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 : 출옥성도들(1948, 평양)
주님의 사랑
한상동 목사님 옥중기
삼일교회 엮음
머 릿 말
한상동 목사님께서 일제 말기에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키시고 투쟁하시어 승리하신 역사를 기록하자면 큰 책으로 몇 권이 될 것이다. 그 혹독한 핍박을 5, 6년 옥중 생활에서 받으시고 승리자로 출옥하실 때에는 몸이 너무 쇠약하시어 걸어 나오시기가 곤란하셨던 것이다.
이런 불가형언의 옥고를 어찌 몇 페이지 팜플렛에다 기록할 수 있을까? 그것은 천부당만부당한 일이다. 주님을 위한 수난 성도의 고난을 자세히 기록하여 다른 성도들에게 알려서 신앙적 유익을 받게 함이 필요하나 한목사님은 이것을 어디까지든지 금하신다. 불초자가 애걸복걸하면서 그 옥고의 일부분이라도 기록하여 달라고 하였는데 고맙게도 허락하셔서 이제 그것을 여기 소개한다.
이 원고는 수년 전에 기록된 것인데 아무 수정 없이 그대로 세상에 내 놓게 됨을 사과하는 동시에 양해를 바라는 바이다.
1954년 7월 고려신학교에서 박윤선
차 례
머리말|2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까지|4
전도와 목회|5
환난의 시작|10
신사 참배 반대 운동|12
옥중 생활|20
하늘의 음성|22
기이한 현상|24
최후의 각오|26
주님의 사랑|30
해방과 출옥|33
하나님의 일꾼이 되기까지
주님께서 지금도 저와 같이 계심을 믿어서 알고(마28:20), 감사하신 내 주님을 증거할 수 있는 이 글을 쓰게 됨을 감사하는 바이다.
저는 나이 여섯 살 되는 때에 부모를 떠나서 10리가량 되는 곳에 있는 5촌 당숙의 집으로 양자로 가서 부모와 남녀 8형제나 되는 형제를 떠나 어릴 때부터 고독의 생활을 하지 않으면 안될 운명이었다. 21세 때부터 인생 문제로 고민을 당하다가 견디지 못하여 자살까지도 생각해 보았으나 24세 되는 봄부터 주께서 불러 교회에 출석하게 되어 25세에 세례를 받고 신앙으로 살게 됨에 따라 핍박이 시작되었다.
우리 풍속은 특히 선조의 제사에 대하여 관심이 많은 것이다. 동시에 저는 양자로 간 사람인 것만큼 본래 무자한 사람이 양자를 구함은 선조의 제사 문제가 중대한 일이 되는 것이었다. 사정이 이렇게 되고 보니 미리부터 예측한 바이었지만 예측 그대로 양가에서 쫓겨났다. 쫓겨나왔다가 양가 부모의 감정이 좀 식어지면 다시 들어가고 또 쫓겨났다가 또 들어가고 하여 약 3년간이나 쫓겨나왔다, 들어갔다 하는 중 별별 사건도 많았다.
그 중에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양가 부친께서 주야 3일간이나 가슴을 치며 무자하심을 한탄하여 통곡하시는데 이는 참 쫓겨나옴을 당함보다 더 심한 고통을 느끼었다. 한번은 문중 회의를 열었는데 우리 동리는 전 인구가 약800명가량인데 그 중에 우리 일가인 한씨가 약 250명이며, 이 사람들 중에 남자로 대표되는 이들이 삼, 사십 명 모여서 일가족을 위한 사건의 회의를 하고, 내게 파양선고를 한 것이다. 그 때 양모되신 어머님이 목을 매어 죽은 모양이라 대문 밖에서 들은즉 온 식구들의 곡성이 진동하였다. 나는 들어 갈 수 없어 대문 밖에서 듣다가 생각하기를 이제는 멀리 도망할 수밖에는 다른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전도사를 찾아 방문하고 사연을 말한 후 도망 하겠다 하였더니 오늘 밤은 전도사 댁에서 자고, 내일 되어가는 형편을 보아서 어떻게 할 것이라 하여 거기서 자고 보니 소식이 들리는데 별세하지는 아니하셨고, 목을 맨 까닭으로 아직도 괴로워하시는 모양이라 하며 양가에서 사람을 보내어 나를 찾아 왔었다. 이는 양가에서 생각하기로 축출을 당한 자식이 자살이나 하지 않았나 함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양가에 들어갔으나 가정의 불평은 여전히 계속되어 삼년이란 세월을 지난 27세 되던 9월경에는 아주 축출을 당하였다.(눅12:45-53)
그러던 중에 경남 진주읍에서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학교에 교편을 들고 있었으나, 그때부터 전도의 사명을 느끼고 성경 공부하고 싶어 서울 피어선 고등 성경 학교에 입학하여 공부하다가 그것도 만족을 얻지 못하고 주님의 복음을 전할 생각만 간절하여 마침 경남 여전도회 사업으로 전도인의 사명을 받아서 교회도 없고 신자도 없는 곳으로 전도하러 갔었다.
전도와 목회
경상남도 고성군 학림리란 곳은 옛날 풍속의 예의에 너무 완고한 곳이라 부부간에도 내외를 하는 곳이었다. 옛날 풍속에 남자만 거처하는 사랑방이 있어 이 남자가 자기 부인 방에 들어가야 할 일이 있어 들어 갈 때에는 뜰에서부터 기침을 하여 부인에게 들어갈 뜻을 알려 주면 그 부인은 주의하여 남자가 자기 방에 들어오기 전에 남자가 보이지 않는 다른 문을 열고 슬금 나갔다가 자기 남편이 방에 들어와서 볼 일을 다 보고 나가면 부인은 다시 조용히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고래의 풍속 그대로 지키는 동리였다.
또 한 가지 다른 남자와 서로 대하는 것은 무례한 것이라 하여 남자가 길을 가다가 여자가 오면 옆으로 돌아서고, 여자는 남자의 뒤로 지나가는 법이었다. 그러나 여자가 길을 가다가 남자를 만나면 좀 머뭇머뭇하여 보아서 남자가 돌아서지 않으면 이 남자는 하인이라, 예의를 알지 못하는 하인은 내외의 법을 지킬 필요가 없다는 의미에서 그대로 마주 보고 지나가 버린다.
이와 같이 아직도 옛날 고풍 예의를 지키는 곳에 처음으로 전도하러 나선 나 자신으로서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왜 그런고하니 이 동리에 있어서 전도인에게는 가옥도 빌려 주지 않기로 하며 동시에 수화(물과불)를 불통하고 누구와 더불어 이야기하며 전도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일주일을 금식하는데 화요일 조반부터 안 먹기 시작하여 다음 화요일 아침에 냉수를 마시고 일주일을 금식하며 기도하여도 여전히 전도는 되지 않았다. 그 때 나는 생각하기를 말만 지혜있게 잘해서 듣는 자로 하여금 답변할 수 없도록 하여 말로써 이기기만 하면 그 사람들이 믿어 신자가 될 줄 알았던 것이다.
지금에 생각하면 너무도 유치하였다. 가정에서 쫓겨 나오기까지 한 나로서는 전도가 되지 아니함에 대하여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주님을 위하여 부모도, 형제도, 친척도, 재산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라 나왔거늘 왜 전도가 되지 않는가 하고 나는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전도지로 옮길 때에 나를 한번만 더 전도인으로 써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전도회에 청원하였다. 전도회에서는 만2개년 내에 교회를 세우고는 다른 전도지로 이전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전도회에서 또 허락하여서 이번은 아주 불량자들이 많은 시골 시장인 경상남도 하동군 진교리로 갔었다.
