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성탄부활과 절기

[스크랩] 죽은 이들의 부활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8:40
    1. 신앙의 신조에서 말하는 "죽은 이들의 부활"은 무엇을 가리키 는 것인가?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모든 죽은 사람들의 육신과 그들의 영혼을 합치게 하여 생명을 갖게 하고 영적으로 죽지않게 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 1서 15, 44. 53에서 이렇게 말한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 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이 썩을 몸은 불멸의 옷을 입어야 하고 이 죽을 몸은 불사의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2. 땅에 묻힌 육신은 썩어 없어지는데 어떻게 부활할 수가 있는가?
      하느님께서 흙으로 우리의 몸을 만드셨듯이 그의 전능하심으로 다시 우리를 영적인 몸으로 만드실 수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고린도 1서 15, 36에서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그러면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나며 어떤 몸으로 살아 나느냐?'하고 묻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어리석은 질문입니다. 심은 씨는 죽지 않고서는 살아날 수 없습니다."
       
    3. 모든 사람들이 부활하는 것인가?
      모든 죽었던 사람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며 살아있던 사람들도 그 시간에 죽지 않는 영적인 몸으로 변하게 된다.
      고린도 1서 15, 51-52에서 사도 바울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이제 심오한 진리 하나를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죽지않고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마지막 나팔 소리가 울릴때에 순식간에 눈깜빡할 사이도 없이 죽은 이들은 불멸의 몸으로 살아나고 우리는 모두 변화할 것입니다."
       
    4. 언제 죽은 자들이 부활하는가?
      세상 끝날에
       
    5. 세상에 종말이 올 것인가?
      물론이다. 이 세상에는 종말이 올 것이고 영원한 세상으로 변화될 것이다.
      사도 바울로는 로마서 8, 21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곧 피조물에게도 멸망의 사슬에서 풀려나 하느님의 자녀들이 누리는 영광스러운 자유에 참여할 날이 올것입니다."
      그리고 사도 베드로는 베드로 2서 3, 13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하느님의 약속을 믿고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는 정의가 깃들어 있습니다."
       
    6. 세상은 어떻게 변화되는가?
      불로서 변화된다. 베드로 2서 3, 7절에 이렇게 말하고 있다. "사실 하늘과 땅은 지금도 하느님의 같은 말씀에 의해서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하늘과 땅은 하느님을 배반하는 자들이 멸망당할 심판의 날까지만 보존되었다가 불에 타 버리고 말 것입니다."
       
    7. 모두가 부활할 때까지 죽은 사람들의 영혼은 어떤 상태에 있게 되는가?
      공심판의 시기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 상태에 있게 된다.
      의로운 영혼들은 빛에 있게되어 영원한 선한 것들을 미리 맛보며 쉬게되고 불의한 영혼들은 그와는 반대인 상태에 놓이게 되어 영원한 고통을 미리 맛보게 되고 하느님과 멀리 떨어진 상태에 놓이게 된다.
       
    8. 왜 죽은 자들의 영혼들에게 죽은 즉시 완전한 행복과 벌을 주지 않는 것인가?
      왜냐하면 완전한 심판은 육신의 부활이 있고난 후에 각 사람들의 행적에 따라 최후의 심판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로는 디모테오 2서 4, 8절과 고린도 2서 5, 10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이제는 정의의 월계관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입니다. 그 날에 정의의 재판장이신 주님께서 그 월계관을 나에게 주실 것이며 나에게 뿐만 아니라 다시 오실 주님을 사모하는 모든 사람에게도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가는 날에는 우리가 육체에 머물러 있는 동안에 한 일들이 숨김없이 드러나서 잘한 일은 상을 받고 잘못한 일은 벌을 받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9. 죽은 이들의 영혼들이 죽음을 당한 후 중간 상태에서 선함과 고통을 맛보게 된다는데 성서 어디에서 그러한 것을 찾아볼 수 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증거하신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에서 부자와 라자로가 죽은 후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행복을 느끼고 있고 부자는 뜨거운 불 속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데서 찾아볼 수가 있다.(루가 16, 19-31)
       
    10. 그리스도인이면서 회개를 하지 않고 죽은 이들을 위하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들을 위하여 추도식과 기도 그리고 특별히 성찬예배때 그들을 위하여 봉헌물을 바치며 또한 그들의 영혼을 위한 자선 등으로 도울 수 있다고 믿고있다.
       
