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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사적 10호 서울성곽-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21. 10:38
9 서울성곽 사적 10호 서울 종로구 조선 태조
 
서울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 조선시대의 도성(都城)이다.

조선건국 초에 태조가 한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위하여 궁궐과 종묘를 먼저 지은 후, 태조 4년(1395) 도성축조도감을 설치하고 한양을 방위하기 위해 성곽을 쌓도록 하였다. 석성과 토성으로 쌓은 성곽에는 4대문과 4소문을 두었다. 4대문은 동의 흥인지문 ·서의 돈의문 ·남의 숭례문 ·북의 숙정문이고, 4소문은 동북의 홍화문 ·동남의 광희문 ·서북의 창의문 ·서남의 소덕문을 말한다. 동대문에만 성문을 이중으로 보호하기 위한 옹성을 쌓았고, 북문인 숙정문은 원래 숙청문이었는데 이 숙청문은 비밀통로인 암문으로 문루(門樓)를 세우지 않았다.

세종 4년(1422)에 대대적으로 고쳤는데, 흙으로 쌓은 부분을 모두 돌로 다시 쌓고 공격 ·방어 시설을 늘렸다. 숙종 30년(1704)에는 정사각형의 돌을 다듬어 벽면이 수직이 되게 쌓았는데 이는 축성기술이 근대화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처럼 서울 성곽은 여러 번에 걸친 수리를 하였으나, 쌓는 방법과 돌의 모양이 각기 달라 쌓은 시기를 구분할 수 있다. 일제시대에는 도시계획이라는 구실로 성문과 성벽을 무너뜨렸고, 해방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더욱 많이 파괴되었다.

현재 삼청동 ·장충동 일대의 성벽 일부와 남대문 ·동대문 ·동북문 ·홍예문만이 남아있다. 서울 성곽은 조선시대 성 쌓는 기술의 변화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며, 조상들이 나라를 지키려는 호국정신이 깃든 귀중한 문화유산이다.


 

 

관련 자료 

http://blog.chosun.com/blog.log.view.screen?
 

국민 품으로 돌아온 북악산 서울 성곽

▲ 서울의 북문인 숙정문

 

1395년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계획하고 한양에 종묘사직을 건립한 이래 북악산(백악산이라고도 함)은 군부통치 시대를 거치며 40여년 동안 일반인에게는 닫혀 있었다. 1993년 2월 문민정부가 출범하면서 인왕산을 개방한 것에 이어 지난달 5일 식목일을 맞아 북악산이 전면 개방되었다.

 

북악산 개방 한달을 맞아 서울의 북대문인 숙정문과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둘러보았다. 둘러보면서 찍은 사진들을 소개한다.

 

▲ 북악산 서울 성곽 탐방 안내도


서울 성곽 탐방로의 한곳인 말바위 쉼터 집결장소에서 예약과 신원확인 절차를 거친 후 숙정문으로 향했다.
숙정문은 서울 성곽의 북대문으로 남대문인 숭례문과 대비하여 ‘엄숙하게 다스린다’는 뜻으로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숙정문은 성곽 동서남북에 사대문의 격식을 갖추고 비상시에 사용할 목적으로 지어져 문루가 없이 무지개 모양의 석문(월문)만 남아 있었는데 1976년 북악산 일대의 서울 성곽을 보수하면서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했다.

 

숙정문을 지나면 높이 13m의 촛대바위가 있다. 촛대바위 위의 지석은 1920년대 일제 강점기에 민족정기 말살정책의 일환으로 쇠말뚝을 박았던 곳이라 한다. 북악산 완전개방 전까지는 촛대바위까지만 관람할 수 있었다.

 

▲ 촛대바위 모습. 바위위의 지석도 보인다.


서울 성곽은 태조가 수도 서울의 방어와 도성의 안팎을 구분하기 위해 정도전의 도성축조 계획에 따라 축조했다. 서울의 4대산인 북악산, 낙산, 남산, 인왕산을 잇는 18.2km로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현재의 성곽은 1704년 숙종 때 이루어진 것으로 이후 전차부설 등의 이유로 철거되어 10.5.km만 남아있다. 소실된 8km는 복원하여 유네스코에 등재할 계획이라고 한다.

