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다시보기
기원1. 고구려 민족의 기원
고구려는 부여족의 한 갈래인 예맥족에 의해 세워졌다.
부여는 285년 선비족 모용씨가 공격하여 왕이 죽고 국운이 쇠락하면서 멸망의 길을 걷다가 346년 모용씨의 재침입으로 결국 운을 다하였다. 그 후 부여족의 일부가 나라를 재건하려고 하였으나 고구려에 의해 494년 흡수, 통합된다.
한편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구려의 건국전설에서는 고구려의 민족이 부여족의 이동에서 시작되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중국의 문헌인 위서 에서도 "고구려는 부여에서 나왔다. 스스로 말하기를 선조는 주몽이고 주몽의 어머니는 하백의 딸이며..."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는 아마도 당시 중국인들이 고구려의 건국전설을 고구려의 누군가로부터 전해 들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삼국사기에 언급된 고구려의 건국전설의 내용을 잠시 살펴 보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은 하백(물귀신)의 딸 유화에 의해 잉태되었다. 유화는 자칭 천제의 아들이라는 해모수와 만나서 사귀게 되고 이로 인해 부모에게 쫓겨나 동부여의 왕 금와를 만나게 된다. 금와의 보살핌으로 주몽을 낳게 되고 주몽은 자라면서 금와의 다른 아들들에게 시기를 받아 죽을 고비를 맞으나 기사회생으로 도피한다. 주몽은 세 신하와 함께 이동하여 엄호수를 신통하게 건너 모둔곡에 이르렀다. 주몽은 거기서 다시 세 사람을 만나 그들을 신하로 삼고 졸본천에 이르러 도읍을 정한다. 고구려를 세울 때 주몽은 나이 22살이었다."
이러한 고구려의 건국전설은 주몽의 탄생을 통하여 부여의 왕족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함과 아울러 이동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이 기존의 약소부족을 암시하고, 이 부족들을 포용하면서 자체적인 집단을 결성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천제의 아들로부터 잉태한다는 부분은 고구려가 하늘로부터 혜택을 받은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것은 곧 당시 고구려인의 자신감의 표현이기도 하다.
고구려는 처음에 송화강 유역에 부족이 모여 살았으나 B.C 2세기 경부터 남하하여 압록강의 지류인 동가강 유역에 자리를 잡았다가 다시 압록강 북쪽의 집안으로 근거를 옮겼다. 이는 지리적으로 산과 계곡이 많은 험한 지역이었다. 성이 산의 굴곡을 따라 있고 남쪽으로는 강을 끼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신당서의 고려전에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인 요건으로 인해 고구려는 자급자족적인 생활을 하기 보다는 대외 정복활동에 주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고구려가 초기에는 현토군의 지배권 안에 있었으나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항쟁으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는 작용을 하게 된다.
기원2. 고구려 부족연맹체의 성립과 발전
고구려가 국가의 개념을 갖기 이전, 전신으로는 5부족에 의해 국가가 운영되어 왔는데,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고구려는 본래 다섯 개의 족이 있는데 소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가 있다"고 했다.
이들 5부족은 초기에 각 집단의 독립적 기반하에 활동이 되었지만, 이후에는 계루부에 의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국가 체제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태조왕 이전에 소노부에서 부족연맹장이 나왔지만 이후 계루부가 다른 부족을 누루고 부족연맹장의 지위를 갖게 된다. 5부족에 의한 부족연맹체의 모습을 갖춘 고구려는 계루부에 의한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고 계루부를 중심으로 하는 각 부족의 통제를 강화한다.
이러한 가운데 주변 정세는 중국세의 동점과 특히 서기전 2세기의 위만조선의 팽창에 따른 압박은 압록강 중류유역의 집단들간의 상호연합의 움직임을 촉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서기전 128년 한나라에 투항한 예군 남여 휘하 28만명의 존재는 그러한 추세를 말해준다. 이 28만명의 집단은 어떤 강력한 조직과 결속력을 지닌 국가라기보다는 각 지역의 부족집단들을 영도하는 완만한 연맹체적인 성격의 것으로 여겨진다. 더 이상의 수준으로 통합이 미처 진전되지 못한 상태에서, 한나라의 동방침략으로 그 지배하에 귀속되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서기전 107년에 현토군이 설치되었다. 현토군의 위치에 대해서는 중심지가 집안현 일대이며, 그 영역이 개마고원 이서지방이라는 설과, 요동에서 동해안의 옥저에 이르는 동서 교통로를 중심으로 설치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데 <한서>지리지에서 현토군의 인구를 4만 5006호, 22만 1845인이라 하였고, 그 소속 현으로서 고구려, 상은대, 서개마 등이 있다고 하였다.
현토군 소속 현이 셋에 불과한 것은 당시의 낙랑군이나 요동군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적은 수이다. 이는 곧 <한서>지리지 현토군의 인구는 전 현토군 때의 것이고, 현의 숫자는 현토군이 퇴축된 뒤 압록강 중류 방면에 있던 현 가운데 일부를 요동방면에 옮겨 설치한 것을 기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현토군과의 관계에서 주목되는 것은 현토군이 설치될 당시에 이미 `고구려'라는 명칭이 사용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러한 대외 정세속에서 고구려는 부족의 통합과 중앙집권화와 아울러 지리적 요건으로 인한 대외 정복활동을 강화하게 된다. 고구려족은 산악지대라는 지리적 특수성으로 중국의 지배력이 철절히 미치지 못하였다.
또한 자급자족을 할 수 없는 구조에서 필연적으로 대외 정복활동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러한 조건으로 고구려족은 민족의식에 눈뜨게 되면서 중국에 대한 지속적인 항쟁을 벌여 나갔다. 항쟁의 가운데 부족간 통일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되고 점차 통일의 방향성을 찾게 되었다.
그리하여 고구려족은 여러 부족 중에 가장 강한 부족을 중심으로 집권 국가체제를 갖춰 나가게 되면서 발전을 거듭한다. 이러한 발전은 고대국가로의 성립을 재촉하게 된다.
초기1. 고대국가로의 성립
대체로 1세기 후반 태조 때에 이르러 고구려족 전체를 통괄하는 강력한 집권력을 지닌 고대국가체제가 확립되었다. 앞서도 언급되었지만 대내적으로는 여러 부족들이 상호통합을 거쳐 다섯 집단으로 되었고, 이 중 중앙의 계루부가 나머지 네 집단을 강력히 통제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국의 5부가 확립되었다. 각 부는 대내적인 자치권은 인정되었으나, 적어도 대외적인 무역권, 외교권 및 전쟁권은 박탈당하였다. 나아가 각 부가 자체적으로 임명한 관인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도록 되어 각 부내의 동향까지 왕실에서 통제하는 단계로까지 진전되어 나갔다.
대외적으로는 중국 군현과의 교섭은 중앙정부에서만 취급하여 그 교섭창구를 일원화하였다. 현토군과의 경계에 세운 책구루는 그 교역지점이었다. 이는 곧 중국 군현의 분열. 회유책을 봉쇄하기 위함이었다.
이에 고구려는 한군현의 간접적인 영향력하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나아가 태조왕 때부터 왕의 지휘하에 정복활동이 시작된다. 이는 고구려가 당시 처한 지리적 환경과도 맞물리는 것이다.
한편 태조왕 때의 강력한 집권력이 성립되는 과정에서 계루부 내에서도 각 친족집단들간에 격렬한 상쟁이 있었던 것 같다. 태조왕 이전의 고구려왕들의 성은 해씨라 하였는데 비해, 태조왕 이후는 고씨라 칭하였으며, 그리고 태종왕과 그 안의 모본왕이 사촌간이라고 하였지만은 태조왕의 재위기간이나 그 수명 등을 통해 볼 때 양자는 실제 계보상에서 직접적인 계승관계에 있았던 것 같지 않다.
태조왕계는 종전의 계루부 왕실의 방계집단으로서, 이때 대두하여 세력을 굳힌 것으로 여겨진다. 태조왕 또는 `국조왕'이라는 왕호를 칭하였다는 것도 그러한 신흥세력으로서의 의식을 과시한 것으로 보겠다. 해씨족내에서 보다 좁은 범위의 계보 친족이 왕족으로서의 지위를 차지하여 스스로 고씨라 하였던 것이다. 그만큼 재래의 지배씨족내의 각 친족집단들간에 분화가 현저해지게 되었음을 말하고, 그에 따라 공동체적 면모가 지양되고 지배체제가 보다 진전되어갔다.
고구려가 연맹체단계에서 벗어나 고대국가로 성립된 것은 정치적으로는 연맹체내의 여러 집단들에 대한 계루부 왕실의 통제력의 강화를 통해서이다. 그러므로 그 뒤의 고구려 내부의 정치적 추세는 각 부의 자치력과 그 상위권력으로서의 중앙정부의 집권력과의 상관관계하에서 설정되었고, 그것은 대체로 부의 자치권의 약화와 중앙집권력의 강화라는 방향으로 전개됨을 보여준다.
