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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우리나라 성(城)의 여러가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09:52
조선 시대

서울숭례문
종    목 국보  제1호
명     칭 서울숭례문(서울崇禮門)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1동
지 정 일 1962.12.20
소 재 지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29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중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조선시대 서울도성을 둘러싸고 있던 성곽의 정문으로 원래 이름은 숭례문이며, 남쪽에 있다고 해서 남대문이라고도 불렀다. 현재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 건물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태조 4년(1395)에 짓기 시작하여 태조 7년(1398)에 완성하였다. 지금 있는 건물은 세종 29년(1447)에 고쳐 지은 것인데 1961∼1963년 해체·수리 때 성종 10년(1479)에도 큰 공사가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문은 돌을 높이 쌓아 만든 석축 가운데에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을 두고, 그 위에 앞면 5칸·옆면 2칸 크기로 지은 누각형 2층 건물이다.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 형태를 하고 있는데, 이러한 지붕을 우진각지붕이라 한다.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기둥 위부분에 장식하여 짠 구조가 기둥 위뿐만 아니라 기둥 사이에도 있는 다포 양식으로, 그 형태가 곡이 심하지 않고 짜임도 건실해 조선 전기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지봉유설』의 기록에는 ‘숭례문’이라고 쓴 현판을 양녕대군이 썼다고 한다. 지어진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있는 서울 성곽 중에서 제일 오래된 목조 건축물이다.
 

화성,
    목 사적  제3호
명     칭 화성(華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88,04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기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190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수원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원래의 수원은 지금보다 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화산< 華山 > 아래가 그 중심이었으나, 조선< 朝鮮 > 정조< 正祖 >가 동왕< 同王 > 13년(1789) 그의 생부< 生父 >인 장헌세자< 莊獻世子 >(속칭 사도세자< 思悼世子 >)의 원침< 園寢 >인 현륭원< 顯隆園 >(후에 융릉< 隆陵 >으로 추증함)을 양주< 楊州 > 배봉산< 拜峰山 >에서 현 위치인 수원의 화산으로 옮기면서, 그 아래에 있던 읍치< 邑治 >와 민가< 民家 >들을 수원 팔달산< 八達山 > 아래로 집단 이전시킴으로써 현재의 수원이 형성되었다. 정조< 正祖 >는 부왕< 父王 >인 장조< 莊祖 >에 대한 효심에서 화성천도< 華城遷都 >를 계획하고, 정조 18년(1794)에 축성공사< 築城工事 >를 시작, 2년 뒤인 1796년에 준공되었다. 이 화성은 실학자< 實學者 >로 불리는 유형원< 柳馨遠 >과 정약용< 丁若鏞 >의 성설< 城說 >을 설계의 기본 지침으로 삼아, 좌의정 채제공< 蔡濟恭 >이 성역< 城役 >을 주관하고 조심태< 趙心泰 > 등이 전력하여 이룩한 것으로 우리나라 성곽 중에서는 가장 과학적으로 구조물< 構造物 >을 치밀하게 배치하면서도 우아하고 장엄한 면모를 갖춘 것이다. 특히, 성곽의 축조에 석재< 石材 >와 전< 塼 >을 병용한 것 그리고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만이 아니라 총포< 銃砲 >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 구조를 갖추고 있는 점, 또한 용재< 用材 >를 규격화하여 거중기< 擧重機 >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사상 가장 특기할 일이다. 성곽의 전체 길이는 5.52km이며 거기에 동쪽으로 창룡문< 蒼龍門 >, 서쪽으로 화서문 < 華西門 >, 남쪽으로 팔달문 < 八達門 >, 북쪽으로 장안문< 長安門 > 등 4대문을 내고 암문< 暗門 > 4개, 수문< 水門 > 2개, 적대< 敵臺 > 4개, 공심돈< 空心墩 > 3개, 봉돈< 烽墩 > 1개, 포루< 砲樓 > 5개, 장대< 將臺 > 2개, 각루< 角樓 > 4개, 포루< 포樓 > 5개 등의 다양한 구조물을 규모있게 배치하였다. 그리고 팔달산 아래에는 행궁< 行宮 >을 지어 현륭원< 顯隆園 >에 행차하는 임금이 일시 머물 수 있게 제반 시설을 갖추었던 것이다. 그런데 약 200여 년이 지나는 동안 성곽이 퇴락하고 제반 구조물이 무너지기도 하였으며, 특히 6·25동란을 통해 문루< 門樓 >가 파손되었다가 1975년부터 3년간 복원< 復元 >하였다. 이때에는 이미 시가지가 성터 일부를 점하고 있어서 팔달문에서 동서남루까지의 450m 구간과 방대한 행궁은 시가지의 형편상 복원하지 못하였다.

