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테크/Bible Study

성전에 예배드리러 모인 것이 아니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 19:54

성전에 예배드리러 모인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강해(14)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며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전혀 힘쓰니라. 사람마다 두려워하는데 사도들로 인하여 기사와 표적이 많이 나타나니 믿는 사람이 다 함께 있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 날마다 마음을 같이 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행2:41‐47)



본받아야할 초대교회 모습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청중들에게 영적 찔림이 생겼다. 그런데 성경은 그 말(설교)을 ‘들었다’고 하지 않고 그 말을 ‘받았다’고 표현했다. 말하자면 청중들이 단순히 인간 베드로가 하는 설교가 아니라 그를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 것으로 인식했다는 뜻이다. 그들 자신의 이성으로 설교의 논리와 주제를 분석한 후에 납득하여 스스로 회개한 것이 아니라 성령의 간섭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세주로 영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듣는 것은 라디오나 TV처럼 화자와 청중 간에 아무런 접촉이나 교통 없이 귀만 동원해도 된다.  그리고 단순히 지식적 욕구만 충족된다. 반면에 받는 것은 자기 몸을 전부 사용해야 하되 무엇보다 화자와 개인적인 접촉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베드로의 설교가 성전에 모인 수많은 청중 각자에게 하나님이 직접 개인적으로 말씀하신 양 그들 가슴에 비수처럼 찔렸다는 뜻이다. 성령이 각 사람에게 간섭하여 그 말씀의 영향력이 영혼에까지 미쳤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 말씀대로 자신의 전인격이 예수라는 한 인물로 인해 온전히 새롭게 바뀐 것이다.

당연히 오순절 하루에 삼천 명이나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역사가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인간의 지혜의 말로 전도한 것이 아니라 구원을 주시는 성령의 능력이 충만하게 역사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들이 스스로 믿어서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라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드러난 사랑으로 자신의 심령이 가득히 채워졌던 것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구원을 주시는 은혜의 홍수 가운데 완전히 잠겨버렸던 것이다.

나아가 듣는 것은 가만히 있어도 들을 수 있다. 구태여 자신이 반응하지 않아도 그저 들리기만 해도  무슨 말인지 안다. 그러나 받는 것은 반드시 자신의 온전한 반응이 수반되어야 한다. 말하자면 받는 것은 자발적 반응으로 받거나 그렇지 않으면 거부하거나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해야 한다. 가만히 있는데 받을 수는 결코 없다.

따라서 설교란 청중더러 들으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도록 하는 것이다. 누구나 쉽게 듣고 알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심령의 깊숙한 곳에 진정한 찔림을 주거나 그 반대로 아예 노골적 반발을 하거나 반드시 둘 중 하나의 반응이 따라오게 해야 한다. 회개하라 그렇지 않으면 영원한 심판이 기다리고 있다는 십자가 복음만 선포해야 한다는 뜻이다.  

본문은 그렇게 새로이 예수님의 제자가 된 삼천 명과 마가의 다락방에 이미 모여 있었던 120명의 제자들이 오순절 이후에 어떻게 변화되었는가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우선 저희가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모이기에 힘썼다고 한다. 즉 초대교회가 결성된 것이다. 기독교 역사의 한 획을 긋는 순간이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해의 오순절이 바로 .신약교회가 창립된 시점이었다.
  
그런데 본문의 초점은 오순절에 초대교회가 탄생되었다는 교회사를 기술하고자 한 것보다는 당시 사도들과 신자들이 어떻게 주님을 또 서로를 섬겼는지 묘사한데 있다. 초대교회 교인들의 가장 특징적인 실제 생활상을 간략히 설명했다. 참으로 아름다운 삶의 모습이 아닐 수 없다. 사도행전을 공부해야 하는 이유 가운데 하나가 초대교회와 교인들의 성령 충만했던 모습을 닮고 싶다는 것인데 본문이야말로 가장 본받아야 할 표본이다.  

어떤 일이나 인물을 표본으로 하여 닮고 싶을 때는 한 가지 이유밖에 없다. 그 일이나 그 사람이 지향하는 목표와 이뤄내고 있는 가치와 의미가 월등히 좋기 때문이다. 그에 비해 내 모습이나 내가 하는 일은 아주 부족하며 그 격차가 커야 한다. 또는 내가 갖고 있지 않거나 가질 수 없는 것을 상대가 반드시 갖고 있어야 한다. 현재의 나와 비슷한 수준이라면 구태여 닮을 필요가 없다. 현재의 상태에서 조금만 더 노력만 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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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에 드러난 초대교회나 교인들의 모습과 현재 섬기는 교회의 모습과 우리들을 비교해 보면 어떠한가? 아마 거의 모든 현대 교회와 교인들이 우리도 잘하고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하면 되겠다고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모두가 반드시 본을 삼아 닮아야겠다고 새삼 다짐할 것이다. 어쩌면 감히 본을 삼아 보겠다는 마음도 먹지 못하고 너무나 부족함, 부끄러움, 심지어 죄책감마저 느낄지 모른다.

