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의 연역적 구성과 귀납적 구성
설교는 크게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가지 전달 방법으로 나누어진다. 이 두 가지는 각기 나름대로의 장단점을 갖고 있으며 설교자의 취향이 방법론의 선택에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방법론을 결정하는 데 더 중요한 것은 회중의 경향이다. 회중이 설교의 직접적인 대상이기 때문이다.
연역적 구성
회중은 매우 다양하다. 그들의 종사하는 직업만큼이나 그들이 설교를 받아들이는 이해도 역시 천차만별이다. 물론 학력과 상관없이 설교를 잘 이해하는 지혜로운 분들이 계심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시인할 수밖에 없는 것은 회중 가운데는 설교를 알아듣는 이해에 있어 열등한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고 또 대강적인 수준에 있어서도 지적 수용도가 낮은 집단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학력이 전부는 아니지만 고학력이 대부분인 회중은 저학력이 주종을 이루는 집단에 비해 이해도가 높은 게 사실이다. 또 집중도가 떨어지는 노인 위주의 회중을 상대해야 하는 설교자는 청장년이 주류를 이루는 회중을 가진 설교자에 비해 더욱 전달적 측면에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연역적 구성의 원리
만일 이런 회중을 갖고 있는 설교자라면 설교의 전달 방법도 달라져야 하는데 이때 가장 먼저 추천하고 싶은 것이 연역적인 방식이다. 연역적 방식이란 하고 싶은 요점을 설교의 앞부분에 놓는 방식이다. 즉 원리 + 일반적 사례 + 적용의 구성으로 설교를 풀어가는 방식이다. 예를 들어 호 12:1-6을 본문으로 회개를 주제로 설교한다 할 경우 설교자는 본문을 연구해서 얻은 결론적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설교 앞부분에 놓는다:
- 원리: 하나님께 돌아오는 길만이 우리가 살 수 있는 길인데 그 구체적인 방법은 곧 우리가 회개하고 의롭게 사는 것입니다.
- 일반사례: 이스라엘의 경우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서 정의롭게 살지 못했습니다.
- 적용: 여러분은 정의롭게 삶으로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물론 이 방법은 회중의 수준을 고려하여 결론적으로 말할 원리를 설교 앞에 놓음으로 전달의 효율성을 기하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아담스(Jay Adams)가 주장하는 것처럼 설교의 주제를 일찍 밝히면 설교 도중에 다양한 표현을 사용하여 적절히 반복함으로써 주제를 재차 강조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하지만 이 방식은 장점 못지 않게 식상함으로 빠질 수 있는 위험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회중의 입장에서는 이미 들을 내용을 다 들었기 때문에 원리 다음에 나오는 일반적인 사례들을 다루는 경우 자칫 집중력이 상실될 우려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얼마나 긴장의 끈을 놓치지 않고 설교를 진행시키는가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핵심 사안이 될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일반적인 사례를 들 경우 본문에 기록된 이스라엘의 사례가 주종을 이룰 것인데 가급적 본문에 언급되지 않은 배경적 설명이나 본문에 나오는 인물에 대한 새로운 구성 등의 방식 그리고 회중의 일반적 삶과 경험적으로 연결될 수 있는 소재와의 접맥 등을 염두에 두고 진행시켜 나가면 좀더 효과적일 것이다.
심층심리학적 연역구성
지금까지 우리는 회중의 지적 능력을 기준으로 한 연역적 방식을 논했는데 그렇다고 이 방식이 단지 회중의 수준 때문에 필요한 방식만은 결코 아니다. 성경본문 중에는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이해가 가지 않는 불가해성을 포함하고 잇는 본문들이 적지 않게 많이 있다. 이런 본문 가운데 하나가 사기꾼 야곱이 장자권을 획득하고 믿음의 삼대조상이 될 뿐 아니라 예수님의 육적 조상이 된 사실이다. 이런 경우는 당연히 그 이유를 설명해야하는 논쟁적 구조를 필요로 한다.
