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태영 박사 인터뷰 - 청와대에서 모셔간 머슴의 아들, 2007/11/12 09:42
출처 = http://blog.naver.com/likej8027/50024417724
1부
머슴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자기 땅 한 뼘조차 없는 지독한 가난을 대물림 받았습니다. 가난은 ‘한’ 이었고 비참함을 뛰어넘는 ‘비극’이었으며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 도토리로 주린 배를 채워야 하는 ‘굶주림’이었습니다.
간신히 18살 늦은 나이에 중학교를 졸업하고 어머니가 어렵게 마련해준 차비를 들고 올라온 서울, 신문을 돌리는 것은 기본이고 하우스 보이, 구두닦이에 방물장수, 아이스께키 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었습니다.
농촌이 이렇게 가난해선 안 된다는 생각에 당시 농업선진국으로 알려졌던 덴마크 국왕에게 무작정 편지 한 통을 보냈습니다.
꿈에 그리던 덴마크 장학생으로 선발되어 결국 우리나라에 새마을 운동을 도입하게 된 배경이 됐습니다.
다시 또 이스라엘에 갔습니다. 이스라엘의 농촌개발을 직접 보고 공부하고 싶어서였습니다. 그 어렵다는 히브리어를 마스터하고
5년 2개월의 최단기간에 최고 우수한 성적으로 히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습니다.
참 한편의 소설 같은, 어찌 보면 거짓말 같은 삶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로 건국대학교 부총장까지 지내신 류태영 박사의 얘깁니다.
꿈과 믿음이 있는 한 좌절은 없다고 외치시는 류태영 박사를 7월 25일 CBS 손 숙의 아주 특별한 인터뷰(표준FM 98.1Mhz 월~토 오후 4시 5분)에서 만나보았습니다.
◇ 세상은 달라졌어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
▶ 우리나라 최초로 새마을 운동을 도입하셨고 이스라엘의 전문가이자 교육에 관한 한 최고의 전문가이신 류태영 박사님을 모셨습니다.
아직도 많이 바쁘신가 봐요. 강의를 자주 다니시나요?
강연도 하고 저서집필도 하고, 하는 일이 많지요. 청소년 지도도 하고 있습니다.
▶ 일흔이 넘은 나이, 연세가 꽤 있으신데 그렇게 많은 일을 해도 괜찮은가요?
건강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할 수 있으면 기회가 될 때마다 많이 걸으려고 하고 지하철 타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고 일주일에 2,3번은 스포츠클럽에서 러닝머신을 40분 정도 하는 것 같아요. 한 달에 1,2번은 골프를 치고요. 정기적인 운동을 조금씩 하는 거죠.
▶ 학교는 정년퇴직 하셨겠군요?
학교는 명예교수로 있는데 명예교수는 일주일에 6시간을 학교에서 강의할 권리가 있습니다. 월급은 받지 않고 강의를 하면 강사료를 다른 강사보다 2,3배를 더 줘요. 현재 건국대학교 사범대학 명예교수로 있습니다.
▶ 청소년 미래재단 일도 하시죠?
학교 정년퇴임을 하면서 퇴임식상에서 선언을 했어요. 중고등학교, 특별히 고등학교 학생들 중에 경제적으로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주고 교육훈련을 시켜서 사회의 지도자를 만들겠다고요. 그런 목적으로 만든 것인데, 제가 외부에 강의를 하면 강사료, 책을 쓰면 인세(印稅) 등을 모아서 4억2천만 원을 냈습니다. 그렇게 해서 재단을 만든 거예요.
같이 뜻을 동참하여 한 달에 1만원, 10만원, 20만원, 30만원씩 낸 사람들이 600여 명이 됩니다. 지금 기금이 11억5천만 원이 되고, 세워진 이후에 매년 1억5천만 원 정도를 쓰고 있습니다. 그걸로 장학금 주고 학생들 교육 훈련시키는 여러 사업을 합니다.
▶ 지금 몇 년이나 되셨나요?
세워진 지 4년이 넘었어요.
▶ 그 동안에 많은 학생들이 장학금을 받았겠어요?
70-80명 정도 혜택을 받았죠. 졸업생들도 두어 번 나오고요.
제가 고등학교 시절에 그렇게 고생하고 어려웠기 때문에 그때 일을 생각해서, 물론 그 시절과는 다르겠지만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가 55-56년 전이었는데 시대가 달라졌어도 어려운 학생들이 많아요. 대부분 가정결손으로 인해서 어려운 사람이 많고 그렇지 않더라도 사업에 실패한다거나 여러 면에서 어려운 학생들이 많이 있습니다.
◇ 지긋했던 가난의 기억, 주식은 소나무 껍질과 칡뿌리
▶ 어려운 성장과정을 겪으셨기 때문에 어려운 학생들을 더 생각하시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고향이 어디세요?
전라북도 임실입니다. 거기서도 깊은 산골이에요.
▶ 지금도 고향에 가끔 가시나요?
아직 그곳에 누님 가족이 살고 선친의 묘도 있고 형님과 형수님의 묘도 있고 해서 1년에 한두 번은 갑니다.
고향에 가면 어머님 품속에 간 것처럼 마음이 포근해지고 너무 좋아요. 풀 한 포기, 나무 한 그루, 돌 하나가 모두 다 60년 전 제가 자랄 때 만져보고 함께 했던 동네이기 때문에 좋습니다.
▶ 그때의 가난이 지긋지긋하게 기억되지 않으세요?
왜 기억이 안 나겠어요. 하지만 지긋지긋한 가난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그 시절에 모두 겪었고, 그런 것이 거울이 되어 마음속에 자리를 잡아서 힘이 되고 용기가 되고 소망이 생기고 그렇죠. 그 일로 인해서 일을 할 수 있는 일감들이 많아요.
말하자면 희망이 없고 용기가 없고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들한테, 용기와 희망과 꿈을 갖고 살게 하는 좋은 원동력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 어린 시절에 농사지을 땅이 없었어요?
다 없는 게 아니고 우리 집이 없었죠.(웃음) 농촌에 있는 땅을 누가 가져가나요, 그대로 있죠. 옛날이나 지금이나 농토가 늘었으면 늘었지 줄지는 않아요. 농촌에 공장이 생기는 것도 아니고. 본래 어렸을 때 집안 어른들께 교육을 받으면 우리가 양반의 집이라고 문화 류씨라고 합니다. 더구나 충경공파라고 해서 양반 중의 양반이라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실 때도 항상 뼈있는 자손이다, 가난하고 무식하지만 뼈있는 자손이 그렇게 하면 안 된다, 정직하고 성실하고 부지런히 일해야 한다는 것을 심어주셨어요.
그래서 선조들의 뿌리를 조사해봤더니 3대조 할아버지 때 마음이 너무 착해서 보증을 섰어요. 그런데 보증을 선 사람이 사업을 함부로 해서, 우리 할아버지 재산이 싹 날아가 버렸어요. 그러니 양반이 집안에 앉아 있어야지 얻어먹을 수도 없고 품팔이를 할 수도 없으니까 다른 동네로 가서 아버지가 머슴살이를 하게 되었지요. 요즘도 보면 보증서서 몽땅 망해서 미국으로 이민 간 사람들도 있잖아요. 그런데 그게 8,90년 전 이야기거든요. 집이 몰락을 한 후, 아무리 뼈있고 양반이라 한들 밥은 먹어야죠. 현실적으로 그래서 어려움을 당하게 된 거예요.
▶ 정말 도토리, 칡뿌리를 잡수셨어요?
우리만 그런 게 아니고 1940년대 이야기인데, 45년 전후로 제가 기억이 많아요. 정확하게 말하자면 두 달 동안, 쌀이나 보리나 수수 등의 곡식을 한 톨도 입에 넣지 못한 적이 있어요. 그래서 산에 가서 소나무 겉껍질을 벗기면 흰 껍질이 있어요. 송피라고 하는데 그걸 벗겨다가 삶아서 넓은 대야에, 그 시절은 플라스틱이 아니니까 옹기로 된 대야에 물을 잔뜩 넣고 삶으면 밤색 붉은 물이 우러나요. 그게 독한 거라서 따라버리고 돌로 된 넓적한 절구 같은 데에 주먹 2개 정도 크기 만한 돌로 짓이겨서 갈아요.
도토리가루, 수수가루 등을 섞어서 납작하니 호떡같이 만들어서 그걸 먹으면 곡식이 안 들어가고 소나무 껍질만 씹혀서 섬유질만 있잖아요. 그걸 삼키고 도토리 따다 먹고 칡뿌리 캐 먹고 소나무 잎사귀 먹고 쑥 캐서 먹고 그랬어요.
1945년엔 얼마나 어려웠냐 하면 우리 동네가 쑥이 많은 곳이에요. 어딜 가나 쑥이 천지죠. 그런데 하도 사람들이 뜯어먹어서 쑥이 없어요. 저는 쑥을 캐다가 집 근처에 심고 물을 줬어요. 쑥이 자라면 쑥을 캐는 것이 아니라 낫으로 베어서 삶아서 먹는 거예요.
그리고 고구마가 날 때는 잎사귀 두 개 붙은 만큼 잘라요. 아무데나 묻어서 쇠똥이나 개똥 같은 것을 주면 고구마가 열려요. 특별히 우리 집은 고구마가 있는 거예요. 아침도 고구마, 점심도 고구마, 저녁도 고구마, 오늘도 고구마, 내일도 고구마, 고구마만 먹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고구마 못 먹어요. 우리 애들이 고구마 먹자고 하면 너나 먹으라고 해요.(웃음)
◇ 중고등학교는 꿈같은 곳, 지게 지고 산으로 들로
▶ 그렇게 어려우신데 학교는 어떻게 다니셨어요?
