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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중문화 비판

명호경영컨설턴트 2009. 7. 30. 13:29
 

아도르노적인 대중문화 비판

현대인에게 대중문화는 매순간 숨쉬는 공기와 같은 것이다.
문화라는 용어가 요즈음 각광을 받고 있지만 문화가 무엇인지 규정하기는 매우 난삽하다.

문화란 개인적 또는 집합적인 삶 자체를 일컫기도 하고, 실제적인 일이나 삶 자체보다는

여기서 벗어난 여가생활이나 놀이를 지칭하기도 하고, 이것을 관장하는

문화계 같은 특수한 부류의 활동을 뜻하기도 한다. 이처럼 문화라는 것은 특정화되기를

거부하는 모호한 개념인데, 사실은 이 모호성 안에 문화 개념의 본질을 암시하는

중요한 단서가 들어 있다. 그것은 미로 같은 ‘부분’들 속에 몰입하는 분석적 태도보다

엉켜 있는 ‘전체’의 메커니즘이나 분위기에 주목하라는 요구일 것이다.

 

한국 문화, 독일 문화, 고대 문화, 중세 문화라고 말할 때

우리는 개개의 자료나 정보보다 그 시대나 그 지역에서 삶의 재생산이 이루어지는

총체적 차원을 떠올리게 된다.
현대의 문화는 왕이나, 성직자, 귀족, 시민 또는 노동자가 주체가 되는 문화가 아니라

대중이 주체가 되는 문화이다. 그렇다면 대중이란 무엇인가? 대중은 없다.

있는 것은 이 대중 사회에서라도 일하고 느끼고 즐기고 욕구하고 좌절하는

개개인이 있을 뿐이다. ‘대중’이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이러한 ‘개인’의 정체성을

공주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부정하는 익명의 허깨비인데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것은 사실상 대세의 논리, 질(質)을 부정하는 양(量)의 논리, 현대사회에서

거역할 수 없는 대세를 장악한 장사와 산업의 논리, 궁극적으로는

산업사회의 새로운 신이 된 ‘자본의 논리’이다.


대중문화 이론에 대한 아도르노의 결정적 공로는

대중문화란 ‘문화산업’이라는 것과--오늘날 문화는 가장 부가가치가 큰 산업이라고

문화의 산업적 성격을 공공연하게 떠들고 있지만--, 구세계가 송두리째 무너져내리는

2차대전 중 미국은 민주와 자유의 땅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미국적 문화산업은

파시즘이나 스탈린주의와 다를 바 없다는 파격적인 명제를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명제는 60년이 지난 지금 명백한 현실로 입증되고 있으며, 텔레비전이 아직 제대로

출현하기도 전에 쓴 문화에 관한 글들은 마치 지금 시대의 문화를 묘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대중문화가 그 전신인 통속문화와 구별되는 변별점은 대중 매체의 존재이다.

‘매체가 곧 메시지다’라는 맥루한의 명제에서 느낄 수 있듯--소재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는

내용 분석보다 형식 자체의 분석을 통해 ‘내용’을 찾으려는 아도르노의 방식에

익숙한 독자라면 별로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지만--대중 매체에 근거한 대중문화는

테크놀로지의 산물인 그 매체 속에 어떤 내용이 담기든 산업의 대리인,

비지니스의 논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아니다.

 

경영 마인드라는 것이 모든 사물을 경영과 관리의 원칙, 돈과 자본의 논리에 따라

재구성할 수 있는 능력인 것처럼 대중 매체는 산업과 자본의 논리를 부지불식간에

모든 시청자의 무의식 속에 주입한다. ꡔ계몽의 변증법ꡕ에서는

‘라디오는 총통의 입’이라는 명제가 온 사방에 퍼져 있는 성령에 대한

악마적 패러디라고 말하듯, 문화산업은 우주 속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자본의 논리’ 안에서 재배치하는 기능을 떠맡는다.

