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와 고구려사에 나오는 [말갈]에 대한 문제 / 이재환 / 2000년 8월 5일 -------------------------------------------------------------------------------- 발해와 고구려사를 뒤지다 보면, [말갈]이라는 말이 자주 나온다. 이 [말갈]을 놓고 한국과 중국, 러시아 학계는 자주 말다툼을 벌인다.
*1.한국 - 말갈은 한민족의 한 갈래다. *2.러시아 - 틀렸다. 연해주를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고 그 땅에 말갈과 발해가 살았으니 이들은 다 우리 러시아 역사다. *3.중국 - 말갈은 한국역사와 관계가 없다. 지금 그들이 살던 땅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우리 중국 역사다.
2번과 3번이 말이 안된다는 사실은 다 아시겠고, 문제는 1 번이다. 1 번이 맞느냐 틀리냐에 따라서 우리 역사는 확 뒤바뀌기 때문이다.
한국의 역사교과서는 "고구려 사람인 대조영이 당에서 빠져 나와 고구려의 옛 땅에서 말갈인과 고구려 사람들을 모아 대진국(大辰國- 발해)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바로 이 말 때문에 논쟁이 끊이지 않고 있다. 만약 말갈인을 한민족이 아닌 다른 민족으로 본다면 발해는 꼼짝없이 한국의 역사가 아닌 이민족의 역사가 되어버리는 것이요(청이 중국 역사이지 만주족의 역사가 되지 못하는 것처럼), 거꾸로 만약한민족으로 인정한다면 우리 역사 속으로 당당히 들어올 수 있기 때문이다.
우선, 이름을 한번 들여다보자. 당의 기록에는, 대조영과 그의 아버지 대중상은원래 말갈인으로, 고구려 병사였다고 적혀 있다. 그런데 대중상大仲象의 원래 이름은 걸걸중상(乞乞仲象)이다.
걸걸중상과 대중상, '중상'이라는 글자만 같고 대大와 걸걸乞乞이 다르다. 이사실로 보아 중상이 이름이고 대大가 성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원래는 걸걸이라는 성을 썼다가 크다는 뜻의 대大자를 성으로 골랐다고 볼 수 있다.
즉 걸걸중상은 '크고 큰 중상'이라는 뜻이다. 또, 걸걸중상의 오른팔 걸사비우는 어떤가? 우리 말로 읽으면 금방 뜻이 드러난다. '클 쇠보' '보'가 남자를 뜻하는 우리 옛말이고 '쇠'도 남자이름에 썼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큰 남자', '큰 사나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이들의 이름을 우리 말로 풀 수 있다는 사실은,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이들이 우리 민족일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리말로 풀 수 있는 이름을 가지고 고구려에서 살았던 사람들은 고구려의 후예일 수밖에 없다. 이름은 무덤을 쓰는 방식과 마찬가지로 꽤나 보수적이고 쉽게 바뀌지 않는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또 한가지, 중국 기록인 통전通典에는 이상한 기록이 전해 내려온다.
"본국이 무너지자 성 밖에 있던 백제 사람들은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버렸고 그 군주인 부여숭은 고국으로 돌아갈 수 없어 자멸했다."
주목해서 봐 주시기 바란다. '돌궐'과 '말갈'이 나온다. (한반도의)본국이 무너지자 중국 대륙에 있는 성 밖에 살던 백제 사람들이 흩어져서 돌궐과 말갈로 항복하고 말았다는 얘기다.
(한반도에 있는 백제였다면 과연 몽골 초원에 있던 돌궐에 가서 항복할 수 있었을까?이 사실만 봐도 백제가 무너질 때까지 중국 대륙에 백제의 군현- 담로 - 이 남아있었다고 봐야 한다. 게다가 한반도에는 부여숭이라는 이름을 지닌 군주가 없었다!또, 본국이 무너지자 성 밖에 살던 백제인들이 흩어졌다고 썼다.만약 한반도의 백제였다면 굳이 본국이라는 말을 강조할 리가 없다)
만약 대륙백제를 인정하고 그들의 담로가 하북성과 요서에 남아 있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면 돌궐에 투항했다는 기록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요서나 하북에서 내몽골 쪽으로 넘어가기는 쉬운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말갈]은 연해주와 만주 동북쪽에 살고 있던 민족이다. 교과서에서도 그렇게 가르치고 우리도 그렇게 알아 왔다.
하지만 그렇다면 어떻게 백제인들이 말갈에 항복할 수 있었을까? 고구려가 가로막고 있는데 말이다.
그렇다면 발상을 바꾸어야 한다. 고구려에 투항했다는 말을 말갈이라고 잘못 썼다든가, 아니면 중국이 요령성 동쪽에 살던 민족들을 얕보고 깔보는 뜻으로 말갈이라는 말을 썼고, 말갈이라는 말은 특정 민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라고 말이다.
두번째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말갈은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말로 발해도 우리역사로 볼 수 있게 된다. 따라서 발해는 당당한 우리 역사이며, 말갈로 지칭된 사람들은 발해나 고구려 사람으로 봐야 한다. --------------------------------------------- 말갈과 대조영의 출자문제에 대해서는 한규철 교수님이 쓰신 '발해의 대외 관계사연구(1995, 신서원)'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방주인]
1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6:36:59
역사속의 말갈 / 이재환
1.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한국역사 학계에서는,'말갈靺鞨'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이민족(?)'에 대해 많은 논란이 나돌았다.
어떤 학자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을 옥저나 동예, 동부여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서주西周 때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숙신肅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는 숙신肅愼에서 물길勿吉로, 물길勿吉에서 말갈靺鞨로 이름이 바뀌어져 온 이민족 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한국 사학계는 딱 한가지는 의견이 일치한 상태인데, '말갈'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된 '이민족異民族' 일 뿐이며, 야만적이었고 우리 역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 단정 때문에 아직까지 발해사는 한국 역사가 아니라는 망발이 나오고 있으며 고구려의 주민구성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
필자는 과감히 '말갈'은 곧 고구려이며,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도 야만인이 아니라 문화민족 이었으며 대진국大振國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또 시대에 따라서 '말갈'이라는 말이 다르게 쓰였다는 사실도 검증하고 싶다.