나는 이곳에서 비로서 참으로 기도의 재미를 맛보았으며 경험을 얻었다. 밤2시, 혹은 3시 늦으면 4시경에 일어나서 산에 올라가 숲속에 가서 기도하는데 처음에는 바람 소리, 나무 잎사귀 소리에 무슨 짐승이 나오는 것 같아서 무서운 중에서 기도도 잘 하지 못하였으나 주께서 성령으로 은혜를 베푸시매 주님께서 저와 같이 계셔 주시마고 약속하신 말씀이 믿어졌다(마28:20)
나는 바람 소리도, 나무 잎사귀 소리도 들리지 않으며 육신의 감각이란 것은 도무지 모르고 오직 주님과 이야기하기를 시작하면 그 시간이 혹은 한 시간, 혹은 두 시간, 혹은 세 시간으로 괴로운 줄도 모르며 피곤한 줄도 모르고 기도할 수 있게 되어 그 기도하는 시간이 나에게 있어서 말할 수 없는 즐거움의 시간이 되어졌다.
전에는 예배당에서 기도할 때에도 사람들이 오고 나가는 것과 다른 사람의 기도하는 소리가 들렸는데 이렇게 기도에 재미를 본 나는 일절 외계로부터 오는 모든 것에 감각이 없어지고 오직 주님만 향하여 기도하는 데만 집중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전도가 되고, 안됨을 나는 하등 염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의외에도 신자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진실한 신자가 차차 많아졌다. 이는 꼭 주님께서 하시는 것이 확실하였다.
그 후 평양 신학교에 입학하여 졸업을 두 학기 앞두고 앞으로 교회로 나가 섬김에 어찌하며, 또한 어찌 될까 함이 나에게는 일대 문제가 되었다. 보통으로 보아 신학교를 졸업하고 나갈 때에 2, 3년 간은 아무 염려가 없도록 설교 준비가 되어서 교회로 나가는 데, 나는 설교 하나 준비 없이 그대로인지라 할 수 없어 두 학기를 앞두고 새벽 기도는 물론이거니와 토요일이 되면 밤을 새워 기도하였다. 그리하여 나는 신학교를 졸업하고 부산 초량교회에 조사로 갔다.
그 당시 우리나라에 있어서 신학교를 졸업하고서 목사로 가지 않고 조사로 가는 일은 별로 없는 일이었다. 신학교를 졸업하고 조사로 간 것만큼 그 교회에서 업신여김을 받는 감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2개월가량 지난 후에 그들이 자복하며 말하기를 “한조사님은 옛날의 한조사님이 아니고 아주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하였다. 그것은 기도하는 것도, 설교하는 것도 전과는 다르다 함이었다.
나 자신이 생각하여도 설교나 기도에 있어서 전과는 다름을 느끼는 바이었다. 그리하여 온 교회가 크게 은혜를 받아 교회가 부흥되는데 새벽기도회에 매일 출석하는 교인이 백여 명이 되어 새벽마다 은혜를 주시매, 형편상 기도회에 참석하지 못하는 교인은 늘 탄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어느 교회에서든지 1년 중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회는 계속하였는데 주께서 성령으로 친히 일하심을 알게 하여 주셨다.
그 후 경상남도 마산교회 목사로 시무하였는데 내가 가기 전에 마산 교회에서 나를 가장 사랑하는 어떤 장로님이 사람을 내게 보내어 하는 말이 “우리 교회에서 공동 의회를 열어 가결이 되어 목사로 청하였으나 사실은 모든 청년들과 기타 유력한 직분 중에서는 환영하지 않으니 우리 교회로 오지 않는 것이 좋은 것은 우리 교회에 왔다가 만일 배척을 당하면 교역 첫 걸음이 되는 일인 것만큼 한목사의 앞길이 막힐까 합니다. 또 우리 노회에서도 마산교회 목사로서 시무하기로 가결되었다가 다시 재론을 일으켜 한목사는 아직도 경험이 없고 유치한 사람이니 마산교회 시무는 합당하지 않다하여 의론이 많았습니다.”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때 기도하기를 ‘아버지여! 내가 마산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면 전지전능하신 주께서 어떻게 하여서라도 가지 못하게 하시고 만일 마산교회로 가는 것이 주님의 뜻 이오면 내가 그 교회에 가서 배척을 당하여 쫓겨나며 동시에 교역할 길이 막혀 세상 교회에서 버림을 당할지라도 이 희생을 달게 받겠나이다. 아버지여! 이 종의 희생을 돌아보시지 마옵시고 오직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 나는 대단히 시원하였다. 의외에도 나를 오지 말라고 사람을 비밀로 보내어 말하던 장로님이 친히 와서 자기 잘못을 자복하고 꼭 마산교회로 와야 될 것을 역설하며, 또 참인지 거짓인지는 모르나 노회에서 마산교회에 가는 것을 허락하기로 결의가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주님의 뜻인 줄 알고 마산교회 목사로 갔었다. 의외에도 첫 시간부터 주께서 은혜를 주셨다. 두 달이 지나매 청년들이 자복하며 자기들이 목사님을 알지 못하였다고 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전에 한조사 보다도 지금 한목사는 주님이 같이 하는 것을 잊지 않는 생활을 매일 매일 힘쓰고 있으며, 보다도 주님께서 같이하셔서 내 모든 일절을 주장하심을 알지 못하고, 한목사인 사람만을 보는 청년들의 하는 말인 것이다.
환난의 시작
수년 전부터 일본 국가가 강요하던 신사참배 문제로 직접 마산교회와 마산경찰서 사이에 마찰이 시작되었다. 지방 촌 교회에서 오는 조사님들의 말을 들으면 신사참배 하지 않는 자는 죽지 않을 정도로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준다고 한다.
한 가지 예를 든다면 어떤 조사님을 꿇어 앉혀놓고 다리 사이에 큰 몽둥이를 넣어 한 시간 이상이나 있다가 그것도 부족하여 순사 2명이 그 양단위에 올라 앉아 다리뼈가 부서지는지 어찌 되는지 감각이 없게 되어 걸음도 못 걸을 지경에 이르게 한 후 집으로 보내는지라 치료한 후 겨우 불구자는 면하였다고 한다.
나는 이에 고민한 것은 일찍이 죽어지면 오히려 다행이겠는데 만일 불구자가 되면 이 일을 어찌하나 함이었다.
이에 나는 기도하기를 ‘오, 주여! 이 몸을 드리나이다. 신사 참배를 반대하다가 불구자가 되어도 주님께 영광만 된다면 나는 이로서 만족하겠나이다. 전지전능하신 주여 뜻대로 하옵소서! 아-멘’
이렇게 기도하고 나니 나는 시원하였다. 하루는 마산경찰서에서 마산 시내에 있는 각 교회 제직 전부를 불러 좌담회를 한다고 하였다. 우리 당회에서도 각 직원들과 함께 참석하였다. 경찰서장 이하 서원 전부와 시내 중등학교 교장(일본사람)들도 참석하였다. 그리하여 경찰서장이 간단히 설명을 한 후 마산중학교 교장이 미리부터 단단히 준비를 하여 가지고 와서 신사 참배를 하여야 할 이유에 대하여 일장 연설을 하였다.
