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성경의 역사적, 정치적 배경
콜린 헤머(COLIN HEMER)
바사제국은 알렉산더 대제(B.C. 336-323)의 극적인 정복으로 몰락하였다. 알렉산더는 헬라와 동방의 문화를 결합시켜서 하나로 만드는 데에 역점을 두었고 그리하여 그의 시대 이후로 헬라의 영향이 동부 지중해 연안에 퍼지게 되었다. 알렉산더 대제가 갑자기 요절한 뒤로 그의 방대한 영토는 여럿으로 나뉘어졌다. 그의 휘하 장군이었던 톨레미는 애굽을 차지한 후 팔레스타인은 전략상 중요한 지역이었으나 종교상의 문제들에 있어서는 상당한 자치권을 허용하였다. 많은 유대이들이 그의 새 수도의 애굽의 알렉산드리아에 실제로 이주하였고 또 그들의 공동체는 화려하고 성공적인 그 도시에서 정치적으로 제한된 권리들을 부여받았다.
헬라적인 영향
- 그 뒤에 이어진 전시대는 자주 헬레니즘 시대(Hellen = "Greek") 를 불리운다. 헬라인의 코이네("공통")언어는 국제어가 되었다. 특히 알렉산드리아에 정착한 "흩어진"(이주한) 유대인들이 이 언어를 채택하였다. 그리고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칠십인경"이 그곳에서 완성되었는데 본래 톨레미 II세가 그 일을 위촉하였다고 전하여지고 있으며 B.C. 2세기 중엽에 완역되었다.
헬리니즘 운동은 유대인들 중에서도 강력히 전개되었다. 하지만 하시딤(" 경건한 자들")과 후대의 바리새인들은 유대 율법에 헌신한다는 명분으로 헬라의 영향에 항거하였다.
톨레미 왕조의 세력이 기울자 팔레스타인은 B.C. 200년에 결국 경쟁적인 수리아의 마게도냐 왕조인 셀류키드 왕조의 안티오쿠스 III세("대제")에게 넘어갔다. 셀류키드 왕조는 처음에 유대의 제도들을 존중하였다.그러나 안티오쿠스는 결정적인 실수를 저질렀다. 소아시아와 헬라에서의 그의 야망들은 신흥 로마 세력과의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그는 A.D.190년 서부 소아시아의 마그네시아에서 결정적인 타격을 받고 큰 영토를 넘겨주었으며 막대한 벌과금을 지불하였다. 그리하여 로마는 동방의 세력이 되었다.
안티오쿠스 IV세 에피파네스("신이 나타나다",B.C.175-164년)는 그의 왕국의 운을 회복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는 유대인 당파들 간의 음모들을 이용하여 유대인들에게 헬라 문화를 강요하고 또 이교의 제단과 제사를 예루살렘 성전 안에 들여 놓게 하였다.
이같은 처사는 폭력적인 반응을 불러 일으켰다. 유대의 애국자들은 제사장 맛타디아스와 그의 다섯 아들들을 차례로 지도자로 삼고 투쟁하였다. 그 가족은 한데 묶어서 막카비 가문으로 알려지고 있다. 막카비 가문의 명칭은 아버지가 죽고 나서 처음 지도권을 쥔 셋째 아들 유다스 막카비우스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었다. 오랜 투쟁 끝에 그 형제들은 그들의 백성을 위한 신앙의 자유를 쟁취하였고 결국에 가서는 실제적으로 독립된 유대국가를 세우기에 이르렀다. 이 국가는 막카비 가문의 대제사장들이 대를 이어 통치하였다. 이 통치자들은 그 왕조의 이름인 하스모네아인들로 알려지고 있다. 후에 그들은 "왕"의 칭호로 불리워졌다. 그들은 로마와 우호적인 관계를 추구하면서 북쪽으로 사마리아와 갈릴리를 정복하고 B.C. 63년까지 그 지역의 실권자로 남아 있었다. 그 해에 동방의 로마사령과 폼페이는 왕조의 한 싸움에 셀류키드 왕조의 영토를 새로 조직한 로마의 수리아 주에 편입시켰다.