중,고등학교는 꿈같은 부잣집 애나 가는 곳이고 가봐야 국민학교인데, 요즘 말로 초등학교죠. 그 초등학교 마저 못 다녔어요. 제 위로 누님이 두 분, 형님이 두 분이 있는데 한 사람도 입학한 일이 없어요.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나이가 되었는데도 못 가고 1년 놀다가 아버지가 큰맘 먹고 학교에 입학을 시켜준 것이, 우리 가까운 집안에서 1호에요. 그렇게 가난했어요.
8남매 중에 제가 다섯 번째예요. 밑에 여동생 하나, 남동생 둘이 있어요. 제 밑의 동생들은 해방 이후에 의무교육이 되었으니까 다 다녔죠.
▶ 초등학교를 몇 살 때 졸업하셨어요?
제가 호적나이와 실제나이 두 가지가 있는데 옛날 촌사람들은 호적나이보다 실제 나이가 높아요. 제 경우는 1년 반이 틀려요. 왜 그럴까 조사를 했는데, 왜냐하면 옛날에 면사무소에 등록을 하잖아요. 아기를 낳으면 출생신고를 안 했대요. 출생신고 하고 나면 두세 달 후에 아기들이 죽어요. 그러면 출생신고 했다가 서너 달 후에 사망신고 하러 가야 해요.
번거롭고 불편하니까 사는지 죽는지 두고 봤다가, 1,2년 후에 쫄랑쫄랑 기어 다니면 그때 신고하러 가는 거예요. 그래서 면사무소에 가서 우리 아들 등적하러 왔다고 하면 이름이 뭐냐, 언제 낳았느냐 물으면 작년쯤에 낳았다고 하거든요. 그러면 면 서기가 과태료를 내야 한다고 해요. “예끼! 이 사람아, 자식을 낳아서 이름을 올리러 왔는데 무슨 죄를 지었다고 벌금이야?” 그러면 벌금 안 내게 해 준다고 하면서 신고하는 날을 생일날로 해버려요. 그러면 과태료를 안내거든요. 그래서 촌사람들 나이가 다 틀린 거예요.
제가 1년 반이 늦는데 덕을 본 것이, 학교 정년퇴임을 늦게 했어요. (웃음)
▶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진학을 바로 못하셨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는 당연히 못 가죠. 촌에서 지게 지고 산으로 들로 일하러 가고 남의 집 마당, 남의 집 밭, 남의 집 논, 남의 집 돼지 먹이는 생활을 몇 년 했어요.
▶ 그러다가 어떻게 서울로 올라오셨어요?
초등학교 5학년 때 어머니 손에 잡혀서 교회를 나가기 시작했어요. 시골의 개척교회는 초가집 벽을 털고 볏짚으로 만든 쌀 가마니를 땅바닥에 깔고 예배를 드리는 교회에요. 어른들이 한 20명, 아이들이 20명 정도 되는 교회를 나갔는데 전도사님이 정말로 바른 신앙의 씨를 떨어뜨렸어요.
그래서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다, 확실하게 믿게 만들고 그 하나님이 우리가 아닌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믿게 하고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커뮤니케이션을 할 수 있다는 것, 세 가지를 저에게 주셨어요.
그래서 어머니가 나를 위해서 기도를 많이 하고 새벽기도를 하루도 안 빠지고 다니셨어요. 나도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같이 기도를 하러 다녔어요. 나중에 나 혼자라도, 단순 반복되는 생활을 하니까 어린 시절에 몇 십 년을 단 하루도 빠진 일이 없었어요.
그런데 그 신앙이 사람에게 용기와 희망과 소망을 주는 겁니다. 현실은 어렵더라도 미래에 대한 꿈과 희망이 넘쳐나요.
◇ 18살에 입학한 중학교, 가난한 농촌을 위해 일하리라!
▶ 초등학교를 졸업하시고 몇 년 있다가 중학교를 가신 거예요?
초등학교 졸업할 때 6년 개근상을 탔어요. 한 번도 결석한 일이 없거든요. 그리고 우등상도 타고 반장도 3번인가 했어요. 그런데 반장도 못 하고 우등상도 못 타고 개근상도 못 탄 사람이, 중학교에 올라가서 중학교 모자를 쓰고 방학 때마다 고개 너머로 고향으로 다니러 오는 모습을 볼 때, 눈물을 얼마나 흘렸는지 몰라요.
나는 왜 중학교를 못 가나, 왜 지게 지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 남의 집에 가서 일하고 이렇게 지내는가? 새벽에 하나님께 서원을 올렸어요. 내 일생을 통해서 공부를 끝까지 하겠습니다. 끝까지 한 뒤에 거기서 배움을 얻고 힘을 얻어서, 나라를 위해서 가난한 농촌을 위해서 일하겠다고 했어요.
매일 공부하기를 원했지만 공부할 여건이 안됐죠. 그런데 하루는 응답을 받았는데, 현실의 상황과 여건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었어요. 집 모퉁이에 토끼를 몇 마리 키웠어요. 촌에서는 애들이 다 토끼를 키웠어요. 하루는 장날에 토끼 몇 마리를 망태기에 넣어가지고 팔아서 중학교 강의록이라는 책을 샀어요. 중학교 못 간 사람이 집에서 공부하는 책이에요.
그걸 가지고 3년 동안 죽어라 하고 공부했어요. 또 초등학교에서는 중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불러서 담임선생이 공부를 가르쳤어요. 거기에 다니기도 했어요.
그렇게 공부를 했는데 18살 되던 해에 읍내에 중학교가 생겼고, 어머니가 읍내에서 하는 교회 연합집회에 갔어요. 읍내의 제일 잘 사는 장로님 댁에서, 그날 온 집사님들을 위해서 국수를 삶아줬어요. 가서 보니까 큰 부자거든요. 사모님한테 이야기를 한 모양이에요. 우리 아들 태영이가 있는데 열심히 공부만 하고 어쩌고 하시면서 하소연을 하셨나 봐요. 그래서 집회에 다녀오시더니 내일 한 번 그 장로님 댁에 가보라고 하셔서 갔더니, 이것저것 테스트를 한 끝에 그 집에 있는 10살과 8살짜리 아이들을 가르쳐주고 놀아주는 조건으로 그 집에서 밥 먹고 중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그래서 18살에 중학교를 가게 되었어요. 말하자면 입주가정교사를 한 거죠.
그리고 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고등학교가 없어서, 어머니에게 차비를 해달라고 해서 6.25 직후 서울로 올라왔어요. 오라는 데도 없고 갈 데도 없고 아는 사람도 없는데 무작정 올라온 거예요. 여름에 길거리에서도 자고 기차역에서도 잤어요.
그러면서 길가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당시 대방 전철역 앞에 미군부대가 있었는데 그곳에 고향 사람이 통역으로 있었어요. 그 사람한테 가서 인사하고 이야기를 했더니 미군 부대 안에서 구두닦이를 할 수 있도록 해주었는데 부대 안 천막 안에서 잘 수 있게 된 거예요.
그때가 고등학교 입학시험과 등록이 끝나고 개학한 지 한달 뒤였어요. 내가 서울에 구두닦이를 하러 온 것이 아니라 공부를 하러 왔기 때문에 학교를 가야겠어요. 낮에는 구두닦이를 하니까 야간학교, 마침 아는 사람이 옆에서 보니까 야간학교를 간다고 해서 따라갔어요.
따라갔더니 노량진 산꼭대기에 동양공업고등학교를 가더라고요. 그 친구는 공부하러 들어가고 저는 교장선생님 방으로 찾아갔어요. 할아버지 교장선생님이셨는데 무릎 꿇고 울면서 하소연을 했어요. 내가 서울에 구두를 닦으러 온 것이 아니라 독학을 하다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가 없어서 서울에 왔는데, 미군 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하니까 천막에서 자기는 하는데 입학금도 없고 등록금도 없고 입학 시기도 다 지나가버렸지만 입학만 시켜주시면 진도도 잘 따라가고 월사금도 잘 내겠다고 했어요.
교장선생님께서 특별히 허락을 해 주셨어요. 요즘은 말도 안 되죠. 누가 한 달이나 지나서 입학을 허락해 주겠어요? 그래도 어쨌든 그래서 학교를 들어갔어요.
◇ 영양실조에 안 해 본일 없어 “그래도 감사해”
▶ 입학 이후로 월사금은 어떻게 내셨어요?
구두닦이 해서 한 달에 한 번씩 냈어요. 그거 갖다 내니까 굶어야죠. 많이 굶어서 빈혈증이 걸려서 학교 가다가 여러 번 쓰러졌어요. 어질어질해서 전봇대 붙들고 있다가 가기도 하고 잔디밭에 드러누우면 1천 미터, 2천 미터 가라앉을 것 같은 느낌은 영양실조 안 걸려본 사람은 몰라요. 아스팔트 길도 한 쪽으로 기울어진 것 같고, 그런 경험들을 숱하게 했어요.
▶ 구두닦이만 해서는 안 되니까, 다른 일도 하셨다고요?
