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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사기장-2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7:55

사기장

 

 

 

종    목

중요무형문화재  제105호

 

명     칭

사기장(沙器匠)

 

분     류

무형유산 / 공예기술/ 도자공예/ 자기공예

 

수량/면적

 

 

지 정 일

1996.07.01

 

소 재 지

경북 경북전역 

 

시     대

 

 

소 유 자

 

 

관 리 자

 

 

 

일반설명 | 전문설명

사기장이란 백토 등을 혼합하여 그릇형태를 만든 다음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사기그릇을 만드는 기술 또는 사람을 말한다.

한국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천하제일의 비색청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국가기관인 사옹원(司甕院)에서 제작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경기도에 분원을 설치하여 특별히 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관요(정부 관리하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민요(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번창하였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공예품으로 도자 공예제품에 따라 제와장·옹기장·도기장·사기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기의 제작과정은 사토를 채굴하는 것부터 구워내는 작업까지이다. 우선 모래흙(사토)을 구한 후 물에 넣어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비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순수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물레작업을 한다. 만들어진 그릇을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와 유약을 바른 뒤 다시 재벌구이를 해서 구워낸다. 전통적인 나무로 만든 발물레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키는데, 이러한 물레 돌리는 방법이 한국 도자기 장인들의 기술이다.

사기장은 서민적이면서 활달한 조선분청사기와 단아한 선비의 향을 담고 있는 조선백자의 한국적 정감과 멋을 나타내는 전통공예기술로 가치가 높아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기능보유자로는 김정옥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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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설명

사기장이란 백토 등을 혼합하여 그릇형태를 만든 다음 1300℃ 이상의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사기그릇을 만드는 기술 또는 사람을 말한다.

한국 도자기는 고려시대부터 천하제일의 비색청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으며 국가기관인 사옹원(司甕院)에서 제작하였는데 조선시대에는 왕실에서 사용하기 위해 경기도에 분원을 설치하여 특별히 제작하였고 조선 후기에는 관요(정부 관리하에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폐쇄되면서 도공들이 문경, 괴산, 단양 등 지방으로 흩어져 민요(민간에서 도자기를 만드는 곳)가 번창하였다. 오늘날에도 세계적으로 잘 알려진 공예품으로 도자 공예제품에 따라 제와장·옹기장·도기장·사기장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기의 제작과정은 사토를 채굴하는 것부터 구워내는 작업까지이다. 우선 모래흙(사토)을 구한 후 물에 넣어 이물질을 제거하는 수비과정을 거친다. 이 과정이 끝나면 순수 흙으로 그릇의 형태를 만드는 물레작업을 한다. 만들어진 그릇을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와 유약을 바른 뒤 다시 재벌구이를 해서 구워낸다. 전통적인 나무로 만든 발물레를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키는데, 이러한 물레 돌리는 방법이 한국 도자기 장인들의 기술이다.

사기장은 서민적이면서 활달한 분청사기와 단아한 선비의 향을 담고 있는 백자의 한국적 정감과 멋을 나타내는 전통공예기술로 가치가 높아 문화재 보전차원에서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기능보유자로는 김정옥 씨가 그 맥을 이어가고 있다.

※ 보충설명

사기(沙器)란 도자기를 구워내는 온도에 따라 토기(土器), 도기(陶器), 석기(석器), 자기(瓷器)로 나누어지며 백토 등이 혼합되어 높은 온도에서 구워진 것을 말하고, 사기장(沙器匠)은 사옹원(司甕院)에서 사기를 제작하던 장인(匠人)들을 일컫는 말이며 문화재에서는 도자 공예제품에 따라 제와장(製瓦匠), 옹기장(甕器匠), 도기장(陶器匠), 사기장(沙器匠)으로 분류할 수 있다.