서울성곽,
종    목 사적  제10호
명     칭 서울성곽(서울城郭)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467,922.6㎡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누상동 산1-3외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서울특별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목마산성,
종    목 사적  제65호
명     칭 목마산성(牧馬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82,116㎡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송현리 산5-2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사유
관 리 자 창녕군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 성은 화왕산< 火旺山 > 북봉< 北峰 >으로부터 서쪽으로 뻗은 지맥< 支脈 >의 끝에 하나의 골짜기를 에워싸서 쌓은 산성으로, 보통 산복식< 山腹式 > 혹은 반면식< 半面式 > 산성< 山城 > 형식의 대표적 예이다. 둘레는 약 1.9km이며 현존하는 성지< 城址 >로서는 석축의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게 남아 있는 편이다. 축조연대에 대해서는 확실하지 않으나, 신라< 新羅 > 진흥왕< 眞興王 >(540∼576, 재위)이 대가야< 大伽倻 >를 정복하고 하주< 下州 >를 설치할 무렵 화왕산성 < 火旺山城 >과 함께 중요한 구실을 한 산성이었을 것인바, 이 성은 그 이전부터도 존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에는 가야시대< 伽倻時代 >의 고분군이 있어서 가야문화의 면모를 알 수 있으며, 이 산성이 아마도 가야에 의해 축조되었을 것임을 추측케 한다
 
 
 

상당산성,
종    목 사적  제212호
명     칭 상당산성(上黨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80,830㎡
지 정 일 1970.10.01
소 재 지 충북 청주시  상당구 산성동 산28-1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청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상당산 계곡을 둘러 돌로 쌓아 만든 산성으로 백제 때 부터 이미 이곳에 토성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는 곳이다.,

『삼국사기』에는 통일신라 초기에 김유신의 셋째 아들이 서원술성을 쌓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때 쌓여진 것이 아닌가 추측되기도 한다. 상당이란 이름은 백제 때 청주목을 상당현이라 부르던 것에서 유래한 것이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때에 일부 고쳤으며 숙종 42년(1716)에 돌성으로 다시 쌓은 것이다. 성벽은 네모나게 다듬은 화강암으로 쌓았으며, 비교적 잘 남아있으나 성벽 위에 낮게 쌓은 담(여장)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성 안에 5개의 연못과 3개의 사찰, 관청건물, 창고 등이 있었는데, 현재는 문과 치성이 남아있다.,

정상에 오르면 서쪽으로 청주·청원 시내가 한 눈에 내려다 보여 서쪽 방어를 위해 쌓여진 곳이었음을 알 수 있다.
 