안 해본 일이 없어요. 쓰레기 주워다 팔기도 하고, 못이나 쇳조각 모아다 팔기도 하고, 방학 동안에는 행상을 하고, 안 해본 일이 없죠. 집에는 제가 대학을 입학하기 전에는 안 간다는 결심을 했어요. 대학을 입학한 뒤 처음으로 고향을 방문했어요. 대학도 야간대학을 갔지요. 대학을 가려면 저축을 해야 하니까 저축할 수 있는 돈은 먹는 것밖에 없었어요. 밥 주워 먹어봤어요? 저는 너무 배고파서 쓰레기통에서 밥도 주워 먹어봤어요. 연탄재나 모래 묻은 거 털어내고 먹기도 하고, 빵 내버린 거 덜 썩은 부분 골라내서 먹기도 하고.러닝셔츠와 팬티는 갈아입을 옷이 없으니까, 한번 입으면 방학 될 때까지 입었어요.
하얀 옷을 갈아입고 회색이 될 때까지 입는 거죠. 6개월간 입으니까 흰 와이셔츠가 회색이 돼요. 그러면 이른 여름에 한강에 가요. 그때는 비누에 겨가 들어 있고 한강 물이 단물이어서 빨래가 잘 돼요. 그래서 러닝을 빨면 처음에는 검정물이 나와요. 흰물이 나올 때까지 빨아서 걸어요. 또 물속 가슴쯤까지 들어가서 팬티를 벗어서 빨아요. 널러 나갈 수가 없잖아요. 누구 보고 널어달라고 할 수도 없고.
한강 백사장이 흑석동 앞인데 그냥 가지고 철교 있는 쪽으로 가요. 그쪽은 사람이 없으니까 교각에 뾰족하게 나와 있는 곳에 널어놓고 물 속에서 안 나와요. 한 두 시간쯤 있다가 나와서 만져보면 아직도 축축해요. 나중에는 물속에 있는 게 너무 피곤해서 축축해도 그냥 입어버려요. 체온으로 말렸죠.(웃음)
▶ 대학 이후에는 어떻게 생활하셨어요?
구두닦이, 신문배달, 행상을 하다가 대학교 때까지 신문배달을 했어요. 그 다음에 고향 사람을 만나서 공장청소부로 들어갔어요. 야간 대학교니까 오후 4시까지 청소부로 쓸고, 이것도 겨우 연명하죠. 그런데 나중에 공장이 부도가 나서 문을 닫았어요. 공장지기 하는 곳에서 여름 몇 달을 지냈는데, 오도 가도 못하고 월급도 없고 어떻게 하질 못했죠.
▶ 그런 와중에도 어려운 사람들을 도와주셨다면서요?
저는 하나님께서 저를 트레이닝을 시키신 거라고 생각해요. 왜냐하면 그렇게 고생하던 시절에, 옛날에 일기를 하루도 안 빼먹고 썼는데, 그때 일기를 보면 ‘감사하다’는 말이 가득 찼어요. 요즘 읽어도 내가 은혜를 받아요. 그 시절이 뭐가 감사하겠어요?
그런데도 기뻐서 감사하고 굶어 쓰러지면서도 감사해. 왜 그랬냐 하면 어렸을 때 받은 신앙 3가지,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지금 내 앞에 계신다는 걸 확실히 믿었어요.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 그것을 서울에 와서 생각할 때 전능하신 하나님이 살아계시고 나를 이처럼 사랑하시는데 내가 왜 굶고 빈혈이 걸리고 길가에서 자고 이러는가?
일기장을 보니까 하나님께서 나를 쓰시려고 그런다. 호미나 괭이를 만드시려고 녹슬고 쓸데없는 쇳조각 같은 나를 훈련을 시키시니 얼마나 감사해요.
◇ ‘우리 농촌을 위하여’ 덴마크 국왕에게 보낸 편지
▶ 덴마크로 가실 생각은 어떻게 하신 거예요?
고1때 미군부대에서 구두닦이를 했는데 미군부대에 왔다 갔다 하는 사람들을 보니까 유학을 간다고 하더라고요. 그런데 유학이라는 단어를 일생에서 처음 들었어요. 시골에 있을 때는 유학을 간 사람도 없고 갈 사람도 없고 갔다 온 사람도 없었어요. 유학이라는 말을 들어본 일이 없어요. 유학이 뭐냐고 했더니 영국이나 미국 같은 선진국의 훌륭한 대학에 가서 세계적인 교수한테 공부하는 것이 유학이래요. 공부를 끝까지 하겠다고 하나님께 서원했으니 나도 간다 생각했죠.
그 다음날 새벽에 대방동 해군본부가 있는 건너편에 대방교회라고 있어요. 그 교회가 완성되기 전인데 지하실에 가서 하나님께서 ‘예스’ 라고 한 마디만 주시면 저 유학 갑니다. 그리고 꽉 믿었어요. 13년 되던 해에 기도하던 중에 응답을 받았어요.
유학을 간다고 하면 막연히 가요. 미국의 하버드, 예일, 아무데나. 유학을 가면 ‘어디로 갈 거냐?’는 질문 이전에 ‘가서 무엇을 배울래?’ 하시더라고요. 가난한 농촌이 잘 사는 복지국가가 되는 것을 배워서 우리나라의 가난을 살려보겠다고 했어요.
그러면 어느 나라냐? 50년대 유학 하면 전부 미국이에요. 그런데 책을 보면 미국농장이 얼마나 큰지 5천만 평, 100만 평, 거기서 배워서 뭘 써먹을 거예요? 돈 주면서 공부하라고 해도 미국은 아니다 싶었어요. 왜냐하면 우리나라 가난한 농촌에 써 먹을 게 없어요.
그래서 책을 보고 공부하다 보니까 네덜란드나 덴마크 이런 나라가 있더라고요. 유달영 박사가 쓰신 「새 역사를 위하여」라는 책을 52년에 입수해서 몇 번을 읽었어요. 덴마크의 가난한 농촌이 세계적인 복지국가가 되는 과정과 그 이야기를 쓴 책이에요. 나는 공부한다면 덴마크로 간다. 책을 보고 결심하고 나간 거예요.
그 후에 신학대학교에 학사편입을 해서 2년간 성경공부를 했어요. 그리고 나서 경기도 용인에 대안학교를 세워서 교장을 하고 있었어요. 보금농림고등학교라고 대안학교인데 정식고등학교는 아니고, 중학교 졸업한 아이들이 먹고 자고 함께 일하면서 공부하는 학교였어요.
그때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은 것인 때가 되었으니 농촌에 대한 논문을 써라. 논문을 써야 사상과 비전이 나오거든요. 그 다음에 자기소개서를 썼는데 2달 걸렸어요. 영어로 다시 번역했는데 아무도 지도해주는 사람도 없고 밀어준 사람도 없어요. 워낙 거지로 사니까 거들떠보는 사람도 없어요. 영어도 지금 보니까 관계대명사, 전치사 잘못 써서 어수룩해요. 돈 벌기 바빴지 공부를 했어야 말이죠.(웃음)
어떻게 하오리까 새벽에 기도를 드렸죠. 교수도 모르고 목사도 모르고 아무도 모르는데, 그럴 바에는 그 나라의 가장 높은 사람한테 보내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그렇지! 내가 아무도 모를 바에는 높은 사람한테 보내야지. 도서관에 가서 대백과사전을 들쳐보니까 프레드릭 9세가 임금님이라고 써있더라고요. 그래서 서두에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 이렇게 썼지요.
봉투를 만들어서 다 넣고 주소를 쓰는데 왼쪽 위에다 보내는 사람을 나로 쓰고, 받는 사람 쓸 때는 가운데 “To. 프레드릭 9세 임금님 귀하” 이렇게 썼는데 주소를 알 수가 있어야지요. 그때는 컴퓨터나 이메일도 없고 대사관도 없던 시절이라 결국 못 부쳤어요.
그 이튿날 기도를 드렸어요. 제일 높은 사람한테 보내려고 이름을 알았는데 백과사전을 아무리 봐도 주소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대답 주시기를 ‘걱정 말아라, 그 나라 편지배달부가 임금님이 어디 사는지 모르겠냐?’ 그렇지! 임금님은 그 나라 서울인 코펜하겐에 살겠지, 그래서 코펜하겐 덴마크라고 썼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 말로 하면 ‘김서방, 서울, 대한민국’ 인데 편지가 들어가겠어요? 어림도 없죠. 주소를 제대로 썼다 하더라도 국가 원수에게 보내는 편지가 대사관이나 특수기관을 통해서 보내야지, 시답지 못한 놈이 쓴 게 가겠어요? 그런데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니까 간 거예요.
20여 일 지나니까 편지가 회답이 왔는데 왕궁 사무실에서 왔어요. 임금님 보좌관 아무개 해서 사인을 했는데 편지도 A4용지 절반만한 거예요. 영어로 세줄 반. 간단하게 썼어요.
“임금님께서 당신의 편지를 읽으시고 감동이 되어, 당신의 뜻을 이루도록 하기 위하여 행정부에 넘겼습니다.”
가만 보니까 중간보고예요. 임금님이 부전지를 써서 외무부장관에게, 국제장학금 관련한 사람한테 보냈나 봐요. 얼마 있으니까 외무성차관보가 사인을 해서 A4용지에 가득 쓴 편지가 왔어요.
“당신이 원하는 기간, 원하는 장소에서, 원하는 분야를 공부할 수 있도록, 우리 정부가 책임을 지기로 했습니다.”
내가 뭐라고 쓰겠어요? 10년 한다고 쓰겠어요? 5년이나 한 달을 한다고 쓰겠어요? 원하는 장소를 서울대학교나 고려대학교에서 한다고 하겠어요? 경제학과를 한다, 미술을 한다, 뭐라고 쓰겠어요? 그 나라 대학 이름을 하나도 몰라요. 아무것도 모르는데 뭐라고 쓰겠어요?
