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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 전통 문화와 한국 교회의 세속화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5. 10.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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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 문화와 한국 교회의 세속화



The Traditional Culture in Korea and the Secularization of Korean Church


권 문 상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교수, 조직신학, Ph.D.)

Kwon, Moon-Sang (Prof. 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Systematic Theology, Ph.D.)

서론 

   20세기 중반에 유행하였던 소위 ‘세속화’ (secularization) 신학 운동이 21세기에도 역시 그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은 틀림없다. 특히 불트만의 비신화화 개념, 본회퍼의 ‘비종교화’ 개념이 유입된 이래 정통 기독교 신학 개념을 현세적 측면에서 단순화하였는데, 그 실례로 하나님의 내재성을 보다 더욱 강조한다든지 그리스도의 인간적인 면만을 부각시킨 것이 그것이다. ‘세속화’ 신학은 이러한 초월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술어를 기피할 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도 여전히 전 세기와 같이 계시적 표현, 천국과 지옥, 동정녀 탄생 등과 같은 초자연적인 개념을 신화적인 내용으로 치부시켜 버리고 있다. 기독교 신학의 형이상학적인 개념, 즉 초월적인 하나님, 양성일위의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 그리고 과학과 상식을 뛰어 넘는 성경의 초자연적인 기사들은 현대인들을 이성적이고 과학적으로 설득하기에 부족하다는 핑계로 거부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궁극적으로 영적인 구원을 중시하는 종교로서 보다는 윤리 실천적 삶에로 그 본질을 새롭게 해석함으로써 교회의 사회 참여를 강조하게 되었다. 나아가 윤리화된 기독교는 스스로를 상대화시키고 타종교와의 대화를 용이하게 하여 종교다원주의 개념을 보편화시키게 하였다. 이러한 기독교의 ‘사회화’ 현상은 서구교회에서 특히 발전하였지만, 한국에서도 역시 상당히 진척되어 왔다. 본격적으로 ‘세속화’ 신학 논의가 한참이던 1960년대에 한국도 크게 시차를 두지 않고 서구의 ‘세속화’ 신학을 소개하고 발전시켰던 것이다.

   그 열매인지는 모르지만 최근 언론에서는 교회의 ‘세속화’를 의도적으로 고무하고 있다. 한 때 공영방송에서 기독교를 비역사적이고 또한 독선적 특징을 갖는 종교라고 비난하는 내용을 방영하기도 하였고, 최근 모 민영 방송에서는 모 통신회사와 협조하여 기독교와 불교의 화해 노력을 유도하는 듯 한 광고 방송을 내 보내기도 하고 있다. 이러한 매스컴의 활동이 시사 하는 바는, 이 사회가, (공영방송에서 어떤 학자가) 기독교의 초자연적 요소를 우스개 이야기로 치부하였던 말에 동조한다는 것이며, 또한 종교 다원주의 행동을 아주 높이 평가하고 있다는 말일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세속화’ 신학자들은 이러한 사회적 요구가, 자신들이 (서구의 신학자들을 따라 1960년대에) 새로운 신학 운동을 일으킨 것의 열매라고 생각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러나 한국의 ‘세속화’ 흐름은 단순히 서구의 ‘세속화’ 신학의 전파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한국의 ‘세속화’ 사상은 근본적으로 이미 우리 정신을 오래 전부터 기초하였고, 한국의 교회는 이미 그러한 문화의 영향 아래 세워져왔기 때문에 ‘세속화’ 신학의 길은 한국 기독교 역사 초기부터 내재되어 왔다고 하겠다. 이는 세속화가 뜻하는 말을 분석하면 금방 이해될 수 있다. (앞으로 세속화 정의를 논의하겠지만,) 이 개념이 초월적 혹은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거부하면서 현세적 관심을 그 본질로 한다고 말한다면, 바로 우리의 정신세계를 지탱하는 것이 현세주의적이라 할 때, 우리의 문화는 처음부터 세속화 단계에서 출발하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점이 중요한데, 왜냐하면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한국교회의 세속화를 극복해야 한다고 (여기서는 ‘세속화’ 신학적인 의미도 있지만 종교적 타락이라는 의미에서의 세속화도 포함됨. 이 두 개념의 차이는 곧 설명될 것임.) 백방으로 주문하지만 이것이 그리 쉽게 해결될 문제가 아님을 드러내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치 원래는 암인데 단순한 감기로 생각하고 처방을 내리다가는 결코 그 병이 완치될 수 없는 것과 같이, 한국의 ‘세속화’ 문제는 만만하게 대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이런 뜻에서 한국 교회 ‘세속화’ 현상의 근저를 우리의 전통 문화에서 찾는 것은 의미가 있다. 그 해결책을 구하는 데 그 어떤 실마리를 실제로 보여줄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 논문에서는 한국교회의 ‘세속화’ 현상이 현대에 갑작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닌, 한국의 전통 문화 특히 무교와 유교의 전통에서 찾아야 할 것임을 밝힐 것이다. 서구의 경우는 어떤 의미에서 콘스탄틴 이래 발전한 기독교 국가 (Christendom) 개념의 소멸에 대한 대안으로서 ‘세속화’ 신학이 출발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한국의 ‘세속화’는 이미 우리 민족 심성의 근원을 형성한 현세주의적 무교 전통이 어떤 종교이든 그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차단시키거나 이를 현세적 차원에로 내재화시켰던 데에서 그 본질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 논의하기 위해, 먼저 소위 ‘세속화’ 정의와 관련하여 혼란을 일으킨 문제를 살피고 서구의 ‘세속화’ 신학을 회고한 후, 한국의 ‘세속화’ 문화 전통 그리고 그것의 한국 교회에의 영향을 살펴볼 것이다.

1. ‘세속화’ 용어의 혼란

   ‘세속화’ (secularization) 라는 용어는 우리에게 많은 혼동을 주어왔다. 본래 이 단어는 인간이 살 수 있는 기간, 그래서 한 세대, 한 시대, 혹은 이 세대 (this age), 이 세상이라는 뜻의 라틴어 새쿨름 (saeculum)에서 유래하였다. 따라서 어원적으로 새쿨름에서 비롯된 영어의 형용사 secular는 종교적인 것과 분리된 어떤 것으로서, 세상적, 현세적인 이란 뜻을 갖게 되었다. 예를 들어 종교적인 원리를 떠난 교육 등을 말하는 것이었다. 종교와는 분리된 이 세상의 개념을 의미하였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말에서 세속화란 이러한 어원적 특징과는 사뭇 다른, 저열하게 하고 타락시키는 것, 혹은 신성 모독적인 것을 뜻하는 말이었다. 서구 교회가 ‘비기독교화’와 그 사회적 결과를 ‘세속화’로 이해하는 반면, 우리는 그것을 세상 정신의 유입과 관용을 통한 교회의 영적 타락을 서술하는 것으로 보았다는 것이다.1) 종교적으로 그 순수성을 잃고 더러워져서, 거룩한 것이 물질적이고 부정한, 속물적인 차원으로 타락하여 윤리적인 문제를 야기하게 되는 것, 이것을 우리는 세속화라고 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의 세속화란 “가치의 등하와 도덕적으로 부정적인 의미가 포함된 것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하겠다.2) 그래서 교회의 세속화 하면, 많은 이들이 교회의 경건성 상실, 물질주의적이고 물량주의적인 현상, 윤리적 타락 등을 떠올리게 되어, 그 실례로, 장로직의 세속화, 목회자와 장로의 권력화, 목회 성공주의, 기복신앙, 교회의 물질주의, 담임목사 세습제 등을 논하곤 하였던 것이다.3) 우리말의 세속화란 단어가 주는 뉘앙스는 바로 그러한 윤리적인 개념이었다는 말이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1960년대 이 신학을 도입하면서 그렇게 이해되어온 세속화라는 단어와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른 개념인 secularization을, 우리말로 단순히 ‘세속화’라고 직역하였던 것이다. 이로 인해 앞의 예에서와 같이 소위 세속화 ‘신학’과 교회의 세속화 ‘현상’을 혼동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용어 사용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secularization을 처음부터 우리말로 옮길 때 사실은 ‘세속화’ 보다는 “기독교의 사회화”4) 혹은 ‘탈종교화’ 그리고 그러한 신학을 ‘세속화 신학’보다는 ‘탈종교화 신학’ 등으로 했다면 더욱 좋았을 것이다. 본래의 이 신학은 기존의 종교적인 제도나 상징, 개념과는 다른 차원으로 접근하고자 하는 것을 말하였기 때문이다. 이 신학의 원래 의도를 고려하여 용어를 보다 신중하게 번역해야 했었던 것이다.