그 때 연설이 끝나자 서장이 나에게 신사 참배의 가부를 말하라고 하였다. 나는 그 자리에 들어갈 때부터 주님께서 나와 함께 계셔 주심이 믿어졌던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중학교 교장이 서장에게 말한 것에 대하여 옳은 것은 옳다고, 아닌 것은 아니라고 힘 있게 증거 하였다. 이렇게 힘 있게 증거 하게 된 것은 하늘의 권세와 땅의 권세를 다 가지신 주님께서 나와 같이 계심이 믿어졌던 까닭이었다.
그 자리에 앉았던 우리 믿는 형제들이 다 크게 두려워한 것은 한목사가 너무도 강하게 신사 참배를 반대하였은즉, 오늘 한목사는 크게 어려움을 당하리라고 짐작하였던 까닭이었다.
우리 믿는 형제들은 나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한편 서원들은 서장의 명령일하에 나를 검속할 태도를 보이었다. 그러나 서장의 태도는 의외에도 나를 주목하여 보다가 서원들을 보면서 검속하지 말라는 뜻으로 머리 짓을 하여 의사를 표시하였다.
아!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은 진실로 나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었다. 그리하여 우리 일행은 그 자리에서 무사히 나왔는데, 같이 갔던 우리 형제들은 그 된 일로 인하여 큰 힘을 얻었다.
그 후 마산경찰서에서는 매일 나 혼자 불러서 갖은 고난을 준 것이다. 그러는 중에 한 가지 증거 하고자 함은 신사 참배를 못할 이유를 기록하여 달라고 하며 만일 그 신사 참배 못할 이유가 합당치 못하면 용서할 수 없다고 위협한 것이다.
나는 기도하였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법관 앞에 설 때에 무엇을 말할까 염려하지 말라! 내가 말할 것을 주리라 하신 주님이시여! 이제 나에게 주시옵소서!’ 기도할 순간에 여섯 대지로 신사 참배 못할 이유가 환하게 알아지는데 그대로 기록하여 주었더니, 서장이 보고 ‘너 같으면 신사 참배 못하겠다. 나가라!’고 말하였다.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나와 같이 계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그러나 그 후부터 점점 형세가 흉악하여 마침내 나는 마산교회에 시무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대하여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못하나 간단히 말하자면 내가 마산교회에 있음으로 나 자신의 고난은 물론이거니와 보다도 온 교회 교인들에게 갖은 고난을 주게 되는 것이었다. 혹 어떤 교우 중에서는 한목사가 사임하였으면 좋겠다는 이도 있었다. 이는 교우들이 너무 괴로움을 당하는 까닭이었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
떠나기 어려운 나 자신! 보내기 싫은 마산 교회 형제들! 아 가슴에 뭉친 한없는 한탄에서 말 못하고 흐르는 눈물은 나의 일생을 통하여 잊을 수 없었다. 나는 부산으로 나가 약 1년이란 세월을 가만히 침묵하고 있으면서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한 방법은 신사 참배하는 목사가 인도하는 교회에는 교인으로 하여금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출석하지 못하게 한 것이며, 신사 참배한 목사나 교인들에게는 인사도 아니 하며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여 교우들에게 보여 주니, 이와 같이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 참석하지 아니하며 신사 참배한 사람과는 인사도 아니 하고, 한 자리에서 먹지도 아니하는 교인이 차차 많게 되어 마침내 전국적 문제가 된 것이다.
이 일에 대하여 나는 어느 주일날 예배 보러 갈 교회가 없으므로 산에 올라 가서 홀로 예배를 보았다. 예배하는 순서에 따라 찬송도 하며 기도도 하고 성경도 보며 설교도 하여 모든 순서가 다 되었는데 마지막 축복 기도도 하여야겠는데 앞에 교인이 보이지 않는지라. 나는 두 손을 들어 우리 강산 교회를 향하여 축복 기도를 할 수 밖에 없었다. 그 때 한국 교회가 장차 여호와의 축복을 받을 것을 기뻐하였다.
그 후 1939년 여름이었다. 부산 근처인 해수욕장에서 몇 사람의 동지가 모여 수양하면서 기도하였다. 이때가 우리 한국 교회의 재건의 시작이었다. 그 때부터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동기가 되어진 것이다.
기도하는 중 한국 교회를 위하여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철저히 할 필요를 깊이 느낀 것이다. 이 수양회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왔는데 하루는 마산 교회 김두석이란 여학교 선생에게서 편지가 왔다. 편지 내용은 신사 참배 문제로 고민이 되니 어떻게 해결할 방침이 없을까 함이었다.
나는 즉시 마산으로 가서 찾아보았으나 문제는 단순하지 못하였다. 여학교 선생으로 처녀인데 이 여선생의 받는 월급으로 늙은 어머니와 홀로 있는 오빠, 이 세 식구가 그날그날 생활하여 가는 것이다. 만일 신사 참배를 하지 않으면 학교 선생으로 있을 수 없으니 3인의 생활은 물론 어려운 문제이고, 신사 참배를 할려니 신앙 양심으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요, 신사 참배를 하지 않고 그대로 선생으로 시무할려니 남자도 견디지 못하는 일을 처녀의 몸으로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와 같이 계시는 주 예수여! 이 일을 어찌하오리까?” 나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이 세 식구를 향하여 나는 이렇게 말하였다. “공중에 나는 새도 먹이시는 주님께서 여호와의 계명을 지키기 위하여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모든 생활을 주님께 맡기며 주님을 믿는 신앙만 있다면 학교 선생 직을 사직할 수밖에 없습니다.”라고.
말이 떨어지자 늙으신 모친은 “나는 이대로 죽임을 당하여 죽을지언정 신사 참배하고 받는 월급으로 먹고 살기는 원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니 김두석 선생은 쾌활하게 “나는 학교 일 보는 것 그만 두겠습니다.”하며 이제는 3인의 생사 전부를 주님께 맡긴다는 기도로 그 밤을 나하고 네 사람이 혹은 울며 혹은 기뻐하면서 기도의 밤을 지낸 것이다.
이는 목사인 나 역시 생활의 앞길이 막연한 것이었다. 그 후 김두석 선생의 2개월 동안 옥중에서 말할 수 없는 고난의 생활은 전 한국 신도에게 무언의 설교가 된 것이다. 동시에 그 오빠와 그 어머님, 아! 말할 수 없는 그 고통의 생활, 그 쓰라림의 사정을 그 누가 알 사람이 있으리요.