그래서 회답을 뭐라고 썼냐 하면 “먼저 덴마크 말을 속성으로 공부할 수 있는 과정에 나를 넣어주면 말을 배우는 과정에 정보를 수집해서 갈 곳과 공부할 것을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왕복비행기표에다 초청장과 일본에서 하룻밤을 자야 하는데 호텔 값까지 전부 대 줘서 덴마크에 갔어요.
◇ 3개월 만에 덴마크 말 배워, 비결은 ‘소리 흉내’
▶ 덴마크 말은 어떻게 배우셨어요?
덴마크 공항에 내리니까 사람들이 덴마크 말을 하는데, 얼마나 웃었는지 몰라요. 저런 것도 말이라고 하는가? 새떼들이 지저귀는 것 같았어요.(웃음)
외무성에서 귀빈실 의전 대사가 나와서 나를 데려다가 학교에 인계해 주었는데, 기숙사에서 짐을 정리하고 자다가 생각하니까 웃을 일이 아니에요. 겁이 나더라고요. 저놈의 새소리 같은 소리를 언제 배워서 대학에서 공부하냐? 대학은 그 나라 말로 가르칠 테니까.
짐을 다 정리하고 하나님께 기도 드리기를 더 이상은 염치가 없어서 뭘 더 해달라는 말을 못하고 속이 터져서 “하나님! 하나님!”소리만 했어요. 이렇게까지 해줬는데 뭘 더 달라고 하겠어요? 그렇게 기도하는데 창세기에 바벨탑이 무너지는 모습이 머릿속에서 그려지더라고요. 거기서 하나님께서 말을 만드셨다고, 그 말이 떠오르면서 저절로 내 입에서 ‘말을 만드신 말의 주인이신 하나님이시여, 내 입의 굳은 혀를 풀어주시고 머리를 명석하게 하셔서 말 배우는 지혜를 주세요’ 라고 기도해서 받은 지혜가 참 놀라운 겁니다.
간절히 기도하면 응답을 주시는데 “너, 한국말을 어떻게 배웠냐?” 어떻게 배웠어요? 아빠, 엄마, 까까 하면서 배웠어요. 맞다! 막 태어난 아이가 뭘 아냐? 엄마 말소리 흉내 내다가 배운 거예요. 그런데도 정확하게 한국말을 잘 알아요. 문법을 알아요, 뭘 알아요? 그런데 다 한다고요.
그래서 나라 사람들이 하는 소리를 흉내를 냈어요. 그러면 얼마만큼 흉내를 내야 하는가?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 얼마나 될 것 같은가? 기도하다가 노트를 꺼내서 “I am a boy, You are a girl..." 이렇게 영어로 쓰기 시작했어요. 90문장 쓰니까 더 못쓰겠어요. 한 200~300말 되겠네요 했죠. 네가 머리가 모자란다고 하면 하루에 새벽부터 밤까지 몇 마디를 외우겠냐? “I am a boy”를 몇 번을 외우고 쓰면 될까? 10문장을 생각했어요. 새벽부터 밤까지 죽어라 하고 외우면 10문장은 외우겠다고요.
그러고 나니까 이 나라 말은 한 달이면 마스터하겠어요. 맞잖아요. 한 달이면 300문장. 그만큼만 외우면 되니까요. 그 다음에 돌아온 말이 어떻게 10말을 다 외우겠냐? 10말을 외우면 7말을 잊어버린 걸로 생각해라. 그래서 3달로 늘렸어요. 죽어라 하고 외우면 900말을 외우거든요. 700말은 잊어버려도 200말은 남잖아요. 3개월 만에 덴마크 말을 마스터했어요.
나중에 이스라엘에 유학을 가서도 하루에 10말씩 외웠어요. 3개월에 끝내버리고 3개월 전문용어 외워서 6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봐서 들어갔어요.
▶ 지금도 덴마크 말은 다 하실 줄 아세요?
그때는 덴마크 말로 강연도 많이 했어요. 그런데 지금 40년이 흐르다 보니까 보통 말은 하는데 강연은 못할 것 같아요. 그 나라 가면 한 달이면 회복을 하지요. 말이라는 것은 쓰지 않으면 잊어버리거든요.
▶ 그래서 덴마크에서 몇 년을 계신 거예요?
2년을 했어요. 나는 학문을 하러 간 게 아니고 가난한 나라가 어떻게 부자가 되는지 공부하러 갔는데 2년이면 충분했어요. 그리고는 끝나고 돌아오는 거죠. 한국에 와서 농촌운동을 하려고요.
▶ 덴마크에서 꽤나 유명하셨겠어요?
신문, 일간지, 월간지, 주간지 인터뷰 기사가 났어요. 한국에서는 신문배달은 해봤어도 인터뷰 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죠. 그래서 음식점에 가면 밥값을 안 받아요. 그저께 당신 기사를 봤는데 우리 임금님이 당신을 초대해서 왔다고 왔다, 밥 먹으러 우리 식당에 온 게 영광이라 이거에요.
주말이면 학교 끝나고 산책하러 다니면 동네 아주머니들이 창문을 열고 ‘류태영 씨! 우리 집에 와서 차 한 잔 해요’ 했어요. 그러면 차 마시러 가서 저녁 먹고 가라고 하면 저녁 먹고 가고 동네 아저씨들이 다 내 친척이었어요. 국왕도 한 번 만났어요.
▶ 국왕은 어떻게 만나셨어요?
외무성에 가서 인사했지요. 인사만 잠깐 했어요.
◇ 덴마크에서 사막의 개척자 이스라엘로
▶ 2년 만에 돌아오신 거예요?
덴마크가 너무 잘 살아요. 그 나라에서 무엇을 배웠냐 하면 그때 당시의 시간으로 하면 120년 전에, 아주 가난하고 못 살았어요. 그것을 국민운동을 통해서 그룬트비라는 목사님이 정신운동을 통해서 국민들을 깨우치고 오늘날 세계 1등 복지국가가 된 거예요.
덴마크 같은 복지국가가 이 지구상에 없습니다. 우선 학교는 유치원부터 중고등학교와 대학교에 이르기까지 일체 등록금이나 입학금이나 수업료 등이 없어요. 전문대학도 기술대학도 돈을 안 내요. 배우는 사람한테 돈 받는 것은 미개한 민족이나 하는 거라는 거죠.
전국에 있는 병원이 모두 국립병원으로 시골에 있는 병원도 전부 첨단의료기기가 장치되어 있고 전부 무료에요. 의료보험? 없어요. 수익자 부담? 없어요. 전액무료에요.
집이 없는 사람한테는 집을 줘요. 지상낙원이에요. 직업이 없는 사람은 실업수당으로 월급을 줘요. 그런데 우리 생각에는 그러면 매일 놀지 않겠느냐고 하는데 노는 사람은 하나도 없어요.
한번 놀아보라고 해요. 일이 너무 바빴을 때 놀고 싶은 생각이 들지 놀아보면 하루 먹고 하루 쉬고 심심해서 일주일은 몰라도 몸이 근질거려서 못 견디는 거예요. 전부 일하고 있어요.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이 유학을 가면 그것도 무료에요. 학교나 병원에 돈 받는 창구가 아예 없어요. 외국사람이 가면 랭귀지 과정을 들어가야 하는데 그것도 무료에요. 우리나라 사람이 몰라서 못 가는 거예요.
우리 학생들 유학시키려고 랭귀지과정을 봤더니 아프리카, 인도네시아, 중국, 이런 데서 온 학생들로 바글바글하더라고요. 말만 배우면 대학은 등록금이 없으니까. 그리고 공부를 조금만 잘 해도 장학금을 줘요. 농촌에 가면 자가용 없는 집이 하나도 없어요. 2,3대는 갖고 있어요. 그런데 그 현실 조건을 배워다가 써 먹을 수가 있어야죠.
그 시절에 들어가서 공부를 했는데 건축으로 말하자면 완성된 건물만 자꾸 보고 설계도만 봤단 말이죠. 땅 파고 바짝 일하는 것을 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던 차에 이스라엘에 육일전쟁이 나서 신문과 TV에 기사가 매일 나는 거예요. 한 손에 총을 들고 한 손에 괭이 들고 사막을 개척하면서 일을 한다고요. 거기로 유학 간다 결정했죠.
또 하나님한테 빽을 썼어요. 한 번만 더 ‘예스’ 라고 해 주시면 이스라엘 갑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응답을 받아서 이스라엘 대통령한테 편지를 썼어요. 난 코펜하겐에 이스라엘 대사관이 있는 줄도 몰랐어요. 있는 줄 알았으면 그쪽을 통해서 했을 텐데 이스라엘로 바로 부쳤거든요.
그런데 대사관에서 오라고 해서 갔더니 총영사가 나를 만나더니 대통령 특령으로 당신을 모셔오라고 했대요. 왕복비행기표, 용돈, 생활비, 치료비까지 전부 우리 정부가 부담할 테니 와서 공부하고 가라는 거예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이스라엘로 갔어요.
그때는 학문을 하러 간 게 아니에요. 가서 농촌은 어떻게 지내는가, 6개월 동안 영어로 공부했어요. 정식대학이 아니고 저개발 국가 사람들을 불러다가 공부시키는 국제연수원이 있는데 거기서 현장도 가보고 실습도 하고 그러고 돌아왔죠.
돌아와서 건국대학교의 설립자를 만났는데 제 얘기에 감동을 해서 저를 특채로 뽑았어요. 그때 축산대학생들이 전부 장학생이었어요. 그 학생들의 정신교육을 시키는데 저를 책임자로 임명했어요.
그래서 건국대학교 축산대학의 생활관 관장을 맡아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그때 농촌운동을 다녔어요. 방과 후에는 농촌운동을 열심히 다녔죠.
