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아테크/한국의국보, 보물,기념물,천연기념물

[스크랩] 보물 568호 윤봉길의사 유품-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9:45
677 윤봉길의사유품 보물 568호 충남 예산군 일제시대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폭탄을 투척하는 의거를 일으킨 독립운동가 윤봉길(1908∼1932)의사가 남긴 유품들이다.

윤봉길은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량리에서 태어나, 덕산보통학교와 오치서숙에서 공부하였고 19세 때 고향에 야학을 세워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했다. 20세 때 각곡독서회를 조직하고 『농민독본』을 편찬했으며, 22세 때 월진회를 조직, 농촌운동을 정열적으로 전개하였다. 윤봉길 의사는 국내에서 독립운동이 어려워지자 23세 때 중국으로 망명하여 1931년 김구선생의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

그 뒤 항일투쟁을 계속하다가 1932년 4월 29일 혼자 일본의 상해사변 전승축하회가 열리던 상해의 홍구공원에 폭탄을 던져 일본군총사령관 시라가와 등 일본의 군수뇌부를 제거하는데 성공하였다. 그 자리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는 군법재판 단심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1월 일본으로 이송되어 1932년 12월 19일 일본 대판 위수형무소에서 24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유품은 총 18종 31점이다.

1.선서문 2.윤봉길의사의 이력서 및 유서 3.회중시계 4.지갑부중국화폐 5.윤봉길의사인 6.손수건 7.안경집 8.일기 9.월진회장립취지서 10.농민독본 11.형틀대 12.편지 13.월진회통장 등


 
 
 
 
 
 
관련 자료 

http://blog.chosun.com/blog.screen
 
 
윤봉길 의사 유해 - 반환 사진 공개


1946년 3월4일 일본 가나자와시 노다산 육군묘지 부근에 암매장된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는 장면.


1946년 3월9일 발굴단이 윤봉길 의사의 유해를 갖고 일본 가나자와역을 출발하기 직전의 장면.


1946년 6월16일 임시 특별열차 ‘해방자호’를 통해 서울역에 도착한 윤 의사 유해를
동생 윤남의 선생이 들고가는 장면. 바로 뒤에서 따르는 사람은 백범 김구


윤봉길 의사 순국 직후 일본군 군의관이 작성한 사체검안서 사본.



다음은 이와 관련한 연합뉴스 기사 전문이다.
‘훙커우(虹口)의거’로 일제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매헌(梅軒) 윤봉길(尹奉吉.1908-1932) 의사 유해의 국내 반환 장면을 담은 사진이 일반에 공개됐다.

윤 의사의 조카인 윤 주(59) 월진회 부회장은 윤 의사 순국 74주기(12월19일)를하루 앞둔 18일 유해 발굴의 전후 과정을 담은 사진 3장과 일본군이 작성한 사체검안서 사본을 공개했다.

이번에 공개된 사진 3장은 ▲ 1946년 3월4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유해 발굴 작업을 벌이는 장면 ▲1946년 3월9일 발굴한 유해를 가나자와역에서 기차에 싣기 직전 장면 ▲1946년 6월16일 서울역에 도착한 유해를 싣고가는 장면을 담고 있다.

윤 부회장은 “유해 발굴작업 장면은 다른 사진을 통해서도 공개된 적이 있었지만 발굴단이 기차역에서 함께 찍은 사진과 유해가 서울역에 도착한 장면을 찍은 사진이 일반인들에게 공개된 되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밝혔다.

당시 독립운동가 서상한씨와 이강훈씨 등을 주축으로 일본 현지에 거주하는 한국인 청년들이 모여 윤 의사의 유해를 발굴하고 국내로 송환하는 작업을 주도했다.

이 중 가나자와역에서 찍은 사진에는 유해뿐 아니라 처형에 사용된 십자가 모양의 형틀도 담겨 있어 주목받는다.

