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상 ’출신으로 사법고시 합격한 양선화의 ‘긍정의 힘’ | ||||||
‘사법고시 패스’가 한국사회에서 갖는 상징성은 독보적이다. 신분상승의 지름길이다. 모든 전문직이 그렇지만 법조계는 특히 폐쇄적이다. ‘서울대 법대’가 갖는 단단한 상징과 다르지 않다. 양선화씨(32)는 지난 11월 27일 발표된 사법고시 합격생 1천8명 중 한 명이다. 그는 상고 출신이고, 고등학교 졸업 직후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했다.
양선화씨가 언론의 눈길을 끄는 것은 배경 때문이다. 상업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변호사 업무 보조로 7년간 일했다. 사법고시에 뜻을 두고 방송통신대학교 법학과에 진학, 졸업 후에는 다시 고시에 매달렸다. 그리고 7년 만에 합격했다. 지난 12월 17일 그의 합격을 축하하는 행사가 열렸던 대전 신일 여고도 흥분했지만, 언론도 마찬가지였다. 신문은 물론이고, 공부 비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출연해 자신만의 공부법을 소개하기도 했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두 분의 변호사를 모셨어요. 소송 결과를 들으러 법정에 가면 판사 세 명 중 젊은 여성 판사도 있었죠. 멋있다고 생각했어요. 부럽기도 했고요. 그리고 법이 정말 어렵고 억울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계기는 소박하다. 양선화씨는 좋은 교육 환경을 찾기 위해 세 번의 이사를 했던 ‘맹자 어머니’를 떠올렸다. 변호사 사무실에서 일하고 직·간접적으로 법조계를 겪었기 때문에 사법고시에 뜻을 두게 됐다는 뜻이다. 그러나 사법고시를 ‘뜻’만으로 합격하기는 쉽지 않다. 당연하지만, 남다른 노력이 있었다. “매일 아침 5시에 일어나 고시생들이 모여 산다는 서울 관악구 신림동 독서실에 갔어요. ‘출퇴근’을 했죠. 오전 7시 반쯤 도착해 저녁 11시까지 공부했어요.” 여기까지는 대입을 준비하는 고3 수험생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스톱워치’로 순수하게 공부에 집중하는 시간을 측정하는 사람은 드물다. 양선화씨는 그렇게 했다. 화장실 가는 시간, 식사하는 시간, 커피 마시는 시간을 빼고 공부에 집중하는 시간을 스톱워치로 측정했다. “집에 갈 때 찍혀 있는 시간을 보면 열네 시간 정도 됐어요. 하고 싶어서 했던 공부였기 때문에 스트레스는 없었죠. 공부 하면서 행복했고, 재미있었어요.” 얄미운 얘기다. 하지만 “‘밥 먹는 시간도 아끼려고 비빔밥을 먹었다’는 고승덕 변호사의 식단마저 시간이 아까워 점심과 저녁을 김밥과 우유로 떼웠다”는 그에게는 독한 진정성이 느껴진다. “비빔밥을 해 먹으려면 반찬을 준비하고, 또 채를 썰어야 하잖아요. 제가 직접 해야 하니까, 그 시간이 아까웠어요. 은박지에 싸인 김밥을 손에 들고, 벗겨가며 먹었죠. 그래야 시간이 절약되니까요.” 계단을 오르듯 차근차근
어머니와 남편의 전격적인 지지는 “눈물이 날 정도로 고맙다. 사랑한다”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다. 느닷없이 사법고시에 도전하겠다는 포부를 말했을 때, 어머니는 반대했다. ‘선생님이 되는 게 어떻겠느냐’며 그를 설득했다. 아버지는 달랐다. 건축업에 종사하던 아버지는 딸의 선택을 지지하고 힘을 북돋았다. 법대를 나온 당신께서 이루지 못한 꿈을 딸이 이뤄주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딸의 성공을 볼 수 없었다. 지난 2001년, 양선화씨의 아버지는 암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그가 첫 번째 시험에 도전하기도 전이었다. “지금 아버지가 살아 계시면 얼마나 좋겠어, 그 말밖에는 못하겠어요. 