로마: 공화국에서 제국으로
- 로마 정부 자체는 사회분쟁과 당파싸움으로 깊이 나뉘어져 있었다. 자치행정제도는 방대한 정복자들의 통치를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것으로 판명되기에 이르렀다. 일련의 로마 내전들이 동방 도처에서 반사적으로 일어났다.가이사(Julius Caesar)는 폼페이를 치고 B.C. 44년 공화주의자들에게 살해될 때까지 독재자로 군립하였다. 이제 안토니와 옥타비안이 주도하게 된 그의 당은 브루투스와 갓시우스가 주도하던 공화주의자들을 B.C 42년 마게도냐의 빌립보에서 타도하였다. 그리고 나서는 안토니와 옥타비안이 서로 패권다툼을 한 끝에 옥타비안이 B.C. 31년 헬라 서부의 악티움 해전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로마 세계의 새 주인은 아직 청년인 대 가이사(Julius Caesar0의 조카의 아들이자 수양아들 옥타비안이었다.원로원은 그에게 "아구스도"("Augustus")라는 칭호를 부여하였다. 그는 신중을 기해서 엄한 법률준수를 내세워 그의 권력의 범위를 위장하였다. 그는 공화정부를 회복할 것을 주장하였으나 실상은 우리가 "제국"이라고 불러야만 할 정부를 수립하였다. 하지만 이론상 세습적인 군주정치의 개념은 로마인들에게 상극이었다. 그와 및 그의 바로 다음 후계자들은 지중해 세계 전체에 새로운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 주었다. 그는 A.D. 14년에 죽었다.
신약성경 저작자들 가운데 오직 누가만 로마 황제의 이름을 밝히고 있다. 그의 언급들은 우리에게 복음서들과 사도행전에 나오는 사건들의 대략적인 윤곽을 잡을 수 있는 자료를 제공해준다. 예수께서는 아구스도 때에 탄생하셨다(눅2:1). 세례요한의 전파(눅 3:1-2)와 및 예수님의 사역 죽으심,부활, 승천은 디베료 치하에서 일어났다(A.D.14-37년)바울의 여행들은 대부분 글라우디오(A.D. 41-54년,행 11:28과 18:2에 언급된 황제)와 네로(A.D.54-68 년 바울이 호소한 가이사 황제)의 통치 때에 이루어졌다. 바울은 A.D.60년경에 로마에 도착하였다.
하나님의 때
- 예수께서 오시고 복음이 전파할 하나님의 때가 차 있었다. 아구스도는 그의 세계에서 전쟁을 종식시켰다. 거대한 신설 도로망이 문명세계를 하나로 묶어서 로마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전 어느 때보다도 의사소통이 쉬워졌다. 라틴어와 헬라어는 공식언어가 되었다. 동방 도처에서는 헬라어가 사용되었다. 헬라어는 이미 구약을 헬라어로 번역한 70인경의 언어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곧 신약성경의 언어가 될 것이었다.
유대인들 가운데는 약속된 메시야에 대한 열렬한 기대와 소망이 있었고(p. 494의 "신약성경의 종교적 배경"을 보라). 또 이방인들 중에는 다소 불분명 하나 개인적인 "구원"을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다. 한편 로마제국의 전략적인 중심지들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 사회들은 바울과 그 밖의 사람들의 선교를 위한 미래이 청중들을 쉽게 확보해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팔레스타인의 통치자들
- 복음서들에 대한 보다 직접적인 정치배경은 로마의 정복 이전의 팔레스타인 지배자였던 안티파텔이라 하는 잔인무도한 혼혈유대인 모험가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와 그의 아들 헤롯은 이어지는 로마 통치자들의 환심을 샀고 그 결과 헤롯("대제") 은 로마 당국에 의해서 유대인의 왕이 되었다. 그는 B.C. 37- B.C. 4년 어간에 유대를 통치하였고 예수께서는 그가 죽기 직전에 탄생하셨다(마2장,눅1:5을 보라).