2.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갈
대진국(발해) 역사를 다룰 때 가장 골치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과연 대진국은 얼마나 결속력이 있었나?' '혹시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닐까?'는 문제이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나 중국학자들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것인데, 까닭인즉 '고구려 유민'인 지배층이 '말갈인'을 피지배층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 "대조영이 당에서 도망쳐서 옛 고구려 땅에 들어가 그곳의 말갈인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과, "발해(대진국)가 여러 말갈을 복속시켰으나 흑수말갈만은 당에 부탁하여 당에 부용(:속국이 됨. 이 경우는 형식적임)하였고, 발해에 맞섰다."는 구절을 '증거'로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있던 말갈인' 이 누구였나부터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서기 668 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은 분명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요하 하구에 있는 평양성)을 무너뜨렸고 평양성을 약탈하고 고구려의 역사책이나 각종 서적을 모아 불태워 버린 뒤 궁궐과 무덤, 비석, 건물들을 깡그리 부숴버린다.
아울러 그들이 손에 넣은 성은 모두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지금까지 평양성의 유물이나 유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는 당이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점령한 땅의 왕족, 귀족, 백성들을 모두 당에 끌고 갔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철저히 파괴되고 유물과 유적이 안 남아 있으며 백성들이 깡그리 끌려간 곳'은 어디까지나 당이 차지한 곳일 뿐이지, 당이 차지하지 못한 고구려의 땅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당이 점령한 곳은 어디까지나 요령성과 평안도, 황해도 정도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간도지방에 있는 국내성國內城이 너무나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록대로라면 만약 당이 국내성을 점령했다면 국내성도 깡그리 불타고 부숴져야 했을 것이다. 특히 왕과 귀족들의 무덤, 요새인 성벽, 광개토태왕비 등이 약탈 대상이 되어 파헤쳐지고 깨지고 부숴져야 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너무나 온전히 남아 있다.
이 사실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데, 다름아닌 고구려의 대다수 백성들은 끌려가지 않고 계속 고구려 땅에 남아있었을 가능성과(물론 당이 차지하지 못한 곳에서만) 당이 손에 넣은 곳은 도읍인 평양성과 당과 가까운 요령지방과 평안도, 황해도 정도고 나머지 땅들은 손에 넣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당의 군대는 대부분이 보병이어서, 고구려의 기마병이나 백제의 수군처럼 재빨리, 효과적으로 먼 곳까지 움직을 수가 없었다. 또한 전투력에 있어서도 뒤떨어졌다. 그래서 간신히(남생의 배신으로) 당나라와 가까운 일부 지방과 평양성, 그리고 요령과 가까운 평야지대인 평안도와 황해도만을 손에 넣고 "고구려의 도읍이 무너졌으니 고구려 전체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 여겨서 고구려가 망했다고 적은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자기가 점령한 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만 당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당나라에 나오는 '말갈'이라는 말도 달리 봐야 한다.
즉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에게 지배를 받은 '이민족'이 아니라 고구려가 무너진 뒤에도 옛 땅에 남아서 계속 살았고 당에 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로 말이다.(단, 아무르강 북쪽에 사는 흑수말갈은 빼고) 이들은 고구려가 무너지기는 했어도 당의 손길도, 신라의 손길도 미치지 못했기에 자유롭게 살고 있었고 힘의 공백 상태였기 때문에 군벌軍閥들처럼 몇 조각으로 나뉘어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고구려의 장군이다 태수였던 사람들이 지방에서 왕노릇을 하면서 사실상의 지방정권을 세웠던 것이 당唐이나 훗날 [당서唐書]를 정리한 송나라 사람들에게 '여러 말갈'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대조영을 비롯해서 대진국(발해)의 황제들이 여러 말갈을 복속시켰다는 기록도 바로 이런 지방 정권들을 하나로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무력을 쓴 사실을 나타낸 것일게고.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울 때, 남아 있던 고구려 사람들이 찬성해서 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대진국(발해)이 빨리 성장할 수 있었고 빨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며 하북성이나 산동으로 쳐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본다.
결국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갈靺鞨이란 남아있던 고구려 사람들을 깔보는 비칭일 뿐이며, 대진국과는 별종인 흑수말갈까지 싸잡아서 말갈이라고 부르는 사실로 보아 말갈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 동북쪽에 살던 민족을 싸잡아서 부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말갈渤海靺鞨 이라는 말도 발해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볼 때 대진국이 발해만의 땅까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만에 있는 말갈족'이라는 뜻으로 부른 멋대로의 이름일 뿐이다.
3. [통전通典]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
중국 역사책인 [통전通典]을 보면,'이상한' 기록이 나온다.
"본국(백제가) 무너지자 성 밖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차차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서 투항해 버렸으며, 군주인 부여숭扶餘崇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백제는 소멸하였다."
만약 이 기사의 백제를 한반도의 백제라고 본다면, 굳이 본국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본국이라는 말을 쓴 것이 이상하며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백제가 어째서 '돌궐과 말갈'에 항복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백제왕 가운데 숭崇(부여扶餘는 백제 왕실의 성임. 줄여서 여餘라고 불렀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군주가 없다. 우리가 아는 돌궐은 몽골초원에 있었고, '말갈'은 고구려 동쪽인 연해주와 아무르강 북쪽에 있었으므로 한반도 서쪽에 있던 백제인들이 가서 항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백제가 백제인들이 중국 땅에 건너가서 세운 담로백제라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부여숭은 담로 백제의 왕이었지 본국백제의 왕은 아니었으며, 성을 만리장성으로, 백제를 지금의 요서지방 일부에 남아있던 담로백제로 본다면, 요서에서 몽골초원으로 넘어가기는 쉬운 일이므로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이다. 우리가 아는 말갈은 고구려와는 생판 '남'이고 이민족(?)이다. 그것도 연해주나 아무르강 동북쪽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데 어떻게 백제인들이 고구려를 넘어서 말갈에 항복할 수 있나?