 
 
 

낙안읍성,
 
종    목 사적  제302호
명     칭 낙안읍성(樂安邑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223,108㎡
지 정 일 1983.06.14
소 재 지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공유,사유
관 리 자 순천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서·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성안의 마을은 전통적인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어, 당시 생활풍속과 문화를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낙안 읍성은 현존하는 읍성 가운데 보존 상태가 좋은 것들 중 하나이며, 조선 전기의 양식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홍지문및탕춘대성,
종    목 시도유형문화재 
제33호 (종로구)
명     칭 홍지문및탕춘대성(弘智門및蕩春大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시설
수량/면적 일원
지 정 일 1976.06.23
소 재 지 서울 종로구  홍지동 산4
시     대 조선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종로구
상 세 문 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문화진흥과 02-731-1170
일반설명 | 전문설명
홍지문은 탕춘대성의 성문으로, 조선 숙종 41년(1715)에 서울도성과 북한산성을 보완하기 위해 세웠다. 지금 있는 건물은 1921년 홍수로 오간대 수문과 같이 허물어진 것을 1977년에 복원한 것이다. 한북문이라고도 부른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앞면에서 볼 때 사다리꼴을 한 우진각지붕이다.,

탕춘대성은 숙종 44년(1718)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 완성한 것으로, 명칭은 세검정 부근에 있던 탕춘대(蕩春臺)에서 따왔다고 한다.
삼국 시대

부여부소산성,
종    목 사적  제5호
명     칭 부여부소산성(扶餘扶蘇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983,598㎡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부여군  부여읍 쌍북리 산4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부여군
일반설명 | 전문설명
백마강 남쪽 부소산을 감싸고 쌓은 산성으로 사비시대의 도성(都城)이다.『삼국사기』「백제본기」에는 사비성·소부리성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성이 위치한 산의 이름을 따서 부소산성이라 부른다.

웅진(지금의 공주)에서 사비(지금의 부여)로 수도를 옮기던 시기인 백제 성왕 16년(538)에 왕궁을 수호하기 위하여 쌓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성왕 22년(500)경에 이미 산 정상을 둘러쌓은 테뫼식 산성이 있던 것을 무왕 6년(605)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한 것으로 짐작되어 백제 성곽 발달사를 보여주는데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성곽의 형식은 산봉우리를 중심으로 빙 둘러싼 테뫼식과 다시 그 주위를 감싸게 쌓은 포곡식이 혼합된 복합식 산성이다. 동·서·남문터가 남아 있으며, 북문터에는 금강으로 향하는 낮은 곳에 물을 빼는 수구가 있던 것으로 보인다.

성 안에는 군창터 및 백제 때 건물터와 영일루·사비루·고란사·낙화암 등이 남아있다. 성 안에 군창터와 건물터 등이 있는 것으로 보아, 유사시에는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고, 평상시에는 백마강과 부소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이용하여 왕과 귀족들이 즐기던 곳으로 쓰인 듯하다.

이 산성은 사비시대의 중심 산성으로서 백제가 멸망할 때까지 수도를 방어한 곳으로 역사적 의의가 있다.

공주공산성,
종    목 사적  제12호
명     칭 공주공산성(公州公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218,817㎡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충남 공주시  산성동 2외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 사유
관 리 자 공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공산성은 백제의 수도가 공주에 있을 때, 공주를 지키던 백제의 산성이다.

금강변 야산의 계곡을 둘러싼 산성으로, 원래는 흙으로 쌓은 토성이었으나 조선시대에 석성으로 고쳤다. 쌓은 연대는 정확하지 않으며, 백제 때에는 웅진성으로, 고려시대에는 공주산성·공산성으로, 조선 인조 이후에는 쌍수산성으로 불렀다.

4방에 문터가 확인되는데, 남문인 진남루와 북문인 공북루가 남아있고 동문과 서문은 터만 남아있다. 암문·치성·고대·장대·수구문 등의 방어시설이 남아 있으며, 성 안에는 쌍수정·영은사·연지·임류각지, 그리고 만하루지 등이 있다. 또한 연꽃무늬 와당을 비롯하여 백제 기와·토기 등의 유물들과 고려·조선시대의 유물들이 많이 출토되었다.

백제 멸망 직후에 의자왕이 잠시 머물기도 하였으며, 백제부흥운동의 거점지이기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김헌창의 난(822)이 일어나기도 하였으며, 조선시대 이괄의 난(1623)으로 인조가 피난했던 곳이기도 하다.