   이 신학이 의도한 것은, 하비 콕스가 반 퍼센 (van Peursen)의 말을 빌려 말한 바와 같이 “‘첫째는 인간의 이성과 언어를 지배해 오던 종교로부터, 둘째는 형이상학으로부터’ 인간을 해방하는 것”이고, 나아가 “세계에 대한 종교적 또는 유사 종교적 이해로부터 세계를 풀어놓는 것이며, 모든 폐쇄적 세계관을 헤쳐 버림이며, 모든 초자연적 신화와 거룩한 상징들을 깨뜨려 버림”인 것이다.5) 인간의 자율성의 시대, 과학의 시대에서는, 현대인들에게 적응 가능한 종교로, 이해 가능한 수준에로 낮아질 필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과거와 같이 종교 혹은 기독교를 신성화하여 범인들이 접근하기 어렵게 하며 스스로 게토화하지 말고 세상 사람들과의 접촉을 적극적으로 시도하라는 것이다. 그 가장 구체적인 행위로서, 그리스도가 이 땅으로 내려와 고난과 희생의 삶을 살았듯이 오늘날 교회도,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이라면 누구든지 그러한 자기희생적 고난의 삶을 살아야 하며, 바로 그러한 행동을 기독교의 본질로 재해석해야 한다고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본래의 ‘세속화’ 신학이라는 것은 기독교에 대해 윤리적으로 새롭게 해석하여 교회의 ‘사회화,’ 혹은 폐쇄주의적이고 사색적인 종교적 개념을 벗어난 탈종교화라는 개념을 제창한 것이지, 교회의 종교적 타락상 혹은 세상적 가치관에의 추구를 비판적으로 논하는 것은 아닌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가 흔히 세속화 문제를 교회 및 그리스도인들이 거룩한 삶, 곧 타계성에 기초한 경건, 자기 절제, 자기 수련의 삶 등에서 벗어나, 물질주의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술수와 궤휼로 무장한 야비하고 유치한 삶을 살아가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기독교 정신을 훼손하고 하나님을 욕되게 하는 것을 생각하곤 하는데, 1960년대의 신학 논쟁은 이러한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지금까지 용어 문제의 혼란이 있었음을 지적한다고 해서, 많은 사람들이 윤리적이고 거룩성을 잃은 교회의 일탈된 모습을 세속화라 하여 비판적으로 논의해온 것 그 자체를 무시하거나 그러한 논의를 금하자는 이야기는 아니다. 오히려 더 많이 그러한 종류의 비판적 고찰을 계속하여야 할 것이다. 다만 영어의 secularization을 ‘세속화’라고 번역함으로써 우리가 그동안 갖고 있던 세속화 개념과 혼동을 가져오게 하였다는 측면에서 치밀하지 못한 아쉬움을 다시 한 번 더 되새겨보자는 것이다.


2. ‘세속화’ 신학 비판

   그러면 1960년대에 본격적으로 시작된 서구 사회와 한국의 소위 ‘세속화’ 신학이란 무엇인지 먼저 살펴보도록 하자. 지금까지 여러 논문과 단행본을 통해 ‘세속화’ 신학이 많이 논의 되어왔기 때문에 반복하는 면이 없지 않으나 이 글의 의도를 밝히기 위하여 간단하나마 언급해야 될 것 같다. 여기서는 세속화 신학 전반에 걸쳐 상세하게 다루지 않고 지면상 이 신학의 특징만을 살펴봄으로써 한국에서의 현세주의 세계관과의 연계성을 찾고자 하는데 만족하려 한다.

   서구에서 발전된 ‘세속화’ 신학은 기독교 국가 체제의 붕괴 현상 혹은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에 저항하는 시대적 흐름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비기독교적 세대에 걸맞은 기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제창되었다고 하겠다. 이제 ‘기독교적’인 신학은 더 이상 호소력을 갖지 못하므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개념을 과감하게 버리고 세상이 용납할 수 있는 모양으로 그 옷을 새롭게 입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의 ‘비종교화’이며 소위 ‘세속화’ 신학의 모토이다. 그리고 이 신학의 물결은 본회퍼 (Dietrich Bonhoeffer 1906∼1945)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제기되었고 극단적으로는 알타이저 (Thomas J. Altizer)와 해밀톤 (William Hamilton)의 사신 신학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한편, 엄밀히 따지면 이러한 ‘세속화’ 신학은 1960년대에, 즉 본회퍼의 유작들이 본격적으로 발간되면서 급속하게 전파된 그 시기에야 비로소 대두되었다고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세속화’ 신학은 불트만의 비신화화 개념, 그리고 더 실질적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계몽주의가 시작된 시기부터일 것이다. 계몽주의는 객관 혹은 대상이 주관 혹은 주체를 판단할 수 있고 해석할 수 있다는 개념을 보편화시켰고 그 결과 이성이 계시를 대체하고 초월적 신관과 교리는 인간의 경험과 과학에 의해 심판을 받게 되면서 신의 내재화와 역사에 대해 강조하였다. 이후 자유주의 신학이 융성함으로써 기독론 중심의 신학이 새롭게 수립되었고, 이는 본회퍼를 비롯한 사신 신학자들에게 까지도 그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초월적 개념으로서의 신보다는 이 땅에서 인간이 ‘되어’ 희생의 삶을 살아가신 예수에게 신학의 출발과 마침을 부여함으로써 신학의 윤리화 혹은 교회의 ‘사회화’를 기초하였던 것이다. 말하자면 현대의 ‘세속화’ 신학은 완전히 새롭게 출발된 것이라기보다는 그동안 수 세기 동안 제기되어온 내재적 신학이 20세기 중반에 과학문명의 급속한 발전에 따라 보다 노골적이고 급진적으로 그 모양을 갖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기독교의 비종교화, 성인된 세계, 신 죽음의 신앙 등의 급진적 개념은 이 신학의 중심 주제가 되었다. 이제 과거의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들은 현대인의 수용 가능한 ‘세속적’ 위치에로 낮아져야 했다. 전통적인 신학적 술어를 혁명적으로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그러면 무슨 근거로 수천 년 동안 이어온 신학적 전통의 옷을 갈아입혀야 된다는 말인가?

   세속화 신학의 전제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과학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모든 초자연적인 것들과 신화적인 것들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알타이저의 스승인 엘리아드가 말한 바와 같이 과학의 영향으로 말미암아 현대인들은 모든 초월성을 거부하게 하는 일종의 새로운 실존적 상황을 지향하고 있다는 것이다.6) 귀납법적 해석을 진리 판별의 기준으로 삼고 있는 오늘의 우리들은 연역적 시도를 요구하는 종래의 신 개념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는 말이다. 우리의 감각으로 증명할 수도 없는, 현상계 저 너머에 있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존재를 전제한다는 것이 이치에도 맞지 않으며 상상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당연히 형이상학적인 신을 그리는 것, 그것은 망상에 불과한 과거 신화적 시대의 유물에 다름없었던 것이다.

