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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알짜부자 4인방]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 부자 되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5. 17. 06:50
제목 없음

 

알짜부자 4인방]대한민국에서 보통 사람 부자 되기
 
“돈의 노예가 되지 말고 돈을 노예로 부리는 부자가 되자”
많은 사람들이 ‘부자’가 되기를 열망한다. 서점가에 돈 버는 것과 관련된 서적이 넘쳐나는 것도 이때문이다. 돈을 가급적 빨리, 최대한 많이 벌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책들이 대부분지만, 이런 정보를 수집해보아도 부자가 되는 길은 여전히 막막하게만 느껴진다. 단순히 절약해야 한다거나 부지런해야 한다는 추상적인 내용이 아니라 구체적인 방법을 현실감 있게 제시해주기 쉽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디어와 성실함으로 10억을 번 보통 사람들을 만나보았다.


토스트 하나로 프랜차이즈 사업에 성공한

‘석봉 토스트’ 대표 김석봉

 
빗줄기가 굵게 내리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새벽 4시면 눈을 뜬다. 거울 앞에선 주문을 외우듯 다짐을 한다. “오늘 하루도 항상 웃음 잃지 않게 해주세요”라고. 곱게 다진 야채를 한가득 싣고 중구 무교동 코오롱빌딩 앞으로 출근을 한다. 일단 신나는 음악 한 소절 듣고 큰 소리로 따라 불러본다. 이로써 김석봉씨(46)의 하루 일과는 시작이다.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 전, 그는 곱게 다림질한 흰 가운을 입고 조리사 모자를 쓴다. 웰빙 시대에 맞춰 오이, 양배추, 당근, 양파 등 잘게 썬 채소를 넣고 달걀 반죽을 만든다. 달걀도 값비싼 영양란을 사용한다. 조미료와 설탕은 전혀 쓰지 않는다. 녹차, 커피 등도 손님의 취향에 맞게 마실 수 있도록 정수기로 걸러낸  물로 물을 만든다. 유통기한을 철저히 확인한 우유 등을 하나 둘 펼치며 손님 맞을 준비를 한다.
“어! 진짜 오랜만이네요. 군 생활은 잘하고 있어요? 휴가 나오자마자 또 이리로 왔구나~.(웃음)”
군인 아저씨 한 명이 아침부터 그를 찾았다. 부대에서도석봉 토스트 맛이 그리웠다는 군인 아저씨는 스낵 카에 들어서자마자 분주하다. 노릇노릇 토스트를 굽고 있는 김석봉 사장과 이야기를 나누며 그는 휴지 몇 장을 꺼내더니 매장 안을 닦기 시작한다. 무척 자연스러워 보인다.“여기서 아르바이트했어요? 아니면 친인척 관계인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아니오. 혼자서 저렇게 바쁘게 일하시는데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비도 오는데 매장이 더 깨끗하게 보여야 할 것 같기도 하구요”라고 답변한다. 군인 아저씨뿐만이 아니었다. “빗물이 고인다”며 매장을 닦아주는 손님은 이후에도 종종 만날 수 있었다.
어느덧 그의 가게 앞을 사람들이 촘촘히 둘러싸고 있다. 한번 석봉 토스트의 맛을 보면 절대 빠져나갈 수 없다는 감탄사도 서로 주고받는다. 몇 년째 단골인 이들이 대부분.
“이름을 일일이 외우진 못하지만 손님의 특징이나 좋아하는 토스트 종류는 대부분 기억하고 있어요. 서비스의 기본 아니겠어요?”
