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꾸리의 "걱정마"로 잠시 휴식을 가졌으니 오병이어 얘기를 계속해 보겠습니다. '다섯 떡과 두 물고기' 이야기를 읽으면서 성경적 상상력을 동원해 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런 상상력이 필요한 걸까요?
여러분이 영화 감독이라고 칩시다. 어떤 교단이나 선교 단체의 의뢰를 받아서 '다섯 떡과 두 물고기'를 영화를 찍는다고 합시다. 찍는 바에야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건 당연하겠지요. 좋은 영화를 만들려면 작품성과 메시지가 좋아야 합니다. 유명해 지고 돈도 벌 수 있습니다.
메시지의 핵심은 예수님이 초월적 능력으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하셨는지, 그리고 그런 기적을 통해서 어떻게 자기 앞길을 예비하셨는지 보여주는 겁니다. 그런 메시지를 위해서 좋은 시나리오와 음악, 카메라 기술과 배우들의 연기를 조화시키는 것이 바로 작품성이지요.
그래서 영화의 초점은 예수님의 초월성을 표현하는 데에 맞춰집니다. 오병이어 기적이 일어나는 장면과 과정을 담는 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설교나 성경공부에서라면 그건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사건 설명은 간단하니까요. 그냥 '축사하시고 나눠주시니까 오천명이 배부르게 먹고 열두 광주리가 남았다'고 '말'해 버리면 됩니다.
말보다 그림, 그림보다 동영상
그런데 영화를 찍을 때는 그게 안 통합니다. 그 사건을 그래픽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물론 꼼수를 쓸 수는 있지요. 장면을 그리는 대신 집회가 끝나고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서너 사람의 대화로 처리하는 겁니다.
"참, 그 떡 맛있데."
"물고기는 또 어떻고?"
"그걸로 어떻게 오천명이 먹었지?"
이런 식입니다.
그러나 기적의 장면을 그렇게 처리한다면 누가 영화를 보러 오겠습니까?^^ '십계'에서 홍해가 갈라지는 장면을 나레이션으로 처리해 버리면 되겠습니까? '벤허'에서 전차 경기와 문둥병이 낫는 장면을 대화로 뭉갰다면 사람들이 보러 갔겠습니까?
'매트릭스'에서 트리니티의 공중 발차기 3백60도 회전 촬영 장면을 생략하면 그게 '매트릭스'겠습니까? '스타워즈'에서 다스베다와 오비완의 레이저 칼싸움을 소리만 들려준다면 그게 '스타워즈'겠냐는 말입니다.
사람의 인식 작용은 '말'보다 '그림'에 적극적으로 반응합니다. '그림'보다는 '동영상'에 더 잘 반응하고요. 그건 우리가 겪는 현실에 더 가깝기 때문일 겁니다. 말과 글은 아무래도 추상적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오늘날 인터넷의 수많은 웹사이트 중에서, 글만 있는 곳보다 음악이 있는 곳이나 동영상이 있는 곳이 인기를 끄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지요.
따라서 오병이어 영화를 찍으려면 기적의 장면을 '보여줘야' 합니다. 그래야 좋은 영화 소릴 들을 수 있습니다.
문제는 성경구절과 영화 작품 사이에는 간극이 있다는 겁니다. 오병이어 기적에 대한 성경의 서술은 너무도 간단하고 생략이 많습니다. 그래서 감독은 성경과 영화 사이의 생략과 간극을 메워 줘야 합니다. 그게 바로 상상력이 해야 할 일입니다.
성경 안에 머무는 상상력
성경을 이해하는 상상력은 여느 상상력이 아닙니다. 그래서 저는 그걸 '성경적 상상력'이라고 불렀습니다. 성경 기록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는 상상력이라는 말입니다. 그건 그리스도인이라면 누구나 성경의 서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용어법은 다른 상상력에도 적용됩니다. 예컨대 60년대에 풍미했던 '사회학적 상상력'은 개인적 환타지를 말하는 게 아닙니다. 얼른 보이지 않는 사회 구조를 파헤치는 상상력을 가리킵니다. '미학적 상상력'은 그림 가격이 얼마인지 알아 맞추는 게 아닙니다. 표현기법과 시대정신에 견주어 작품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지요.
