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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미국인 신부가 찍은 전쟁 직후의 부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9. 06:14

 

 

한국전쟁이 끝난지 4년 뒤인 1957년 12월.
미국신부 알로이시오(한국명 소재건.1930~1992)에게 부산은 상처투성이의 모습으로 다가섰다. 1949년

부산의 인구는 47만. 전쟁이 터지면서 피란민이 몰려들어 1951년에는 84만, 1957년에는 1백2만명으로 늘어났다.

돌아갈 고향도, 먹고 살 땅 한평 없는 피란민들은 산비탈에 눌러앉았다. 거리는 부랑아와 전쟁고아들로 넘쳐났다.


"한국 어린이에게 도움을"
"도와주세요. 전쟁으로 고통 받는 아이들입니다." 알로이시오 신부는 소년의 집 운영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엽서를

만들어 미국의 독지가들에게 보냈다.


▷ 거리를 헤매는 아이들 중에는 혼혈아도 눈에 띄었다. 이들은 같은 처지의 고아들 사이에서도 멸시와 따돌림을

당해야 했다.


목마른 양동이 행렬
전기도 수도도 없었다. 비를 피하고 몸을 누일 곳이 있는 것만도 다행이었다. 하루 두번 오는 급수차를 기다리는

양동이가 부산 아미동 난민촌 언덕에 길게 줄지어 있다.


고아 수용소
고향도 이름도 나이도 모른다. 머릿속은 하얗게 백지가 돼버렸다. 폭행과 감금, 굶주림에 시달린 아이들의

눈빛은 세상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 전쟁이 끝난 뒤에도 갈 곳 없는 피란민들은 부산에 그대로 눌러앉았다. 1960년대 초반에 촬영된 아미동

산자락의 난민촌 전경.


▷ 하루종일 구걸을 하고 쓰레기통을 뒤지지만 끼니를 거르는 날이 더 많았다. 열살이 채 안돼 보이는 고아들이

군용 반합에 구걸해 온 음식물을 끓이고 있다.


엄마'수녀님
'소년의 집' 전신인 '송도가정'에 입양돼 잠든 아이들. 이곳은 '엄마'수녀와 아이들이 함께 살도록 가족단위로

운영됐다. 수용소에서 굶주림과 학대에 시달리던 고아들은 여기서 난생 처음으로 사랑이라는 것을 맛보게 된다.

 

 

돌아와요 부산항에 / Paul Mauriat 


 

 

 

 

<출처;eroom.korea.com/bs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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