그는 처음부터 탄탄대로를 걸은 것은 아니다. 전북 정읍에서 빈농의 6남 2녀 중 여섯째로 태어나 가난 때문에 안 해본 일이 없다. 자동차 정비소 견습공, 조선소·컨테이너 공장 노동자, 용접공, 과일 행상,  막노동 등 극심한 육체적 피로가 수반되는 수많은 직업을 전전했다. 하지만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단 한 번도 학업에 대한 꿈을 포기한 적이 없었다. 1997년 3월, 검정고시를 거쳐 신학교에 입학했다.  학업과 병행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를 찾던 중 오전에만 일하고 오후에는 공부할 수 있는 토스트 장사가 제격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장 먼저 트럭을 몰고 간 곳은 지하철 3호선 녹번역이었다. 직장인들이 많이 드나드는 지하철역이 목이 좋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사흘 내내 허탕만 친 그는 또다른 지하철역으로 발길을 옮겼다. 하지만 당초 기대에는 훨씬 못 미치는 결과였다.
그는 곧바로 원인 분석에 착수했다. 상권과 유동인구가 많은 지역을 찾은 것은 좋았지만 맛과 청결함, 그리고 손님을 대하는 마음에 문제가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리고 일찍 일어나는 습관이 몸에 배지 않아 늘 피곤한 상태로 일을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인상을 찌푸린 채 손님을 맞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무뚝뚝한 손님에게는 맞받아 성의 없이 대했던 일들이 떠올랐다. 단돈 천원짜리 토스트를 팔지만 마음만큼은 몇 만원짜리 고급 요리를 파는 심정으로 대했어야 했다.
철저한 분석과 다짐을 하고 자리잡은 곳은 현재의 무교동 코오롱 빌딩 옆이다. 그는 길거리에서 먹을 것을 파는 ‘로드 비즈니스’의 생명은 청결이라는 점에 착안해 흰 가운을 입었고, 토스트 만들던 손으로 돈을 받는 방식을 그만두고 손님들이 직접 돈을 내고 거스름돈을 받아갈 수 있도록 했다. 또 보통 포장마차에서 쓰는 철제 그릴판을 스테인리스로 바꿨으며, 두루마리 휴지 대신 보푸라기가 생기지 않는 최고급 티슈를 비치했다.
인근 호텔의 외국인들이 눈에 띄었다. 그들도 아침이면 토스트를 찾는다는 소문을 접하곤 메뉴판도 한글, 영어, 일어, 중국어 등 4개 국어로 표기했다. 이 때문에 그를 찾는 외국 손님이 부쩍 늘기 시작했다. 일본 여행 가이드북에는 ‘무교동 5대 명물’로 등장할 정도. 불량배의 행패와 당국의 단속이라는 노점상의 숙명이 그라고 피해갔을 리 없다. 무교동 개업 초기 주변 불량배들이 느닷없이 찾아와 “자릿세를 내지 않으면 때려 부수겠다”고 위협하기도 했다. 공짜로 토스트를 먹는 건 기본이었다. 하지만 그는 다른 손님들과 다름없이 친절하게 이들을 대했다. 결국 불량배들은 “아저씨 토스트 맛이 대한민국 최고”라며 물러갔고, 그의 단골이 됐다. 그가 만드는 토스트 맛에 푹 빠져 체인점을 열겠다고 찾아온 이들도 있다.
전국 15개 체인점이 생긴 것도 이 때문이다. 매월 순수입 8백만원 남짓, 연 수입 1억원의 고소득을 벌어들이지만 김석봉씨는 아직 전셋집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업투자도 많이 하지만 기본적으로 번 돈을 아낌없이 이웃과 나누기 때문이다. 아침에 마련한 재료가 다 팔리지 않은 날엔 그는 남김없이 구워 사직공원과 서소문 공원의 노숙자들에게 나눠준다. 또 일이 끝난 뒤 오후에는 고아원, 양로원, 어린이집 등을 찾아 토스트 대접을 하며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 그의 꿈이 궁금했다.
“20만 평 규모의 어린이 캠프장을 만들고 싶어요. 다양한 볼거리와 이벤트가 가득한 꿈의 동산 말입니다. 물론 저처럼 힘겹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어린이들에겐 무료랍니다.”


