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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십계명의 현대적인 의미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0. 11. 07:24

십계명의 현대적인 의미

 

 

        1. 십계명의 배경: 시내산 언약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을 떠나 홍해 바다에서 구원을 얻은 후(1-15장),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와 메추라기를 경험하고(16장), 므리바에서 갈증을 해결한다(17:1-6). 이스라엘 자손은 그곳 르비딤에서 아말렉과 싸워 승리를 거둔 다음(17:8-16), 출애굽한 지 3개월 째가 되던 때에 시내산(또는 호렙산)에 도착한다(19:1). 이 시내산에서 하나님은 모세를 중재자로 하여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으시고, 십계명을 비롯한 다수의 법규들을 주신다. 이 언약은 아브라함 이후로 지속되어 온 하나님과의 관계를 정식으로 공인하는 성격의 것이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공적인 인정을 받은 때는 바로 이 시내산 언약을 맺은 이후부터라는 말이다.

   시내산 언약은 사실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구원 은총(출애굽 해방)에 이스라엘이 어떻게 응답해야 하는가를 규정하고 있는 자발적인 순종과 응답의 체계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출애굽기 19:5-6은 이 점을 다음과 같이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열국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즉 이스라엘은 시내산 언약을 잘 지킴으로써 본격적으로 하나님의 소유, 제사장 나라, 거룩한 백성 등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참조, 벧전 2:9). 이것은 시내산 언약이 하나님의 구원을 가능하게 하는 필수적인 조건이라거나, 사람들을 강제하고 속박하는 것임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은 마치 제사장이 일반인들로부터 구별되는 것처럼, 이스라엘도 시내산 언약에 의해 다른 민족들로부터 구별되는 존재가 될 것임을 의미한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시내산 언약은 하나님의 특별한 구원 은총에 힘입어 그의 소유된 백성이 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거룩한 백성으로 지켜야 할 삶의 규범이 아닐 수 없다. 달리 말해서 시내산 언약은 어디까지나 이미 조건 없이 이루어진 하나님의 구원에 감사함으로 응답해야 할 성격의 것이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 됨을 증명하는 매우 중요한 표지가 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얘기다(갈 3:15-19). 이것은 아무런 조건 없이 오직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경험한 오늘의 신자들이, 감사함으로 그의 법을 지킴으로써 생활 속에서 그가 원하시는 행위의 열매를 맺는 것과도 같은 이치에 속한다.



        2. 십계명의 기본 형식과 그 신학적인 의미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신 언약은 크게 보아 십계명(20:1-17)과 언약의 책(20:22-23:33)의 둘로 나누어지며, 이의 구체적인 시행 방안으로 성막 건축과 레위기 제사법 규정이 뒤따른다. 모세는 언약 체결의 과정에서 철저하게 언약의 중재자(mediator)로서 나타나는 바, 이 글에서 살피고자 하는 십계명은 사실 그 뒤에 이어지는 모든 다른 계명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시내산 언약의 핵심 내용을 구성하고 있다.

   신명기 5:6-21에도 평행 자료가 있는 십계명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서 마치 헌법과도 같은 것으로서, ‘열 마디의 말씀’(출 34:28; 신 4:13; 10:4)으로 알려져 있으며, 두 돌판으로의 구분은 출애굽기 34:1에 처음 언급되어 있다. 이 열 마디의 말씀은 그 내용에 따라 크게 두 부분으로 나누인다. 첫 번째 계명에서 네 번째 계명에 이르기까지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수직적인 관계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으며, 다섯 번째 계명에서 열 번째 계명에 이르기까지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해서 규정하고 있다.

   십계명의 이러한 구조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주신 열 가지의 계명들이 하나님을 향한 종교적인 계명과 이웃을 향한 사회적인(또는 세속적인) 계명을 결합시키고 있음을 잘 보여 준다. 이는 이웃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회적인 차원의 범죄(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것, 살인, 간음, 도적질, 거짓 증거, 이웃의 소유를 탐하는 것 등)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종교적인 차원의 범죄(우상 숭배,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게 일컫는 것, 안식일 위반 행위 등)와 마찬가지의 범주에 속한 것임을 밝혀 주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즉 십계명에서는 사회적인 책임과 종교적인 책임이 이원화되어 있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기에 사람들에게 저지르는 모든 잘못들은 곧 하나님께 저지르는 범죄와 동일한 차원에 속한 것으로 이해된다.

   십계명이 갖는 또 하나의 특징은, 그 안에 포함되어 있는 열 가지의 계명들이 안식일 계명(제4계명)과 부모 공경 계명(제5계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부정 계명으로 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 자체로서 볼 경우에 부정 계명들은 인간의 삶을 폐쇄시키기보다는 개방시키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것들은 특수한 행동들(20:22-23:33)에 초점을 맞추기보다는 인간 행동의 외적인 한계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얘기다. 이와 아울러 부정적인 계명들은 그 주요 관심사가 새로운 인간 공동체를 창조하는 데 있지 않고 도리어 공동체를 파괴할 위험성이 있는 행동들로부터 그 공동체를 지키는 데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면서도 부정 계명들은 암묵적으로 그 안에 긍정적인 측면이 있음을 드러내고 있다. 예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지 말 것을 명하는 계명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일 것을 권고하며, 살인을 금지하는 계명은 생명을 보존하고자 하는 노력을 요청한다. 그리고 거짓 증거를 금지하는 계명은 이웃에 대하여 좋은 말을 할 것을 요청한다. 이로써 십계명의 부정 계명들은 하나님을 향한 올바른 신앙과 그에 기초한 공동체의 생명과 건강을 위해서는 단순히 범죄를 피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음을 우리에게 보여 준다. 이것은 결국 부정 계명이 긍정 계명보다 훨씬 포괄적인 내용을 포함할 수 있다는 평범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에 다름 아니다.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십계명이 영원한 효력을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단언 명령 또는 정명법(apodictic law)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것은 십계명이 모든 상황에 적용될 수 있는 공동체의 핵심적인 관심사를 직설적으로 선포하고 있음을 뜻한다. 따라서 십계명에는 불순종에 대한 어떠한 사법적인 판단도 명시되어 있지 않다. 십계명이 이처럼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에게 직접 명하는 정명법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은, 십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외적인 강제보다는 내적인 순종이 더 중요함을 강조하는 효과를 갖는다.


        3. 본문 주해


  <1-2절> 나는 너를 애굽 땅, 종 되었던 집에서 인도하여 낸

                너의 하나님 야웨로라

   헌법 전문(前文)과도 같은 십계명의 서두 부분(1-2절)은 먼저 열 개의 계명들이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에게 직접 주신 말씀이라고 말한다(1절). 이것은 십계명이 이스라엘 공동체 안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실제로 유대교에서는 이 서론 부분을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으로 보고, 개신교의 첫 번째 계명과 두 번째 계명을 합쳐서 두 번째 계명으로 본다. 반면에 개신교와 로마 천주교, 동방 정교회, 루터교 등은 1-2절을 단순히 십계명의 서론으로만 이해한다.