필자는 이 '말갈'을 고구려로 본다. 왜냐하면 백제가 무너진 뒤에도 고구려는 668년 망할 때까지 버티고 있고, 그러면 (지금의)요서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인들이 쉽게 건너와서 항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말갈이 동쪽 외진 곳에 사는 '이민족' 이고 고구려가 말갈에 적대적이라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항복해야 할 백제인들이 쉽게 건너갈 수도 없거니와 가다가 얼어죽거나 군사의 습격을 받아서 피살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기록의 말갈을 고구려로 본다면,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에 저항하던 때였으므로 고구려는 주저하지 않고 백제 난민들을 받아주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아울러 지금의 요서에서 고구려로 항복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음)
따라서 [통전]에 나오는 말갈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이며, 말갈은 말갈족이 스스로를 부른 말이 아니라 중국인들 - 한족漢族 - 이 동북쪽에 사는 우리 민족을 깔보고 깎아내리는 뜻에서 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은 또 어떤가? [삼국유사]에는 옛 문헌인 [삼국사]를 인용하며 [삼국사]에서 "백제 말년에 발해와 말갈과 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했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또 일연 스스로가 [삼국유사]에서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신라)의 해독害毒이다.'고 했다." 고 밝히고 있다.
자, 잘 뜯어보자. 신라인 스스로가 신라의 '북쪽'에 '말갈'이 있고, '남쪽'에 '왜인'이 있고, '서쪽'에 '백제'가 있어서 나라의 해독이라고 했다. 이 말로 보아, 이 글에 나오는 '말갈'은 삼국시대의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백제와 왜가 함께 거론되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있고, 왜(사실은 가야세력)는 남쪽에 있으면서 계속 싸우고 대립해 왔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왜 갑자기, 난데없이(!) '북쪽'에 '말갈'이 나오고 있을까? 우리가 알기로, 신라의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갈이라니!
이 문제도 이 때의 말갈은 고구려의 비칭이었고, 고구려가 북쪽에 있으면서 신라를 위협했다고 보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결국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은 고구려로 봐야 한다.
대진국을 깎아 내리려고 발해말갈이라는 말을 쓴 당나라와,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과 적대의식 때문에 말갈이라는 비칭을 고구려에 쓴 신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결국 이 기록에서의 말갈은 고구려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삼국사]에서 발해와 말갈(필자는 발해말갈이라고 생각한다)과 신라가 백제 말년에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말갈이라면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말갈'은 연해주와 고구려의 동북쪽에 처박혀 있었고, 백제가 망할 때에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엄연히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건너 뛰어서 백제의 땅을 신라와 나눠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 경우도 발해말갈을 고구려의 오기誤記로 보고 (백제가 무너진 뒤)고구려와 신라가 각각 백제의 옛 땅을 빼앗아서 다스렸다고 보던가, 아니면 대진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제 - 대륙백제 - 가 다스렸던 땅 가운데 일부를 자기 영토로 삼고 신라도 한반도에 있던 본국백제의 땅을 자기 땅으로 굳힌 사실을 이렇게 나타냈다고 봐야 한다.
4. 무쿠리, 복클리, 그리고 말갈
돌궐 카한의 비문을 보면, 돌궐 칸의 장례식에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온 "복클리"국의 사신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돌궐 쪽에서 "해가 뜨는 곳"이라면 동쪽이다. 이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로 고구려를 돌궐이 "복클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복클리는 복(Bok) + 엘리(eli) 즉 복(Bok)족의 나라(:엘리)라는 뜻이다. 그럼 이 '복' 족은 누구인가? 왜 돌궐은 고구려를 복클리라고 불렀을까?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의 지배민족이 맥貊 족이라고 불렸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高句麗에서 고高를 수식어로 보아 빼버리고, 구려句麗라는 말을 보면,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고 했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또, 고구려의 후예로 보이는 만주족의 말에서, 나라(국國)를 '구루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려는 '나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이름은 주로 중국 쪽에서 부른 이름이고, 원래는 맥貊 구루, 맥 고리, 맥굴리라고 불렸을 수 있다. 그걸 시사해 주는 것이 동로마의 역사가 데오필라스 - 시모카테스가 거론하고 있는 '모으쿠리'나 '무쿠리'라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동방에 투르크족 못지 않은 용맹한 민족이 산다고 했는데, 해뜨는 곳에 살며 이름을 '무쿠리' 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맥족의 나라'라는 뜻에서 맥구루, 맥코리 라고 한 것이 무쿠리, 모으쿠리라고 발음이 다듬어져서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째 말갈이라는 말의 발음과 비슷하지 않은가? 말갈이라는 말은 발음만 따온 이두문일 수도 있다! 무쿠리, 무구릭, 무구루, 무굴, 물길, 말갈 하는 식으로.
또, 티베트 문서에서도 '무그릭'이라는 동방민족에 대한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범어잡명梵語雜名]이라는 기록에서는 모쿠리라는 민족의 이름이 나오는 만큼, 똑같은 한 나라가 중국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유목민 세계나 티베트, 서역, 동로마에는 맥족의 나라라는 뜻인 무쿠리,무그릭, 모쿠리, 모으쿠리로 알려졌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말갈이라는 말도 이 무쿠리를 한문으로(발음만) 옮긴 것이 아닐까? 따라서 말갈인 = 고구려인 이라는 필자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왜 돌궐인은 고구려를 복클리, 뵈클리라고 불렀을까? 맥貊이라는 한자를 다시 살펴봐 주시기 바란다. 이 글자는 '박'으로도 읽을 수 있다.
따라서 맥클리라는 말은 박클리라고 읽을 수도 있다. 이렇게 보면 고구려는 밝은 나라라는 말을 줄여서 '밝구루'라고 읽었겠고, 그것이 박크리, 박클리. 복클리라고 발음이 바뀌어서 내려져 왔다고 볼 수 있다.
아니면 동쪽의 나라라는 뜻으로 밝은 구루를 밝클리라고 한 것이 복클리로 소리가 바뀌었거나.(동쪽에서 해가 떠오르므로 '밝다'라는 뜻이 들어간다)
결론 = 역사서에 나오는 '말갈인'은 고구려 인이었다. 고구려라는 말도 한자를 쓸 때에나 들어간 말이고, 실제로는 맥클리, 복클리, 무구루(= 말갈, 물길)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이 이민족이었다는 주장은 이제 고쳐져야 한다.
