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구약(창세기)인물-10] ▒
[구약인물열전1]인류의 시조 아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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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조회수 : 7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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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이라는 이름은 '사람'이라는 뜻이다. 인류의 시조를 아담이라 부른 것은 흙(아다마)으로 창조되었고 마지막에는 "흙으로 돌아갈 것"(창3:19)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지상의 모든 생물이나 식물이나 동물과 마찬가지로 대지에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간다. 아담의 자손인 사람은 그 육체적인 구조나 그 자라고 발전하는 역사나 그 미래의 가능성 등 전부를 포함하여 대지에서 자연에 즈음하여 삶을 이어가는 작은 생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사람은 자연을 초월하는 위대한 존재이다. "사람을 하나님보다 조금 못하게 하시고, 영화와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시 8:5) 사람이 존귀한 존재인 것은 "하나님의 형상"(Imago Dei)으로 시조 아담이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히브리인은 헬라인과는 달리 사람을 육체와 영혼으로 가르지 않는다. 따라서 아담은 육체적인 측면에서도 '하나님의 형상'이었다는 것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담과 그의 후손인 인류는 정신적 측면에서 보다 더 '하나님의 형상'으로 본다. 즉, "지혜가 충족하며 온전히 아름다운" 존재(겔 28:12), "선과 악을 분간하는" 존재(삼하 14:17), "선한" 존재(삼하 29:9)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아담은 허물과 티가 없는 깨끗한 사람이었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벌거벗고 살았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다.(창 2:25) 아담이 범죄한 이후 사람은 죄에 빠져 허례허식의 생활을 하게 되었다. 벌거벗은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하여 옷으로 몸을 꾸미게 되었고 추악한 마음을 숨기기 위하여 아첨하는 말을 하며 얼굴에 가면을 쓰게 되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가운데 고귀한 인격을 가질 수 있게 되고, 고상한 인격에는 영광의 모습이 나타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되찾으며, 죄와 허물을 버리고 원래 모습인 벌거숭이로 돌아가게 된다. ■ 하나님의 생기 땅의 흙으로 아담(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은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되었다"(창2:7). 사람이 여느 생물과 결정적으로 다른 것은 바로 이 점에 있다. 이것이 하나님과 관계를 가지는 주체적인 존재의 독자성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질그릇처럼 지으시고, 그 코에 생기를 불어넣은 존재이다. 이것이 사람에 관한 성경의 첫 마디 선언이다. 그리고 성경 전체의 주제는 에덴 동산에서 시작되는 사람의 운명에 관한 추구이다.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의미는 무엇인가. 첫째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은 군주이든 노예이든 그리고 문화인이든 야만인이든 하나님의 피조물로서, 아무런 차별이 없다는 것, 따라서 인류는 모두 평등하다는 인권 선언이다. 둘째로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의 형상(image)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만큼 사람은 하나님과 깊은 '관계'를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즉, 사람은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를 듣고, 그 말씀에 '응답하는 존재'며 '책임 있는 주체'로 창조되었다. 셋째로 사람(아담)은 모든 만물을 다스리며 돌보는 관리인(청지기)으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창 1:28) 넷째로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에게 일하는 즐거움을 주셨다. 생명이 넘치는 곳에는 일하며 활동하는 것이 기쁨이며 즐거움이다 사람이 일하는 것은 원래 자유였고 자연스러움이었다. 그것이 수고로움과 고통이 된 것은 사람이 타락하고 만 이후부터였다.(창 3:17~19) 하나님을 떠난 인간의 활동은 한갓 율법적이며 의무적인 것이 되어, 단지 살아가기 위한 수고로운 노동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경륜의 수레바퀴에 연결하여 하나님 나라를 이룩할 수 있도록 일하게 해주신다. 첫 사람이 잃었던 노동의 기쁨은 그 가운데서 회복된다. ■ "너는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하나님은 우주 만물의 창조 사역의 마무리로 사람을 지으시고 기뻐하셨다.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1)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이 범죄하므로 낙원(에덴동산)에 크나큰 변동이 생기게 되었다. 죄악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모든 것을 저주한다. 첫째로 죄는 사람의 영혼을 죽였다. 첫 사람 아담은 하나님이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 비록 아담의 육체는 그 즉시 죽지는 않았지만,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서 떠난 첫 사람의 영혼은 죽었다. 아담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교제하는 기쁨을 누릴 수 없게 되었다. 첫 사람의 후손들은 죄로 말미암아 죽은 자가 되어, 사탄의 종으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둘째로 죄는 사람의 육신을 죽였다. 