 

뜨개질 솜씨 하나로 니트 시장 평정한

‘바늘이야기’ 대표 송영예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해보았을 뜨개질. 하지만 대부분 취미로 만족하거나 아주 실력이 좋은 사람이라도 부업 정도로 생각하는게 보통이다. 그런데 이런 고정관념을 깨고 손뜨개로 돈 되는 사업을 일군 사람이 있다. ‘송영예의 바늘이야기’ 대표 송영예씨(38). 그녀는 지금 연 매출 30억원을 기록하는 어엿한 중견 회사의 최고 경영자다.
지난 98년까지만 해도 그녀는 평범한 전업주부였다. 집안일을 하며 평범하게 살던 그녀에게 작은 변화가 찾아온 것은 첫아이를 임신할 무렵이었다. 태교를 위해 시작한 뜨개질이 그녀의 삶을 바꿔놓으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육아와 가사를 병행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PC 통신 동호회 활동을 시작했다. 그녀가 활동한 동호회는 주부들이 자녀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히는 모임이었다. 수많은 회원들 중 송 대표만이 유일하게 다양한 손뜨개질을 활용할 줄 알았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그녀는 온·오프라인 회원들을 대상으로 손뜨개 강좌를 열었다.
그녀의 솜씨에 대해 입소문이 퍼지면서 유명세를 타기 시작했다. 두 아이를 키우며 하루에 7~8시간씩 뜨개질을 하고 마감이 임박하면 밤샘 작업까지 해야 하는 버거운 일이었지만, 그녀는 자신의 솜씨를 인정받는 기쁨에 힘든 줄도 몰랐다. 뜨개질을 하는 사람이라면 값싸고 질 좋은 실을 편리하게 구입하기 위해 전자상거래를 이용할 것이라는 그녀의 판단은 기막히게 적중했다. 홈페이지를 개설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터넷 열풍이 불었고, IMF 이후에는 많은 사람들이 IP 사업과 전자상거래에 관심을 보였다. 회원수가 눈에 띄게 급증하면서 사업을 시작한 지 3개월 만에 ‘대박’을 터뜨렸다.
송 대표가 성공한 데는 네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뜨개실 색깔이 다양하다. 둘째, 실·바늘·지퍼 등 손뜨개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구입할 수 있다. 셋째, 소량 구매가 가능하다. 가격은 일반 수예점보다 싸고 도매시장보다는 조금 비쌌지만 소비자에게 오히려 이익이었다. 마지막으로 주문한 물건은 수도권 지역인 경우 하루 만에 배달한다. 뿐만 아니라 회원을 위해 자료실에는 ‘니트 옷의 패션 동향’과 ‘배색 넣는 법’ 등 기술 강의는 물론 초보자를 위해 동영상 강좌도 제공했다.
전자상거래가 활기를 띠자 그녀의 집은 배송할 실과 재료들로 발 디딜 틈이 없어졌다. 그녀는 어쩔 수 없이 가정과 일을 분리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래서 손뜨개 강의를 하고 있던 일산의 한 백화점 지하1층에 손뜨개 전문점을 냈다. 보증금 없이 수익금의 20%를 내는 조건으로 5평 규모의 매장을 빌렸다. 결과는 놀라웠다. 하루 매출액이 최하 백만원에서 최고 1백70만원을 유지할 정도로 장사가 잘 됐다.
한 달 순수익이 1천5백만원이 넘었다. ‘뜨개질을 배우고 싶다’는 사람뿐만 아니라 ‘송영예란 이름을 간판에 넣게 해달라’는 사람도 생겨났다. 내친김에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고 싶었지만 망설여지는 부분이 있었다. 손뜨개 시장은 여름이 비수기라 겨울에 비해 10% 정도밖에 매출이 오르지 않는 것에 대한 고민이었다. 그러던 중 편물기계를 떠올렸다. 편물기계는 가는 면사를 기계로 직접 짜기 때문에 여름 시장에 제격이었다. 그녀는 편물기계를 수입하는 회사와 독점 계약을 맺으면서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편물기계는 소매점 수준이던 ‘바늘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유통업과 프랜차이즈 사업을 하는 계기가 됐다. 이런 과정을 거쳐 2년여 만인 현재 백 개의 가맹점과 연 매출액 30억원이 넘는 손뜨개 전문 프랜차이즈 기업으로 성장했다. 순수익은 유통 마진의 20%. 그녀는 개인 자산만 15억원에 달한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고성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송 대표의 뛰어난 뜨개질 솜씨와 체계적인 교육 프로그램, 그리고 가맹점주들과 쌓아온 신뢰가 더해진 결과였다. 


