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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진의 역사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8. 9. 08:53

사진의 역사는 L.J.M.다게르(1787∼1851)에 의해 발명된 은판사진(:daguerreotype)이 프랑스과학 아카데미에서 1839년 8월 19일 정식으로 발명품으로서 인정받고 공포된 후, 맨 처음에 찍은 것이 풍경사진들에서 비롯된다. 그러나 얼마 후에 초상사진(:인물사진)이 획기적으로 유행하였다. 이는 1851년 영국의 F.S.아처(1813∼57)에 의해 개발된 습판사진술(collodion process) 때문이었다. 이것은 다게르가 발명한 사진술이나 W.탈봇의 종이인화법(talbotype)보다 노출시간이 훨씬 단축되었으며 또한 음화()에서 양화()로 인화하는 과정도 간략하게 되어 사진표현상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 발명이었다. 이미 은판사진이나 종이인화법에 의한 초상사진의 수요가 증가하였으나 습판사진술의 출현으로 더한층 유행을 자극하여 1850년대에는 그 정점에 이르렀다.

사진의 역사상 최초의 주목할 만한 초상사진가는 영국의 D.O.힐(1802∼70)로 종이인화법에 의한 훌륭한 작품을 제작하였다. 그는 미술사상 처음으로 17세기 네덜란드의 사실적인 시민회화양식()을 도입하여 그 당시 유행한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회화사조()를 벗어나 사실주의의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였다. 역시 영국의 여류사진가 J.M.캐머런(1815∼79)은 칼라일, 다윈, 테니슨 등 당대의 저명한 문화인들을 모델로 내면적인 개성파악을 생생하게 드러내어 성공을 거두었다. 또한 프랑스의 나다르(1820∼1910)도 캐머런처럼 습판사진술을 구사한 사진가인데, 그 당시 한창 유행된 명함판 초상사진의 고정된 양식에 도전하여 포즈를 자연스럽게 취하게 하고, 또한 인물의 일상적 분위기를 살려 보들레르들라크루아와 같은 저명인사들을 찍었다.

그러나 이 때는 유럽 전반에 걸쳐서 아카데믹한 회화양식을 모방한 시대이며, 특히 영국에서는 이러한 회화적 사진 경향이 짙어 O.G.레일란데르(1813∼75)나 H.P.로빈슨(1830∼1901)이 앞장을 섰다. 그들은 미술의 조형적 원칙에 합치하는 사진을 주장했으며 마음대로 수정이나 합성인화(montage)를 시도하여 우화적()이고 교훈적인 내용의 작품을 만들었다. 예를 들어 레일란데르는 성인()이 도덕적인 설교를 하는 31×16인치 크기의 《인생의 두 갈림길》(1857)이라는 작품을 제작했다. 이것은 소녀가 꺼져가는 등불처럼 죽어가는 정경을 연출해서 찍은 로빈슨의 《임종》(1858)이라는 사진과 함께 대표적인 작품이다.

이러한 극단적인 회화적 사진()에 반기를 들고 1889년 영국의 P.H.에머슨(1856∼1936)이 자연주의적 사진(naturalistic photography)을 제창하고 나섰다. 이 운동은 당시 문단에서 일기 시작한 E.졸라의 자연주의에 공명()하여, 독일의 물리학자 헬름 홀츠의 ‘생리학적 광학’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자연주의적 사진이란 인간의 육안에 의한 시각상()에 될 수 있는 대로 접근한 영상을 얻으려는 것으로, 그러기 위해서는 망막()에 비치는 시각상의 둘레가 실제로는 희미해지는 사실대로 대상을 충실하게 기록하기 위해서 렌즈의 주변을 약간 아웃 포커스(out focus)시킬 필요가 있다고 했다. 에머슨은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생활주변의 자연풍경을 많이 찍어 주목을 끌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그를 따르는 후계자들이 그의 연초점묘사()의 과학적인 본래의 의도를 저버린 채 회화적인 효과를 위한 잘못된 방향으로 빠져버렸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주장하는 그의 설득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분개하여 끝내 사진계를 떠나버렸다.

이 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연초점묘사는 순수사진(straight photo)이 대두될 때까지 사진계의 주류적 조류가 되었다. 그리하여 19세기의 사진사()는 한마디로 회화적 사진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한편 회화는 루이 아라공이 지적한 바와 같이 사진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사실적 재현성()에 밀려 외적() 사실주의에서 내적() 사실주의로 방향을 돌리기 시작했다. 만약, 당시의 사진가가 사진이 지니고 있는 사실주의적 성격을 자각했더라면 사진의 방향과 흐름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서 사진의 표현성을 렌즈의 묘사력과 메커니즘의 기능에 근거를 두고 선명한 핀트와 솔직한 사실주의로 영상의 현실감을 회복하려고 한 사람이 미국의 A.스티글리츠(1864∼1940)였다. 이러한 새로운 경향의 사진을 순수사진이라고 하는데, 종래의 회화적 사진에서 볼 수 있었던 지나친 문학성이나 우화적 내용을 떨쳐 버리고, 사진의 자율적인 새로운 기틀을 이룩하였다. 또한 그는 예술적 표현을 시도할 때에는 으례 대형카메라를 써온 일반적 관례를 깨고 소형카메라(hand camera)를 써서 생동감이 넘치면서도 시적()인 《종착역》(1907)이나 《3등선실》(1893) 등의 작품을 발표하였다. 이리하여 그는 근대 사진의 아버지라 불리게 되었다.