   과학 문명의 발달이 현대인들에게 전통적인 종교적 술어들, 특히 초자연적이고 비합리적이라고 판단되는 교리들을 수용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을 안다면 이제 신학을 새롭게 수립해 나가는 것은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신화적 이야기에 절대 맹종하는 원시적이고 유아적인 무지몽매한 자들이 사는 것이 아니라 분별력 있고 이성적인 ‘성숙한’ 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이므로 진정 기독교 메시지를 남기려면 현대인이 수용할 수 있도록 신학이 근본적으로 달리 정립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가 신과 같다든지 항상 신의 아들이라고 말하는 것은 현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현대인은 신이 무엇인지 모르기 때문이다.7) 증명할 수 있는 것만을 진리로 규정하는 과학적 사고방식으로는 객관적으로 입증할 수 없는 신 개념을 타당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는 것이다. 당연히 과학의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신과 같은 초월적 개념을 신화적인 것으로 보려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과학 시대의 현대인들은 실재를 신화적 객관 혹은 형이상학적인 실체로 생각하지 않고 그것을 기능적으로, 역사적으로 그리고 사회적으로 상대화 한다.8)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이해를 기능주의적으로 본다든지 이 세상에로 내재화시켜 이해한다든지 하게 하였던 것이다. 또한 이들은 신비한 것에 관심을 두기 보다는 실천하여 거두는 결과에 따라 어떤 개념을 판단하는 실용주의적 사고방식을 지향한다.9) 종교에 대한 이러한 ‘세속적’ 관심은 특히 도시 문화 속에 사는 자들에게서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현대의 ‘도시인들’은 초자연적이고 초월적인 개념에 더욱더 알레르기적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콕스가 지적한 바와 같이 도시 세속인은 이제 더 이상 종교적인 문제를 묻지 아니하기 때문이다.10)

   또한 ‘세속화’ 신학자들은 인류 발전사적으로 볼 때에도, 이러한 반 기독교적 혹은 반종교적 세태는 사회발전의 마지막 단계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사실을 교회는 인정해야 하며, 따라서 신학도 혁신적으로 이에 발맞추어야 한다고 한다. 콩트가 제시한 3시대 구분, 즉 신학적 (신화적), 형이상학적 (철학적), 실증주의적 (과학적) 시대 중 현재 우리는 마지막 시대인 실증주의적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며, 반 퍼센이 구분한 것처럼, 사회가 발전하는 단계로서 신화적 단계, 존재론적,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능주의적 단계에 오늘 현대의 시대가 이르렀고 이는 필연적으로 초월적 종교 시대가 종말을 고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과학에 지배를 받고 있는 현대인들에게는 완전히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종교로부터 자유하였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제도나, 종교적 상징체계의 지배가 더 이상 현대인들을 구속하지는 못하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진정한 의미에서 기독교 시대는 지나갔으며 ‘종교 없는’ 시대, 곧 ‘세속’의 시대가 왔다는 말이다.11) 이러한 의미에서 종래의 기독교 모습은 혁명적 변화를 요구한다. 당연히 이러한 혁명적인 변화의 시대를 맞이하여 혁명의 신학이 요청된다고 세속화 신학자는 주장하였던 것이다.12)

   세속화 신학이 전제하는 두 번째 것은 인간의 자율성 제고이다. 현대인들은 스스로의 힘에 의존하면서 자기 책임 아래 일을 처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의 시대는, 자신의 이러한 능력을 알지 못하고 한없이 자신을 비하하여 의존적 존재가 되었던 과거와는 달리, 인간의 자율성을 깨닫고 자신을 신뢰하는 독립적 존재로 살아가는 ‘성인된’ 시대이기 때문에, 이제 자신의 문제 해결을 위해 신적 존재에 의존하는 삶을 더 이상 살아가서는 안 되는 것이다. 본회퍼는 신의 능력에 호소하여 인간의 곤궁 상태를 해결하려 하는 시도를 비난한다. 그것은 곧 신을 “기계 장치”로13) 만들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인된 세계에서는 그러한 신 의존적 종교성을 극복하여야 하는 것이다.

   나아가 본회퍼는 인간 자율성의 부정적 표현인 ‘신 없이’ 라는 개념을 제안하였다.14)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신부재의 신앙을 가르치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서 신의 무력과 고난을 수용하도록 가르쳐야 한다.15) 주님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고난에 동참할 것을 요청하기에16) 더욱 고난 받는 것에 적극적인 태도를 가져야 하는 것이다. 여기서 본회퍼는 우리가 마치 신이 없는 것처럼 살아가야 할 것을 주장한다. 따라서 때로는 인간의 한계 앞에 하나님은 없는 것이며, 나아가 그 한계 앞에서 침묵한다든지 아니면 그저 미해결로 두게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결코 우리들에게 미해결의 문제를 대답하기 위해서 ‘여기에 오신’ 것이 아닌” 것이다.17) 따라서 문제 앞에서 하나님에게 호소하여 곤궁에서 피하려 하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신앙인의 태도는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더 이상 신앙을 내면화시키는 것으로 국한시킨다든지 경건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개인주의적 경건성을 강조하였던 전통적인 신학은 이제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신앙인들로 하여금 세상으로부터 도피하게 하였고, 형이상학적이고 피안적인 것에만 관심을 기울이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늘에 있는 것 대신에 이 땅에 있는 것에로, 다음 세상이 아닌 지금의 세상에, 개인주의적인 경건성 대신에 이웃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로 하여금 ‘종교적’ 인간으로 살라고 하지 않고 ‘사회 참여적’으로 살 것을 명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우리 한계를 해결하는 신 정도로 인식하지 말고 스스로 책임을 지고 문제 해결하라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본회퍼는 하나님을 부정할 의도를 나타낸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자율성을 자각한 오늘의 성인의 세계에서 신 의존적 경건성을 거부해야 한다는 그의 주장은 파격적이다.

   물론 이러한 ‘비종교화’의 의도 자체가 무조건 비판의 대상은 아닐 것이다. 어떻게든 기독교 신앙을 전하려 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본회퍼는 과학의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이들이 수용 가능하도록 기독론적 착상을 통해 기독교 신앙을 전달하려 하였다. 현대인들에게 이해될 수 있는 하나님이란 무엇인가,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말하려 하였다. 진정 그는 하나님의 정체성과 인간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해 해석함으로써 그의 전 신학적 체계를 구성하려 하였다고 하겠다.18) 그리스도의 고난을 통해 하나님을 보여주고 인간의 본질과 그 삶을 보여주려 하였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본회퍼가 강조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따르는 구체적인 행동과 이 변화된 실존에서 나오는 기독교 신앙의 새로운 언어”인 것이다.19) 이는 그가 서구 교회의 쇠퇴를 지켜보면서 현대인들에게 기독교 신앙의 의미를 전달하려고 노력한 데에서 나온 결과이다. 그러나 신앙의 생활화를 제안하여 교회의 사명 수행에 도움이 되었다는 측면에서 긍정적 평가를20)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이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기독교 개념을 수용할 수 없다고 ‘예언’하면서 신의 내재화와 교회의 사회화를 주문하였던 것에는 의문의 여지가 있다 (이 문제는 조금 후에 논하기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신학은 그를 따른다는 소위 ‘세속화’ 신학자들에 의해 왜곡 전달되었지 않았는가 한다. 특히 사신 신학자들은 본회퍼의 신학 전반을 왜곡 해석하였던 것이다.21) 이는 본회퍼가 교회에 자기반성을 촉구하는 인상적인 시도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통적인 기독교 신학 개념이 현대인들에게는 수용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기독교 종교를 재해석하였던 데에서 오해의 빌미가 제공되었을 것이라 보인다. 아무튼 본회퍼 이후, 많은 사람들이 이 세속화 신학을 주목하고 이를 더욱 발전시켰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세속화 신학의 전제와 비종교화라는 그 목적이 서구와 한국에서 많은 지지를 받아, 한동안 새로운 신학 열풍을 일으키게 하였다. 콕스는 앞에서 언급한 반 퍼센의 세속화 정의를 받아들여 우리가 ‘종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폐쇄적 세계관으로부터의 해방되어야 할 것을 지지하고, 이것이 바로 본회퍼가 말하는 인간의 자율화라고 말하였다.22) 나아가 본회퍼의 비종교화 신학을 그대로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본회퍼가 말한 바대로 우리는 하나님을 세속적인 형태로 말하고, 성서적 개념을 비종교적으로 해석하도록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23) 특히 도시인들에게는 더욱 뚜렷하게 세속적이라고 하였다.  