원래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누릴 수 있는 존재였다. 항상 신선함을 더해주는 생명의 힘에 떠받쳐져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을 찬미하며 영생했을 것이다. 그러나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 네가 그것에서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셋째로 죄는 자연계에 상처를 주었다. 첫 사람이 범죄한 결과 자연계의 아름다운 조화는 깨졌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롬 8:22) 대자연은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심으로 낙원이 회복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롬 8:18) 넷째로 죄는 인류에게 멸망을 주었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롬 5:12) 그러나 우리는 첫 사람 아담을 탓할 수 없다. 그 후손인 우리는 아담의 범죄 이후에도 계속하여 범죄하는 약한 존재이다. 첫 사람 아담은 인류의 대표자일 뿐이다. ■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 첫 사람 아담의 범죄때문에 그의 후손인 인류는 모두 죽을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나 범죄한 아담의 후손인 우리에게 속죄와 구원이 있다는 복음의 진리가 있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고,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죽음이 세상에 들어왔으며,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음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이 은혜를 베푸실 때에 생긴 일은 아담 한 사람으로 범죄했을 때에 생긴 일과 같지 않다. 아담 한 사람의 범죄로 많은 사람이 죽었으나, 하나님의 은혜와 예수 그리스도 한 사람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더욱 넘치게 되었다. 아담의 범죄에는 심판이 따라왔으나, 그 후손의 많은 범죄에서는 그리스도의 은혜가 뒤따라 무죄 선고가 내려지게 되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롬 5:20) 첫 사람 아담으로 말미암아 죽음이 온 세상에 넘치게 되었으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더욱 큰 은혜와 영원한 생명이 넘치게 되었다. 죄와 죽음은 유전의 법칙에 따라 아담의 혈통에 이어진 사람에게 미치게 되며,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도 거듭나서 그리스도에게 이어지는 사람에게만 미치게 된다. "첫 사람 아담은 생령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나니, 그러나 먼저는 신령한 사람이 아니요 육의 사람이요 그 다음에 신령한 사람이니라. 첫 사람은 땅에서 났으니 흙에 속한 자이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에서 나셨느니라"(고전 15:45~47) 첫 사람 아담은 에덴동산의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자기의 만족을 구하였으며, 그 결과 온 인류에게 죽음의 멸망이 이르게 되었다. 마지막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는 골고다에 세워진 나무에 매달려 자기를 희생하셨으며 그 결과 온 인류에게 영생의 은혜가 넘치게 되었다. 범죄하고 숨어있는 아담을 찾으신 하나님은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며 우리를 찾으신다. 김 희 보 / 서울장신 명예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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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7월 17일 09:34:45 / 수정 : 2008년 07월 17일 09:58:05 |
[구약인물열전 2] 사람의 배필 하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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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조회수 : 8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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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첫 사람 아담은 처음에 고독한 존재였다. 때문에 하나님은 여성을 창조하여 서로 사랑하고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도록 작정하셨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르시되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배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 2:18) 창조주 하나님의 피조물인 우주 만물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다. 모든 것이 서로 조화를 이루며 역사를 형성하는 것이 그 본질이다. 만물이 조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서로 사랑하는 대상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초월자이시며 창조주이신 하나님은 무한한 존재이기 때문에 유한한 피조물을 사랑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으시다. 피조물인 유한자는 유한자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피조물이며 유한한 존재인 인간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방법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경외심"으로 나타나게 된다. 과학적인 입장에서만 본다면 사람은 하나의 물질 곧 땅의 '흙'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의 몸뚱이도 짐승들의 몸뚱이도 그리고 무생물까지도 결국 같은 물질에 지나지 않는다. 