이처럼 연역적이면서 동시에 논쟁적인 구성으로 설교를 진행시키는 방식에 대해 독일의 설교학계는 심층심리학의 이론에 의지해서 다음과 같은 형식을 사용해왔다: ① 정의 ② 문제제기 ③ 문제 해결의 시도 ④ 성서적 반증. 만일 이 도식에 의해 야곱 이야기(창 32: 22-31)를 구성한다면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정의: 여러분은 야곱의 목숨을 건 신앙 의지를 본받아야 한다.
- 문제제기: 야곱은 형과 아버지까지 속인 사기꾼 아닌가?
- 문제해결의 시도: ⓐ 비상한 상업적인 영악함도 남보다 탁월한 요소이다. ⓑ 라헬을 차지하는 데서 보는 것처럼 불굴의 의지도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 성서적 반증: 천사와 씨름하는 데서 볼 수 있듯 그는 다른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입신출세에 만족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제대로 살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괴로워하며 이스라엘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목숨을 건 씨름을 감행한 것이다.
일반적인 대화에서도 무엇인가 질문과 이의 그리고 반대가 제기될 때 양 화자가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마련이다. 마찬가지로 설교에서도 일방적으로 아무 이견 없이 듣기만 하게 만드는 설교는 진정한 의미에서 전달되는 설교라 하기 어렵다.
따라서 설교자는 회중로 왜? 라는 의문을 품도록 논리를 끌고가는 것과 나아가 이 의문을 완벽하게 수긍할 수 있도록 반증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하다. 함께 고민의 터널을 헤쳐나가는 설교는 두말할 것 없이 설교의 일방성이라는 위험성에서 떠난 설교요 설교자의 독백이라는 반(反) 대화적 성격을 탈피한 설교이다. 연역적 구성은 이런 설교의 진행에 있어 매우 효과적인 방식이 될 수 있다.
설교의 귀납 방식
이 방식과 관련해 다음의 이야기를 상기해 보자. 그 유명한 자칭 국보요 천재였던 무애 양주동 박사도 이등변 삼각형의 내변의 합이 왜 180도가 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더란다. 그런데 수학 선생님이 가르치시는 대로 따라서 짚어나가다 보니까 몇 번 고개를 끄덕이는 사이에 정확히 180도가 되는 것 아닌가? 물론 무애 선생이 말하고자 했던 바는 우리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어찌어찌 몇 번 “예, 예” 하다보니 일본의 속국이 되어 있더라는 쓰라린 이야기를 하려던 것이었지만 사실은 이 아픈 말 속에 진정 멋진 설교의 이치가 숨겨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설교자가 말할 내용을 설교 서두에 두었다고 하자. 그래서 회중이 그날 설교의 핵심을 설교 서두에서 다 인지했다고 하자. 앞에서 말한 연역적 설교가 여기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는데 물론 어떻게 진행하는가에 따라 다르겠지만 웬만한 연역적 기술이 아니면 들을 것을 다 들은 회중으로 하여금 계속해서 듣고 싶은 욕구가 일어나게끔 자극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생각해 보라! 돈을 빌리러 갔는데 한마디로 ‘돈 없어!’라는 말을 들으면 들을 이야기는 다 들은 것 아닌가? 그 나머지 이야기는 들으나 마나 뻔한 핑계요 변명이요 설교(?)가 되는 거다.
귀납적 방식의 윈리
그래서 예로부터 모든 연설의 백미로 꼽혀온 것이 소위 귀납적인 연설 방식이다. 이 귀납적 방식이란 쉽게 말해 말하고자 하는 핵심을 연설의 마지막에 두는 방식이다. 즉 일반적 사례 + 원리 + 적용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욥기 1:13-22을 본문으로 설교한다 할 경우 다음과 같이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 일반사례: 고난은 악한 자뿐 아니라 동방의 의인인 욥에게도 닥쳤던 것처럼 보편적인 성격을 갖고 있습니다
- 원리: 모든 고난에는 뜻이 있습니다.
- 적용: 여러분은 고난의 순간에 하나님을 바라보십시오.