조종당하는 것 같은 신자들

그런데 초대교회를 본받는 모습에서 너무 쉽게 간과해버리는 중대한 오류가 하나 있다. 초대교회 성도들의 모습을 보고 자괴감을 느끼는 이유가 우리는 실제 그대로 하지 못하거나 오히려 잘못을 저지르기 때문이라면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나 간혹 닮고자 하는 모습을 잘못 이해하여 엉뚱한 방향으로 목표를 설정하여 노력하는 경우라면 어떻게 되는가? 당연히 전혀 엉뚱한 결과만 나타날 것이니까 죄책감에 빠져 왜 우리는 그렇게 안 되지 한탄하기보다 잘못된 목표부터 수정해야 한다.  

솔직히 많은 목사님들이 본문을 문자적으로만 자기 교회에 적용하려 든다. “우리 교회가 초대교회의 모습을 닮고 여러분도 초대교회의 신자들을 닮기를 원합니다. 그들처럼 모이기에 힘써야 하고 기도하기에 힘써야 합니다. 나아가 모든 소유를 서로 통용하고 떡을 떼서 나누어야만 합니다.”라고 종종 권면한다.

물론 초대교회의 모습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만 그런 권면을 듣는 신자들의 기분은 어떠할까? 말씀에 틀린 내용이라곤 하나도 없다. 너무나 지당하다. 그럼에도 신자들 마음 한 구석에는 “목사님이 드디어 본색을 드러내는구나. 결국 교회 봉사 열심히 하고 헌금 많이 하라는 뜻이지! 성경공부 십일조 잘하는 집사들을 양성하려는 목적이겠지.”라는 의심이 잠시나마 스쳐 지나갈 것이다.

성경 말씀을 너무 직선적으로 적용시키려 들 때는 항상 반발이 따르기 마련이다. 죄에 찌든 인간은 아무리 옳고 바른 소리라도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착하게 행동하고 공부 열심히 하라고 말로 해서 다 잘 들을 바에야 대학 못가고 나쁜 길로 빠지는 아이들이 어디 있겠는가? 공부하라고 닦달하는 부모들에게 아이들이 어떻게 대드는가? 안 그래도 지금 막 공부하려는 참인데 기분 나빠 못하겠다고 하지 않는가? 또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야단치면 엄마 그 정도는 나도 잘 알고 있으니 자꾸 잔소리하지 마세요라고 반발하지 않는가?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만 적용하면 감동 내지 영향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역겨운 잔소리로밖에 받아들이지 않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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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교회의 모습을 본받자고 할 때에도 지금껏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를 당연하게만 적용 시키려 드는 우를 자주 범해 왔다. 겉으로 드러난 모습만을 직설적으로 강조했다. 그래서 모이라, 기도하라, 떡을 나눠라, 쓸 것을 통용하라고만 했지 왜 그들이 그렇게 했는지 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근거에 대해 가르치는 것은 등한히 했다. 알기 쉽게 말해 당시 시대 상황과 초대 교회가 행한 실제적이고도 구체적인 모습과 그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선 제대로 가르치지 않았다.

모여라, 기도하라, 말씀을 보라, 구제하라, 떡을 떼라는 권면들은 신자라면 두 번만 이야기해도 잔소리가 될 만큼 많이 들었고 듣고 있다. 앞으로도 주일마다 반복해서 들을 권면이다. 그리고 아무리 잔소리 같아도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의 말씀이므로 성도는 마땅히 그런 삶을 살아야 한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껏 강조해 온 권면들이 마치 성도의 의무인양으로만 들렸다는데 있다. 그렇게 살아야 한다고 권면하고, 독려하고, 안되면 이상한 눈으로 보고, 정죄하고, 본인도 그래서 죄책감을 느껴왔다. 어떤 인생도 의무감에서 살아선 안 된다. 즐겁고 기뻐야만 한다. 하나님의 은혜 안에 붙잡혀 있는 신자들의 삶은 더더욱 그래야 한다. 성경에 기록된 말씀대로 사는 것이 진정한 기쁨이자 즐거움이어야 한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절대 의무감에서 본문처럼 산 것이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렇게 사는 것이 바로 축복이었으며 또 그런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이야말로 신자 된 첫 번째 권리였다.

신자가 올바른 신앙생활을 한다고 해서 교회와 목사의, 심지어 하나님의 유익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오직 본인의 유익일 뿐이다. 예수님께 새로이 받은 참 생명을 더 풍성하게 가꾸는 길이다. 말하자면 초대교회 신자들처럼 온전한 주님의 사랑으로 물건을 서로 기꺼이 통용하면 할수록 본인의 손해가 아니라 유익이 되며 공동체 전체에 하나님의 신비로운 은혜가 넘치게 됨을 누구나 체험할 수 있다.

그런데도 지금껏 본받아야 할 초대교회의 모습은 교회에 모이기 힘썼다는 외적 사실에만 초점을 두는 경향이 많았다. 말하자면 신자 개개인의 인격과 영성을 거룩하게 변화시키기 보다는 목사에게 순종하여 교회에 봉사하는 일꾼을 만드는 데에 더 많은 노력을 기울이는 교회들이 있었다. 양식 있는 신자로선 신앙이라는 미명 아래 종교적 행위에만 인위적으로 동원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이제는 초대교회 성도들이 실제로 어떠한 삶을 살았는지 정확하게 살펴봄으로써 그동안 잘못 알고 있었던 사항들을 고치며, 흉내를 내어도 제대로 흉내를 내어야 할 것이다.