사기장(沙器匠) 기능보유자인 김정옥(金正玉)씨는 그의 8대조인 김영만(金榮萬)씨가 충청북도 청원군 성흥리(淸原郡 城興里)에서 경상북도 문경군 관음리(聞慶郡 觀音里)로 옮겨와 서당훈장으로 있으면서 터전을 마련하였고 7대조인 김경정(金就廷)씨로부터 사기장으로 출발하기 시작하여 200여 년간에 걸쳐 사기장가계(沙器匠家系)를 형성하였던 것이다. 김정옥은 제7대조로부터 이어내려 온 전통적인 사기 제조기술을 계승한 사기장인 선친 김교수(金敎壽)의 셋째아들이다. 그는 18세부터 부친 밑에서 사기제작에 종사하기 시작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곳 관음리 중점(中店)에는 마을 공동 사기가마터가 있었던 사기점이 있다. 중점에 현존하는 사기가마는 현재 다섯칸이 남아 있으나 원래는 여섯칸의 칸가마였다고 한다. 가마의 연대는 약 150년 정도로 언덕을 오르는 등요(登窯)의 구조를 취하고 있으며, 망송이로 가마를 쌓아 올린 망송이 가마이다. 이러한 망송이가마는 소백산 줄기를 중심으로 분포되어 있던 독특한 가마시설이다. 1883년에 관요인 분원의 가마가 민요로 바뀌고, 분원에서 일하였던 도공들이 뿔뿔히 흩어지면서 문경, 괴산, 단양일대로 분산되어 갔는데 이 일대의 소백산맥은 풍부한 연료와 도자기의 원료인 사토(沙土)가 풍부히 매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김정옥씨는 어릴때부터 아버지의 물레질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흙과 친숙해 흙을 온몸에 묻히고 살기 시작한 것은 열여덟살 때부터였다. 그는 문경 관음리 사기점 부근에 매장되어 있는 사토를 채굴하여 전통적인 수비과정을 거쳐 순박한 그릇들을 생산해 내고 있다. 작업장에서 수비된 사토를 꼬박작업을 거쳐 그릇으로 빚는 물레작업을 한다. 성형한 그릇들을 가마에 넣고 초벌구이와 시유한 후 다시 굽는 재벌구이를 거쳐 그릇을 구워낸다. 그가 사용하는 물레는 발물레로써 작업장의 움속에 마련된 전통적인 나무로 만든 것으로 시계방향으로 회전시키는데 이러한 물레 돌리는 방법이 한국 도자기 장인들의 기술이다. 만들어진 작품은 19세기후반부터 20세기의 막사기로써 코발트 안료로 간략한 초문(草紋), 초화문(草花紋)을 그린 사발, 술병, 항아리, 요강 등의 청화백자들과 막사발 등을 주로 만들고 있다.

김정옥씨가 사기를 굽는 일로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지난 1984년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상하고 나서 부터였다. 그 후 1987년,88년 전승공예대전에서 입선과 특별상을 수상해 명실공히 사기장(沙器匠)으로서 널리 인정을 받았다.

옛부터 도자기를 굽는 마을, 문경 관음리 산골마을은 조선시대 옛 가마터가 30여 군데 조사되기도 한 지방 사기제작의 중요한 곳이었다. 전통적인 망송이가마와 옛 나무로 만든 발물레, 주변의 사토를 사용하여 전통의 옛그릇들을 만들고 있는 사기장 김정옥씨는 투철한 장인정신으로 정진하고 있다.



 

 

 

관련 자료 

http://kr.blog.yahoo.com/gjtmsla1000/2549.html?p=1

 

 옹기장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 30 호

 
 
 
 
 



옹기장
▒ 지정번호 : 서울특별시 무형문화재 제 30 호
▒ 지정연월일 : 2002.9.25
▒ 보 유 자 : 배요섭
▒ 전 승 지 : 서울특별시



옹기는 곡식과 음식물을 담기 위해서 진흙을 반죽해 구워낸 그릇을 말한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의 그릇문화는 도기(陶器)와 자기(瓷器)를 두 축으로 해서 발전해왔다. 음식을 담는 고급 그릇은 유리질막을 씌운 자기가 사용되었다면, 물기를 머금은 내용물을 보관하거나 음식을 발효시키는데는 필수적으로 쓰였던 질그릇이 바로 옹기이다. 유약을 씌운 그릇이 보기에 아름답고 정치하여 고급 그릇문화를 형성하고 있지만, 음식을 장기간 발효시키는 데는 유리질막으로 인하여 부적합하다. 그러나 옹기는 갈무리 음식이 주종인 우리나라의 음식문화를 지탱해온 탁월한 생활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다.
화를 지탱해온 탁월한 생활공예품이라고 할 수 있다. 옹기는 오랜 역사를 통하여 우리의 전통음식문화와 호흡하면서 명맥을 이어왔다. 각 지역마다 고유의 지역적 방식으로 옹기가 생산되고, 19세기 경부터는 천주교에 대한 탄압으로 교인들이 시골로 피신하편서 옹기장이가 되어 천주교의 전교와 깊숙하게 연결되면서 성장하였다.