   이어지는 2절은 이스라엘에게 십계명을 주시는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지를 분명하게 밝힌다. 이 구절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자신을 특정 역사와의 관련성 속에서 드러내고 있음을 보여 줌으로써, 십계명을 이스라엘이 앞서 경험한 하나님의 구원 행동, 곧 이집트 탈출로부터 홍해 바다 구원에 이르기까지의 출애굽 해방과 연결시키는 역할을 수행한다. 아울러 이 본문은 십계명이 구속의 은총을 베푸신 하나님의 선물임을 강조하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십계명을 받은 자들은 이미 하나님의 구원 은총에 힘입어 그의 백성이 된 자들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십계명은 구원의 수단으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도리어 구속함을 받은 자의 일상적인 삶이 어떠한 형태를 취해야 하는가에 대한 가르침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3절>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개신교에서 첫 번째 계명으로 이해되는 이 본문은, 다른 모든 신들을 거부하고 절대적으로 이스라엘의 하나님 야웨께만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참조, 22:20; 23:13; 34:14). 신명기 6:5는 이 계명을 긍정적인 측면에서 다시 진술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너는 마음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야웨를 사랑하라.” 이것은 다른 어떤 신들보다도 하나님을 더 두려워하고 사랑하고 신뢰해야 함을 의미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이 계명이 다른 모든 계명들의 기초를 이룬다고 말할 수 있다.

   이 계명이 십계명의 첫 번째 계명으로 강조된 것은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이 주변 나라들, 특히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및 시리아-팔레스타인 등의 다신교(polytheism)에 접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신들의 유혹을 받았기 때문이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고대 근동’(Ancient Near East), 곧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종교는 철저하게 자연 만물을 신적인 숭배의 대상으로 삼는 자연 종교(nature religion)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종교적인 혼돈 상황 속에서 다른 신들의 유혹을 뿌리치고서 오로지 야웨 하나님만을 섬기고 산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제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 유랑(출 32장)에서부터 시작하여 가나안 정착 시대를 거쳐 왕정 시대와 바벨론 포로기 및 그 이후의 시기에 이르기까지 계속해서 야웨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는 잘못을 범하였다. 가나안의 바알과 아세라 뿐만 아니라 바벨론과 이집트의 여러 신들, 그리고 해와 달과 별을 비롯한 천체 신들이 다른 신들의 범주에 속했는 바, 이스라엘은 야웨를 버리고 이들을 섬기거나 이들을 야웨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종교적인 혼합주의(syncretism)에 빠져들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다른 신들을 섬긴 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왕국 분열과 왕국의 멸망이 그에 해당한다(왕상 11:1-13; 왕하 17:7-41; 21:1-15; 23:26-27 등).

   

  <4-6절>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그것들에 절하지 말며

                그것들을 섬기지 말라

   로마 천주교와 루터교는 신상(神像) 금지를 명하는 이 계명(4-6절)을 개신교의 첫 번째 계명(3절)과 한데 묶어서 첫 번째 계명으로 간주하고, 그 대신에 개신교의 열 번째 계명을 집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과 아내를 포함한 다른 소유물을 탐하지 말라는 계명의 둘로 나누어 계산한다. 유대교도 마찬가지로 3-6절을 한데 묶어서 하나의 계명으로 간주하지만, 개신교의 십계명 서론을 첫 번째 계명으로 계산하고 3-6절을 두 번째 계명으로 처리한다.

   신상 제조와 신상 숭배를 금하는 이 계명은 이스라엘을 당시의 주변 문화권에서 흔히 통용되던 종교적인 관행-동물이나 사람의 모양을 본떠서 신들의 형상을 만드는-으로부터 구별짓는다. 이스라엘 주변 세계, 특히 가나안 지역의 바알 종교가 신상을 폭넓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얼마나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이스라엘 주변 종교들의 흡인력은 참으로 대단하였으며, 그 종교들에서 사용하는 다양한 신상들(“위로 하늘에 있는 것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 속에 있는 것의 아무 형상이든지 만들지 말며,” 4절)은 그 신상이 표상하는 신을 대신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기 때문에, 신상을 제조하거나 그것을 숭배하는 일의 금지는 야웨 신앙의 존속과 불가분의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이 계명이 단순히 이방 신들의 형상을 만들어 그것을 섬기고 그것에 절하는 것만을 금지하는 것은 아니다. 야웨 하나님의 형상을 만드는 것 역시 우회적으로나마 신상 금지 대상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이스라엘 백성의 사주를 받아 아론이 만든 금송아지(출 32장)나 북왕국의 여로보암의 여로보암 1세가 벧엘과 단에 세운 금송아지(왕상 12:25 이하)가 그에 해당한다. 그렇다면 왜 야웨 하나님의 신상이 금지 대상이 되는가? 야웨의 신상을 만드는 일은 어떤 점에서 우상 숭배와 관련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이 물음에 대하여 그것이 야웨의 초월성을 손상시키기 때문이라고 답변한다(신 4:11-18; 사 40:18). 야웨는 창조 세계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넘어서시는 분이요, 따라서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그가 창조하신 피조 세계의 유한한 것들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있을 수 없는 일이라는 얘기다.

   그러나 그러한 금지 명령은 하나님의 초월성 못지 않게 하나님의 관계성(relatedness), 곧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역동적인 관계를 보호하려는 관심사를 있는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도무지 움직이지 못하고 듣지도 못하고 느끼거나 생각하지도 못하며(시 115:4-7; 렘 10:3-5; 사 44:15-18 등) 해당 신을 한 곳에 묶어 두는 신상 조형물들과는 달리,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연과 역사 안에서 자유롭게 말하고 느끼고 행동하시는 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야웨 하나님의 신상을 만들어 숭배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 및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에 관한 기본적인 사실들을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때문에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을 위한 신상을 만드는 대신에 그의 임재를 상징하는 법궤를 사용해야만 했다. 법궤 안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표하는 십계명 두 돌판을 비치되어 있었다(출 25:16, 21; 신 10:1-5).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피조 세계에 속한 어떤 것으로 형상화하려는 노력을 버리고서 하나님에 대한 언어적인 형상(verbal images)-하나님을 다양한 개념들로 형상화하는 방식-으로 방향을 바꾸게 된다. 그 까닭은 언어적인 형상이야말로 조형화된 신상이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과 세상 사이의 관계를 효과적으로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되었다는 설명(창 1:26-28)과 연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형상이라고 보는 신약성서의 주장(골 1:15)과 일치한다. 생기 있고 활동적인 인간의 몸을 입으신 그는 참으로 하나님을 가장 잘 드러내신 분이었다.

   아울러 이 계명은 하나님께서 이방 신들의 형상을 금지하는 이유를, 그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데에서 찾는다(5절). 일상적인 결혼 생활로부터 이끌어낸 이 은유(metaphor)는 다른 신들을 섬기지 말고 오로지 야웨께만 충성할 것을 강조한다. 이 계명은 신상을 포함한 이방 신들을 섬김으로써 야웨께 불충성한 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엄하게 심판하실 것임을 분명하게 밝히며(“나를 미워하는 자의 죄를 갚되 아비로부터 아들에게로 3, 4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 5절), 그와는 대조적으로 하나님께서 베푸실 변치 않는 사랑을 조건절 형태로 서술하고 있다(“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 6절).