1939년 10월경이었다. 나는 밀양군 마산리란 작은 촌 교회에 가서 2-3개월간 고요히 침묵하고 있을 때에 된 일 중에 한 가지 증거 하고자 한다. 이 작은 촌 교회에서 세례를 베풀기 위하여 일주일 전에 세례 베풀 것과 성찬 먹을 광고를 하고 그 주일 안에 세례 내용과 성찬 준비가 다 되었는데, 주일을 당하여 새벽에 예배당에 나가 기도하는데 내 일생을 통하여 기도하던 중 그 때와 같이 어려움을 당한 그 경험은 나 자신 외에는 알 자가 없을 것이다. 무엇이라 어떻다고 말하여야 좋을지 한 말로 말하자면 기도가 되어 지지를 않는다는 것인데, 기도만이 안 된다는 것보다도 사방에서 들려오는 그 무서운 세력이라고 할런지, 형언할 수 없는 일을 당한 나는 견디다 못하여 산으로 도망하여 5일 만에 집으로 돌아오니 경찰서에서 목사, 장로, 집사, 제직 전부를 호출하였다. 그리고 목사가 산으로 간 후 교우들은 철야하며 교회를 떠나지 않고 기도하여 많은 은혜를 받아서 성례를 거행함보다 이상으로 주님위하여 헌신할 힘을 얻은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 제직 전부가 경찰서에 갔었다. 사건은 신사 불참배한 일인데 나에게 신사 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라 하기에 나는 산에서 기도하고 온 것만큼 힘이 있었다. 열심히 신사 참배 못할 이유를 말하는 중에 중지를 당하였다. 그리고 동행한 장로 집사들에게 신사 참배 가부를 물었으나 전부가 힘있게 반대하였다. 이상하게도 경관들이 힘을 잃어 말을 잘 하지 못한다. “오늘은 그만 두고 수일 후에 너희 교회로 가서 전 교인들 있는데서 신사 참배 인식을 시킬터이니 그리 알고 오늘은 다 돌아가라”고 하였다. 우리는 무사히 돌아 와 승리의 기도로 감사를 드리고 수일 후에 오겠다는 경관을 기다리면서 기도하였다.
하루는 정복 혹은 사복 입은 경관 4인이 그 이웃 동리에 있는 경방대원인 청년 삼, 사십 명을 데리고 와서 교회를 둘러싸며 시위를 한다. 촌사람들이 크게 야단이 난 것처럼 두려워하여 어찌 할 줄을 모르는 것이었다. 불신자들은 교회가 당장에 없어지는 것 같이 구경을 한다. 목사인 나에게 한 시간 이상이나 신사 참배 강요하며 위협을 하였다. 그 다음으로 장로를 불러서 말하였으나 신사 참배는 죽어도 못하겠다고 하매 “전에 한 목사 오기 전에는 어찌하여 신사참배를 하겠다고 하였느냐?”고 묻는 말에 대하여 “전에는 너무 강제로 위협함에 부득이 하여 하겠다고 하였지마는 이제는 죽어도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경관들은 목사와 장로에게는 실패한 줄 알고 교인들을 모아 놓고 연설을 하여 인식을 시킬려고 하였으나 한 사람도 신사참배를 하겠다는 사람이 없었다. 그 경관들이 돌아가면서 내일 아침에 목사와 장로는 경찰서로 오라하고 가더니 이튿날 아침 일찍이 와서 하는 말이 “한목사! 오늘 어디로 갈 일 없느냐?” 묻기에 그 때 미리부터 부산 가기로 약속한 일이 있었으므로 나는 “부산 갈 일이 있노라”고 대답하였다. 경관들은 말하되 “그러면 부산으로 가라 그리고 한목사가 경찰서에 오지 않으니까 장로도 경찰서에 올 것 없다”하면서 떠나고 말았다.
아! 진실로 우리와 같이 계셔 주시는 주님은 어찌 이렇게도 권능을 베푸시는지! 성찬을 베풀려던 그 주일날에 기어코 산으로 보내어 기도하게 하시며 온 교회로 하여금 또한 기도하게 하시고, 그로 인하여 받은 은혜로 이렇게 승리하게 하시니 과거 기독교 역사 중 목사가 성찬을 베풀기로 준비한 주일에 교회를 비어 두고 산으로 도피 하였다는 것은 보지도 못하였고 또는 듣지도 못하였으며 또한 정신병자가 아니고야 이런 일이 있을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결코 정신에 이상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나 역시 지내고 보니 어찌 그리 하였던 가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나는 참으로 찬송한다.
1939년 12월경이었다. 경찰서에서 다시금 우리 교회 제직 전부를 호출하여 목사 장로를 옥에 가두었다가 2주일인 15일을 지나, 한목사와 장로는 경찰의 수단과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다는 자기들의 낙망에서 인지 모르나 우리들을 출옥시켰다.
그리하여 일반 신자들은 우리를 의심하였다. 신사 참배하기로 허락하지 않고는 결단코 2주일 만에 출옥할 수 없다 하여 우리들을 불신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가두었던 밀양 경찰서 서원이 이를 증명하였다. 검속당한지 2주일 만이었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불러 인식을 시켜 볼려고 할 때에 나는 기도하기를 “나와 같이 계시는 주님이시여! 내 연약함을 아시오니 이때에 주님께서 저를 돌보아 주시옵소서.”하며 나는 전심으로 주님을 향하였다. 경찰서 서장이 나를 주목하여 보더니 하는 말이 “신사 참배를 못 하겠다 하니 만일 금후로 다른 법에 조금이라도 위반하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하며 고등계 주임을 보고 출옥 시키라는 것이었다. 장로님을 모시고 우리는 출옥하여 우리 교회를 향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온 교우들이 나와서 우리를 영접하여 주었다.
그 중에 한 여자 청년이 나에게 묻기를 “목사님 어떻게 되었습니까?”한다. 이는 신사 참배하기로 허락하고 출옥하심이라는 의미의 물음이었다. 나의 대답은 “주님을 믿으라! 그리하면 만사가 형통할 것이요, 주님만 신뢰하여라! 그러면 권능을 얻으리라”하였다. 신사 참배 문제로 검속 되었다가 2주일 만에 무사히 출옥됨은 전국에 없는 일이었으므로 일반 신자들이 우리를 의심함도 무리는 아니었다.
1939년 12월경이었다. 이인재란 형님이 평양신학교에 공부하러 갔다가 신사 참배 문제로 개학을 못하매 평양신학교 기숙사에 머물러 있으면서 개인 교수를 받고 있었다. 이 때 어떤 청년이 와서 돈 4백원을 주면서 말하기를 “신사참배 하지 않는 운동에 사용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기로 그 돈을 가지고 나에게 찾아와서 상의하는 것이었다. 인재 형님은 부산 근처인 해수욕장에서 같이 수양하며 기도하던 분이요, 신사 불 참배 운동을 하여 한국 교회의 신앙 자유를 부르짖으며 한국 교회의 신앙 부흥 운동을 하리라는 나의 중심을 아는 분이었다.
그리하여 이인재 형님과 같이 경남 각 지방을 순회하며 신사 참배 반대는 물론이고, 각자 개인 신앙 부흥 운동을 시작하였는데, 실행할 조목은,
1. 신사 참배하는 교회에는 출석하지 아니할 것.(이는 신사 참배하 는 목사가 그 교인을 인솔하여 가지고 시시로 신사 참배하러 가는 것 때문이다.)
2. 신사 참배한 목사에게 성례를 받지 아니할 것.
3. 신사 참배한 교회에 십일조와 연보를 하지 아니할 것.(우리 개인 신앙 부흥 운동하는 일에 연보하여 도와 주기 위한 까닭이다)
4. 교회 출석하지 않는 교인끼리 모여 예배 하되 특별히 가정예배를
할 것.. 등
경남에 있어 분담하여 일할 구역은 부산 지방, 마산 지방, 진주 지방, 거창 지방, 통영 지방의 5구역으로 하여 각 참배 반대를 하며 개인 신앙 부흥 운동과 함께 연락을 취하였다. 이렇게 운동하며 다니는 중 가는 곳 마다 모든 신도들이 크게 환영하여 주었다. 신사 참배한 목사들 중에도 이 운동에 가입하는 목사도 있었고, 가입하지 아니하는 목사들은 신도들에게 배척을 당할까 하여 두려워하였다.