2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6:45:40
당서에 나오는 말갈 / 이재환 / 2000년 8월 5일
[들어가는 말]
지금까지 한국역사 학계에서는,'말갈靺鞨'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이민족(?)'에 대해 많은 논란이 나돌았다. 어떤 학자는 [삼국사기]에 나타나는 말갈을 옥저나 동예, 동부여라고 하고, 어떤 학자는 서주西周 때의 기록에도 나타나는 숙신肅愼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학자는 숙신肅愼에서 물길勿吉로, 물길勿吉에서 말갈靺鞨로 이름이 바뀌어져 온 이민족이라고 주장한다.
지금의 한국 사학계는 딱 한가지는 의견이 일치한 상태인데, '말갈'은 어디까지나 고구려와 발해에 복속된 '이민족異民族' 일 뿐이며, 야만적이었고 우리 역사와는 별다른 관계가 없다는 주장이다.
이 단정 때문에 아직까지 발해사는 한국 역사가 아니라는 망발이 나오고 있으며 고구려의 주민구성 문제도 완전히 해결되지는 않고 있다.
필자는 과감히 '말갈'은 곧 고구려이며, 우리 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것도 야만인이 아니라 문화민족이었으며 대진국大振國은 한국의 역사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싶다. 또 시대에 따라서 '말갈'이라는 말이 다르게 쓰였다는 사실도 검증하고 싶다.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갈
대진국(발해) 역사를 다룰 때 가장 골치아픈 문제 가운데 하나가 '과연 대진국은 얼마나 결속력이 있었나?' '혹시 지배층과 피지배층 사이에 갈등이 있었던 게 아닐까?'는 문제이다.
이런 주장은 러시아나 중국학자들이 걸핏하면 들고 나오는 것인데, 까닭인즉 '고구려 유민'인 지배층이 '말갈인'을 피지배층으로 다스렸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구당서舊唐書]나 [신당서新唐書]에 "대조영이 당에서 도망쳐서 옛 고구려 땅에 들어가 그곳의 말갈인들과 함께 나라를 세웠다."는 구절과, "발해(대진국)가 여러 말갈을 복속시켰으나 흑수말갈만은 당에 부탁하여 당에 부용(:속국이 됨. 이 경우는 형식적임)하였고, 발해에 맞섰다."는 구절을 '증거'로 든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먼저 '고구려의 옛 땅에 남아있던 말갈인' 이 누구였나부터 살펴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서기 668 년으로 돌아가 보자.
당은 분명 고구려의 도읍인 평양성(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라 요하 하구에 있는 평양성)을 무너뜨렸고 평양성을 약탈하고 고구려의 역사책이나 각종 서적을 모아 불태워 버린 뒤 궁궐과 무덤, 비석, 건물들을 깡그리 부숴버린다.
아울러 그들이 손에 넣은 성은 모두 그런 식으로 처리했는데 이 때문에 지금까지 평양성의 유물이나 유적이 제대로 전해지지 않고 있다.
기록에는 당이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했고 점령한 땅의 왕족, 귀족, 백성들을 모두 당에 끌고 갔다고 적혀 있다. 따라서 '철저히 파괴되고 유물과 유적이 안 남아 있으며 백성들이 깡그리 끌려간 곳'은 어디까지나 당이 차지한 곳일 뿐이지, 당이 차지하지 못한 고구려의 땅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필자는 당이 점령한 곳은 어디까지나 요령성과 평안도, 황해도 정도로 보고 있다. 그 까닭은 간도지방에 있는 국내성國內城이 너무나 온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기록대로라면 만약 당이 국내성을 점령했다면 국내성도 깡그리 불타고 부숴져야 했을 것이다. 특히 왕과 귀족들의 무덤, 요새인 성벽, 광개토태왕비 등이 약탈 대상이 되어 파헤쳐지고 깨지고 부숴져야 했을 텐데 그렇지가 않고 오히려 너무나 온전히 남아 있다.
이 사실은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는데, 다름 아닌 고구려의 대다수 백성들은 끌려가지 않고 계속 고구려 땅에 남아있었을 가능성과(물론 당이 차지하지 못한 곳에서만) 당이 손에 넣은 곳은 도읍인 평양성과 당과 가까운 요령지방과 평안도, 황해도 정도고 나머지 땅들은 손에 넣지 못했을 가능성이다.
당의 군대는 대부분이 보병이어서, 고구려의 기마병이나 백제의 수군처럼 재빨리, 효과적으로 먼 곳까지 움직을 수가 없었다. 또한 전투력에 있어서도 뒤떨어졌다.
그래서 간신히(남생의 배신으로) 당나라와 가까운 일부 지방과 평양성, 그리고 요령과 가까운 평야지대인 평안도와 황해도만을 손에 넣고 "고구려의 도읍이 무너졌으니 고구려 전체를 손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다." 고 여겨서 고구려가 망했다고 적은 것이 아닐까?(이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항복한 성과 항복하지 않은 성의 기록으로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자기가 점령한 곳에 살고 있던 주민들만 당으로 끌고 갔을 것이다. 이 가설이 사실이라면, 당나라에 나오는 '말갈'이라는 말도 달리 봐야 한다.
즉 '고구려 장수'인 대조영에게 지배를 받은 '이민족'이 아니라 고구려가 무너진 뒤에도 옛 땅에 남아서 계속 살았고 당에 저항했던 고구려 유민들로 말이다.(단, 아무르강 북쪽에 사는 흑수말갈은 빼고)
이들은 고구려가 무너지기는 했어도 당의 손길도, 신라의 손길도 미치지 못했기에 자유롭게 살고 있었고 힘의 공백 상태였기 때문에 군벌軍閥들처럼 몇 조각으로 나뉘어서 살았다고 볼 수 있다.
예전에 고구려의 장군이다 태수였던 사람들이 지방에서 왕노릇을 하면서 사실상의 지방정권을 세웠던 것이 당唐이나 훗날 [당서唐書]를 정리한 송나라 사람들에게 '여러 말갈'로 불리게 된 것이 아닐까?
대조영을 비롯해서 대진국(발해)의 황제들이 여러 말갈을 복속시켰다는 기록도 바로 이런 지방 정권들을 하나로 통합해 가는 과정에서 무력을 쓴 사실을 나타낸 것일게고.