사람이 여느 동물들과 구별되게 하고 존귀하게 하는 것은 하나님의 생기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땅의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를 그 코에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이 된지라"(창 2:7). 생기(날숨)는 '영혼'이라는 뜻이기도 하다. 영혼이 없을 때 사람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라 땅의 흙이 되고 만다. 인간의 본질은 물질이 아닌 영혼에 있다. 인간은 무엇인가 하는 문제는 과학을 초월한 차원에서 해답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인격'의 존엄성은 물질 내지 과학을 초월한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또한 사람에게는 더불어 살아가는 사람 곧 돕는 협력자가 필요하다. "사람이 혼자 사는 것이 좋지 아니하니". 이 구절은 사람은 혼자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존재라는 점을 말하고 있다. 인간 사회를 깊이 생각해 볼 때 사회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관계는 1대 1로 남자와 여자가 인격적으로 만나는 관계이다. ■ 아담의 갈빗대 하나 아담(사람)이 혼자 사는 것을 좋치 않게 여기신 하나님은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아담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은 아담의 갈빗대 하나를 뽑고 그 자리는 살로 메우셨다. 그리고 아담의 갈빗대 하나로 여자를 만드신 하나님은 그 여자를 아담에게로 이끌어 오셨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 이것을 남자에게서 취하였은즉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창 2:23). 구약을 기록한 히브리어로 남자 또는 남편을 가리켜 이시(ish)라 하고, 여자 또는 아내를 가리켜 잇샤(ishsha)라 한다. 즉 '이시(남자)'라는 말에서 '잇샤(여자)'라는 말이 생겨났다. 이것은 남자만이거나 또는 여자만으로는 사람으로서 불완전한 미완성품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 아담과 하와가 부부로 맺어진 것은 가장 이상적인 결혼이었다. 이상적인 결혼은 하나님의 주례에서 비롯된다. 오늘날에도 두 남녀가 결혼하게 될 때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우선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셨다. 현대인은 결혼 문제에서 너무 눈을 부릅뜨는 감이 든다. 결혼 대상자의 기준은 용모와 재산과 학벌과 가문인 것 같다. 이런 가치관 때문에 자기와 배필의 일생을 망치게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는 일이 너무나 많다. 자기 일생과 자기 배필을 하나님께 맡기고 깊이 잠드는 청춘 남녀는 인생이 행복해진다.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인 아담의 육신과 영혼의 반쪽인 배필 하와는 아담이 깊이 잠든 사이에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하와는 아담의 분신이었고 그 반쪽이었다. 하나님께서 굳이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신 것은 서로 지키고 감싸며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아담의 갈빗대로 하와를 만드신 하나님의 창조 사역에 관해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아담의 두개골로 하와를 창조하셨다면 여자의 지위가 너무 존귀해지고, 다리뼈로 창조하셨다면 너무 천한 존재가 된다. 남자의 갈빗대로 여자를 창조하신 것은 남녀가 평등하다는 뜻이다". ■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아담과 그의 아내 두 사람이 벌거 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니라"(창 2:24~25). 부끄러움은 원래 죄와 상관 관계에 있는 것으로서, 이를테면 죄의 외면적 표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에덴 낙원에 사는 아담과 하와는 아직 죄를 알지 못한다. 따라서 그들에게는 당연히 부끄럽다는 생각이 생겨나지 않았다. 에덴 낙원에서 행복하게 사는 인류의 시조 아담과 하와에게 유혹이 닥치게 되었다. 하나님이 지으신 들짐승 중에 가장 간교한 뱀이 여자를 유혹하였다. 성경에는 뱀을 악마와 사탄과 용으로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 많다.(계 20:2 등). 에덴 동산에 있는 과일나무들은 모두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였다. 아담과 하와는 그 모든 나무의 열매를 따 먹을 수 있었다. 하나님은 그 중의 단 한 나무,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 열매"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말씀하셨다. 비록 하나님께서 금지하셨으나 인간에게는 그것을 따 먹을 수 있는 자유가 주어졌다. 여느 동물은 본능에 따라서만 살게 마련이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훈계를 들을 수 있으며, 그 훈계에 순종하는 자유와 아울러 거역하는 자유도 가지고 있다. 유혹자 뱀은 여자에게 금지된 그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너희 눈이 밝아져 하나님과같이 되리라"고 하였다. 피조물인 인간이 흡사 창조주가 된 듯이 지상의 절대자로서 우쭐거리는 반역적인 행위, 곧 반신적(反神的) 허무주의자가 되라고 부추겼다. 여자는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의 열매를 따먹고 아담에게도 주었다. "도둑질한 물이 달고 몰래 먹는 떡이 맛이 있다"(잠 9:17). 금지된 열매를 따먹은 결과 "그들의 눈이 밝아져" 벗은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여 무화과나무 잎으로 치마를 삼았다. 즉, "눈이 밝아져 악한 세계의 쾌락을 알게 된 아담과 하와는 티없는 순진함을 잃어버리게 되었다. ■ "모든 산 자의 어머니" 아담과 하와는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을 거니시는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었다. 하나님이 두려워졌기 때문이다. 인간은 존재의 밑바닥에 두려움과 불안이 있다. 그것은 죄의식에서 비롯되었다.