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기초,기술테크/우리들세상 이야기

[스크랩] 결혼 30주년 ,지금이 제일 행복하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2. 9. 09:39

 한번 가 보고 싶었던 곳.

 

순천 송광사, 보성 차밭, , 담양 대밭,   전남 대학교, 광주 5.18묘지, 해남, 고흥 반도, ...강원도 평창 야생화 밭,강릉, ....안동 하회마을....등이었다.

 

전국의 유명한 대학은 다 다녀 봤는데 정작 꼭 가보고 싶었던 [전남 대학교]는 못 가봐서 아쉬었는데 올해 예기치 않게 출장을 갔다. 전남대학교 제 1학생회관 앞 잔디 밭에 세 동의 텐트를 치고  [대학생을 위한 책 할인행사]를  금요일까지 했다.

5.18을 앞 둔 전남대는 조용히 집회도 하고 , 학생회에서 까만천에 쓴 현수막이 캠퍼스 곳곳에 걸려 있었다.

후문 에서는 수입 소고기를 반대하는 [촛불 집회]가 며칠 동안 계속 되었다.

 

꼭 오고 싶었던 [전남 대학교]는 나의 생각보다 학구적이었고 학생들은 순수하고 평화로웠으며,한결같이 모범생같은 모습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치마를 입었어도 끈이 많은 하얀 운동화를 많이 신고 있었다.

마치 [공부에 한 번 미쳐 보겠다]는 것 같았다.

중앙도서관은 5층까지 모두 개괄식이었고 층마다 책을 읽는 학생들로 빈 좌석이 거의 없었다.

 잔디밭에서, 시화전, 취업 설명회, [건강보험협회]에서 하는 큐즈대회가 있었다.

평화와 항쟁이 공존 하는 학교.

나는 다시 20대로 돌아 간다면 광주의 [전남대학교,국어 국문학과]에 다니고 싶다.

 

금요일 밤 11시가 다 되도록 철수 작업을 하고난 후, 남편은 자고 내일은 5.18묘지에 가자고 했다.

광주에 오면 꼭 가봐야만 할 것 같은 곳.

내가 겪은 것은 아니지만 가슴 한곳에 무겁게 자리 잡고 있는 광주, 전남대학교, 5.18 묘지.

나는 오래 전부터 이 곳들을 오고 싶었다.

 

5.18묘지로 가는 길에는 태극기가 가로수마다 걸려있었다.

노란 추모의 긴 리본엔 방문객들이 쓴 기도문이 쓰여서 길가에 걸린 줄에 매듭지어져서  바람에 휘날렸다.

나도 방명록에 이름을 쓰고 노란 리본에 글을 써서 매듭을 지어 묶었다.

[두 아들의 부모로서 5.18 때 가족을 잃은 분들의 마음을  깊이 생각하고 갑니다.]

 

멀리,서울,  인천,경기, 대구등지에서 학생들이 도보로 깃발을 들고 도착을 했다.

 내일  있을   5.18 기념식을 준비 하기위해서 방송국 직원들 , 경찰들, 미리 온 참배 객들로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묘지의 곱고 맑은 중고등학교때 사진들을 보며 숙연한 마음이 들고 가슴이 뭉클하였다.

" 참 기분을 표현 할 수가 없네. 잘 왔다. 많은 것을 느끼게 되네."

남편이 중얼 거렸다.

 

그렇게 가고 싶었던 전라 남도, 다음은 순천 송광사로 향했다.

송광사에는 관광객이 별로 없었다.

부처님 오신 날이 지난지 며칠 되지 않아서 인 것 같았다.

그래서 한적하고 차분하게 돌아 볼 수 있었고 남편과 마음으로 더 가까워 지는 기분이들었다.

 

명당에는 다 절이 있다더니 송광사 뒷편을 둘러싸고 있는 산들과 절의 탱화들이 자연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어서 마치 옛날 사람이 된 듯 마음이 고요해 졌다.

 

그런데 스님 두분이 풀을 먹여서 깔끔하게 다림질 한 승복을 입고 한가이 거니는 모습이 보였다.

방마다 에어컨이 설치 되어 있고, 절로 들어오는 승용차에는 스님이 운전을 하고 있는 풍경은 흔히 볼 수 있는 것이다.

 

" 여보! 어째서 나는 스님도 관광객을 위한 소품같이 느껴지지. 수행을 하는 분들이 참 편하게 살고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묘하네"

남편이 머리를 끄떡였다.

 

내가 불자가 아니라서 절 사정을 잘 모르니까 본대로 느낀 대로 말하는 것이다.

 

송광사 입구의 여관에서 일박을 하고 보성 녹차 밭으로 향했다.