대조영이 고구려의 옛 땅에서 나라를 세울 때, 남아 있던 고구려 사람들이 찬성해서 이를 지지했기 때문에 대진국(발해)이 빨리 성장할 수 있었고 빨리 고구려의 옛 땅을 회복하며 하북성이나 산동으로 쳐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본다.
결국 [당서唐書]에 나오는 말갈靺鞨이란 남아있던 고구려 사람들을 깔보는 비칭일 뿐이며, 대진국과는 별종인 흑수말갈까지 싸잡아서 말갈이라고 부르는 사실로 보아 말갈은 나라 이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자기들 동북쪽에 살던 민족을 싸잡아서 부르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발해말갈渤海靺鞨 이라는 말도 발해가 스스로를 부른 이름이 아니라, 중국인들이 볼 때 대진국이 발해만의 땅까지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발해만에 있는 말갈족'이라는 뜻으로 부른 멋대로의 이름일 뿐이다.
3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6:46:34
통전과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 / 이재환 / 2000년 8월 5일
중국 역사책인 [통전通典]을 보면,'이상한' 기록이 나온다.
"본국(백제가) 무너지자 성 밖에 남아있던 무리들은 차차 약해져서 돌궐과 말갈로 흩어져서 투항해 버렸으며, 군주인 부여숭扶餘崇은 고국에 돌아갈 수 없음으로 하여 마침내 백제는 소멸하였다."
만약 이 기사의 백제를 한반도의 백제라고 본다면, 굳이 본국이라는 말을 쓸 필요가 없는데도 본국이라는 말을 쓴 것이 이상하며 한반도에'만' 있었다는 백제가 어째서 '돌궐과 말갈'에 항복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삼국사기]에는 백제왕 가운데 숭崇(부여扶餘는 백제 왕실의 성임. 줄여서 여餘라고 불렀다) 이라는 이름을 가진 군주가 없다. 우리가 아는 돌궐은 몽골초원에 있었고, '말갈'은 고구려 동쪽인 연해주와 아무르강 북쪽에 있었으므로 한반도 서쪽에 있던 백제인들이 가서 항복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 백제가 백제인들이 중국 땅에 건너가서 세운 담로백제라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부여숭은 담로 백제의 왕이었지 본국백제의 왕은 아니었으며, 성을 만리장성으로, 백제를 지금의 요서지방 일부에 남아있던 담로백제로 본다면, 요서에서 몽골초원으로 넘어가기는 쉬운 일이므로 무리없이 설명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말갈'이다. 우리가 아는 말갈은 고구려와는 생판 '남'이고 이민족(?)이다. 그것도 연해주나 아무르강 동북쪽에 살고 있는 민족이다. 그런데 어떻게 백제인들이 고구려를 넘어서 말갈에 항복할 수 있나?
필자는 이 '말갈'을 고구려로 본다. 왜냐하면 백제가 무너진 뒤에도 고구려는 668년 망할 때까지 버티고 있고, 그러면 (지금의)요서지방에 남아있던 백제인들이 쉽게 건너와서 항복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약에 말갈이 동쪽 외진 곳에 사는 '이민족' 이고 고구려가 말갈에 적대적이라면, 고구려를 통과해서 항복해야 할 백제인들이 쉽게 건너갈 수도 없거니와 가다가 얼어죽거나 군사의 습격을 받아서 피살당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 기록의 말갈을 고구려로 본다면, 백제가 고구려와 함께 당에 저항하던 때였으므로 고구려는 주저하지 않고 백제 난민들을 받아주었을 것이라는 추리가 가능하다. 아울러 지금의 요서에서 고구려로 항복하기는 아주 쉬운 일이다.(시간도 별로 걸리지 않음)
따라서 [통전]에 나오는 말갈은 고구려를 가리키는 말이며, 말갈은 말갈족이 스스로를 부른 말이 아니라 중국인들 - 한족漢族 - 이 동북쪽에 사는 우리 민족을 깔보고 깎아내리는 뜻에서 쓴 말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은 또 어떤가? [삼국유사]에는 옛 문헌인 [삼국사]를 인용하며 [삼국사]에서 "백제 말년에 발해와 말갈과 신라가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했다."고 적혀 있다고 했다.
또 일연 스스로가 [삼국유사]에서 "신라 사람들은 '북쪽에는 말갈이 있고, 남쪽에는 왜인이 있고, 서쪽으로는 백제가 있으니 이것이 나라(신라)의 해독害毒이다.'고 했다." 고 밝히고 있다.
자, 잘 뜯어보자. 신라인 스스로가 신라의 '북쪽'에 '말갈'이 있고, '남쪽'에 '왜인'이 있고, '서쪽'에 '백제'가 있어서 나라의 해독이라고 했다. 이 말로 보아, 이 글에 나오는 '말갈'은 삼국시대의 국가를 가리키는 말이 된다. 백제와 왜가 함께 거론되기 때문이다. 백제는 신라의 서쪽에 있고, 왜(사실은 가야세력)는 남쪽에 있으면서 계속 싸우고 대립해 왔으니 그렇다 하더라도 왜 갑자기, 난데없이(!) '북쪽'에 '말갈'이 나오고 있을까? 우리가 알기로, 신라의 북쪽에는 고구려가 있지 않았던가? 그런데 말갈이라니!
이 문제도 이 때의 말갈은 고구려의 비칭이었고, 고구려가 북쪽에 있으면서 신라를 위협했다고 보면 자연스럽게 풀린다. 결국 삼국유사에 나오는 말갈은 고구려로 봐야 한다.
대진국을 깎아 내리려고 발해말갈이라는 말을 쓴 당나라와, 고구려에 대한 열등감과 적대의식 때문에 말갈이라는 비칭을 고구려에 쓴 신라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것이다.