    11. 이러한 가르침은 어디를 근거로 하는 것인가?
      마카베오 하 12, 43절을 근거로 교회의 전통이 계속되는 것이다. 이 절을 보면 유다 마카베오가 죽은 병사들의 죄를 위하여 제물을 바친 것을 볼 수가 있다. "그리고 유다는 각 사람에게서 모금을 하여 은 이천 드라크마를 모아 그것을 속죄의 제사를 위한 비용으로 써 달라고 예루살렘으로 보냈다. 그가 이와같이 숭고한 일을 한 것은 부활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예루살렘의 성 끼릴로스는 성찬예배에서 죽은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매우 이롭게 만든다고 말한다. 죽은 자들을 위한 자선에 대하여는 죽은 이들의 영혼을 위하여 그들의 이름으로 자선을 베풀라는 사도들의 규범에서 찿아볼 수가 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사랑하는 사람의 영혼을 위하여 자선하는 것이며 만약 그가 죄인이었다면 그의 죄를 위로할 것이고 의로운 사람이었 다면 그를 더욱 의롭게 할 것이다."라고 말한다.
       
    12. 왜 죽은 후 삼일만에 추도식을 하는가?
      에집트의 성 마카리오스가 천사의 인도로 죽은 그리스도인의 영혼이 삼일째 되는 날 주님을 경배하려고 하늘로 올라가는 계시를 보게 되었다. 또한 삼일째 되는 날은 그리스도께서 무덤에 삼일째 계시다 부활하신 것을 회상하기 위함이다.
       
    13. 그리고 왜 구일째 되는 날 다시 추도식을 행하는가?
      성 마카리오스가 천사로부터 받은 계시에 의하면 죽은 자의 영혼이 삼일째 되는 날 주님을 경배한 후 육일동안 낙원의 아름다운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허가를 받고 구경한 후에 육일째 되는 날(죽은지 9일째 되는 날) 다시 천사들의 인도로 하느님을 경배하였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 구일째 되는 날 추도식을 하는 것이다.
       
    14. 왜 죽은지 사십일만에 추도식을 다시 하는 것이가?
      일찍부터 교회는 사십일째 되는 날 죽은 자들을 위하여 추도식을 하도록 규정하였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금식과 기도로써 사십일을 지내시면서 사탄에게 승리하신 것과 같이 교회는 죽은 자의 영혼을 위하여 사십일째 되는 날 성찬예배에서 그의 영혼이 사탄의 손길로부터 벗어나 하늘나라를 상속받을수 있도록 주님께 간청하는 것이다.
      성 마카리오스는 천사의 인도로 보았던 계시에서 구일째, 즉 두번째로 주님을 경배한 영혼은 바로 하느님께서 부재하신 지옥으로 인도되는 것을 보았다. 그 곳에서 삼십일 동안 고통을 받고 있는 죄인들을 보며 혹시 그 자신도 이 곳에 와서 이러한 고통을 받지나 않을까 두려움과 공포에 떨게된다.
      지옥에서 삼십일동안 그러한 광경을 본 후 그러니까 죽은지 사십일째 되는 날 영혼은 다시 주님을 경배하기 위하여 세번째로 하늘로 올라간다. 이 날은 매우 중요한 날로서 주님께서는 그의 생전의 행적에 따라 천국으로 보내야할지 지옥으로 보내야할지를 결정한다. 그리고 그에게 알맞는 장소로 보내지게 된다.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는 육체도 부활하게 될 것이다. 그때에는 영혼과 육신이 함께하여 만약 낙원에 있게되면 모든 기쁨과 행복을 더욱 맛보게 되고 지옥에 있게되면 더욱더 힘든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십일째 되는 날 성찬예배에서는 그들이 생전에 지었던 모든 잘못을 하느님께서 용서하시고 낙원에 정착할 수 있도록 그들의 영혼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해야 한다.
       