그가 죽고 나서 그의 왕국은 세 아들들에게 분배되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통치자 헤롯 아켈라오(마2:22)는 A.D. 6년에 페위되었고 그의 영토는 로마의 직접적인 통치하에 들어갔다. 로마 당국은 수리아 총독 밑에 속하는 "집정관" 혹은 총독을 세워 팔레스타인을 다스리게 하였다. 갈릴리와 및 다른 영토는 대부분 헤롯 가문의 왕들이 다스렸다. 갈릴리의 통치자 헤롯 안티파스(B.C 4-A.D.39년)는 세례요한을 죽인 자였다(마14장과 그 밖의 병행 기사들). 사도행전에서 우리는 헤롯 아그립바 I세(A.D 44년 사망.행12장)에 관한 내용을 대하게 되는데 그의 통치하에서 팔레스타인 전체가 잠시 다시 한번 통일이 되었다. 그의 아들 헤롯 아그립바 II세(행 25-26장)가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P 540의 특주도 역시 보라).
가장 잘 알려진 집정관 혹은 총독은 빌라도이다(A.D 26-36년).그는 다른 자료들에서도 유대인들의 미움을 살 일들을 많이 한 요령있고 난폭한 자로 알려지고 있다(P.510도 역시 보라) 뒤에 바울은 벨릭스와 베스도 총독 앞에 선 일이 있다(행 23-26장).
정치적 긴장
- 팔레스타인은 정복자의 하나여서 강력한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민족주의자들은 자기 백성을 로마인들에게서 해방시켜 줄 정치적인 메시야를 찾았다. 특히 소란했던 갈릴리에서도 자칭 메시야들이 많이 나타났다. 극단적인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열심당은 로마에 세금 바치는 것을 거부하였다. 한편 대제사자들과 그들의 사두개파 추종자들은 로마인들과 손을 잡았다. 특히 안나스와 그의 가족은 그들의 지위를 보장해준 로마 당국자들과 영합하여 기득이권을 얻었다. 헤롯 가문도 역시 그들의 지위를 로마에 의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세리들"과 그들의 앞잡이들은 로마를 위하여 동족으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과정에서 부정축제를 일삼았다.
예수께서 민족주의 노선의 지도자 역할을 맡아주실 것으로 기대하였다가 그가 그들의 계획에 아무 관심도 표명하지 않으시자 물러가버린 사람들도 분명히 많았다(요6:15,66을 보라).그러나 전반적인 정치상황의 긴장은 예수님을 재판할 때의 계략에서 나타났다. 빌라도는 그의 죄수에 대한 기소내용의 가상적인 암시로 말미암아 강요된 행동을 취한 것 뿐이었다.
로마 세계의 복음
- 그 시대의 역사는 너무나 자주 로마 황실의 사건들만을 위주로 해서 살펴온 감이 있다. 사도행전은 지방의 생활 및 행정에 있어서 무시되었던 국면들을 보여 주는 아주 중요한 문서의 하나로서 그 본래의 위치를 점하고 있다.거기서 우리는 지방의 총독들과 예속된 왕들과 헬라 도시의 행정관들의 면모를 생생하게 엿보게 된다. 상당한 양의 관련기사가 나오는 소아시아 땅은 그 시대 헬라문명의 실제적인 중심지였다. 또 그곳은 이방인 기독교의 전략적 중심지였다. 로마는 헬라적인 시민생활의 제도들을 통해서 이 지역을 움직여 나아갔고 또 한편으로는 동양사상에 일치되는 통치자 숭배를 받아들였고 결국에 가서는 그것을 충성의 유대로 인정하기에 이르렀다. 여러 전략적인 도시들에는 로마 당국에 의해서 보증을 받는 특권을 가진 부요한 유대인 사회들이 있었다.
다소 사람 바울은 유대인인 동시에 헬라인이요 로마인으로서 인종과 문화의 장벽들을 넘어서 복음을 전하기에 아주 적합한 인물이었다. 우리는 대로들을 따라서 그가 지났던 길을 추적할 수가 있다. 또 그가 청중들 중에서 개인을 택하여 접근하는 방법을 채택한 사실도 찾아볼 수가 있다. 사도행전의 기록은 다양한 지방의 제도들-에베소의 "서기장" 데살로니가의 "읍장들"(A.V.는 "그 성의 통치자들") 아덴의 "아레오바고"혹은 "군신의 언덕"등-을 아주 정확히 언급하고 있다. 로마 시민들의 "식민지"로서의 신분에 대한 빌립보의 교만이 분명히 그리고 풍자적으로 지적되고 있다(행 16:12,20-21,37-39,R.V.의 빌3:20과 비교하여 보라). 이같은 유의 수많은 세부사항들은 이 성읍들에서 나온 돌비들에 새겨진 그 당시의 비문들에 의해서 확증이 된다.