결국 이 기록에서의 말갈은 고구려의 또다른 이름이라고 봐야 한다. [삼국사]에서 발해와 말갈(필자는 발해말갈이라고 생각한다)과 신라가 백제 말년에 백제의 땅을 나누어 차지했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상식적으로' 생각하는 말갈이라면 백제의 땅을 나누어 가질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아는 '말갈'은 연해주와 고구려의 동북쪽에 처박혀 있었고, 백제가 망할 때에는 고구려라는 나라가 엄연히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를 건너 뛰어서 백제의 땅을 신라와 나눠 가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역시 이 경우도 발해말갈을 고구려의 오기誤記로 보고 (백제가 무너진 뒤)고구려와 신라가 각각 백제의 옛 땅을 빼앗아서 다스렸다고 보던가, 아니면 대진국이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백제 - 대륙백제 - 가 다스렸던 땅 가운데 일부를 자기 영토로 삼고 신라도 한반도에 있던 본국백제의 땅을 자기 땅으로 굳힌 사실을 이렇게 나타냈다고 봐야 한다.
4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6:47:25
무쿠리, 복클리 그리고 말갈 / 이재환 / 2000년 8월 5일 -------------------------------------------------------------------------------- 돌궐 카한의 비문을 보면, 돌궐 칸의 장례식에 "해가 뜨는 곳"으로부터 온 "복클리"국의 사신 이야기가 나온다. 돌궐 쪽에서 "해가 뜨는 곳"이라면 동쪽이다. 이 동쪽에는 고구려가 있었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바로 고구려를 돌궐이 "복클리"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복클리는 복(Bok) + 엘리(eli) 즉 복(Bok)족의 나라(:엘리)라는 뜻이다.
그럼 이 '복' 족은 누구인가? 왜 돌궐은 고구려를 복클리라고 불렀을까?
여기서 우리는, 고구려의 지배민족이 맥貊 족이라고 불렸다는 주장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구려高句麗에서 고高를 수식어로 보아 빼버리고, 구려句麗라는 말을 보면, 고구려말로 성城을 '구루'라고 했다는 기록과 상통한다. 또, 고구려의 후예로 보이는 만주족의 말에서, 나라(국國)를 '구루니'라고 한다. 그렇다면 구려는 '나라', '도성'이라는 뜻으로 풀 수 있다.
그렇다면 고구려라는 이름은 주로 중국 쪽에서 부른 이름이고, 원래는 맥貊 구루, 맥 고리, 맥굴리라고 불렸을 수 있다. 그걸 시사해 주는 것이 동로마의 역사가 데오필라스 - 시모카테스가 거론하고 있는 '모으쿠리'나 '무쿠리'라는 나라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는 동방에 투르크족 못지 않은 용맹한 민족이 산다고 했는데, 해뜨는 곳에 살며 이름을 '무쿠리' 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맥족의 나라'라는 뜻에서 맥구루, 맥코리 라고 한 것이 무쿠리, 모으쿠리라고 발음이 다듬어져서 전해진 것일 수도 있다. 어째 말갈이라는 말의 발음과 비슷하지 않은가? 말갈이라는 말은 발음만 따온 이두문일 수도 있다!
무쿠리, 무구릭, 무구루, 무굴, 물길, 말갈 하는 식으로.
또, 티베트 문서에서도 '무그릭'이라는 동방민족에 대한 기록이 전해 내려오고, [범어잡명梵語雜名]이라는 기록에서는 모쿠리라는 민족의 이름이 나오는 만큼, 똑같은 한 나라가 중국에는 고구려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고 유목민 세계나 티베트, 서역, 동로마에는 맥족의 나라라는 뜻인 무쿠리,무그릭, 모쿠리, 모으쿠리로 알려졌다고 봐야 한다.
어쩌면 말갈이라는 말도 이 무쿠리를 한문으로(발음만) 옮긴 것이 아닐까? 따라서 말갈인 = 고구려인 이라는 필자의 해석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럼 왜 돌궐인은 고구려를 복클리, 뵈클리라고 불렀을까?
고대 튀르크(투르크)말에서는 'ㅁ'음을 'ㅂ'음으로 읽는 경우가 많았다.(경상도에서 'ㅆ'발음을 'ㅅ'발음으로 읽고 전라도에서는 '김치'를 '짐치'로 읽듯이) 따라서 튀르크 비문에서 '뵈클리'라고 읽었다면, 실제 발음은 '뫼클리'였을 가능성이 있다. 즉 '맥클리', '맥골리', '맥[고올리]'이다. 따라서 무쿠리, 모우크리와 같은 발음인 것이다. 튀르크인은 고구려인에게서 나라 이름을 듣고 옮긴 것일 것이며 그렇다면 우리는 고구려인이 스스로를 '맥구루', '맥골리'인이라고 불렀다고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결론 = 역사서에 나오는 '말갈인'은 고구려 인이었다. 고구려라는 말도 한자를 쓸 때에나 들어간 말이고, 실제로는 맥클리, 복클리, 무구루(= 말갈, 물길)라고 불렀을 가능성이 높다.
말갈이 이민족이었다는 주장은 이제 고쳐져야 한다. --------------------------------------------------- 방주인 주 = 고구려와 발해를 무쿠리, 무쿨리, 뵈클리, 복클리 등으로 불렀을 가능성에 대해서 돈황문서에 대한 기록과 초원의 길 사이에 존재했던 나라들의 문서를 분석하여 정리한 자세한 자료가 있습니다. 서울대학교 국사학과 노태돈 교수님이 쓰신 '고구려사 연구' 부록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2001. 6. 9 일부 수정)
5 / 글쓴이 : 역사21 / 2005-03-19 오전 06:48:01
남북국 시대 말기에 나오는 [말갈(靺鞨)]의 정체 / 이재환 --------------------------------------------------------------------------------
(서기 922년)…2월에 말갈(靺鞨)의 별부(別府)인 달고(達姑)의 군사가 북쪽 변경에 와서 노략하였다. 이때 태조의 장수 견권(堅權)이 삭주(朔州)를 지키고 있다가 기병(騎兵)을 거느리고 쳐서 크게 깨뜨리니, 한 필의 말도 돌아가지 못하였다. 왕(신라의 경명왕 - 옮긴이)이 기뻐하여 사신을 시켜 편지를 보내 태조에게 감사하였다. /『삼국사기』「신라본기」권 제 12 경명왕조(條)
이 삼국사기의 기사에는 한가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고려'의 "북쪽 변경"에 '발해(대진국)'가 아닌 말갈人 달고의 군사가 와서 노략질을 합니다.