그 중에 한 가지 내가 담대하여진 것은, 어느 날 나는 마산에 있는 김두석 여자 선생 집에서 자고 새벽 여섯시 경이나 되었을 때에 의외로 마산경찰서 고등계 형사 한 사람이 와서 주인을 불러 말하기를 “이 집에 어떤 손님이 오지 아니 하였느냐?”고 묻는다. 나는 경찰서 고등계에서 와서 묻는 줄 알았다. 주님이 나와 같이 계시니 무엇이 두려우리요? 내가 곧 나서면서 “예, 제가 왔습니다.”
“한목사요?”
“예, 그렇습니다.”
이러한 문답을 하였다. 물론 이 형사는 어떻게 알았든지 한목사가 이 김두석 선생 댁에 와서 자고 있는 줄 알고 찾아 온 것이었다. 문답은 다시 계속하였다.
“ 한목사 요사이 무엇 하노라고 이곳저곳 다니느냐?”고 한다.
“신사 참배 반대 운동하러 다니노라. 그리고 이 반대 운동은 결단코 비밀로 하지 아니하겠노라. 왜 그런고 하니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다하여 놓을찌라도 또 다시 당신들이 경찰의 힘으로 탄압을 할터이니 우리들의 운동이 무슨 효과가 있으리요? 그러므로 우리는 합법적으로 정부가 양해되도록 할터이니 안심하시오”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이 잘 되느냐?”
“물론 잘 됩니다. 신자로서 누가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으리요?”
“혹 여가가 있으면 경찰서에도 자주 와 주시오.”한다.
나는 물론 금명일간에 검속될 줄 알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그 후 2, 3개월이 되도록 검속하지 아니하였다. 주님께서 하시는 일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주께서 친히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신다.
옥중 생활
1940년 7월3일이었다. 나는 경상남도 경찰부 유치장에 구검이 되어 인생으로서는 차마 견디지 못할 어려움을 당하였다. 나는 그 어려움을 당할 때마다 사랑하는 주님께 나의 전 생명을 맡기었다. 아무리 어려운 일을 당하여도 우리 주님께서 나를 천당으로 데리고 가신다고 믿었다. 형사는 물론 나의 숨이 끊어지도록 어려움을 주었다.
그러나 나는 주님을 향하여 다른 세계에서 주님과 교제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나의 얼굴은 태연하였다. 평화의 세계를 참으로 맛보았다. 주님의 그 크신 사랑을 나는 그때 맛을 보았다. 참 그 사랑은 샘솟듯 하였다. 나는 가진 어려움을 당하여 나의 몸을 자유로이 할 수 없었다. 그 때 주님께로부터 오는 한없는 그 사랑! 아- 나는 너무 감격에 넘쳐서 울었다.
내가 부산에서 검속 된지 수개월간 취조를 당하는 중 심문하는 조건은,
1. 독립운동을 하였다는 것인데 이 문제로 수 개월간 당하였고.
2. 외국 선교사에게 돈을 받고 스파이 노릇을 하였다고 고초를
당하고.
3. 주님께서 재림하사 천년 왕국 건설 운동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한국 독립 운동을 하였다는 일에 대하여 취조를 하는데 물론 어려움을 당하였고 다음으로는 외국 선교사에게 돈 받고 스파이 노릇을 하였다 함에 있어서도 물론 또 어려움을 당하였다.
만 1년을 지나 1941년 7월10일에 평양으로 갔다. 평양 경찰서 유치장에서 하루 밤을 지냈는데 주님의 은혜로 뜻하지도 못한, 이미 순교를 당하신 주기철 목사님이 갇혀 계신 방으로 들여보내어 주었다. 나는 너무나도 반가웠으며 그 밤은 참으로 잊을 수가 없다. 주목사님과 모든 이야기를 하지 못하게 했다. 이것이 주목사님과의 마지막 말씀이 될 것인 줄, 나는 이미 각오한 바이었다.
“연로하신 어머님을 두고 나 먼저 세상을 떠나는 것은...” 하시고 다음 말씀을 하지 못하였다. 간수는 “주 목사님과 말씀 다 했지요”하며 부산과 다름없는 평양 간수였다. 때에 주 목사님은 눈물에 잠기어 침묵하여졌다.
다음 날에는 검사의 간단한 심문이 있은 후 나는 평양 대동 경찰서 유치장으로 가서 약 일 개월 반 가량 검속되어 있었다. 나는 오후마다 매일 열이 나기 시작하여 한 달 동안이나 계속하였다. 의사의 진찰을 요구하였으나 쉬이 출옥하려는 핑계로 진찰을 시켜 주지 아니한다. “오 주여! 뜻대로 하소서!”하는 기도가 매일 매일 그날그날의 나의 생활이었다.
1941년 8월25일경에 평양 형무소로 옮겨가서 만5개년에서 체험한 주님께서 친히 하신 일을 몇 가지 증거 하고자 한다.
형무소에 들어간 지 3일 만에 진찰을 받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전에도 27세 때에 오후마다 열이 나며 기침이 나므로 부산 철도 병원 내과 박사에게 진찰 받은 결과, 의사는 상세한 이야기는 아니 하였으나 부산이나 기타 도시를 떠나서 공기 좋은 촌으로 가지 않으면 아니 된다고 말하였는데, 그 때 다행히 경남 여전도회 전도인 으로서 교회 없는 곳에 가서 전도하기 시작하므로 병에 대하여는 잊어버리고 지냈던 것이었다.
진찰한 의사는 중병으로 고생한 일이 없느냐고 묻더니 벌써 알았다하며 그 날 부터는 폐병 환자로 취급하여 폐병에 필요한 약을 주었다. 나는 낙망하였다. 폐병 환자로서 옥중에서 생명을 보존하리라고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나는 이 세상에서는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되지 않을 수 없었다.
하늘의 음성
수일을 지낸 후 어느 날 밤에 잘 시간이 되어 누워 잠이 들려고 할 때였다. 의외에도 나의 이름을 고성으로 부름에 나는 깜짝 놀라서 일어났으나 독방인 것만큼 너무도 고요하였다. 나는 폐병 환자인 것만큼 또한 고달파서 그대로 누웠으나 잠은 좀처럼 들지 않았다. 그 다음 날 밤이었다. 다시 공중에서 고성으로 나를 부르는데 이번은 이름을 부르지 않고 한목사라고 부르는데 똑똑하고 확실하였다.
그리하여 나에게 지시하시는 것은 “기도하라”는 것이었다. 나는 고달픈 몸이나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밤인지 주께서 몽중에 나타나 나의 몸이 건강할 것을 보여 주셨다. 옛날 사무엘을 부르시던 주님께서 지금 저와 같이 계셔 주심이 너무도 확실했다. 한국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여 주시는 외국에 계신 부모 형제자매여! 안심하여 주십시오. 우리 주님이 한국에도 살아 계셔서 친히 일하심이 확실합니다.
만천하 형제여! 주님께서 지금도 살아계셔서 우리와 같이 계시나이다. 나는 그 때부터 의사의 진찰도, 약 먹는 것도 다 그만 두었다. 의사와 간수는 염려하였다.