옹기 장인 배요섭의 조부와 부친도 천주교인이었으며, 요섭이라는 그의 이름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이 집안의 공방은 경기도 이천군 백사면 모존리에 있다. 조부인 배경춘(1927년 사망) 때부터 가업으로 이어온 옹기일은 삼대에 걸쳐 자연스럽게 전승되었으며 옹기 이외의 일에는 눈을 돌리지 않고 줄곧 외길을 걸어온 전형적인 대물림 장인이다. 배요섭의 전승계보는 아래와 같다.

배경춘 → 배의석 → 배요섭

옹기장 배요섭은 1955년 서울 중랑구 신내동 피울점으로 공방을 옮겨 부친과 함께 「한미요업」이라는 옹기 전문점을 열고 주로 서울, 경기지역의 독자적인 옹기형식을 유지하면서 제작활동을 전개하였다. 그의 나이 42세가 되던 1968년에 부친이 사망하자 공방을 주도적으로 운영해 나갔으며, 장성한 두 아들(둘째 배연식, 셋째 배춘식)을 입문시켜 가업을 계승토록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조부와 부친을 통해 가승된 서울 지역의 고유한 옹기양식이 배요섭과 그의 아들을 통하여 원형 그대로 유지되고 있어서 그 정통적 측면이 주목된다.
배요섭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푸레옹기를 제작할 수 있는 장인이다. 푸레옹기는 유약을 입히지 않은 질그릇의 일종으로, 근래까지 경기도 북부의 전곡을 중심으로 제작되던 옹기기법이다. 고온의 가마번조에서 생겨난 재를 자연스럽게 녹아 내리게 함으로써 연한 녹색 계열의 재유가 발색된 상태에서(약 1250도), 약간의 천일염을 가마 봉통 안에 뿌려주고, 그 위에 다시 연기를 씌워 검은색을 입히는 방식으로 생산된다. 소금의 나트륨 성분과 나무재가 상호 작용하여 매우 얇은 피막이 형성된 다른 지역에서 찾아볼수 없는 특이한 옹기이다.
저온에서 연기를 먹이는 기술은 보편화되어 있으나, 고온에서는 연이 쉽게 타버리기 때문에 난이도가 높은 고급 기술로 손꼽히고 있으며, 배요섭이 유일하게 제작할 수 있다. 푸레옹기 기법은 세계적으로도 그 가치가 인정되고 있으며, 수 차례에 걸친 해외 현지 활동을 통해서 이 기법이 널리 소개되어 세계 각국의 많은 작가들이 전수를 희망하고 있다.

자료편집 : 대광불교대학 悟惺 沙門

 

 

 

 

관련 자료 

 http://blog.daum.net/doyota91/11272288

 

9대째 이어온 옹기의 명가

 

새근새근 숨쉬는 항아리-미력옹기

 

  이종원(ljhkhs44) 기자  

 

▲ 운주사 옹기
ⓒ2003 이종원
힘겨운 역사를 살아온 우리 민초들의 애환을 가장 잘 표현해 내는 것 중에 옹기 만한 것이 또 있을까?

머리끝까지 화가 났어도 항아리에서 퍼온 동치미 국물 한 그릇이면 뭉쳤던 응어리가 풀렸고, 콩쥐를 난감하게 만든 것도 깨진 독이고 보면 옹기는 늘 민초들과 늘 함께 살아 온 것임이 분명하다.

청자와 백자가 우아한 귀족의 모양새를 하고 있다면 옹기는 미련하지만 우직한 돌쇠 모양새를 하고 있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옹기는 맑고 청아한 소리를 들려준다. 순수한 그릇이기 때문이다. 옹기를 어루만지면 어머님 품안처럼 따뜻하고 포근하게 느껴진다. 쓰다듬으면 진흙이 묻어날 것 같은 솔직함 때문에 나는 우리네 옹기를 끔찍이도 사랑한다.

못생긴 옹기들이지만 함께 모여 있으면 대단한 위력을 발휘한다. 따사로운 가을볕을 쬐고 있는 간장독, 된장독, 고추장독은 보기만 해도 음악이 들려온다. 크기도 제각각이고 볼품없던 것들이 모여 조화된 화음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래서 '옹기종기'란 말이 나왔는지도 모른다.