공산주의식 공동체가 아니었다.

초대 교회에 대해 가장 잘못 알고 있는 부분은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또 재산과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고”(44,45절)라는 말씀이다. 너무 쉽게 유토피아(Utopia)적인 개념으로만 이해한다. 공동으로 소유하고 공동으로 분배함으로써 서로 사랑하며 다 같이 잘살 수 있다고 판단한다.

그런데 이는 인류 역사 이래로 모든 사회가 추구해야 할 가장 이상적인 공동선으로 인식되었고 또 그렇게 되도록 많은 수고를 바쳤다. 사회학, 정치학, 경제학, 철학, 윤리학 등 모든 사회과학은 그 이상과 실현 방안을 연구하는데 진력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온전히 성공한 예는 단 하나도 없다. 그 중에는 말 그대로 공동으로 소유 분배한 공산주의도 포함되는데 흥미롭게도 최단 기간 내에 가장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초대교회에서 실행한 나누는 삶은 공산주의 식의 완전한 공동소유와 공동분배가 아니었다. 모든 성도가 자기 개인 소유를 완전히 팔지 않았다는 뜻이다. 지금껏 이단 종파들이 그럴듯한 공동체를 설립한 후에 신자들의 모든 재산을 헌납하라고 강요하곤 하는데 이 구절을 잘못 이해했거나,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이 이상향을 동경하는 심리를 역이용하여 사욕을 채우려 한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초대 교회가 사유 재산을 다 팔지 않았고 또 일부 판 재산도 완전한 공동소유로 관리하지 않았다.

연관된 사도행전 기록부터 살펴보자.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4:32) 언뜻 보면 마치 완전한 공산 사회인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씀에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이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라고 했다. 분명히 제 것을 제 것이라고 하는 이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공동관리라기 보다는 각자가 재산을 관리하면서 핍절한 사람이 나타나면 밭을 팔아 핍절한 만큼 나눠준 것이다.

그들이 재물을 제 것이라고 여기지 않은 이유는 세상만물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원천적인 소유권을 철저하게 인정했기 때문이었다. 이 땅에서 신자가 재물을 얻어서 관리하고 누리더라도 단지 하나님의 것을 대신 맡은 청지기일 뿐이라는 소명을 실제로 실천한 것이다. 그들이 모든 재산의 법적 소유권과 관리권마저 공동체에 헌납한 것은 아니었다.

본문 45절이 “소유를 팔아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 주고”라고 했지만, “팔아”와 “나눠 주고”의 동사형이 원문에 의하면 미완료시제형으로 계속해서 반복하는 동작을 나타낸다. 만약 전 재산을 헌납하는 공동체를 설립했다면 일회적 동작으로 끝나야 한다. 또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라고 설명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 꼭 도와주어야 할 필요가 생기면 누구라도 자원하는 자가 자기 재물을 아끼지 않고 팔아서 도와주었다는 것이다. 성도들이 성전에도 모였지만 분명 집에서도 모였다고 했는데 당연히 그 집은 개인 소유이었지 않겠는가?

너무나 순수했던 초대교회 신앙

물론 초대교회의 초기에는 모든 소유를 팔아 공동 소유 분배하는 완전한 공산체적 삶을 살았던 적도 있었다. 당시로선 그럴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었다. 예수님이 자기들 당대에 재림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는데 요즘같이 황당무계한 종말론자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 아니라 예수님 당신이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이일이 다 이루리라.”(마24:29‐35) 정말 자기가 죽기 전에 주님이 곧 다시 오신다면 재물이 더 이상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들로선 예수님이 말한 “이 세대”가 숫자적으로 한 세대(One Generation)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님을 몰랐다. 액면 그대로 문자적으로 해석했던 것이다. 또 “이 일이 다 이루리라”는 말씀도 당신께서 예언한 그대로 예루살렘이 멸망 될 때에 온갖 환난을 틀림없이 겪게 될 것이라는 뜻이었지 종말이 그 당대에 곧 바로 온다는 의미가 아니었다. 이 말씀 뒤에 주님은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24:36)고 덧붙이셨다. 심지어 아들인 예수님 당신도 모른다고 했는데 초대 교인들이 자기들 세대로 한정지었던 것은 너무 무리한 해석이었다.  

그 결과 초대 교회에는 신자들의 종말론적 사고와 삶에 편승하여 사욕을 채우려는 즉, 경건을 이익의 재료로 삼는 종말주의 이단사상이 활개를 치게 되었다. 비교적 후기에 기록된 신약성경에 그런 거짓 가르침에 대한 경고의 말씀이 나타나게 된 까닭이다. “혹 영으로나 혹 말로나 혹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쉬 동심하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아니할 그것이라. 누가 아무렇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하지 말라.”(살후2:2,3).