   나아가 이러한 세속화는 오늘의 시대에는 필연적이요 또한 성경적이라고 보았다. 역사적 필연 과정에 따라 주어진 것이라든지24) 혹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콩트의 시대 구분에 따라 오늘의 시대가 신학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단계를 넘어 실증과학의 시대이므로 자연적으로 세속화는 거역할 수 없는 대세이라고 보았다.25) 세속화의 물결은 전통적인 교회의 행동이나 그 어떤 다른 이념으로도 막을 수 없게 되었다. 더 나아가 사회학적으로도 세속화가 필연적이지만, 특히 중요한 것은 성경적으로도 세속화는 정당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속화와 복음은 상충되지 아니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성숙한 세속성에로 부른다고 말한다는 것이다.26) 세속화는 기독교에서 자연스럽게 창출해낼 개념인 것이다. 하나님이 바로 이러한 세속화를 주셨기 때문인 것이다. 다른 의미로 본다면, 세속화는 하나님의 시대 경륜에 따라 역사과정에 주어진 것으로 기독교의 변형된 모습이라는 것이다.27)

   결과적으로 이 세속화 신학은 종교의 상대화를 낳았다. 현대인의 문화 자체가 어떤 이념이나 실재를 상대화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은 실재를 객관화시키기 보다는 상대화하기를 즐긴다는 것이다.28) 따라서 오늘날 세속 시대에 살고 있는 자들은 종교적 세계관에 대해 자연스럽게 그 어떤 절대적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독선적인 종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세속화란 곧 종교적 세계관의 상대화를 포함하는 것이다.29) 종교적 세계관을 상대화하는 이들은 자연스럽게 타종교에 대해 포용적이다. 그러므로 세속화 신학은 종교다원주의를 받아들이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이러한 세속화 신학은 과연 정당한가? 본회퍼가 주장하듯이30) 오늘날 영혼 구원을 개인주의적으로 다루는 것이 거의 사라져 버렸는가? 콕스가 말하듯이31) 도시 세속인은 ‘종교적인’ 문제를 정말 묻지 않는가? 과학 시대에 사는 현대인들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개념을 부인하여, 종국에는 로빈슨이 말하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를 외면할 것이라고 말한 것이 옳았는가? 반세기가 더 지난 오늘, 20세기 중반 보다 더 과학적 사고가 지배적인 사회이지만, 미국을 보더라도 그렇고 한국을 보더라도 과연 이들 세속화 신학자들의 ‘예언’이 적중하였는지는 의심스럽다. 오늘날 종교 조직이 증가하고 복음주의가 상당하게 성장하며, 새로운 다양한 종교 운동이 일어나는 미국을 보면 세속화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이 정당한지 생각해 볼 일이다.32) 물론 현대화되기 이전 보다는 덜 종교적일지 모르지만 미국의 70%이상이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믿고 있는 것을 세속화 신학자들은 설명하기 힘들 것이다. 한국의 경우, 폭발적인 교회성장과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종교를 갖고 있다고 본다면, 현대인들이 종교에 무관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은 섣부른 진단이 아니었는가 한다. “어떤 식으로든 종교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분명한 거부는 ‘강력한 세속화 주제’에 대한 장애물이 되고 있다. 현대성의 발전으로 종교가 쇠퇴하고 있다는 옛 가설은 매우 불확실한 것이다.”33)

   그리고 인간이 고난에 처하였을 때 이를 지나가게 해달라고 간구하는 것을 부정적으로만 보는 것이 타당한가? 경건성을 토대로 개인주의화하는 신앙은 경계해야 할 것이지만, 이를 무조건 타계주의적인 것으로만 보는 것은 본질적으로 인간이 의존적인 존재임을 애써 부인하고 이상화하는 것은 아닌지 의문시된다. 어려울 때 신을 찾는 식의 종교 행위가 ‘기계장치의 신’을 만들어 버린다고 하였는데, 이를 절대시한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난의 잔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한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시편의 기도는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져야 하겠지만 이와 동시에 위기에 처하였을 때 하나님께 기도할 것과 병들었을 때에 기도하여 줄 것을 말하고 있는 성경 말씀을 염두에 둔다면, 인간의 실존적 한계상황에 맞서 하나님께 간구하여 피하게 하여달라고 하는 것 자체를 단순히 개인주의적인 신앙 행위로 치부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본회퍼의 ‘세속화’ 해석을 적극적으로 평가한 서남동 역시 그의 ‘기계장치로서의 신’ 개념을 비판하면서, 실존적 한계상황을 본회퍼와는 달리 적극적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은34) 신앙인 혹은 인간의 기본적인 신앙 행위 그 자체가 무시될 성질의 것이 아님을 표명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세속화 신학자들이 전제한 바, 사회학적 분석에 따라 오늘의 시대는 역사 발전의 단계 중 최종적인 것으로 보고 세속화를 정당화하였는데, 이러한 견해들은 결정론적 역사관에 기초하여 역사를 너무 단원적으로 보는 데에서 기인하였다고 하겠다. 이는 본래 역사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드라마요 역사는 그래서 다원적인 사실을 간과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으로 비판받아야 한다.35) 이와 비슷하게 라이언은 이들 세속화 신학자들이 근거로 삼은 사회학적 역사발전 단계론은 전과 후식의 분석방법 즉, 전은 비산업적이고 후는 산업화 도시적이라는 형식으로 지나치게 단순화 시켰는데 이는 역사가 하나의 진화적 과정이며 변화는 돌이킬 수 없다고 하는 기계론적 진화론적 가정에 기초하여 전개된 것이라 보고, 이 또한 비판이 요구된다고 하였다.36)

   또한 세속화 신학은 기독론 중심의 해석을 제시하는데 이는 과연 정당한가? 기독론 중심의 세속화 신학은 그리스도의 삶에서 참 신의 모습이 드러난다고 하며, 그의 희생적 고난의 삶은 우리가 따라야할 그 이상과 모델이라고 제안한다. 그리스도의 고난에서 보듯이 하나님은 고난에 간여하지 않으시며 마치 그가 없는 것처럼 우리의 운명이 다하도록 내버려 둔다는 것이다.37) 성인된 세계에서 신은 고난의 해결사로서의 기계적 신이 아닌 고난을 그대로 겪게 하는 신이라는 말이다. 또한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은 경험은 신앙인이라면 바로 이러한 삶에로 우리가 초대를 받았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가 고난을 겪어야 했듯이 그의 진정한 제자라면 자기의 십자가 고난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 희생은 모든 신앙인이 취하여야 할 삶의 모델인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그는 실제로 우리의 이상이요 모델이 된다. 그러나 여기서 문제는 그리스도의 고난을 구속사적인 맥락에서 보지 않고 윤리적 기준으로만 해석한다는 것이며 또한 칼케돈 신조의 기독론 선언에 반기를 들고 논리를 전개한 것이다 (여기서 전자는 후자 곧 양성론을 거부하는 데에서 비롯하였음은 물론이다). 이들 세속화 신학자들이 양성론을 거부한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삶을 인간적으로만 이해하였던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나아가 그리스도가 고난 앞에 처절하게 연약한, 무기력한 모습에로 떨어진 사실에서, 세속화 신학자들, 특히 신 죽음의 신학을 제시한 로빈슨, 알타이저, 해밀톤은 그의 삶이 결코 하나님이면서 동시에 인간일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이다.38) 이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을 부인하고 그의 삶을 그저 인간적인 인격체로 단순화 시켜버림으로써 십자가 사건을 인류 구원을 위한 신적인 행위로 보지 않고 윤리적 삶의 모형으로 축소시켜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당연히 이들의 기독론은 속죄론도 부활도 없었다.39) 결과적으로 이들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모든 신학적 개념의 부당성을 전하기 위해 기독론 중심으로 신학 작업을 하는데 몰두하게 되었던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큰 가치인 구속론을 희생시켜가면서 까지 말이다.

   끝으로, 세속화 신학자들이 주장하듯이 초자연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술어들을 인간들이 수용하려 하지 않는다고 하는 것을 과학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한정시켜 설명한 것은 설득력이 약하다. 물론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현대인에게 종교가 매력 없는 것으로 가정한 것이 명백하게 틀렸다고 말할 수 있지만, 또한 과학시대에 이르러서야 형이상학적이고 초월적인 기독교 개념이 거부되었다고 말하는 것도 틀렸다고 하겠다. 근본적으로 영적인 실체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부정, 창조주요 섭리주라는 초월적 신적 존재에 대한 거부 반응, 그리고 인간의 자율성을 희구한다든지 사모하는 태도, 즉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규범성을 지닌 개념에 저항하던 습관은 인간이 살기 시작한 이후로 계속되었다고 하겠다. 물론 과학시대에 이르러서 그 정도가 보다 노골화되고 급진적이 되고 말았지만 인간은 처음 죄의 역사를 시작한 때부터 초월적 존재로부터 독립적이 되기를 원하였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는 “우주적”이라40) 하겠다. 또한 이러한 인간론적인 측면에서 보아 ‘세속화’의 기원을 한국의 경우 역시 20세기 중반 이후에 시작한 것으로 볼 수 없게 한다. 그 이전에 이미 ‘세속화’ 문화의 경향을 추적할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는 민속 연구 혹은 전통 문화 연구를 통해 그 설득력을 더하게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의 경우 ‘세속화’ 문화 혹은 ‘세속화’ 종교 현상은 그 기원상 상당히 오래 전의 것임을 알 수 있게 한다는 것이다. 이제 그 현장으로 들어가 보자.