 

지리학적 발상에서 나온 하비의 용어를 빌리면,

각자 나름대로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던 온갖 사물을 ‘탈영역화’ 하여

자본의 논리 속에서 다시 자리매김해주는 ‘재영역화’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주어지는 다채로운 내용들은 막간에 주어지는

 ‘주인’인 광고를 위한 부가 서비스일 뿐이다.

광고 수입의 증대를 위해 시청률 경쟁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산업과 테크놀로지의 논리를 대중의 무의식 깊숙이까지 내재화하는 뚜쟁이인

대중매체는 항복 선언을 한 난쟁이 ‘개인’들--이제 이들은 자연의 이치에 따라

대지를 보살피는 ‘주체’인 농민도, 정글 같은 도시 속에서 온갖 암초들을 피하면서

인생을 항해해야 하는 자율적 주체인 부르주아도 아닌--을 어루고 달래고 위로한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힌 짐승 같은 신세가 된 인간은 릴케의 ‘표범’처럼

우리 안에 던져진 고기덩어리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예전의 축제란

모든 것이 새로움인 어린아이의 세계에서는 놀이가 소꿉장난에서처럼 자연스럽게

삶을 터득하는 학습이기도 하지만 노동분업과 함께

시작된 문화(자연과 대비되는)의 틀 속에 갇혀있는 지루함에서 빠져나와 제한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나마 ‘뒤집기’의 해방을 만끽하는 순간이라면, 현대인의 휴일은

일을 더 잘 하기 위한 휴식이거나 일의 논리를 내재화하는 시간, 아니면

자신의 소득 수준에 걸맞게 문화상품을 소비하는 시간으로 변질된다.

 

‘사이렌의 노래’처럼 객관적 현실과 삶의 진실을 직시하면서

자유와 해방과 화해의 꿈을 꾸던 고급문화나 ‘진정한 예술’은 ‘중화’되거나,

고급 소비자들을 위한 서비스로서 전체 메커니즘을 위한 액세서리가 될 뿐이다.

클래식 음악 채널처럼 어쩌다 광고가 없는 방송은

 이 모든 것이 광고를 위한 것만은 아니라는 강변을 위한 알리바이로서

 다시금 전체 메커니즘 속에서 기능할 뿐이다. 고급예술과 대중예술의 차이는

미국의 팝 아트에서부터 사라지더니, 구시대나 구세계에 대한 콤플렉스를 벗어던진

포스트모더니즘에 오면 최후의 ‘개인’들인 모더니스트들의 비장한 거작들이

‘산 자의 머리를 짓누르는 죽은 자의 망령’으로 매도될 정도로,

고급문화의 붕괴는 전문 문화계의 이론과 실천으로 자리잡는다.


이런 식의 담론에 대해 혹자는 포퓰리즘적인 입장에서

엘리트주의적이 아니냐고 반론을 제기할지 모른다.

계몽의 변증법 에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19세기에는 존경할 만한 ‘교양’이 특권이었다면--교양 없는 사람들의

그만큼 증대된 고통을 대가로 지불했지만--, 20세기에는 모든 문화적 가치를

거대한 용광로에 녹여버림으로써 그 교양은 매각되었고

그 자리에 위생적인 공장의 작업공간이 들어섰다.

문화의 매각이 경제적 성공을 그 반대의 결과로 만드는데 기여하지만 않는다면,

그러한 매각은 문화의 옹호자들이 생각하듯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문화’ 개념의 모호성 안에는 자연상태의 무질서나 질곡에서 벗어나

 ‘인위에 의한’ 자연과 인간, 인간과 인간 사이의 바람직한 관계방식 같은

이상주의적인 가치도 들어 있는데, 민주적인 입장에서 문화와 교양의 폐기나

문화의 하향 평준화가 그 자체만으로

굳이(인간과 자연, 인간과 인간 사이의 새로운 안정된 질서를 만드는데 불가피한 희생이라면)

나쁘다고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신자유주의적인 질서는 질서가 아니라 반(反)질서이며, 브레이크가 파열된