2세기 후반에서 3세기 전반의 상황을 전해주는 <삼국지> 동이전 고구려전에 의하면, 이전의 왕족이던 소노부는 독자적으로 종묘와 영성사직에 대한 제사를 행하고 있었다. 이는 곧 소노부의 시조신은 지역수호신 및 지모신과 같은 농업신 등에 대한 제사와 의식을 자체에서 행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당대에 있어 이러한 행사는 종교적 의미뿐 아니라 집단 내부의 여러 문제들을 조정하는 정치적 기능을 행하는 집회로서, 그리고 소속원의 일체감과 단결을 도모하는 대회로서 중요한 기능을 가졌다. 이는 소노부가 아직도 독자적인 정치체로서의 운동력과 결집력을 지니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아울러 대가들은 각각 사자. 조의. 선인 등의 관원을 거느리고 있어,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자기 집단 내부의 일에 자치권을 상당히 행사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이 자치권이란 중앙정부에 의해 초기에는 대외적인 외교, 군사, 무역권 등을, 이어 점차적으로 각 부 내부의 동향까지 통제되어 갔다.
각 족장들은 스스로 자신의 관원을 두었지만 그 명단을 왕에게 보고하여야만 하였다. 이에 자연 왕권이 대가들의 관원에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같은 위계의 관원일지라도 중앙정부의 관원과 대가들의 관원은 격을 달리하는 위계질서가 형성되어갔다. 왕권이 개입하여 각 부의 관원의 위계를 올려 주기도 하고 때로는 중앙정부에로 발탁하여 임용하기도 하여, 중앙정부의 관계조직 체계에다가 각 부의 크고 작은 족장들과 여타의 관원들을 연계시켜 부의 독자성을 해체시켜 나갔다.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강화됨에 따라 각 부의 자치력도 약화되어갔고, 그러한 과정의 상징으로 각 부의 명칭도 고유한 호칭으로서가 아니라 방위를 나타내는 명칭으로 표현하게 되었다. 구체적으로 부의 명칭은 신대왕 이전에는 고유한 명칭으로 보이던 것이, 고국천왕대부터는 방위로 표현된 것이 많아지다가, 서천왕대 이후부터는 방위로 표현된 명칭만이 보이게 되었다.
이는 대체로 중앙정부와 각 부 사이의 집권력과 자치력의 상관관계에서 집권력이 강화되어가는 개략적인 추세를 나타내주는 것이다. 이러한 추세에 따라 각급 족장들은 중앙정부와 연결을 가지며 그에 소속되어 점차 중앙귀족으로 전신하게 되었다. 고구려 국가의 발전에 따라 왕권이 강화되고, 한편으로 사회분화가 진전됨에 따라,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점차 약화되어갔다.
그러한 가운데서 왕위계승에서도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의 변화가 시도되었고, 그것은 진통을 겪으면서 마침내 산상왕 이후 확립되게 되었다. 그에 따라 왕제들의 위치는 저락되고, 왕은 보다 초월적인 존재로 되었다. 그러한 왕권강화의 한 방안으로서 3세기 이후 왕실은 연나부와 대대로 혼인관계를 맺었다.
또하나 왕실에 있어 취수혼의 관행은 3세기초에 파기되었으며, 다른 족장들의 가계에서도 점차 그렇게 되었다. 이는 곧 친족집단의 공동체적 성격이 해체되어가는 추세를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한편, 그러한 변화를 낳은 사회분화의 진전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몰락해 예민으로 떨어져갔다. 고국천왕 때 상대적으로 한미한 집안출신인 을파소를 국상으로 등용하여 집권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다. 이때 시행되었던 `진대법'은 공동체적 관계의 해체현상에 따라 증가되는 가난한 농민들을 보호하여 귀족들이 귀족의 예민으로 전락하는 것을 방지해 국가의 공민으로 확보하기 위한 조처라 하겠다. 이들 공민은 곧 왕실의 강력한 집권력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었다.
이러한 여러가지 변화는 한편으로는 고대국가 특색의 하나이며 당대 사회에 있어 유리한 생산방법이기도 한 대외전쟁을 통한 정복과 약탈 및 공납의 징수 등이 가져다 주는 부의 증가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초기2. 고대국가로의 발전
고구려는 고대국가로의 성립과 함께 독자적인 기반을 가졌던 5부의 성장세력들을 중앙귀족으로 편제시켜나갔다. 족장층을 전신시킨 형류와, 수취와 행정을 주관하였던 사자류를 중심으로 한 중앙관게조직을 성립시켜 고대국가체제를 확립해 나갔다. 고구려의 대외적 정복활동으로서는 이미 서기전후 무렵부터 주변의 다른 종족들과의 사이에 전개되었다.
고대국가 성립 후 고구려의 본격적인 대외적 팽창을 대략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첫단계는 태조왕대부터로서, 고구려족의 통합에 따른 국력의 분출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것은 옥저지역을 비롯하여 주로 한군현이 설치되었던 물산이 풍부하고 비옥한 농경지대인 요동, 현토, 낙랑 및 동예방면으로 집중되었다.
이 무렵 정복한 옥저, 동예, 양맥, 숙신 그리고 일부의 선비족 등은 그들 재래의 읍락 단위의 질서를 유지시키고 공납을 징수하는 형태로 지배하였다. 현토, 낙랑, 요동 등의 한군현에 대한 공격은 기습적으로 물자와 인민을 노획하는 약탈적인 성격을 띠는 것이었다. 포로는 노예로 분배되기도 하고, 때에 따라서는 한군현과 타협하여 보상을 받고 돌려주기도 하였다. 이어 중국이 삼국으로 나뉘자 고구려는 양자강 이남의 오나라와도 통교를 하여 보다 폭넓은 국제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활발한 대외정복활동이 가져다준 막대한 부는 대내적으로 집권력의 강화와 왕권의 강대화에 밑받침이 되었고, 3세기초에는 이미 국내에 1만여 인이나 되는 소위 좌식자라는 지배층 전사단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위나라 관구검의 침공을 받은 이후 대외활동은 한동안 위축되었다.
그러다가 4세기에 접어들면서 고구려는 크게 팽창하였다. 이는 진대법의 시행이나 각 부의 자치력의 약화 등에서 보듯, 그간의 집권화와 중앙정부의 지배기반 확충 등에 따라 내적으로 충실해진 고구려의 국력이 5호 16국 시대로 접어드는 국제적인 대혼란을 맞아 발산되었기 때문이다.
미천왕대에 낙랑 대방군을 병합하고, 요동지역에 대한 지배권 쟁탈을 치열하게 벌여나갔다. 요동 지역의 병합은 잇달아 흥기하는 유목민과의 경쟁에서 승리하여야만 가능하였다. 이 경쟁에서 고구려는 선비족의 모용씨가 세운 전연과 첨예한 대결을 벌였다.
342년에는 전연의 침공으로 수도가 함락되는 대타격을 받기도 하였고, 남에서 새롭게 일어나는 백제가 북으로 팽창해와, 371년에는 고국원왕이 백제군을 막다가 평양성전투에서 전사하기까지 하였다. 미천왕 이후의 일련의 팽창은 이에 이루러 서와 남에서 저지되고, 도리어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종래와는 달리 넓은 평야와 고도로 문물이 발달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하여, 그리고 서로 투쟁하고 있는 유목민족이나 백제에 대처하여 생존하기 위해, 새로운 수취체계와 지배질서의 창출이 시급히 요청되게 되었다.
이에 고국원왕을 이어 왕위에 오른 소수림왕 때에 일대 개혁이 시도되어 율령의 반포, 불교의 수용, 태학의 설립 등이 행하여졌다. 일전한 법체계로서의 율령의 반포와 태학의 설립은 관료체계 확립에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보편적인 정신세계로서 불교의 수용은 고구려 영역내의 잡다한 여러 족속들이 지닌 신화와 설화들을 포용하면서 이것들을 보다 한 단계 고양된 종교와 철학의 세계로 규합시켜 나갈 수 있게 하였다.
이에 고구려는 견고한 뼈대를 확충하게 되었다. 이러한 토대 위에서 다음 단계, 광개토왕 및 장수왕 때의 웅비를 가져왔다.
5세기 고구려의 판도는 서로는 요하선을 돌파하여 요서지방을 사이에 두고 북위와 대치하였으며, 남으로는 아산만과 영덕을 닿는 선까지 밀고 내려갔으며, 신라에 강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북으로는 광개토왕대에 이미 북부여에 진주하였고, 말갈족의 대부분을 복속시켰으며, 동으로는 오늘날의 북간도지역에 있었던 동부여 지역을 통합하였다. 서북으로는 서북 만주지역 홍만령 산록에 있었던 유목종족인 지두우에 대한 분할을 유연과 함께 도모할 정도였다. 그리고 요하 상류에 세력을 뻗쳐 거란족의 상당부분을 예하에 종속시켰다.
한편, 이 시기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다원적인 세력균형상태를 이루고 있었다. 4세기의 격렬한 상쟁과 혼돈의 시기를 벗어나 5세기 중반 이후 국제정세는 상대적으로 안정된 면모를 나타내었다. 그러나 이는 그 전 시기와는 달리 어느 한 나라가 국제정세를 일방적으로 주도할 수 있는 상태는 아니었다. 주요 국가들간의 역관계의 연동성에 의해 세력균형적인 상태를 유지하였다.
이러한 당대의 국제정세하에서, 고구려는 중국의 남북조와 몽고고원의 유연 등과 각각 관계를 맺으며, 또 일방으로 이들을 견제하여, 특히 국경을 접하고 있던 강대하고 팽창적인 북위를 견제하여 대륙세력들과 장기간에 걸친 평화를 유지하였다. 그러한 가운데서 동북아시아지역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형성하였다.