그런데 이단이 설치고 신자들이 당신의 말씀을 오해하고 있는 그 와중에도 하나님의 섭리는 놀랍고 신비했다. 예수님 말씀을 문자적으로 이해해 완전한 공산 공동체 생활을 하던 신자들로 그 잘못을 깨달을 수 있게 하는 일이 곧바로 일어났다. 세속역사의 기록에도 나와 있는 대기근이 예루살렘을 휩쓸었다. 이미 소유를 다 팔고 아무 일도 하지 않고 있던 자들이 상당한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아가보라 하는 한 사람이 일어나 성령으로 말하되 천하가 크게 흉년이 들리라 하더니 글라우디오 때에 그렇게 되니라.”(행11:28).

그래서 바울은 3차 전도여행을 하면서 헬라의 여러 교회에서 거액의 연보를 모아 예루살렘 성도에게 전해 주었다. “마게도냐와 아가야 사람들이 예루살렘 성도 중 가난한 자들을 위하여 기쁘게 얼마를 동정하였음이라.”(롬15:26) 말하자면 하나님의 뜻은 아무리 종말이 눈앞에 닥친 것 같아도 아무 일도 안하고 종말만 기다리는 것은 잘못이라는 것이다. 또 그런 환난 가운데도 예루살렘 교회의 실수를 들어 쓰셔서 하나님의 교회들이 서로 섬기며 사랑하는 법을 배울 수 있게 하셨던 것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며 공동체 생활을 했던 초대 교인들의 신앙은 요즘의 사이비 종말론자와는 질적으로 전혀 달랐다. 적어도 “이 불공평하고 재미없는 세상을 어서 빨리 하직하고 천국에 가서 천년만년 잘 살아 보세! 나는 이 땅에서만 실패했지만 저 예수 안 믿고 형통하는 나쁜 놈들은 어서 빨리 영원토록 망해버려라!”는 식은 아니었다. 한 마디로 현실도피적인 종말관이 결코 아니었다. 예수님의 말씀을 정말 순진하도록 액면 그대로 믿었을 따름이다.

예수님이 살아 계실 때에 그 분의 이적과 기사를 눈으로 보았을 뿐만 아니라 권세 있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그 말씀을 전혀 의심하지 않았고 구태여 앞뒤로 살펴볼 필요도 없었다. 그 분 말씀 그대로 “천지는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마24:35)는 진리를 확신했다. 그 분만을 이 세상을 구원하고 심판하실 유일한 구세주로 온전히 받아 들였다. 그래서 자기들 당대에 주님의 재림으로 드러날 하나님의 영광을 열렬히 보고 싶었던 것이다.

그들이 자기 소유를 팔아 나눠 주고 제 것도 제 것으로 여기지 않았던 이유도 오직 주님의 말씀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적이 구멍을 뚫고 도적질하느니라...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19‐24)는 말씀 그대로 실천했던 것이다.

매 칠년마다 형제들의 빚을 면제해 주라는 하나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면 “여호와께서 네게 유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정녕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신15:5)는 구약의 약속이 초대교회에서 처음으로 완벽하게 실현되었다. 그들은 단순히 이 세상을 포기하고 저 세상만 바라본 것이 아니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하고 함께 주의 영광 가운데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원했던 것이다.

말하자면 예수님의 말씀에는 초대교회 신자들이 오해를 살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었다. 그러나 오늘 날의 신자마저 언제 오실지 모르는 종말을 당장 내일 있으리라 오해하거나 미혹되어 아무 일도 안하고 기다려선 안 된다. 노아 홍수 때에 심판은 아무도 모르게 오지만 노아처럼 열심히 하나님의 명령을 순종하는 자만이 구원을 받았지 않는가? 집 팔고 논 팔아 교회에 헌납하면 복을 받고 재림 때에 천국행 일등칸을 탈 수 있는 것이 절대 아니다.

안식년마다 빚을 탕감해주라는 계명은 구약 이스라엘이라는 특수한 상황에 적용된다. 현대인에게는  해당도 되지 않지만 도무지 실현할 수도 없을 것이다. 반면에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 드러난 하나님의 뜻에는 주목해야 한다. “땅에는 언제든지 가난한 자가 그치지 아니하겠으므로 내게 네게 명하여 이르노니 너는 반드시 네 경내 네 형제의 곤란한 자와 궁핍한 자에게 네 손을 펼지니라.”(신15:11) 각자 생업에 종사하되 주위에 정말로 곤란하고 궁핍한 자가 생기면 자기의 것을 아끼지 말라는 것이다. 신자들이 평등한 공동체를 이루기보다는 각 개인이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마리아가 예수님의 발에 향유 한 근을 붓는 모습을 본 가룟 유다는 그것을 팔아 가난한 자를 나눠주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여겼다. 예수님은 바로 “저를 가만두어 나의 장사할 날을 위하여 이를 두게 하라 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거니와 나는 항상 있지 아니하리라.”(요12:7,8)고 깨우쳐 주셨다. 인간이 가장 시급히 해결해야 할 일은 이 땅에서 가난을 추방하는 구제보다 그 영혼이 하나님께 구원 받는 것이라는 뜻이었다.  