  <7절> 너의 하나님 야웨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하나님의 이름(Yahweh)을 ‘함부로’(히브리어 ‘샤베’) 쓰지 말 것을 명하는 이 계명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명예와 관련되어 있다. 달리 말해서 그것은 하나님의 이름이 하나님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세계를 위한 그의 계획을 불명예스럽게 만드는 방식으로 사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는 얘기다. 이 계명은 이름과 명예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전제하고 있다(참조, 시 135:13; 30:4; 97:12). 하나님의 선한 이름은 마치 사람의 이름이 그 사람에게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과도 같이 하나님 자신에게 대하여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십계명이 주어지기에 앞서 출애굽 사건에서 밝혀진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는 “내 이름이 온 천하에 전파되게 하려 하는”(9:16) 데에 있었다. 하나님의 이러한 이름은 시내산 언약의 갱신 과정에서 주어지는 이름 선포에서 가장 완전하게 규정된다(34:5-7):


     야웨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그와 함께 거기 서서 야웨의 이름을 반포하실새, 야웨께서 그의 앞으로 지나시며 반포하시되, ‘야웨로라. 야웨로라. 자비롭고 은혜롭고 노하기를 더디하고 인자와 진실이 많은 하나님이로라. 인자를 천대까지 베풀며 악과 과실과 죄를 용서하나 형벌 받을 자는 결단코 면죄하지 않고 아비의 악을 자녀손 3, 4대까지 보응하리라.’


이 두 본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하나님께 대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그의 이름을 온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자랑하는 데 있으며(참조, 시 18:49; 20:7; 22:2; 45:17; 34:3; 69:30; 96:2-3 등),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들음으로써 영향을 받게 되는 데 있다(시 48:10; 86:9). 만일에 하나님의 이름이 그의 백성이 사용하던 방식에 의해 또는 그와 관련된 사회적인 관습에 의해 더럽혀진다면, 하나님의 의도는 그 목적한 바를 성취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계명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행동들을 금하고 있는가? 대체적으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것들이 이 계명의 금지 범위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다. 그 첫 번째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 맹세를 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지 말라는 것이다(레 19:12). 자신의 신실함과 굳은 결심을 나타내는 표로 그의 이름을 들어 맹세하되 그를 경외하는 마음을 잃어서는 안 되겠지만(신 6:13), 그와는 달리 자신의 부정함과 신실치 못함을 변명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들어 거짓 맹세하는 행동은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 이 계명의 참된 의미에 해당한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너무도 흔히 자기들이 피하거나 거부하고 싶은 명분과 관련시키려고 하는 바, 이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은 그것이 사용되는 차원으로까지 이끌어 내려진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이름은 그에 걸맞은 명성과 영광을 얻지 못하게 된다.

   둘째로 이 계명은 이스라엘을 비롯한 고대 근동 세계에서 미워하는 사람을 저주할 때 자기가 믿는 신의 이름을 사용하는 태도를 염두에 두고 있기도 하다. 남을 저주할 때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것은 결국 세상 만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욕되게 하고 그의 이름을 무가치한 것으로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세 번째로 이 계명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바르게 행동하지 못함으로 인해서 우회적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는 것까지도 포함한다. 아울러 하나님의 이름을 앞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신의 세속적인 이익과 영광을 추구하려는 태도 역시 이에 포함될 것이다.

   하나님은 이상과 같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의 이름을 잘못 사용하거나 오용 내지는 남용하여 그것을 더럽히는 자의 행동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 레위기 24:16에 의하면 야웨의 이름을 훼방하는(blaspheme) 자는 그가 외국인이든지 본토인이든지 관계없이 온 회중이 돌로 쳐서 그를 죽여야만 한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거짓을 예언하는 경우에도 이와 똑같은 처벌이 주어진다(신 18:20). 비록 이 규정이 이스라엘 백성 전체를 대상으로 하는 십계명의 기본 방향과 일치하지 않기는 해도, 거짓 예언자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잘못된 예언을 하여 하나님의 백성을 미혹케 하는 경우 역시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여 그것을 욕되게 하는 범주에 들어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8-11절>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히 지키라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그것을 다른 여섯 날들로부터 구별하여 거룩하게 여기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계명에 의한다면, 사람들은 모든 시간이 자신의 것이라는 식으로 살아서는 안 되며, 자기들이 원하는 방식을 따라 행동해서도 안 된다. 모든 시간의 주인이신 하나님만이 특정한 한 날을 어떻게 사용해야 하고 또 어떻게 사용해서는 안 되는가에 관한 문제를 결정지을 권한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안식일을 ‘기억한다’는 것은 단순히 정신적인 행동만을 뜻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배를 포함한 모든 행동을 통하여 이 계명을 적극적으로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안식일 논의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주신 선물(‘야웨의 안식일,’ 10절; 31:13)이지 짐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와 같이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는 것이요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기”(막 2:27) 때문이다.

   그렇다면 안식일을 야웨의 날로서, 그리고 사람을 위한 날로서 거룩하게 지켜야 할 이유는 어디에 있는가? 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20:10-11; 신 5:13-15).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켜야 할 첫 번째 이유는 여기서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을 취하심으로써(창 2:2) 그 날을 거룩하게 하셨다는 데에 있다(출 20:10-11; 31:16-17). 안식일을 지킨다는 것은 따라서 일차적으로 하나님의 창조와 관련된 문제이지, 하나님의 구속이나 특별히 이스라엘적인 법과 관련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단순히 이스라엘만이 지켜야 할 어떤 것이 아니다. 짐승들과 나그네들도 안식일을 존중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이렇듯이 창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안식은 하나님의 창조 사역을 마무리하는 것으로서, 창조 질서 안에 일-휴식의 리듬을 집어넣으신 하나님의 행동에 해당한다. 모든 사람들이 그러한 리듬을 존중할 때에만 비로소 창조 세계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본래의 모습을 간직하게 된다. 안식일은 이렇듯이 모든 피조물-소나 나귀를 비롯한 모든 집짐승을 포함하는(출 20:10; 23:12; 신 5:14)-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 질서와 조화를 이루게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이다. 따라서 안식일을 지키는 행동은 창조 세계를 지키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다. 그것은 곧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창조 세계의 리듬에 참여함을 의미한다. 그러나 반대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곧 창조 질서를 깨뜨리는 것을 뜻한다. 그것은 창조 질서의 한 부분을 위기에 빠뜨린다. 이러한 사고 유형은 왜 이스라엘이 안식일을 지키지 못한 자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게 한다(31:12-17; 35:2; 민 15:32-36).

   참으로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인간의 모든 노력을 한켠에 밀쳐 놓음으로써 창조 세계에서의 하나님의 역할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며, 사막과도 같은 치열한 생존 세계 안에서 매주 한 번씩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오아시스를 제공한다. 여기서 우리는 안식일을 지켜야 할 두 번째 이유, 곧 안식일과 관련된 인도주의적인 배려에 특별한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출애굽기 23:12와 34:21에서, 특히 안식일의 근거를 출애굽 해방에서 찾는 신명기 5:14-15에서 분명하게 언급된다. 안식일은 근본적으로 평등주의를 목적으로 하는 제도이다. 안식일의 쉼은 부자나 가난한 자, 주인이나 종, 인간이나 짐승 모두를 위한 것이다. 안식일은 신앙 공동체로 하여금 하나님의 구속 행동을 본받아 정기적으로 사회적인 약자들에게 관심을 갖게 만든다(참조, 출 22:21-27). 그렇게 할 때 비로소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온 세상의 피조물들이 서로 간에 평화를 누리는 한 순간이 회복될 것이다.