무일푼 노점상으로 시작한 ‘묵’의 제왕

모정식품(주) 대표 이충섭

 
전국에 수많은 묵 장수들이 있지만 모정식품(주) 이충섭 대표(42)만큼 성공한 묵 장수는 드물다. 그는 노점상으로 출발해 연 매출 60억원의 중소기업을 일궈낸 신화 창조의 주인공이다. 1992년 무일푼으로 묵 장사를 시작한 이 대표는 남다른 판매 전략과 아낌없는 투자로 ‘시장 점유율 1위’를 기록하는 사업체 대표가 됐다. 이 대표는 유복한 집안의 4남으로 서울에서 태어났다.
볼트 공장을 운영하던 부친 덕분에 아무 어려움 없이 자란 그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완구회사 경리로 사회에 첫발을 디뎠다. 그러나 틀에 박힌 직장 생활이 답답해 7개월 만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몽상가였던 이 대표는 소설 속 주인공처럼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싶었다. 술집에서 웨이터 생활도 하고 구두닦이, 때밀이 등 10여 가지 직업을 전전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재래시장을 지나가다 묵 장수를 보게 됐다. 그저 거리에 묵을 내놓고 팔 뿐인데 10명 중 8명이 묵을 사가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묵이 뭔지도 몰랐지만 80%의 고객이 확보되는 장사라면 도전해볼 만하다고 생각했다. 당시 묵 장수들은 도매상에게서 하루치 물건을 받아다. 팔고 물건값은 나중에 지불하는 후불제 방식으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밑천이 없는 그로서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장사 경험도 없는데다 종전 묵 장수들과 똑같은 방식으로 장사를 하면 승산이 없을 것 같았다.
이 대표는 그때부터 손님의 발길을 붙잡을 수 있는 차별화 전략을 짰다. 첫째, 청결하고 세련된 이미지. 재래시장 특유의 불결한 이미지를 청산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말쑥한 양복 차림에 머리는 무스를 발라 깔끔한 인상을 주도록 했다. 둘째, 눈길을 끄는 제품명. 그는 묵에 함유된 도토리 중 80%가 ‘재롱이 도토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쌀과 비교하자면 찹쌀에 해당할 정도로 품질이 우수한 도토리다. 여기에 착안한 이 대표는 당장 ‘재롱이 묵’을 제품명으로 정했다. 같은 도토리묵이라도 묵에 재미난 이름을 붙여 호기심을 자극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고객 중심 서비스. 그는 종전의 묵 장수들과 달리 손님들이 마음껏 시식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다. 커다란 쟁반에 묵을 가득 담고 상추와 오이도 곁들여 먹음직하게 내놓았다. 비록 재래시장 길거리였지만 마치 기업이 마케팅 전략을 기획하듯이 그는 ‘행상 차별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다른 행상들은 고작해야 하루 5만원을 번다면,  그는 하루 50만원씩 벌 정도였다. 그러지 묵 공장을 설립해보겠다는 야심이 생겼다. 일반 묵 공장들은 재롱이 도토리 대신 옥수수녹말을 섞거나 값싼 상수리 도토리를 사용했기 때문이다. 품질이 생명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 대표는 결국 강원도 화천에 자본금 6천만원을 투자해 직접 묵 공장을 세웠다. 하지만 묵을 쑤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때로는 뜸이 안 들고 때로는 너무 질게 되는 등 번번이 쓰레기통으로 직행했다. 그는 잘못 만든 묵을 공장 주변 농가에 소 먹이로 주고 계속 묵 개발에 매달렸다. 하루는 소 주인이 화난 얼굴로 그를 찾아왔다.
소 주인은 묵을 먹인 후부터 소가 살이 빠졌다며 항의를 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는 바로 다이어트 식품이다. 묵은 포만감은 있지만 칼로리가 낮아 다이어트 식품으로 안성맞춤이란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는 다이어트 효능 쪽으로 사업 방향을 정하고 홍보에 박차를 가했다. 무작정 묵을 들고 백화점을 찾아갔다. 하나같이 콧방귀만 뀔 뿐이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6개월 동안 끈질기게 찾아갔다. 그의 끈기에 딱 3일만 팔아보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그가 내놓은 묵은 하루 만에 백화점 식품 코너에서 돌풍을 일으키며 소비자들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백화점에 입점한 다른 코너가 하루 10만원의 매상을 올리는 데 비해 이 대표의 묵은 하루 1백만원 이상의 매출을 올렸고, 최고 3백만원대에 육박하기도 했다. 이후 다른 유명 백화점과 마트에도 납품 문의가 쇄도했다.
그의 성공 전략은 묵 장수 때나 지금이나 별반 달라진 것이 없다. 묵 장수를 하면서 내걸었던 모토처럼 언제나 소비자 입장에서 생각했다. 그의 묵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더해갔다. 최근에는 묵을 양념장에 무쳐 먹거나 채썰어 국수처럼 말아먹던 방식에서 탈피해 새로운 먹거리를 제품화했다. 끓는 물에 액상 수프와 건더기 수프, 면처럼 뽑은 묵을 넣어 바로 해 먹는 ‘묵우동’을 만든 것이다. 이미 특허 출원까지 마친 상태. 해외 수출도 목전에 둔 상황이다. 그는 “묵은 결코 사양 산업이 아니다”라고 거듭 강조한다. 경쟁력을 확보할 만한 아이디어만 있다면 사양 산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굳은 신념을 갖고 있다. 이 대표는 ‘고객 만족, 고객 감동’의 원칙만 지켜나가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일푼에서 시작해 억대 부자로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멈추지 않는 그의 열정 덕분이다. 