그 다음해 3월경인지 또 다시 기침도 나며 담이 나오는데 피도 심하게 나왔다. 의사에게 진찰을 받으니 의사는 비웃었다. 그들을 본 나는 기도하였다. 주께서 또 나에게 보여 주시는 것은, 결코 이 병으로 인하여 세상을 떠나지 않을 것을 보여 주시고 위로해 주셨다. 매일 진찰하고 약도 매일 먹었다. 그런 중에 의사가 나의 태도에 있어서 이상하게 본 것은, 모든 사람들은 병 아닌 것도 병이라 하여 병보석으로 출옥하여 보겠다고 별별 수단으로 말하는 사람이 많은데, 의사가 나를 볼 때에 병은 중한데 한 번도 의사에게 병보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함을 보고, 병세를 보아서는 보석으로 출옥을 시켜야 되겠는데 한번이라도 의사에게 머리를 숙이는 태도를 보이기만 하면 출옥 시키려 했으나 최후까지 주님만 바라보는 나에게는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다. 의사는 나를 병실에 보낼 것인데 나의 태도만 보아서 하루 일찍 병보석으로 출옥시킬 것으로 하여 매일 매일 나의 입으로 의사에게 청원하여 나갈 수 있도록 나에게 기회를 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간수는 내가 진찰하러 나갈 때마다 나에게 말하기를 “아무쪼록 의사에게 말을 잘하여 속히 집으로 나가 치료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 나의 전부를 맡기는 동시에 또한 보석되어 출옥함이 주님의 뜻이고 유익이 될진대 의사의 마음을 주님이 주장하사 출옥되게 하시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간수를 통하여도 되지 아니하매 의사가 직접 나에게 말할 기회를 몇 번이나 주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의사가 친히 독방에 있는 나에게 와서 가장 친절히 하며 주사도 놓아주고 하여 말 할 기회를 주었다. 나는 말을 아니 하려는 것보다 말을 할 수 없었다. 그 까닭은 나의 책임 문제이니 전국에 신사 참배 반대 운동을 일으킨 일에 대하여는 물론, 다른 사람도 반대는 아니 한 것은 아니로되 특히 나에게는 이 책임을 지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내가 전국뿐 아니라 만주에까지 문제를 일으킨 사람인 까닭이다.
그리하여 내가 가서 말한 곳에서 내 말을 들은 사람마다 한 사람도 남김 없이 다 검속되었고 또 나와 편지 거래한 사람마다 다 검속되어 말할 수 없는 고난을 당하며 여전히 검속되고 있는 까닭에 다른 형제들은 옥중에 두고 나 혼자 나가 평안히 누워서 치료하고 있을 수가 없었던 까닭이었고, 또는 내가 검속되기 전에 각 교회에 다니면서 부탁한 말은 금일 가담한 이 문제에 있어 희생은 우리가 당할 터이니 아무쪼록 하나님께 기도만은 하여 달라고 부탁한 것인데 이미 내가 희생을 당하겠다고 각오한 바이었고, 또한 만일 우리가 출옥하게 되면 전국에 숨어 있는 형제들의 기도가 끊어지는 까닭이었다.
기이한 현상
또 한 가지 더욱 큰 문제는 주님께서 도저히 무슨 문제로든지 출옥하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이에 대한 나의 증거는 이러하다. 내가 병으로 인하여 오랜 동안 식사를 잘 하지 못하였는데 어느 날 밤 잘 시간이 되어 누워서 잠을 자려할 때, 비몽사몽간이었다. 곳은 여전히 내가 갇혀 있는 형무소 독방인 감방인데 언제나 감방에서 주는 그 밥을 주는 것을 받아먹는 것을 보여 주었다. 눈을 떠 보니 캄캄한지라. 아마 나의 신경이 약한 관계인가 하고 또 잠을 자겠다고 하는데 두 번째 또 그와 같이 밥을 주는 것을 다 먹어버렸다. 나는 여전히 예사로 생각하고 또 다시 잠을 자려고 할 때, 세 번째 또 그와 같이 주는 밥을 다 먹어 버렸다. 나는 그제야 이상히 생각 되었다. 네 번째 또 그렇게 주는 밥을 다 먹어 보았다. 그제야 나는 일어나 기도하기를 “주여! 내일은 식사에 대하여 주는 밥을 다 먹는 것이 주님의 뜻이면 먹기가 어려울지라도 다 먹겠습니다.”라고 기도하고 잤으니 그 후에는 아무 것도 보여 주시지 아니하였다.
그 다음 날이었다. 아침밥, 점심밥, 저녁밥을 다 먹었다. 간수는 저녁 식후에 나의 감방 문을 열고 말하기를
“오늘은 밥을 다 먹은 것을 보니 병이 좀 나은 모양이로구나”하였다. 나는 “예, 괜찮습니다.” 간수는 아무래도 속히 출옥하여 치료하여야 된다고 말하였다.
그날 밤이었다. 주님은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기이한 영광을 보여 주시는데 지극히 적은 것 하나라도 주님께 순종하면 크신 영광을 주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이었다. 주님과 나의 관계는 세상이 알지 못하고 혹은 세상이 나를 향하여 신비가라고 할지 모르나 나와 같이 계셔 주시는 주님께서 나의 전부를 주장하심이 너무도 확실하였다. 왜 식사에 대하여 이렇게 된 것인가는 그날 식사에 대하여 다 먹지 못하는 것을 보아서 병보석으로 출옥시킬 예정인 것이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출옥하지 못하도록 하신 것이었다. 이 사실을 세상은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나는 주님께서 하시는 일을 확실히 아는 까닭이다. 그리하여 의사는 결국 감정이 좋지 못하게 되어 진찰도 하여 주지 않고 약도 주지 않고 기타 정신적으로 나에게 무수히 고난을 주었다. 그러나 주님께서 보호하여 주심에는 승리하고도 남음이 넉넉하였다.
최후의 각오
1942년 9월경이었다. 예심 판사가 30명이나 되는 소위 공범자인 우리를 차례로 불러서 간단한 심문이 있은 후이었다. 하루는 간수가 내게 와서 문을 열고 말하기를 “287번!”하고 불렀다. 형무소에 있어서 나의 이름은 287번이었다.
“3일 후에는 집으로 나가게 되었다. 그동안 많은 고생을 하였다”고 하면서 위로를 하여 주었다. 또 다른 간수들도 여러 사람이 와서 한가지로 말하며 출옥하게 됨을 축하 하는 뜻으로 말하였다. 그런지 3일만이었다. 조반을 먹은 후 간수는 나에게 말하기를 “오늘은 법정에 가서 예심 판사를 만나보고 오늘 밤에는 집으로 나간다!”고 하였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법정으로 가는 간수도 “오늘은 집으로 나간다!”고 하면서 친절히 하여 주었다.
법정에 가서 예심 판사를 만났는데, 대단히 친절히 하여 주며 묻는 말이 "왜 예수를 믿었느냐?" 신앙의 동기 또는 신학을 한 동기 등을 물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일본 나라 ‘왕’에 대하여 어찌 생각하느냐?”하였다. 물론,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성의가 있을 줄 알았던 것이다. 그리하여 일본 국가를 위하여 힘써 달라는 말로 설유하고 그날 출옥 시킬 예정인 것이었다. 그리고 나도 출옥하리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나의 마음을 주장하사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하겠다는 말을 하지 못하도록 나의 맘을 어둡게 만들어, 온 천지가 캄캄하여 이에 대하여 한마디도 말하지 못하도록 내 입을 막으시는 체험을 나만이 알 수 있었다.