마찬가지로 성경적 상상력에도 규칙이 있습니다. 그건 '성경 기록의 완전성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어떤 경우에도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오류처리하지 않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성경적 상상력을 동원하려면 무엇보다도 성경의 기록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오병이어의 기본 플롯
다섯 떡과 두 물고기 기적은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된 기적입니다. 그만큼 복음서 기록자들에게 인상적인 사건이었다는 말이겠지요. 이 네 복음서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섯 떡과 두 물고기 기적 이야기의 전말은 이렇습니다.
"유월절이 가까워지자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제자들에게 모여들었다. 장소는 디베랴 바다 건너편, 구릉으로 둘러싸인 한적한 빈들. 예수님은 병자도 고치시고 하나님 나라 이야기를 해 주셨다.
날이 저물어 가자,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배고픈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다. 제자들이 그럴 돈이 없으니까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자고 했다. 예수님은 먹을 게 뭐가 있는 지 물으셨고 제자들은 다섯 떡과 두 물고기가 전부라고 대답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오십명이나 백명씩 무리를 지어 앉히라고 하셨다. 그리고는 떡과 물고기를 가지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 기도를 하셨고, 떼어서 제자들에게 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다. 사람들이 다 배부르게 먹고 남은 것을 모았더니 열두 바구니를 채웠다. 그날 거기서 떡과 물고기를 먹은 사람의 수는 남자만 오천명이었다." (마태14:15-21, 마가6:35-44, 누가9:12-17, 요한6:1-14)
이게 바로 다섯 떡과 두 물고기 기적의 뼈대입니다. 이 뼈대만 가지고도 훌륭한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마치 표본실의 해골과 뼈대를 가지고 인체구조를 설명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그 해골과 뼈대가 이야기의 전부가 아닙니다. 그 뼈대를 중심으로 기관과 근육과 살과 피부를 보완해 줘야 비로서 인체 이해가 가능해 집니다. 에스겔은 환상 중에 마른 뼉다귀들이 큰 군대를 이루는 모습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게 바로 성경적 상상력입니다.
물론 어떤 사람들은 '성경의 이러저러한 기록은 정황으로 보아 사실이 아닐 것'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것은 과학적 분석일 수도 있고, 고고인류학적 해석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건 적어도 "성경적" 상상력은 아닙니다.
오병이어의 성경적 상상력
지난 글/의견에 나온 '다섯 떡과 두 물고기'에 대한 해석이 네 가지입니다. 평미레는 '엘리야 벤치마킹설' 혹은 '무한 증식설'을 주장했습니다. 조앤님이 동조하셨고요. 문제를 처음 제기하신 김수석님은 '숭콰놨던 도시락론'이었는데, 시루봉님께서 찬성하셨습니다. 너굴 대감님은 '마술 같은 기술론'을 제기하셨는데, '무한 증식설'과 맥락이 닿는다면서 평미레가 찬성했습니다. 닥터만물님께서는 시공과 차원을 뛰어넘는 '하늘 식탁 직송론'을 제기하셨지요.
이런 상상력의 산물을 영화로 찍는다고 생각해 보십시다. 우선 닥터만물님의 '하늘 식탁 직송론'을 영상으로 옮기려면 하늘이 열리고 떡과 물고기가 예수님 손으로 우수수 떨어지는 장면이 돼야 하겠지요. 혹은 천사들이 떡과 물고기를 바구니로 예수님께 배달하는 모습을 그려야 할 지도 모릅니다.