또 마지막 사진에서는 임시 특별열차인 ‘해방자호’를 타고 서울역에 도착한 윤 의사의 유해를 동생인 고(故) 윤남의 선생이 들고 있으며 백범 김구(1876-1949) 선생이 그 뒤를 따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윤 부회장은 “윤 의사의 의거는 우리나라의 자주 독립을 위한 것이었는데 아직도 우리는 남과 북으로 갈려 ‘반쪽짜리’ 독립밖에 이루지 못하고 있다. 윤 의사의 정신을 살려 통일을 기원하는 마음에서 미공개 사진을 꺼내게 됐다”고 말했다.

사진과 함께 공개된 윤 의사의 사체검안서는 윤 의사의 사망 시각이 오전 7시40분(1932년 12월19일)이며 순국 장소가 일본 이시카와현 이시카와군 우치가와 마을 미고우시 지역 육군작업장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사체검안서는 일본군 군의관에 의해 작성된 것으로 학자들간 이견이 나왔던 순국 시간과 장소가 기록된 공식 문서라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된다. (서울=연합뉴스)

 

 

출처 ; 동아누리(31720)

2007-03-09 16:22:08

 

[자작 영상] 윤봉길 의사 다시알기

 

수많은 왜곡들이 있습니다... 그중윤봉길의사와 수많은 독립투사분들이 목숨받쳐 지키려고한

우리의 조국을 생각하고 그분들의 정신을 가슴깊이 되새기는 계기가 되었으면...

조국을 위해 목숨 받치신 모든분들께 깊이 머리숙입니다.
 
 

 

 

출처 ; 동아일보

 

[광화문에서/허문명]잘사는 게 최고의 복수



처음으로 일본인과 이야기를 나눠 본 것이 1998년이었다. 호주에서 배낭여행 중인 한 대학생과 장거리 버스에 동승했다. 동양인이라 반가웠지만 그가 꺼내 든 일본 책에 거부감이 일었다. 일본 하면 수탈과 식민의 역사밖에 배운 게 없었으니 ‘일본은 악’이라는 당시 내 생각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그렇다면, 그에게 한국은 어떤 나라일까. ‘한국을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대뜸 물었더니 돌아온 대답은 ‘관심 없는데요’였다. 그때의 허탈함이라니. 증오는 피해자의 것이고 무관심은 가해자의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제국과 식민지라는 상이한 역사 체험은 생각을 이렇게 갈라놓을 수도 있구나 싶었다.

 

그 후 일본을 가 보고 일본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지만, 한국에 무덤덤하다는 인상을 받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분위기가 달라진 건 한류(韓流) 이후였다.

 

한국 배우 이름들을 줄줄이 꿰고 너도나도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 했다. 한국이 좋다는 그들이 반갑긴 했지만 나는 일본이 좋다고 말할 용기가 있는가 되짚어졌다. ‘선(善)한 일본’은 내 안에 자리한 일종의 금기였다.

 

그런데 이번엔 일류(日流)다.

 

2월이라는 여행 비수기에 일본 도시 사람들도 잘 가지 않는다는 촌구석을 돌아다닐 기회가 있었는데 곳곳에서 한국인들을 만났다. 이들은 한결같이 일본의 음식, 숙박, 물건들이 질과 서비스가 우수하면서도 심지어 싸기까지 하다고 칭찬했다. ‘일본이 좋다’고 당당하게 말하는 그들에게 오래전 내가 가졌던 죄의식은 없었다.

 

여행길에서 만난 대부분의 일본인들은 친절하고 따뜻했다. 특히 사소한 데까지 남을 배려하는 마음에서 여행자인 나는 종종 감동받았다.

 

그러나 귀국길에 집어 든 한국 신문은 ‘일본군위안부는 없었다’는 일본 정치인들의 발언을 전하고 있었다. 선한 일본인들의 얼굴과 정치인들의 발언이 겹쳐졌다.

 

일본을 체험하고 알아 갈수록 정치와 일상이 갈라놓는 단절의 폭이 크게 느껴지는 요즘이다. 이번 일본군위안부 문제에서부터 얼마 전 야스쿠니신사 참배에 이르기까지 일본 정치인들은 값싼 국수주의와 민족주의를 대중에게 파는 비굴함을 보인다.

