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종황제 칙령 (카페명 : 여행 사진 모음)
고종황제 칙령
고 박정희 대통령 휘호
당시 신문들 (출처- 카페명 : 여행 사진 모음)
이준 열사 사망 관련 자료들
이준 열사는 1907년 7월 14일 순국했으며, 사인으로는 자살설과 병사설 두 가지가 있다. 네덜란드 대표언론 <데 텔레그라프(De Telegraaf)>는 1907년 7월 17일자에서 "이준은 볼에 종기를 앓고 있었고 이를 수술로 제거했는데 불행하게도 이 수술의 충격으로 죽음을 맞이하게 됐다"고 보도한 반면,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는 1907년 7월18일자 호외를 발간, 이준 열사가 자결했다고 보도했다. 한국 언론의 정식보도는 7월19일자. 그러나 당시 발행된 사망 진단서에는 사인(死因)이 없다. 1907년 7월 14일 한국에서 온 이준이라는 이름의 한 기혼 남성이 죽었다는 내용이 전부다. 일본 대표로 평화회의에 참석한 스즈키 대사는 7월 17일 이준의 사망 사실을 알리는 친필 서한에서 단독(丹毒, 상처에 세균감염)에 의한 사망과 자살설 두 가지 모두 말한 것으로 기록했다. / <이준 열사 기념관 자료 참조 정리>
네델란드 당국이 발행한 사망진단서인데 병명이 기록되어있지 않다.
지금까지 걸었던 태국기를 보여주고 있는 이기항 송창주 부부 (블로그명 : 밝은 미래)
개관자 이기항 송창주 부부 ( 블로그명 : 밝은 미래)
이와마츠가 기증한 천 마리 종이학과 평화 기원 메시지. 1999년 5월 13일 일본 나가자키 대학 이와마츠 명예교수는 손수 접은 종이학 천 마리를 갖고 그의 체취가 남아있는 '어떤 곳'을 찾아 한일 과거사 문제에 대해 깊이 사죄했다. 이와마츠를 비롯 일본인 관람객들은 "용서를 구한다" "잊지 말자" "다시는 이런 일이 없도록 하자"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헤이그 외곽 묘지의 이준 열사 무덤 (블로그명 : 화려한 시절)
「헤이그」교외 「니에·아이큰다인」공동묘지 안에 있는 이준(李儁)열사의 묘지는 1977년 흉상과 묘비(墓碑)가 제막되어 한결 정화돼 있다. 외무부의 「李열사 묘적(墓跡)정화사업」은 3천 5백만원을 들여 이루어졌다. 조각가 백문기씨(전 이대(梨大)교수)사 높이 90cm·어깨 폭 72cm·가슴두께 40cm의 청동 흉상(胸像)과 높이 2·3m의 조석묘비, 그리고 애석(艾石)으로 만든 상석(床石)과 화강암 석병풍, 대리석 화병(花甁)·향로(香爐)들을 모두 서울에서 제작, 옮겨왔다. 묘역바닥과 울타리에 쓴 화강암은 거울같이 비치도록 7천번의 물갈기로 곱게 갈았다. 습도가 유달리 높은 「네덜란드」지역에서 돌의 산화를 막고 이끼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李열사의 흉상은 분사(憤死) 며칠전 「헤이그」에서 찍은 마지막 사진에 따라 수염이 있는 기품있는 모습이다. 열사의 묘지를 찾는 한국인의 발걸음은 그침이 없고 싱싱한 꽃다발도 끊이지 않고 놓인다.「파리」의 유학생이건, 서독에서 일하는 광부들이건 한국인들은 이역(異域)의 외로움과 고달픔을 달래고 뜨거운 동족애를 확인하려는 듯이 열사의 묘지를 찾는다. 기자가 李열사의 묘역의 묘역을 찾아들었을 때에도 두 어린이를 이끈 한 한국인 주부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72년엔 저녁 늦게 닫혀버린 공동묘지의 담을 넘어 들어간 한국인 청년들이 출동한 경찰에 연행되었다가 「단지 애국열사의 묘역에 참배하려는 순수한 뜻」이 판명되어 석방, 화제가 된 알까지 있었다. 묘역은 원래 가로 3·6m, 세로 2m가 못돼 몹시 협소했고 묘비의 국명조차 잘못 표기돼 있었다. 확장은 「네덜란드」정부와 공동묘지측의 협조로 이루어졌다. 인접 묘지의 연고자들을 설득, 이들의 묘지를 옮기고 8필지의 공간을 확보해야 했기 때문이다. - 1978. 6. 30 중앙일보 - -이 근 량(李根諒) 특파원-
이준 열사의 유해는 헤이그 외곽의 한 묘지에 묻혀 있다가 1963년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이 묘지에는 열사의 묘비와 흉상이 여전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준 열사가 도착한 헤이그 역
감리교회 이준 열사의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 구입