이 무렵 고구려는 그 영향에 포괄되어진 광대한 정복지역을 점차 크고 작은 성을 기본 단위로 한 지역편제를 행하여 이를 중앙정부에 일원적으로 귀속시켜나가고 있었다. 지방통치체제의 정비와 그에 따른 지역간의 교류의 증대는 자연 고구려 영역내의 여러 종족집단들간의 교류와 융합을 촉진하였다.
그러한 시기에 그 전 시기와는 달리 대외적으로 어떠한 외세의 간섭이나 침공에 따른 원심분리적인 작용력이 가해짐이 없이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사실은 이 시기의 대내적인 고구려사회의 성장과 발전에 지대한 기여를 하였다 아울러 그러한 대외관계에 힘입어 문화적으로도 동아시아 여러 나라와 나아가 중앙아시아지역과도 직접 간접의 교류를 함으로써, 고구려사회의 발전에 따라 필요해진 제반 문물을 수용해, 전통적인 문화기반 위에서 이들을 복합시켜 독자적이면서도 국제성이 풍부한 문화를 이룩해나갈 수 있었다.
오늘날 남아 전하는 고구려 벽화고분에서 그러한 면모를 여실히 찾아볼 수 있다. 이 시기 고구려인들의 국가의식에 반영되어 호기롭게 표현되어 전한다. <광개토왕비문>과 <모두루묘지>에서 시조 주몽을 `천제의 아들',`하백의 손자',`해와 강의 아들'이라 표현하였으며, 스스로 자국이 천하의 중심임을 자부하였다. <중원고구려비>에서도 신라를 동이라 기술하는 등 동일한 의식을 나타내고 있다.
초기3. 한군현과의 투쟁
한나라는 저들의 건국초기에는 중국내부의 군소지방 세력들을 통합하며 또 북방의 흉노족들의 공격을 막기 위하여 고구려, 고조선과는 좋은 관계를 가지려고 하였다. 그러나 기원전 2세기 초엽부터 그들은 고조선을 침략할 것을 계획하였다. 기원전 2세기 말엽에 이르러 한나라는 흉노세력을 일정하게 물리친 기회에 침략의 방향을 고조선에 돌렸다.
이러한 상황에서 고구려는 한나라의 동향을 주시하는 한편 자체의 방위준비를 강화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시기 고구려가 고조선을 지원하는 무력을 보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없어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한무제가 고구려 땅까지도 병탄하려고 한 사실로 보아 그렇게 하였을 가능성은 있다.
한무제는 기원전 108년에 고조선을 멸망시킨 다음 그 땅에 4군(낙랑, 임둔, 현토, 진번)을 설치할 것을 예견하였다. 이것은 그가 고조선의 영역범위를 잘 알지 못하고 고조선의 동방도 다 고조선에 속한 땅인것으로 오인하고 있는데 기인한다.
이와 관련하여 한나라는 고구려땅의 중심지구에 현토군을 두려고 하면서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감행하여 나섰다.이로부터 한나라의 무력적 침략을 막는 고구려의 투쟁이 시작되었다. 한나라 군대의 군사행동이 언제부터 개시되었는지는 명백하게 전하는 자료가 없다. 그러나 한나라의 본격적 침략은 고조선이 멸망한 직후부터 감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한나라는 고조선침략에 동원되었던 많은 병력을 긁어모아서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고구려군은 굳세고 완강한 투쟁으로 맞서서 싸웠다. 그리하여 적군은 1년이상이나 막대한 손실을 내면서 침입한 끝에 겨우 고구려 서쪽변방의 일부 지역을 점령하고 <고구려>, <상은태>,<서개마>의 3개 현을 가진 현토군을 설치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을 수 없었다.
고구려는 한군현의 설치에 대해 일시나마 자기의 영토안에 있게 된 것을 그냥 둘 수 없었다. 그리하여 현토군 설치와 때를 같이 하여 맹렬한 반공격을 벌였으며 얼마 후에는 현토군을 서쪽으로 몰아냈다. 그리하여 현토군은 오늘의 무순방면으로 쫓겨갔으며 다른 현들도 같은 시기에 서쪽으로 밀려가게 되었다. 그 후에도 고구려는 한나라세력을 자기 땅에서 한명도 남기지 않고 몰아내며 또 고조선 땅에 있는 한군현 세력들을 몰아내기 위한 정복활동을 계속하였다.
한나라는 기원전 82년에 4군 가운데서 임둔과 진번 2개 군을 폐지하여 낙랑군, 현토군에 합친다고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한나라는 고구려의 공격이 두려워 소제때(기원전 86년-기원전74년)에는 고구려에 의책(옷가지와 쓰개), 조복(조회때 입는 예복), 고취(북, 나팔 등의 고취악기)를 보내주었고 그 후에도 <현토군 고구려현령>이 책임을 지고 고구려왕과 귀족관료들에게 옷가지와 모자 같은 것을 선물로 보내주었다. 고구려사람들이 이 선물을 받으러 오지 않으므로 한나라 측에서는 현토군의 동쪽경계지대에 성을 하나 쌓고 거기에다 물건들을 갖다 놓았다고 한다.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유민들의 투쟁이 계속되는 조건에서 한나라는 기원전 76-75년에 군국 (전국 각지)의 죄수들을 모집하여 요동군과 현토군의 동쪽에 <새> 또는 <교>로 불리운 장성방어시설을 만들었다. <요동 현토성>의 축조는 고구려의 정복활동을 가로막기 위한 것이었으며 실제로 그것을 건설하는 과정에도 부단한 공격을 받을 수 있는 매우 위험한 일이었기 때문에 죄수, 망나니들을 동원하여 그들의 죄를 면제해 주는 대신 일을 시켰던 것이다. 이 <새>, <교>는 대체로 오늘의 무순, 본계동쪽 산간지대초입에 쌓았던 것으로 보이는 데 그것은 고구려가 그만큼 서쪽으로 진출하였던 사실을 말해준다.
고구려는 이러한 한군현과의 투쟁과 병행하여 주변 부족의 정복활동도 함께 벌여 나갔다. 기원전 1세기 중엽경 까지 동옥저(남옥저)지역을 자기의 속령으로 만들었다. 동옥저(남옥저)는 대체로 오늘의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남부의 연해지방에서 살던 사람들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고구려는 기원 56년에 동옥저를 쳐서 그 지역을 성읍(고을)으로 삼았다. 그런데 이것은 동옥저가 이때에 와서 비로소 고구려땅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후한서>의 동옥저(남옥저)관계 기사를 보면 고구려는 동옥저를 종속시키고 그들속에서 대인(우두머리)을 사자로 삼아 서로 통제하게 하였다고 했으며 <삼국지>에는 그밖에 또 고구려의 대가(높은 귀족관료)를 보내 조세징수를 감독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 기사들은 어느 것이나 다 성읍제도로 넘어가기전의 동옥저의 형편을 전하고 있다.
그러므로 기원 56년 이전에 이미 이러한 관계가 있었으며 기원 18년에 고구려에 속한 7개 나라가 신라(진한)에 투항하였다고 한 <삼국유사>(권 1 기이 남해왕)의 기사를 참고한다면 그것은 기원전 1세기 말엽 이전의 형편을 전한것으로 고구려의 영역확장 과정으로 미루어 대체로 기원전 1세기 중엽 경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4. 초기 정복활동
건국 이후 고구려는 안으로 중앙집권 통치제도와 질서를 세워나가는 한편 주변에 있던 여러 소국 정치세력들을 통합하여 영역을 확대해 나가야 하였다. 그것은 당시 새로 성립된 고구려의 정치, 경제적 지반을 공고히 하는 필수불가결한 방법있었다. 건국 이후 10년 안으로 고구려는 상당히 넓은 지역을 가진 나라로 장성하였다.
동명왕 2년(기원전 36년) 6월에 고구려는 비류국을 통합하였다. 비류국은 비류수의 상류지역(혼강상류, 팔도강 유역)에 있었던 소국이었다. 원래 동명왕은 졸본 지역에 와서 거점을 잡게 된 초기에 비유수 상류 쪽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비류국왕 송양을 만나서 활쏘기 경기를 하여 그를 놀라게 한 일이 있었다.
동명왕과 같은 무예가 출중한 인물이 나라를 세우게 된 조건에서 송양왕은 어차피 오래지 않아 통합될 것이 불가피하였으므로 자진해서 투항해왔던 것이다. 동명왕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송양왕을 <다물후>로 삼았다. <다물>이란 고구려말로 옛땅을 도로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것은 고구려와 비류국 사이에 상하주종관계가 성립되고 동명왕이 제후왕 위에 선 대왕으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후 이웃 소국들에 대한 통합사업은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되었다.
동명왕 6년(기원전 32년) 10월에 고구려의 장수들인 오이, 부분노는 군사들을 거느리고 태백산(백두산)동남쪽에 있는 행인국을 공격하여 그 지역을 성읍(고을)으로 만들었으며 동명왕 10년(기원전 28년) 11월에 부위염이 거느린 고구려군이 북옥저를 쳐서 그곳을 성읍으로 개편하였다. 행인국은 오늘의 함경북도의 일부 지역에 있었고 북옥저는 함경북도 북부, 연변지구, 연해주 남부에 걸쳐 있었던 정치세력이었다.