 

▲ 북악산의 서울 성곽. 굽어서 곡장이라고 한다.

 

▲ 화강암으로 이루어진 서울 성곽의 모습

 

성곽은 지붕 모양의 옥계정, 중간부분인 차고, 원충안 2개와 근충안 1개의 구멍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곽의 밑부분이 ㄱ과 ㄴ자 형태로 짜임새 있게 축조된 것이나 멀고 가까운 곳의 발포에 맞게 구멍의 안쪽 구조를 다르게 한 것, 축조 책임자의 이름 등을 새겨넣은 것 등에서 조상들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 성루와 공사책임자를 알리는 문구


산의 정상에 오르기 전 눈에 띠는 소나무가 한그루 있다. 1968년 1월21일 김신조 일행의 청와대 기습으로 총격전이 벌어진 역사의 현장에 자리한 소나무가 그것.

 

북한 민족보위성 정찰국 소속 게릴라 31명이 박정희 전 대통령 암살 임무를 띠고 남파되어 청와대 기습을 노렸고 성곽을 넘어선 이들은 소나무를 중심으로 우리 군경과 최대 격전을 벌였다. 소나무는 당시 총탄 세례를 받아 15발의 자국이 남아있는데 성곽 복원 과정에서 ‘1.21사태 소나무’라고 이름하였으나 이전에는 ‘잊지말자’는 표석이 자리하고 있었다.

 

▲ 1.21 사태 소나무


서울의 주산인 북악산은 또다른 이름 백악산으로도 불린다. 높이 324m로 내사산 중 가장 높으며 멀리 경복궁, 세종로, 남산, 관악산, 인왕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 북악산 정상에서 본 서울시내(황사로 인해 희미하게 보인다)

 

서울 성곽을 둘러보는 중에 삼청각,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 흥선대원군의 별장이었던 석파정 등을 원거리에서 볼 수 있다.

 

▲ 북악스카이웨이의 팔각정이 보인다. 아래는 촛대바위.


서울의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에 위치한 북소문에 해당하는 창의문은 계곡의 이름을 빌어 자하문이라는 별칭으로 불린다. 창의문은 사소문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성문의 무지개 모양 월단 맨 위에 봉황 한쌍이 새겨져 있다.

 

속설에 이것은 창의문 밖의 지네형상 지형을 누르기 위해 지네의 천적인 닭을 새겨 넣은 것이라 한다. 빗물이 잘 흘러내리도록 문루 바깥쪽에 설치한 한쌍의 누혈 장식은 연잎 모양으로 조각되어 있다.

 

▲ 창의문 월단에 새겨진 봉황(?).

 

▲ 창의문 문루 바깥쪽에 있는 연잎 모양의 누혈.


북악산의 서울성곽 탐방로는 크게 세 곳에서 오를 수 있다. 관람객 집결장소는 말바위, 홍련사, 창의문 쉼터 세곳으로 문화재청 홈페이지(www.ocp.go.kr)와 한국문화재 보호재단 홈페이지(www.fpcp.or.kr.kr)에서 신청하면 된다.

 

관람인원은 세곳에서 매회 150명 내외로 받고 있는데 완전개방 이후 관람객들이 많으므로 사전 예약하는 것이 좋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2시까지 6차례 개방하며 탐방에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창의문 쉼터는 경사가 급하므로 주의를 요하며 군시설물 관련 주의사항을 숙지하면 된다.

 

도깨비뉴스 리포터 최순화 report2@dkbnews.com

 

 

출처 ; 동아일보

입력2007.05.19 03:01

 

[문화칼럼/김봉렬]서울시 ‘한양 역사구’

 


1970년대의 밤은 끔찍한 추억이다. 야간통행금지 때문에 선량한 시민도 자정에 거리에 나오면 범죄자가 됐다. 자정부터 오전 4시까지 온 국민이 국가권력에 소중한 시간을 반납해야 했다. 통금은 너무도 당연한 규율이었다. 용감한 반정부인사들도 통금 해제는 주장하지 않았다.
 

