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자가 곧 설교의 메시지입니다
설교는 설교자의 인격 그 자체입니다. 인격을 전달하십시오!
설교를 설교 되게 하는 요소로는 설교의 내용인 하나님의 말씀, 설교를 전달하는 설교자, 설교의 직접적인 대상인 회중 그리고 영적인 능력으로 감동과 변화를 가능케 하시는 성령을 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모든 요소 가운데 어느 것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마는 이 장에서는 특히 설교자에 주목하려고 합니다.
사실 동일한 본문을 놓고 100사람의 설교자가 설교할 경우 비록 본문의 핵심에는 다같이 접근할 수 있다 손 치더라도 전달의 방식과 설교에 쓰이는 소재의 사용 그리고 설교의 전달에서는 제각각 다른 설교가 만들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설교자가 가진 신학적 입장, 자라온 문화적 배경, 멘탈리티, 성격, 인간관계, 학문적 배경과 깊이, 통찰력 등등이 이런 차이를 만들어내는 요소임은 말할 필요가 없겠지요. 이것은 설교에서 설교자라는 설교의 통로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웅변해 주는 것입니다.
역사적인 변천
기독교 역사를 보면 제도적 권위가 설교의 규정 틀을 결정한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중세가 이런 면을 가장 극명하게 보여 준다 할 수 있는데, 가령 중세교회는 서품받은 성직자들에게 교회의 모든 성례를 독점케 하는 ‘성사 전권’과 법적 행정적 권한을 의미하는 ‘사목 전권’을 부여하였습니다. 따라서 이런 법적인 장치 안에 있기만 하면 설교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게 행해질 수 있는 권리요 의무에 해당되는 것이었습니다.
‘만인 사제설’을 바탕으로 한 개신교에서는 이런 전통을 거부하였지만, 그럼에도 공회 앞에서 복음의 공적 집행을 수행해야 하는 특수 소명은 여전히 필요한 것이었고, 이를 위해 마르틴 루터는 ‘내적 소명’과 ‘외적 소명’를 제시하면서 하나님의 부르심에 대한 확신, 일정 기간의 신학 수업, 안수를 통한 공회 앞에서의 공인을 그 조건으로 내세웠습니다. 이것은 의식의 수행과 예전의 집행자에 의미를 두었던 중세교회와 달리 ‘말씀에의 봉사’에 그 초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이러한 개혁 초기의 순수한 동기는 탈색되고 또다시 성직자와 회중을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고정시키는 중세적인 성직 이해로 되돌아가 버리는 경향을 보여 왔습니다. 이것은 설교에서도 볼 수 있는데, 가령 18세기 영적 대각성운동이 일어나기 직전까지만 해도 설교자들은 준비된 설교를 낭독해 나가는 방식을 취해 왔습니다. 이것은 그 밑바탕에 설교자라는 법적 지위와 권위에 의지하고 안주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하나의 전형입니다. 거기에는 한 인간으로서의 설교자 인격은 별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다만 법적으로 보장된 자격 있는 설교자인가 하는 것에만 초점이 있었습니다. 물론 설교자의 자격을 법적으로 규정하는 것은 교회의 질서를 위해서나 복음의 올바른 해석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마는 그러나 설교의 근거가 어떻게 법적 지위만으로 충분하겠습니까?
리처드 박스터는 교회와 기독교의 비극을 이런 말로 표현합니다:
“갱생되지 않고 미숙한 목사들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스도인이 되기 전에 사람들이 설교자가 된다는 것,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마음으로부터 그리스도에게 헌신함으로 성화되기 전에,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강단의 헌신에 의해 성화된다는 것 그리고 알지 못하는 하나님을 예배하고 알지 못하는 그리스도와 알지 못하는 성령, 알지도 못하는 성결의 상태와 하나님과의 교통 그리고 알지도 못하고 영원히 그들에게 알려지지 않는 영광을 설교하는 것은 교회의 공통된 위험이자 재앙이다. 자신이 설교하는 은혜와 그리스도를 마음에 소유하지 못한 자는 단지 무정한 설교자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대학에서 공부하는 우리 학생 모두는 이것을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주님 자체를 알지 못하고 그를 그의 심중에서 높이지 못하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고 갱신시키는 사역에 정통하지 못한 채 하나님의 하신 일 가운데 지극히 일부를 아는 것에 그리고 분열된 국가의 언어가 그들에게 부여한 몇몇 이름들을 아는 것에 그들의 시간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들 자신에게 얼마나 가엾은 일인지 모른다. 그들이 자신들의 재치와 언어로 그 많은 이름과 나라들로 인해 분주하여 하나님과 성인들의 삶에 대해서는 이방인이 되는 동안, 그들은 단지 헛된 흔적을 걷는 것이며, 그들의 생을 마치 꿈꾸는 사람처럼 허비하는 것이다.”1)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
박스터의 견해처럼 법적 지위 이전에 한 신앙인으로서의 자세와 부름받은 소명인으로서의 자세가 설교자에게는 우선적으로 전제되어야 합니다. 이런 요소 위에 필립 브룩스가 말하는 ‘진리와 인격’이라는 설교의 두 요소가 신중하게 첨가되어야 합니다. 말하는 내용이 진리라면, 그것이 전달되는 설교자라는 통로는 다름아닌 인격입니다. 그런데 만일 설교자의 인격이 회중들로부터 전혀 신뢰를 받지 못한다면 진리의 깊이가 아무리 깊다 하여도 그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의미의 설교란 곧 인격을 통한 진리의 전달이기 때문입니다.