 

일본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악인들로 비난받아 왔다고 느끼겠지만 과거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는 자신감을 지니지 못한 것 또한 사실이다.(복거일 ‘조심스러운 낙관’)

 

어느 때보다 민간 교류가 활발해진 요즘이기에 이런 일본을 바라보는 일은 더욱더 불편하다. 일본군위안부 동원에 정부가 개입했다는 증거가 없다는 그들의 논리를 들으면서 차제에 우리도 그야말로 ‘정밀한 일본관’을 가질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우리 역시 논리와 증거로 무장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감정을 가라앉히고 차분해지는 게 필요하다.

일제강점기를 수탈과 억압의 앵글만이 아닌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시각에서 다양하게 바라보는 일은 그 시작이다.

 

뭐니 뭐니 해도 잘사는 게 최고다. 따지고 보면, 내가 만난 ‘친절한 일본인’들이란 자기네들 물건을 사 주고 관광을 하는 소비자에 대한 친절함,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여튼 나는 그들의 극진한 서비스를 받으며 복거일 씨 말대로 “잘사는 것보다 더 좋은 복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허문명 교육생활부 angelhuh@donga.com

 

2007.03.16 03:01 입력

 

 

출처 ; 조선일보

 

  • [초점] ■ ‘윤봉길 의사 의거 오류’
  • 도시락폭탄·즉사, 사실과 달라… 어린이서적 90%가 잘못 기술
  • 허성호·대학생·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 회원
    입력 : 2007.04.25 22:50 / 수정 : 2007.04.25 23:44

     

    4월 29일이면 윤봉길 의사 의거 75주년을 맞게 된다. 그런데 의거와 관련해 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두 가지 사실이 있다. 우선, 윤봉길 의사는 도시락 폭탄을 던진 적이 없다. 윤 의사가 일본인들을 암살한 폭탄은 도시락 폭탄이 아닌 물통형 폭탄이다. 도시락 폭탄은 자결용으로 준비했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압수당했으므로, 의거의 상징은 될 수 있어도 도시락 폭탄을 던졌다는 기술은 사실이 아니다. 둘째, 윤 의사가 암살 1순위로 지목한 상하이 파견 일본군 총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는 윤 의사의 폭탄을 맞고 즉사하지 않았다. ‘전신 폭탄 파편창’을 입고 신음하다 거사 약 1달 후인 5월 26일에 사망했다.

    며칠 전, 시내의 한 대형서점에서 윤 의사 관련 어린이 위인전 10여 종을 살펴보니 이 두 사안에 관하여 정확히 기술하고 있는 서적이 단 한 권에 불과한 것을 보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최근 화제가 되었던 ‘윤봉길 의사 연행 사진 진위 논란 동영상’을 비롯해 각종 매체를 통해서도 오류가 전방위로 쏟아지고 있다. 꿈나무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는 저자와 출판사는 책을 리콜해서라도 사실을 제대로 가르쳐야 할 것이다.

    문제는 그들만이 아니다. 이러한 오류를 반세기 이상 방치하고 있는 국가보훈처와 언론매체는 물론, 지금도 학교에서 이 오류를 확대 재생산하고 있을 초중고 교사들이나 평소 역사교육을 가볍게 여겨온 교육부 역시 책임을 통감해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크게 자숙해야 할 사람은, 평소 역사에 대해 분노만 있고 실천은 없는 젊은 네티즌들이 아닐까 싶다.

     

     

    출처 ; 동아일보

    입력2007.04.30 03:01

     

    “숭고한 정신, 모두에게 교훈”…윤봉길 의사 상하이 의거 75주년

     


    《매헌 윤봉길(梅軒 尹奉吉·사진) 의사 기념사업회와 동아일보사, 상하이(上海) 시 훙커우(虹口) 구가 공동으로 주최하는 윤 의사 의거 75주년 기념식이 28일 오전 중국 상하이 루쉰(魯迅·옛 훙커우) 공원의 윤 의사 기념관인 매정(梅亭) 앞에서 열렸다. 국내에서도 29일 충남 예산 충의사와 도중도 생가 일대에서 의거 75주년 기념식이 열렸다.》
     

    루쉰 공원 기념식에는 기념사업회 김덕룡 명예회장과 김학준 동아일보 사장, 김양 상하이 주재 총영사, 박용옥 3·1여성동지회 회장, 윤 의사의 장손인 윤주웅 현대기아남양연구소 선임연구원을 비롯해 400여 명이 참석했다.