나는 할 말이 없어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고 대답하였다. 검사의 말이 목사로서 일본 국체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지 못하였다는 말은 너무도 의외의 대답이라고 하여 내가 능히 대답할 수 있는 정도로서 가르쳐 준다. 그러나 나는 할 말이 없었다. 20분가량이나 기다리다가 검사는 분이 발하여 하는 말이 “금일 우리 일본 청년들이 누구를 위하여 전지에 나가서 죽느냐?”하며 “빠가 빠가 빠가”하며 수십 차례 거듭하며 욕하는 말이 “이놈아 잘 묶였다. 잘 갇혔다. 이놈아 죽어라. 이놈아 썩어라”하며 분이 나서 날뛰고, 서기 역시 분이 나서 일어섰다 앉았다 하며 그 문제는 다 해결되었는데 말 한마디 하지 못해서 출옥하지 못함이 심히 안타까워하는 태도이었다.
나는 형무소로 돌아와서 그때부터 더욱 심한 고난을 당한 것이다. 전에 신사 참배하지 못할 이유를 명확하게 보여주시다시피 하시더니 일본 왕에게 충의를 다 하겠다는 말은 기어코 하지 못하게 하심이었다.(막10:19-20)
진실로 주님께서 하신 말씀은 금일도 여전히 그대로 변함없이 이루시는 우리 주님이시다. 나의 폐병은 날로 위중하여 형무소에서도 이 사람은 아무래도 살지 못할 사람인 줄 알고 있으며 나 역시 타계로 갈 줄 알고 몇 번이나 “오 주여, 어서 데리고 가시옵소서. 나의 한날의 생활이 괴롭습니다.”고 부르짖었다. 나의 마음은 뜨거웠다. 나는 주님 위하여 옥중에서 세상을 떠나는 것이 너무 감사하였다. 아 나는 진실로 나의 생명보다도 주님을 더 사모하게 되었다. 나는 밤마다 “오늘 밤이나 데리고 가실른지!”하며 기다리는 것이었다.
주님은 다시 나에게 보여 주시었다. “결단코 세상을 떠나지 아니하리라”하시는 것이었다. 나는 주님께 감사하며 믿었다. 의외에도 그 옥중에서 날이 갈수록 병이 물러갔다. 기침도 점점 없어지고 담도 차차 줄어지며 가슴의 괴로움도 점점 없어졌다. 이것은 이적 중에도 큰 이적이다. 이때는 더욱이 전쟁 중 일본이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을 때이다. 식료품은 짐승도 먹지 못할 것을 주는 때가 많았으며 그 방안의 공기는 더욱 무거웠다.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말할 수 없는 괴로움 가운데서 병이 낫는다는 사실은 사람으로서는 너무도 상상하기 어려운 사실이며 오직 주님의 능력만이 역사하신 것이다. 형무소에서 뿐 아니라 나의 폐병으로 인하여 형무소에서 살아 나오지 못할 것을 부모 형제나 기타 나와 같이 있는 사람은 다 이구동성으로 말하였던 것이었다.
병이 낫기를 시작하니 형무소 안에 있는 소장 이하 소원들은 자기 국가의 정체에 반대되는 예수님의 이적을 시기하여 무한한 고난을 주는 것이었다.
당한 고난을 다 말할 수는 없으나 몇 가지 예를 든다면 첫째, 식사에 대하여 미결에 있는 많은 사람의 밥을 가지고 와서 내 감방 문 앞에 놓고 내게 다 보인 후 그 중에 제일 적은 밥을 골라서 내 방에 넣어주며 문을 탁 닫고는 자기에게 있는 감정을 다 풀어서 나에게 보이며 어떻게 하여서라도 내 마음을 상하게 하려고 하였다. 나는 병이 낫기를 시작함으로부터 음식에 대하여는 얼마든지 먹고 싶었다. 이런 기회를 타서 나를 괴롭게 하는 것이다. 수개월뿐만 아니라 수년을 이렇게 하니 나의 육체는 피골이 상접하여 뼈만 남더니 나중에는 전신이 퉁퉁 부어 몸을 자유로 움직일 수 없었다.
이 사실은 형무소 안에 미결로 있는 사람이 다 이렇게 되었다면 영양 부족의 원인이라고 하겠지만 유독히 이렇게 부은 것은 영양 부족으로 혈액 순환이 잘 안되어서 부었다고는 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렇게 부어서 생명이 위태할 때에는 좀 더 먹어서 부은 것이 좀 나아지면 다시 이 상태로 배를 골리는 것이었다.
아-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끔직하고 잔인무도하였다. 그리고 시장함을 이용하여 고난을 주는 한 가지 예는, 밥을 특별히 적게 먹인 후에 일본 사람들의 김치(다꾸왕) 매우 짠 것을 가장 사랑하고 동정하는 듯이 많이 주는 것이다. 그러면 시장하던 차에 그것을 주는 대로 먹어버리고 나면 다음 문제는 물을 먹고 싶은 것이나 물을 주지는 않는 것이다. 그리하여 물을 좀 달라고 하면 “오늘 우리 국민 중에 전지에 나가서 물이 없어 곤란을 당하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아느냐? 건방지다”고 하면서 매를 치는 것이었다. 여름 더위에 물을 마시고 싶은 것과 또는 여름 더운 때에 뜨거운 국을 끓여서 먹을 수 없는 것을 주면서 “식기가 부족하니 속히 먹으라!”고 하는 것이었다. 여름에는 더위로 말미암아 피부병이 생기며 가을이 되면 그 아픔이란 것은 필설로 나타내기 어렵다. 겨울이면 어름덩이가 된 밥을 다 식어진 국물에 말아서 먹고 나면 한 시간 이상은 참새 새끼처럼 벌벌 떨고 있던 것을 생각만 해도 끔직하다.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서 나의 생명이 살아서 나온 것은 참으로 주님의 신기하신 능력이요 기적중의 기적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주님의 사랑
1942년 2월경이었다. 옥중에 있는 나에게는 말할 수 없는 슬픈 소식이 들렸다. 즉, 일본이 승리하여 싱가폴을 함락하였다고 하여 형무소 안에서는 만세 소리와 의기가 양양하였다. 이제 나는 이 땅 위에 살 곳이 없다는 생각과 동시에 한국 교회는 어떻게 될 것인가 하고 생각할 때에 낙망의 탄식으로 나의 가슴은 터질 듯이 답답하여 견딜 수가 없었다.
견디다 못해 주님 앞에 엎드려서 “오 주여, 오 주님이시어!” 이 한 마디로 그치고 한없이 울었다. 아 나는 참으로 한없는 슬픔과 고독 가운데서 나의 가슴이 쓰라린 것은 비할 곳이 없었다. 그때 비몽사몽이었다. 사람의 시체가 보이며 그 시체에서 벌레가 나오는데 그 벌레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을 보았다. 이 사실은 즉시로 해석이 되어지는데 시체는 일본이오, 벌레는 일본 군인들이오, 불이 나오는 것은 총질하는 일본 군인들의 전쟁하는 것으로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을 버리지 아니하시고 전쟁에는 패전하게 하시고 복음으로 구원하시려는 주님의 경륜을 생각할 때에 눈물로 감사하면서 ‘아 주님은 일본을 사랑하시나이다’ 이렇게 기도하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주님께서 나를 사랑하심에 있어서 지극히 적은 일로부터 지극히 큰 데까지였다.