백제 성왕 16년(538)에 부여로 도읍을 옮길 때까지의 백제 도성이었으며, 이후 조선시대까지 지방 행정의 중심지였던 곳으로, 역사적 가치가 크고 연구할 가치가 있는 중요한 유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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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달성,
종    목 사적  제62호
명     칭 대구달성(大邱達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05,238.5㎡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대구 중구  달성동 294-1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중구
일반설명 | 전문설명
평지의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다. 높이는 일정치 않으나 4m정도이며, 둘레는 약 1,300m이다.

성벽의 아랫부분에서 초기철기시대의 조개더미와 각종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보아, 이 지방의 중심세력이 성장하여 초기적 국가 형태를 이루면서 쌓은 것으로 생각된다. 또한 경주의 월성처럼 평지에 낮은 구릉을 이용하여 쌓은 것이 특징이다. 따라서 달성은 우리나라 남부지방에서 초기 성곽의 전형으로 평가되고 있다.

성벽은 주로 흙으로 쌓았고, 성벽 윗부분에는 큰 돌덩어리들이 군데군데 드러나 있어 후대에 수리한 것으로 보인다. 성안에는 조선시대 전기까지 군대의 창고가 있었고, 우물과 연못이 있었다고 한다. 성의 서남쪽으로 연결된 구릉지대에는 돌방무덤(석실분)이 많이 흩어져 있고, 무덤에서 금동관을 비롯한 유물이 발견되었다.

대구 달성은 우리나라 성곽 발달사에 있어 가장 이른 시기의 형식이라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화왕산성,
 
종    목 사적  제64호
명     칭 화왕산성(火旺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226,790㎡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 산322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창녕군
일반설명 | 전문설명
가야< 伽倻 >의 영토였던 창녕< 昌寧 >땅이 신라< 新羅 >에 병합된 뒤 이곳을 비자화군< 比自火郡 > 또는 비사벌< 比斯伐 >이라 일컬었으며, 영토 확장에 힘쓴 진흥왕< 眞興王 >(540∼576, 재위)은 이 지방에 척경비< 拓境碑 >(국보 제33호)를 세우는 한편 하주< 下州 >를 설치하였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로 미루어 주변의 고분군과 함께 이 산성이 당시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여겨진다. 산성 입구인 서문< 西門 >은 흔적이 없고, 동문< 東門 >은 석축이 무너졌으나, 좌우 석벽은 그대로 남아 있다. 기록에는 이 석성의 둘레가 2,600m였고, 경내에 9개의 우물과 3개의 연못, 그리고 군창< 軍倉 >이 있었다고 한다. 『세종실록지리지< 世宗實錄地理志 >』, 『동국여지승람< 東國輿地勝覽 >』에 보면 조선< 朝鮮 > 성종< 成宗 > 때 이미 폐성< 廢城 >이 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임진왜란< 壬辰倭亂 >이 일어나자 다시 요새가 되어 선조< 宣祖 > 30년(1597) 홍의장군< 紅衣將軍 > 곽재우< 郭再祐 >가 이 산성을 지키며 내성을 쌓았다고 한다.

함안성산산성,
종    목 사적  제67호
명     칭 함안성산산성(咸安城山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102,855㎡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남 함안군  함안읍 괴산리, 가야읍 광정리 569
시     대 삼국시대
소 유 자 국유,사유
관 리 자 함안군
일반설명 | 전문설명
함안의 서북쪽에 있는 성산에 둘레 약 1,400m에 걸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산성으로, 조남산성이라고도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함안읍지』에 의하면 이 산성은 가야국의 옛터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산성의 형식이 삼국시대 유형을 따르고 있다. 산 아래 북쪽 낮은 언덕에는 가야의 무덤들이 있어, 무덤과의 관계를 생각할 때 가야 유적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성산은 북쪽에서 보면 독립된 구릉처럼 보이며, 서남쪽으로 계속되는 구릉지맥을 빼면 나머지 3면이 모두 비교적 경사가 급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성안의 형태는 약간 오목하게 생긴 평탄한 지형인데, 대부분 논과 밭으로 경작되고 있다. 동쪽 제일 낮은 곳으로 흘러가는 물이 성밖에 작은 계곡을 만들고 있다. 이 부근에 문터가 있고, 서쪽 성벽에도 문터로 보이는 곳이 남아 있으며, 그밖에 뚜렷한 시설물은 보이지 않는다
 