3. 한국의 세속화 문화

   한국인의 세계관에 근본적으로 깊은 영향을 준 종교를 든다면 무속종교 혹은 샤머니즘이라 하겠다. 이 땅에 불교, 유교 및 기독교와 같은 고등 종교가 수입되었지만 그 어떤 신앙인이든 무교적 세계관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였다. 아니 여전히 무교적 정서를 기본으로 하고 신앙생활한다고 보아야 더 정확할 것이다. 불교의 사찰 내에 있는 삼신각이 그 실례이다. 불교인이 찾는 삼신각은 무교의 삼신 사상, 즉 삼신이 출생하여 성인이 될 때까지 지켜준다는 신앙을 반영하여 준다고 하겠다. 기독교에서는 헌금 행위에서 기복적 행태를 보이는 것도 그 예가 될 수 있다. 무교에서 굿을 할 때에는 병 치유 혹은 재물의 보상을 기대하는 차원에서 이루어지는데, 기독교 신앙인들에게서도 이러한 보상적 기복 행위가 잔재하다는 것이다. 물론 신앙인들만 샤머니즘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요컨대, 신앙생활을 하던 무종교인으로 있던, 한국인 이라면 모두 무속종교의 영향을 받지 않은 자는 없다는 말이다. 무속 신앙은 우리 한국인의 뿌리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인이라면 누구도 무속적 세계관으로 일탈할 수는 없다.41)

   그러면 샤머니즘의 어떤 특징이 한국인 모두에게 삶의 방식을 기초하였다는 말인가? 현세주의 세계관이 바로 그것이다. 무속신앙의 메시지는 현세에 대한 절대 가치 추구이다.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은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초월적 세계 혹은 내세는 현세의 연장선에서 파악되며, 그러한 개념을 기본으로 하는 종교가 유입되더라도 내재화시켜 이해하게 하였다.

   무속종교는 여러 등급으로 신을 나누는데, 그 중 제 1등급에 속하는 최고의 신 개념이 있는 반면에 소위 잡신이라 일컫는 불행하게 죽은 신들, 예를 들면 총각 귀신, 처녀 귀신 등이 하등급에 속한 신들이 있다. 한편, 이러한 신들 간에는 상호 교통도 없고 따라서 위계질서도 없다. 각 신은 인간과 개별적으로 관계하는 정도이다. 그런데 최고의 신 개념이 있어 인간들이 두려워하는 대상으로 여겨지는데 일반적으로 그 분은 너무도 거룩하고 능력이 많은 존재이기 때문에 인간과의 일상적 관계를 갖고 있지는 않는다고 한다.42) 따라서 이 신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는 없다. 오직 하등급에 속하는 잡신들이 일상사에 깊이 관여하여, 병이나 재난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이해하고 이들을 달래는 의례를 행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일상사, 특히 불행한 일들과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는 잡신들과의 의사소통을 중시하였다. 결과적으로, 최고의 신이 있다고는 하여도 인간들의 주요 관심의 대상이 되지는 못하여 자연스럽게 초월적 신 개념을 형이상학적으로 연구하지 않게 되었다.

   물론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무속 종교에서 저승의 세계라든지 귀신의 존재라는 초월적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승과 저승의 그 모든 것은 일원론적 구도에서 현세의 연장으로 치부한다. 무속 종교는 이승과 저승 사이를 연속적으로 생각하여 출생에서 저승에 이르기 까지 무한한 과정을 분리나 구별됨이 없이 한 인격체 안에 지속되는 것으로 보았던 것이다.43) 따라서 이들 신들은 죽음을 겪었지만 그들은 여전히 생전에 살던 그 삶을 지속한다고 보고 이들과의 대화를 가능하게 한다는 것이다. 실례로, 병이 들거나 재난을 겪게 되면 이는 이들 귀신들이 자기들에 관심을 가져달라는 메시지로 인식하고, 굿을 통해 이들의 억울함을 달래거나 좋은 곳으로 보내주게 되는 것이다. 신들이라도 여전히 살아있는 인간이 겪는 불안정한 세계를 경험하고 이러한 불안정성을 해소하기 위해 살아있는 자기 가족들에게 자신들의 비참한 상태를 벗어나게 해달라고 때로는 병을 주고 재물을 잃게 하며 불행한 일을 겪게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살아 있는 인간은 자연스럽게 죽은 자신의 조상이든 억울하게 죽은 마을의 신이든 돈을 많이 들여 지노귀굿을 하여 노잣돈을 이들 귀신에게 주어 좋은 곳으로 가게 한다. 굿을 통해 그 귀신들도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게 되고 자신들도 병에서 해방되는 것이다. 때로는 재수굿을 통해 재물의 운수를 얻게 하는 등 역시 살아있는 이들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소하게 하기도 한다. 이는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종교적인 삶을 형이상학적 구도로 이해하기 보다는 지극히 현세주의적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결국 내재화 혹은 현실지상주의화 시키고 말았던 것이다. ‘세속화’ 문화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 행위로부터 벗어난 것이라면 이미 우리 문화 속에는 ‘세속화’ 정서가 자리 잡고 있다고 하겠다. 오로지 현세주의적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이해하는 신과의 인간 간의 관계는 상호의존적인 특징을 갖는다. 살아있는 인간들이 굿을 해주어야 신들이 불행으로부터 벗어나 좋은 곳으로 가게 되고, 인간은 이러한 종교적 의례를 통해 불행한 일들로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이런 신적 세계관 속에서 한국인들은 신과의 교제를, 혹은 신앙의 행위를 상거래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는 한국인들로 하여금 매우 실용주의적인 세계관을 심어주게 되었다. 자기들의 현세적 욕구 만족이 최우선 덕목이 되었던 것이다. 최근의 실례로 우리 민족이 황우석 박사가 인간 배아줄기세포 배양에 성공한 것을 크게 반긴다든지, 2005년 1월 12에는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 (복지부)가 ‘배아연구기관, 체세포 복제 배아연구기관 등록신청, 배아연구 승인신청’에 대하여 승인 허가를 내어 준 사실에서 찾아볼 수 있다. 어떤 실용적 가치가 입증되면, 즉 인간의 건강을 되찾게 되는 일이라면 윤리적인 문제는 크게 중요하지 않은 것이다. 이는 우리가 잘 아는 대로 무속에서 최고의 가치로 보고 있는 ‘건강과 재수’ 라는 관점에서 충분히 이해되는 사항이라 하겠다.44) 가족의 건강과 재물의 운수 혹은 축복이 전부 다였으며 이는 소위 ‘기복주의’ 사상을 고착화하였고 한국인의 현세주의 세계관에 있어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는 모두 초월의 신적 세계를 철저하게 내재화 혹은 현실주의 구도 하에 이해하였던 데에서 비롯되었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자연스럽게 인간과 신적 세계와의 구별 혹은 분리를 만들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세주의 세계관은 초월적 세계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갖게 하지 못하였다. 사후의 세계에서 살아갈 꿈 혹은 그 세계에 대한 희구보다는 현실 세계에서의 안주가 주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이는 사후의 세계에서 사는 것이라고 해도 현재 자신의 자식들이, 죽은 이후의 자기들을 위해 굿을 잘 해주면 된다고 생각하고, 이를 가능하게 하기위해 어떻게 하든 살아 있는 동안 재물을 많이 모아 자식들에게 물려주어 자기에게 잘해주게 하는 것이 최고의 인생 목표였기 때문이다. 당연히 우리 조상들에게는 사후의 세계 보다는 현실의 세계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우리로 하여금 소위 종말론적인 삶, 초월 세계에 대한 경외감 등을 상상할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우리 한국인들에게는 종교적인 삶이라야 현실주의적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는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이유로 기독교에서는 타계주의적 세계관이 중요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기독교 신앙인들은 기복주의적이고 현세주의적 관심이 더 지배적이 된 것일 것이다. 앞에서 밝힌바 무속 신앙의 최고 가치인 ‘건강한 삶과 재물의 축복’을 오늘날 한국 기독인들이 기도하는 제1의 제목이라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부활 신앙을 ‘믿고’는 있지만 부활 신앙을 ‘고대’하는, 즉 종말론적 신앙생활을 즐기는 경우가 많은 않은 것이 아마도 이러한 우리네의 현세주의 세계관의 영향이리라 여겨진다.45) 기독교를 수입한 경우에서만 그런 것은 아니다. 불교를 수입한 다음에도 우리는 “인도와는 달리 말세 혹은 절대자라는 관념이 희박하고, 현실의 일상적 인간 생활을 중시하고 초월적 보편을 무시하는 식으로, 어디까지나 현실 생활의 행복을 기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사원과 탑을 세우게 된 동기도 국가 내지 개인의 현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였던 데에 있다.”46) 결국, 이러한 초월과 내재 사이의 무차별성을 전제하여 현세주의 세계관을 형성한 우리의 문화 기초는 물질만능주의 사고가 만연하게 하면서 사회적 책임감을 결여하게 하는 등 사회 윤리적 관심을 형성하게 하는데 방해가 되었다.47)