고구려가 이때 북옥저의 전지역을 통합하였는지는 잘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로써 고구려는 동서로 거의 2,000리나 되는 넓은 영토를 가진 큰 나라로 되었으며 특히 주요 철산지, 해안지대를 차지한것은 무기나 소금, 수산물에 대한 수요를 충족시키며 나라의 경제를 발전시키는데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었다. 고구려가 급속히 큰 나라로 성장한 것은 이웃나라들에게 큰 영향을 주었다.
동명왕 4년(기원전 34년)에 부여국에서 살던 동명왕의 어머니 류화가 세상을 떠나자 부여의 근와왕은 그를 태후(임금의 어머니)의 예로써 장레지내고 신묘(사당)까지 세웠다. 이것은 고구려의 급속한 강화에 불안을 느낀 부여가 고구려와의 관계를 개선하기 위하여 취한 조치였다. 한편 고구려에서도 부여와의 좋은 관계를 가지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그것은 부여가 큰 나라인데다가 동명왕의 어머니(유화)와 처(예씨)등 가족들이 부여땅에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동명왕 19년(기원전 19년)에 부여국에 있던 왕자 유리가 찾아왔다. 그는 동명왕이 부여땅에 있을 때 처 예씨가 낳은 아들이었다. 그가 고구려로 와서 태자로 된 조건에서 동명왕과 소서노사이에 난 아들들인 온조와 비류는 남쪽으로 가서 백제소국을 세우게 되었다. 그것은 그 후 고구려-백제관계를 우호적인 것으로 만드는 데서 중요한 작용을 하였다.
유리왕 11년(기원전 9년)에 고구려는 서북방면에 살고 있으면서 고구려를 자주 침범하던 선비족의 한개 나라를 쳐서 속국으로 삼았다. 이때 고구려의 장수 부분노는 선비족의 특성을 고려하여 지혜로써 이길 계책을 썼다. 즉 부분노의 지휘밑에 정예로운 군사들은 사이길로 해서 선비국의 수도성이 바라보이는 산림 속에 은폐하고 국왕은 일부 군사를 거느리고 정면으로 선비국의 수도성을 공격하였다. 선비군은 정면으로 오는 고구려군이 적은 것을 보고 출격하였다가 국왕이 뒤따르는 정예무력과 함께 맞서는 바람에 혼란에 빠졌다.
그러는 사이에 부분노는 선비국의 성을 점령하였다. 선비군은 성안으로 철수하려 하였으나 이미 성은 함락되었으므로 결국 투항하고 말았다. 이때로부터 선비국은 고구려의 한개 속국으로 되었다. 선비국의 투항, 복속은 고구려 서북지방의 정세를 안정시키고 부여를 견제하는데서 일정한 의의가 있었다.
고구려 초기에 제일 큰 반대 세력은 부여였다. 그러나 부여에서는 왕위계승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내부분열이 일어 났으며 이러한 혼란을 틈타 3세기 말 선비족의 침략을 받아 크게 쇠퇴하였고, 결국은 494년 고구려에 편입되었다.
중기1. 후한과의 투쟁1(1세기~2세기초)
1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소국통합을 기본적으로 끝내게 되자 자기의 대외정책에서 기본으로 내세우고 있던 왕성한 정복활동의 추진으로 영토를 확장, 고조선 옛땅의 완전수복을 위한 투쟁을 더욱 힘있게 벌려나갔다. 고구려는 경제와 문화를 발전시키고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도 강화해나감으로써 국력을 더욱 강화하고 동시에 부여와의 관계도 개선하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1세기말 2세기초에 후한의 동북방면 주, 군들에서는 선비족의 침입 등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고 무겁게 지워지는 각종 부담으로 하여 백성들이 이에 대한 불만이 높아졌다. 이것은 후한의 변방 방어력을 현저히 약화시켰다.
고구려는 이러한 국내외 정세를 잘 타산한 기초위에서 105년(태조대왕 53년)에 요동군, 현토군에 대한 일대 공세를 취하였다. 고구려군은 급속한 진격으로 후한 요동지방의 6개 현을 함락시켰다. 이 전역에서 고구려군은 후한에게 큰 타격을 주었으며 수많은 군수물자를 노획하여 가지고 돌아왔다.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이때 요동태수 경기가 고구려군을 반격하여 크게 이긴 것처럼 써놓았으나 그것은 고구려군의 주력부대가 철수한 뒤에 남아있던 일부 소부대와 싸운 것을 왜곡, 과장해 놓은 것이다. 105년 전쟁에서 고구려는 무순부근에 있던 현토군(제2)을 더욱 서쪽으로 몰아내고 그 일대를 자기의 전방거점으로 확고히 차지하였다.
그 뿐 아니라 고구려는 요동군의 동쪽, 동남쪽에서도 맹렬한 공격을 하여 100-200리 지역을 차지하였다. 105년에 진행된 고구려군의 요동공격이 후한에 대한 타격으로 되었는가 하는 것은 그 이듬해인 106년에 후한이 요동지방의 군현들을 대폭 개편한데서 찾아볼 수 있다.
<후한서>(권33 군국지 5)현토군조에 의하면 106년에 현토군에는 고현, 후성, 요양의 3개 현이 요동군으로부터 이관되었다. 그리하여 현토군은 본래 가지고 있던 <고구려>,<상은태>,<서개마> 3개현을 포함하여 6개 현을 소속시키게 되었으나 영화 5년(140년) 당시 호구는 1,594호 4만 3,16명으로서 <한서>지리지에 실려있는 호구(대체로 원시 2년 <기원 2년>의 수자로 알려진 호구) 4만 5,006호 22만 1,845명에 비하면 엄청나게 줄어들었다.
이것은 기원전 시기에 현토군이 수도부근에 있을 당시에만 하여도 무순, 본계 지구의 풍부한 철, 석탄자원을 개발하여 생계를 이어가던 사람들이 많았던 반면에 105년이후 현토군과 그 산하 현들이 더 서쪽인 심양부근으로 쫓겨간 다음에는 전쟁으로 인한 인구의 감소도 있었지만 주로는 생계를 잃은 것이 원인이 되어 주민수가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실지로 <후한서> 군국지에는 현토군치(소재지)가 요동군지(소재지)에서 400리 떨어진 것으로 되어 있으나 233년 당시에는 요동군치의 북쪽 200리에 있었다.
이러한 변화는 1606년에 군현 개편과 관련되어 있었다는 것이 명백하다. 현토군과 마찬가지로 요동군의 호구도 같은 시기에 크게 감소되었다. 동북도위가 자리잡고 있던 무차현과 거취현이 <후한서> 군국지에 보이지 않게 된것은 그 현들이 고구려에 탈환되었거나 그 부근에까지 고구려의 힘이 미치게 되어 더는 현을 들 수 없게 된 사정과 관련된 것이다. 이처럼 105년에 있는 고구려군의 요동진격은 고구려의 큰 승리로 끝났으며 후한에 대한 커다란 타격으로 되었다. 118년에는 고구려군이 <예맥>의 군사들과 함께 한나라 현토군을 습격하고 화려성을 공격하였다.
중기2. 후한과의 투쟁2(2세기 초~3세기)
2세기 초엽에 고구려의 공세로 큰 타격을 받은 후한은 부여민의 일부를 회유하여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게 된 조건에서 유주자사 풍환의 지휘밑에 121년 1월에 고구려군에 대한 일대 공격전을 개시하였다.
고구려는 왕의 아우 수성의 지휘밑에 2천 명의 부대로 적들을 요격하게 하는 한편 3천여 명의 별동대를 적후에 내보내 요동, 현토 2군 소재지를 들이쳐서 2천여 명을 살상, 포로하였으며 4월에는 요동지방의 선비족들과 손잡고 요동군 료수현을 들이쳤으며 요동태수의 직속부대 1백여 명을 신창현(요양북쪽)에서 포위하여 전멸시켰다. 12월에는 고구려왕이 고루여, <마한>, <예맥>의 순사 수천기를 거느리고 직접 현토성을 포위공격하였다. 포위전은 오랫동안 계속 되었다. 이듬해 2월에 후부여군 2만 명이 후한 등을 지원하여 나섰으므로 대세가 불리해졌다. 그리하여 고구려군은 철수하였다. 비록 최후의 결전에서 성공하지 못하였으나 121-122년 현토군에 대한 공격은 후한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후한이 이때 얼마나 큰 타격을 받았는가 하는 것은 유주자사 풍환이 패전의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혀서 죽었고 현토태수 요광이 처형당한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 후 한동안 후한과의 사이에는 평화적 관계가 회복되었다. 그것은 후한이 평화를 구걸하면서 많은 대가를 치르고 포로들을 찾아갔던 것과도 관련이 있었다. 146년에 이르러 고구려는 다시 후한의 요동군 신안 거향과 서안평 방면으로 진격하였으며 때마침 그곳에 와있던 낙랑군 태수의 처자를 포로하고 대방현령을 처단하였다.
168년에 고구려는 선비국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공동으로 후한의 유주와 병주를 공격하였다. 169년에 후한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고구려에 침입하였다. 그러나 이 침공에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던 후한은 172년 11월에 대군을 보내 고구려땅 깊이 침공하였다.
고구려의 통수부에서는 명림답부의 주장에 따라 이번에도 청야수성전술을 썼다. 적군이 속전속결을 꾀하면서 기병부대로 침입해오는 조건에서 이 전술은 옳은 것이었다. 고구려군이 적들에게 한알의 곡식도 주지 않으면서 성문을 굳게 지키고 있는 조건에서 굶주리게 된 후한군은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고구려의 국상 명림답부는 이때 나이 106살이나 된 노인이였으나 갑옷을 입고 출전하였으며 좌원벌에서 포위전을 벌려 적군을 완전히 소멸하였다. 이리하여 오랫동안 질기게 계속된 후한의 침략은 여지없이 분쇄되고 고구려의 위력은 더욱 더 강화되었다.