오늘날 신자들이 교회 공동체를 위해 자기 소유를 팔지 않아 초대 교인과 너무 거리가 먼 것 같은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 정작 본받아야 할 모습은 모든 소유가 정말로 하나님이 주신 것이며 절대로 자기 것이 아니라는 믿음 그 자체다. 나아가 우리가 닮지 못하는, 아니 사실은 의도적으로 닮지 않으려는 실체는 어려운 이웃의 형편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짐짓 외면하는 것이다. 정말 모든 소유가 내 것이 아니라고 확신치 않는 자는 아무리 주위에 궁핍해 곤란을 겪는 성도가 있어도 자기 것을 팔면서까지 그 필요를 채워 주지 못한다.    

모이는 것보다 먼저 할 것은?

현대 교회가 닮기를 원하는 초대교회의 두 번째 모습은 모이기에 힘쓰고 떡을 떼는 것인데 이 또한 동일한 맥락의 오류를 범하고 있다. 목사님들은 “초대교회를 보십시오. 모이기에 너무나 많이 힘을 쏟았지 않습니까? 그러니 이제 우리도 모이기에 힘을 씁시다.”라고 함께 모이는 측면만 계속 강조한다. 성경이 지금 어떻게 말하고 있는가? “마음을 같이하여 모이기를 힘쓰고”라고 했다. 모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앞부분 즉, “마음을 같이하는 것”은 보지 못하거나 일부러 강조하지 않는 것 같다.

초대 교인들은 마음이 같았기에 누가 소집하지 않아도 그저 함께 모이고 싶었다. 모여서 마음을 같이 하려고 노력했던 것이 아니다. 이미 살펴 본대로 메시야의 영광을 다시 보기를 간절히 소망했고,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했으며, 이 땅의 재물보다는 하나님을 더 섬겼다. 모이는 사람들마다 한 결 같이 똑 같은 마음이었다.

우리가 닮아야 할 부분도 먼저 마음이 같아지는 것이다. 그러면 목사가 구태여 “모입시다.” “모이기에 힘씁시다.”라고 권면 안 해도 저절로 잘 모이게 된다. 다른 말로 목사가 정작 하여야 할 일은 교인의 마음을 하나로 만드는 것이지 어떻게든 모일 수 있는 행사를 고안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자주 실패하는 원인도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기도와 성경공부와 찬양과 구제와 봉사 같은 교회 행사에는 그런대로 성실히 잘 참여한다. 그러나 마음이 하나가 되는 일에는 조금만 수가 틀려도 그저 삐끗하고 쉽게 넘어진다. 예컨대 누구누구 집사나 장로 꼴 보기 싫어서 교회 갈 마음이 안 난다는 것이다.

미국교회에 한동안 출석했던 제 경험에 비추어 봐도 한국교회와 명백한 차이를 감지할 수 있는 것도  바로 이 부분이었다. 한국교회는 근본적으로 뭉치고, 합치고, 외부로 드러나는 잡음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것을 좋아하고 지향한다. 그래야만 하나가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그렇게 되는데 가장 크게 작용하는 요인이 감정적 측면이다. 반드시 마음으로 서로 좋아하는 것이 하나가 되는  선결과제다. 좋게 해석해서 인간관계가 우선이 되며 교분이 되는 정을 우선시하는 교제다.

반면에 미국교회는 외형적으로 뭉쳐서 하나가 되는 것을 그렇게 중요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성도 개인의 특성을 존중하여 개발되도록 격려한다. 때로는 성도 간에 많은 논쟁이 있어도 일단 어떤 일이 결정 되면 서로 간에 복종하며 쉽게 다시 하나가 된다. 인간관계보다는 일의 효율이 중심이 되는 교제로서 모든 판단의 근거가 감정보다 이성이 먼저 작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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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히 한국 교인들은 담임목사 호령 한마디에 “으쌰, 으쌰!”하면서 모두 참여하고 또 감정적으로 뜨거워져야만 뭔가 은혜를 받았고 하나님의 일을 수행한 것처럼 여긴다. 그러나 교회 문을 나서자마자 부부싸움을 예사로 해버린다. 실생활에서 말씀대로 실천하는 면이 너무나 부족하다. 눈물 흘리며 감e동적으로 기도하고 찬양하면 그저 믿음이 아주 좋다고 칭찬하면서 실생활의 이런 저런 허물은 크게 문제 삼지 않는다.

미국 교인들은 함께 모여 열심을 내는 경우는 별로 없어도 삶이 다르다. 예컨대 예배 시작부터 마치고 나갈 때까지 부부는 정답게 손잡고 앉아 있고 심지어 예배 중에 키스도 예사로 한다. 비록 성경적 지식은 우리보다 훨씬 모자라고 기도가 하는 둥 마는 둥 아주 짧아도 실제 생활은 우리보다 훨씬 성결하다. 아마 두 교인들의 장점을 합쳐 놓으면 이상적인 신자의 모습이 될 것 같다.  

성경이 마음이 하나가 된다고 말하는 것은 흔히 이해하는 것과는 다르다. 본문에서 초대교회의 성도 끼리 교제하는 모습도 오늘날의 것과 다르며, 심지어 한국과 미국 신자들의 장점을 합쳐 놓은 모습과도 달랐다. 감정적으로 친근하면서 이성적으로 선을 실천하는 정도가 아니었다. 감정과 이성이 잘 조화된 교제는 일반인들도 조금만 노력하면 달성할 수 있지 않는가?