   안식일에 담겨 있는 이러한 인도주의적인 관심사는 이 계명을 인간 사이의 관계와 관련된 계명들과 연결짓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안식일 계명이 쉼에 대해서 규정하기에 앞서 “너희는 엿새 동안 모든 일을 힘써 하여라”(출 20:9; 34:21; 신 5:13)고 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그냥 지나쳐서는 안 된다. 이 구절은 안식일의 쉼이 엿새 동안 힘껏 일하고 난 후에 피곤에 지친 몸과 마음에 새 힘을 주기 위한 기쁨과 즐거움의 쉼이어야 함을 규정하고 있는 것에 다름 아니다(사 58:13-14). 따라서 안식일의 쉼은 엿새 동안의 부지런한 삶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의미도 갖지 못한다. 즉 땀 흘림이 없는 삶을 사는 사람은 안식일의 쉼을 누릴 자격이 없다는 얘기다.


  <12절> 네 부모를 공경하라

   사람들 사이의 관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 바로 자녀와 부모 사이의 관계이다. 어느 시대에도 인간은 어떤 한 부모의 자녀이기를 중단한 적이 없다. 그 까닭에 십계명은 부모 공경과 관련된 계명을 수평적인 차원에 속한 계명들의 첫 번째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 계명에서 가장 먼저 주목할 것은 그것이 아버지와 어머니를 똑같이 존중히 여겨야 할 자들로 여기고 있다는 점이다(참조, 엡 6:1-2). 이것은 이스라엘 사회의 가부장제적인 성격이 명백하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이 계명은 하나님과의 수직적인 관계에 대해서 규정하는 1-4계명과 똑같이, 그리고 사람 사이의 수평적인 관계에 대하여 규정하는 6-10계명과는 달리 ‘하나님’이라는 낱말을 가지고 있는 바, 이것은 부모 공경 계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효과를 가짐과 아울러, 이 계명이 수직적인 차원의 계명들과 수평적인 차원의 계명들을 연결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이 점은 부모가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있어서 하나님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볼 때 쉽게 이해할 수 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관계를 부모와 자녀 관계로 보는 은유(출 4:22; 호 11:1-3; 사 64:8; 66:12-13 등) 역시 같은 맥락에 속한다. 이 때문에 부모를 공경하지 못하는 자녀에게는 사형이라는 엄벌이 주어질 수밖에 없다(출 21:15, 17; 레 20:9; 24:15; 신 21:18-21).

   부모 공경 계명이 갖는 이러한 의미는 부모를 공경하는 것이 마치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과도 같은 차원에 속한 것임을 강조하는 효과를 갖는다. 사실 이 계명이 긍정적인 구문으로 되어 있고 ‘공경하다’는 폭넓은 의미의 동사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그것이 어떤 특정한 행동을 지시하고 있는 것이 아님을 보여 준다. 그것은 자녀들로 하여금 어떤 형식으로든 부모를 공경하는 방식으로 응답할 것을 가르치고 있다는 점에서 개방적인 계명이라 할 수 있다. 이 점에 비추어볼 때 부모를 대함에 있어서 자녀가 마땅히 가져야 할 태도에는 존경, 존중, 관심, 배려, 애정, 이해심, 감사, 순종 등이 반드시 포함되어야 할 것이다.

   아울러 이 계명은 연로한 부모 또는 일할 수 있는 능력이나 정신력이 현저하게 쇠퇴한 부모를 학대하거나 괴롭히는 일을 금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인간의 수명이 길어지게 됨으로써 노년 인구가 점차 늘어나는 오늘날의 시대에는 이 계명을 자녀들의 힘만으로는 성취하기 어렵다는 현실적인 한계에 부닥치게 된다. 결국에는 국가와 정부가 다양한 차원에서 이 계명을 지켜야 할 책임을 일부나마 질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 생겨난다. 이 때문에 연로한 부모를 모시고 있는 현 세대의 자녀들은 국가와 정부가 양질의 양로원 시설이나 폭넓은 의료 혜택 등의 다양한 사회 복지 정책에 어느 정도 충실한지를 감시하고 비판함으로써 부모 공경 계명을 간접적으로나마 이룰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이 계명은 부모를 모시고 있는 자녀에게 뿐만 아니라 자녀를 둔 부모에게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기도 하다. 즉 자녀들에게 공경을 받을 수 있는 부모가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부모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이 계명의 배후에 감추어져 있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자녀들을 양육하고 돌보는 일 못지 않게 그들을 신앙적으로 바르게 지도하는 일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신 6:4-9, 20-25). 부모 공경에 관해 권면하는 에베소서 6:1-4이 이 점을 잘 반영하고 있다: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6:4). 이 점에 비추어 본다면 오늘날 사회 문제가 되고 있는 자녀 학대와 같은 행동은 이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부모를 공경하는 자에게는 어떠한 복이 따르는가? 12절 하반절에 의하면 부모를 공경하는 자는 하나님께서 주신 땅에서 장수하는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러한 복은 하나님의 규례와 명령을 잘 지키면 받게 될 복과 동일한 것으로서(신 4:40; 5:33; 22:7; 25:15 등), 하나님을 대신하여 생명을 주신 부모를 공경하는 것은 곧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공경하는 것과 동일한 까닭에, 생명과 관련된 보상이 주어질 것임을 의미한다. 바울 사도는 에베소서 6:3에서 장수의 복에 더하여 형통함의 복이 덤으로 주어질 것임을 약속한다: “이로써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개역 개정판).


  <13절> 살인하지 말라

   후반부에 있는 다섯 개의 간결한 계명들은 대등한 관계 속에 있는 사회 구성원들에게 적용되는 것들로서, 앞에 소개된 계명들과는 달리 왜 그 계명을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계명을 지켰을 때 주어지는 약속이나 보상에 대해서도 아무런 언급을 하고 있지 않다. 그 중 첫 번째에 해당하는 살인 금지 계명은 세월이 흘러가면서 점차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최근에 이르러서 전쟁, 사형 제도, 자살, 안락사, 정당 방위, 낙태 등을 배격하는 자들은 모두가 한결같이 어떤 형식으로든 이 계명에 호소하고자 한다. 비록 이 계명이 살인과 관련된 다양한 사례들을 소개하고 있지는 않으나, 우리는 그것의 의미와 그것의 적법한 확대 적용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먼저 13절 자체만을 두고 본다면, 이 계명이 금지하는 살인의 범위를 어디까지로 볼 것인지가 불확실하다. 그러나 ‘죽이다’(히브리어 ‘라하츠’)는 동사의 용례를 살펴보면 그 범위가 어느 정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 낱말은 구약성서에서 전쟁의 경우나 사형의 경우에는 한 번도 사용된 적이 없으며, 전반적으로 어떠한 환경 속에서건 또는 어떠한 방법에 의존하건 관계없이 증오심, 분노, 악의, 속임수, 사리사욕 등의 나쁜 마음을 품고서 일부러 다른 사람을 죽이는 경우를 가리키는 낱말로 사용되었다. 이를테면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도 있는 물건, 곧 철 연장이나 돌, 나무 연장 등으로 사람을 죽인 경우와, 미워하는 사람을 밀쳐서 죽이거나 무엇을 던져 죽이거나 원한으로 인하여 손으로 쳐죽이는 경우(민 35:16-21), 또는 이웃에 사는 사람을 미워하여 해치려고 숨었다가 일어나 그를 죽이는 경우(신 19:11) 등의 고의적인 살인이 이에 해당한다.