에베소의 이 극장은 사도행전 19장에 아주 극적으로 서술되고 있는 바울과 그의 동료들에 대한 군중의 반대 시위 현장이었다.
사해동포주의자인 바울은 로마의 제도들 안에서 복음에 대한 보호와 도움 을 발견하였다. 유대교는 메시야적인 성취가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졌다. 고린도에서 이 견해는 심각한 도전을 받았다. 그것은 첫 시도로서 잠정적인 법률적 판례의 하나였다. 바울은 새 로마총독 갈리오 앞에서 율법에 어긋나는 종교를 가르치는 일로 고소당하였다(행18:13).미래의 황제 네로의 가정교사요 유명한 철학자인 세네카의 형제였던 갈리오는 감명을 받지 못하였다. 그의 보기에 그 전체의 일은 유대 종파의 신학에 관한 문제였고 또 별 흥미도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고소를 기각함으로써 그는 암시적으로 바울의 메시지가 다른 형태의 유대교와 동등한 위치에 있음을 인정하는 셈이 되었다. 이 사건은 필시 A.D. 52년에 일어났을 것이다. 그리이스의 델피에서 나온 바 비문을 갈리오를 언급하고 있고 또 바울의 생애에 대한 연대기를 작성하는 데에 하나의 고정된 시점을 제공해주고 있다.
바울은 그가 나면서부터 얻은 로마 시민권을 최대한으로 이용하였다. 이것은 그 시대의 지방 유대인에게는 특별한 권리였다. 팔레스타인에서 긴장이 고조되어가고 있을 때 그는 황제에게 호소함으로써 그의 최고 권리를 행사하였다. 그는 결국 죄수의 신분으로 로마에 도착하였으나 분명히 무죄석방이 될 것과 네로의 최고법정 앞에서 복음이 변호될 것을 확신하고 있었다. 사도행전의 기사는 우리에게 그 결과를 들려 주지 않고 갑자기 끝을 맺는다.
위기와 핍박
- 그 다음 해들의 역사는 광범위한 영향을 미전 사건들에 의해서 특징지워진다.A.D. 64년에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로마시의 태반을 파괴한 대화재의 범인들로 몰아세워 속죄의 염소를 삼았다. 그는 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온갖 잔인한 방법을 다 동원하여 처형했다. 그러나 이것은 심사숙고한 정책의 일부가 아니라 이성을 잃은 그리고 아마도 아주 집중적인 감정의 폭발이었을 것이다.
그러는 동안에 팔레스타인에서는 사건들이 하나의 비극적인 절정을 향해서 진행되어 가고 있었다. 후임총독들의 실책과 열심당에 의해서 고무된 반항이 로마에 대한 필사적인 반란에서 그 절정에 이르렀다(A.D.66-70년).로마 사령관 베스파시안은 A.D.69년에 황제로 선언되었고 그의 아들 타이투스로 하여금 그의 원정을 끝내게 하였다. A.D. 70년에 타이투스는 예루살렘을 함락시키고 헤롯 성전을 완전히 파괴하였으며 예루살렘 성을 초토화시켰다.
그 재난은 유대인과 그리스도인들에게 다 같이 심각한 영향을 초래하였다. 두 신앙은 훨씬 더 결정적으로 분리되었다. 유대교는 그 특권의 일부를 상실하였고 기독교는 새로운 문제들과 다시 고개를 든 공식적인 핍박의 위기에 봉착하였다.
후기에 몇몇 신약성경이 예루살렘 멸망과 초기의 핍박에 대해서 갖는 관계는 자주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적어도 요한계시록은 베스파시안의 다른 아들인 도미티안 황제(A.D.81-96년)의 통치 말년에 속하는 것으로 믿을 만한 강력한 근거들이 있다. 로마는 이제 기독교의 보호자가 아니라 치명적인 대적이 되었다. 도미티안은 자신을 "주"와 "하나님"으로 예배하도록 하여 충성의 여부를 시험하도록 명령하였다.백성은 그리스도와 가이사 중 어느 한편을 택해야 할 중요한 기로에 서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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