성도간의 교제는 반드시 서로 다른 두 영이 성령 안에서 교통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보혈로 깨끗케 된 영혼끼리 가장 먼저 주님의 은혜를 함께 누리며 또 각자가 받은 은혜를 남들과 나누는 것이다. 쉽게 말해 만나기만 하면 자신들보다는 예수님과 그분의 베푼 은혜에 관한 이야기로만 밤을 지샐 수 있다. 또 매일 매일 주의 성령으로 그 영혼을 새롭게 하며 실제 삶에서 주님을 닮아가고 있기에 구태여 대화가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의 얼굴만 보아도 가슴이 뜨거워진다. 또 항상 기도하며 말씀을 묵상하여 영적 분별력이 생겼기에 상대의 영적 형편까지 짐작할 수 있다. 함께 기도하면서 위로하고 권면하여서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소망을 서로 키워나간다.  

그러나 성령 안에서 교제한다고 해서 상대에 대해 느끼는 감정에 비상한 뜨거움이 있거나 뭔가 신령한 측면을 감지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영과 영이 통했다고 해서 감성적, 이성적, 지성적 측면에서 상대와의 사이에 있었던 모든 장애가 자동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초대교회 교인들이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모였다는 말도 서로 간에 감정적으로 불편한 점 완전히 없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성도도 죄의 본성이 남아 있기에  교회 안에서 100명이 100명을 서로 다 좋아 할 수는 절대 없다.

본문의 “기쁘고 순전했다”는 원어는 마음 문을 열고(Openness) 진지함(Sincerity)을 갖고서 서로를 대했다는 뜻이다. 서로가 서로를 영적인 안목으로 바라본다는 것이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외모에 좌우되지 않고 상대의 영혼을 용납하고 받아들여서 동일한 주님의 자녀로 대했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어떤 집사가 보기 싫어 모이기 싫다는 핑계는 자신의 감정이 그를 용납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바꿔 말해 예수의 피로 거듭난 성도임에도 다른 성도를 바라보면서 아직도 인간적 시각으로만 판단했지 십자가 복음의 시각으로는 바라보지 않았거나 못했다는 반증이다.

오순절 성령강림 이후 초대교인들은 모두 성령을 선물로 받음으로써 한 성령 안에서 한 주님을 모시고 한 소망과 한 믿음을 가지고 즉 마음을 같이 하여 교제했다. 모일 때마다 성령의 강력한 임재를 느꼈고 그 가운데 역사하시는 주님의 은혜와 권능을 나눠가졌다.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성령 안에서 주님과 하나가 될 때에 성도끼리도 자연적으로 하나가 된다. 구태여 교회가 하나가 되려는 행사를 하지 않아도 성령이 교회 안에 충만하면 한 마음으로 바꿔 준다.  

나아가 그렇게 하나가 된 교회는 세상의 어느 권세도, 특별히 신자 각자가 갖고 있는 죄와 결점들로도 절대 그 하나된 것을 끊을 수가 없다. 현대의 교회와 성도가 먼저 본받으려 노력해야 하는 것은  성령 안에서 마음부터 하나가 되는 것이다. 모든 성도가 자신을 예수님의 십자가에 못 박아 죽었다 그분의 부활에 연합하여 새로 태어나야 한다. 담임목사의 호령으로 군대처럼 일사불란해지는 것을 연습한다고 십자가 군병이 양성되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 없이 어떻게 십자가 군병을 양성할 수 있다는 말인가?

성전에 모인 진짜 이유는?  

한국교회의 많은 목사님들은 불행하게도 함께 모이되 한 술 더 떠서 교회로만 모이라고 자꾸 강조한다. 본문처럼 분명 성전에 모이기를 힘썼지 않았느냐고 강조하기 바쁘다. 성도가 교회에 자주 모이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러나 개인적인 용무가 있으면 주일 예배를 제외하고는 빠질 수 있다. 주중에 교회로 호출해놓고 한번이라도 빠지면 아예 모이기에 힘쓰지 않는 신앙이 모자란, 사실은 목사에게 불충한다는 의미에 불과한데도, 신자로 낙인 찍혀버린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라는 본문 말씀이 성전에서 모든 행사를 다하고 집에서는 교제만 했다는 뜻이 아니다. 아직 유대교와 기독교가 완전히 분리되기 전이라 성전에는 유대교식의 예배를 드리러 간 것이다. 아직은 예수 믿는 신자들은 유대인이 대부분이었고 유대교의 성전 예배시간과 절차를 지키고 있었다.  

집에서 떡을 뗀 것이 오히려 기독교식 예배로 모였다는, 성도교제가 아니라, 뜻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어떻게 당부했는가?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고전11:23,24)” 따라서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표현은 성찬식과 예찬(요즘의 성도교제)을 가정집에서 했다는 것이다.