2세기 말에 후한내부에서는 대규모의 <황건> 농민폭동이 일어났으며 밖으로는 선비족들의 침습이 그치지 않았다. 이러한 복잡다단한 정세속에서 이전에 현토군의 한 하급관리였던 공손도는 189년에 요동태수로 임명되었다. 그는 요동에 오자 자기를 업신여기는 토호들을 가혹하게 탄압하고 요동, 요서, 산동반도의 일부까지 통제하는 큰 세력으로 되었으며 그와 그의 자손은 138년까지 50년동안 권력을 잡았다. 공손도는 자기 역량이 미약했던 초기에는 고구려와 협력하여 <부산적>을 쳤다. 이 부산의 위치는 광개토왕릉비에 나오는 상대적 위치로 보아 요하 서쪽 법고현 서북쪽일대 였다고 생각된다. 이때 고구려는 대가 우거, 주부 연인 등으로 하여금 많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이 협동작전은 성과적으로 실현되었다.
그러나 그 후 공손도는 자기 세력지반이 강화됨에 따라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꾀하게 되었다. 때마침 고구려에서는 197년에 고국천왕이 죽고 왕위문제로 어수선한 틈을 타 공손도는 침략의 호기로 생각하고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대패하고 물러나게 되었다. 이후 고구려는 공손새력의 있을 수 있는 침략과 연나부귀족들의 분립책동을 미리 방지할 목적으로 198년에 연나부지역에 환도성을 쌓고 방비를 강화하였다.
204년에 공손도가 죽고 그 아들 공손강이 그 뒤를 이었다. 그는 197년의 침공실패를 만회해보려고 집권하자마자 고구려에 대한 새로운 침략전쟁을 일으켰다. 그러나 고구려는 국왕이 직접 정예로운 기병부대를 이끌고 출전하여 좌원벌에서 또다시 적을 크게 격파하였다. 공손강은 그 후에도 낙랑군 둔유현 이남지역을 따로 떼네여 새로 대방군을 둠으로써 이 지방에서 무너져가는 통치지반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이것은 고구려의 서쪽에 침략과 전쟁의 발원지가 계속 남아있으며 또 그것이 강화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였다.
공손침략세력이 강화되는 조건에서 고구려에서는 서북지방의 주요길목과 그 부근의 성들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으며 209년(산상왕 13년)에는 수도를 환도성으로 옮겼다. 환도성에 수도를 옮긴 것은 이것이 고구려의 또하나의 부수도로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427년 평양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국내성이 여전히 기본 수도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220년에 중국에서는 후한왕조가 망하고 위나라(조위, 삼국위 220-265), 촉나라(촉한 221-263), 오나라(222-280)가 섰다. 이러한 정세에서 공손강의 아들 공손연은 위나라와 오나라사이의 대립을 이용하여 자기의 정권을 유지하려고 하였다. 고구려는 한때 오나라와 국교관계를 맺기도 하였으나 위나라가 고구려와 연합하여 공손세력을 멸망시킬 것을 제기하는 조건에서 위나라와의 공동작전을 할것을 계획하고 238년에 많은 병력을 보내 싸움으로써 요동지방의 넓은 땅을 차지하였다. 238년 8월에 양평성(요양)이 함락되고 공손세력은 멸망하였다.
그러나 위나라는 전쟁 전에 약속한 바를 어기고 고구려가 차지한 지역까지도 다 내놓을 것을 요구하였으며 고구려를 반대하는 새로운 침략세력으로 등장하였다.
중기3. 위와의 투쟁
고구려는 239년부터 위나라의 침략에 반대하는 투쟁을 벌였다. 이 전쟁은 240년 중엽까지 오랫동안 계속되었으며 여러 차례의 군사행동을 동반한 큰 전쟁이었다. 239년부터 240년 사이에 고구려군은 요동군의 북부와 남부에 대한 공격을 진행하여 큰 타격을 주었다. 그것은 239년 여름에 요동군 동답현의 관리들과 백성들이, 240년 초에는 요동군 문현, 북풍현의 백성들이 바다건너 산동반도의 제군의 지경에 피난가서 살았다는 사실을 보아도 알 수 있다. 자연재해도 없었던 조건에서 이러한 주민들의 원거리 대규모 이동은 오직 전쟁에 의한 생활거점의 상실로 인한 것으로 밖에 설명될 수 없다.
242년에 고구려는 요동군 서안평현에 다시 진격하여 현성을 함락시켰다. 그것은 요동지역에서 일진일퇴가 반복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준다.
고구려군의 연속적인 공격으로 피동에 빠진 위나라의 유주자사 관구검은 7명의 아문장군을 보내 고구려를 공격하였으나 244년에 고구려는 다시 반공격으로 넘어갔다. 이듬해 245년 5월에 위나라는 오환족의 추장 선우 등을 선봉장으로 고구려 영내 깊이까지 침입시켰으나 격퇴되었으며 같은 해에 현토태수 왕기가 인솔한 침략군도 부여땅을 우회하여 고구려의 후방을 치려고 하였으나 그 역시 실패를 면치 못하였다.
유주자사 관구검은 이렇게 실패를 거듭하자 246년 2월에는 유주의 무력을 총동원하여 현토군을 출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낙랑태수 유무와 대방태수 궁준을 시켜 낙랑국방면으로 길을 빌어 고구려의 남부를 침으로써 앞뒤로 협격하는 전술로 나왔다. 관구검의 위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방어진에 걸려 숱한 손실을 내면서도 침공을 계속하여 8월에는 비류수가에까지 들어왔다.
고구려의 동천왕은 보병, 기병을 합하여 2만명의 군사로 적군을 요격하여 3,000여 명을 쳐죽이는 큰 전과를 거두었으며 다시 퇴각하는 적을 추격하여 양맥(태자하부근)골짜기에서 크게 싸워 3,000여 명을 죽이거나 사로잡았다. 동천왕은 승리에 도취한 나머지 <위나라의 대군이 도리어 우리의 적은 군사만도 못하다.
관구검은 위나라의 명장인데 오늘은 그의 목슴이 나의 손안에 장악되어있구나>라고 하면서 철기(말까지도 갑옷을 씌운 중기병) 5,000명을 이끌고 진격하였다. 그러나 관구검은 방진을 치고 결사적으로 대항하여 나섰다. 보병과의 협동작전없이 기병만으로 방진을 공격하는 무모한 공격전을 한 것은 고구려 기병부대에 커다란 손실을 가져왔다. 대오를 수습하기 어렵게 된 동천왕은 1,000여 기의 군사를 데리고 압록원(압록강가의 벌지대)으로 후퇴하였다.
이리하여 10월에 적군은 환도성을 포위공격하여 함락시켰고 추격을 계속 하였다. 국왕이 남옥저(오늘의 함경남도)로 후퇴하여 죽령부근에 이르렀을 때에는 따라오던 군사들도 다 흩어지고 위험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이때 동부출신의 밀우는 결사대를 조직해 적을 막다가 쓰러졌고 남옥저에 이르러 위급한 정황이 조성되었을 때 동부출신의 뉴유는 자진하여 적진에 들어가 위로하는체 하면서 적장을 찔러죽임으로써 적군을 와해상태에 빠뜨렸다.
그리하여 고구려군은 3개 방면에서 반공격전으로 넘어갔다. 급해진 위나라는 남옥저에서 낙랑국방면으로 패주하였다. 그것은 낙랑 대방 태수들이 거느린 군대가 한, <예맥>지역에까지 침습하여 비교적 가까운 곳에 와있었기 때문이다. 고구려군은 한, <예맥> 군사들과 함께 적을 공격하였으며 대방태수 궁준을 전사하게 하였다. 그 후 위나라는 오랫동안 전쟁준비를 한 끝에 259년 12월에 울지해를 우두머리로 하는 침략군을 들여보냈다. 그러나 고구려의 정예로운 기병 5,000명은 양맥골짜기에서 적군을 크게 격파하였다. 이 전쟁에서 8,000여 명을 잃은 적군은 황황히 도망치지 않을 수 없었다.
위나라의 침공으로 시작된 고구려-위전쟁은 용맹한 고구려인들의 투쟁에 의하여 고구려의 커다란 승리로 종결되었다. 그 후 위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다시는 고구려에 침입하지 못하였다.
중기4. 연과의 투쟁
모용 선비족이 세운 전연은 그 지리적 요건으로 인하여 고구려에 대한 침략을 일삼는 세력으로 되었다. 그러므로 고구려는 연의 침략에 대처하기 위한 군사적 준비를 하는 것과 함께 대외적으로도 전연을 후방에서 견제할 수 있는 석조(후조, 319-350)와 관계를 맺었다.
333년에 전연왕으로 된 모용황은 336년 자기를 반대했던 그 아우 모용인을 공격하여 요동군 지역을 차지하였다. 이때 동수(299-357), 곽충 등이 모용황의 추격을 받고 고구려에 망명해왔다. 339년 9-10월에 모용황은 고구려 서북방의 중요거점인 신성에 침공하였다. 당시 아직 전쟁준비가 되어있지 못한 고구려는 외교적 방법으로 적군을 물리쳤다. 342년에 고구려는 침략에 대비하기 위해 다시 환도성을 보수하고 국내성을 개축하였으며 8월에는 고국원왕이 환도성으로 옮겼다.