   이런 고의적인 살인은 생명을 창조하시고 모든 생명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권한을 침범한 행동이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자리를 대신하는 교만한 행동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은 생명의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생명뿐만 아니라 자기 생명까지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다. 그것은 오로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전쟁이나 사형(출 21:15- 17; 22:20; 레 20:1-5, 9; 24:15-16; 신 22장; 24:7 등) 등과 같이 하나님께서 정하신 경우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생명을 고의적으로 빼앗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따라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서 고의적으로 사람을 죽인 자는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그 자신의 생명을 내놓아야만 한다. 고살자(故殺者)를 돌로 쳐서 죽이되(출 21:12; 민 35:16-21; 레 24:17-22; 신 19:11-13; 21:22 등) 짐승을 죽였을 때 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사용되던 속전(출 21:33-34)을 받아서는 안 되며(민 35:31), 그를 제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여야 한다는 규정(출 21:14)이 그 점을 잘 보여 준다.

   그러나 고의가 전혀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였을 때에는 상황이 다르다. 이를테면 잘못 보고 던진 돌이 사람에게 맞아 그를 죽게 한 경우(민 35:23)나, 일찍이 미워한 적이 없는 이웃을 뜻하지 않게 죽였거나 산에서 나무를 자르다가 도끼가 자루에서 빠져 친구를 죽게 했을 경우(신 19:4-5)가 그렇다. 이런 경우를 대비해서 율법 규정은 아무런 원한 없이 실수로 사람을 죽인 자들의 생명을 보호하기 위해 도피성 제도를 마련하였다(출 21:13; 민 35:10-15; 신 19:1-10; 수 20장). 이와 아울러 성읍의 회중으로 하여금 고의적인 살인인지 아니면 실수로 인한 살인인지를 판정하도록 했으며(민 35:12, 24), 고살자라는 판결을 내릴 때조차도 반드시 두 명 이상의 증인이 동일한 증언을 하는 경우에만 그를 처형할 수 있게 했다(민 35:30).

   오늘날에는 어떠한가? 우리는 살인과 관련된 이상의 다양한 규정들을 염두에 두되, 이 계명의 근본이 하나님께서 주신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데에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아울러 우리는 예수께서 산상수훈에서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 곧 살인이라고 말씀하심으로써(마 5:21-22), 물리적인 폭력을 넘어서서 언어상의 폭력과 다른 분노의 표현들에 이 계명을 확대 적용하신 바가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참으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들은 형제를 미워하는 것 자체가 사람을 죽이는 것과 같은 차원에 속한다는 고차원적인 사랑의 가르침에 눈이 멀어서는 안 될 것이다.


  <14절> 간음하지 말라

   이 계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性)에 대한 구약성서의 가르침이 어떠한가를 먼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전체적으로 보아 구약성서는 성 자체를 아름답고 선한 것으로, 그리고 하나님의 창조 질서에 부합되는 것으로 본다. 구약성서의 이러한 시각은 첫 인간의 창조와 남녀 사이의 결합에 관해 묘사하는 창세기 1-2장과, 남자와 여자 사이에 주고 받는 사랑의 노래 내지는 결혼의 노래로 알려진 아가서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 두 본문은 남녀간의 사랑과 그에 기초한 성적인 결합이 하나님의 선물이요,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소중한 삶의 원리임을 가르쳐 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남녀 사이에 정하신 이러한 아름다운 창조 질서가 세속 현실 속에서 제대로 지켜진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 까닭에 구약성서는 성에 관한 문제에 있어서 사랑의 완성으로서의 성적인 결합이라는 개인적인 차원과 종족 보존이라는 사회적인 차원 이외의 성행위에 대해서는 매우 엄격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한 행위의 대부분에 대해서 구약성서는 엄한 처벌을 규정하고 있는 바, 처벌을 받아야 할 불법적인 성 관계에는 여자가 그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힘있는 자들의 권력 남용에 희생되는 경우(창 34:1-2; 삿 19:25-28; 삼하 11:2-5; 13:7-14)와 간통(레 18:20; 20:10; 신 22:22-24), 근친상간(레 18:6-18; 20:11-12, 17-21; 신 27:20, 22-23), 짐승들과 성 관계를 맺는 이른바 수간(獸姦, 출 21:19; 레 18:23; 20:15-16; 신 27:21), 동성(同性) 사이의 성 관계(창 19:5; 삿 19:22; 레 18:22; 20:13) 등이다.

   뿐만 아니라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의 주변 나라들에 유행하던 신전 창기 제도, 곧 남신과 여신 사이의 천상 결혼이 지상 세계에 풍요를 가져다 준다고 믿고서 신전 창기와의 관계를 통해서 그것을 재현함으로써 다산(多産)과 풍요를 약속 받고자 했던 제의적인 매음 행위를 강하게 비판하기도 했다(신 12:2; 왕상 14:23; 왕하 16:4; 17:10; 사 30:25; 57:5, 7; 65:7; 렘 2:20; 3:6; 17:2; 겔 6:13; 20:28; 34:6; 호 4:13; 대하 28:4 등). 이스라엘 안에는 사실 남자들을 상대하는 여자 신전 창기들(신 23:17; 호 4:14)이 널리 활약하고 있었으며, 남자 신전 창기들(왕상 14:24; 22:46; 왕하 23:7)도 이에 못지 않은 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이스라엘에는 신전 창기와 성 관계를 맺음으로써 풍요를 약속 받고자 하는 바알적인 혼합주의 종교가 야웨 신앙의 존립 자체를 크게 위협했다.

   이러한 위기의 때에 출현한 예언자들은 지상 세계의 풍요가 남녀 신들의 성 관계에 의해 좌우된다는 믿음에 근거한 제의적인 성행위에 대해 타협의 여지가 없는 단호한 태도를 보였다(암 2:7; 호 4:13-14; 렘 2:20). 제의적인 매음 행위에 대한 예언자들의 비판 메시지는 하나님을 이스라엘의 남편으로 보고 이스라엘을 하나님의 아내로 보는 결혼 은유(호 1-3장; 렘 2:2-3, 20-25; 3:1-10; 겔 16장, 23장; 사 54:5-8 등)에서 절정에 이른다. 맨 처음으로 결혼 은유를 사용한 호세아는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의 계약 관계를 결혼 관계로 표현함으로써, 제의적인 성행위를 정면에서 공격하고자 했다. 호세아의 이 새로운 비유 메시지는 후에 예레미야(2-3장), 에스겔(16, 23장), 제 2이사야(사 50:1; 54:4-6; 62:4-5) 등에 의해 그대로 채용되었으며, 예수 그리스도와 교회 사이의 관계를 신랑과 신부의 관계로 보는 신약 본문들(마 22:1-14; 25:1-13; 고후 11:2; 엡 5:22-33; 계 19:7; 21:2 등)에까지 영향을 주었다.

