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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 Homo Faber / Voyager)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8. 9. 21:16

사랑과 슬픔의 여로(1991, Homo Faber / Voyager)

국가 독일 / 영국 / 프랑스
감독 폴커 슐렌도르프
배우 샘 셰퍼드 / 바바라 수코바





국내에 개봉된 제목이 사랑과 슬픔의 여로...
두 부녀의 여정이 사랑과 슬픔으로 점철되었으니 영화 내용에 대해 정확한 설명은 될지언정,
너무 산문적이라서 재미 없고 촌스럽다는 느낌을 준다. 7,80년대 우리나라 '방화'에서 풍기던
그런 퀴퀴한 느낌이랄까...이상하게도 이 영화의 장면장면을 떠올리노라면 선명하고
뚜렷한 인상이 아니라 왠지 모르게 뿌옇게 흐려진 듯한 이미지들만이 떠오르곤 한다.
어쨌든 이 영화는 9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느낌이 전혀 들지 않고
4,50년쯤 된 빛바랜 흑백영화를 보는 듯한 아련한 느낌이 들곤 한다.

주인공 월터는 성공한 기술자이다.
그는 기계문명을 신뢰하고 그밖의 것은 모두 하찮게 여기며, 매사에 자신감에 충만한
사람이다.하지만 그는 애정 문제에 있어서는 그다지 유능해 보이지 않는다.
결혼하지 않았고, 애인은 있으나 진심없는 관계일 뿐이다.
그런 그가 미국에서 파리로 가는 여객선에서 우연히 엘리자베스를 만난다.



"월터 훼이버야"
"엘리자베스에요" "엘리자베스? 참 안어울리는 이름이군,
내가 적당한 이름을 생각해봐야겠어."

통성명하는 마당에, 불쑥 이름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말을 하는 월터,
참 생뚱맞다는 느낌이 들지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상당히 의미심장하다.




"지금까지 그렇게 어린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을 잊고 살았었다"

포니테일을 팔랑거리며 눈앞에 아른거리는 그녀, 온갖 사랑스러운 요소들을 한 몸에 갖춘
그녀에게 반하지 않고 배길 남자가 어디 있으랴 싶지만, 운도 없지, 그녀는 존재자체마저
잊고 있던 자신의 친딸이었다. 월터는 그녀에게 '엘리자베스'라는 이름 대신에 '자베트'라는
이름을 붙여준다. 목적지인 파리에 도착하기 전날 밤 파티장에서 빠져나와 갑판에서
이야기 나누는 두 사람.




"나와 결혼해 주겠어?""?..."



"진심인가요?" "그래"

파리에 도착하여 두 사람은 서로 헤어지지만-월터 씨는 회의장으로,
자베트는 여행일정을 따라- 월터 씨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자베트를 찾아오면서
두 사람은 재회한다.



심드렁한 표정으로 박물관을 둘러보는 월터와



숨어서 그를 지켜보는 자베트
월터는 자베트가 히치하이킹을 하려는 것에 대해 무척 걱정한다.
마치 딸을 걱정하는 아버지같다.



"히치하이킹은 하지 마라, 위험해."



"내가 차를 빌려서 너를 데려다주는 건 어떨까?"
이렇게 해서 두 사람은 함께 "사랑과 슬픔의 여행"을 하게 된다.



"라틴어로 월터가 무슨 뜻인지 아세요?...
자신의 운명에 매인 사람이라는 뜻이에요."



예술을 향한 열정으로 가득찬 엘리자베스와의 미술관 순회여행
그러나 세상의 많은 일들이 그러하듯,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않았다.
엄마에게 엽서를 쓰던 자베트가 엽서에 엄마의 이름을 적다가
문득 구구절절 가정사를 늘어 놓기 시작한 것이다!!



"엄마의 이름은 한나 피퍼이고 이혼했는데 저는 그 아버지가 싫었어요....
옛날 아버지는 헨케씨였어요.......주라킴 헨케."
순간 돌처럼 굳어지는 월터
"자베트, 네가 태어난 게 정확히 언제지?", "너희 엄마와 헨케가 결혼한 게 언제지?"
그 날 밤, 자베트에게 갑자기 차갑게 대하는 월터,




"더이상 절 사랑하지 않는군요." "아니야 사랑해"




"우리 엄마와 친구여서 그런건가요? 괜찮아요,
때로는 당신이 저만큼 젊어 보이기도 해요."
"엄마 얘기 좀 그만 해!"
"너를 집에 데려다줘야겠다" "됐어요, 혼자 가겠어요."
"아니야, 네 엄마를 만나야 해. 할 말이 있어."
그리스, 집으로 돌아가던 중, 바닷가에 들렀다가,
자베트는 그만 뱀에 물려 의식을 잃고 만다.
재회한 한나와 월터.



그 애가 내 딸인가?" "아니에요! 쥬라킴의 아이에요"
"그 애와 관계를 가졌나요?... 말해봐요" "...그래"
방을 나와 혼자 통곡을 하는 한나.
"이태리에서 무슨 짓을 했죠?" "....내 딸을 보고 싶어....
저 애도 사실을 알아야 해." "안돼요, 당신을 사랑한대요."




한나는 두 사람이 한 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고,
그는 딸이자 연인인 그녀의 이름을 나직히 부른다.
"자베트" 그리고 상태가 호전되어가던 엘리자베스는 의사조차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아마도 상실감과 절망감 때문에, 죽고 만다.

이 영화의 비극성과는 별개로, 엘리자베스는 정말 사랑스러운 캐릭터다.
소녀와 여인사이의 어중간한 나이로 인한 싱그러움도 하얀 얼굴과 가녀린 몸집도
깃털처럼 살랑거리는 가벼운 곱슬머리도 솔직하고 독립적인 성격도 그렇지만
무엇보다 내가 그녀에게 반한 건 그녀의 햇살같은 따사로움 때문이었다.
이글거리는 태양같은 강렬함이 아니다. 대신 그녀는 온화하지만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그런 매력을 지녔다.

그녀는 흔히 스무 살 여자애는 이러저러할 거라고 생각되는 그런 특징을 갖고 있지
않다.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와 사귀지만 어리광을 부린다거나 애교로 주의를 끌려
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모르는 순하고 착해빠진 어리숙한 아이도 아니고.
얄팍한 지식을 떠벌이며 잘난척하는 여자도 아니다.
대신 그녀는 독립심이 강하고, 예술과 학문에 열성적이며, 무엇보다 상대를
진심으로 이해하고 위로하려고 애쓰는 인물이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애초에 배 안에서 엘리자베스가 월터에게 다가간 것도,
그와 사랑에 빠진 것도, 무슨 운명적인 사랑을 느꼈다거나,
그에게 첫눈에 반해서가 아니라 그가 많이 외롭고 지쳐 보여서
그에게 연민을 느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밤눈이 어두워서 운전하기 힘들어 하는 월터 대신에 운전대를 잡고
조용조용 이야기하던 장면.
(월터는 그런 자베트의 어깨 위에 조용히 머리를 기대고 있다.)

비포 시리즈의 셀린느가 줄리 델피의 많은 부분을 담고 있긴 하지만 결코
그녀 자신은 아니었듯이, 엘리자베스 역시 그녀의 밝고 긍정적인 면을 위주로
담은 캐릭터라는 것을 잘 안다. 하지만 자칫 예쁘고 천사같고 귀엽기만 한 인형이
될 수도 있었을 엘리자베스라는 인물을 이토록 생기 있고 따뜻한 매력이 넘치는
인물로 그려낸 것은 줄리 델피 자신의 역량이자 그녀 내면의 성숙함의 반영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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