스티글리츠의 직접적인 영향은 근대적인 초상사진과 패션사진의 주춧돌을 놓은 미국의 E.스타이켄(1879∼1973)이 이어받았으며, 이 맥을 다시 사진계의 피카소라 일컫는 E.웨스턴(1886∼1958)이 계승하였다. 웨스턴은 언제나 8×10인치의 대형카메라를 썼으며, 또한 조리개도 F64의 최소값으로 죄어서 선명한 핀트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그의 질감묘사()는 매우 예리하며, 사물의 견고한 존재감에 깊이 파고드는 동시에 그 선명하고 강력한 사실주의는 대상물질의 형태를 때때로 극한으로까지 몰고가 추상화하고 또한 대상의 본질적 윤곽을 드러냈다. 그리하여 필연적으로 표현은 엄격한 리얼리티가 농후하게 되고, 회삽()하면서도 일종의 명상적인 세계를 이룩하였다. 이러한 웨스턴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현재 미국 사진계의 거장이 된 A.애덤스를 중심으로 F64 사진그룹이 탄생되었다.

한편 프랑스의 E.아제는 이름없이 고독하게 죽어간 사진가이나 그는 근대사진의 흐름에 있어서 이색적인 존재일 뿐만 아니라 현대사진에 미치는 영향이 매우 크다. 그의 사진은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발견되어 빛을 보게 되었으며 그의 소박한 기록성은 초현실주의자들이 감탄할 만한 시적 환상감()이 흘러 넘친다. 그는 원래 생계를 위해 파리의 사진 기록을 하기 시작했던 것인데, 그 제재()는 일상적인 풍경에서부터 베르사유 궁전까지 다양했으며 조금도 꾸밈없는 솔직한 기록성은 평범한 일상적 현실을 미묘하게도 환상적인 분위기가 감돌게 처리하는 데 성공했다.

그 당시, 즉 1920년대는 예술의 전위운동()과 사진의 새로운 움직임이 활발하게 고개를 치켜든 때로, 이러한 소용돌이 속에서 갖가지 사진영상의 실험이 행하여졌다. 헝가리에서 태어나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운동에 큰 몫을 한 L.모호이노디(1895∼1946)는 곧 바로 인화지에 물건들을 올려놓고 빛을 쐬어 포토그램(photogram)을 만들었으며, 아울러 ‘빛에 의한 조형’이라는 새로운 이념을 부르짖어 독창적이며 실험적인 사진가로 알려졌다.

또한 포토몽타주(photomontage) 수법에서 콜라주(collage)의 힌트를 얻은 독일의 J.허트필드는 이러한 특수기법을 효과적으로 구사하여 히틀러나치즘을 철저하게 풍자하였다. 이러한 창조사진(creative photo)과는 달리 클로즈업(close-up)·하이앵글(high angle)·로앵글(low angle)등 다양한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사하여 스트레이트하게 정밀묘사도 미칠 수 없을 만한 리얼리즘으로써 일상적인 제재()를 포착한 A.렝거패츠의 객관적인 기록성의 경향을 신즉물주의(:new objectivism)라고 하며, 그의 일상적인 것에 대한 관심은 후에 보도사진의 발전에 길잡이가 되었다.

다큐멘터리 사진으로 눈을 돌리면, 이 분야는 미국에서 맨 먼저 태동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사진이 들어오자 얼마 후에 남북전쟁이 일어나 뜻있는 사진가에게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으며, 시대적 기록성을 자극하였다. M.B.브래디는 영업사진가로 링컨을 비롯한 미국의 저명한 인사들을 찍어 명성을 떨쳤는데,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자비를 들여 위험을 무릅쓰고 6,000장이나 되는 전쟁사진을 찍어 오늘날 귀중한 자료로 남아 있다. 브래디의 영향을 받아 남북전쟁의 기록사진을 찍으러 나선 사진가들이 여럿 있었는데, 그 중에서 A.가드너가 가장 유명하다. 그는 처음에 브래디의 조수로 참가했으나 후에 따로 독립해서 전쟁에 종군하여 대작 《전쟁의 스케치북》을 1866년에 펴냈다.

남북전쟁이 끝난 뒤 한동안 중단되었던 광활한 변경개척사업()이 다시 시작되어 가드너를 비롯한 남북전쟁 당시의 기록사진작가들이 다시 이에 참가하게 되었다. 그들은 주로 개척사업을 위한 탐험대에 끼어서 미지의 처녀지 개척사진을 많이 찍었다.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을 대표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는 J.A.리스와 L.W.하인이었다. 리스는 가난한 덴마크 이민으로 오랫동안 빈민가의 쓰라림을 뼈저리게 체험하다가 신문기자가 된 다음 자기가 몸소 겪은 이민생활의 비참한 실태를 카메라로 찍고 신문에 실어 사회적 여론을 환기시키는 포토 캠페인(photo campaign)을 벌였다. 특히 《우리 반의 동포는 어떠한 생활을 하고 있나》(1889)는 전국적으로 여론을 들끓게 하여 그를 일약 유명인으로 만들었으며, 당시 루스벨트 대통령은 “ I have read your book, and I have come to help.”라고 그를 격려하기도 하였다. 카메라에 의한 사회문제의 캠페인은 사진 역사상 이것이 처음이었다.