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하나님에게서 떠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하나님의 심판과 진노의 소리로만 듣게 마련이다. '나'는 과연 어디 있는가. 하나님의 낯을 피한 사람이 어디서 자기 실존의 근거를 찾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신다. 이어 하나님의 문책과 아담의 변명이 시작되었다. 아담의 변명은 종잡을 수 없으며, 하나님에게까지 책임을 떠넘기려 하는 남자의 비겁한 이기주의로 일관되어 있다. 아담은 자기 아내를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라 부르고 있다. 죄는 무엇인가. 가장 근원적인 점은 하나님을 제껴버리고 인간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자기 자신이 모든 것을 결정하려 하는 삶의 태도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자기 중심에서 생겨나게 되는 결과로서의 이기주의 곧 사랑이 빠져버리고 만 상태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범죄한 인류의 조상을 버리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여자(하와)의 후손은 네(뱀 ^ 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라고 이른바 '원초(原初) 복음'을 선언하셨다. 하와의 후손에서 구주가 탄생하실 것을 약속하신 것이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은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 옷을 지어 입히시니라"(창 3:21)는 구절에도 나타나 있다. 그리고 에덴 동산에 생명 나무가 남아 있다는 기사에도 나타나 있다. 이 생명 나무에 다가가 우리에게 생명을 회복시켜 주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다. "아담이 그의 아내의 이름을 하와(생명)라 불렀으니 그는 모든 산 자의 어머니가 됨이더라"(창 3:20). 김 희 보 <서울장신 명예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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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7월 17일 09:45:55 / 수정 : 2008년 07월 17일 09:58:54 |
[구약인물열전3] 죄악의 아들 가인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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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조회수 : 10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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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과 하와는 범죄하여 에덴 낙원에서 쫓겨난 후 두 아들을 낳았다. 하와는 "임신하는 고통을 크게 더하리니 네가 수고하고 자식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선고를 들은 터였으나, 사랑의 하나님이 첫 아들을 주시자 "내가 여호와로 말미암아 득남하였다"(창 4:1)고 하며 기뻐하였다. 맏아들의 이름 가인은 '얻음, 창, 대장장이'라는 뜻이다. 그 아우의 이름 아벨은 '날숨, 무사함'이라는 뜻이다. 아벨이라는 이름은 젊은 나이에 형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마는 인물의 불행한 생애를 예고해 주는 듯한 이름이다. 가인은 농사하는 사람이 되었고, 아벨은 양 치는 목자가 되었다. 세월이 지나 두 형제는 각각 하나님 앞에 제물을 바쳤다. 농사를 짓는 가인은 당연히 땅에서 얻은 첫 소산물을 제물로 드렸고, 아벨은 들에서 친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하나님께 드렸다. 하나님은 아벨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의 제물은 받기를 거부하셨다. "가인이 그의 아우에게 (우리가 들로 나가자) 말하고, 그들이 들에 있을 때에 가인이 그의 아우 아벨을 쳐죽이니라"(창 4:8). 이 끔찍한 살인 사건은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 관계는 사회 구성의 기본이 되는 가족 관계에서 이미 비극적인 파멸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또한 원죄를 지니고 태어난 인간은 혈연으로 대표되는 자연 관계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다는 사실을 말해주기도 한다. 이 살인 사건은 사람이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여자의 후손"은 언제 이 세상에 오시는가. 구약 시대를 통하여 인간은 어디까지나 피조물이며, 절대로 죄가 없는 완전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종의 형상으로 이 세상에 오시게 된다. 성경 처음 부분에 형이 아우를 죽이는 사건이 기록된 것을 보고 우리는 충격을 느낀다. 이 사건에 의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창 1:28)는 하나님의 축복은 인간 자신의 손에 찢겨 버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물 "여호와께서 아벨과 그의 제물은 받으셨으나, 가인과 그의 제물은 받지 아니하신지라"(창 4:4~5). 이 원인에 관하여 성경은 아무 설명도 하지 않는다. 이 부분에 관하여 많은 연구자들이 여러 가지 견해를 주장하고 있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은 4장 5(하)~7절에 근거한 주장이다. "가인이 몹시 분하여 안색이 변하니, 여호와께서 가인에게 이르시되 네가 분하여 함이 어찌 됨이며 안색이 변함은 어찌 됨이냐.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러져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제물의 종류거나 그 양의 많고 적음에 따르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사는 제물이 아니라 하나님께 예배하는 사람의 정성이며 상한 마음이다.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시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하심이라"(히 11:4). 