통일신라 시대

경주부산성,
종    목 사적  제25호
명     칭 경주부산성(慶州富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762,87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건천읍 송선리 산195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국유
관 리 자 경주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건천에서 서쪽 약 4km의 거리에 있는 오봉산(五峯山)에 위치한 신라 시대의 석축 산성으로 일명 주사산성(朱砂山城)이라고도 한다. 경주의 서쪽에 해당되는 교통의 요로를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으며, 주사산(朱砂山)·오봉산(五峯山)·오로봉산(吳老峯山)·닭벼슬산이라고도 불리는 높이 729.5m의 부산((富山) : 부산(夫山))의 정상부를 중심으로 한 세 줄기의 골짜기를 감싸 마련된 포곡식 산성(包谷式山城)으로서, 할석(割石)을 이용하여 쌓은 석축성이다.

성 밖의 지형은 사면이 모두 경사가 심하고 험준하여 방어를 위한 천험(天險)의 요새지(要塞地)이며, 성내는 평탄한 지형이 많고 물이 풍부하여 거주에 적합하다. 성문은 4개가 터를 남기고 있으며, 남문터가 비교적 잘 남아 있다.건물터가 6개소, 우물터가 4개소, 못이 2개, 암문터가 1개에 치성도 2개가 있다.

산성이 위치하는 곳은 경주에서 대구로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신라 선덕여왕 때에 백제 군사가 이 산을 넘어 옥문곡((玉門谷)일명 여근곡(女根谷))까지 침입한 일이 있은 뒤, 허술한 신라 도성(都城)의 방위를 강화하기 위하여 663년(문무왕(文武王) 3)에 경주 남산의 장창(長倉)을 축조하면서 동시에 쌓은 것이라 여겨지는데, 축성이 3년만에 이루어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석축은 가공하지 않은 안산암(安山巖) 석재를 사용하여 안팎을 쌓아올리면서 내부에는 잡석으로 채우는 협축법(夾築法)으로 쌓았다. 지금은 대부분 무너진 성벽 돌이 산허리에 널려 있으며, 성내에는 남문지(南門址), 군량미를 비축하였던 군창지(軍倉址), 군사훈련을 시켰던 연병장지(練兵場址)·주사암지(朱砂庵址) 등의 건물터와 못·암문지(暗門址)·우물터 등이 남아 있다.

특히, 주사암은 신라 의상(義湘)의 창건이라고 전하는데, 이 절터 바로 북쪽에 지맥석(持麥石)이라고 불리는 큰 반석이 있다. 이 반석은 1백여 명이 앉을 수 있는 크기이며, 신라의 명장 김유신(金庾信)이 술을 빚기 위하여 보리를 두고 술을 공급하여 군사들을 대접하던 곳이라 하여 지맥석이 되었다고 전하고 있다. 또 부산성은 효소왕(孝昭王) 때의 향가인 모죽지랑가(慕竹旨郞歌)와 관련된 곳으로 전하고 있다.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誌)에서는 이 성을 부산성(夫山城)이라 하고 둘레가 2,765보 3척이라하고 군창이 있었다고 하므로 조선 시대 초기에도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여 경영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관문성,
종    목 사적  제48호
명     칭 관문성(關門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892,014㎡
지 정 일 1963.01.21
소 재 지 경북 경주시  외동읍 모화리 산122,울산 북구 달천동,중산동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경주시
관 리 자 경주시, 울산시
일반설명 | 전문설명
왜적의 침입으로부터 경주를 보호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 21년(722)에 쌓은 산성이다.