하인도 또한 이민의 실태에 대한 캠페인을 벌였는데, 특히 남부 방직공장의 가혹한 아동노동()의 실태를 카메라로 파헤쳐 여론을 불러일으킨 다음 정부가 꼼짝없이 아동노동복지법을 만들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다. 또한, 이 밖에 자기의 도큐먼트(document)를 ‘사진에 의한 해설’로 보는 입장에서 제1차 세계대전 중의 미국 적십자구원사업의 기록이나 30년대 대공황 전야의 미국 노동자들의 실태를 파헤친 《노동하는 미국인들》(1932)을 발표했다. 그러나 극적인 도큐먼트는 세계 제1을 자랑하는 뉴욕의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의 건설기록으로 매우 성공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1929년 10월 월가(Wall Street)의 대공황에서 비롯한 미국 역사상 최대의 불경기세계경제에도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이때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루스벨트는 수정자본주의적인 뉴딜(New Deal)정책으로 이 위기를 극복하려고 노력했다. 이 시기는 미국의 지식인·문화인들이 사회주의적 풍조에 휩쓸린 시대인데, 농업과 농민문제를 다루는 농업안정국(FSA)에서는 자료부를 신설하여 R.E.스트라이커의 지휘 아래 이 문제를 계몽하기 위하여 포토 캠페인을 전개하게 되었다. 이 캠페인에는 W.에번스와 D.랭이 중심이 되어 2만 장이나 되는 생생한 기록물을 남겼다. 30년대의 미국에서는 이상과 같은 포토 캠페인 이외에 획기적인 포토 저널리즘(photo journalism:보도사진)의 새시대가 시작되었다.

1936년 11월 23일에 《라이프(Life)》가 창간되었는데, 무엇보다도 편집방식에 있어서 사진을 단지 보는 것이 아니라 읽도록 독자를 유도하는 방향으로 이끌어 엮음사진에 의한 포토 에세이(photo-essay)나 포토 스토리(photo story)라는 독자적인 양식을 확립하였다. 이리하여 세계적인 보도사진가들이 다투어 《라이프》로 모여들었는데, 이들 중에서도 창간호부터 관여해온 대표적인 사진가는 M.버크화이트(1906∼71)로 문명비평적인 신문 특유의 정확한 보도로 높이 평가되었다.

한편, 20년대 중엽부터 소형 카메라가 개발되어 사진의 표현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다. 즉, 기동성이 있고, 순간적인 사물의 비전(vision)을 포착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소형 카메라의 표현기능을 본격적으로 개발한 것은 독일의 E.잘로몬(1886∼1944)이었다. 그는 종종 카메라를 몸에 숨기고 법정이나 국제연맹회의장에 침입해서 몰래 촬영하여 종래의 기념사진적인 기록사진과는 비교할 수 없는 생생한 기록을 발표하여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진은 숨김이 없고 솔직하다는 뜻에서 캔디드 사진(candid photograph), 즉 스냅사진이라고 한다.

소형 카메라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라이카(Leica)로 사진표현의 새로운 예술적 생명감을 불어넣어 ‘결정적 순간’의 미학으로까지 캔디드 수법을 끌어올린 사진가는 프랑스의 H.카르티에 브레송인데, 그는 현대의 대표적인 사진작가로 발돋움하였다. 그의 다큐멘터리는 일상적인 상황 속에서 역사적인 본질에 육박하려는 입장인데, 모든 사람의 눈길을 끌기에 충분한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그는 헝가리 출신의 R.카파와 손을 잡고 ‘MAGNAM’이라는 새로운 보도사진가 집단을 조직하여 《라이프:Life》나 《룩:Look》의 사진가들 이상의 사진활동을 전개하였다. 카파는 주로 목숨을 내건 모험을 감행한 전쟁사진가로 이름을 떨치다가 끝내는 인도차이나전쟁에서 전사하였다.

또, 전후에는 광고사진 분야도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활기를 띠게 되었는데 미국의 I.펜과 R.아베던이 저마다의 개성적인 작업으로 이름을 떨쳤다. 다큐멘터리 분야에서는 미국 출신으로 프랑스에서 활약한 W.클라인스위스 출신으로 미국에서 활약한 R.프랭크가 이색적인 개성으로 두각을 나타냈다. 특히 클라인은 사진집 《뉴욕》(56)에서 이제까지의 사진표현의 상식을 뒤엎어버린 ‘카메라 워크(camera work)’와 인화의 마티에르로 사람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프랭크의 작품집 《미국인》(1958)도 냉철하고 이지적인 포토 에세이(photo-essay)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출처 : Joyful의 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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