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적) 분재의 본질-분재의 역설
“소나무라면 문인목(文人木), 문인목이라면 소나무. 이것은 아주 극단적인 표현이지만, 문인목이 가지고 있는 “우아하고 아름다움(優美), 경묘(輕妙)함, 파격(破格―일어 원문은 주탈(酒脫)‘ 등이 소나무의 특징과 일치하고 있는 것은 틀림이 없고, 문인목의 매력은 그대로 소나무의 매력이라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소나무에도 수는 적지만 상당히 굵은 모양목이 있고, 문인목풍의 나무가 많긴 하지만 한편으로 다양한 수형(樹形)도 있다.
소나무는 에도(江戶)부터 메이지(明治)에 걸친 분재 여명기(黎明期)에 가장 많은 사랑을 받았던 수종이다.
소화(昭和)에 들어 그 후 오랫동안 소나무 불운의 시대가 있었지만, 그 때에도 애호가(愛好家)를 중심으로 문인목만은 변함없이 높게 평가 되었다. 유행하는 수종(樹種)과 수형(樹形)은 있지만 분재의 본질(本質)은 쉽게 변하지 않고, 분재의 본질이 많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문인목이고, 소나무는 문인목에 잘 어울리는 특징이 있기 때문이었다.“
―소나무 기르는 방법(일본 근대출판 5쪽)―
여기서 (일본인) 필자가 말하는 분재의 본질은 무엇이고, 문인목은 왜 분재의 본질의 집약이라 할 수 있는가.
(‘분재의 본질’을 언급한다는 것은 그만큼 분재에 익어 있으며 분재에 의식적 자각적으로-분재란 무엇이며, 무엇을 하고자 하고, 어떻게 하고자 하는 것이며,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에 대해 자각적으로- 임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분재를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가 한 번은 진지하게 답해 보아야 할 매우 중요한 본질적 질문으로, 이에 대한 대답은 자신의 분재관과 분재 미의식을 피력하는 것인 동시에 분재에 있어 자신이 행하는 선택의 의식적 무의식적 바탕이 될 것이다.
(일본인) 필자의 글을 바탕으로 역으로 추리해 보면 1차적으로 일본인 필자가 느끼고 생각하는 소나무의 아름다움, 문인목의 아름다움, 분재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짐작할 수 있고 또 이로부터 정상급 일본 분재인의 분재의식과 미의식, 일본 분재의 특징을 추리해 볼 수 있다. ‘일본 분재의 특징’이라고 말하는 것은 일본인 필자의 진술 속에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동의할 수 없는 것은 (일본인) 필자의 오류 때문이나 개인적 특질 때문이 아니라 문화적 차이 때문이다.
1. 일본 문인목의 특질과 한국의 문인목이 지녀야 할 당위의 차이
―한일의 소나무 분재의 미적 특질의 차이
(일본인) 필자에게 있어 문인목의 미적 특질은 ‘우아하고 아름다움, 가벼운 듯하나 묘미가 있음, 틀을 벗어난 아름다움’이며 이는 그대로 소나무의 아름다움의 특징이자 매력이다.(5쪽에서 인용)
‘문인목에는 선(禪)이나 다도(茶道)와 공통점이 많아서, 불필요함을 꺼리고. 군더더기(贅)를 피한다.’, ‘그러나 이 나무(귀거래)도 전에는 가지와 잎이 더욱 적었고 사뿐한 모습이었다. 이전의 모습을 보면 가늘고 빨간 수피에, 가지도 가늘고, 우아하고 온화한 모습이었다.’(15쪽에서 인용)
(일본인) 필자는 (또 일본 분재에서는) 소나무를 곰솔과 대비하여 여성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소나무가 가진 여성적 미적 특질을 문인목의 미적 특질과 거의 등식화하고 있으나 이는 일본 무신 정권하의 문인이 갖는 위상의 특수성에 기인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경우 전통적 무신 정권하에서 문인은 체제 자체에 의해 권력의 담당층에서 소외된 계층(이는 한국에서 고려시대의 문인이 처했던 상황과 유사할 것이다.-고려시대의 죽림칠현은 이와 같은 정치 체제에서 나타난 것이다)이었으나, 한국이나 중국에서의 문인은 벼슬하지 않을 때는 사(士)요, 벼슬에 임해서는 대부(大夫)로 세상을 다스리고 현실에 적극적으로 임하여 정치적으로 자신의 뜻을 펴는-경세제민(經世濟民)하는- 계층이었다.