산업 논리의 극단화이고, 이를 대변하는 강자들의 자기주장이며,

구체적으로는 미국 산업·언론·정치 복합체의 불안 의식과 투사(投射) 심리에서

나온 광기일 뿐이다. 굴러갈 때까지는 굴러가야 하는 것이 산업과 기술의 메커니즘이라는

이 지옥 기계의 유일한 대안일지도 모르지만--한반도 같은 열악한 지정학적 처지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위한 희생제물이 될 수도 있는 상황에서

우리에게는 세계화에 대한 저항마저 쉽지 않은데--그 ‘전율’을 느낄 수조차 없게 만드는

문화산업의 메커니즘은 또 다른 전율을 불러일으킨다.

 

이 메커니즘을 언뜻언뜻 느끼기도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 ‘공기’를 숨쉬고 살아가는 수십억 대중의 개개인들이 애처럽기도 하고

경이롭기도 하지만. 파시즘과 미국의 대중문화가 다르지 않다는

계몽의 변증법의 명제는 이라크 전쟁에서 사실로 입증되었다.

모더니티 체계가 형식적으로나마 자율적 주체인 인간들 사이의, 또한 국가들 사이의 관계틀

상호주의 하에서 이루어지는 거래와 야합, 그리고 간헐적으로는 법질서를 넘어서는

협박과 강탈로 점철된--이었다면, 컴퓨터 게임 같은 이 전쟁‘놀이’를 통해 명실공히

이제까지는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그래도 은밀히 진행되어 왔다면 역사상 어느 경우보다

강력한 ‘제국’이 출현했다. 미국 일방주의의 세계화와 히틀러의 파시즘에 차이가 있다면,

과거의 파시즘은 ‘특수한’ 종족이 다른 특수한 ‘종족들’ 위에 군림하려는

억지 ‘보편성’을, 모더니티의 주체들에게는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프로파간다와

야만적인 강권을 통해 획득하려 허망한 시도를 했다면, ‘부시의 푸쉬’는 자본의 논리

그리고 국민국가의 특수성을 넘어선 이민자들의 ‘다(多)문화’--사실은 자본의 논리 아래

사이좋게 놀도록 순치된--라는 보편성과 효율적인 문화산업--어떤 큰 이슈도 스쳐지나가는

 이미지와 정보의 홍수 속에서 실증적인 ‘사실’의 권위 밑에 녹혀버리는--을 수단으로

성공할 수밖에 없는 게임을 했다는 것일 것이다.

라이언 일병 구출작전이라는 쇼는 헐리우드 영화에 길들여진 대중이, 전쟁의 실상 대신

그 속에 의당 있어야 하는(그를 위해 필요하면 조작까지 해야 했던) 휴먼 드라마를

즐기도록 짜여져 있으며, 그 대중 속의 살아있는 ‘개인’들은 얼핏 진실을 예감해도

애써 눈감든지 아니면 진실이란 바쁜 세상 속에서 저절로 잊혀지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필자가 거칠게 전체의 ‘구도’를 실험삼아 만들어본 증인의 시각은,

대속을 통한 인류사의 역전이라는 위대한 환상을 품을 수도, 대안 불능의 상황에서

혁명을 꿈꿀 수도, 브레히트처럼 단계단계 최선의 실천에 투신할 수도 없는 상황에서

도도히 흐르는 탁류를 무력감 속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는--탁류에 휩쓸리지 않으려는

‘저항’만으로도 엄청난 에너지가 들겠지만--소수 인문학자의 슬픈 특권일 것이다.

김유동
현재 경상대 독문학과 교수
서울대 독문과 학부와 대학원 졸업
독일 자유 베를린대와 미국 듀크대에서 수학
저서로 {아도르노 사상}, {아도르노와 현대사상}
역서로 {계몽의 변증법}, {아도르노}, {후기마르크스주의}가 있다.

 

출처 : 흙집마을
글쓴이 : 비즈니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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