조선 천주교가 민간인들에게 깊이 파고 든 것도 옹기쟁이 덕이 크다. 박해를 피해 산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고, 옹기를 구워가며 생계를 이어갔던 것이다. 가끔 주님이 보고 싶으면 흙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벽에 걸었고 그것을 바라보며 신앙을 지켜나갔던 것이다. 그래서 순교자의 손에는 흙으로 만든 묵주가 늘 걸려 있었고 품안에서 십자고상이 발견하기도 했다.

이렇게 가득 사연을 담았던 옹기들을 이제는 보기가 쉽지 않다. 옹기촌이 하나 둘씩 사라지기 시작했고, 프라스틱 용기와 냉장고의 출현으로 잊혀져 간 퇴물이 전락한 것이다.

▲ 미력옹기 전시장
ⓒ2003 이종원
그러나 전남 보성의 미력옹기는 우리 전통의 옹기를 힘겹게 이어가고 있다. 이학수(옹기전수자)씨는 중요무형문화재 96호 옹기장 보유자였던 선친(이옥동. 94년 5월 작고)의 대를 이어 9대째 옛 모양, 옛 방식의 살아 숨쉬는 전통옹기를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제가 옹기를 굽는 것을 무척이나 반대하셨습니다. 천대받는 옹기장이 일은 당신 대에서 끝나기를 바라셨던 거지요. 하지만, 피는 속일 수 없었나 봅니다. 대학시절인 76년 여름 대가 끊기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바로 학업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

그 때만 해도 옹기로 밥을 먹고살기는 힘에 부쳤던 시기였단다. 아버지는 한달 가까이 말 한마디도 하지 않을 만큼 화가 났지만 아들을 이기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 결국 마지못해 아버지는 옹기 전수를 허락한 것이다. 이 대목에서 이학수씨께 고마움을 느낀다.

만약 그때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다면 300년 전통의 미력옹기는 영영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아들이라고 특별한 대우는 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더 혹독하게 다그쳤으며 결국 온갖 설움을 이기고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 받은 것이다.

옹기를 구워서 집안을 꾸려나갈 수 없자 보성에서 안경점까지 차렸을 정도로 어려운 시기도 있었다. 다행히 90년대 초반부터 건강을 중시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미력옹기는 차츰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서울 경복궁안 전통공예관, 인사동 통인가게 등 서울을 비롯해 지방 곳곳에서 그의 옹기는 팔려 나간다.

이것은 바로 이학수씨가 옛 문헌을 뒤적여 전통옹기 제작방법을 연구하고, 대학원에 진학하여 도자기 이론 수업을 받는 등 쉬지 않고 노력해온 결실인 것이다. 91, 92년 덕수궁과 잠실롯데백화점에서 열린 옹기문화전에 출품, 작품의 우수성을 인정받았고, 대한민국 전수공예 미전에서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학수씨의 아내 이화영씨도 옹기제작 기능전수자다. 이화영씨는 조소과 출신의 도예가로 부부가 함께 옹기를 굽는다. 350년 된 가업이 계속됐으면 하는 것이 이들 부부의 소망이다. 숨쉬는 옹기, 과학문명도 잡을 수 없는 선조들의 슬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란다. 다행히 막내 이레군이 옹기제작에 관심이 커 10대째 대를 이을 것 같다고 한다.

▲ 오로지 점토 3개만으로 옹기를 만든다. 옹기의 생명은 질 좋은 흙이다. 진흙에 물을 주어가며 수차례 메로 두드리고, 께끼로 얇게 썰면서 불순물을 제거해야 한다.
ⓒ2003 이종원
▲ 그렇게 정제된 흙을 판장질로 넓적하게 만들어 물레에 올려 밑판과 그릇벽에 붙여 기본형을 만든다. 미력옹기는 쳇바퀴타레기법으로 만드는데, 이 기법은 판장을 한장씩 쌓아올리는 방법으로 남도고유의 기법이다.
ⓒ2003 이종원
▲ 흙을 판자모양처럼 넓게 펴고 물레 위에 밑판과 그릇판을 붙여 그릇의 행태를 잡고 배를 부르게 만든다
ⓒ2003 이종원
▲ 그 위에 또 흙을 붙여 나간다.
ⓒ2003 이종원
▲ 발로 물레를 돌리면서 모양을 만들고 두께를 조절한다.
ⓒ2003 이종원
▲ 물을 묻힌 물가죽으로 주둥이 모양을 잡으면 옹기의 형태가 완성된다.
ⓒ2003 이종원
▲ 가마
ⓒ2003 이종원
이런 옹기는 4일 동안 그늘에서 말린다. 그리고 나무와 풀을 태운 부염토가 혼합된 고운 흙으로 만든 '잿물'유약을 바른다. 일반 옹기는 인체에 해로운 '광명단'이란 유약을 사용하기 때문에 그릇이 숨을 쉴 수가 없다고 한다.

