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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라면땅, 소라빵, 똥과자...고갈비에 대한 추억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0. 06:54
사람의 살아가는 일중에서 귀중한 것이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그중에서 제일로 치는 일은 의당 '먹을거리'에 관련된 일일 게다. 이 먹을거리라는 놈이 조건과 환경에 따라 천차만별의 대접을 받는데, 지천으로 깔려 있을 때는 그저 그런 놈으로 취급받기 일쑤이며, 부족할 때는 아주 귀한 놈으로 대접받는다.
지금에야 우리 민족도 굶주림의 고통에서 벗어낫지만 불과 이삼십년 전만 해도 도시에서 아사자가 생길 정도로 먹을 게 부족했었다. 필자의 어린 시절만 해도 과자라고 해봐야 '라면땅'이나 빵부스러기 같은 하품 밀가루 과자가 대부분이었다. 당시 꽤 고급 과자에 속했던 것으로 '소라 빵'이라는 게 있었는데, 생긴 모양이 소라 모양이라서 그런 별칭이 붙은 빵이었다.
또 당시 하굣길에는 코 묻은 돈을 바라보며 몇몇의 노점들이 군것질거리를 팔았는데, 대표적인 것이 설탕을 녹여서 납작하게 만든 일명 ‘똥과자’였다. 색깔도 누르퉁퉁한데다가 모양도 비슷하게 생겨 아이들 사이에서 자연스레 그렇게 불렸던 것이다.
   

그걸 부산사투리로 ‘쪽자’라고 하기도 했는데, 참 아득한 옛날 일이었다. 그런데 요즘 초등학교 앞에 가면 시간이 마치 거꾸로 돌아간 느낌이 들 정도이다. 그 예전의 먹거리들이 슬그머니 등장하고 있으니 말이다.
필자는 얼마 전 모 대학 근처를 지나다가 대학시절에 먹었던 추억의 먹거리를 발견하곤 감회에 젖은 일이 있었다. 대학 정문 근처의 낡은 노점에서 아련한 옛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음식을 팔고 있었다. 하도 오래전이라 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던 그 음식을 우연한 기회에 다시 보았을 때의 감회란!
춥고 배고프던 대학 시절, 후문의 노점에서 자주 사먹곤 했던 음식이었다.
이 음식은 반죽한 밀가루를 불판에 올려놓고, 잡채를 조금 얹어 반쯤 익을 때쯤 만두처럼 반으로 접어 구워낸 것인데, 당시에 ‘잡채왕만두’라고 불렀던 것 같다. 당시 돈으로 1개에 100원이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500원이라고 한다.
넉넉한 품새를 가진 아줌마에게 하나 구워달라고 해서 설레는 마음으로 맛을 보았다. 젓가락으로 조금 집어 입안에 넣으니 밀가루와 잡채가 버무려진 들큼한 맛이 훅 끼쳐왔다. 야속하게도 예전의 그 맛인지 아닌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러나 500원 어치를 사면 두세 명이서 넉넉히 배를 채웠던 20년 전의 기억만은 생생히 떠올랐다.
이 추억의 먹거리가 아직도 버젓이 대학생들의 미각을 희롱하고 있으니 세월의 흐름이 일순 정지된 느낌이 들 수밖에.
그런데 필자의 추억 여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볼 일을 마치고 집으로 가던 길에 친근한 선배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선배는 대뜸 ‘돼지껍데기’먹으러 가자며 자갈치 시장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이번엔 ‘돼지껍데기’라. 오늘은 '추억을 먹는 날'이라는 생각에 미소가 절로 얼굴에 번져왔다.
잡채왕만두가 배고픔을 해결해주었다면 돼지껍데기는 저렴한 가격으로 술자리를 해결해 준 고마운 친구였다. 원래 부산에서 돼지껍데기로 유명한 곳은 구포동과 덕포동, 감전동 등지의 공단지역이었다. 힘든 하루를 보낸 노동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흥겹게 먹던 소주와 돼지껍데기는 저렴한 가격에 풍성한 양을 자랑하였다.
어찌 보면 돼지껍데기는 가난한 노동자들에게 단백질을 섭취하게 해 준, 참 고마운 음식이었다. 오천 원짜리 한 접시의 추억을 맛보며 넉넉함을 즐긴 선배는 이제 배가 고프니 ‘보리밥’을 먹으러 가자고 한다.
   
오늘의 화두는 ‘7080이야’를 외치는 선배의 명령을 어찌 감히 거절할까? 자갈치 시장의 구석진 곳에 초라하게 자리 잡은 보리밥집으로 자연스레 발걸음을 옮겼다. 지금에야 보리밥이 웰빙이다 뭐다 해서 다시 대접받기도 하지만, 보리밥은 우리 민족에겐 가난과 배고픔의 대명사일 정도로 한이 서린 음식이다. 오죽하면 ‘보릿고개’라고 했던가? 보리를 수확할 수 있는 시기까지 이 땅의 백성들은 소나무 껍질에 나물을 섞은 멀건 죽으로 질긴 목숨을 연명해갔다.
필자가 사회생활을 처음 할 때 간단한 점심이기도 했고, 때론 별미였던 보리밥. 오랜만에 씹어본 굵은 보리밥알의 살갗이 어느새 이 사이로 끼어오고 있었다.

돼지껍데기로 일차 술 고픔을 해결했고, 보리밥으로 간단하게 위장마저 채웠으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던 우리는 잠시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겨우 9시. 시간 참 많이 남았다며 선배는 마지막으로 ‘고갈비’나 먹으러 가자고 한다.
이젠 고갈비라! 하도 오랜만에 들어본 그 소박한 이름. 대학 신입생 시절 ‘고갈비’란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이게 도대체 무슨 갈비를 뜻하는지 한참을 생각해야 했다. 특히 ‘고’의 의미가 무엇인지, 내 나름대로 이리저리 생각해보았지만 왜 하필이면 갈비 중에서 고갈비인지 도통 이해가 가지 않았던 것이다. 더군다나 가난했던 같은 과 선배가 무슨 돈으로 감히 ‘갈비’를 사주겠다는 것인지, 그것도 ‘고갈비’를 사주겠다는 것인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갈비를 사줄 테니 기대하라는 선배의 호기는 지금은 사라진 남포동의 미화당 뒷골목으로 들어선 순간 허풍임이 그대로 들어났다. 선배와 함께 어두컴컴한 뒷골목을 들어서자 다소 역한 기름 냄새가 코끝을 자극하였고, 낡고 좁은 대여섯 개의 건물들에선 고등어들이 뒤집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고단백질을 자랑하는 고등어갈비가 바로 ‘고갈비’임을 안 순간, 허공에는 술에 취한 채 고갈비 '하나 더'를 외치는 서민들의 목소리가 맴돌고 있었다. 얼굴을 마주보며 소탈하게 웃던 같은 과 선배는 지금은 미국으로 이민을 가고 말았지만, 나와 같이 먹던 ‘고갈비’의 추억만은 소중히 간직하고 있으리라.
그 예전의 북적이던 모습은 사라지고 없지만 오늘도 추억을 먹기 위해 자정을 훌쩍 넘긴 이 시간에도 사람들은 몰려오고 있었다. 같이 간 선배의 화두는 ‘7080과 조용필’이었고, 나의 화두는 ‘추억의 뒤안길’이었다.<김대갑 객원기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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