342년에 전연은 수도를 용성(조양부근)으로 옮겼으며 서쪽의 우문선비, 서남쪽의 석조를 치기 전에 후방의 근심을 없앤다고 하면서 불의에 고구려로 침략하여 왔다. 이때 적군은 당시 고구려왕이 와있던 환도성을 목표로 삼았는데 환도성으로 가는 두갈래 길 가운데서 북도는 넓고 남도는 좁으니 주력군을 남도로 내보내는 것이 불의공격전술로 된다고 보았다.
이에 대하여 고구려측에서는 적의 주력이 반드시 넓은 북도로 올것으로 판단하고 5만 명의 대군을 파견하였으며 좁은 남도에는 국왕이 거느리는 소수의 약한 무력만을 배치하였다. 결과 북도로 쳐들어온 적군 1만 5,000명은 완전히 소멸할 수 있었으나 남도에서는 방어진이 무너지고 정세가 위급하게 되었다. 고국원왕은 환도성으로 들어가 대응할 방책을 세우고 소수병력의 호위 밑에 단웅곡으로 피신하였다. 그리하여 적들은 환도성으로 밀려들게 되었으며 미처 피신하지 못한 왕의 어머니 주씨는 적들의 손에 잡히고 말았다.
그러나 전쟁은 결코 고구려가 진 것이 아니었다. 병력의 손실은 전연 측이 더 컸으며 북도로 나갔던 고구려군의 주력은 즉시 환도성으로 향하여 달려오고 있었다. 이런 형편을 알아차린 모용황은 달아나는 것이 상책이라고 생각하면서 서안의 귀중품들을 노략질하다 못해 국왕의 아버지 미천왕의 시체까지 파갔다. 343년에 전연은 미천왕의 시체를 돌려주었으나 왕의 어머니 주씨는 계속 인질로 붙들어 둠으로써 고구려의 약점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4세기 중엽에 고구려는 전연과의 대결을 위한 준비로서 남평양일대의 경영에 힘을 넣었을 뿐 아니라 서북방면으로도 전연의 있을 수 있는 침공에 대처할 요동지방과 서북조서 각지에 성곽방어시설들을 새로 쌓거나 보수하였으며 자체의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군사들의 훈련과 무기무장생산을 강화하였다.
355년에 고국원왕의 어머니가 전연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당시 전연은 북중국 깊이까지 진출하여 큰 나라를 이루었으므로 함부로 건드릴 수 없었다. 370년에 이르러 중국대륙의 정세는 일변하였다. 모용선비의 전연은 자체내부의 모순이 극도에 달하여 심히 약화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동남쪽에서는 동진(317-420)이, 서쪽에서는 전진(351-394)이 전연을 공격하였다. 370년 초에 전진은 전연의 낙양을 점령하였고 연이어 공세를 취하였다. 전연은 40만 대군을 동원하여 맞섰으나 연전연패하였으며 10월 말에는 전진군이 전연의 수도 입성을 포위하였다.
서방정세를 주의 깊이 주시하고 있던 고구려는 전연의 후방이 비어 있는 틈을 타서 전연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하였다. 고구려의 정예기병부대의 대무력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만리장성계선을 넘어섰으며 유주의 중심지 연군(계), 범양국(베이징남방), 대국(하북성 서북부, 산서성 동북부)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11월 7일에 업성은 함락되고 도망치던 전연왕 모용위는 며칠 후에 붙잡혔다. 고구려는 전연의 유주와 평주를 합하여 13군 75현으로 된 자체의 유주를 두고 몇해동안 전연이 다시는 일어서지 못하게 진압하였다.
그 후 고구려는 376년 초경에 유주지역에서 철수하였다. 그러나 대릉하 하류-의무려 계선 이동지역을 확보함으로써 기원전 3세기초 이후시기 고조선의 옛땅을 완전히 되찾았다.
전성기1. 광개토대왕기
광개토대왕은 고국양왕의 아들로 이름은 담덕이었다. 고구려의 19대 왕으로 즉위한 그는 영락이란 연호를 사용하고 생존시 영락대왕이라 불리워졌다. 375년(소수림왕 5)에서 413년(광개토대왕 23)이란 짧은 생애를 살면서 재위 기간인 391년에서 413년까지 그가 이룬 영토확장의 업적은 우리 민족사에 길이 남을만한 것이었다.
광개토대왕의 업적은 왕의 사후, 장수왕 2년(414년)에 세워진 `광개토왕비'에 잘 나타나 있다. 비문의 내용은 대체로 세 부분으로 나누어지는데, 제1부분은 고구려 건국의 신화전설과 왕위계승에 대한 것과 호태왕의 행장을 간단히 기술한 것이다. 제2부분은 호태왕이 비려와 백제를 정벌하고 신라를 구하고 왜구를 퇴패시키며 동부여 등을 정벌한 사실 및 탈취한 성지, 촌락 수와 인마의 수 등을 기술한 것이다. 제3부분은 호태왕의 "존시교언(存時敎言)"에 근거해서 호태왕릉의 수묘연호의 내원 및 인가수 등을 상세히 기록한 것이며 동시에 호태왕이 제정했던 제도인 조상묘에 세우는 비와 연호의 제정, 그리고 그들은 서로 전매할 수 없음을 정한 제도도 아울러 기술하고 있다.
광개토왕은 비려, 숙신 동부여 등을 정복하고 수를 물리쳐 가야까지 정벌하였다. 또한 백제에 대한 공격을 즉위하면서부터 감행하였는데, 재위기간 중 4차례의 대백제전을 치른 것으로 보아 전날 고국원왕의 전사에 대한 본격전인 설욕전의 시작으로 볼 수 있겠다. 비려는 계단 8부 중 하나인데 그들의 거주지는 대체로 오늘날의 요하 유역으로 추정되고 있다. 숙신은 동북아시아의 오랜 종족의 하나로서 시대에 따라, 읍루, 물길, 말갈 등 여러가지 이름으로 불리웠다. 이들의 거주지는 길림 일대 또는 송화강 유역 등 고구려의 북쪽 지역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동부여는 오늘날의 모단강 유역 일대에서 연해주에 걸쳐 있었다.
그런데 삼국사기에는 비문에는 없는 연과의 교섭 대립이 많이 전하여지고 있다. 이에 의하면 요동군에서의 공방이 전하여지는데 고구려는 요동평원을 거의 손에 넣은 듯 하다. 요동군은 한대부터 철관이 있던 곳으로, 일찌기 두만강 유역의 철자원을 개발했던 고구려는 이 지역을 차지함으로써 생산력과 무력증가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다. 한편 광개토왕은 평양에 9개의 사찰을 건설하였는데, 9개의 사찰을 건설하였다는 것은 당시 평양성의 주민이 상당히 많았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고구려에서 불교가 공인되고 사찰이 처음으로 건설된 때로부터 20년도 못되는 시기에 평양에 9개의2 사찰을 건설한 것은 고구려가 평양성을 매우 중요시한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전성기2. 장수왕기
광개토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장수왕도 부왕의 활발한 정복사업을 이어받아 영토확장에 힘쓰는 등 고구려사에 있어서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특히 장수왕은 반도 남쪽으로의 진출에 힘써 신라와는 죽령. 마령을 연결하는 산맥 및 속리산의 서쪽에 있는 보은의 북쪽을 획선으로 대치하였고, 백제와는 이 선을 서쪽으로 연장하여 남양만 및 아산만으로써 경계를 삼았다. 1979년 충주에서 발견된 `중원고구려비'는 이러한 장수왕의 영토 확장 업적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주는 좋은 증거라 하겠다.
또한 광개토왕 이래 확대된 영토의 효율적 통치를 위하여 장수왕 15년(427년)의 평양천도를 전후하여 정부기구의 확대. 정비가 불가피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국초부터 정치기구의 양대조직이었던 족장을 의미하는 형류과 취수체계를 담당했던 사자류를 확대. 개편하여 중앙관제로 정비하였다. 장수왕의 평양천도를 전후한 시기의 고구려 사회는 그 발전 방향이 자기 사회의 성장을 저지하고자 하는 밖으로부터의 압력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는 한편, 안으로는 다원적 지배질서를 지지하는 족장세력들을 왕권하에 통합하면서 왕권강화와 일원적, 중앙집권적 지배질서를 구축하는 것이었고 또 이러한 방향은 소수림왕의 일련의 시책을 통하여 더욱 가속화되어 이 시기에 상당한 진전을 보았다.
이제 고구려는 외침으로 수도를 잃고 피난하며 지내던 이전의 국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일련의 체제 정비와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활발히 정복전을 펴 나갈 수 있을 만큼 국력이 신장되었다. 이러한 가운데서 장수왕은 427년에 평양천도를 단행했던 것이다.
고구려가 평양으로 천도한 목적은 삼국통일의 원대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였다. 즉 삼국통일 정책을 강력히 추진하는데 있어서 평양은 매우 유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평양은 우선 군사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는데 산성에 의거한 군사활동에 능하였던 고구려인들에게 대성산은 믿음직한 방어수단이었다. 평양은 또한 교통의 요충지에 자리잡고 있었다. 중앙집권적 국가의 통치에 있어서 교통로는 정부가 각 지방에 통치력을 관철시키는 신경과 같았으며 전국에서 생산되는 물자를 전달하는 혈관과 같이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평양은 경제적으로도 유리한 곳이었다. 대동강 하류를 중심으로 펼쳐진 평야지대는 수도 평양성의 수요를 충족시킬 수 있는 농산물을 생산할 수 있었으며 대동강, 재령강과 서해를 끼고 있기 때문에 수산에도 유리하였다.