여기서는 욥의 경우만 들어 간단하게 서술했지만 좀더 포괄적이고 광범위한 접근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 고난을 바라지 않는 인간들의 심성이라는 고난과 정반대의 방향에서 설교를 시작해서, ⓑ 그럼에도 불구하고 몰려드는 고난을 여러 다양한 소재를 사용해서 설명하고, ⓒ이 경우에 갖게 되는 신앙인의 회의로 갈등의 수위를 높인 다음, ⓓ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 가운데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강하게 제시한 후, ⓔ 당신이 바로 이 굳센 믿음의 주인공이 되라는 권면으로 설교를 진행시킬 수 있다.
사실 귀납적인 설교방식은 매우 고급스런 방식이자 매우 어려운 방식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설교가 처음부터 끝까지 논리적인 끈으로 정교하게 이어져 있기 때문이며 따라서 그만큼 설교를 작성하기에도 힘이 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설교자가 힘들다고 해서 회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는 방식에 소홀히 할 수는 없다. 만일 설교자의 편함을 설교준비의 우선적 고려사항으로 여긴다면 그것은 설교자의 죄이다.
오늘의 회중은 납득이 가야 듣고 이치에 맞아야 들으려 한다. 무조건 성령의 이름만 들먹이면서 소리 크게 지르는 설교 앞에 어린양처럼 언제 까지나 고분고분할 것이라는 착각은 이제 버려야 한다. 어떤 분들은 사회에서 골치 아픈 일들로 시달린 회중에게 적어도 교회에서만이라도 쉼을 주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설교의 단순화를 주장한다. 당연한 지적이다. 지친 사람들에게 억지로 들어야 하는 노동을 또다시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단순한 것과 유치한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이다. 오늘의 회중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단순한 설교이지 유치한 설교가 아니다. 평신도들의 듣는 수준은 하늘을 날아가는데 단위에 높이 서서 하나님 말씀을 대언하는 설교자는 바닥을 기고 있다면 그런 상태에서 나오는 설교는 단순함이 아닌 유치함이다.
따라서 회중이 생각하며 들을 수 있는 설교를 준비하라. 알아들을 수 있는 지적인 귀를 갖고 있는 오늘의 회중은 당신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는 모험의 길로 나서기를 고대하고 있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판단하고 스스로 결단할 수 있는 그들에게 언제까지 엄마가 갓난아이에게 하듯 입으로 씹어서 넣어주겠는가?
귀납적인 설교를 올바로 하기 위해서는 한 사안에 대해 직접 들어가기보다는 그 사안과 반대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든지 - 가령 청소년문제를 이야기하려면 아무 문제없는 어린아이와 그에 대한 부모의 기대로부터 시작 - 아니면 설교 주제와 연결되는 예화부터 시작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아니면 하나의 공통 성격을 가진 몇 가지 사안들을 차례로 나열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방법을 통해 회중은 설교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스스로 비교, 분석하게 되며 또 멀리서부터 차츰 주제에 접근해 올 수 있게 된다. 즉 회중은 설교자가 이야기하려는 것을 파악하려 하고 이야기한 것을 분석하려 하게 된다. 만일 설교자가 회중을 이렇게 유도할 수만 있다면 이미 회중은 집중적으로 설교에 참여하고 있는 것이요 따라서 그 설교는 이미 전달되고 있는 설교라 할 수 있다.
심층심리학적 귀납구성
이런 귀납적인 설교를 위해 독일 설교학계는 심층심리학의 도움으로 다음과 같은 도식을 만들어 냈다: ① 도입 ② 문제제기/갈등제기 ③ 상식적 인간적 문제 해결시도 ④ 성경적 해결.
이 방법 역시 설교 서두에 일반론에서 시작해서 그것이 갖는 문제와 갈등요소를 제시하고 그것을 풀기 위한 일반적 인간적 방법들을 제시한 후 성경본문이 핵심적으로 제시하는 해결책을 제시하는 귀납적 방식의 일종이라 할 수 있다.
회중과 설교자가 함께 문제 해결의 터널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설교! 이것이야말로 대화로서의 설교에 가장 잘 어울리는 방식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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