◇ 결실을 맺은 새마을 운동, 핵심은 “정신개조”
▶ 새마을 운동은 어떻게 시작하게 되신 거예요?
KBS 방송국에서 방송하라고 해서 3년간 아침 농가 방송을 했어요. 그렇게 1년쯤 되었을 때 청와대에서 전화가 왔어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우리나라 농촌을 어떻게 하면 좋으냐고 묻더라고요. 새마을 운동이 일어나기 전이었어요.
그래서 덴마크 예를 들고 이스라엘 예를 들고, 우리나라 농촌에서 못 살던 경험과 머슴살이 하던 얘기 등 다 이야기를 했죠. 그랬더니 박정희 대통령이 내일부터 여기 와서 농촌운동을 하라고 하는 거예요. 아니, 학교에서도 농촌운동을 하는데 어떻게 내일부터 여기에 와서 하느냐고 했더니 학교 사표 내라고 하더라고요.
곤란하다고, 어떻게 오늘 밤 10시에 사표 내고 내일부터 오겠느냐고 그럴 수 없다고 했더니 알았다고 가라고 하대요. 없던 일로 하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집에 돌아오니 12시 반이 됐어요. 아침에 8시쯤 학교에 나갔더니 총장님과 이사장님이 학교에 나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거예요. 우리집에는 전화가 없던 시절이니까요.
갔더니 눈이 동그래져가지고 있어요. 나중에 이야기를 들으니 밤 12시가 넘어서 중앙정보부청와대 문교부에서 전화를 걸어서 ‘내일 아침 류태영 선생이 출근을 하면 아무런 불편한 마음이 들지 않도록 분위기를 조성해서 청와대로 보내라’고 했대요.
그래서 총장님이 그러더라고요. 사무인계고 과목이고 강의고 아무 걱정 말고 지금 얼른 들어가라고요. 대통령께 말씀 드리라고, ‘건대 총장님께서 우리학교의 영광입니다. 그러면서 보내더라’고 말을 전해 달래요.
가서 보니까 앉을 자리가 없어요. 무슨 계획이 있던 게 아니에요. 나한테 어제 저녁 늦게까지 듣다가 결심한 거죠. 그래서 내가 들어가서 방을 만들게 된 거예요. 급작스럽게 사무실이 나오나요? 일할 사람이 있나요? 일 할 사람을 스카우트하는 거예요. 그때 정종택 장관님이 당시 홍성철 수석 밑에 있었는데 정장관과 함께 다니면서, 사람도 구해서 들여오고 해서 시작된 게 새마을 운동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사람들 불러다 놓는데 다 나만 쳐다봐요. 어떻게 하느냐고요.
그래서 덴마크에서 배운 것을 100% 써 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100% 써먹었다는 것이 ‘정신개조’에요. 온 국민이 정신을 의식개조를 하고 정신개조를 해서, 결국 생활개선도 하고 경제발전도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는 거였어요.
▶ 박사님과 인터뷰를 하다 보니까 1시간으로는 도저히 안될 거 같아요.
새마을 운동 시작한 이야기까지만 오늘 듣고요, 내일 선생님의 이야기를 이어서 들을 수 있을까요?
네. 그러죠.
(꿈을 잃지 않기에 언제나 청년인 류태영 박사님 이야기, 내일 이 시간 계속됩니다.)
2부
◇ 덴마크 부흥사를 새마을 운동에 담아
▶ 이틀 동안 귀한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청와대에서 연락을 받고 들어간 후,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셨는데요, 몇 년을 일하셨죠?
2년 있었어요.
맨 처음 들어가서 방을 만들고 사람을 스카우트하는데, 군수 중에 제일 똑똑한 군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그랬더니 지금 충청대학교 총장으로 있는 정종택(鄭宗澤)장관 얘기를 해요. 내무부에 고등고시를 수석으로 합격해서 전남 장흥에서 군수를 하는 사람이라고요. 실장님이 불러오라고 했는데, 그 시절에 어떻게 후임 군수를 임명했는지 사무인계까지 끝내버리고 사흘 후에 청와대에 왔어요.
그리고 농업협동조합중앙회에 전국을 다니면서 농촌을 지도하는 지도과장이 있는데 그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이틀 후에 왔고, 농촌진흥청에서 CD(Community-Development, 地域社會開發)요원이라고 지역사회개발요원이 있는데 그 사람은 일주일 후에 왔어요. 그 다음은 책상도 챙기고 비서도 두고 했는데 다들 어떻게 할지를 몰라서 나에게 다 묻는 거예요. 그래서 써먹은 것이 앞에서 말했던 덴마크의 부흥사(復興史)였어요.
덴마크는 지금으로부터 160여 년 전에 프러시아(지금의 독일)와의 전쟁에서 패하고 막대한 배상금을 물어주고 유럽대륙 북부의 곡창지대인 슐리스비히-홀슈타인(Schleswig-Holstein) 지역을 넘겨준 상태였어요. 국가 경제가 파탄에 이른 완전히 망한 상태였죠. 그때 덴마크 국민은 워낙 희망이 없으니까 좌절과 실의에 빠졌고 술을 먹고 길바닥에서 죽어나간 사람이 세계에서 제일 많았어요.
거기에 그룬트비(Nikolai Frederik Severin Grundtvig, 1783~1872)라는 목사님이 나와서 정신개조운동을 했지요.
저는 그것을 공부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해 쓴 것이 아닌가 할 정도였는데, 덴마크 국민의 입에는 불평과 불만이 가득 차있었어요. 앉아서 하는 소리가 이 사회가 썩을 대로 썩고 부패할 대로 부패해서 사람들이 입만 벌리면 ‘썩었다, 썩었다’ 정치인도 썩었고, 교사도 썩었고, 세무원도 썩었고, 다 썩었다는 겁니다.
그때 그룬트비 목사님이 하는 말이 ‘썩었다, 썩었다. 큰일 났다, 큰일 났다.’ 소리를 가만히 들어보면 그 말을 한 사람 중에 ‘자신이 푹 썩어서 이 나라가 이렇게 됐다’ 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는 거예요. 은연중 자기를 빼놓고 이야기하는 거죠.
그렇다면 썩었다는 소리가 많이 돌면 돌수록 자기는 계속 빼놓고 얘기 했으니까, 결국 썩은 놈은 하나도 없다는 얘기에요. 귀신이나 썩었지... (웃음)
‘내가 푹 썩었다는 소리는 괜찮지만 남이 썩었다는 소리는 하지 말고, 남이 거짓말했다 하지 말고 내가 거짓말했다고 말하자!’ 그래서 사회연대책임의식, 자기책임의식을 개발한 겁니다. 이 나라는 희망이 없다, 그러니 나부터 달라지는 운동을 한 거죠.
‘밖에서 잃은 것을 안에서 찾자!’는 구호도 만들었어요. ‘전쟁으로 물어준 막대한 배상금을 우리가 단결하여 회복하자!’ 또 하나는 ‘물질적인 손실을 정신적으로 회복하자!’는 거예요. 기독교 국가이기 때문에, 썩을 대로 썩어서 지옥문 앞까지 다다랐으니 지옥문에서 돌아서자는 거죠.
우리가 덴마크의 본을 받아 새마을 운동 때 ‘근면·자조·협동 정신으로 잘살아보자!’는 구호를 내놓은 것처럼 그룬트비 목사님은 '하나님을 사랑하자, 이웃을 사랑하자, 흙을 사랑하자'는 세 가지 슬로건을 내놓았어요.
‘하나님을 사랑하자’는 것은 신앙과 종교심을 가지고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뜻이고 ‘이웃을 사랑하자’는 것은 성경에도 나온 말이지만 다른 말로 하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해서 협동운동을 통해 나라가 일어나자는 뜻이에요. 그리고 ‘흙을 사랑하자’는 것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흙이 생명이기도 하지만 다른 말로 하면 농업을 일으켜서 나라를 살리자는 뜻이었죠.
이 세 가지 모토를 가지고 밀고 나가면서 개척에 이바지한 달가스(Enriko Mylius Dalgas, 1828~1894)라든지 교육에 이바지한 크리스티안 콜(Christen Mikkelsen Kold, 1816-1870) 같은 많은 동지들이 따르게 되었죠. 그러면서 덴마크가 이렇게 잘사는 나라가 되었다는 얘기입니다. 그 과정을 자세히 공부했기 때문에 그때 썼던 교재, 조직, 교육훈련... 이런 것을 100% 써먹은 것이 새마을 운동입니다.
▶ 덴마크에서 공부할 때 농촌도 많이 방문하셨을 텐데, 어릴 적 우리 옛 농촌과 비교가 많이 됐겠어요?
앞에서 말했듯이 당시 사는 것은 세계적인 수준인데, 15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어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 왔을 때 설득력이 있었던 거예요. 지금 현재 우리나라보다 더 못살았던 나라가 우리보다 천 배나 더 잘살고 있으니, ‘우리도 잘살 수 있다, 우리도 할 수 있다’ 이것이 적용된 거죠.
◇ 유 박사의 '진짜 박사' 도전기
▶ 덴마크 부흥기의 의식개혁운동을 벤치마킹(Benchmarking)해서 새마을운동을 만드셨는데 2년 동안 열심히 하시면서 제일 보람됐던 일은 어떤 것이었나요?
대통령과 독대(獨對)해서 얘기하는 시간이 많았는데 저녁 내내 이야기했던 내용을 이튿날 대통령이 국무회의에서나 방송에서 이야기하는데 제가 했던 말이 그대로 나가는 거예요. 그런 일이 가장 보람 있었죠. 물론 제 이름이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국정을 이끌고 나가는 국가 최고의 대통령이 내가 말한 그대로 이야기하니까요.