가인은 단지 자기의 땅에서 농사지어 얻은 소산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쳤다. 그의 마음눈에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무엇이며, 자기가 원죄의 아들이라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아벨은 믿음의 눈으로 자기가 원죄의 아들이며, 하나님께 양의 첫 새끼와 아울러 생명을 바쳐야 한다는 것을 알고 양의 기름을 태워 하나님께 번제를 드렸다. 그러나 이 기사의 주제는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물만 받으셨는가 하는 점에 있지 않다. 그보다는 가인이 왜 범죄하게 되었는가 하는 문제에 주제가 있다. 즉, 하나님의 예정과 섭리 문제가 다루어지고 있다. 아벨의 제물만 받으시고 가인의 제물을 거절하신 것은 하나님의 불공평한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 의지와 주권에 따른 선택이다. 요컨대 선택을 인간의 논리로 다룬다면 인간의 교만이 되고 만다. 하나님의 예정은 믿음이 있는 사람만 이해할 수 있는 진리이다. 우리는 오직 은혜에 의해 선택되었음을 믿고 있는 것이다. ■ "아벨이 어디 있느냐" 가인은 마땅히 정성이 담긴 다른 제물을 하나님께 드렸어야 했다. 끝내 억울한 마음을 누를 길이 없었다면, 자기 제물을 받아 달라고 하소연이라도 했어야 했다. 그러나 가인은 그 분풀이의 창끝을 착한 아우 아벨에게 향하여 그를 죽이고 말았다. 하나님의 일방적인 선택과 예정에 대하여 사람은 어떤 태도로 응답해야 할 것인가. 가인은 자기의 제물이 거부되었어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모든 것을 맡기며 하나님께 매달려야 했었다. 바로 그것 자체가 은혜이며 선택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인은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거부하였다. 가인이 믿은 하나님은 제물만 바치면 복을 내려주는 기복 신앙의 대상인 하나님이었다. 기복 신앙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당장 응답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을 거부하고 하나님을 미워하게 되는 "모래 위에 세운 집"과 같은 것이다. 가인은 그의 아우 아벨을 들에서 쳐죽였다. 범행 장소가 들이기 때문에 목격자는 물론 없었다. 살인 현장에는 아무 증거물도 없다고 생각하는 뻔뻔스러운 가인에게 갑자기 하늘에서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다.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창 4:9). 알찍이 가인의 아버지 아담이 금지된 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때 하나님은 아담을 부르시며 "네가 어디 있느냐"고 물으셨다. 가인에게 "네 아우 아벨이 어디 있느냐"하는 물음도 같은 성질의 것이다. 그러나 죄악의 내용을 따진다면 가인의 경우가 훨씬 질이 나쁘다. 하나님의 물음에 대해 가인은 "내가 알지 못하나이다.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니이까"라고 뻔뻔스럽게 대답하였다. 하나님은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고 가인을 탓하셨다. 원래 피는 생명의 자리이며 하나님의 소유로 돌아가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피가 흘려졌을 경우 그것은 거룩한 것이기 때문에 흙으로 덮어야 한다(레 17:13~14). 그러나 죄 없이 살해된 사람의 피가 흙으로 덮여지지 않을 경우 그 피 자체가 하늘에 닿을 정도로 크게 탄식하며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이 성경의 사상이다. ■ 에덴의 동쪽 마침내 하나님은 가인에 대해 심판의 판결을 내리셨다. "너는 땅에서 피하며 유리하는 자가 되리라"(창 4:12). 즉, 땅을 피로 더럽힌 자는 영원히 땅을 갈아야 하며 땅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권리를 잃고 말게 된다. 사람의 피로 적셔진 땅은 더 이상 수확을 하게 하지 않고, 그곳은 황폐한 불모지가 되고 말기 때문이다. 가인은 하나님께 "내 죄짐을 지기가 너무 무거우니이다"라고 하며,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창 4:13~14)고 하소연하였다. 가인의 발언에는 자기 자신의 죄의식은 터럭만큼도 없고, 단지 자기 신변이 안전하기만 바라고 있다. 가인이 죽기를 두려워하는 것으로 미루어 이 세상에 아담족 이외의 다른 인간이 존재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사랑의 하나님은 이 뻔뻔스럽고 흉악하기 그지없는 살인자 가인에게 자비의 손길을 펴셨다. "그렇지 아니하다. 가인을 죽이는 자는 벌을 칠 배나 받으리라"(창 4:15)하시며, 가인에게 보호의 표를 주셨다. 그 표로 해서 가인은 모든 사람에게서 죽임을 면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께서 가인에게 땅에서 피하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되리라고 선고하시는 한편, 가인에게 생명을 보존할 수 있는 표를 주신 것은 무슨 뜻인가. 그것은 인생의 실패와 재기의 문제인 동시에 하나님의 형벌과 그 목적 이해의 문제이기도 하다. 죄에 당연히 따르게 되는 형벌은 속량인 동시에 죄인으로 하여금 새로 거듭나게 하기 위한 것이다. 가인이 여호와 앞을 떠나서 에덴의 동쪽 놋 땅에서 살게 되었다. '떠돌이'라는 뜻인 놋이 어디인지 그 지리적 위치가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아마도 죄를 지은 사람이 고독하게 방랑하며 살아야 하는 곳이었을 것이다. 사랑의 하나님은 가인과 같은 죄인이라도 버리지 않고 보호하신다. 가인의 후예인 우리는 인도자와의 만남을 통해 에덴을 목적지로 삼고 놋 땅을 떠날 때 새로운 인생의 새벽을 맞게 된다. 김 희 보 <서울장신 명예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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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7월 17일 10:01:51 / 수정 : 2008년 07월 17일 10:25:29 |