초대교회에서도 초창기, 말하자면 본문이 기록되었던 시절의 예배는 아직 일정한 형식이 생성되기 전이었다. 예수님을 주라 시인한 자들끼리 한 가정에 모여 예수님께 직접 배움을 받고 그 이적과 부활을 눈으로 본 자 즉, 사도가 중심이 되어서 주님을 추모하는 모임이었다. 주님의 가르침, 신유, 기적, 십자가 사건, 부활, 승천 등을 간증한 다음에 성찬식을 했다. 그것도 어떤 순서나 틀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인도에 자연스레 따랐다. 말하자면 집에서 떡을 떼었다는 것은 바로 집집마다 돌아가면서 예배를 드렸다는 뜻이다. 당연히 믿지 않는 자들도 초대했을 것이며 때로는 믿지 않는 자의 집에서도 모였을 것이다. 그래서 날마다 구원 받는 자들이 더하게 된 것이다.

그럼 성전에 모인 것은 무슨 목적이었는가? 우선 아직 자기들이 몸담고 있는 유대교식의 제사를 드리러 간 것이 일차적인 목적임에 틀림없다. 또 위에서 살펴 본대로 마음을 같이하여 모였기에 성도간의 교제도 분명 그곳에서 이뤄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전도하러 간 것이다.

본문이 ‘회당’이라고 하지 않고 ‘성전’이라는 표현한 것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성전’(The Temple)은 바로 헤롯이 지은 예루살렘 성전만을 의미한다. 그런데도 성전에 모이기 열심이었다는 본문을 예루살렘에 형성된 초대교회가 예배드릴 목적으로 성전에 자주 모였다고 해석하면 어떤 상황이 되는가? 아직 유대교가 생생하게 살아 있는 판국에 즉, 동물 희생 제사를 엄숙하게 드리고 있는 곳에서 예수님에 대한 회고담을 하며 기도하고 떡을 떼었다는 것이다. 그럴 가능성은 아무래도 희박하지 않는가? 유대교의 성전 기도 시간에 맞추어 기도하러 갔거나, 성전 회랑에서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하러 간 두 가지 목적 말고는 예수 믿는 자들이 성전에 모일 리는 없었다.  

나아가 초대 교회 신자들이 성전에 자주 모임으로써 주님의 십자가 은혜를 더더욱 확실한 체험으로 느꼈을 것이다. 집에서 예수님을 회고하며 드렸던 예배와 성전에서 제사를 드린 후에 받는 마음의 감동이 어떻게 다른가를 말이다. 동물 희생 제사로는 대제사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에 의지하여 그분과 교제하며 누리는 기쁨과 평강을 도무지 얻지 못했을 것 아닌가? 성전에 예배나 다른 교회 행사를 위해 자주 모였다는 해석은 어떤 면으로 따져도 무리다.  

다시 말하지만 가정에서 성찬과 예찬까지, 요즘 식의 예배와 교제를 하여 마음을 같이 한 후에 전도하려고 열심히 성전으로 모였던 것이다. 참된 구원의 감격을 누린 자들이 아직도 성전과 율법과 제사에 매여 있는 경건한 자기 동족에 대한 사랑과 안타까움이 앞서서 그들부터 일차 전도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로 베드로는 본문의 교회 탄생 기사 후에 유대교 기도시간에 맞추어 성전으로 설교, 즉 전도하러 갔고(행3장) 초대교회의 복음전파는 주로 유대 회당에서 이뤄졌지 않는가?

요컨대 초대교회는 전도를 제외한 다른 모든 교회 행사는 신자들의 집에 모여서 행했다. 무조건 교회로 나와 모든 행사에 열심을 내어 참석하라고 닦달한 것이 아니었다. 성전에 모이기를 힘쓴 것은 엄밀히 따지면 다른 종교의 예배당 안에까지 가서 십자가 복음을 증거 하기에 힘썼다는 뜻이다. 다른 말로 모이기에 힘쓴 것이 아니라 흩어지기에 힘썼다는 것이다.

사도행전의 주인공이 되어라.

사도행전의 기록이 전반부는 베드로가, 후반부는 바울이 주인공으로 등장해 마치 초대교회의 부흥이  이 두 사도에 의해 다 이뤄진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다. 사도행전의 실제 주인공은 오순절에 회개한 이름도 없던 천하각국으로부터 모인 3,000명의 경건한 자들이다. 그들이 오순절이 후에 자기들이 살던 곳으로 흩어져 돌아가 복음을 전파한 것이 밑거름이 되었다. 그 가운데는 빌립사도가 만났던 에디오피아 내시도 포함되며 또 스데반이 순교하는 현장에 바울이 되기 전의 사울도 영적 찔림을 받고 서있었다.  

사도들은 이들이 뿌려놓은 복음의 씨앗에 물을 주어 싹이 나게 한 것뿐이다. 더 정확히는 그 모든 일을 오순절에 강림하신 성령님의 내주, 교통, 역사, 간섭하심으로만 가능했었다. 사도행전은 그래서  성령행전이다.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이 자라나게 하셨으니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자라나게 하시는 이는 하나님뿐이니라(고전3:6,7).”