   성과 결혼(가정)에 관한 이상의 세속적이고 종교적인 차원의 가르침에 근거해볼 때, 간음을 금하는 본 계명이 이스라엘 백성에게 성(性)의 순결함을 가르침과 동시에 가정과 결혼의 신성함을 지키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해진다. 사실 성적인 간음 행위는 사람을 향한 죄악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을 향한 죄악이기도 하다(창 39:9; 삼하 12:9). 그것은 창조 세계 안에 있는 하나님의 계획, 곧 남성과 여성 사이를 상호 헌신과 충성이라는 긍정적인 역할을 통해 연결짓고자 하나님의 의도(창 2:24-25)를 손상시키는 행동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이 계명이 일상적인 삶의 모든 차원들에서 건강한 남녀 관계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강한 애착에서 비롯된 것임을 암시한다. 이에 비추어볼 때 남자와 여자에 대한 태도나 행동은 존경심, 공경, 순전함 등에 기초하지 않으면 안 된다. 따라서 성적인 학대, 강간, 포르노 등은 확실히 다른 사람의 인격을 훼손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가 아닐 수 없다. 예수께서 친히 이 계명을 확대 적용하신 것은 바로 이 점을 정확하게 지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또 간음치 말라 하였다는 말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 5:27-28).


  <15절> 도적질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재물, 곧 물건이나 짐승을 훔치는 행동과 사람을 훔치는 행동 모두를 금지하는 포괄적인 부정 계명의 성격을 갖는다. 먼저 재물을 훔치는 경우를 본다면, 도적질 금지 규정은 지상 세계에 있는 재물이 그것을 소유한 자의 인격을 대변하는 것이라는 생각에 기초하고 있다. 따라서 재물을 훔치는 것은 단순히 그 소유자의 재산을 손상시키는 행동이 아니라 그 소유자의 인격을 손상시키는 행동에 해당한다. 이 계명의 위반에 대한 처벌은 벌금이나 손해 배상이 주류를 이룬다(출 22:1-9; 삼하 12:6). 이러한 처벌 규정은 범죄자로 하여금 피해자의 재물을 가능한 한 도적질 이전의 상태로 회복시키게 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만일에 도적질한 사람이 배상을 할 수 없을 만큼 가난한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그 경우에 그는 자기 몸을 종으로 팔아서라도 배상을 해야만 한다(출 22:3). 물론 종으로 팔리더라도 7년마다 반복되는 안식년에 그는 신분의 자유를 얻을 수 있었다(출 21:2-6; 신 15:12-18).

   도적질 행위에 이러한 처벌이 따르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인가? 그것은 도적질이 인간과 그가 하는 일(work)의 존귀함에 손상을 입히는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일거리를 주심으로써 인간을 존귀하게 하신다. 인간은 그 일로부터 노동의 열매들을 기대할 수 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삶에 의도하신 창조 질서의 핵심에 해당한다(창 2:15-16). 도적질은 이러한 사실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는 행동이다. 그리하여 도적질한 사람과 피해자 모두가 손상을 입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인간은 자신의 일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들을 활용하는 바, 도둑이 이러한 선물들과 그로부터 비롯되는 복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들을 멸시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이 계명은 또한 모든 인간이 자기 이웃의 재산을 보호함으로써 그를 행복하게 해야 할 책임을 지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가르쳐주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 계명이 사유 재산 자체나 특정 경제 체제의 신성함을 뒷받침하는 역할을 수행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공동 소유를 강조하는 사회 구조를 금지하지 않는다(참조, 행 2:44-45). 이러한 이해의 밑바닥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재물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를 타고났기 때문에 재물을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순전히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 재물을 소유하게 된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야웨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신 8:17-18).

   도적질을 금지하는 이 계명은 또한 재물이 아닌 사람을 훔치는(유괴하는) 경우까지도 포함한다. 단순히 사람을 훔치거나 유괴한 자를 볼모로 하여 더 많은 재물을 얻고자 하는 자에게는 사형의 형벌이 주어진다(출 21:16; 신 24:7). 왜 사람을 도적질하는 행동에 대해서는 이처럼 엄한 형벌이 주어지는가? 재물을 도적질하는 행동은 대부분 경제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이 저지르는 범죄 행위여서 사형과도 같은 엄한 처벌이 불필요하겠지만, 사람을 도적질하는 행동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생명을 손상시키고 인간의 존엄성을 파괴하는 중대한 범죄 행위이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우리는 도적질 금지 계명이 철저하게 하나님께서 주신 재물과 노동 및 인간 생명의 소중함을 강조하는 계명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다. 특히 이 계명은 풍요와 번영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삶의 양식에 비추어볼 때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재물에 대한 지나친 집착, 무절제한 삶의 양식, 그로부터 비롯되는 엄청난 소비 등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널리 퍼진 굶주림과 결핍에 직면하여 도적질을 새로운 차원에서 보게 한다. 예언자들은 정확하게 이스라엘의 바로 이러한 점을 비판한 바가 있다(사 3:16-26; 암 8:4-6; 호 4:2; 렘 7:8; 미 3:1-3; 겔 22:29; 참조, 약 5:1-6). 부의 축적은 결국 누구의 희생을 기초로 한 것인가? 종종 불충분한 임금이나 돈벌이가 도적질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닌가? 이러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누구에게나 노동의 대가를 정당하게 지불해 주는 건강한 사회, 그리하여 도적질하지 않아도 되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를 만드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가를 마음 속 깊이 새겨두지 않으면 안 된다.


  <16절>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이 계명은 재판 과정에서 거짓된 증언을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23:1-2). 본래 이스라엘의 재판 제도는 억울하게 희생되는 자가 생겨나지 않게 하기 위하여 복수 증인 제도를 취했지만(민 35:30; 신 17:6; 19:15), 두세 사람이 말을 맞추어 거짓 증거를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었다(시 27:12; 35:11; 잠 6:16-19; 19:5, 9 등). 나봇의 죽음(왕상 21:10, 13)과 예수의 죽음(마 26:59-60) 및 스데반 집사의 죽음(행 6:13) 등이 그러했다. 시내산 언약법은 그러한 속임수에 대하여 대단히 무거운 형벌을 규정하고 있다. 신명기 19:15-19에 의하면, 위증죄를 범한 거짓 증인은 그가 거짓 증거로 다른 사람에게 해를 주려고 했던 것과 똑같은 형벌을 받아야만 했다.