     

    중국 측에서는 장즈언(張志恩) 훙커우 구 정치협상회의 부주석과 천젠(陳儉) 훙커우 구 국제교류중심 주임 등 10여 명이 자리를 함께했다.

     

    이날 기념식에는 1990년 한국과 중국이 공동으로 기념식을 개최해 온 이래 처음으로 태극기가 기념식장에 걸려 참석자들의 감회를 새롭게 했다. 중국 측은 그동안 민간단체가 주관하는 외국인물의 기념행사에 국기 게양을 허용한 적이 없다며 이를 불허해 왔다.

     


    윤봉길 의사의 상하이 의거 75주년 기념식이 중국과 한국에서 동시에 열렸다. 국내에서는 29일 충남 예산 충의사에서 기념 다례가 열렸다(왼쪽 사진). 28일 상하이 루쉰공원의 윤 의사 기념관인 매정 앞에서 열린 기념식(오른쪽). 연합뉴스

    김 명예회장은 기념사에서 “윤 의사의 의거는 독립운동에 전기를 마련하고 중국과 공동 항전의 계기를 제공해 주었다”며 “숭고한 정신을 되새겨 한중 양국의 우호협력 관계를 더욱 증진시키자”고 말했다.

     

    김 사장은 “동아일보는 항일운동사에 빛나는 윤 의사의 상하이 의거를 가장 먼저 호외로 동포들에게 알렸다”며 “자기희생과 살신성인을 바탕으로 한 윤 의사의 구국 정신으로 우리 모두가 힘을 모아 국가적 어려움을 헤쳐 나가자”고 강조했다.

    중국 측의 장 부주석은 “윤 의사의 영웅적인 쾌거는 한국민의 귀중한 정신적 재산이자 상하이 인민의 뇌리에 영원히 기억될 일”이라고 말했다.

     

    김 명예회장은 중국 측 인사들에게 “윤 의사의 호가 ‘매헌(梅軒)’이니 기념관 이름을 ‘매정(梅亭)’ 대신 매헌정 또는 매헌 기념관으로 하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중국 측은 “한국 측이 원한다면 상부에 건의해 바꾸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기념사업회 남효응 사무처장은 “상하이 훙커우 구의 사적지인 기념관이 상하이 시 사적지로 지정받도록 중국 측에 요청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한편 29일 예산 충의사에서 열린 기념식에서 이명박 매헌 윤봉길 의사 기념사업회장은 축사를 통해 “윤 의사는 자신을 바쳐 대의를 구했고 어려운 일을 스스로 나서서 행했다”며 “국정의 혼란과 갈등으로 얼룩진 현실에서 윤 의사께서 보여 주신 나라 사랑은 큰 교훈을 준다”고 말했다.

     

    도중도에서는 윤 의사의 부인을 기리기 위한 ‘배용순 효부상’ 등 각종 시상식이 열렸다. 배 여사는 윤 의사가 1932년 순국한 뒤 종부로서 50여 년간 시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자식을 키우며 가정을 지켰다.

    1908년 6월 예산에서 태어난 윤 의사는 1932년 4월 29일 상하이 훙커우 공원에서 일왕의 생일을 기념하는 천장절(天長節) 및 전승축하 기념식장에 폭탄을 투척해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일본군 대장 등을 폭사시킨 뒤 붙잡혀 12월 19일 일본 가나자와에서 순국했다.

    상하이=하종대 특파원 orionha@donga.com

    예산=박민혁 기자 mhpark@donga.com

  •  

    출처 : ..
    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