[구약인물열전4]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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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조회수 : 25]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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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에는 '새로 온 사람'이라는 뜻인 에녹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두 명 등장한다. 한 명은 가인의 아들 에녹이며, 다른 한 명은 아담이 아벨 대신 얻은 셋의 후손인 에녹이다. 이 두 명의 에녹을 통해 죄의 후손은 반역자로 대가 이어지고, 의의 후손은 신앙인으로 대가 이어지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인자 가인은 에덴의 동쪽 놋 땅에 살며 에녹을 낳았다. 일찍이 하나님께 "무릇 나를 만나는 자마다 나를 죽이겠나이다"라고 호소하였던 가인은 여전히 불안감에 사로잡혀 성을 쌓았다. 성을 쌓아 최초의 도시 문명을 이룩한 가인은 그 성을 에녹이라 이름지었다. 살인자 가인의 혈통에는 죄의 유전자가 떠나지 않았다. 가인의 아들 에녹의 증손자 라멕은 세상 사람들이 영웅으로 우러러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두 아내를 맞이했으니 하나의 이름은 아다요 하나의 이름은 씰라였더라"(창 4:19). 라멕에 의해 일부일처제는 무너지고 일부다처제가 시작되었다. 라멕이 아다와 씰라에게서 얻은 세 아들도 세상에서 영웅으로 그 이름이 알려졌다. 맏아들 야발은 "장막에 거주하며 가축을 치는 자" 곧 목축업자의 조상이 되었고, 그의 아우 유발은 "수금과 퉁소를 잡는 모든 자" 곧 음악인의 조상이 되었으며, 씰라의 소생 두발가인은 "구리와 쇠로 여러 가지 기구를 만드는 자" 곧 공업인의 조상이 되었다. 가인의 자손 라멕의 세 아들은 인류 문명의 막을 열었다. 그러나 문명의 발전에 따라 인간의 정신 문화와 도덕은 뒷걸음치게 된다는 것이 문제점이다. 그와 같은 문명의 부정적인 면은 벌써 라멕의 노래(창 4:23~24)에 나타난다. '검의 노래'라고 하는 이 민요에서 라멕은 두발가인이 만든 검으로 자기 비위에 거슬리는 사람은 모조리 죽이겠다고 복수를 다짐하고 있다. 우리는 이 노래를 읽을 때 현대 세계는 도덕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라멕의 시대에서 조금도 진보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느끼게 된다. 아니, 핵무기를 만드는 현대는 오히려 야만 사회로 뒷걸음질치고 있다. ■ "그는 (얼마동안) 살고 죽었더라" 한편 아벨을 대신한 셋의 후손은 일찍부터 하나님을 믿었다. "셋도 에노스를 낳고 그의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셋의 5대손이 에녹이며 7대손이 노아이다.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죽지 않고 하나님에게로 간 에녹에 관한 기록은 단 4개절(창 5:21~24)이다. 영적으로 살았던 에녹에게 세상에 관한 사건은 더 이상 기록할 내용이 없었던 듯하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의 기사가 나오는 창세기 5장에는 아담에서 노아까지 10대에 걸친 족보가 기록되어 있다. 족보의 기록 양식은 예컨대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5:6~8)고 하는 식이다. 즉, "아무개는 아무개를 낳고 그리고 죽었더라"고 하는 단조로운 양식의 기록이 이어지고 있다. 요컨대 아담의 후손은 끝없는 역사의 바다 위에 잠시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물거품과 같이 아무개가 존재했다고만 말하고 있다. 모든 사람의 생애는 어둡고 허무하다. 그러나 그 중에는 캄캄한 밤에 빛나는 샛별과 같이 눈에 번쩍 띄는 인물이 있다. 바로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 에녹이다. 죄악의 자식 가인의 후예들이 날뛰던 무법천지에서 에녹은 삼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다. 에녹이 살던 시대는 날로 인간의 죄악이 더 해지고, 선한 사람은 목소리를 죽이고 살아야 했다. 에녹의 아들 므두셀라가 죽은 해에는 노아의 홍수로 인류가 멸망해야 할 만큼 죄악이 가득한 때였다. 그러나 에녹은 거름 더미 옆에 핀 백합화였고, 구정물이 괸 연못 가운데 핀 연꽃이었다. 세상이 어지러울 때 영웅이 등장하고, 윤리가 땅에 떨어진 때 성자가 나오며, 박해 때 신앙인이 나타난다. 현대는 에녹이 등장할 때이다. ■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에녹은 나면서부터 성자로 출생한 것은 아니었다.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라고 기록된 바와 같이 에녹의 처음 65년 동안의 생애는 평범한 사람이었다. 그는 므두셀라를 낳으면서 삶에 전환을 가져와, 3백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살았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 생활을 말한다. 신앙 생활은 결코 극적인 체험이 아니라, 매일 매일 평범한 일상적인 삶을 반복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는 생활이다. 한국 교회가 일제 시대와 공산주의자의 통치 때 박해를 당하며, 순교하느냐 아니면 믿음을 버리느냐 하는 신앙적인 긴박감이 감도는 상황만 믿음을 가늠하는 것은 아니다. 평범한 일상 생활에서 시간과 돈을 어떻게 쓰며, 어떤 삶을 사는가 하는 태도에 따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신앙 생활이 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이 세상은 배와 호수의 관계와 같다. 배는 뭍에 계속해 머물러 있으면 안 되고 호수로 가야 한다. 호수를 지나가더라도 배 안에 물이 들어오게 하면 안 된다. 가라앉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해서는 이 세상에 살면서, 끊임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말씀에 따라 행동할 수 있도록 숙달된 훈련이 필요하다. 또한 예배와 봉사 생활을 계속하고, 인내심과 지속성을 키우며, 신앙의 기반을 쌓아 가는 일도 중요하다. 하나님과 동행한 에녹의 영적인 눈에는 그 시대가 멸망의 때라는 것이 분명하게 보였다. 그는 세상에 속한 모든 것은 꿈과 같은 것이며, 또한 그림자와 같은 허상일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에녹은 앞으로 하나님의 심판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따라서 이 세상에 터럭만한 미련도 두지 않았을 것이다.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유 14~15). ■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에녹은 이 세상에서 3백 년 동안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늘 나라 시민으로 살다가 하늘 나라에 갔다.