어머니는 ‘내가 죽어서도 너를 못 잊는다’고 말씀하시곤 했어요. 제가 속을 너무 많이 썩여서. 2년 동안 1차에서 떨어졌을 때 ‘그러게 그거 하지 말고, 선생님 하라니까’라고 말씀하셨죠. 3년째 1차에 합격하니까 응원해주시던걸요(웃음).” 그는 계단을 밟아 올라가듯 합격했다. 2002, 2003년에는 1차에 불합격했다. 2004년에는 1차에 합격, 그해 2차와 이듬해 2차는 불합격했다. 2006년에는 1차 합격 · 2차 불합격, 2007년에야 비로소 2차에 합격하고 3차에도 합격했다. 7년이 걸렸다. 진부하지만 진실한, 양선화만의 무기 세 번째 도전했을 때, ‘영어’가 필수 과목으로 지정됐다. 영어는 ‘알파벳만 아는 상태’였던 그는 포기 직전이었다.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으로 영어 공부를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공부를 쉬고 십자수를 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헌민형(헌법·민법·형법)’은 어려운 게 아니다. 한국어니까. 그렇다면 영어는? 언어니까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마음을 고쳐먹으니 영어 공부도 재미가 붙었어요. 생각도 영어로 하고, ‘취급주의’ 같은 한글 표지도 영어로 바꿔보고. 두 번째 토익시험에서 700점을 넘겼죠. 그때 이후로 포기를 생각한 적은 없어요.” 독특한 배경은 그를 이슈메이커로 만들었지만 그건 예나 지금이나 극복해야 하는 일종의 벽이다. 신림동에서 공부하던 시절에도 ‘여상’과 ‘방통대’ 출신인 그가 받았던 시선은 두 가지, ‘격려’와 ‘무시’였다. “제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그 모습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숨길 수 없는 사실이죠. 앞으로 경쟁할 분들은 저와는 다른 단단한 배경을 갖고 계시겠죠. 행여 무시당할 수도 있지만 이미 감안하고 있으니까, 상처를 받지는 않습니다.” 사실 합격보다 앞으로가 문제다. ‘법조계’에서 양선화씨가 차지하는 위상은 독특함 이상일 수 있다.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의 행보에 있어 배경을 빼고 그를 설명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남과 다른 시작과 과정을 거친 그가 내세우는 ‘양선화만의 무기’는 그 계기만큼이나 소박하다. “인내. 그거 하나밖에 없어요. 누구에게도 지지 않는 ‘성실’을 보여주고 싶어요. 아직은 많이 모자라지만, 제 바람이고 목표죠.” 지난 12월 17일, 그의 합격을 축하하기 위해 대전 신일여고에서는 작은 행사를 마련했다. 그는 ‘자랑스러운 신일인상’을 받았고, 전교생 앞에서 짧은 강의를 했다. ‘긍정의 힘’을 강조하며 ‘해는 여러분을 위해 뜨는 거다. 항상 목표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저는 ‘공부해서 남 준다’고 생각해요. 법조계의 문턱이 아직은 높으니까, 앞으로는 정말 가난해서 법의 도움을 받을 수 없는 분들을 위해 일하고 싶어요.” ‘긍정, 열정, 인내, 희망’ 같은 단어는 진부하다. 어디서든 들을 수 있고, 돈을 주면 살 수도 있다. 그러나 이제 열여섯, 열일곱 살인 후배들 앞에서 양선화씨가 말하는 단어들은 그렇지 않았다. 스피커를 타고 확장된 울림은 단호하고 절실했다. 그는 그렇게 살았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 이제는 물러설 길도 없다. |
출처 : 파란세상
글쓴이 : 보라빛향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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