   구약성서에서 이러한 처벌의 가장 분명한 예는 북왕국 아합과 이세벨의 죽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은 거짓 증인들을 매수하여 나봇이 하나님과 왕을 저주하였다는 위증을 하게 하고서, 그 죄목으로 나봇을 죽인 후에(레 24:15-16) 그의 포도원을 빼앗았지만, 그 위증죄로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나봇의 죽음과 똑같은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만 했던 것이다(왕상 21:19-24; 왕하 9:30-37). 이 계명의 이러한 처벌 규정은 이 계명의 주요 관심사가 단순히 다른 사람을 공격하고 그 사람의 명성에 손상을 입히는 거짓 증거 행위를 벌하는 데에 있기보다는, 거짓 증거의 위협으로부터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정의로운 공동체를 지키려는 데에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이 계명의 신학적인 의미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넓은 의미에서 볼 경우에 이 계명은 진실을 말해야 하는 경우에 진실을 알고도 침묵하는 행동에도 적용할 수 있으며(레 5:1), 모든 형태의 거짓말에까지 확대 적용할 수 있다. 후자의 경우에는 다른 사람들의명성에 손상을 입히거나 그들을 나쁘게 평가하고자 하는 속임수, 중상모략, 한담, 실없는 말 등 모두가 포함된다(레 19:16; 신 5:20; 수 7:11; 호 4:2 등). 그러한 행동은 속임수를 쓰기 위한 계획적인 노력을 수반할 뿐만 아니라 아무 생각 없이 한 험담이나 소문까지도 포함할 것이다. 이렇듯이 이 계명은 개개인의 관심사를 넘어서서 사회 구성원들의 신뢰성에 바탕을 둔 공동체의 행복에까지 그 적용 범위가 확대된다. 이 점은 세 번째 계명의 의미를 폭넓게 해석한 예수의 가르침(마 5:33-37)에 잘 반영되어 있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5:37).

   긍정적인 시각에서 본다면, 이 계명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에 끝까지 진실할 것을 요청한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모든 사람들이 건설적인 언어를 사용하고 다른 사람들에 관해 말할 때 그들의 행복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말할 것을 요청한다. 야고보서는 특히 이러한 문제들이 공공의 평화에 대하여 갖는 중요성과 관련하여 상당히 날카로운 지적을 한다(3:1-18): “형제들아, 피차에 비방하지 말라. 형제를 비방하는 자나 형제를 판단하는 자는 곧 율법을 비방하고 율법을 판단하는 것이라. 네가 만일 율법을 판단하면 율법의 준행자가 아니요, 재판자로다....”(약 4:11-12).


  <17절>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

   출애굽기와 신명기는 어떠한 이유에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집’과 ‘아내’의 순서를 바꾸어 사용한다:


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출 20:17).


네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도 말지니라. 네 이웃의 집이나 그의 밭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도 말지니라(신 5:21).


신명기가 ‘아내’를 독립적인 계명으로 분리시킨 것은 그것이 단지 남자들에게만 해당되는 계명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집’이라는 낱말은 이웃 사람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포함할 것이다. 그러나 이 계명의 해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문제는 히브리어 ‘하마드’라는 낱말의 의미이다. 이 낱말은 ‘탐하다’ 또는 ‘갈망하다’는 뜻을 가진 것으로서, 본래 단순히 의지적인 충동을 가리킬 뿐만 아니라 탐심의 대상이 되는 것을 소유하게 만드는 행동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를테면 에덴 동산의 하와가 선악과를 보는 순간 그것이 지혜롭게 할만큼 ‘탐스러운’ 것임을 알고서(창 3:6) 그것을 따먹은 것이나, 아간이 여리고 성에서 시날산의 아름다운 외투 한 벌과 은 200세겔 및 50세겔 중의 금덩이 하나를 보고 ‘탐내어’ 취한 행동(수 7:21)이 그렇다.

   ‘하마드’라는 낱말의 의미가 이러하다는 것은, 이 마지막 계명이 인간의 외적인 행동을 규제하는 여타 계명들과는 달리, 인간의 내면 세계에 있는 탐욕과 탐심 자체를 금지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음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 이 열 번째 계명이 탐욕적인 동기 자체를 금한 것은, 그것이야말로 모든 불의한 행동의 뿌리가 되기 때문이요, 모든 사회적인 부정과 부패의 근원이 되기 때문이다(암 2:7; 미 2:1-3; 왕상 21장 등). 뿐만 아니라 탐심은 사람들 사이의 관계에서 사회적인 무질서와 말썽을 불러일으키는 기본적인 원인이나 다름이 없다. 이것은 결국 탐심이 없다면 다른 계명들에 대한 불순종은 생겨나지도 않을 것임을 의미한다. 예수께서도 인간의 탐심이 모든 죄악의 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다음과 같은 경고의 말씀을 주신 바가 있다: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 데 있지 아니하니라”(눅 12:15).

   오늘날의 상황에 비추어볼 경우에 이 계명은 온갖 탐욕과 탐심을 부채질하는 풍요로운 사회에 대하여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누구나 인정하는 바와 같이 우리가 사는 시대는 사실 점점 더 많은 것들을 가지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자극하고 있다. 우리는 매일의 삶 속에서 우리의 탐심을 자극하는 각종 물질들과 재물들에 대한 균형 감각을 유지한다는 것이 점점 힘들어짐을 느끼고 있다. 많은 재물들에 대한 애착 때문에 영생 얻기를 포기한 채로 근심 어린 모습으로 돌아가는 부자 청년의 모습(마 19:16-26; 막 10:17-27; 눅 18:18-27)이 곧 우리 시대의 자화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과 자연 모두에게 건전하고 선하고 유익한 갈망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들에 대한 갈증을 더하게 할뿐인 갈망 사이를 구별하는 법을 배우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신앙의 기본 원리(마 6:24; 엡 5:3)를 분명하게 세우는 한편으로, 자신의 넉넉한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베풀 줄 아는 나눔과 섬김의 정신(신 24:19-21; 고후 8:9-15)에 충실한 삶을 터득하는 데 힘써야 할 것이다.



        4. 설교를 위한 메시지


   (1) 신약성서의 시각에서 볼 경우에, 그리스도인들이라고 해서 십계명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사실 예수께서는 산상수훈(마 5:17-32; 참조, 19:18-22)에서 그리스도인의 영적인 세계와 관련하여 십계명을 가장 깊은 단계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지켜야 함을 강조하신 바가 있다. 그는 또한 십계명이 가지고 있는 이러한 특징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라는 두 개의 긍정 계명으로 요약하신 적이 있다(마 22:37-40; 막 12:30-31; 눅 10:27). 바울 역시 로마서에서 사랑에 관해 교훈하면서 거의 같은 얘기를 하고 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8-9).

   

   예수와 바울의 이러한 가르침은 십계명의 두 부분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고 도리어 그것을 한데 묶어 무한정하게 확대시키되, 사랑의 요구를 실천에 옮긴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밝히고 있는 셈이다. 이들의 가르침에 의하면 사랑은 항상 십계명이 규정하는 모든 것들을 넘어서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십계명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루신 일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로 하여금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게 한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는 율법, 곧 십계명의 요구를 이룸에 있어서 자유를 얻은 자로되, 율법을 행함은 기독교인이 되게 하는 수단이 아니라 사랑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의 신앙적인 삶을 만드는 데 꼭 필요한 가르침의 역할을 수행한다.

   (2) 십계명의 서문(1-2절)에서 보는 바와 같이, 십계명은 하나님의 구원 은총(출애굽 해방)을 경험한 자들이 그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켜야 할 신앙적인 응답의 핵심에 해당한다. 따라서 십계명은 당연히 하나님의 백성이 자신의 취향에 따라 마음대로 선택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원받은 자의 삶에 대해서 대단히 특별한 방식으로 교훈하는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다. 그 까닭에 구원받은 하나님의 백성은 개방적인 자세를 가지고서, 변화하는 삶의 정황들 속에서 하나님의 구속 은총에 끊임없이 응답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아울러 그들은 자신을 위한 하나님의 놀랍고도 무조건적인 구원 행동에 보답하고자 하는 마음으로 항상 새롭게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기준인 십계명에 맞추고자 노력해야만 한다.