1943년 겨울이었다. 북풍한설에 독방에서 옥중 생활이란 것은, 더욱이 “평양”에 있어서 너무도 견디기가 어려웠다. 철창 사이로 불어오는 무정한 바람! 살을 베는 듯이 올라오는 마루 사이의 바람! 어떤 날 창문 틈과 청마루 틈을 휴지로 막았더니 이것이 형무 법에 범칙이 되었던 모양이다. 어느 날 밤중이었다. 잠이 들기 전 비몽사몽간에 나 자신이 형벌을 받고 있는데 두 손이 결박을 당하고 꿇어 앉아 있는 것을 보여 주신다. 나는 잠을 깨어 내 신경이 연약한 까닭인가? 하고 다시 잠을 자려할 때에 또 다시 그와 같이 형벌을 받고 있는 것을 보여준다. 이 모양으로 두 번 세 번 보여 주어 나로 하여금 깨달아 알 때까지 보여 주었다. 나는 이것을 깨닫고 주님 앞에 업디어 감사하고 그 이튿날 아침 일찍이 창문 틈과 청마루 틈에 막았던 종이를 빼어 버렸다. 조반을 먹은 후 간수들이 검사할 시간이 되어 나 있는 방문을 열더니 간수들의 얼굴에는 노기가 가득하여 보기에 대단히 흉하였다.
이것은 수일 전부터 창문 틈과 마루 틈을 막았던 것을 보고도 모르는 척하고 상관에게 보고하여서 나를 처벌하려는 것이었다. 이날 아침에는 상관의 명령에 의하여 처벌하려는 것인데 의외에도 막았던 종이가 없어진 것을 보고 자기들의 계획대로 되지 아니하였으므로 저희들끼리 고개를 흔들면서 지나가는 것이었다. 그날 석양에 간수가 나의 방문을 열고 하는 말이 일기가 매우 춥다고 하면서 나를 위로한다. 나는 말하기를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차고 견디기 어려워서 종이로 틈을 막았더니 이것이 잘못한 것이지요?”하고 물어 보았더니 간수는 대답하기를 “물론 범칙이지마는 저녁에 막았다가 아침 검사하기 전에 빼버리면 상관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나로 하여금 간수 눈을 속이는 자로 만들려는 것이었다.
“만일 검사할 때 빼야 하면 평시에도 막지 않아야지요”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수일 전에 창문 틈을 막았던 종이를 상관들에게 보이고 처벌하려는 그날에 어찌하여 빼어 버렸을까? 이것은 분명히 어떤 간수가 미리 알려준 것이라하여 그 전날 밤 당번인 간수들을 불러다가 엄격하게 심문한 모양이다. 그날부터는 조선 간수를 다시는 나 있는 곳으로 보내지 않았고 나는 출옥할 때까지 그 간수를 다시 보지 못하였다.
또 한 가지 재미있는 것은 처음 입옥할 때에는 성경을 허락하더니 얼마 후에는 성경을 다 거두어 가고 성경 보는 것을 허락하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이것도 통일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혹 다른 사람들에게는 허락하였다. 김인선 조사님께서 내게 성경 없는 줄 알고 비밀히 “요한1서, 요한2서, 요한3서”를 간수가 보지 않는 기회를 이용하여 내 방에 던져 주었다. 나는 즉각으로 “나에게는 비밀이 없노라”고 말하게 되었는가하면 어느 날 간수가 와서 내게 하는 말이 “신사 참배를 하겠다고 말하고서 출옥하여 참배를 아니 할찌라도 누가 따라 다니면서 신사 참배 하라고 말할 사람이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나는 그렇게 수단적이 아니다. 만일 내가 형무소에 오기 전에 경찰서에서 신사 참배에 대하여 생각하여 보겠다고만 대답 하였더라도 아무 문제없이 이렇게 형무소에까지 들어오지 아니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에게는 양심 그대로 말하는 것이라 하여 우리에게는 무엇이든지 비밀이 없노라고 말한 것이었다. 그런데 비밀로 던져준 이 성경을 어떻게 하느냐가 나에게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실상은 성경을 보고 싶어 하였고, 또한 주님 앞에서 조금도 양심에 거리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성경을 숨겨 가면서 간수의 눈을 피하여 보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한편 형무소에서는 어떻게 하여서라도 내 방에 모든 비밀을 찾아내려고 노력하고 있는 것이었다. 어느 날 내가 성경을 비밀히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감방 문을 덜컥 열고 간수가 들어오므로 성경을 숨길 시간의 여유가 없었다.
할 수 없이 내가 방석과 같이 사용하는 담요 속에 집어 놓고 기도하기를 ‘오 주여! 저희 무리들의 눈을 어둡게 하시어 보지도 못하고 또한 만져 보아도 알지 못하게 하옵소서. 만일 내가 망신당하면 주님의 이름이 그릇 될까 하나이다’
이렇게 기도하고 검사를 당하였다. 이날에도 주님께서 저희들의 눈을 가리워서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하게 하여 무사히 통과 되었다.
해방과 출옥
1944년 11월경이었다. 독일이 망하였다는 정보를 들은 나는 이어서 일본이 망할 것을 알았다. 나는 출옥의 날이 오늘인가? 내일인가? 하고 날마다 기다리게 되었다. 나는 이제 출옥한다면 수도원과 같은 수양원을 만들어서 일본 정치 아래서 양심이 마비되어 타락한 목사들이 수양하여 한국 교회의 앞날을 새롭게 출발하도록 하며, 또한 신학교를 설립하여서 진리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할 전도인을 기르며 또한 전도하여 이 나라를 기독교국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수개월 전부터 기도하였다.
다시 말하면,
1.수양원을 설립하여 일본 정치 하에 타락된 목사들을 수양할 것.
2.신학교를 설립하여 진리를 위해서 한국 교회와 운명을 같이할 목사
를 양성할 것.
3. 전도인들을 길러서 교회를 설립할 것.
마침내 한국 민족이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역사적인 해방의 날 1945년 8월15일을 맞이하고 8월17일에 나는 출옥되었다.
과거 5년간의 옥중 생활을 묵묵히 회고하여 볼 때 그 생활 전부가 나 자신의 힘으로 된 것은 추호도 없다. 진실로 주님은 살아계셔서 나의 생활 전부를 주관하시고 계시는 능력의 주님이심을 나는 확실히 체험하였다.
오! 땅 위에서 주를 믿고 성도의 생애를 걷고 있는 형제여! 안심하라 주님이 살아계셔서 지금도 일하시고 계시느니라.
나는 병으로 인하여 눕기 전에는 부절히 힘 미치는 데까지 한국 교회를 위하여 충성하겠다는 일편단심에 불타고 있다. 하루도 아직 수양이라고는 해보지 못했다.
나는 출옥당시에는 행보도 잘하지 못하였으나 지금은 건강하다. 이것 역시 주님의 은혜이다. 나의 폐병을 아는 사람, 내가 사경에 이르렀던 사실을 아는 자 치고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이 나의 체험 전부가 아니요, 대략 기록한 것뿐이다. 지금 나의 사업은 한국 교회의 재건 운동을 하고 있는데 재건 운동이란 과거 일본 정치하의 잘못을 회개하고 기도 생활과 동시에 선지자 격으로 외치는 것이다.
또 한 가지는 신학교를 설립하여 한국 교회를 위한 희생의 제물이 되어줄 수 있는 목사를 길러 내는 사업이다. 그리고 각처에 전도인을 파송하려는 것이 나의 몇 가지 사업이며, 이 사업을 위하여 나의 일생을 바치려함은, 오늘 우리 대한 민족은 아무리 하여도 주님의 복음이 아니면 살 길이 없는 까닭이다.
만천하 형제여! 기도로 물질로 동정을 구하노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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