원래 이름은 모벌군성·모벌관문이었는데, 조선시대에 관문성으로 부르게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우박천이라는 냇물을 사이에 두고 동해를 향하여 쌓았으며, 673년에 쌓은 북형산성과 함께 경주의 동쪽을 지키는데 큰 역할을 했다.

관문성은 경주의 다른 산성들과 다르게 산과 산을 연결하며 길게 쌓은 특수한 방식의 산성으로, 그 규모가 12㎞에 달해 신라의 만리장성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성 안에는 성문자리로 보이는 곳과 창고자리·건물자리 등이 군데군데 남아 있다.

잘 다듬은 돌과 자연석을 이용하여 쌓은 산성으로, 경주의 남산성과 비교해볼 때 성쌓기 방식에서 훨씬 발달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대덕산성,
종    목 시도기념물 
제7호 (남구)
명     칭 대덕산성(大德山城)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곽
수량/면적 일원
지 정 일 1988.05.30
소 재 지 대구 남구  대명동 산224, 226, 227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대구시
관 리 자 남구
상 세 문 의 대구광역시 남구 문화공보실 053-664-2171
일반설명 | 전문설명
해발 580m의 대덕산 북쪽 정상(頂上)에서 북쪽의 안지랭이 계곡을 포함하여 포곡식(包谷式)으로 축조된 산성으로 앞산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옛 기록에는 성불산(成佛山)의 옛성이 수성현(壽城縣)에 있었으나 없어졌다고 하였는데, 지금은 산의 능선(稜線)과 접근이 용이한 비탈에 할석(割石)으로 쌓은 자취만 남아 있다. 둘레가 3,051척(尺)이라 기록되어 있는데, 그 범위는 약 3km에 달한다. 자연 암벽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전형적인 산성으로 성안 곳곳에서 발견되는 옛 그릇조각과 기와 조각으로 보아 통일신라(統一新羅)에서 고려시대(高麗時代)에 걸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무진고성지,
종    목 시도기념물 
제14호 (북구)
명     칭 무진고성지(武珍古城址)
분     류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성/ 성지
수량/면적 일원
지 정 일 1989.03.20
소 재 지 광주 북구  북구 두암동 산136외, 동구 지산동.산수동 일원
시     대 통일신라
소 유 자 사유
관 리 자 북구
상 세 문 의 광주광역시 북구 문화정보실 062-510-1225
일반설명 | 전문설명
이성터는 북쪽 지맥인 장원봉(壯元峰:386m)을 중심으로 잣고개의 장대봉(壯臺峰:350m)과 제4수원지 안쪽의 산능선을 따라 남북장축 1,000여m, 동서단축 500m, 둘레 3,500여m의 타원형으로 축조되어 있다. 성안은 잣고개에서 제4수원지 안쪽 골짜기 속칭 도독골에 해당하며, 이 일대에서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성의 기저부(基底部)는 석축을 하여 전통적인 백제의 축성 양식을 취하였다. 여기에서 관(官), 국성(國城)등의 명문이 있는 기와조각과 서조문(瑞鳥文), 귀면문(鬼面文), 일휘문(日暉文)등의 기와, 그밖에 순청자(純靑磁), 상감청자(象嵌靑磁)등의 자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잣고개 나쪽 윗층 건물지에서 출토된 서조문 숫막새는 독특한 새(鳥)모양이 있어 주목을 끌고 있으며, 암막새에는 도깨비문양이 표현되고 있어 통일신라의 역동적(力動的)힘이 반영되어 있다. 출토유물로 보아 통일신라말에서 고려중기까지 사용된 성터로 추정된다
출처 : 문화재청

 

 

 

 

 

 

<출처;blog.empas.com/okja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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