   (3) 오늘날 우리는 이스라엘 주변 세계의 자연 종교들처럼 또는 구약 시대의 이스라엘처럼 신상이나 금송아지를 만드는 어리석음을 범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유일하신 창조주이신 야웨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충성과 순종 및 신앙과 찬양 등의 대상이 되신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과 찬양을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게 돌리는 우상 숭배의 죄를 범할 때가 많다. 이 점을 잘 알고 있던 사도 바울은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기는 것”(롬 1:25)이 곧 우상 숭배임을 강조한다. 굳이 그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야웨 하나님만이 절대적인 분이라는 사실은 누구도 부정하지 못한다. 따라서 모든 피조물은 상대적인 존재요 상대적인 가치밖에 가지고 있지 못하다. 이러한 상대적인 존재에게 절대적인 가치를 부여하는 태도야말로 우상 숭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하나님을 젖혀둔 채로 물질, 재물, 명예, 사회적인 지위, 세상 권세, 교회의 교권, 과학 기술, 이데올로기 등, 이 모든 것을 절대화시키는 태도는 참으로 위험스러운 우상 숭배인 것이다.

   (4) 오늘의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하거나 하나님을 불명예스럽게 하는 모든 말과 행동을 피하는 대신에, 그의 선하신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그에게 돌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살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거짓 맹세하는 잘못을 범하지 말아야 하고, 가능하다면 자신의 신실함과 정직함을 강조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는 행동 역시 삼가는 것이 좋다. 그리고 기왕이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맹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의롭고 선한 삶을 사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아울러 우리는 자신이 미워하는 사람을 저주하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함부로 사용해서도 안 될 것이며, 하나님을 믿는 자로서 바르고 정직한 삶을 영위함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게 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5) 안식일(오늘날의 주일)을 거룩하게 지킨다는 것은 엿새 동안 열심히 일하는 삶을 전제한다. 따라서 부지런히 일하지 않는 사람은 안식일의 쉼을 누릴 자격이 없다. 더 나아가서 주일의 쉼은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다. 나의 쉼이 소중함을 안다면 남의 쉼 역시 소중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더 나아가서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안식일의 쉼을 통하여 창조주이시요 구속주이신 하나님과의 깊은 영적인 관계를 맺는 데 힘써야 하며, 가능하다면 안식일이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맡기신 자연을 쉬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날이기도 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오늘날 우리가 맞고 있는 생태계의 위기나 환경 문제를 해결하는 데 적극적으로 나서야 할 것이다.

   (6) 하나님을 믿는 자들은 생명을 창조하는 일에 하나님의 동역자 내지는 대리인으로 활동하는 부모(특히 연로하신 부모)를 공경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다. 물론 부모를 공경하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나 어머니를 차별한다는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이와 더불어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공경 받는 부모가 되기 위해서라도 자녀들을 믿음으로 잘 양육할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올바른 신앙의 유산을 남겨주어야 할 책임을 지고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에게 부모와도 같은 분으로 다가오시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 늘 머물고자 하는 순전한 믿음을 가지고서 한 단계 더 높은 신앙 목표를 향해 꾸준히 전진해야 할 것이다.

   (7) 오늘의 우리는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것이라는 구약성서의 가르침에 충실하여, 다른 사람의 생명을 해치거나 남을 미워하고자 하는 유혹을 능히 이길 수 있어야 한다. 아울러 하나님께서 왜 도피성 제도를 두셨는가를 늘 염두에 두면서, 혹시나 우리 주변에 아무런 잘못도 없는데 억울하게 고통 당하거나 그 생명에 해를 당하는 이웃이 없는지 늘 관심을 가지고서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이로써 우리는 단순히 생명을 해치거나 생명에 손상을 입히는 행동을 배격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서 모든 생명이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가운데 참된 평화를 누리게 하는 아름다운 생명 공동체를 만들어내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8)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선물로 주신 성(性)은 아름답고 선한 것이지만,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사랑의 완성으로서의 성적인 결합이라는 개인적인 차원과 종족 보존이라는 사회적인 차원 이외의 성 관계에 대해서 엄격한 태도를 보임으로써, 가정과 결혼이 하나님의 창조 질서로서 갖는 신성함 내지는 그에 기초한 공동체의 질서와 건강을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를테면 여자가 강한 남자들의 권력에 희생되는 일이나, 간통 행위, 근친상간, 수간, 동성애, 성적인 학대, 강간, 포르노 등이 그렇다. 더 나아가서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야웨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모든 믿는 자들의 남편이 되신다는 기본 인식 하에 신앙적인 정절을 지키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9)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과 쉼의 기본 질서를 지키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다. 따라서 아무런 일도 하지 않은 채로 남의 수고와 땀의 결실을 도적질하는 행동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어기는 중대한 범죄 행위에 해당한다. 우리는 창세 이후로 지금까지 끊임없이 일하시고 행동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을 본받아, 자신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보여야 하며, 그럼으로써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지키는 파수꾼 역할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 아울러 남의 것을 훔친 사람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그것을 원상복귀시켜야 할 책임을 지는 바, 예수 믿는 사람들은 꼭 재물을 훔친 경우가 아니라 할지라도 남의 것에 어떤 형식으로든 손해-정신적인 피해까지도 포함하여-를 입혔을 경우에는, 그것을 배상할 줄 아는 신앙인의 기본 덕목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가난 때문에 도적질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지 않도록 자신의 유여한 것으로 약한 자들을 돕는 섬김과 나눔의 실천에도 인색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10) 하나님의 사람들은 거짓 증언이나 거짓말로 남을 해치려는 태도를 용납해서는 안 된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보다도 정직하고 진실해야 할 사람들로서, 자신의 정직한 삶을 통하여 우리 사회가 상호 신뢰가 가능한 정의로운 공동체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리스도인들은 단순히 거짓 증언이나 거짓말 또는 유언비어를 날조하여 유포하는 행위를 배격하는 것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진실을 알고 있고 또 진실을 말해야 할 경우에 침묵을 지키는 비겁한 삶의 모습까지도 극복할 수 있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진실과 진리를 위해 자신의 삶을 내걸 수 있는 순교자적인 삶의 자세가 모두에게 요구될 것이다.

   (11) 하나님의 계명을 위반하는 모든 행동은 인간의 내면 세계에 있는 탐심과 탐욕에서 비롯된다. 탐심은 재물이나 명예나 권세 등에 몰두하게 함으로써 인간의 존재 전체를 망칠 뿐만 아니라, 모든 불의한 행동의 뿌리가 되며 사회적인 부정과 무질서의 근원이 된다. 따라서 탐심을 억제하고서 절제 있는 삶을 산다는 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올바로 지키는 것을 넘어서서 건강하고 깨끗한 사회를 만드는 지름길이기도 하다. 그것은 특히 각종 욕망을 부추기고 소유와 소비에 대한 갈증을 부채질하는 오늘날의 풍요로운 시대에 더욱 절실하게 요구된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자신을 비우시고 종의 형체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받아 청빈하고 검소한 삶을 살되, 소유에 집착하는 삶처럼 비참한 것도 없다는 사실을 신앙 생활의 기본 원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출처 : 춘천 대우인력 김진규
글쓴이 : 대우인력 김진규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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