독실한 감리교인으로서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대한독립만세”를 부르짖으며 순국했던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가 헤이그에 세워진다. 최근 기독교대한감리회 중앙연회 박영준 감독(이준 열사 기념교회 추진위원회 위원)과 상동교회 서철 목사는 네덜란드 현지를 방문, 헤이그에 위치한 ‘레잇스켐담 천주교회’를 이준 열사 순국 100주년 기념교회로 재건축하기 위한 계약을 체결했다. 이날 서명식은 현지 공증 변호사가 참석한 가운데 진행됐으며, 신경하 감독회장의 위탁을 받은 서철 목사가 계약전권위임서에 서명함으로 이뤄졌다. 레잇스켐담 천주교회는 77만 유로에 구입하기로 했다. 원화로 9억5천만원 상당이다. 앞으로 재건축 등의 마무리 작업은 네덜란드 헤이그한인교회 이창기 목사가 맡아 수행한다. 이준 열사 기념교회 설립 계획은 지난 2005년부터 추진돼 왔으며, 작년 제27회 기감 총회에서는 3월 4일을 이준 열사 기념주일로 정했다. 이준 열사 기념교회 설립을 위해 기감 산하 전국교회는 오는 3월 4일 이준 열사 기념주일을 통해 특별헌금을 받을 예정이다. 중앙연회는 기념주일에 앞서 각 연회 2백여 교회에 이준 열사 기념주일 특별헌금 봉투를 배부했으며, 신경하 감독회장도 “기념교회 건립헌금에 적극 동참해 달라”고 서신을 전했다. 2007년은 이준 열사가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순국한지 100주년이 되는 해이다. 그는 1907년 7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리는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이상설, 이위종과 함께 고종 황제 특사로 파견됐다. 을사늑약은 일본의 강압으로 되었음을 세계 만방에 알려 무효화 시키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동교회 전덕기 목사는 이준 열사를 위해 간곡히 기도한 후 출발시켰지만 이준은 일본 측의 방해로 회원이 되지 못했고, 마지막으로 언권을 얻은 그는 일본을 규탄하는 연설 후 할복 자살로 쓰러졌다. 지난 2월 27일 이준 열사 순국 백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출범식에 참석한 주한 네덜란드 라딩크. J. 반 볼렌호벤 대사는 “이준 열사는 한국인으로 태어났지만 자신의 이상을 통해서 세계시민이 되었다”며 “그 분은 조국 땅에 묻혀 있지만 그의 정신은 정의와 평화의 도시 헤이그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고 높이 평가했다.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우표
애국선열이자 감리교회 청년인 이준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이 한창인 가운데 때마침 항일 독립운동의 주춧돌이 됐던 헤이그 특사를 기념하는 우표가 발행돼 화제다. 액면가 2백50원, 발행량 1백60만 장으로 이준·이상설·이위종 등 헤이그 특사 3인과 고종황제의 위임장으로 디자인 됐다. 헤이그 특사 사건은 항일 독립운동의 여명을 연 사건이라는 점과 열강 45개국이 모인 외교 무대에서 동양의 은둔국 한국을 알린 최초의 특사외교라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깊다. 우정사업본부는 “100년 전 조국의 독립과 평화를 위해 목숨을 내걸고 싸운 헤이그 특사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기 위해 헤이그 특사와 고종황제의 위임장을 기념우표를 발행한다”고 밝혔다. 우표 발행에 맞춰 독립기념관을 방문해 우표 및 전시액자를 증정할 예정이며 내달 1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헤이그 특사 100주년 행사에도 국가보훈처 행사 방문단을 통해 기념우표와 액자를 전달할 계획이다.
(출처- 기독교타임즈/윤선주 기자/200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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