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히 11:5). 존 번연의 신앙 소설 '천로역정'의 주인공 '크리스찬'은 온갖 고난을 겪으며, 하늘 나라를 목적지로 하고 순례의 길을 간다. 요단강과 생명강을 건너 크리스찬이 도착한 하늘 나라는 에덴 동산과 같은 낙원이었다. 아름답고 향기로운 꽃들이 피었고, 귀여운 새들이 맑은 소리로 노래하며, 천군천사들이 장엄하게 하나님을 찬양하는 곳이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에녹과 같이 이 세상에서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세상 끝날에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소망하고 있다. 에녹 이후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대 신앙의 선진들은 한결 같이 "하나님이 데려가시기"를 애타게 소망하였다. 그러나 그것은 주 예수께서 재림하실 때 택하신 성도들에게만 주어지는 크나큰 특권이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히 11:13~14). 우리는 비록 에녹처럼 육신을 입은 채 "하나님이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고 되지 못하더라도 주 예수와 더불어 동행하는 성도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다. 천국은 이미 이 세상에 임하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히 11:15~16) 김 희 보 목사ㆍ서울장신 명예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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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7월 23일 12:16:05 / 수정 : 2008년 07월 23일 15:08:34 |
[구약인물열전5] 방주를 만든 노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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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기독공보 webmaster@kidokongbo.com [조회수 : 1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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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에 관한 기사(창 6~9장)에는 하나님의 진노하심과 그보다 더 큰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다. 땅에 포악함이 가득하므로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땅과 함께 멸하리라"(창 6:13)고 말씀하셨다. 천지를 창조하신 후 "하나님이 지으신 그 모든 것을 보시니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창 1:30)와는 대조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내가 다시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땅을 저주하지 아니하리라"(창 8:21)고 다짐하신다. 인류의 시조 아담이 범죄한 후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하였다. 하나님은 지면에서 사람으로부터 비롯하여 모든 생물을 쓸어 버리기로 작정하셨다. 그러나 죄악으로 가득한 세상에 의로운 하나님의 종 한 명이 있었다. "노아는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라. 그는 하나님과 동행하였다"(창 6:9). '탈무드'에 노아의 할아버지 므두셀라는 그의 아버지 에녹의 삶을 본받아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전하였고, 노아는 어릴 때부터 므두셀라를 따라다니며 큰 감화를 받으면서 믿음을 굳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노아가 당대에 완전한 자가 될 수 있던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였다.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8).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은 것이다.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5). 하나님의 은혜는 사람 편에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내려진다. 그것은 마치 우리 주위에 전파가 에워싸고 있다 하더라도 수신기의 설비가 있어야만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은혜는 믿음의 사람만 체험할 수 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히 11:1~2). 노아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이지 않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준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따르는 의의 조상이 되었느니라"(히 11:7). ■ "내가 내 언약을 세우리니"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그대로 따랐다. "너는 고페르 나무로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 그 안에 칸들을 막고 역청을 그 안팎에 칠하라"(창 6:14). 노아의 거주지가 아라랏산 근방이었다면 바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산간 지대이다. 그 곳에서 당시로서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큰 배를 건조한다는 것은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 정상인으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 노아는 하나님께서 명하시는 대로 방주를 건조하였다. 그 방주는 길이가 3백 규빗(135m), 너비가 50 규빗(23m), 높이가 30 규빗(13.5m)이었다. 그리고 "거기에 창을 내되 위에서부터 한 규빗에 내고, 그 문은 옆으로 내고 상 중 하 삼층으로 할지니라"(창 6:16). 