한국과 중국에서의 문인 곧 선비란 학문하는 사람으로, 학문의 목표는 백성들을 살리고 그 삶을 윤택하게 하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맹자는 “나라에 도(道)가 있을 때에는 나아가 겸선천하(兼善天下-천하를 선하게)하고, 나라에 도가 없을 때에는 물러나 독선기신(獨善其身-자기의 몸과 마음을 닦는다)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이러하므로 중국과 한국에서는 문인과 그 문인이 아끼고 사랑하며 자신의 상징물로 여겼던 소나무를 여성적 특질에서 바라보는 관점은 존재하지 않았고, 또 그러한 전통의 맥락 때문에 지금도 발붙일 수가 없는 것이다.
일본 문인목의 우미(優美), 경묘(輕妙), 주탈(酒脫)은 문인(목)의 한 일면적 특질일 수는 있으나, 문인(목)의 본질일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한국에 있어 문인의 본질은, 문인목의 본질은 무엇인가.
조선 시대의 연암 박지원은 사(士)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士)란 곧 하늘이 내린 작위(爵位)이니 사(士)와 심(心)이 합하면 지(志)가 되는 것이다. 그 ‘지(志)’는 모름지기 어떠해야 할 것인가. 권세와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현달해도 사의 입장을 떠나지 아니하고 곤궁해도 ‘사’의 지조를 잃지 말아야 할 것이다.”
(여기서 ‘하늘이 내린 작위’란 말은 오직 자신이 아닌 백성을 위해 행동하고 실천한다는 행위의 이타성을 말하기 위한 것이다.)
문인(선비)이란 권세와 이익을 염두에 두지 않고 현달과 곤궁 속에서도 자신을 굳게 지킬 수 있는 인물이며, 그 인물(선비)이 가진 뜻이 <지(志)>로 그 지(志)는 널리 백성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한국의 문인목은 이런 인물이 가진 지취(志趣). 지향(志向)과 태도를 나무로 표현한 것이어야 한다. 그러므로 한국 문인목의 바탕이 되는 특질은 세상을 버리는 것이 아니라, 세속적 가치에 대한 초연함과 오연함에서 오는 기품이며, 사(士)로서의 내면적 정신적 지향(志向)을 소중히 여기고 숭상하는 태도이다.(이런 점에서 한국 문인목 수형에 있어 직간형과 직사간형은 활용도가 높은 수형이 되리라 예측된다.)
이것이 문인목의 바탕이며 포괄적 특질로 일본의 문인목이 갖는 특질 등 개개의 개별적 특질은 이를 바탕으로 구현되어야 할 것이다. 또 보다 엄밀히 살피면 <우미(優美)와 경묘(輕妙)>는 일본적인 미적 특질이라 할 수 있다, 과거 한국의 선비들이 중시했던 것은 품격(品格)-이는 자기 수련을 통해 체득된 인격의 반영이며, 대상이나 취미에 있어서는 안목(眼目)으로 나타나는 것이다-과 이에 따르는 아취(雅趣)였고 이를 간소(簡素)함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것이다.
문인목에 분재의 본질이 가장 많이 집약되어 있는 것이 사실일진대, 이상의 논의가 타당하다면 이는 한국 분재와 일본 분재는 구현하고자 하는 정취와 방법에 있어 뚜렷한 차이가 있거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차이는 문인목에서 나타나는 양자의 차이와 맥락이 통하는 것일 것이다.
2. (고전적)분재의 본질―분재의 역설
분재란 자연의 수목을 분(盆)에서 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많은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제약을 넘어서서 그 목적을 성취하는 것이 분재의 존재 이유이며, 분재를 분재답게 하는 것인 동시에 분재의 본질을 구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분재의 본질은 분재가 갖는 제약과 그 제약을 극복하는 방식 속에 드러날 수밖에 없다.
