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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12. 1. 11:12

[스크랩] 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 글쓴이: 金永集
  • 조회수 : 2
  • 07.09.16 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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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민족의 어머니 웅녀황비 (출처 - 다물넷)

 

 

1. 단군 왕검의 탄생

 

 한동안 제국의 변경을 넘나들며 소란을 떨던 부여족들이 패퇴하여 흥안령의 서쪽에 머물며 자리를 잡자 오래간만에 전쟁이 사라지고 사람들에게 평화가 찾아왔다. 이때 웅녀황비는 커붉단 한웅의 황손을 잉태하는 경사를 맞아 나라의 안팎이 즐거움으로 충만하였다.

 

 산월(産月)이 다가오자 웅녀황비는 차가운 날씨의 신시 아사달을 떠나 친정어머니가 계신 백두산 아래 감족의 땅으로 돌아갔다.

 

 백두산(白頭山)은 예로부터 우리 한민족의 정기가 서린 민족의 성산(聖山)이다. 산의 정상 양달에는 하늘 못인 천지(天池)가 있고 산중 깊숙이 응달에는 천지(하늘 못)와 감지(지상 못)의 걸침 역할을 하는 작은 하늘못(小天池)이 있다.

 

 성산(白頭山)의 아랫녘 친정에 자리 잡은 황비는 매일같이 소천지에 들어 깨끗하게 목욕을 하고 다시 하늘못에 올라 뱃속의 황손을 위한 축원(祝願)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드디어 산일이 가까이 다가오자 신시 아사달의 커붉단 한웅은 잠시 정무를 접어두고 황비의 측근(側近)에 행궁(行宮)을 마련한 후 황비의 축원행사에 동참한다.

 

 개천(開天) 1528년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 : 오전 3~5시), 웅녀황비는 백두산의 소천지옆 신단수(神檀樹)아래에서 한민족의 시조로 추앙받게 되는 단군성조(檀君聖祖)를 생산하였다. 단군은 커붉단한웅의 셋째 아들이고 웅녀황비의 첫 아들이다.

 

 아기 단군이 무사히 첫돌을 맞았을 때 아버지인 커붉단 한웅과 어머니 웅녀황비는 아기단군을 데리고 백두성산의 하늘못(天池)에 올라 정성을 다하여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하늘의 백성인 하늘민족(天孫族)을 이끌어줄 단군을 내려주심에 감사함을 고(告)하였다.

 

 


 

웅녀황비와 어린 단군

 

 

2. 단군의 성장

 

 나라의 서쪽에 자리잡고 있는 부여족들의 뛰어난 전투력에 위협을 느낀 커붉단 한웅은 황태자 지명문제보다 감족과 쥬신족을 하나의 민족으로 단결시켜 나라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는 것을 최우선 정책으로 삼고 있었다. 이러한 주변 상황은 단군에게 유리하게 작용하여 커붉단 한웅의 제 1,2 황자들은 태자의 자리에 앉지 못하였고, 후에 이복 동생인 단군에게 배달한국 천황위를 내주어야 했다.

 

 어떻게 제 3황자였던 단군이 혈통을 중시하는 배달한국의 풍습을 거스르고 천황위에 오를 수 있었던 걸까? 그 이유는 어머니 웅녀황비의 피나는 노력 덕분이었다.

 

 배달한국과 동시대에 있던 다른 나라의 통치자 선발제도를 살펴보면 대부분 그 나라의 최강자나 최강 세력가문 출신이 통치자가 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하지만 배달한국은 타국과는 달리 나라 최고의 통치자에게 수준 높은 학식을 요구하는 특이한 점을 보인다.
 

 그 이유는 우리 민족만의 독특한 단군제도(檀君制度)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우리 민족의 정신적인 지주(支柱) 단군은, 단군에 오르는 순간 천자(天子)로 신분이 격상되면서 인신(人神)으로 대접 받게 된다. 단군에게는 국난에 대처하여 자유롭게 병력을 운영할 수 있는 권리와 함께 국가의 명운(命運)이 걸린 사안에 대한 결정도 중신들의 동의없이 내릴수 있다.

 

 단군에게는 그에게 주어진 무소불위의 권력만큼이나 무거운 책임과 임무도 따르게 된다. 단군은 하늘과 지상을 잇는 천자로서 나라와 백성의 안위를 위하여 손수 축문(祝文)을 짓고 하늘에 올리는 천제(天祭)를 주관하는 일에서부터, 전란이나 역병 등은 물론이고 심지어는 자연재해(自然災害)까지 막아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중대한 임무를 지닌 단군에 오르기 위해서는 까다로운 절차와 함께 상당한 무예와 학식이 필요했고, 이러한 것들이 배달한국의 독특한 통치자 선발제도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현명한 웅녀황비는 이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거기다 중신들의 지지를 받는 단군의 이복형제인 제 1,2황자와 경쟁해야 하는 불리한 현실을 절감하게 된다.

 

 상황이 불리한 만큼 이에 대처하는 웅녀황비의 움직임도 재빠르고 주도면밀 했다. 그녀는 심복들을 부여족의 땅으로 보내어 그들이 보유하고 있던 신종 전투 장비들을 구입해 들였다. 특히 청동 화살촉과 살상력이 높은 날이 굽은 장단검(長短劒), 그리고 치명적인 투창(投槍), 가볍고 효과적인 방패(防牌) 등은 모두 전투를 수행하는데 탁월한 효능을 발휘할 수 있도록 개발되어 있어서 이러한 무기를 사용하게 될 앞으로의 전쟁은 대량 살상을 피할 수 없음을 예고하고 있는 것이다.

 

 웅녀황비는 어린단군에게 이러한 전투용 신장비들을 능숙하게 다룰 수 있는 기술을 연마하도록 하였고, 웅녀황비의 노력에 힘입어 어린 단군의 무예실력은 갈수록 일취월장 했다.

 

 소년 단군이 13세에 이르자 소년답지 않은 건장한 체격을 과시했고, 그동안에 갈고 닦은 무예실력을 천하에 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그의 존재를 철저히 무시하고 있던 두 황자들은 긴장하게 되었다. 그동안 은인자중하며 무예와 학업 정진에만 몰두했던 소년 단군은 이제 세상이 잊고 있던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백성들의 민심을 자신에게 모아야 할 필요성을 깨달았던 것이다.

 

 이때 소년단군은 몇 가지 돌출행동을 벌여 세상을 놀라게 하는데 그중의 한 가지를 살펴보면 신시의 백악산에 혼자 들어가 3일 밤낮을 잠복한 끝에 그 동안 산에 오른 약초꾼들을 공격했던 악명 높은 곰을 잡아 세상을 놀라게 한 것이다.

 

 소년단군이 14세가 되던 해 웅녀황비는 단군을 친정으로 보내 감국(熊國)의 부왕(副王) 직무를 맡도록 하였다. 웅녀황비가 이와 같은 결단을 한 이유는 단군의 존재에 위협을 느낀 두 황자측에서 어린 단군에게 해를 입힐 음모를 꾸미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선 소년단군을 안전하게 피신시킨다는 의미와 함께 감족의 부왕으로서 실무 경험도 쌓도록 한다는 절묘한 수순이기도 했다.

 소년 단군은 어머니의 뜻에 따라 홀로 감국(熊國)의 수도가 있는 백두산 아사달(阿斯達)로 떠나갔다. 그곳은 소년 단군이 태어난 고향땅이기도 했다.

출처 :왕실과 황실의 역사▶역사지식Cafe 원문보기 글쓴이 : 지 기ノ인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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