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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일조, 아직도 하십니까?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8. 00:16

십일조, 아직도 하십니까?

 
십일조 문제는 아직도 한국 개신교계에서는 뜨거운 감자같은 논란거리인 것 같습니다.

사실 이 문제는 서구 기독교계에서는( 카톨릭은 물론이고 개신교에서도) 이미 신학적, 신앙적 정리가 끝나서 지금은 어느 국가의 교회에서도 시행하지않는 종교행위인데, 유독 한국-특히 개신교계에서만 아직도 살아 남아서 여러가지 신앙적 혼란과 부작용을 낳고 있다는 현실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우선 이 십일조 논쟁에 관해서는 이미 많은 논란이 있어왔던 것이므로 여기서는 다만 간략히 그 논란의 요점을 한번 정리해 보고자 합니다.

1. 첫째, 십일조 헌금은 결코 성경적인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십일조 헌금은 성경에 따른 것이고 또한 하나님의 거룩한 명령이므로 신자라면 마땅히 지켜야하는 법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결론부터 말하자면 '전혀 그렇지 않다'입니다. 한 번 살펴봅시다.

1). 십일조는 하나님의 명령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참고구절 : 신명기 14장 / 26장)

-->하나님의 명령도 한시적인 것이 있고 아닌 것이 있습니다.

만일 그저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시대를 초월하여 무조건 지켜야 한다고 한다면 우리는 지금도 안식일을 지켜야 하고, 제사도 드려야하고, 오징어도 돼지고기도 먹으면 안되고, 할례도 다 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니 이런 주장은 말이 안되는 것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겠지요. 그 이유는 그런 율법들은 모두 다 한시적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후, 신약시대 이후는 그런 것은 다 지나간 구시대의 법이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십일조 법도 성전과 제사제도가 존재했던 구약시대에만 필요했던 하나님의 명령이요 율법입니다.

구약시대 이스라엘에는 레위 지파라는 특수 지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제사임무를 위해서 따로 구별된 지파입니다. 그들에게는 먹고 살 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나머지 11지파가 분배받은 땅에서 난 소출중에서 10분의 1을 거둬서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이것이 십일조 법의 기본 근거입니다.

그런데 신약시대에 들어와서 AD 70년이후 예루살렘 성전이 완전히 무너지고 모든 백성들이 다 풍지박산난 후에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이스라엘이란 국가자체도 없어지고 성전도 제사도 없어진 마당에 당연히 레위인도 십일조도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요.

다시말하면 십일조는 그것을 거두어 나눠줄 대상이 있을 때 필요했던 한시적 율법이란 말입니다.

(물론 십일조 정신에는 가난한 자들을 위한 나눔의 정신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중에 다시 설명하지요)

어떤 사람은 지금의 성직자가 레위인들 아니냐고 생각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것은 전혀 아닙니다.

지금의 개신교회에는 신분상 제사장이란 직분은 없습니다.

목사란 똑같은 신자로서 다만 직무에 따른 구분일 뿐이지요, (오히려 교리적으로 신분상 성직자를 인정하는 카톨릭조차도 십일조란 명목의 헌금은 걷지 않습니다.)

2). 십일조는 '하나님의 것'이기에 바쳐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말라기 3장 8절에 대한 해석):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 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말라기 3장 8절)

-->이것도 역시 그 문맥과 의미를 세심히 살펴봐야 합니다.

이 구절의 진정한 의미는 그 당시 제사장들의 부패한 행태를 질책하고 경고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우선, '도적질하는 자들'은 과연 누구입니까? 많은 사람들은 그들을 일반 백성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일반백성이 아니라 십일조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책임을 맡은 제사장들입니다.

그 당시 그들은 그런 헌물을 그 본래의 뜻대로 잘 나눠주고 잘 쓰지않고 제멋대로 자기들 뱃속에 착복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도적놈들이지요.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한.

그러면, '하나님의 것'이 뭐라구요? '십일조와 헌물'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은 '헌물'이란 의무적으로 바쳐야하는 것이 아니지요?

즉 헌물은 본래부터 '하나님의 것'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저 스스로 자발적으로 바치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이 일단 바쳐지고 나면 그때부터는 소위 '하나님의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것을 왜 "하나님의 것"이라고 하실까요?

그 뜻은 '하나님의 것'이란-- "곤궁한 자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하나님의 긍휼을 따라서 가난한 백성들과 레위인들에게 마땅히 분배되어야 할 헌물들"-- 을 가리 키는 것입니다.