    15. "델로니아"(방벽)이란 무엇인가? "
      "델로니아"의 정의는 히브리 민족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이며 오늘날에는 하늘로 올라가기 위한 영혼을 방해하는 방벽들을 표현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 사용하고 있다.
      팔레스타인이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때에 도시 중앙길에 "델로니아"가 있어 그 곳을 지나가는 유대인들은 통행료를 내야만 했었다. 마치 오늘날 고속도로를 가려고 할 때 요금을 내는 징수소 같은 곳이었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는 "죽은 이후 영혼이 만나는 대기권에 있는 고통의 장소"로 표현하고 있다. 그 밖에 이집트의 성 마카리오스와 그리고 성 요한 클리마코스 등 많은 성인들이 여기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
      사람이 죽음을 당한 직후 죽은이의 영혼을 위하여 교회에서 기도하는 것과 장례식 그리고 성찬예배는 영혼이 "델로니아"를 지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
      알렉산드리아의 성 끼릴로스는 "사람이 죽은 뒤 육체로부터 분리된 영혼은 그의 앞에 그를 데려가기 위한 하느님의 천사들과 그의 행적에 대해 비난하는 악마들이 서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을 본 영혼은 악마들이 무섭고 두려워 하느님의 천사들에게 보호를 요청한다. 그러면 천사들은 영혼을 그들의 보호속에 높은 곳으로 데리고 올라간다. 그러나 영혼은 대기권을 지나면서 하늘로 가기위한 길을 방해하는 "델로니아"를 만나게 된다.
      각 "델로니아"는 영혼에게 죄에 대한 댓가를 요구한다. 그러므로 "델로니아"를 지나기 위하여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죽은 후 매우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 필요하다.
       
    16. 왜 추도식에 꼴리바를 갖고 가는가?
      꼴리바는 삶은 곡식에 설탕, 꿀, 포도 그리고 그 외에 다른 달콤한 것들을 섞어 만든 것인데 상징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가 있다.
      곡식은 언젠가 무덤에서 부활할 죽은 이의 몸을 상징한다. 왜냐하면 곡식은 땅에 뿌려지고 썩기 때문이다. 그러나 풍성한 과일을 맺는 나무로 되살아 난다.
      설탕과 꿀 그리고 그 밖의 달콤한 것들은 부활한 후에 낙원에서 행복한 삶과 기쁨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교회의 기도가 죽은 이의 영혼을 이롭게 한다면 꼴리바를 갖고 교회에 가는 것은 죽은 이들의 부활과 죽은 이후 더 좋은 삶을 나타내는 것이다.
       
    17. 그리스도인이 죽음을 앞두고 성체성혈을 영접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죽음직전에 성체성혈을 영접하며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해 주는 것이 얼마나 필요한 것인가는 어떤 사건을 통해서 알 수가 있다. 그 사건은 라부라에 위치한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장인 대사제 안토니오스의 삶에서 있었다.
      안토니오스 대사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그가 라부라에 있는 성 세르기오스와 성삼위의 수도원에 왔을때 약간의 수도자들이 있었고 보제는 한명도 없었다.
      수도원장으로 부임한 얼마후에 어떤 교구에서 보제 한명이 왔고 그는 다른 수도자들과 잘 어울렸다. 그는 좋은 목소리를 갖고 있었고 수도원에서 보조자로서 봉사하였다.
      수도원의 축일이 있기 몇일전 보제는 수도원장 안토니오스에게 집에 일이 있어 갔다올 수 있도록 요청하였다. 그 요청을 들은 수도원장은 갔다오라고 허락하며 다시 말하였다. "그러나 축일에 맞추어 도착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으면 누구와 같이 예배를 집전할 수 있는가?" 그러자 보제는 "축일에 맞추어 도착하겠습니다. 빨리 돌아 오도록 하겠습니다."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나 축일 아침까지도 보제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수도원장은 매우 초조하였고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러나 예배가 시작되어 얼마가 지나자 보제가 도착하였고 그를 본 수도원장은 그에게 준비가 되었으면 예배를 같이 집전하자고 말하였다.
      성찬예배가 끝난후 식사를 함께 하면서 어떤 수도자가 보제의 목소리에 대해 "누군가가 집에 가서 그의 목소리를 두고 왔다."하며 오늘은 목소리가 좋지 않았다고 그의 신경을 건드렸다. 보제는 신경이 예민해졌고 그들 사이에는 다툼이 오고갔다.
      그리고난후 보제는 그의 거처로 돌아가 물통을 들고 물을 길러갔다. 그러나 그는 통에 물을 가득히 채우고 그의 거처로 돌아와 문을 열자마자 갑자기 땅에 쓰러져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이 소식을 들은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은 매우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가 보제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는 보제가 축일전에 도착하라는 명을 듣고 급히 와서 예배에 참여하여 고생하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원장은 죽은 보제를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모든 지역에 이 소식을 전하여 성찬예배에서 그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글을 써서 보냈다.
      그가 죽은지 사십일째 되는 날 안토니오스 수도원장이 그의 방에서 잠깐 잠이 들었는데 갑자기 누군가가 그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꼈다. 그러자 그는 벌떡 일어나서 불을 켰고 그의 앞에 보제가 서 있는 것을 보았다. "당신께 감사드리러 왔습니다."하고 보제는 말하였다. "왜지?" "당신이 나를 위해 기도해 주셨기 때문이지요." "나만 기도한 것이 아니라 모든 수도자들이 너를 위하여 기도하였다. 너를 위하여 기도해 달라고 모든 곳에 너의 이름을 적어 보냈다." "내 이름은 어느 곳에도 기록되지 않았고 아무도 나를 위해 기도해 주지 않았습니다." (나중에 수도원장은 누군가의 실수로 인하여 전달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델로니아'를 어떻게 통과했느냐?" "마치 번개와 같이 통과하였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통과할 수가 있었지?" "왜냐하면 죽기전에 성찬 예배에서 그리스도의 몸과 피를 영접하였기 때문입니다." "식사할 때에 다른 수도자와 다툰 것에 대하여는 어떻게 되었는가?" "주님께서 그것에 대하여는 말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때에 다른 수녀원에서 수녀 한 명이 죽음을 당하였는데 수도원장은 보제에게 그녀는 어떤 상급을 받았느냐고 물어 보았다. "그녀는 저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습니다."하며 보제는 대답하였고 수도원장의 영상은 여기에서 끝났다.
       