 

문구점으로 중소기업 수준의 매출 올리는

‘베스트오피스’ 안산점 대표 신왕무
 
제화업체 영업사원에서 문구점 사장으로 변신해 5년 만에 10억원 부자의 꿈을 이룬 신왕무 대표(47). 그는 94년 여름, 12년간 몸담았던 직장을 나오면서 인생 항로를 바꾸었다. 소자본 창업을 두고 고심하던 그는 제화업체 상품권을 영업하면서 알게 된 업체들을 상대로 사무용품을 판매하기로 마음먹었다. 일반 문구점은 마진이 너무 적을 뿐만 아니라 손님을 마냥 기다려야 하지만, 업체를 상대로 하면 볼펜에서 판촉물까지 다양한 물품을 납품할 수 있어 훨씬 경쟁력이 있어 보였다.
더구나 10년 넘게 영업으로 잔뼈가 굵은 경험을 살릴 수 있어 남다른 자신감도 생겼다. 지난 94년 8월, 안산역 부근에 8평 규모의 작은 문구점을 열었다. 안산역을 택한 것은 주변에 수십 개의 공장들이 몰려 있어 일단 수요층이 두텁다는 점 때문이었다. 단돈 2천만원으로 시작한 문구점. 대형 문구점처럼 다양한 품목을 갖추지는 못했지만 판촉과 관련된 인쇄물을 취급하면서 1년 뒤에는 월 매출이 1천만원, 2년째부터 2천만원 수준으로 성장했다.
2001년 10월 신대표에게 새로운 기회가 찾아왔다. 안양 지역을 방문한 그는 작은 문구점들이 대부분 사라지고 그 자리에 대형 프랜차이즈 사무용품 할인점들이 들어선 것을 목격했다. 월 매출이 억대라는 얘기도 들렸다. 문구업도 이제 소형 점포나 독립점보다 브랜드 파워로 승부하는 시대가 된 것이다. 그는 운영하던 문구점을 정리하고 안산 반월공단 상가 1층에 사무용품 할인점 ‘베스트오피스’ 안산점을 열었다. 총 투자비는 1억5백만원으로 임대 보증금은 3천만원, 초도 물품비 5천만원, 가맹비 5백만원, 인테리어비와 간판비 2천만원 등이었다. 투자비는 문구점을 정리한 자금 6천만원에 그동안 저축한 돈으로 마련했다.
점포 위치를 안산역 부근에서 반월공단 지역으로 옮긴 이유는 폭넓은 수요층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반월은 공단 중심 지역이면서 인근 시화공단까지 거래망을 넓힐 수 있어 문구점 입지로는 최적이었다. 문구업을 처음 시작하던 때로 돌아간 신 대표는 종전 거래망을 유지하면서 반월공단에 입주한 회사들을 대상으로 신규 거래처를 뚫기 시작했다. 소규모 문구점을 운영할 때는 사무용품보다는 홍보 판촉물이 주 수입원이었지만 사무용품 할인점은 볼펜부터 팩스, 컴퓨터 관련 소모품, 복사기 등을 주로 판매하기 때문에 납품 영업의 비중이 더 컸다. 사무용품 구매 담당자는 대개 20대 여직원. 영업 대상을 잘 파악한 그는 일일이 그들을 상대하며 서비스 질을 높이는 데 주력했다. 물량에 관계없이 배달은 기본. 철저한 반품 보증과 A/S로 고객 불만에 적극적으로 대처했다. 그러자 거래처들로부터 신임이 두터워졌고, 그 결과 현재 거래처는 7백여 군데로 늘어났다.
반월공단에 입주해 있는 1천2백여 업체 중 절반 이상이 그의 고객인 셈이다. 거래처를 만드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거래처와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이다. 이를 위해 그는 월 1~2회 직접 업체를 방문했다. 그 결과 사무용품 판매뿐만 아니라 판촉물 수주도 얻어낼 수 있었다. 판촉물은 전체 매출의 20%를 차지하며 부수입원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가게를 연 지 3개월 만에 월 매출은 1억원으로 뛰어올랐고, 지금은 1억4천만원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관리비, 임대료, 유지비, 인건비를 제외한 순수익은 2천2백만원. 매출이 급격히 오른 데는 발로 뛰는 신 대표의 영업 못지않게 매장을 관리하는 아내 김현순씨(43)의 역할도 컸다. 그녀는 수천 개가 넘는 제품의 코드번호와 가격을 줄줄이 외우고 있을 만큼 매장 관리에 철저하다. 남편 신 대표는 외부 영업을, 아내 김씨는 매장 판매를 책임지는 역할 분담이 성공 창업의 또다른 비결이었다.

 

 

출처 : 토지사랑모임카페
글쓴이 : 투자맨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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