드라마 [여름 향기]의 주무대로 나온 곳 ,막내가 몇년 전에 다녀오고 한 번은 가 볼 만한 곳이라고 했던 곳이다.

차 밭만 있을 줄 알았는데 ,관광 단지로 조성해서 참 많은 관광 버스와 관광객들이 모여 들었다.

 

남편이 여기 저기에서 디카로 나를 열심히 찍었지만 마음에 드는 사진이 없었다.

아니, 내가 너무 체중이 늘어서 사진이 좋게 나오지가 않았다.

"보고 느끼라고 당신 사진을 많이 찍는 거야." 하며 계속 찍었다.

" 아니, 아가씨는 나보다 키도 작고 체중도 더 나가는데 서방님이 아무 말도 않한다던데. 당신은 왜 그래?'

' 그건 포기 한거지."

' 그래. 하하하. 나는 당신이 아직 포기 하지 않았네. 집에 가면 매일 30분 이상 걸을께."

 

차 밭과 뒷산의 프르름이 마음까지 프르게 해주었다.

"여보! 당신은 평생 동안 언제가 가장 행복했는데?'

내가 남편에게 물었다.

" 지금이지."

"지금?"

"그래. 마음이 편하니까"

 

이해가 되었다.

결혼 30년 동안 13년은 단 한번의 싸움이 없었고 ,그후 13년은 웬수같이 자주 싸웠고, 그리고 지난 4년은 화해의 시간들이었다

13년 동안 싸운 것은 아니고 주로 내가 화를 내면 남편이 참다가 고함을 지르고 나가서 담배를 한 대 피고 들어 오는 것이다. 그렇게 댐비고 화를 내고  싸워도 잠은 꼭 내 곁에서 자야 하는 줄 알았다.

남편은 자식들에게도  큰소리 한번 내지 않는 온유한 성격이다.

운전을 하다가도 끼어드는 차에게 욕을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사업 실패로 13년간이나 가족에게 늘 미안한 남편, 아버지였다.

지금 다니는 회사에 취직이 되면서 마음의 안정과 가정의 안정을 찾아 갔다.

 

나 또한 지금까지 생활이 아닌, 생존을 위해서  살아 왔기에 30년동안 가족 여행이라고는 신혼 초 합천 해인사에서 일 박한 것과 온양 온천에서 일 박이 전부였다.

[나이트 클럽]이란 데를 한 번도 가보지 못한 사람은 주변에 나 밖에 없었다.

남편과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결혼 30주년 기념여행을 가고 싶었던 곳을 모두 데리고 다니며 ,나를 배려해 주는 남편이 곁에 있어서 행복했다.

치열하게 싸우고 미워했던 부부 전쟁이 생활의 안정을 찾자 어느새 끝나 있었다.

남편에 대한 나의 화풀이가 끝난 것이다.

원인 제공은 남편이 했지만 오랫 동안 화가 나 있는 아내를 위해서 많이 참아 준 남편이 고맙다.

나 또한 이런 날들이 오리라고는 생각을 못했다.

 

순천 [낙안 읍성]의 민속 마을과 담양의 [대밭 테마공원]을 들려서 광주로 돌아 왔다.

마음의 평화가 함께 있었던 추억이 될 아름다운 기념 여행이었다.

남편은 [조선대학교]에서 행사를 하기 위해서 광주에 있고 나는 부산으로 돌아 왔다.

 

집에 와 보니 출장에서 돌아 올 아내를 위해서 남편이  집을 깨끗이 청소를 해 놨다.

생각해 보면 남편은 가족을 위해서 끝없이 노력하고 나의 화병이 나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 주었다.

 

나를 닮아서 키가 큰 아들들과 함께 있으면 더 작아 보이고 ,몸에 힘도 빠져 보이지만 남편이 곁에 있어서 든든하다. 건강을 유지해서 그와 함께 편안하고 넉넉한 할머니,할아버지로 나이 들어 가고 싶다.

 

결혼을 하고 30년을 살면서 정말 죽을 만큼 힘이 들었던 시기도 있었지만 , 그 모든 것을 잘 견딘 서로에 대한 상으로 남은 결혼 생활을 행복하게 이어 갈 것이다.

 

 한 달에 한 번 정도는 부부를 위해서 하루를 투자 할 것이다.

 

지난 세월이 있었기에 두 아들과 남편이 아내와 엄마를 소중히 여기며 자랑으로까지 생각해 주는 것에 감사한다.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들에게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확실한 한 편이 되 주겠다.

 

결혼 30주년 여행은 정말 꿈 속의 여행 같이 아름다웠다.

 

 

 

 

 

 

 

 

 

 

 

 

 

 

 

 

 

 

 

 

 

 

 

 

 

 

 

 

 

 

 

 

 

 

 

 

 

 

 

출처 : 모과 향기
글쓴이 : 모과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