▶ 2년 후에 우리가 바뀌기 시작하는 것이 보이셨나요?
많이 보였죠. 한참 그 운동이 일어나는데 왜 떠났느냐고 하는데 유신과 동시에 저는 떠났어요. 그전에 하나의 에피소드가 있었는데 가끔 관련 장관들 서너 명이 와서 대통령께 보고를 하면 제가 배석을 했어요. 대통령이 맨 앞에 앉고, 장관들 앉고, 그 뒤에 비서관들 앉고, 맨 뒤에 제가 앉아서 슬라이드를 보는데 대통령이 한참 듣다가 ‘유 박사!’ 부르니까 지금은 돌아가신 유혁인 정무 제1수석 비서관이 ‘네’ 하면서 갔어요.
그런데 대통령이 ‘당신 말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저밖에 없거든요. 그래서 저에게 물어보시는 것을 조목조목 대답했더니, 그 다음부터 소문이 나서 모두들 나를 부를 때는 대통령 목소리를 흉내 내서 ‘유 박사’ 그랬어요. (웃음)
한번은 문교부 장관이었던 고(故) 민관식 장관이 문교부 발전대회를 한다고 전국에 있는 교육감, 대학교 총장들, 교장들 몇 천 명을 불러다 놓고 청와대 대통령이 와서 한 말씀 해달라고 했던 모양이에요. 그런데 대통령이 저를 대신 내보내라고 해서 제가 장관 옆에 앉아있다 장관으로부터 소개를 받는데,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있는 분으로, 요원의 불길처럼 일어나는 새마을 운동을 지도하고 보좌하시는 류태영 박사께서 나오셨습니다.’ 그러는 겁니다.
▶ 그땐 박사가 아니셨잖아요. (웃음)
그래서 제가 마이크에 대고 ‘저는 박사가 아닙니다. 그러므로 저를 박사라 부르지 말고 유 비서관이나 유태영 선생으로 불러주기를 바랍니다.’하고 10분 동안 기조연설을 했어요. 그랬더니 끝나고 교육감과 대학 총장들이 올라와서 너무 감동을 받았다고 악수를 하면서 ‘요즘에 박사도 아닌 것이 박사라고 하는 사람이 수두룩한데 유 박사님은 박사라고 부르지도 말라고 하니 얼마나 겸손한 박사님입니까. 진짜 박사십니다.’ 그러는 겁니다.
그리고 지방에 내려가면 전부 저를 박사라고 부르는 거예요. 그때 가슴이 뜨끔하더라고요. 그때야 제가 청와대의 서슬 퍼런 권력 아래 있으니까 누가 아무 소리도 안 하지만, 언젠가는 청와대에서 나올 텐데 ‘저놈 가짜 박사다!’ 할 거 아녜요. 그 생각을 하니까 가슴이 뜨끔하면서 빨리 박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지난번에는 박사를 공부하러 간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농촌이 어떻게 살면 되겠는지 그런 실무적인 공부 하러 갔거든요. 이제는 새마을 운동에 대해서 제대로 학문의 체계를 잡는 박사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스라엘 외무성에 편지를 했어요. 전에 외무부장관이 언제든지 공부하러 온다면 장학금을 준다고 했거든요. 그랬더니 정말 장학금 준다고 회답이 왔어요.
▶ 대한민국에서 이름을 날리는 분이 간다니까 더 좋아했겠네요. (웃음)
더 좋아했죠. ‘그런데 저는 월급이 적으니까 차비가 없으면 그림의 떡이다.’라고 편지를 했더니 차비도 준다는 거예요. 그래서 청와대에 정식으로 보고를 했는데 지금 일을 이렇게 벌여놓고 어디를 가느냐고 난리가 났어요.
그래서 설득을 했죠. ‘새마을 운동을 이만큼 했으니 학문적인 체계와 이론적인 체계가 필요하다, 내가 가서 제대로 공부를 하고 오겠다.’ 육영수 여사가 저를 따로 부르더니 ‘지금이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가느냐고, 대통령님이 유 비서관만 믿고 있는데, 그리고 이렇게 인기 있을 때 여기서 한자리를 해야지 그냥 나가면 되느냐고.’(웃음) 가서 공부 몇 년 하면 잊어버린다는 거였죠.
▶ 흔들리지 않으셨어요?
전혀. 유신 때 유신의원이라고 국회의원을 임명한 적이 있어요. 그때 제 이름도 육영수 여사가 넣었더군요. 그래서 저는 안 한다고 빼라고 했죠.
◇ 3개월 만에 히브리어를 끝내고 3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
▶ 혹시 이스라엘 가시기 전에 고향에 금의환향은 안 하셨어요?
고향에 가끔 방문하면 경찰서장부터 막 동네가 야단이 났어요. 머슴살이한 저희 아버님을 제일 상석에 앉히고 그런 때도 있었죠.
▶ 만류도 뿌리치고 결국 이스라엘로 가셨는데, 그게 언제인가요?
제대로 학문을 하러 간 때가 1973년 7월이었어요.
▶ 히브리어는 덴마크에서 하셨던 식으로 하신 건가요?
그렇죠. 이제는 학문을 해야 하니까 히브리어로 강의를 하는 대학에 가야 할 것 아닙니까. 외국인이라고 영어로 가르치는 곳이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공부하는데 3개월 만에 히브리어 다 끝내버리고 3개월 더해서 6개월 만에 대학원 입학시험을 봤어요.
믿는 사람은 믿을 것이고 안 믿는 사람은 안 믿겠지만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다면 못할 것이 없더라고요. 저는 결심을 하고 모든 것을 하나님께 의지하고 나갔거든요.
히브리어는 덴마크어 보다 더 힘들었어요. 한국에 없는 발음이 많아요. 목에 걸린 생선가시 뱉어내는 목구멍소리가 많아서. (웃음)
‘엄마, 아빠, 까까, 쉬’ 하다가 말을 배우듯이 이스라엘 아이들도 엄마가 내는 소리를 흉내 내다가 이스라엘 언어를 배우잖아요. 흉내 내면 못 배우겠나 싶어서 3개월 만에 끝내버렸어요.
▶ 6개월 동안에 전문용어까지 배우고 대학원에 들어갔는데, 공부하는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없었어요. 사회과학대학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대학입학이 이루어졌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선생 둘과 인터뷰를 한 시간 했어요. 또 과장하고 주임 선생하고 번갈아 가면서 물어요. 어떻게 자랐는지, 생활환경은 어떠했는지, 왜 왔느냐, 뭐 배우러 왔느냐고 묻다가 나중에 사회학에 대해서 학자들 몇 사람 묻더라고요.
파슨스(Talcott Parsons, 1902~1979), 머튼(Robert K. Morton, 1910~ ) 등에 대해서 아느냐고 묻는데 용케 제가 아는 사람만 묻더라고요. 대답했더니 한참 묻다가 과장이 옆에 사람보고 ‘당신은 한국에 가서 6개월 만에 한국말로 이 사람처럼 말 할 수 있겠느냐?’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서로 안 된다며 자기들하고는 비교도 안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들어갔죠. (웃음)
▶ 그래서 어느 대학을 가셨나요?
예루살렘히브리대학(The Hebrew University of Jerusalem)에서 농촌사회학을 전공했어요. 교수가 25년 만에 기록을 깼다고 그래요. 히브리어를 배운 것은 이스라엘 사람이 아니니까 별도의 문제고 보통 석사 하려면 인문사회과학은 3년 걸리고 자연과학은 2년 정도 걸려요. 박사 하려면 석사하고 나서 5년 있어야 하니 총 8년이 걸리죠. 그렇게라도 끝내면 빨리 끝낸 것인데 저는 4년 만에 석사, 박사를 수석으로 끝냈어요.
◇ 인스턴트 지식을 벗어난 유대인식 삶의 지혜
▶ 어제 제가 5년 반이라고 그랬는데... 죄송하게도 1년이나 늘려서 소개했네요.
이수하는 과목의 평균점수가 89점, 92점이었어요. 그곳은 공부 잘한다고 대통령상, 우등상, 총장상이 따로 없고 학위증서에 글자 한 자 써주는데 영어로 번역되면 ‘With distinction’이라고 우리말로 ‘빼어나게 구별된 성적으로’라는 단어 하나하나를 써줘요. 지도교수가 제게 금년에 이 글자를 써서 받은 사람은 저 하나라고 했으니까 제가 일등이죠.
덕분에 국립대학인 이스라엘 벤구리온 대학(Ben-Gurion University of the Negev)에서 동양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교수로 초빙해 주어 이스라엘 언어로 사회학을 2년 가르치다가 돌아왔어요.
▶ 이스라엘과 덴마크의 다른 점이 있다면 어떤 건가요?
덴마크는 150년 전에 있었던 것이고 이스라엘은 지금 말하면 30년 전에 일어난 얘기인데, 같은 점은 신앙을 가지고 정신적인 운동이 일어난 나라라는 점이에요.
다른 점은 주위의 환경과 역사적 배경이죠. 덴마크도 전쟁을 많이 하면서 망한 나라였고 이스라엘은 계속 전쟁 중에 있는 나라예요.
이스라엘은 사막이고 덴마크는 사막은 아니지만 황무지였죠. 이것을 개척하고 나간다는 점에서는 같지만 이스라엘은 키부츠(Kibbutz, 집단농장)와 모샤브(Moshav, 공동농장)의 집단농촌이고 덴마크는 일반 보통 가정의 개인농장이죠.