이렇게 볼 때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전날의 국난을 완전히 극복하고 강력한 정복국가로 발전한 고구려가 마침내 평양성을 수도로 정함으로써 새로운 도약의 발판을 마련한 데에 그 의의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고구려는 동북아 방면에 독자적 세력의 확보에 주력하여 타세력이 위협을 가해올 때는 이를 적극 저지하지만, 스스로 서진하여 북중국 방면으로 진출을 도모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이는 427년 평양천도와 함께 그 이후의 고구려의 대외정책의 기본 방향을 시사해 주는 바이다.
그 후 고구려는 중국의 남조 뿐 아니라 막북의 수연과도 화친을 맺어 북위를 견제하는 한편, 북위 조정에 계속 사신을 보내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서부 국경에서의 긴장을 완화시켰다. 또한 북위 조정에서도 고구려의 사신을 남조 사신 다음으로 대우하는 등 고구려와의 우호관계 유지에 노력하였다. 이로 인해 고구려와 북위 간에는 한동안 평화가 지속되었고 이 틈에 고구려는 본격적으로 반도 남하정책을 추진하였다. 고구려의 남진의 적극화는 곧 백제에게 커다란 압력으로 작용하였다. 앞서 광개토왕의 공략으로 고구려에게 밀리기 시작한 백제는 고구려에게 빼앗긴 영토를 되찾고 또 실세를 만회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삼국사기에 의거하여 광개토왕 즉위년부터 장수왕 38년까지의 여, 제의 공방전을 보면 고구려의 백제 공격이 1회로 나타나고 있는 반면에 백제의 고구려 공격은 3회로 기록되어 있고 공격을 준비하다가 중도에 그만둔 경우도 3회나 있었다. 위의 사실들은 백제가 영토회복을 위해 온갖 힘을 쏟고 있었음을 짐작케 한다. 그러나 백제의 고구려 공격은 제대로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도리어 고구려에게 연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백제의 외교적 노력은 국제정세의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두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하나는 신라와의 우호관계를 도모하여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의 영향권에서 벗어나게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북위에 접근하여 북위로 하여금 고구려를 견제토록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백제의 외교적 노력은 모두 `대고구려 견제 세력권 구축'이라고 하는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후기1. 수문제의 침입
삼국간의 분쟁은 6세기 중반 대륙의 정세변화에 따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580년 수나라가 건국되고, 이어 4세기 이래 3백여 년 분열되었던 중국을 통일하였다. 이에 따라 동아시아 국제정세는 급속히 변모하게 되었다. 수나라는 돌궐을 격파, 복속시켰다. 2백여 년에 걸쳐 다원적인 세력균형적 상태를 유지해왔던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이제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를 지향하는 추세를 나타내었다. 이러한 수나라의 팽창은 자연 동북아 방면에서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해오던 고구려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
고구려는 수나라가 남중국의 진을 멸망시키자, 다가올 위협에 대처해 군비를 강화해나갔다. 그 뒤 고구려와 수나라 사이에는 비록 표면적으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그 이면에서는 중국 중심의 일원적인 국제질서의 지향과 다원적 세력균형체제의 유지라는 양국의 근본적인 이해관계의 상충으로 치열한 대립이 전개되어 나갔다.
수나라의 세력이 동북아 방면으로 뻗쳐오자 고구려국의 안위는 절대적 위협을 받게 되었다. 종래까지 고구려 세력하에 있던 일부 거란족과 말갈족이 수나라의 영향력을 좇아 이탈해나가기 시작하였다. 나아가 수나라는 고구려 왕의 입조를 요구하며 노골적으로 복속을 강요해왔다. 강대한 수나라의 국력 앞에 시간이 흐를수록 고구려의 위치는 불리해졌다. 이제 휘하의 거란족과 말갈족의 동요를 막고 독자적인 세력권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뻗쳐오는 수나라의 영향력을 봉쇄하기 위한 비상 조처를 취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전쟁의 길을 택하였다. 598년 고구려군이 요서지방에 있는 수나라의 전진기지를 공격하여 양국간의 전쟁이 발발하였다. 고구려의 선제공격으로 당황한 수 문제는 수륙 30만 대군을 거병하여 요동으로 하여 요하까지 쳐들어 왔다. 그러나 고구려의 강력한 항전과 천재지변으로 인해 치명적 타격을 받고 패배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헌에는 이때 죽은 수의 군사가 10중 8, 9였다고 한다. 수나라는 이 전쟁의 패배로 인해 한동안 고구려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생각하고 몇차례 거론된 고구려의 침입을 중지하였다.
후기2. 수양제의 침입
수와의 1차 전쟁 이후 고구려와 수와의 관계는 한동안 소강상태를 유지하면서 지냈다. 그러나 문제가 죽고 그의 아들 양제가 왕권을 잡으면서 상황은 다시금 긴장을 고조하였다. 수 양제는 중원을 평정하고 대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에 불타고 있었다.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기고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하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선대왕인 문제가 못다한 고구려 정복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양제는 고구려에 계속적인 복종을 요구하였으나 고구려는 의연하게 거부하며 불시에 있을 수의 침략에 대배하였다. 612년(영양왕 23) 수의 양제는 113만 대군을 이끌고 요하를 건너 요동까지 진입하였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요동 정복이 여의치 않게 되자 양제는 30만 군대를 이끌고 압록강 서쪽으로 침입해 왔다.
이때 고구려 명장 을지문덕은 후퇴를 가장하고 수나라군을 유인하였다. 전쟁 전 을지문덕은 적장 우중문에게 "신기한 계책은 천문을 구하고 기묘한 계책을 지리를 다하였소. 전쟁에서 모두 이기니 이미 공이 높구려 족함을 알거든 그만둠이 어떻소.(神策究天文 妙算窮地理 戰勝功旣高 知足願云止)"라는 희롱조의 오언시를 보냄으로서 싸움에 자신감을 보여주었다. 수의 30만 대군은 살수에서 치명적 타격을 받고 겨우 2천여 명만이 살아 남았다고 한다.
그 후 수나라는 613년과 614년에 두 차례나 더 침입을 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의 완강한 저항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618년 전쟁으로 인한 경제의 파탄과 민심의 이반으로 말미암아 당에게 멸망하고 만다.
고구려도 또한 전화로 인해 국력이 많이 쇠잔하여 이후 당과의 전쟁 등을 치루면서 더욱 위축된다.
후기3. 당 태종의 침입(안시성전투)
수나라 멸망 후 중국대륙의 일시적인 혼란기와 당나라 초기의 과도기를 거쳐 고구려는 다시 당나라와 대결하게 되었다. 전쟁의 근본적 원인은 수나라의 경우와 동일한 것이었다. 당나라도 수나라와 마찬가지로 분열된 중국대륙의 통일, 돌궐의 격파, 그리고 고구려에 대한 공격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밟았다. 당나라에 의한 중국통일이 이루어지자, 고구려도 그에 대처하여 부여성에서 발해만에 이르는 천리장성을 쌓는 등 대책에 부심하였다. 그러한 위기의식과 긴장된 상황하에서, 다시 귀족들간의 분쟁이 야기되어 연개소문일파에 의한 쿠데타가 감행되었다.
연개소문은 집권 후 강경한 대외정책을 표방해 당나라와의 정면 대결의 자세를 강화하였다. 642년 김춘추가 평양을 방문하여 양국간의 화평을 모색할 때, 이를 거절하고 강경노선으로 치달았다. 이러한 연개소문의 정책은 당나라와 대결이 불가피하다는 이 시기 국제정세에 대한 판단과 그리고 신라를 제압해 동북아지역에서 패권을 확보하겠다는 입장 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이나, 또 한편으로는 격렬한 유형 쿠데타를 통해 집권한 그로서는 대외적 긴장과 위기는 그의 지배력을 강고히 하는 데 유리하다는 현실적인 국내 정치상의 상황판단이 작용하였던 것 같다. 아무튼 당나라와의 대결을 앞두고 다시 신라와의 대결을 고집한 것은 고구려국의 운명에 결정적인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
고구려와의 교섭이 좌절된 뒤, 신라는 당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예복을 당나라의 그것에 맞추어 바꾸는 등, 당나라와의 동맹을 더욱 확고히 하게 되었다. 이에 고구려는 남북에서 강력한 적대적인 세력을 맞게 되었다. 고구려가 이에 대항해 백제와 연결하고 북방의 유목민국가와 재휴를 모색하였으나, 그러한 연결은 나당간의 동맹에 비래 훨씬 더 취약한 것이었다.
