는 장사꾼들이 정부의 단속에 반항하여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
 
가 있었는데, 정부로서는 이들을 평정할 힘이 없어 어쩔 수 없이 그
 
들을 용서하고 군대로 조직하였다. 이들은 그 뒤 금(金)의 군대가 쳐
 
들어 오자 용감하게 싸워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하기도 하였는데 이
 
는 차의 밀거래 사업이 금나라로 인해 방해받는 것을 그냥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이 군대를 다상군(茶商軍)이라 한다.
 
 
중국을 원(元)이 지배하면서 차 마시는 습관은 북방의 유목민족들에
 
게도 전파되었다. 그들은 차에 버터나 밀크를 타서 마시곤 하였다.
 
오늘날 서양사람들이 커피나 홍차를 마실 때 크림을 넣는 것을 보면
 
이것이 전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명(明)의 주원장이 정권을 쥐면서 그는 지금까지의 차 제조법이 너
 
무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이를 개량토록 하였고, 이에 따라 나타난
 
것이 가마에서 덖어내는 방식의 개발이었다. 그래서 이때부터는 엽
 
차(葉茶)가 보급되기 시작하였고 남쪽 복건의 단차보다도 절강(浙
 
江)이나 안휘(安徽), 강소(江蘇)의 화중 지방이 차의 명산지로 부각
 
되기 시작하였다. 지금도 인기가 높은 용정차(龍井茶), 무이차(武夷
 
茶) 등이 그것이다. 이때까지만 해도 서민들 사이에는 차에 이것 저
 
것을 섞어 마시는 습관이 남아 있었으므로 당시의 책에 보면 이것을
 
악습이라 하여 차만을 마시는(淸飮) 방식을 권고하였다. 그리고 이
 
때부터 오늘과 같이 뜨거운 물에 불려 마시는 포다법(泡茶法) 방식
 
이 대중화하게 된 것인데 그 중에서도 다관에 끓인 물을 절반 붓고
 
차를 넣은 다음 잠시 뚜껑을 닫았다가 다시 물을 부어 또 잠시 기다
 
렸다가 마시는 중투법(中投法)이 유행하였다. 또한 뚜껑이 달린 찻
 
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찻잎을 띄워서 찻물이 우러나면 뚜껑을 비스
 
듬히 하여 틈새로 차만을 따라 마시는 충다법(沖茶法)도 이때부터
 
시작한 방법이다.
 
다기로는 광동(廣東) 조주(潮州)의 조그마한 다완(茶碗), 다호(茶壺)
 
가 유명해지고 찻잎을 보관하기 위한 엽차호(葉茶壺)도 등장하였다.
 
차의 온도와 향을 유지하기 위해 다완에 뚜껑을 덮은 개배(蓋杯)며
 
개완(蓋碗)이 등장한 것은 명이 끝나갈 무렵이다.
 
 
청(淸)이 들어서고 부터는 말리화 따위의 꽃잎을 넣는 화차(花茶)가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이때가 되면 지방도시에까지 다관(茶館)이나
 
다루(茶樓)가 들어섰다.
 
 
유럽인들이 차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6세기 중엽이며, 아시아의 식
 
민지화와 기독교의 선교과정에서 서양에도 차 마시는 습관이 널리
 
퍼지기 시작하였다. 참고로, 오룡차(반발효차)나 홍차(발효차)는 송
 
대(宋代)에 이미 보급되었으니, 중국에서 영국으로 차를 실어나르는
 
배에서 우연히 발효되어 홍차가 만들어졌다는 말은 서양 상인의 상
 
술이 빚어낸 낭설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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