    18. 믿음이 전혀 없었고 경건한 삶을 살려고 전혀 노력하지 않은채 죽은 자들을 위하여 추도식이나 자선이 필요한 것인가?
      그렇치 않다. 추도식이나 자선은 오직 믿음으로 잠이든 자들만을 위해서 필요하다.
      성 요한 크리소스톰는 "잠든 형제들을 위하여 성찬예배에서 기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들에게 이롭고 많은 것을 얻게해 주기 때문이다."라고 말하면서 (믿음으로 잠든 이들을 위하여) 추도식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성 요한 다미스키노스의 문헌에서도 추도식에 대하여 "죄인들이었을지라도 착한 마음으로 회개하고 고칠려고 하였으나 미처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믿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롭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불경하고 음흉한 삶을 살고 그들의 영혼에 대해 관심이 없던 사람들에게는 추도식이 필요하지 않다.

      제 12 조"후세의 영생을 굳게 믿고 기다리나이다. 아멘."

    1. 영원한 미래의 삶은 어떤 것인가?
      최후의 심판때 죽음에서 부활한 후의 삶이다.
       
    2. 어떤 종류의 삶이 될 것인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의 뜻에 따라 산 교인들을 위하여 우리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행복한 삶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이제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입니다. 우리가 장차 어떻게 될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 (요한 1서 3, 2)
      "내가 잘 아는 그리스도 교인 하나가 십사년 전에 세째 하늘까지 붙들려 올라간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낙원으로 붙들려 올라가서 사람의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이상한 말을 들었습니다." (고린도 2서 12, 2-4)
       
    3. 그렇게 큰 행복이 어디서 오는 것인가?
      "우리가 지금은 거울에 비추어 보듯이 희미하게 보지만 그때에 가서는 얼굴을 맞대고 볼 것입니다. 지금은 내가 불완전하게 알 뿐이지만 그때에 가서는 하느님께서 나를 아시듯이 나도 완전하게 알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1서 13, 12)
      "그때에 의인들은 그들의 아버지의 나라에서 해와 같이 빛날 것이다. 들을 귀가 있는 사람은 알아 들어라."(마태오 13, 43)
       