"발해가 무너져서 통제력을 잃은 '말갈족'이 고려를 노략질한 게 아니냐?"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진(발해)은 서기 926년 거란(키타이)족이 세운 요(遼)나라에게 무너집니다. 위의 기사(記事)는 서기 922년에 일어난 일이므로 진(발해)이 무너지기 4년 전의 일입니다. 따라서 진(발해)의 통제가 없어서 "말갈"족 국사가 고려를 노략질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위 기사에서 "말갈"은 진(발해)나라로 보아야 하고, "달고의 군사"는 진(발해)나라 군사로 보아야 합니다. 제 생각입니다만 평소에 신라와 사이가 나빴던 진(발해)나라가 신라가 작은 나라로 굴러 떨어지고 고려, 백제(후백제)로 나뉘어서 서로 싸우기에 바쁘다는 사실을 알고, 이번 기회에 신라를 쳐서 통합하겠다고 생각하진 않았을까요? 그래서 군사를 남쪽으로 돌려 고려를 쳤고 고려는 이를 격파합니다.(또는 진나라가 거란 - 키타이 - 을 피해 남쪽으로 내려가겠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죠. 당시 진나라 - 발해 - 는 요나라에 시달리고 있던 때니까)
고려가 "말갈"(사실은 진나라 군대)을 격파함으로서 - 결과적으로 - 진(발해)와 사이가 나빴던 신라는 한숨 돌리게 되었고(만약 고려군이 격파당했다면 다음은 신라와 (후)백제 차례였으니까요), 그래서 신라 경명왕이 "기뻐하여 사신을 시켜 편지를 보내 태조(고려태조 왕건)에게 감사"하였던 것입니다.
흔히 '말갈'은 진(秦) 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기 전까지는 '숙신'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한(漢)나라 때 이름을 '읍루((才+邑)婁)'로 바꿨고, 북위(北魏) 시절에는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을 쓰다가 수·당대에 와서야 비로소 '말갈'로 불리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또 우리는 한국 기록이건 중국 기록이건 '말갈'은 다 똑같은 계통이며, "숙신 → 읍루 → 물길 → 말갈" 이라는 공식은 이 두나라의 기록에 나오는 모든 말갈에게 똑같이 적용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말갈'이라는 이름이 나온 뒤에는 더 이상 '숙신'이라는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고 배우고 있지요. 말갈이 곧 숙신의 후예이기 때문에 '말갈'이 나온 이상 '숙신'이라는 이름이 필요없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삼국사기』「고구려본기」와 광개토태왕비의 비문(碑文)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중국 역사서와는 달리『삼국사기』는 '말갈'과 '숙신'을 따로 적고 있고, 광개토태왕 비문은 아예 '말갈' 대신 숙신을 적고 있으니까요.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 ↓
『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는 태조대왕 69년인 서기 121년에 '숙신'이 나옵니다. 그런데 뭔가 이상합니다. 중국이 '말갈'을 적는 원칙 ― 진秦대까지만 '숙신'이라고 적고 한漢대 부터는 '숙신'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적는다는 ―을 어기고 있습니다. 진(秦)이 망하고 320여년은 넘었는데도 '숙신'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있습니다.
▼"숙신(肅愼)의「사신」이 와서 자줏빛 여우 가죽옷 및 흰 매와 흰 말을 바쳤다. 왕이「잔치를 베풀어 그들을 위로해서 보냈다.」"
― 『삼국사기』「고구려본기」태조대왕 69년(서기 121년)
이 기록을 잘 보십시오. 우선 '숙신'은 고구려 왕에게 '사신'을 보내 예물을 바칩니다. "사신"은 한 '나라'나 '독립세력'이 다른 '나라'나 '독립세력'에게 보내지 한 나라 안에서, 이미 복속된 집단이 중앙정부에게 보내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만약 고구려 시조 추모왕에게 복속된 '말갈'이 숙신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의 서울에 사람을 보냈다면 "사신"이라는 말을 쓸 리가 없지요.(숙신이 보낸 사신이 고구려의 중앙정부에 조공을 바치려고 했다면 - 조공은 공무역 公貿易[ : 나라와 나라 사이의 무역 ] 이므로 - 짐승 가죽이나 말을 아주 많이, 한꺼번에 가져와서 바치고 그 대신 고구려에게서 '답례품'을 얻어갔을 것입니다. 또 고구려에 '세금'을 바치려고 했다면 "여우 가죽옷, 흰 매, 흰 말"은 너무 규모가 적은 '세금'이므로 '말갈' 세력이 고구려에 세금을 바쳤다고 풀이할 수도 없습니다)
이는 이 기록에 나타나는 "숙신"이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말갈과는 달리 고구려에 복속되지 않은 '독립국(國)' 내지는 '독립 세력'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또, 고구려 왕이 숙신 사신들을 위해 잔치를 베풀고 그들을 위로해서 보냈다는 사실은 이미 복속되어 '신하'가 된 고구려본기의 말갈과는 달리(단순히 지방의 공물을 바치러 온, 이미 '신하'가 된 말갈인이라면 왕이 직접 잔치를 베풀고 위로할 까닭이 없지요) 숙신족이 '잘 대접해서 돌려보내야 하는 외부 손님'이었다는 것을 알려주죠. 둘 모두 고구려본기에서 고구려군을 따르는 '말갈 군사'를 숙신족으로 볼 수 없게 하는 근거입니다.