정신개혁운동도 덴마크에는 포크 하이스쿨(folk high school, 평민학교, 전형적인 성인 기숙학교 유형)이라고 하는 곳에서 정신교육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시온주의운동(Zionism, 유대인들의 민족주의 운동)을 통해서 정신교육운동으로 나가게 된 것이에요.
두 나라 다 하나님을 중심으로 하되 덴마크는 목사들이 주동이 되어서 농촌운동을 했고 이스라엘은 랍비들이 주동이 된 것이 아니고 그냥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주축이 된 것이 다르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보통 유대인 그러면 교육에 대해서 세계최고라고 하는데 직접 가서 보시니까 어떻던가요? 유대 가정의 교육은 우리와 어떤 점이 다르죠?
교육적인 측면에서 다른 분명한 한 가지 있습니다. 우리는 지식을 가르치는 것을 교육으로 알고 있고 이스라엘은 지혜를 가르치는 것을 교육이라고 합니다. 지식은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입력을 시켜요. 그래서 우리는 어렸을 때부터 외우는 것을 많이 했죠. 60년 전에 외웠던 조선시대, 고려시대 역대 임금을 지금도 외우잖아요.
수학공식, 피타고라스의 정리 등등 이런 공식이나 정의를 많이 외우는 것을 우리는 공부라고 하죠.
그러나 이스라엘에서는 그런 공부를 아예 안 시켜요. 우리 아이들을 교육시키면서 보니까 산수교과서가 우리말로 I․Q 테스트 같아요.
예를 들어 우리는 ‘25+15, 125÷25’ 하는 문제들이 교과서에 나와요. 하지만 이스라엘 교과서에는 ‘두 자리 수를 두 번 더하는 문제를 10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세 자리 수를 두 자리 수로 나누는 문제를 열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정수를 소수로 나무는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봐라.’ 어렸을 때부터 문제를 자기가 만들게 해요. 삼각함수 같은 것도 몇 도와 몇 도를 더해서 어떻게 되는지 문제를 몇 개 만들어서 풀어보라는 식으로 전부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말하자면 생각하게 만드는 거죠.
우리 아이가 학교를 다녀오더니 손가락으로 ‘갑자을축’ 하듯이 꼼지락 대기에 주역을 배웠나 했어요. 이스라엘도 음력을 쓰거든요. 그리고 소띠다 개띠다 하는 태어난 해에 따른 간지가 있어요. 우리와 12마리 짐승 중에 4마리만 다르죠. 우리는 없는 곰 띠, 전갈 띠 같은 게 있거든요. 그리고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나이든 사람은 궁합을 봐요. 가만히 그 말을 들어봤더니 남녀가 4살 터울로 결혼하면 좋다는 그 소리더라고요. 무슨 띠와 무슨 띠가 만나면 좋다는 말요.
그래서 저는 아이가 사주팔자를 배운 줄 알았어요. (웃음)
그래서 뭐하느냐고 하니까 일곱을 일곱 번 더하는 것을 계산하고 있다는 거예요. 그래서 구구단 안 배웠느냐고 물어보니까 구구단이 뭐냐고 물어봐요.
안 배웠다고 하기에 구구단을 적어놓고 외우게 했더니, 다른 아이들은 안 하는데 자기만 한다며 싫다고 하더라고요.
거기는 한 달에 한번 의무적으로 학부모들이 와서 받는 교육이 있는데, 담임선생에게 이스라엘은 구구단도 가르치지 않느냐며 물었죠. 구구단이 뭐냐고 선생님도 묻기에 으쓱해져서 가르쳐줬더니 놀라워해요.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게 있다는 거예요. 속으로 ‘그럼 그렇지.’ 하며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죠.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계산기가 있다는 겁니다. 그런데 중학교 들어가기 전까지는 절대 계산기를 안 준다는 거예요. 애쓰며 계산하는 가운데 생각을 하고 창의력이 생기고 인간이 되어간다는 거죠. 외워서 쓰고 그러는 것은 교육이 아니라고 말하더라고요.
미국에 파견을 나가보니 영국은 15단까지 외우고 인도는 19단까지 가르치던데 여하튼 이스라엘은 암기식으로 정보를 입력시키는 교육을 안 해요. 그러니까 집에서 숙제를 하다가도 엄마에게 질문하면 직접 대답하는 엄마가 하나도 없어요. 간접적으로 반대질문을 해서 깨닫게 해주지 절대 정답을 말해주지 않아요.
사지선다형문제는 있지도 않고 대학에서 시험을 보는데 시험문제가 타자로 10줄이에요. 예를 들고 ‘그래서 이 내용에서 볼 때 네가 생각하는 사상을 어떻게 적용하느냐.’ 문제만 파악하는데도 힘들어요. 어떨 때는 노트를 10장, 20장 줘가면서 두 시간, 세 시간도 시험을 봐요.
▶ 창의력을 보는 거네요.
창의력과 자기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는 것을 가지고 점수를 따는 거죠. 정답이 없고 선생님에게 배운 것을 응용해서 각자가 풀어나가야 해요. 제가 예루살렘대학에서 첫 번 학기에 점수를 가장 많이 받았던 과목의 예를 들어 보면, 한번은 제 지도교수가 책을 하나 주면서 읽고 와서 다음 주에 발표를 하라고 하는 거예요. 받아보니 스펠링은 알파벳인데 영어가 아니더라고요. 물어보니 스패니쉬(Spanish)래요. 그래서 스페인어는 배운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한다고 했더니 스패니쉬는 쉬우니까 그냥 읽어서 오라는 거예요. 저는 교수님이 미쳤나 했어요.
그러다 지혜를 얻은 것이 이곳은 세계 각국에 흩어져있는 유대민족들이 자기 자식들을 보내는 학교니까 분명히 스페인에서 유학 온 사람도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마침 스페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온 학생이 있어서 제목과 각 장(章, chapter)을 읽게 했더니, 아는 책이었고 두 장만 없더라고요. 그래서 스페인어로 된 두 장을 이스라엘말로 읽게 하고 한국말로 받아 적어서 그 다음 주에 발표를 멋지게 했죠.
그러니까 지도교수가 최고의 발표점수를 주면서 스페인어 못한다더니 어떻게 했느냐고 묻기에 자초지종을 말했더니, ‘모르는 학문의 책 재료를 주면 어떻게 소화하는가?’ 그것이 문제였고 그것을 통해 깨닫는 것을 가르쳤다고 하시더라고요.
뭔가를 줬을 때 방법을 주면 안 돼요. 어떻게 처리하는지를 통해 스스로 방법을 체득하면 엄청남 자신감을 갖게 되고 해결하는 방향에 있어서 다른 일도 그렇게 한다는 거죠.
또 한 번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에 대해서 반 페이지 분량의 문제가 나왔어요. 선생님 강의를 모두 외웠다고 하더라도 뭘 써야 할지 모르겠더군요. 그런데 그 시험에서 최고 점수인 97점을 받았어요.
첫마디에 그저께 읽은 이스라엘 신문의 기사를 썼는데, 이스라엘에서 애를 낳고 살던 사람이 미국에 가서 미국여자와 결혼해 10년 동안 오지도 않고 소식을 끊어버렸다가 10년 만에 왔는데 애들 데리고 사느라고 홀로 고생한 아이 엄마가 남편이 왔다는 소문을 듣고 찾아가 경찰에 고발을 해서 재판이 벌어졌어요. 그런데 여기는 미국이 아니라면서 징역판결이 나와 신문 사회면에 대서특필(大書特筆)이 났죠.
이 얘기를 쓰고는 여기서 이스라엘과 미국의 사회제도와 법률공조 이런 것이 안 되어 있다고 하면서 그 선생님의 학설을 죽 풀었더니, 천편일률적인 다른 학생들의 답에 반해 저만 다르니까 이런 것을 높이 평가하셨어요.
다른 애가 배우니까 피아노학원 간다고 하면 절대 안 보내지만 ‘엄마 바이올린 소리를 들으면 가슴이 찡해. 그래서 바이올린을 공부하고 싶어요.’ 하면 보내는 거예요. 누가 하니까 한다고 하는 것은 절대 안 보내죠. 그것이 교육 속에 스며들어 있어요.
우리나라는 오직 일렬로 줄을 세워서 일등 하고, 반장하고, 다 대통령 되기를 바라죠. 그럼 국민은 누가 하나요. (웃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주신 달란트, 하늘이 준 재능을 발전시키는 것이 바로 교육이에요.
◇ 성공으로 가는 길은 나만의 달란트를 사용하는 것
▶ 유대인은 예술분야에서도 뛰어나고 돈 버는 데도 뛰어난데 그런 것들이 교육과 무관하지는 않겠어요.
노벨상을 받은 전체 수상자의 26%가 유대인이라고 해요. 그리고 노벨 의학상, 화학상 같은 노벨상을 받은 사람은 60%래요.
세계적으로 돈이 가장 많은 민족도 유대인이고 전쟁을 잘하는 것도 유대인이죠. 예술가, 음악가도 많고 학자도 많아요. 프로이트, 칼 마르크스, 샤갈, 다 유대인이고 세계적 음악콩쿠르도 다 유대인이 장악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각자에게 주신 서로 다른 달란트를 잘 사용했기 때문이죠. 우리나라는 아무리 돈을 잘 벌거나 바이올린을 잘해도 영어, 수학 못하면 바보취급을 받고 엄마들 입이 ‘욕 기관총’이 돼서 마구 난사 되잖아요. (웃음)
다른 달란트를 받았어도 기가 죽어 버리죠. 그런데 이스라엘은 공부 못한다고 절대 욕하는 엄마가 없어요. 그러니까 있는 재능들이 다 살아나죠.