   한국인들이 현세주의 세계관을 가지고 있어서 자연스럽게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종교적 개념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갖게 되지 못하였는데, 이는 앞에서 논의한 무교의 영향이 절대적이기는 하였지만 유교 사상 역시 깊이 관여하고 있었다. 우리나라에 들어온 유교는 형이상학적인 것이 아닌, 인간관계를 중심으로 하는 현실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표출하였다. 부자, 군신, 부부 등과 같은 대인 관계를 중심 주제로 하여 실천 도덕에 관한 윤리를 세워 나아갔다. 이런 의미에서 엄밀히 보면 유교는 인간관계를 규정짓는 윤리 체계이지 종교라고 보기는 어렵다. 조상 숭배 사상 역시 신적 존재에 대한 경외심에서 라기 보다는 남은 가족의 현세적 축복을 위한 의식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유교에서는 “형이상학이나 종교 같은 데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대부분 윤리적인 문제,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치중하였고 특유의 철학 사상을 창조하는 것도 아니었고 모든 것에 중용을 찾는 것이 유교의 중심 사상이었다.”48) 초월적 궁극 존재를 설정하여 이를 태극 (太極), 이치 (理), 하늘 (天), 상제 (上帝), 신 (神), 도 (道)라고 하였지만 이 모든 궁극 존재는 자연적 변화 과정과 생성 현상을 통해 주어지는 무인격적 존재요, 또한 그것은 스스로 대상적 존재가 되어 그 속에서 그 본질을 구현시키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이 실재는 인간의 문제를 풀어나감으로써 그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49) 즉, 인간의 문제가 유교의 출발이요 마지막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유교는 인간관계의 여러 국면을 규명함으로써 그 목적을 달성케 하는 지극히 현세주의적 세계관을 갖는다고 하겠다.

   한국에 수입된 이러한 유교는 중국 세계관의 기초를 놓은 역경 (易經)에 의해 큰 영향을 받았다. 역경은 중국의 세계관을 최초로 대표하였고 유교와 선교 (仙敎)에서 인정하여 받아들일 정도로 중국을 대표하는 책으로서,50) 우주 만물의 생성, 변화, 발전의 원리를 담고 있으며 특히 인간관계에 있어 조화를 추구하고 화해를 최고의 가치로 받아들이게 한 세계관이라 하겠다. 이러한 역경의 사상은 중용을 중시한 유교에서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한마디로 역경은 현실 세계의 운행 원리를 제시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 원리 핵심은 만물이 갈등 보다는 공존의 법칙에 따라 움직여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대 원칙에 따라, 우주 만물은 생성과 변이를 계속하는 것이다.

   역 (易)에 대한 어원적 의미를 분석할 때 이러한 사상이 잘 드러난다. 이 글자는 원래 도마뱀을 그린 그림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마치 이 짐승이 수없이 자신의 몸 색깔을 변한다고 하여 삼라만상의 그 생성 원리 중 가장 독특한 것으로 ‘변화’를 생각하고 도마뱀이 그 의미를 잘 상징한다고 하여 이 낱말을 만들었다고 하며, 또 다른 경우는 易이라는 글자가 日과 고대에는 月과 비슷하다고 한 勿로 구성되어 있어서, 낮과 밤의 상징으로서의 이 단어들을 양 (陽)과 음 (陰)으로 보고 마치 낮과 밤이 서로 바뀌면서 하루하루를 이어가듯이, 음양 (陰陽) 간에 상호 교호 작용을 통해 화합과 변화를 이루어 간다고 생각하고 만들어졌다는 것이다.51) 이러한 어원적 의미를 보아 역경의 원리는 ‘변화’라는 것을 만물 생성의 기본적 원리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모든 만물의 변화는 이 음양의 교환으로 설명 가능하므로 쉽고, 단순, 간단하다고 (易簡) 말할 수 있고, 그 변화는 일시라도 중지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동하는 것을 뜻하며 (變易), 또한 그 변화는 그 자체가 변하지 않는다는, 즉 변화 자체가 일관적이라는 것 혹은 우주 내에서 변화가 있지만 전체적으로 보면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不變).52)

   역경 (易經)에서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만물이 계속하여 존재하는 것은 음양이 언제나 상호 배타적이기 보다는 상호 의존적 방식으로 공존한다는 것이다. 양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음이 존재하지 않고 음을 무시함으로써 양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음은 양과의 관계없이는 있을 수 없고 또 양은 음과의 관계없이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이다.53) 이러한 사상은 만물이 존재하는 원리가 상호 간의 갈등 보다는 상호 인정, 상호 의지, 상호 화합의 관계를 갖고 있다는 것을 말하여 준다. 만물에는 이와 같이 이중적 구조를 지니고 있으면서도 통일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두 개의 대립 요소가 존재하지만 이는 곧 분리의 구도 속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라는, 하나를 지향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우주 만물에 대한 이해는 반대적인 성격이라도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구별된 구조 속에서도 서로 공존한다는 낙관적 견해를 제공한다. 이러한 음양 사고방식을 이정용은 “Both-and” 사고방식이라고 칭하였다.54) 이 사고 방식은 상호 대립적 견해라도 주역 사상에 비추어 보면 포용적이어서 궁극적으로 공존을 지향한다는 것이다. 나아가 하나는 둘, 쌍방에 있으며, 둘, 쌍방은 하나 속에 포함되어 있는 전체적이고 포용적인 구조를 지닌다는 것이다.55)

   아마도 이러한 포용적 세계관이, 예를 들어, (서론에서 말한 바와 같이 최근의 민간 방송이) 불교와 기독교가 서로 대립하지 않고 화해를 하도록 유도하여 결과적으로 종교다원주의 운동을 자연스럽게 마련하게 하는 것일 것이다. 배타적인 문화를 용인하지 않고 조화를 추구하며 나뉨이 없는 하나를 추구하는 우리 문화에서는 관용과 화해를 최고의 가치를 두는데 이는 모두 위의 포용적 세계관에서 연유한 것이다.56) 아마도 이런 이유에서 우리가 과거 청산 작업을 하는데 힘을 받지 못하는 것, 그리고 정치권에서도 항상 상생을 부르짖는 것이리라.