마침내 645년 당태종이 이끈 원정군이 침공해옴에 따라 양국간에 전쟁이 발발하였다. 수나라와의 전쟁에서 굳건히 지켜던 요동성이 함락당학고 백암성은 성주 손대음이 항복하는 사태가 발생하였다. 그러나 당 태종의 침공은 안시성전투에서 좌절할 수 밖에 없었다. 안시성은 연개소문의 쿠태타에도 굳건히 자기의 역할을 하고 있었던 강성이었다. 당 태종은 4개월에 걸쳐 총 50만 명의 군사와 하루 5~6회의 공격을 퍼부었으나 안시성의 장군 양만춘의 효과적인 지휘와 고구려인의 용맹스런 항쟁으로 당 군은 계속적인 실패를 거듭하였다. 실패의 연속에서 계절은 겨울로 치닫게 되자 당 태종은 철군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649년 당 태종의 죽음 이전까지 당은 고구려에 대해 몇 차례의 침략을 시도하였으나 그때마다 고구려는 당의 침략야욕을 분쇄하였던 것이다.
후기4. 나당연합군과의 전쟁과 멸망
당나라군은 산발적인 침공을 계속함으로써, 고구려의 국력을 피폐하게 하였다. 이어 660년 백제가 멸망하고, 고구려에 대한 나당연합군의 공세가 더욱 가열되었다. 661년 당의 장수 소정방은 35만은 대병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입하였으나 연개소문의 효과적인 대응으로 패퇴하였다.
하지만 이제 고구려가 당과의 대결에서 지녔던 전략적인 최대의 이점은 크게 감쇄되었다. 그것은 대규모 당군이 안고 있는 보급상의 문제였는데 긴 수송로를 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이점이다. 그것은 당군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그런데 백제의 멸망으로 활동이 용이해진 신라군이 남쪽으로부터 공세를 강화하고, 당나라군에게 군수물자를 공급하였다. 이에 당나라군은 겨울철 군사작전도 감행할 수 있게 되었다. 장기간에 걸친 전쟁으로 피폐해진 고구려는 665년 연개소문이 죽은 뒤 그 아들간의 내분으로 결정적으로 약화되었다.
이러한 고구려 정세를 파악한 당의 고종은 666년 12월 이세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침략을 감행하는 한편, 신라로 하여금 고구려를 공격케 하였다. 자체 정권의 분란과 외부의 침략은 우리 역사에서 철옹성을 유지하며 광대한 대제국을 건설했던 고구려를 멸망의 길로 유도하였다.
고구려는 결국 668년 9월 평양성의 함락으로 28대 705년에 걸친 웅장한 역사를 마감하게 되었된 것이다.
고구려의 맥1. 고구려 유민들의 부흥운동
평양성 함락 후, 당나라는 이곳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2만의 군대를 주둔시켰다. 고구려 전국은 9도독부 46주 100현으로 나누고, 그 장에는 고구려인을 뽑아 임명하되 당나라 관리를 보내 실제적인 통치를 하였다. 그리고 669년에는 고구려인의 저항을 원천적으로 봉쇄하기 위해 대대적인 주민을 당나라 내지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는 당시 고구려 말기의 인구 69만 7천호의 약 20분의 1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고구려 사회를 근본적으로 뒤흔드는 망동이었다. 당나라의 이러한 지배정책은 곧바로 고구려 유민들의 강력한 저항을 촉발하게 하였다.
669년 검모잠 일파의 부흥운동이 일어났으며, 이어 안시성 등지에서 봉기가 잇달았다. 한편, 신라는 당나라에 대한 공세를 취하면서 유민들의 부흥운동을 지원하였다. 그리하여 670년에는 신라장군 설오유와 고구려장군 고연무가 이끄는 연합군이 압록강을 넘어 작전을 수행하기도 하였다. 당나라는 이에 대처해 수차례 원정군을 투입하였다. 고구려 유민의 부흥운동은 671년 안시성이 함락되고, 672년 부흥군이 패배하자 평양부근일대의 고구려유민이 신라로 넘어감으로써 좌절되었다. 그 뒤 당나라군과의 전쟁은 신라군에 의해 주도되었다. 한편 요동과 그밖의 옛 고구려영역에서 상당수의 유민들이 신라로 넘어와 합류하였다. 그리고 유민들 중 일부는 몽고고원의 돌궐 영내로 이주하여 몇 개의 집단을 형성해 돌궐 가한의 통치하에서 자치적인 단위를 형성하였다.
고구려 유민집단은 676년 이후 당나라가 요동지역에 산재한 고구려 유민들을 효과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보장왕을 요동주도독조선왕으로 삼아 고구려 유민들을 다스리게 하였으나, 요동에 돌아온 보장왕은 곧 속말말갈과 연결하여 반당운동을 획책하였다. 681년 보장왕을 중심으로 하는 일단의 부흥운동이 있었으나 당에게 탄로나서 다시 당에 소환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지속적인 고구려 유민들의 항쟁에 위협을 느낀 당나라가 다시 대규모로 유민을 당나라 내지에 이사시켰다. 한편으로는 당나라에 저항한 유민들이 계속 신라와 동부만주, 그리고 돌궐로 이주해갔다. 그 결과 요동지역에 거주하는 유민의 수는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다.
한편, 당나라의 영주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집단은 696년 거란족의 반란에 따른 혼란을 틈타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에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로 규합되었다. 이것이 곧 나중에 발해가 된다. 고구려유민은 발해의 중심세력을 형성하였다. 중국 내지와 돌궐방면의 유민은 점차 그 지역 주민들 사이에 흡수, 동화되었다. 요동에 남아 있던 고구려유민은 안녹산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 이어 9세기 전반 발해에 병합되었다.
수백년 동안 한반도와 만주지역에 걸쳐 강대한 국가와 찬란한 문화를 건설하였던 고구려의 자취는 그 유민들과 함께 신라와 발해로 나뉘어 계승되었다.
고구려의 맥2. 당 세력의 축출, 발해로의 계승
고구려의 멸망으로 나라를 잃은 고구려 유민들은 요동 지방을 중심으로 지속적인 항쟁을 벌여 나갔다. 이에 당나라는 고구려 유민들의 저항을 막아 보려는 갖가지 회유책과 대책을 세우느라 고심했다. 그러던 중 696년 요서 지방에서 거란족 이진충의 난이 일어나 당은 일대 혼란에 빠졌다. 이러한 혼란을 절호의 기회로 생각한 고구려의 장군 출신이었던 대조영은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와 더불어 유민들을 이끌고 당의 통치를 벗어나려고 멀리 동쪽으로 이동하였다. 당은 대조영과 걸사비우의 이러한 움직임을 알고 곧 추격군을 보내 대조영과 걸사비우를 잡게 하였다.
당의 추격군을 피해 오던 중 말갈족의 지도자 걸사비우는 당군에게 죽음을 당하고 대조영은 당의 추격을 따돌리고 말갈족까지 인솔하여 길림성의 돈화현 동모산을 중심으로 나라를 세웠다. 이것이 곧 발해의 성립이다. 처음에 발해는 "진"이라 국호를 정하였으나 훗날 발해라 개칭하였다.
716년 당나라와의 평화적 외교 기틀을 확립한 발해는 강력한 국가 건설을 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719년 대조영이 죽으면서 그의 큰 아들 대무예가 왕위를 물려 받았다. 그가 곧 발해의 2대 왕인 무왕이다. 무왕은 즉위 후 건원을 인안이라 하고 독립국가의 기틀을 더욱 다지기 위해 영토 확장에 주력하였다. 무왕은 주위의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고 멀리 연해주 남단까지 영토를 확장하면서 동해로는 일본과의 교통로를 열어 나갔다. 726년 당나라와 흑수말갈문제로 다시 대립하게 되면서 발해는 15대 220여 년간 당과 대립과 화해를 교체하는 관계를 유지해 나갔다.
발해는 2대 무왕과 3대 문왕 대에 국가의 기초를 확립하였고, 10대 선왕 대에 영토와 국력을 가장 강대하게 만들었다. 이 시기에 발해는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전국을 나누어 통치하였고, 당서(唐書) 에서는 이때 발해를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 하였다. 그러나 발해는 후기에 가서 지역적 고립으로 오는 안일함에 빠져 중원에 적이 성장하고 있음을 파악하지 못하였다. 10세기 초에 거란족의 야율아보기가 거란족을 통합하여 자신들의 국가를 수립하였다. 야율아보기는 중국본토 경략에 앞서 후방의 우환을 없애기 위하여 927년 발해를 침략하게 된다. 거란은 발해가 거란족을 막기 위해 구축해 놓은 부여성을 점령하고 불과 20일 만에 발해의 마지막 왕인 대인전의 항복을 받게 된다. 이로써 발해는 제대로 방비하지 못하고 나라를 잃게 된다. 이후 발해의 유민들은 신라와 고려에 편입하게 된다.
한편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밝히는 근거는 역사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예로 조선시대의 실학자인 유득공이 1784년에 집필한 발해고에서는 발해의 무왕이 일본에 보낸 국서의 내용에 "고구려의 옛터를 회복한 것으로 부여의 유속이 있다.(復高麗之舊居 有扶餘之遺俗)"고 나타나는데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임을 암시하는 말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무왕의 아들이었던 문왕도 일본에 보낸 국서에서 스스로 고구려의 국왕이라고 하였다고 한다. 발해의 역사적 규명은 고구려의 명맥을 이은 발해가 만주를 주무대로 활동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는 실학자 유득공이 신라와 발해를 "남북국시대"로 명명했던 사실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한편 유등공 이후로 한치윤, 홍석주, 정약용, 김정호 등에 의해 이러한 발해사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가 되었고 오늘에 와서는 사학자들의 연구와 함께 일반인에게도 발해가 우리 민족이 만주를 경략했었음을 상기시키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출처 http://www.chosu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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