그 긴 네모꼴 배의 크기는 대략 1만 6천 톤급의 수송선과 맞먹는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사는 사람의 생애에서 기차의 철로와 같이 두 줄의 궤도를 만드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일과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일은 믿음에서 생겨나게 되고, 살아 있는 믿음은 반드시 절대적인 순종을 통해 나타나게 된다. 노아가 세상 사람들의 비웃음 속에 방주를 지으며 나무를 찍는 도끼 소리는 앞으로 있을 심판을 예고하는 소리였다. "옛 사랑을 용서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의를 전파하는 노아와 그 일곱 식구를 보존하시고 경건하지 아니한 자들의 세상에 홍수를 내리셨으며"(벧후 2:5). 1만 6천 톤급의 크기인 노아의 방주는 그 용량이 최소 4만 톤에서 최고 9만 톤에 이르렀을 것으로 계산되고 있다. 그 안에 7천 종류의 동물과 1년 분의 식량을 보존할 수 있었다. 우리는 방주의 크기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그 큰 방주를 오랜 세월 동안에 걸쳐 믿음과 순종과 인내로 하나님의 말씀을 따른 데 감탄하게 된다. "노아가 그와 같이 하여 하나님이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6:22). ■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 노아의 방주는 마침내 완성되었다. 노아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정결한 짐승은 암수 일곱씩, 부정한 짐승은 암수 둘씩, 그리고 공중의 새는 암수 일곱씩 방주에 데려왔다. 노아의 세 아들과 세 며느리와 노아 내외도 방주에 들어갔다. 하늘에는 구름 한 점 없었고, 맑게 갠 날씨가 칠 일 동안 이어졌다.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서 자기에게 명하신 대로 다 준행하였더라"(창 7:5).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노아가 육백 세 되던 해 둘째 달 곧 그 달 열이렛날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하였다. 방주의 문은 하나님이 친히 닫으셨다.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문들이 열려 폭포 같은 빗줄기가 사십 주야 동안 땅에 계속하여 쏟아졌다. 홍수로 물이 불어나 방주가 땅에서 떠올랐고, 물이 더 많아져 땅에 넘치매 방주가 물 위에 떠다녔다. 계속되는 홍수로 물이 더욱 넘치매 천하의 높은 산들이 잠겼고, 물이 더 불어 십오 규빗이나 오르니 산봉우리가 모두 물에 잠겨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방주 안에 있는 노아의 여덟 식구는 고요히 기도하면서 비와 바람이 잠잠해지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주에 함께 탄 선택된 새와 짐승들도 때로는 불안해 하면서도, 따분한 가운데 평화와 공존의 생활을 이어가고 있었다. 방주 밖에서 아무리 모진 비바람이 불더라도 하나님이 보호하시는 방주 안은 안온한 평화가 날개 펴고 있었다. "물이 백오십 일을 땅에 넘쳤더라"(창 7:24). 노아의 방주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교회의 그림자이다. 땅 위의 모든 생물을 삼킨 죄악의 큰 물결이 출렁거리는 이 세상 풍파 가운데서 그리스도의 방주인 교회는 의젓하고 초연하게 떠 있다. 원죄의 자손인 사람들의 마음은 예나 이제나 다름이 없다. 노아의 홍수로 상징되는 주 예수의 재림이 가까웠는데도 사람들은 세상의 헛된 쾌락에 잠겨 있다.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마 24:38~39). ■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사랑의 하나님은 "노아와 그와 함께 방주에 있는 모든 들짐승과 가축을 기억하사"(창 8:1) 비를 멈추셨다. 홍수가 그친 뒤 1백50일이 지난 7월 17일에 방주가 아라랏산에 머물렀고, 10월 1일에는 산봉우리들이 보였다. 아라랏산은 터키와 아르메니아 국경 지대에 있는 높이 5,165m의 산이다. 원래 수메르어 '후르 아르 앗'(위대한 왕의 산)을 아라랏이라 부르게 되었다. 아르메니아어로는 '맛시스'(위대한 산), 현재 터키어로는 '아리다'(기울어진 산), 이란어로는 '코 이누'(노아의 산)라 부른다. 40일이 지난 후 까마귀를 내보냈으나 까마귀는 돌아오지 않았다. 7일 후 비둘기를 내보냈더니 그대로 돌아왔다. 다시 7일 후 내보낸 비둘기는 그 입에 감람나무 새 잎사귀를 물고 돌아왔다. 또다시 7일 후 내보낸 비둘기는 방주로 돌아오지 않았다. 노아의 나이로 따져 601년 1월 1일에 지면에서 물이 걷혔고, 2월 27일에 땅이 말랐다. 노아는 하나님의 지시에 따라 가족과 모든 생물들과 더불어 방주에서 나왔다. 노아는 그 즉시 제단을 쌓고 여호와께 정결한 제물로 번제를 드렸다. 하나님은 제물의 향기를 받으시고 노아와 그 아들들에게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고 축복하셨다. 일찍이 하나님께서 인류의 조상에게 내리신 것과 같은 축복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홍수 이전의 세계를 다시 원시의 혼돈 상태로 돌리시고, 새로운 창조 사역을 시작하셨다. 하나님은 인간의 먹거리로 육식을 허락하셨다. "내가 내 무지개를 구름 속에 두었나니 이것이 나와 세상 사이의 언약의 증거니라"(창 9:13). 무지개는 "다시는 모든 생물을 홍수로 멸하지 아니할 것이라"는 하나님의 언약의 증거이다. 노아가 아라랏산에 나타난 무지개를 보고 감격하는 마음을 훗날 영국의 자연시인 워즈워드는 이렇게 노래하였다. "하늘의 무지개를 바라볼 때면 내 마음은 기쁨으로 설레노라" 김 희 보 목사 / 서울장신 명예학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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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 : 2008년 08월 21일 16:20:19 / 수정 : 2008년 08월 21일 16:33:0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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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인물열전10] 완전한 사람 요셉 |
출처 : 인터넷로고스선교회
글쓴이 : lemalogos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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