국립중앙과학관에서 실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잿물을 발라 구운 전통옹기는 옹기안과 밖의 공기가 순환해 물과 음식을 오래 보존 할 수 있고, 잘 썩지 않게 한다'라고 발표하면서 미력옹기의 신비를 밝혀주고 있다. '땀을 바깥으로 공기는 안쪽으로…'라는 신발CF처럼 숨쉴 수 있는 그릇을 만들 수 있는 비결은 잿물에 있는 셈이다.

미세한 구멍 때문에 고추장이나 간장을 담가 해를 거듭해 저장해도 변질되거나 썩지 않으며 음식물의 맛과 신선도를 오래 유지시켜 주고, 오염물질을 없애 주는 자연 자정역할까지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1300도 불을 일주일간 지피기 위해 소나무만을 사용한다고 한다. 가마는 나지막한 언덕 구릉 위에 경사 25도로 길게 뉘여 있다. 이는 불길이 자연스럽게 퍼지도록 하기 위함이란다.

물기가 다 마른 옹기가 한 가마분(500∼1천 개)이 돼야 가마에 불을 지핀다고 한다. 불 때는 작업이야말로 미력옹기제작의 가장 중요한 과정이다. 피를 말리는 힘든 작업이다. 아주 낮은 온도의 피움불을 사흘간 피워서 수분을 완전히 제거하고, 그 다음 본격적인 돋김불을 지핀다.

이때부터 가마 속 온도가 섭씨 1300도 정도가 될 때까지 일주일간 밤낮으로 불을 때야 한다. 공들여 만든 옹기도 불이 너무 세면 주저 앉아버리고 만다. 잘해도 상품화할 수 있는 것은 반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이런 제작의 어려움 때문인지 미력옹기는 상품화될 수 없는 것일지라도 TV에서 나오는 것처럼 깨부수지는 못한다. 대신에 겨울철 불어오는 찬바람을 막기 위해 심어놓은 청죽 숲 속에 감춰 놓는다. 오랜 시간이 지나면 그 못생긴 옹기는 흙으로 다시 돌아가기 때문이란다.

▲ 미력 전통옹기
ⓒ2003 이종원
초등학교 미술시간에 누구나 한번은 찰흙을 만지작거렸을 것이다. 그저 대충 만들어 구우면 옹기가 나오는 줄 알았다. 이번에 장인이 옹기 하나를 만드는 과정을 목격했다. 진흙을 주물기 시작하면서 1시간동안이나 꼬박 정신을 집중해야 옹기 하나가 탄생하게 된다. 손의 움직임은 가히 신기에 가까울 따름이다.

"제 기술은 여기까지랍니다. 이제부터는 불길이 옹기를 만드는 셈이지요. "

이학수씨의 현명한 결단으로 300년의 가업은 다시 이어지게 되었다. 300년간 옹기장이었다는 이유만으로 받았던 멸시와 천대를 이겨냈기에 오늘날 미력옹기가 더욱 아름다운 것이다. 미력 옹기엔 슬픔과 한이 묻어있다.

350년간 흙만 만졌던 옹기장이 집안의 내력을 보면서 착잡함과 감동이 교차된다. 그리고 10대 장인인 막내 이레군에게 시선이 간다. 흙의 숨결이 살아 움직이는 항아리가 수천 년을 이어지길 간절히 바랄 뿐이다.

* 미력옹기 가는 길

서울-서광주 IC-화순-29번 국도-미력면을 지나 오른편에 자리잡고 있다.
문의: 061-853-8090

이 글은 오마이뉴스 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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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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