시간만 금지된 게 아니었다. 수도 서울에는 금지된 공간이 너무 많았다. 조선 중기의 불행한 왕인 경종의 능(서울 성북구 석관동)은 중앙정보부가 장악했다. 왕릉 출입금지는 물론, 주변 동네에 2층 건물을 올릴 수 없었다. 청와대 뒤 북악산과 옆의 인왕산도 출입금지였다. 중앙정보부나 대통령 집이 보일 우려가 있다는 이유였다.

 

6·25전쟁 때 생긴 야간통금은 30여 년 동안, 1·21청와대습격사건으로 생긴 출입금지는 40년 동안 지속됐다. 참 억울하고 분통 터지는 세월이었다. 잃어버린 것은 금지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뿐이 아니었다.

 

최근 마지막 금지 공간이었던 북악산 서울 성곽이 시민에게 공개됐다. 개방된 성곽을 따라 오르면서 잘 살펴보면 조선조의 창업자들이 왜 이곳에 왕도를 정했는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다. 풍수지리설에 대한 지식이 없다 하더라도 서울의 출중한 지형을 몸으로 느낄 수 있다. 산과 산이 이어지면서 자연스러운 경계를 만들고, 크고 작은 계곡에는 맑은 물이 흐르고, 그 안에 포근히 파묻힌 평지에 시가(市街)가 들어섰다.

 

지금의 서울은 공해와 소음으로 찌든 데다 고층건물이 역사적 경관을 훼손하고 있지만, 워낙 뛰어난 자연 환경이 인공적 결점을 감싸 준다. 특히 북악산 줄기를 등지고 앉은 경복궁이나 매봉에서 흘러온 지형에 묻힌 창덕궁과 종묘의 모습을 보면, 뛰어난 자연을 충분히 이용하면서 아름다운 도시를 창조한 선조들께 감사를 드리게 된다. 성곽 길 개방은 잊고 지냈던 ‘한양’이라는 옛 도시의 기억을 되살려 놓았다. 잃어버렸던 서울의 역사도 다시 찾아주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얘기한 서울은 산 위에서 내려다본 반경 1km에 불과하다. 시내로 내려오면 역사 도시 서울은 오간 데 없다. 자본의 논리와 부동산 가치에만 충실한 신자유주의 도시의 오만함과 어리석음만 가득하다. 덕수궁은 3분의 2가 잘려 나가 초라한 도시 공원이 됐고, 경희궁은 아예 사라져 버렸다. 해악의 뿌리야 일제의 식민도시 정책에 있었지만, 광복 후 정부와 시민에 의한 훼손도 적지 않았다. 강북 곳곳의 한옥촌을 철거해 아파트지구로 재개발했고, 북촌 한옥마을마저 다세대 빌라로 변모시켰다. 정도(定都) 600년 동안 시민들의 애환을 담아 왔던 피맛길마저 최근의 대형 개발로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심지어 종묘 앞 세운상가 재개발지역에 100층 이상의 초고층 건물을 세우자고 서울시나 해당 구청장이 허욕을 부리는 현실이다. 세계적 랜드마크를 세워 관광수입을 올리자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는 바로 앞에 있는 세계문화유산인 종묘의 문화적 역사적 가치를 파괴하자는 선동이다. 종묘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종묘를 둘러싼 도시경관이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가져야 한다. 도시의 역사적 경관이야말로 가장 소중한 문화유산이요, 관광자원이다.

 

성곽의 개방과 복원은 도시의 희미한 경계를 되찾은 것에 불과하다. 이제는 성곽으로 둘러싸인 진짜 도시,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일상의 도시를 되찾을 때다. 차제에 서울 성곽 안쪽 지역을 ‘한양 역사구’로 지정하면 어떨까? 개발보다 보존의 가치를 우선으로 여기는, 초고층 빌딩이 없는 저층 고밀도 지역으로, 보행자를 위해 차량이 양보하는 기품 가득한 구도심으로 이 특별구를 회복하면 좋겠다. 서울시 당국자들이 애타게 추구하는 도심 활성화에 이르는 지름길이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김봉렬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건축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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