숙신족이 '고구려 말갈'과는 달리 외부인이고 고구려의 통제를 안 받았다는 증거는 또 있습니다.「고구려본기」 서천왕(西川王) 조(條)에는 서기 280년에 "숙신이「침범」해와 (고구려의) 변경(국경지대, 변방) 백성들을 죽였다. … 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 …「이웃의 적」이 우리 강토를 어지럽히게 하였도다 … 용맹한 장수를 얻어「바깥 적들의 침공」을 꺾으려 하여 묻노니 … .' 라고 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여기서 숙신은
1. 고구려의 국경지대("변경")을 군사를 이끌고 "침범"하고(만약 내부의 말갈 반란군이라면 그냥 '반란'이 일어났다고 적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왜 하필이면 변방입니까? "침범"은 외부세계의 적이 '국경' 안으로 들어와서 군사활동을 벌일 때에나 쓰는 말이지, 내란이나 내전에 쓰는 말은 아닙니다)
2. 고구려왕부터가 숙신을 고구려의 "이웃"에 있는 "적"이라고 하고 그들이 "우리(고구려) 강토를 어지럽"힌다고 하고 있습니다.(내부 반란군일 경우 그냥 반란군이나 '적도賊徒- 도적떼 -', '폭도'가 나라를 어지럽힌다고 하지, "이웃"어쩌구 말하지는 않고 "우리 강토"라고 해서 특별히 '우리 땅이 당하고 있다.'는 식으로 말하지도 않습니다)
3. 특별히 고구려 "바깥"에 있는 "적"이라고 숙신을 부릅니다.(만약 고구려에 복속된 말갈 반란군이라면 "바깥"이라고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이상과 같은 사실로 볼 때 『삼국사기』에 나오는 말갈은 숙신과 별개이며 중국 기록이 말하는대로 '숙신'이 한(漢)대가 되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서기 280년은 서진西晉 시대니까요) 그 뒤에도 계속 존속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서천왕의 아우인 달가가 장수로 나서서 숙신을 치고 "단로성(檀盧城)을 함락시키고 그 추장을 죽였으며, 주민 6백여 가(家) ― 1가(家)를 1호(戶)로 쳤을 때, 1호(戶)는 5 ∼ 6명이 모여서 이루어지므로 600×5 = 3000, 600×6 = 3600이다. 따라서 6백여 가(家)는 약 3000여명 ∼ 3600여명이다 ― 를 부여의 남쪽 오천(烏川)으로 옮기고, 항복한 마을 6 ∼ 7 개는 부용(附庸 : 속국)"으로 삼는 전과를 올리기는 했지만(서기 280년의 일임) 그 뒤에도 숙신은 여전히 고구려와는 별도로 존재하면서 고구려의 '정벌 대상'이 됩니다.
서천왕의 시대로부터 120여년이 지난 뒤인 서기 398년 광개토태왕이 '숙신'을 쳐서 남녀 300여명을 붙잡아오고 조공을 바치게 했다는 사실이 광개토태왕비문에 적혀 있죠.(서기 280년 달가가 숙신을 칠 때에는 3000여 명을 잡아오고 그와는 별도로 6 ∼ 7개의 마을에서 항복을 받아냈으며 숙신의 성채까지 함락시켜야 할 정도로 숙신의 세력이 컸던 데 비해 광개토태왕이 왕위에 있던 서기 398년에는 300여명을 잡아오고 조공을 받았다고 말하는 데에서 그치고 있어 120년 만에 숙신의 세력이 약해졌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한국의 역사 기록에서도, 금석문(金石文)에서도 숙신은 깨끗이 사라집니다. 중국 사서나『삼국사기』에 기록으로나마 남아 있던 부여와는 달리 이름 자체가 사라지죠. 그 뒤 서기 5세기에 고구려의 동북쪽과 정(正)북쪽에서는 '물길'이라는 존재가 나타나 고구려와 대립합니다.(물론 서천왕대인 서기 3세기부터 북위 시절인 서기 5세기까지도 '말갈'은 기록에 계속 나오며 물론 고구려가 망할 때까지 '말갈병'은 계속 나옵니다 , '숙신'과는 달리 고구려와 함께 행동하고 한 번도 한 번도 반란을 일으키지 않습니다. 이 점도 말갈은 숙신이 될 수 없음을 알려주고 있죠. 만약 적대적인 숙신족을 병사로 삼았다면 툭하면 반란을 일으키거나 달아났을 테니까요)
그 '물길'은 수·당 시대에 와서는 "고구려의 북쪽"에 있으며 "숙신의 땅"에 살고 "동쪽은 바다에 이르고 서쪽은 돌궐과 접"하는(몽골초원 동쪽에서부터 오호츠크 해까지로 추정. 동東 시베리아의 남부 지역이다)『수서』,『구당서』,『신당서』의 '말갈'이 됩니다.(『신당서』에 말갈이 북위 때에는 물길勿吉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나와 있음)
이들 '말갈(靺鞨)'이 수나라가 고구려를 헐뜯으면서 언급한 '핍박받는 말갈'이고 당 태종 이세민(李世民)이 고구려를 칠 때 '선발대'로 동원한 '말갈 용병'이며 대조영이 진(발해)을 세우고 고구려의 옛 땅을 하나하나 회복하며 신라·당나라와 싸울 때 앞장서서 반대하고 당나라와 손잡고 진(발해)을 방해한 '흑수말갈'인 것입니다.
결국 <숙신 → 물길 → 말갈>이라는 공식을 적용할 수 있는 '이민족'인 '말갈'은 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숙신'이고 중국 사서에 나오는 흑수말갈 뿐이지 『삼국사기』에서 고구려·백제·신라와 접촉하는 '말갈'은 아니죠.('읍루[(才+邑)婁]'라는 이름은 ―『신당서』에 따르면 ― 흑수말갈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숙신의 별명이 읍루였다고 하는군요)
결론을 말씀드리겠습니다.『삼국사기』「고구려본기」에 나오는 '숙신'은 고구려본기의 말갈이 아니며 '말갈'은 숙신과는 엄연히 다른 '족속'입니다. 또 이 '숙신'이 나오고 사라진 시기와 그들의 활동으로 보아, 그리고 그들이 살았던 곳으로 보아 고구려와는 완전히 별개의 종족이며(열국시대에 와서는 그렇게 되었다는 얘기죠)
고구려와 여러 번 싸우고 힘이 약해졌으나 광개토태왕이 군사를 이끌고 이들을 정복할 때까지는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숙신이 한국 역사서의 기록과 금석문(돌, 나무, 금속에 새긴 옛 기록)에서 사라진 뒤에는 숙신의 옛 땅에서 '물길'이 일어나 고구려를 괴롭혔고, 이들은 수·당대에는 말갈·흑수말갈이 되어 수·당을 돕고 고구려와 진(발해)을 방해합니다. 따라서 "말갈은 어느 기록에 나오건 다 똑같은 말갈'이며, 말갈은 모두 숙신의 자손이다."라는 중국 역사학계의 주장은 고쳐져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