   또한 이러한 역경 (易經)의 원리는 우리로 하여금 신적 존재와의 차별성을 궁구하지 않게 하였다. 우주 만물 삼라만상이 상호 의존적이요 보조적 관계요 조화를 이루는 구조로 되어 있기 때문에 초월적 존재와 인간의 존재 사이에 투명한 분리를 생각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음양의 사고방식으로 본[다면] . . . 누구든지 神의 potential을 가지고 있으며 不完한 사람은 神이 아니지만 그가 完全하게 될 수 있다면 神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57) 즉 신이 있다면 그 신은 우리와 근본적으로 다른 존재로서 이해하기 보다는 바로 우리 안에서 찾아질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범신론적 사상은 사실상 종교적 의미에서 초월적 존재, 형이상학적 존재에 관심을 갖게 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세속화’ 신학을 앞에 정의한 대로 생각할 때, 우리 민족의 문화를 이루는 근원적 사고방식, 곧 현세주의 세계관이 ‘세속화’ 신학 작업을 하도록 되어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이러한 한국의 전통적 문화가 한국 교회로 하여금 ‘세속화’ 현상을 어떻게 구체적으로 만들어 왔는가? 이제 다음에 같이 논의 해보도록 하자.

4. 한국교회의 세속화 현상

   한국 교회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기초한 한국의 전통 문화의 영향으로 기독교를 내재화시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를 즐겨하였고 초월적 세계의 신비성에 크게 주목하지 않았다. 즉 한국(인) 교회는 우리의 문화의 ‘세속성’을 좆아 교회 안에서 그 세속성의 진면모를 보여 왔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보면, 서구의 세속화 신학자들이 초월적 신학 개념을 버리고 지극히 현세적 차원의 단순화를 지향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교리를 어떤 형태로든 단순화하고자 하였으며, 부정적으로는 지나치게 실용주의화 하여 교회의 순수성과 본질을 위협하기도 하였고, 또한 교회가 항상 현세의 삶으로부터 초연하지 않고 사회와의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기도 하였다. 이를 순차적으로 더 분석하여 보자.

4.1. 교리의 단순화

   우리 민족은 현실과 초월 사이의 형이상학적 구도에 관심을 기울이기 보다는 내재화를 주요 과제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에 모든 사건을 현실주의적으로 단순화시키려는 경향을 보여 왔다. 즉, 현실과 초월 세계 사이의 신비함을 주목하기 보다는 현실 세계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직관적이고 단순한 사고를 즐겨하였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에 대한 이해에서, 우리는 서구의 ‘세속화’ 신학자들이 하나님에 대한 개념을 단순화하여 고난을 내버려두는 분으로만, 즉 때로는 고난을 해결하여 주시는 분에 대해서는 소위 ‘기계장치’의 신이라 치부하고 버려버린 체 우리의 고난에 관여 안하시는 마치 이신론적인 하나님으로 단순화하였던 것처럼, 우리도, 내용은 정반대이지만, 역시 고난의 해결자로서의 하나님만을 기대하고 고난의 십자가를 지도록 하게 하는 하나님은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단순화 하곤 한다. 또한 삼위일체론에서, 삼위 하나님의 삶이 갖는 그 분의 신비한 존재를 그대로 보려 하기 보다는 단순 구도화하는 것을 원한다. 삼위 하나님의 (우리가 보기에) 복잡한 삶, 즉 삼위이면서 하나라는 개념을 이해하려 하여 그 신비를 수용하려 하기 보다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부분을 그대로 인정하려하기 보다는, 하나의 하나님의 변형적 형태로서 단순화하기를 즐겨한다는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음양의 사상을 기초로 본다면, 하나님 자신은 존재 그 자체가 (being-itself) 아닌 변화 그 자체이므로 (change-itself)58) 역동적인 하나님이라는 개념 아래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여야 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갖는 신 개념은 양태론적이다. 하나님의 삶을 너무 단순하게 바라 본 결과라 하겠다.

   기독론에서, ‘세속화’ 신학자들이 양성론의 신비함을 제거하고 하나의 인간으로서의 예수로 단순화시키듯이, 같은 원리로, 일부 보수 신학에서는 온전한 양성의 실재를 구체화하여 이해하려하기 보다는 신적 존재로서의 하나의 인격체로, 아니면 진보적 기독교인들은 예수를 인간으로만 생각하기를 즐긴다. 복잡한 구도, 신비한 메커니즘은 우리 문화에 썩 어울리지 않기에 그렇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양성이 한 인격 안에 존재하는 신비한 그의 삶 그 자체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우리에게는 실상 많은 인내를 요한다. 예를 들어, 양성이 한 인격 안에 존재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리스도의 ‘몸 밖에’ 그리스도가 있다고 하는 구도 (‘extra’ Calvinisticum) 속에서 그 신비를 수용하는 것은 상당한 사색적 훈련을 필요로 하는데, 우리들이 이해하는 방식은 세계 속에 그가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형식 아래에서 하나의 인격 안에 계시는 전 존재를 단순하게 받아들이기를 좋아하는 것이다. 바로 위에 언급한, ‘세계 속에 인격적으로 현존하시는 형식 아래에서 하나의 인격 안에 계시는 전 존재’라는 개념은 본회퍼가 받아들인 신앙으로서, 이는 곧 ‘유한은 무한한 것을 파악할 수 있다’ (Finitum capax infiniti)는 루터의 명제를 전제하는 것이다.59) 이러한 사상은 내재화 신학의 신 개념 이해이며, 한국인의 내재화 종교 이해의 영향을 받은 우리 또한 같은 선상에 있기를 즐겨하였다는 것이다.

   교회에 대하여도 우리는 보이지 않는 교회 보다는 보이는 교회를 중시한다. 적어도 로마 카톨릭과 같지는 않더라도 현세의 교회를 화려하게 만드는데 더 관심을 갖지, 우주적 교회를 앙망하지는 않는다. 물론 여기서 칼빈이 중시한, 보이는 교회의 중요성, 즉 지역 교회를 떠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에서의 현재적 교회를 생각하는 것을 가볍게 보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도를 넘어 개교회주의화하고, 대교회를 희구, 열망하는 것은 그만큼 우리가 교회의 초월적 의미보다는 보이는 교회 안에서 누리는 여러 가지 이세상적 가치에 더 관심을 갖기 때문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의미에서 종말론적 신앙 혹은 내세적 가치가 우리의 주목을 받는데 어렵게 하는지 모른다. 한국 교회가 대체적으로 현세적 축복을 중시하고 종말론적 신앙에 호소하기를 즐겨하지 않는 것은 한국인들이 갖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무시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4.2. 실용주의적 교회

   우리의 현세주의 세계관은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교리에 우리로 하여금 매력을 갖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신앙생활을 철저하게 실용주의적이 되게 하는 것이다. 교회가 성장주의로 올인하게 하고, 또한 이것이 최우선 관심사가 되면서 성경에 없는 직제를 도입하여 서리집사, 권사 제도를 만들게 하였던 데에서 그 실례를 찾아볼 수 있다. 이는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근간으로 하고 인간의 문제 해결을 중심으로 삼는, 유교의 인륜적 질서를 중시하였던 데에 따른 것이다. 즉, 한국 교회는 현세주의 세계관을 지닌 무교와 유교의 특징을 수용하여 교회 성장에 활용하였고, 이런 의미에서 “종교 혼합의 관용”을 통해 한국 선교가 성공을 거두게 되었다고60) 하겠다. 한편, 이러한 실용주의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국 교회는 더 심각하게는 이 “세상과 타협하는 [소위 종교적 타락을 의미하는] 세속화”를61) 촉발시켰다. 교회가 실용주의적이 되는 것은 이와 같이 교회의 순수성 혹은 본질을 벗어나게 하는 위험을 안고 있었던 것이다.  