 여기서 강조점은 하나님의 "소유권"이 아니라 그것이 마땅히 쓰여져야할 데 쓰여져야만 한다는 데,

즉 "올바른 사용"을 강조하려고 "하나님의 것" 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쉽게 풀어보면, "그것들은 도적놈들 너희가 마음대로 먹어치워도 좋은 '너희들 것'이 아니라 불쌍한 사람들에게 나눠줄, 바로 '내 것'이니라!" 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이 구절을 잘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것'이란 십일조 그 자체가 아니지요. 따라서 이 구절은 하나님께서 십일조를 하나님 자신의 것이라고 하셨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는 것입니다.

3). 예수님이 십일조를 하라고 명하셨다는 주장에 대하여: (누가 11장 42절에 대한 해석):
"화 있을 진저 너희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를 드리되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버리는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아니하여야 할지니라"( 눅 11장 42절/ 마태 23장 23절)

여기서 논란이 되는 것은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이 구절을 가지고 우리 역시 십일조를 드려야 하다는 주장이지요. 과연 그런 뜻입니까?

--> 여기서도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예수님의 말씀도 그 당시 시대적인 조건을 염두에 두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께서 바리새인들의 형식적인 종교 생활을 책망하기 위해 여러가지 왜곡된 신앙 행위들 중에서 특별히 십일조를 한 예로 드신 것 뿐입니다.

결코 십일조를 잘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면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행하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이 당시에는 아직까지 제단과 성전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레위인도 있었지요. 또한 다른 문맥을 보면 예수님도 제단과 성전을 인정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직은 십일조가 필요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입니다. 즉 이것 역시 그 시대에 국한된 말씀이란 뜻입니다.

만일 예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무조건 시대를 초월하여 지켜야 한다면, 예수님이 할례를 받았으니 우리도 할례를 받아야 하고, 예수님이 성전세를 내셨으니 성전이 없는 지금도 성전세를 내야 할 것이며 그리고 예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예배를 드렸으니 우리도 안식일인 토요일에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그러면 전도하러 가는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대로, 지금도 전도하는 사람은 돈주머니도 두벌 옷도 두벌 신발도 없이 달랑 샌들 하나 신고 단벌 옷에 돈도없이 다녀야 하지 않을까요? 또한 산상수훈의 명령들은 어떻게 지키지요? 과연 그대로 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그렇게는 하지 않으면서 왜 십일조만은 반드시 예수님의 말씀대로 드려야 한다는 것인지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주장 아닙니까?

그러므로 이런 성경구절을 들어서 십일조의 성경적 근거를 주장하는것은 너무나 웃기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 신약시대 이후에는 십일조라는 말이 더 이상 나오지 않는 이유는 십일조는 성전체제와 제사 제도에 종속된 것이기 때문이며 그런 제사 제도와 성전이 필요 없게 된 이후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입니다.

4). 십일조가 율법 이전에도 이미 있었다는 주장에 대하여: 어떤 사람은 주장하기를 십일조는 이미 율법 이전부터 정해진 하나님의 법칙이라고 말합니다. 그 증거로 아브라함과 야곱의 경우를 들고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먼저, 아브라함은 가나안과의 전쟁 후 전리품 중 10분의 1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는데, 이는 아브라함을 멜기세덱이 축복해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준 것이지 이를 율법의 십일조로 생각할 근거가 없습니다. 어떤

학자들에 의하면 그렇게 전승자가 다른 사람에게 전리품의 10분의 1을 준 것은 다른 역사적 사건들에도 종종 있어왔던 것이라고 합니다.

즉 십분의 일을 준 것은 그저 당시의 일반적인 관습에 따른 것이지 어떤 특별한 하나님의 뜻이 개입된 것으로 봐야할 이유가 없다는 말입니다.

만일 그렇지않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율법의 십일조의 효시라면 이 사건 이후에도 아브라함이 계속해서 십일조를 드렸어야 하는데 그런 기록은 전혀 없는 것이 이상한 일이지요. 그러므로 아브라함의 행위는 단순히 감사한 마음에서 고대의 관습을 따라 십분의 일을 주었던 단회적인 사건으로 이해하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리고 야곱은 창 28:20-22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자기 소원을 이루어주시면 십분 일을 바치겠다는 약속을 하는데 이것은 소위 '조건부 십일조'라 할 수 있는 바, 이것은 결코 올바른 행동이 아니지요. 이것이 어떻게 율법의 십일조 정신에 부합될 수 있겠습니까? 그야말로 "주고 받기" 식의 거래일 뿐이지요.