    4. 육신도 영혼의 행복에 동참하는가?
      물론이다. 다볼산에서 예수님의 몸이 변모하듯이 육신도 하느님의 빛으로 영광스럽게 변모할 것이다.
      "천한 것으로 묻히지만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으로 묻히지만 영적인 몸으로 다시 살아납니다. 육체적인 몸이 있으면 영적인 몸도 있습니다. 우리가 흙으로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녔듯이 하늘에 속한 그 분의 형상을 또한 지니게 될 것입니다." (고린도 1서 13, 43-49)
       
    5. 모든 사람들이 같은 행복을 누리게 될 것인가?
      그렇지 않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믿음의 정도에 따라 서로 다른 등급의 행복이 존재할 것이다.
      "해의 영광이 다르고 달의 영광이 다르고 별의 영광이 다르며 또 별과 별 사이에도 그 영광이 다릅니다."(고린도 1서 15, 41)
       
    6. 주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불경한 사람들은 어떻게 되는가?
      그들은 하느님과 멀어진 상태에서 악마들과 함께 영원한 고통과 죽음을 맞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빛은 그들에게 불이 될 것이다.
      "그리고 죽음과 지옥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 이 불바다가 둘째 죽음입니다. 이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올라있지 않은 사람은 누구나 이 불바다에 던져졌습니다."(요한 묵시록 20, 14-15)
      "그리고 왼편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렇게 말할 것이다. '이 저주받은 자들아 나에게서 떠나 악마와 그의 졸도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에 들어가라.' 이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는 곳으로 쫒겨날 것이며 의인들은 영원한 생명의 나라로 들어갈 것이다."(마태오 25, 41-46)
      "또 눈이 죄를 짓게 하거든 그 눈을 빼어 버려라. 두 눈을 가지고 지옥에 들어가는 것보다는 애꾸눈이 되더라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편이 나을 것이다. 지옥에서는 그들을 파먹는 구더기도 죽지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다."(마르코 9, 47-48)
       
    7. 왜 그렇게 죄인들에게 무서운 벌을 내리는가?
      하느님께서 그들을 벌하시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 자신이 원하여 받게되는 것이다.
      "그 사람들은 진리를 받아 들이지도 않고 사랑하지도 않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 못할 것입니다."(데살로니끼 2서 2, 10)
       
    8. 위에서 언급한 것을 보면 지옥이 불로 고통받는 장소로 생각되는데 과연 그러한 곳인가?
      위의 데살로니끼 2서 2, 10에서 사도 바울로가 말하듯이 하느님께서 죄인을 벌하시는 것이 아니고 죄인 자신이 벌을 받게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영혼을 불경하게 하여 행복한 낙원에서 하느님과 사는 것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태양을 예로들어 보기로 하자. 누구든지 건강한 눈을 가지고 태양을 볼 때 밝은 빛을 보게 되지만 눈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태양을 보면 빛으로 인하여 눈이 고통을 받게 된다. 그
      렇듯이 죄인들은 하느님의 출현으로 타게된다. 왜냐하면 그들의 영혼을 더러움에서 정결하게 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그것이 곧 그들의 지옥인 것이다.
      반면에 마음이 깨끗한 그리스도인들은 하느님의 빛을 받아 들이고 그것이 곧 그들의 천국인 것이다. 그래서 교회에서 사제들은 더러움으로 병든 사람들의 영혼을 치료해주어 하느님의 빛이 밝히 비추어 그들 안에 하느님이 거주하게 하는 것이고 그것이 곧 실제적인 천국인 것이다.
       
    9. 하느님을 영원히 영접하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우리는 하느님의 형상이며 하느님을 위해 만들어졌다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이렇게 인간의 본래 모습은 마치 물고기가 물에서 헤엄치며 살아가는 것처럼 하느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예와같이 물고기가 물밖으로 나와 금빛나는 모래 아니면 이끼낀 침대에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물고기 본래의 모습이 아닌 것처럼 만약 사람이 사치와 낭비로 살아가며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져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사람 본연의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인임을 의식하고 죄로부터의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겸손한 마음을 갖고 계속하여 우리의 죄를 영적 사제에게 고백하고 주님께 용서를 빌며 용서를 받아야한다.
      또한 하느님께서 은총을 내려 주시어 죄와의 투쟁을 시작하여 죄로부터 우리의 마음을 깨끗하게 하도록 해야한다. 이렇게 우리의 영혼을 정화하여 신성화되도록 하여 하느님을 영원히 영접해야한다.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