4.3. 교회의 사회참여

   한편, 한국 교회는 초창기부터 교회 안에 갇혀 지내지 않았다. 세상적 관심과 유리하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이는 초기 한국 교회가 타계적인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무시하는 일변도로 나아가지는 않았다. 인류 민복을 위한 종교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불교가 호국 불교 형식을 취한 것과 마찬가지로 초기 기독교는 한국인의 일제 식민 생활을 간과할 수는 없어 적극적으로 민족 운동에 동참하였던 것이다. 예를 들어, 1911년의 105인 사건이 그것이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을 조작하여 700여명의 인사를 검거하여 105인에게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이때 기소자 123명 중 기독교인이 94명으로 전체의 76%에 이르렀을 정도로 당시 기독교인이 1%도 되지 않은 때에 기독교가 얼마나 사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는지를 알게 한다. 개인구원과 함께 민족과 국가를 위한 염려를 가지고 반봉건적인 활동을 하면서 자주적인 국가의 진로를 모색하고 있었던 것이다.62) 인권의 정당성을 주장하고 부정부패에 항거하는 등 사회개혁에 앞장서고, 협성회와 독립협회에 가담하며, 기도회와 경제적인 행동을 통해 또는 적극적으로 항일 운동을 하면서 애국 충군 운동을 전개하였던 것이다.63)

   그런데 한국 교회가 사회 윤리적인 삶을 살아간 것은 소위 서구의 ‘세속화’ 신학의 비종교화 개념과 외견상 유사하여 교회의 사회화 성격을 띠게 하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외형적 결과를 놓고 보면 초기 한국 교회는 대단히 사회참여적이었다. 그러나 이는 개인구원이라는 신앙을 지키면서 이루어진 것으로 서구의 ‘세속화’ 성격과는 다르다고 하겠다. 아마도 이는 한국인의 현세주의 세계관이 어떤 종교든지 현실을 초연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고 모두 내재화시킨 노력의 결과일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한국의 전통 문화가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윤리적인 삶의 형태로, 오늘날은 실용주의적 형태로 (세상적 가치를 추구한다는 의미에서의) 교회의 세속화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늘날에도 서구의 비종교화 형태를 취하여 포용적으로 나아가 종교다원주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지만 이는 아직까지 주류를 형성하고 있지는 못하다. 그렇다고 이러한 세속화 신학이 변두리에 머무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문화 자체가 포용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종교 간의 대화를 고무시키고 있는 데에서 (민간방송과 통신사의 협조로 종교간 화해를 주제로 한 홍보 캠페인에서) 그 사례를 발견한다. 그러나 현재 교회의 ‘사회화’에까지는 전반적으로 나아가지 않더라도 한국 교회의 사회참여 현상은 아주 부족하지는 않다. 빈민들, 노숙자를 돌보는 일, 장기기증, 사회복지 시설 운영 등 교회의 대 사회 봉사활동은 나름대로 적극적이다. 그러나 이 모든 사회 참여적 활동 이면에는 개인 구원이라는 전도의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에 이 또한 실용주의적 교회의 활동이라 하겠다. 비록 위에서와 같이 고상한 형식의 모습을 띠면서 말이다. 


   요컨대 소위 ‘세속화’ 신학이 갖는 특징, 곧 반 초월적, 반 형이상학적인 종교 이해, 교리의 단순화 작업, 실용주의적이고, 포용주의적인 자세 등을, 한국 문화는 이미 그 뿌리에 두어왔으며, 한국 교회에 그대로 전수하였다고 하겠다. 따라서 한국 교회는 한국의 전통 문화라 할 현세주의 세계관을 기초로 기독교를 받아들였고 이는 곧 세속화의 단계를 태생적으로 거쳐 가게 하였다. 세속화 작업이 부자연스럽지 않게 되었다는 말이다. 자연적으로 한국 교회는 세속화 신학적 방향으로 열려져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유입된 기독교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타계주의적 신앙을 형성하게 하여 교회가 지나치게 사회화로 흘러가게 하지 못하도록 하게 하였다. 이는 한국 교회가 오늘날 대체적으로 복음주의적이 되게 하는데 큰 영향을 주었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에서 상술한 바와 같이 세속화의 실체는 그대로 남아 있다. 그리고 우리가 노력하지 않으면 교회는 사회화 혹은 탈종교화로, 또한 포용주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고 나아가 지나친 실용주의 추구로 말미암아 교회는 세속적 타락에의 길로 점점 더 기울어지게 될 것이다. 이는 우리의 전통 문화가 바로 그러한 세속화를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며, 한국 교회는 바로 그 문화의 영향력 아래에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수천 년에 걸쳐 한 나라의 민족적 정서를 결정지어온 세계관, 예를 들어 우리의 현세주의 세계관은 좀처럼 바뀔 수 없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러기에 한국 교회의 세속화를 막는 길은 결코 쉽지 않다. 해결안이 있다면, 그것은 역시 장구한 세월에 걸쳐 세계관 재형성을 교육시키는 길일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다루어야할 주제가 될 것이다.


결론

   지금까지 우리는 한국의 세속화 현상이 한국의 현세주의 세계관의 현상적 실체임을 살펴보았다. 서구의 세속화 신학이 기독교 국가의 침몰에 따른 대안적 작업으로 제기되었고 과학 시대의 현대인들에게 새롭게 제시된 ‘비종교화’ 논리에 따라 전개된 반면에, 한국의 세속화 현상과 한국 교회의 세속화는 근본적으로 초월적이고 형이상학적인 개념을 철저하게 내재화 시켜온 우리의 현세주의 세계관에 따른 것이라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한국인과 한국 교회의 세속화는 무교와 유교 문화에 그 기원을 두고 있는 만큼, 그리고 그 문화는 우리의 핵심 세계관을 형성케 하였기에, 항상 우리 삶 속에, 심지어는 우리 교회 속에 잠재하고 있다고 하겠다. 이 땅에 여러 종교가 유입되었지만 모두 이러한 소위 ‘종교적’ 개념은 현세의 관심의 연장이거나 현세의 기복적 형태, 그리고 포용적인 종교다원주의적 접근을 취하게 한 것도 바로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래서 초월의 세계에 대한 기대, 혹은 종말론적인 삶 등에 대해서 열의를 가지고 생각한다거나 그러한 종교적인 것의 신비를 갖기 보다는, 그 신비를 단순화하기를 즐긴다든지 내재화 구도 속에서 철저하게 실용주의적 가치를 추구하는데 즐거움을 누렸다. 이는 우리 민족으로 하여금 사회 윤리적 연구 및 실천에 관심을 적게 갖도록 하였고, 기독교의 사회화 혹은 탈종교화에로 나아가게는 하지 않았지만, 종교의 세속화를 지속하게 하였던 것이다. 물론 일제 강점기를 포함한 최근에는 교회가 사회적 관심을 적지 않게 갖고 있는데 이것 또한 실용주의적 접근에서 그리고 종교적 이념의 내재화 혹은 현실화 관점에서 실시되고 있는 만큼, 이 역시 ‘세속화’ 현상에 다름 아니다.

   탈 종교적이거나 교회의 사회화라는 측면에서는 아니지만 우리 민족은 종교적 이념을 내재화시키고 실용주의적 견지에서 ‘세속화’를 지속하였다고 하겠다. 물론 다른 의미에서의 세속화, 즉 종교적 가치를 타락시킨다는 측면에서 한국 교회가 실용주의적 접근을 계속한다면 그러한 의미의 세속화에로 더욱 나아갈 것은 당연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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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Traditional Culture in Korea and the Secularization of Korean Church

Kwon, Moon-Sang (Prof. Westminster Graduate School of Theology,

Systematic Theology, Ph.D.) 

   This article examin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traditional culture and the secularization of church in Korea. The author argues that the this-worldly tendency in traditional Korean minds which is built up under the influence of shamanism, made Korean people take non-transcendental or non-metaphysical attitudes towards religious lives and eventually lead to secularization.

   The secularization in Korea did not originate from the import!!ed secularization movement in the West. Rather, it has its root in shamanism and Confucianism. Unlike the secularization of the western world in the latter half of 20 century, the secularization of Korean people and Church did not take on the quality of 'non-religiousness' of Christianity. Nonetheless, Korean secularization in society and Church lacked serious interest in the transcendental and eschatological dimension of Christianity, but rather developed, in the framework of immanence, simplified ideas of metaphysical concepts given in import!!ed religions such as Buddhism and Christianity, inclusiveness or religious pluralism, and pragmatism. Although Koreans did not turn to socialization or post-religious stage, they have nevertheless become secularized in their religious lives.

   Indeed, Korean Church has been showing a strong interest in social issues and problems not only in recent years but also at the period of the Japanese occupation. This was done, however, in terms of pragmatism and of the immanence or actualization of religious concepts, producing effects which are as good as the outcome of secularization. And if the Korean Church continues to take a pragmatic approach, it would also be surely 'secularized' in the negative sense of the word.

키워드

세속화, 현세주의, 세계관, 비종교화, 초월, 형이상학, 실용주의, 문화, 샤머니즘, 유교, 포용주의, 종교 다원주의, 사회화, 사회참여, 개인구원, 대안학교.

출처 : 창골산봉서방http://cafe.daum.net/cgsbong
글쓴이 : 둥근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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