그리고 마찬가지로 야곱역시 그런 약속을 한 이후에 가나안으로 돌아와서도 한번도 십일조를 했다는 기록이 없습니다. 당연하지요. 그것을 도대체 누구에게 바친단 말입니까? 그러나 오늘날 한국 교회들은 아브라함과 야곱의 이와같은 행위를 가지고 십일조의 타당성을 주장하고 있으니 말도 안되는 것입니다.

결국 아브라함과 야곱의 행위에서 십일조의 기원을 찾는 것은 억지일 뿐이며 절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2.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로 인해서 일체의 의무적 율법은 폐지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이루신 일 중에 중요한 것이 바로 율법을 폐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신앙의 자유를 주셨습니다 (갈 5장). 그러므로 이제는 신약시대의 신자에겐 율법적 의무란 없습니다. 다만 자발적 순종만이 있을 뿐이지요.

사도행전 15장에서 초대교회 최초의 공의회가 열리는데 거기서 결정된 것은 할례를 포함한 일체의 율법적 의무를 폐지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유대인들에게 율법적 의무였던 십일조도 폐지된 것이지요.

십자가사건 이후 모든 율법을 폐지하는 것은 당연히 십자가의 뜻을 안다면 마땅한 결론일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떤 율법적 규정을 존속시키려 하는 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부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사건이후에 모든 율법은 없어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율법을 완성시켰다"는 말씀은 과거의 것을 폐지하고 더 좋고 새로운 것으로 대체하셨다는 말입니다.

십일조도 마찬가지로 폐지하시고 더 좋은 자유로운 사랑의 구제헌금인 "연보"로 대체하신 것입니다.

이 연보란 개념속에는 결코 율법이나 의무개념이 없습니다. 어디까지나 사랑의 자발적 헌금이지요.

그런데 왜 한국교회는 안식일은 주일로, 할례는 세례로, 유월절 만찬은 성찬식으로 등등, 다른 율법들은 다 바꾸면서도 유독 십일조만은 아직도 존속시키려고 하는지 그 속내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3. 셋째, 십일조 제도의 폐해들:

어떤 사람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냥 십일조 할 사람은 하고 자유롭게 놔두면 되지 않냐고.. 아니지요.

잘못된 것은 고쳐야합니다. 왜냐하면 그런 잘못된 것들을 그냥 방치하는 것은 자칫 더 나쁜 결과를 유발시킬 가능성이 다분히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그렇지 않습니까? 나쁜 종양은 빨리 도려내는 것이 좋듯이.

십일조가 일으키는 문제점들은 대략 다음과 같습니다:
1).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십일조를 그냥두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주신 자유를 다시 포기하는 것과 같은 행위입니다.

그것은 마치 지금도 그냥 안식일을 지키는 것도 괜찮치 않느냐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구속역사를 부정하는 것이지요.

복음의 본질을 훼손시키고 다시 율법적 신앙으로 회귀시키는 일이란 말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말하기를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갈 2:18) 고 갈파하는 것입니다.

2). 교회가 재물에 대한 잘못된 욕심으로 타락할 가능성이 농후합니다.

십일조를 잘못 걷는 것도 문제지만 그것을 제대로 쓰지않고 쌓아두거나 엉뚱하게 건물짓는데 쓴다는 둥, 하게 되면 교회가 부를 인하여 타락의 길로 들어서게 될 것입니다.

돈의 유혹을 과소평가하면 안됩니다. 그래서 돈과 하나님은 겸해서 섬길 수 없다고 하신 것이지요.

사실로 현재의 한국교회의 실상을 돌아보면 자명하지 않습니까?

오늘의 한국 개신교는 점점 중세의 카톨릭을 닮아가고 있습니다. 그 원인 중에는 교회에 돈과 권력이 많아지고 있기 때문이고 그렇게 되는 데 십일조가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돈이 쌓이면 부패하기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신자들이 잘 모르고 십일조 하는 것은 자기도 모르게 이러한 부패를 조장시켜주는 일에 동참하는꼴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업은 무슨 돈으로 하냐구요? 교회는 사업을 위한 조직이 아닙니다.

다만 신자들 하나 하나가 빛과 소금으로 살면 되는 것입니다. 그밖의 일들은 부차적인 것이지 본질적인 일이 아닙니다. 이것을 구분할수 있어야 합니다.