“설교란 인간에서 인간으로 전해지는 진리의 전달이다. 설교에는 두 가지 요소가 담겨 있는데 진리와 인격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그 어느 것도 생략될 수 없으며 또 그럴 경우 그것을 설교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가장 분명한 뜻에 대한 표명인 참된 진리는 형제의 인격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달되는 그런 방식을 제외하면 진리가 설교된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을 창공에 쓴다고 가정해 보라. 너무 오랫동안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으로 존경받아온 나머지 그것의 페이지를 적어 넣은 사람들의 생생한 인격이 점차 시들해져가는 책 속에 구현되어 있다고 추측해 보라. 그 어떤 경우에도 거기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 반대로 어떤 사람이 다른 사람들에게 그들이 진리라고 주장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면, 만일 그들이 자신들의 설득력이나 친화력을 통해 타인들로 자신들의 생각을 경청하게 한다든지 혹은 그들의 뜻을 실행하게 한다든지 자신들의 총명함을 호소한다든지 해도 그 일체의 것 역시 설교가 아니다. 전자는 인격을 결여하고 있고 후자는 진리를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설교란 인격을 통해 진리를 가져오는 것이다.”2)
마샬 맥루한이 말한 ‘매체가 곧 메시지’라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지만 엄밀히 말해 설교는 ‘인격의 전달’이라는 차원을 지나 설교자가 곧 메시지라는 말이 성립이 될 수 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것은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내용입니다.
설교자가 곧 메시지
첫째는 설교자에 대한 회중의 인격적 신뢰가 설교의 수용 여부를 가늠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규모가 큰 교회의 경우라 해서 크게 예외가 될 것은 없지만, 적어도 회중의 규모가 중·소규모인 대다수 교회의 경우 설교자는 회중에게 완전히 노출되어 있기 마련입니다. 교역과 목회의 전부분은 회중과의 빈번한 접촉을 피할 수 없으며 목회자의 일거수 일투족은 크든 작든 회중에게 하나의 인상을 남기게 되고 관찰의 대상이 됩니다. 만일 이런 관찰의 결과가 설교단 위의 설교자와 설교단 밑의 목회자 사이에 어떤 균열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도 부정적인 균열로 나타나게 된다면 그것처럼 심각한 문제가 또 있겠습니까? 설교단 위의 설교자가 아무리 기가 막힌 설교를 한다 하더라도 평상시 설교자의 인격에 대해 실망하고 신뢰를 잃어버린 경우라면 그 설교는 절대 회중에게 선한 영향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반대로 설교자가 좀 어눌하고 소위 말재주(?)가 없다 하더라도 회중에 대한 신뢰가 이루어진 설교자라면 회중들은 설교의 내용을 듣기 이전에 이미 설교를 들을 마음의 준비를 갖추기 마련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사람들은 자신들이 믿고 존경하는 사람이 하는 말에 대해서는 증거를 따지지 않고 믿으려는 경향이 있으며, 반대로 자기가 싫어하고 인정하지 않는 사람의 말은 확실한 증거를 댄다 하더라도 믿으려 하지 않는 경향이 있다고 합니다.
따라서 진정한 설교는 이미 설교자가 설교단에 오르기 전에 시작되는 것이며 나아가 성패가 결정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근엄한 선비가 되라거나 외적인 경건에 몰두하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설교자를 회중과 떼어 놓는 철책선과 계곡이 될 뿐입니다. 진정한 인격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입니다. 회중들이 설교단 밑의 목회자에게서 진실과 인격을 읽을 수 있어야 합니다. 말하자면 진실한 사람 됨이 설교 이전에 설교를 결정한다는 이야기입니다.
둘째로 ‘설교자가 곧 메시지’라는 이야기는 좀더 실제적인 문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슐라이에르마허(Schleiermacher)는 설교를 가리켜 “관념화된 경건한 자의식의 전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이 말이 의미하는 바는 이렇습니다.
우선 설교자는 설교 본문과의 일차적 경험자입니다. 설교자는 본문과 씨름하면서 자신이 파악한 것을 자기 것으로 내면화합니다. 그리고 이 ‘내적인 것’은 설교 속에서 ‘외적인 것’으로 표현되고, 이것은 다시 회중들이 수용함을 통해 ‘내적인 것’이 됩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속에서 실천되어 다시 ‘외적인 것’이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을 염두에 둔다면 ― 이런 도식을 순전히 문자적으로만 해석할 경우 ― 회중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설교자가 발견한 것에 의해 결정될 수밖에 없습니다. 무엇을 발견했고 또 어느 깊이와 어느 만큼 발견했는가 하는 것은 회중이 무엇을 받아들였고, 또 얼마만큼 변화될 수 있는가 하는 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게 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무엇보다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아니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인가를 들어야 합니다. 들은 것이 있어야 말할 것이 있을 것 아닙니까? 설교자가 말할 것이 있어야 회중들은 들을 것이 있고, 또 변화될 당위와 방향도 제시받게 되는 것 아닙니까?
청중들은 어떤 의미에서 엄격한 시험관과도 같습니다. 설교를 들으며 그들은 끊임없이 설교자가 성경 본문과 진정한 씨름을 했는가 저울질합니다. 설교자가 정말 알고 하는 이야기인지 아니면 남의 이야기를 그대로 베끼는 것인지, 알맹이 없이 그저 헛소리로 일관하고 있는 것인지 판단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 설교자들이 전문가임을 자처한다면 전문가다운 흔적을 설교에서 보여 주어야 할 것 아닙니까?
말씀과 삶의 일치를 통한 인격적인 신뢰, 말씀의 사역자로서 말씀과의 진지한 씨름! 이것이 있어야 설교자는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서 는 것입니다.
1. Richard Baxter, On the Making of the Preacher, p. 55.
2. Phillips Brooks, The Two Elements in Preaching, in: R. Lischer, p.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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