너굴 대감님의 '마술같은 기술론'이나 평미레의 '무한 증식설'의 촬영은 비슷한 데가 있을 겁니다. 예수님이 한 손에 빵을 잡으시고 다른 손으로 뚝 잘라서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는데, 잘려 나간 자리에 어느새 그만큼의 빵이 다시 자라나 있는 겁니다. 물고기도 마찬가지고요.
김수석님과 시루봉님의 '숨겨놨던 도시락론'은 현실적이라는 장점이 있습니다. 어린아이가 도시락을 갖다 바치자, 감동먹은 사람들이 자기 도시락을 썩썩 꺼내서 예수님 앞에 쌓는 겁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걸 다시 제자들에게 나눠주시면서 사람들에게 분배하게 하시는 것이지요. 관악기가 많은 차이코프스키의 서곡이나 빠른 템포의 모차르트 바이얼린 협주곡 같은 걸 배경으로 깔면 아주 극적인 장면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장면을 선호하시는 지는 각자의 취향에 달린 문제겠습니다. 저는 여전히 '무한 증식설' 혹은 '마술 같은 기술론'을 더 좋아합니다. 앞에 정리한 성경의 기록과 마찰이 가장 적기 때문이지요.
예컨대 '하늘 식탁 직송론' 장면은 사람들의 눈에 전혀 띄지 않았다는 점에서 약간의 문제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런 장관을 눈으로 보았다면 복음서 기록자들이 그걸 써놓지 않았을 까닭이 없으니까요.
혹시 사람들의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진 '하늘 식탁 직송'이었다면 그건 기본적으로 '무한 증식론'이나 '마술같은 기술론'과 그다지 차이가 없어집니다.
끝으로 '숨겨놨던 도시락론'은 성경 기록과 좀더 마찰이 큽니다. 예컨대 '먹을게 뭐가 있냐'는 예수님의 질문에 제자들은 한결같이 '다섯 떡과 두 물고기가 전부'라고 대답했으니까요. 이걸 뒤집을 수 있는 근거가 성경에는 없습니다.
게다가 그때는 '날이 저물어 가던 때'였으니까 사람들이 도시락을 싸왔다고 하더라도 점심 때 다 먹어버리지 않았을까요?
예루살렘으로 여행하던 사람들이 점심 도시락을 싸왔을 가능성은 있습니다. 그러나 저녁이면 여관에 들어 저녁을 먹는 게 보통입니다. 그러니 저녁에 먹을 도시락을 따로 더 싸왔을 거라고 가정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문제가 좀 있습니다. '그럴 듯'하지가 않다는 거지요.
'숨겨놨던 도시락론'의 가장 큰 문제는 예수님의 도덕적 감화력은 강조하지만 그분의 초월적 능력은 부정한다는 겁니다. 그건 성경의 의도와 어긋나는 것이지요. 각자 싸온 도시락을 나눠 먹었는데, 먹고 남은 게 열두 바구니나 됐다는 기록은 또 어떡하고요?
'숨겨놨던 도시락론'도 상상력의 산물입니다. 하지만 그걸 '성경적 상상력'이라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의 현실적/상식적 이해력에 어필할 수 있다는 장점은 있지만 성경의 기록과 마찰을 일으키는 정도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무한 증식설'과 '마술같은 기술론'과 '하늘 식탁 직송론'은 성경 기록의 범위 안에서 이루어진 상상력의 결과라고 봅니다.
그 중에서 어떤 것이 더 당시 사실에 가까웠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지요. 그거야말로 나중에 하늘나라에 가면 목격자들을 찾아서 직접 물어보거나 아니면 예수님한테 직접 이야기를 듣는 수밖에 없겠습니다.
성경적 상상력의 세 요소
암튼, 이게 바로 '성경적 상상력'을 이용하는 방법입니다. (1) 상상의 날개를 마음껏 펴되 (2) 성경의 기록과 마찰이 일으키지 말아야 하고, (3) 그러면서도 그럴 듯해야 하는 것이지요. 그게 바로 성경의 메시지를 놓치지 않으면서도 성경 공부를 재미지게 하는 방법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평미레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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