돈 없어도 교회는 존재합니다. 성장할 수 있습니다. 부흥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돈이 없을 때 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교회가 될 것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어렵듯이 교회도 재산이 많아지면 본질을 잃어버리고 타락할 가능성이 훨씬 많습니다. 이미 중세의 기독교 역사가 그것을 증명하고 있지 않습니까?

3). 신자들에게 물질주의적인 신앙심을 조장하는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말라기 3:10) 흔히들 이 구절을 들어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해석입니다.

이것은 제사장들에게 십일조를 떼어 먹지 말고 제대로 잘 나눠주라는 말씀이지 백성들에게 십일조 잘하면 복 받는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가지고 십일조 잘해야 복을 받는다고 가르치는 것은 다른 속셈이 있다고밖에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을 마치 순전히 성도들의 유익을 위해서 강조하는 것처럼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것입니다.

목사들은 이것이 잘못된 것임을 알고도 속이고 모르고도 속이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아무 약효도 없는 가짜약을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속여 파는것과 다를 것이 없는 것입니다. 심하게 말하면 사기치는 것입니다.

또한 신자들 역시 문제입니다. 신자들의 경우도 십일조를 함으로 더 많은 물질축복을 얻어내고자 하는 잘못된 욕심으로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과 거래하자는 것이지요. 이게 말이 됩니까? 그런데 실상은 많은 신자들이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과 거래하고자 하는 경우를 자주 볼 수 있습니다.그게 지금의 교회 현실입니다.

참고로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것은 십일조를 하는 행위자체가 아니라 그 십일조를 거둬서 가난한 자들과 곤궁한 이웃을 위해서 전액 제대로 쓰여질 때 복을 주신다고 약속하신 것임을 명심해야 합니다.(신명기 26장).

그러므로 진정 복을 받고 싶다면 그렇게 제대로 쓰는 일에 더 힘을 쏟아야 할 것입니다.

4). 잘못된 죄책감만 조장시키고 형식적, 외식적 신앙행태를 조장합니다.

아직 신앙이 성숙하지도 않은 신자들에게 자꾸만 십일조를 강요하다시피 강조하는 것은 자칫 외식적이고 형식적인 신앙으로 만들 가능성이 다분합니다.

아니면 그것을 제대로 못한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결국 쓸데없는 죄의식때문에 즐거워야할 신앙생활이 잔뜩 무거운 짐이 되어버리는 것입니다.

도대체 지금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기껏 벗겨놓으신 짐을 또다시 걸머지고 가려는 식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4. 마지막으로, 올바른 십일조 정신을 구현하는 길은 무엇일까요?

구약의 십일조 법에는 과부와 고아등 그 지역안의 가난한 자들을 위해서 3년마다 십일조를 거둬서 나눠주도록 되어있는데, 이 정신은 참으로 본받아야할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신명기 26장)

지금도 사회의 가난한 이웃을 위해서 사용하기 위해서라면 그런 헌금의 명목은 구제금이나 사랑의 헌금 등의 명목으로도 얼마든지 가능하고 또 신약에 의하면 그런 것을 일컬어 "연보"라고 하고 있습니다. 연보의 의미는 "자기 것을 버려서 남의 부족한 것을 메꾼다"는 뜻입니다.

또 그렇게 거뒀다면 당연히 그 전액을 다 그 목적으로만 사용해야겠지요.

여기서 중요한 것은 오늘날에도 이와같은 십일조의 정신을 살리자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자발적 헌금이어야 하는 것이지 '십일조 법' 같은 어떤 종교적 의무로 규정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만일 그것이 의무가 되어버리면 그 순수한 정신이 훼손되고 왜곡되어 외식적이고 형식적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처럼.

이제 요약하면,
1) 이미 말했듯이 십일조라는 규정보다는 사랑의 헌금인 "연보"를 강조하고 그 정신을 더욱 고취하는데 힘써야 할 것입니다.

2) 연보나 "사랑의 헌금"은 그 정신에 따라 전액을 구제와 구난을 위해 사용해야할 것입니다.

그것만이 십일조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는 길이 될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 십일조를 여전히 지키겠다는것은 아무리 좋게 봐도 그것은 십일조를 폐지하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이기도 하고, 모든 율법을 폐지하시고 새로운 사랑의 법으로 대치해 놓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의미를 무색하게 만드는 것이기도 하며, 또한 결과적으로 교회와 신자들을 기복신앙과 물질숭배로 치닫게하는데 일조하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교회개혁은 바로 이 십일조 폐지운동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입니다.*

 


출처 : 은혜(恩惠)
글쓴이 : 은혜 (恩惠)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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