분재가 갖는 제약은 무엇인가.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분재가 지니는 제약인 동시에 이것이 성취되면 그것이 분재의 존재 이유가 되고 분재가 분재답게 되는 것이다. <적은 것으로 많은 것을 표현해야 한다. 작지만 크다.> 이는 역설이다. 분재는 이 역설 위에 존재한다. 분재에서 이 역설을 깨닫고 느끼는 것이 아마도 분재에의 입문이며 시작일 것이다.
적은 것, 작은 것은 무엇인가. 제한된 분토, 작은 크기, 적은 가지 수, 이는 자연수와 달리 분재수가 가질 수밖에 없는 제약이다. 분재는 역으로 이러한 제약을 존재 기반으로 삼아 최소의 수단으로 자연수를 표현함으로써 분재를 분재답게 하고 자신의 존재이유를 증명한다.
이제 일본 분재인이 문인목의 특질이자 분재의 본질이라 말하고 있는 것을 우리의 관점에서 살펴보면 간소하게나마 분재의 본질을 마무리할 수 있다.
일본인이 지적하고 있는 일본 문인목의 미적 특질이자 분재의 본질은 ‘우아하고 아름다움(優美), 가벼운 듯하나 묘미가 있음(輕妙), 틀을 벗어난 아름다움(酒脫)’이었다. 이를 우리의 선비문화를 반영하여 대응시켜 보면, 한국 문인목의 미적 특질이자 분재의 본질은 ‘품격 있는 아름다움을 가질 것, 적은 것으로 많은 느낌을 표현할 것, 궁극적으로는 격식(이나 자연)을 넘어서는 것’이라 할 수 있다.(우미와 품격, 경묘와 간소의 차이에 대해서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다.)
이상을 아우르면 분재의 본질이란
제한된 분에서 적은 크기와 최소의 수단으로 자연의 나무와 그 정취를 살리되, 자연의 단순한 모사가 아니라 인간의 지취를 살리고 품격을 가지게 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분재의 정의와 통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 결국 이 글은 사실상 분재의 정의를 통해 무엇을 익히고 깨달아야 하는가에 대한 재발견의 기록이다.)
왜 문인목에 분재의 본질이 가장 집약되어 나타난다고 말하는 것인가. 이제 이에 대해 위에서 정리한 분재의 본질에 비추어 대답할 수 있다.
문인목이야 말로 최소의 크기와 수단(최소의 근장, 최소의 줄기 굵기, 최소의 가지 수)으로 나무로서의 온전한 형상을 이루는 동시에 인격성을 바탕으로 하는 깊은 정취와 품격을 표현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분재가 가진 제약을 역으로 극대화하여 오히려 그것으로 분재의 본질을 최대한 구현하는 수형이 문인목이기 때문이다.
※<(고전적) 분재의 본질>이라 하여 ‘(고전적)’이란 말을 쓴 것은 이미 일본 분재에서 또 소품에서 이제까지의 분재의 정의로는 포괄할 수 없는 분재가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 포괄할 수 있는 분재의 정의가 필요한지, 기존의 정의에 충실한 분재를 정통분재로 보고 이에 벗어난 것을 비정통 분재로 보아야 할지, 새로 나타난 것을 분재사의 전개에 따라 나타난 발전적 분재 유형으로 보아 대등한 지위를 부여해야 할지가 조만간 논의의 대상이 될 것이다.
3. <분재의 본질―분재의 역설>의 사례와 분재의 묘미 그 하나.
그것을 정통 분재라 하든 고전적 분재라 하든, (현재까지의) 분재의 정의에 바탕을 둔 분재는 ‘적고 작은 것으로 크고 많은 것을 느끼게 만드는 것’을 의도한 것이다. 이는 쉽게 확인할 수 있으므로, 두 개의 분재를 사례로 들어 확인하고 또 목적을 구현하는 방식의 차이를 통해 분재의 묘미 하나를 즐기는 동시에 초보의 답답함―망양지탄(亡羊之歎)―에 직면해 보기로 한다.
