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월간 객석에서 20세기를 대표하는 10인의 피아니스트를 선정했다
그중에 Best 1 위에 호로비츠가 선정됐습니다..
1. 블라디미르 호로비츠(1904∼1989)
20세기의 대지휘자들은 ‘카리스마’라는 단어로 특징지어질 수 있었다.
20세기의 위대한 피아니스트들은 어떨까.
섬세, 예민, 선병질적, 신경질적, 신경과민,까다로움, 변덕, 자존심, 만,
고집불통 등의 단어들이 유난히 쉽게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이는 19세기 낭만주의 예술가들이 보여준 특성들과 거의 고스란히 일치한다.
쇼팽과 리스트를 떠올리기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호로비츠를 보라!
마치 느긋하고 따뜻한 성품의 소유자인 듯 보이는 말년의 사진에
익숙해진 이들에게는 이런 말들이 이해되기 힘들 것이다.
하지만 그는 분명히 까다로웠다!
호로비츠는‘피아니스트는 자신의 악기를 가지고 다니지
않는 유일한 연주가’라는 명제를 뒤집었다.
‘지휘자들마저 자신의 악기인 오케스트라를 대동하고 다니는데,
피아니스트는 왜 안되지?’라는 그의 순간적인 의문은
‘점보 747을 타고 하늘을 나는 피아노’를 만들어냈다.
전속 요리사와 정수기도 연주회에 꼭 따라다녔다.
그렇지만 그의 연주를 듣는 사람들은 그 까다로움에 감사해야 했다.
완벽한 테크닉과 무궁무진한 표현력을 바탕으로
철저히 주관에 입각해 빚어낸 호로비츠의 개성적인 피아니즘 역시
보통의 예민함과 보통의 감수성으로는 빚어지지 않는
위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도 키에프에서 탄생할 당시
그의 이름은 블라디미르 고로비츠였다.
아버지는 기술자였고, 어머니와 누이는 피아니스트였으며
동생은 바이올린을 했다.
피아노도 처음에는 어머니에게서 배우기 시작했다.
안톤 루빈슈타인의 제자였던 또 하나의 위대한 피아니스트인
펠릭스 블루멘펠트에게서 배운 것이야말로 호로비츠를 러시아 피아니즘
전통의 적자이자 20세기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만든 시작이었다.
18세의 나이에 가진 데뷔 연주회의 성공으로 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했고,
1925년, 21세의 나이에 서유럽으로 건너가, 이듬해 함부르크에서 가진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의 대성공으로 명성을 확고히 했다.
28년, 뉴욕 필과 역시 차이코프스키
1번을 협연하며 이루어낸 카네기홀 데뷔 또한 그에게 성공을 안겼다.
이렇게 가는 곳마다 성공만 한 피아니스트가 또 있을까.
33년, 토스카니니의 뉴욕 필과의 베토벤 시리즈는 성공과 함께
토스카니니의 딸 완다를 그의 품에 안겼다.
토스카니니의 사위’는 또 하나의 막강한 권력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36년, 불과 32세의 나이로 그는 은퇴를 선언했다.
1939년 무대에 복귀한 그는 20년이 채 흐르기 전인 53년, 다시 은퇴한다.
왜 이렇게 자주 은퇴와 복귀를 거듭한 것일까.
역시 그의 까다로운 성품 탓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1965년, 지금은 ‘역사적 귀환’이라 기억되는 연주회를 카네기 홀에서 열었다
이후 그가 남긴 역사적 연주회는 78년 백악관에서의‘미국 데뷔 50주년’연주회,
86년 모스크바와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의‘61년 만의 귀향 연주회’
87년 베를린에서의 ‘최후의 연주회’ 등이다.
89년 심장발작으로 사망, 밀라노에 있는 토스카니니의 무덤 옆에 묻혔다
150여 장에 이르는 방대한 음반을 남긴 호로비츠.
그중에서‘이것이 그의 명반이다’라고 꼬집어 내기 무척 힘들다.
RCA 레이블의 호로비츠 전집은
그의 예술혼을 엿보는데 가장 큰 도움을 주는 것이다.
이밖에도‘역사적 귀환’실황녹음(소니),
월간객석자료 정리...
호로비츠 - 라흐마니노프 피협 3번
주빈 메타와 협연 - 78년 카네기 홀 실황
1악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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