◇ 두 여인에 의해 좌우되는 남자의 일생
▶ 결혼은 언제 하셨나요?
33살에 했어요. 제가 구두닦이하고 신문 배달하니까 다른 여자들이 저에게 관심을 둘 수도 없었죠. 그런데도 저는 속도 없이 다른 여자를 좋아해 보기도 했지만 번번이 거절만 당했어요. 그러던 끝에 시골에서 교장선생님을 하시던 장인어른이 가난하지만 서울에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저를 너무나 아껴주셨어요. 집에만 가면 밥을 해주시고 이야기를 하고 그랬거든요.
장인어른에게 딸이 셋 있었는데 그 중에 셋째 딸과 마음이 통해서 결혼을 했죠. 처음에 결혼한다고 했더니 장모님이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는데, 나중에 딸을 낳고 키워보니 그 마음을 알겠더군요. 바지는 떨어져가지고 엉덩이가 해어져서 살이 보일락 말락 하고 다니지, 제가 속도 없이 그러고 갔어요. 게다가 들어보니 나중에는 가정교사를 했지만 신문배달에 구두닦이나 하고 앉았지, 굶기를 밥 먹듯 하지, 아버님은 머슴 살았지, 누가 교장선생님 딸을 거기다 넣겠어요.
그래도 우리 둘은 결혼하기로 작정을 해서, 우선 친구들이 돈을 모아 달동네에 월세 방을 얻어줬어요. 장인어른도 장모님에게 꽉 잡혀서 결혼식에 오지도 못하고 집사람은 드레스도 못 입고 을지로입구에 있는 흥사단 강당에서 무료로 결혼식을 했어요. 한복에 남대문시장에서 파는 구멍 뚫린 망사 화분 받침대를 뒤집어쓰고요. (웃음)
택시를 대기시켰다가 탔는데 그때 당시 신혼여행을 가면 속리산이나 온양온천을 가니까 택시기사는 횡재다 싶어서 기다렸을 거예요. 그런데 제가 기본요금 올라가기 전에 내리자며 미도파 앞에서 내렸어요. (웃음)
3분 거리라 욕을 바가지로 할 텐데 신랑이 얼마나 가난해 보였으면 그냥 내려주더라고요. (웃음) 명동의 한일관에 가서 제 돈 내고 사먹는 음식으로는 제일 비싼 떡만둣국을 둘이서 먹고 시내버스를 타고 서울역에 가서 시외버스를 갈아타고 안양에 갔어요.
6월이라 안양유원지에도 가고 여관에 가격을 물어보니 아까 먹은 떡만둣국 열 그릇 값을 달라는 거예요. 그래서 지붕이 손에 닿을 듯한 여인숙에 가서 제일 싼 방을 달라고 했는데 바로 앞에 항아리로 만든 뒷간이 있고 얼마나 안 치웠는지 오물이 넘쳐서 구더기가 올라오다 떨어지고 있더라고요. 포장마차에서 우동 한 그릇 먹고 여인숙에서 잠자고 집에 돌아온 것이 신혼여행의 전부예요.
▶ 신부가 안 울었어요?
미리 각오를 했지요. 거지인데요 뭐...
▶ 덴마크 가기 전인데 덴마크는 같이 가셨어요?
남자는 일생을 통해서 여자를 둘 만나요. 하나는 어머니고 다른 하나는 부인이죠.
그 두 여인이 생애를 좌우합니다. 어렸을 땐 어머니의 교육, 성장한 뒤에는 부인이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통해서 사람을 바꿔 놓아요. 저는 우리 집사람이 저를 만들었다고 말해요. 저를 박사로 만든 것도 집사람이에요. 덴마크 공부하러 갈 때도 나만 초청장을 받았는데, 아기는 생기고 대책은 없고 당황하고 있는데 가라는 거예요. 아기를 업고 길가에서 떡 장사를 하더라도 살 테니 가라고. 얼마나 용기를 줬는데요.
▶ 고생이 엄청났겠어요.
엄청나게 했죠. 굶기를 밥 먹듯 하고. 집에서는 시집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서 고생한다고 거들떠도 보지 않았어요. 지금도 저는 우리 집사람에게 꼼짝도 못합니다. (웃음)
▶ 2년 만에 돌아오신 후에는 생활이 좀 나아졌나요?
조금 나아졌는데 그때 대학교수 월급이 워낙 박봉이다 보니 제가 가르쳤던 학생이 졸업하고 대기업에 들어가서 일 년이 되니까 저보다 월급이 더 많더라고요.
▶ 처가에서는 언제 인정을 받으셨어요?
청와대 들어가서요. (웃음)
장모님이 기뻐하면서 친척들에게 인사를 시키고 난리가 났었죠. 비서관으로 있으면서 가니까 정부에서 사람이 나오고 경찰서에서 사람이 나오고 막 그랬거든요. 그러니까 우쭐해가지고 대접을 받았지요.
▶ 이스라엘은 가족이 함께 가셨나요?
네, 큰애가 딸이고 밑으로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만 5살, 3살 되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서 초등학교 상급반까지 유대인학교에 보냈어요.
▶ 거기서는 고생을 좀 덜 하셨나요?
한국보다는 덜 했지요. 그러나 저 한 사람만 주는 장학금으로 가족이 살려다 보니까 정부에서 방도 주고, 전기요금 같은 것도 다 내줬지만 아내가 부업으로 일도 하고 그랬어요.
▶ 어떤 식으로 교육을 하셨나요?
학원이나 과외에 보낸 적은 없고 가정교사 한번을 둔 적이 없어요. 한번은 아들이 고등학교 3학년 1학기 때 저에게 와서 ‘아버지는 아들을 사랑하지 않는가 봐요.’ 그래요. 자기 반의 친구가 내내 일등만 하다가 3등으로 떨어져서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고 퉁퉁 부어서 왔는데 자기는 4등 했다, 15등 했다, 7등 했다 하는데 한 번도 뭐라고 않는 것을 보니 사랑하지 않는 거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나는 그런데 별로 관심 없고 네가 친구를 잘 사귀는지, 인간성이 제대로 되는지 같은 문제에 관심이 많다. 친구들과 떡볶이 사먹으라고 돈을 자꾸 주는데 붕어빵도 사서 나눠 먹으며 친구도 만들고, 인간적인 삶을 살기를 원한다. 나라를 생각하고, 신앙심이 좋고, 부모를 공경하고, 바른 마음먹고 그런 것들. 공부는 하는 데까지 네가 알아서 해라. 그 대신 네 선택에 맞게 행동하며 살아라.’ 그랬어요.
◇ 고통과 역경의 불로 단련된 인생 칠십, 새로운 시작
▶ 잘 자랐나요?
입시 때 카이스트가 특차니까 시험을 보러 간대요. 저는 대학교수니까 대게 대학교수들은 아들이 대학교수가 되기를 바라거든요. 그래서 건국대에 오라고 했더니 특차니까 한번 본다고 해서 보냈더니 합격을 한 거예요. 건국대 보내려고 반대했는데 본인이 가고 싶다고 고집을 피우니 그냥 보냈죠. 가서 수석으로 석사․박사 다하고 지금은 교수로 재직 중이에요.
딸은 영문과를 졸업하고 미국에 유학도 보냈는데 거기서 사귄 사람과 결혼했어요. 지금은 남편이 영국으로 발령받아 영국에서 살고 있어요.
▶ 지금은 형편이 많이 좋아지셨나요? (웃음)
그럼요. 아이들 집도 다 마련해주고 신혼여행에서는 집사람을 안양의 여인숙에서 재웠지만 지금은 세계 일주 7번에 63개국을 방문하고 외국에서도 6,7년을 살았죠.
부부간에 용기를 주고 희망을 주고 협력을 하면 무에서 유로 다 이루어지더라고요.
▶ 어머님은 어떤 분이셨어요?
아주 신앙적이고 성실하셨죠. 가난하고 어려운 사람 많이 도와주시다 91세에 세상을 떠나셨어요.
▶ 혹시 좌절해 본적도 있으세요?
없어요. 그 부분이 늘 하나님께 감사해요. 시골 대장간에 가면 낫이나 호미를 잘 만들기 위해 뜨거운 불에 많이 담금질하는 것을 볼 수 있어요. 제 삶도 어려움과 고통 속에 많이 담금질 되면서 더 훌륭한 삶으로 만들어진 것 같아요.
▶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한 말씀 부탁합니다.
이라크에 가서 미국정부의 허락 없이 로비 활동했다고 정치적인 희생양으로 미국에 수감되어있는 유명한 로비스트 박동선 씨와 선언한 것이 있어요. 70살이 되었을 때 지금까지 살아온 경험과 그 동안 연구한 성과와 그 동안에 보아오고 느낀 것들을 가지고, 그때부터 진짜 일을 할 ‘준비’가 끝난 것으로 하자고...
그래서 저는 지금이 시작입니다. 저는 우리나라가 잘되느냐 못되느냐는 청소년에게 달려있다고 생각해요.
청소년들의 교육, 의식, 행동, 품행, 이런 것들이 나라의 운명과 역사를 창조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청소년에 대한 관심이 너무 적어요. 청소년들을 제대로 교육, 훈련시키는 것과 새마을 운동을 했을 때처럼, 국민들의 의식개혁을 통해서 개별로, 집단별로, 국가별로 이 나라가 잘살게 하는 그런 운동을 하는 것이 제 꿈이고, 지금 현재 하고 있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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