위 좀마삭줄은, 손바닥 위가 아니라 탁자 위에 놓고 찍었다면 그 크기를 짐작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노수거목의 느낌은 아니라도 동구를 지키는 나무 정도의 느낌은 주고 있다. 수고는 24cm에 불과하고 가지의 수는 일곱에 불과하다.
무엇이 큰 나무의 느낌을 가능하게 했을까? 줄여놓고 잘라 놓은 나무가 다 그런 느낌을 준다면 분재란 쉬운 것일 뿐 아니라 그 존재 이유를 상실했을 것이다. 가장 큰 요인은 좌측 1지 때문일 것이다. 좌측 1지가 없었다면 이 나무는 대목감을 상실했을 것이다. 그런데 좌측 1지는 그 위치가 자연수에서는 찾아 보기 어려운 것이다. 여기에서 분재의 독자성을 본다. ‘축약된 줄기에서 어떻게 가지를 두어야 대목감(大木感)을 연출할 수 있는가’하는 고민에 대한 대답의 하나이다. (좌측 1지는 ‘내민 가지’로 좌우 대칭의 평범성을 벗어나면서 수형의 변화를 꾀하는 구실도 한다.) 둘째는 잎의 크기가 작다는 점이다. 작은 잎은 매우 가까운 거리에서도 먼 거리의 큰 나무를 바라보는 듯한 원근감의 효과를 부여한다. 만약에 잎이 컸다면 정체를 알 수 없는 나무가 되었을 것이다. 분재수에 있어 잎이 작다는 것은 이와 같은 연유로 해서 대단히 중요한 요건이다. 셋째는 수피의 색감과 질감이다. 마삭줄의 수피는 짙은 바탕에 작은 점무늬가 있어 고목의 수피 같은 느낌을 준다. 좀마삭줄은 단풍이 좋기도 한 수종이지만, 둘째와 셋째와 같은 특질로 해서 고목감을 연출하는 데 가장 좋은 수종의 하나이고, 마삭줄이 지닌 매력의 핵심은 여기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위 나무는 섬잣나무이다. 일본 근대분재에 ‘수형포인트’의 설명을 위해 그 설명과 더불어 제시된 작품이다. 수고 70cm로 그 자체가 중품을 넘는 크기이지만 이 나무도 자연수의 대목감을 지니고 있다. 무엇에 기인하는가. 맨 아래 좌측에 줄기에 달라붙은 짧은 가지(이런 형태, 이런 효과를 의도한 가지를 ‘줄기에 달라붙은 가지’라고 한다) 때문이다. 이 가지를 가리고 보면 이 나무에서 대목감을 느낄 수 없다. 바로 이 작게 달라붙은 가지로 하여 이 나무는 커 보이게 될 뿐 아니라 멀리 있는 나무를 바라보는 듯한 원근감을 연출하여 큰 풍경을 느끼게 함으로써 또 보다 큰 나무로 보이게 된다.(이 줄기에 달라 붙은 가지는 큰 수관부에 대해 나무가 전체적으로 균형감을 갖게 하는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드림분우회 이규남님의 번역 ‘수형의 포인트 시리즈’ 참조
재미있는 것은 마삭줄에서는 대목감(大木感)을 길게 내민 가지가 구현하고 있는 반면에
섬잣나무에서는 줄기에 짧게 달라붙은 가지가 구현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좀마삭줄에서는 작은 잎이 원근감을 연출하여 대목감을 확보하고 있지만 섬잣나무에서는 ‘줄기에 달라붙은 가지가 그 구실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서로 성격이 다른 것이 또는 대립적인 성격의 것이 동일한 기능을 수행한다. 어떤 때 어떤 것을, 어떤 방법을 취해야 하는가. 분재가 재미있어지면서 어려워지는 대목이다. 초보에게는. 분재의 금과옥조를 알고 익히기도 쉽지 않은 데 금과옥조라는 것이 금과옥조가 아니라는 데 이르면 망양지탄의 처지가 아니겠는가. 분재는 망양지탄이라서 어렵다. 그래서 묘미가 있다. 2006. 5.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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