따라서 현대 교회가 초대교회에서 가장 먼저 배워야 할 것은 모이기에 힘쓰기 보다는 흩어지기에 힘쓰는 것이다.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로선 집이든 교회든 모이기만 하면 말씀보고 기도하며 예배드리면 된다. 주일만 한 곳에서 모여 함께 경배와 찬양과 감사를 주님께 드려야 한다. 주일을 제외한 6일 은 자기가 속한 사회 공동체에서 주님의 향기가 드러나는 삶을 살면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해야 한다.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분부하신 대로 십자가를 지고 땅 끝까지 이르러 복음을 선포해야 한다. 신자가 가는 장소와 시간이 항상 세상 땅 끝이며 세상 끝 날이어야 한다.

초대 교회는 특별히 ‘날마다“ 마음을 같이 했다고 한다. 주중에도 거의 매일처럼 교회에 모여서 예배, 기도모임, 성경공부, 성가대 연습, 행사준비 했다는 뜻이 아니다. 하루도 빠짐없이 형제들을 율법의 매임에서 풀어 줄 복음을 전하러 성전에 간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이는 곳이 당연히 성전이니까 그리로 간 것이다. 그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식으로 교회에 이 행사 저 행사로 모였던 것이 아니었다.

오늘날 이름도 거룩한 성도들끼리 모여 기껏 한다는 일이 헌금을 정성껏 모아 천국까지 가서도 뭉쳐서 살아야 한다고 공동묘지를 구매하는 계획을 세우기 바쁘다. 넘쳐나는 헌금을 주체할 수가 없어 이 금싸라기 같고 좁은 한국 땅을 하나님의 일이라는 미명하에 구매하려 든다. 다른 것은 몰라도 교회가 묘지 살려는 돈만은 차라리 정직하고 실력 있는 기업가에게 무이자로 대출 해주던지 어려운 학생들에게 무상으로 장학금으로 지급하는 것이 백번 낫다. 성도는 죽으면 가만히 있어도 천국 가서 다 만나게 되어 있다. 단체로 경치 좋은 곳에 모여서 한꺼번에 안가도 된다. 혹시라도 교회묘지에 묻히면 더 확실하게 천국 가게 될까 기대하는 자는 오히려 천국갈 수 없다는 복음의 가장 근본적 원리조차 모른다는 뜻이다.

초대교회처럼 모이기에 힘쓰고 자기소유를 팔아 서로 통용하고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떡을 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모르고 단지 그렇게 하지 못한 것으로만  죄책감을 느끼는 교회와 신자들이 너무 많다. 그나마 그러지 못해 부끄럽게 생각하고 회개한다면 아직은 희망이 남아 있다. 정작 무조건 외형적 모습만을 순진한 성도들에게 강요하는 교회가 더 큰 일이다.

초대교회는 소유를 다 팔지는 않았다. 대신에 어려운 사람들을 절대로 외면하지 않았다. 또 그럴 수 있었던 근본 이유도 사도가 그렇게 하라고 시킨 것이 아니라 이 땅의 소유가 내 것이 아님을 확신하고 주님의 재림을 진정으로 소망했기 때문이었다. 또 초대교회는 성도 간에 불평불화 없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인 것도 아니었다. 성령 안에서 서로를 용납하고 영적인 안목으로 모든 사람을 주님의 긍휼이 필요한 자로 대했다. 무엇보다 초대교회는 성전에 모여 예배나 행사에 힘쓴 것이 아니었다. 모두가 하루도 빠짐없이 복음의 열정으로 가득 차서 땅 끝까지 흩어졌던 것이다.

그리고 그럴 수 있었던 최초의 출발점은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것이 아니라 받아 들였기 때문이다. 십자가 복음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나게 하면 교회의 머리 되시는 예수님이 성도의 공동체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을 다 주관해 주신다. 요컨대 교회가, 아니 목사가 정작 또 유일하게 해야 할 일은 예수님의 십자가만 올바르게 전하고 가르치는 것이다. 성도들의 마음을 십자가 안에서 하나가 되게 하는 것이다.  
  
여러분은 주일 날 왜 교회로 모이는가? 물론 하나님께 예배드리기 위해서다. 그러나 모두들 열심히 모여서 아무 잡음 없도록 뭉치게 한다고 참 예배가 될 수는 결코 없다. 왜 자기 소유를 팔아 통용해야 하며, 왜 성도들을 기쁘고 순전한 마음으로 대해야 하며, 왜 땅 끝까지 흩어져야만 하는 지를, 재차 강조하지만 모이는 것이 아님, 배우고 실천하기 위해서 예배로 모여야 한다. 쉽게 말해 교회나 담임목사에게 순종하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충성하기 위해서다.  

교회에는 반드시 사도행전의 숨겨진 실제 주인공들 즉, 오순절의 3,000명처럼 성령의 충만을 바라며 흩어지기 위한 자들이 모여야 한다. 그리고 예배를 통해 땅 끝까지 이르러 담대히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성령의 권능을 덧입어야 한다. 제대로 예배를 드리면 모이는 것은 주일날 한번이라도 족하다는 말이다. 대신에 나머지 6일은 가정으로, 학교로, 직장으로, 어디든지 주님이 보내는 곳으로 가야 한다. 한 마디로 신자는 항상 주님이 흩어주신 바로 그곳에서 자기 몸을 거룩한 산제사로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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