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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대한제국 군대의 무기와 사진들

명호경영컨설턴트 2010. 1. 21. 20:31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
사실상 대한제국군의 주력무기다. 아관파천 이후 러시아와의 군사협력을 강화할 목적으로 수입되었는데, 러시아의 무상공여분까지 포함해 대략 5천~7천 정 정도 보유한 듯 하다. 물론 이 무렵 이미 러시아는 모신나강 소총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독일제 마우저 1871
대한제국군의 또 하나의 뻘짓. 러시아제 소총으로 무장한 상태에서 러시아에 군사적으로 종속되는 것을 막아보겠다고 다시 독일로부터도 총기를 수입했다. 덕분에 러시아제와 독일제라는 서로 다른 보급체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 예나 지금이나 보급체계는 단일화할수록 좋은데, 군수능력도 안 되면서 보급체계만 이원화시킨 셈이다. 11밀리 단발식.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국민돌격대에서 쓰이기도 했다.


미국제 레밍턴 롤링블럭 소총
신미양요 때 미군이 쓰던 총이다. 역시나 특정 국가에 군사적으로 예속되는 걸 막는다고 수입했는데, 역시나 뻘짓. 을미사변 현장에도 있었는데, 그때는 이미 그 전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할 때 물에 빠뜨린 걸 건져 쓰는 터라 제 역할을 못했다. 하기야 작정하고 쳐들어온 것이니 제대로 쓰였다고 크게 도움 되었을리는 만무하지만.


일본제 무라다 13식 소총

1880년 포병 장교인 무라다 쓰네요시가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을 일본인 체형에 맞추어 개량하여 만든 소총으로 동학농민전쟁을 진압하던 일본군의 주력무장이었다. 11밀리 단발식. 별기군 창설 당시 200여 정이 도입되었는데, 이후 추가도입을 계획하기도 했지만 무산되었다.


영국제 엔필드 스나이더 소총
이건 또 임오군란 이후 청에 예속되어가면서 거의 떠안듯 수입한 총이다. 한 2천 정 수입했나? 보면 알겠지만 참 구닥다리 냄새가 나는 총이다. 무려 전장식. 메이지 유신에서도 활약했다. 그러나 20세기 여전히 대한제국군에서는 계속 쓰이고 있었다.


마우저 M1896 권총
내가 가장 좋아하는 권총 가운데 하나. 아마 총기마니아들에게 있어 디자인적인 면에서 가장 인기 있는 권총 가운데 하나가 아닐까? 성능과는 별개로 그 독특함이 사람들의 마음을 잡아끈다. 이 놈 때문에라도 대한제국군에 입대하는 것도 괜찮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마우저 1871과 함께 수입되었다.



미국제 개틀링 기관포
동학혁명 당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데 쓰이던 무기. 조선 백성이 낸 세금으로 무기를 사서는 조선 백성을 죽이는 데 쓴 셈이다. 우금치 전투에서 전율스런 살상력을 과시한다. 20여문 이상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맥심 기관총
현대전의 전술개념 자체를 바꾸었다고 일컬어지는 바로 그 기관총이다. 당시로서는 최신무기 가운데 하나였는데 대한제국군도 하나 장만했었다. 원래 무능한 독재자일수록 무기수집을 그 취미로 하는 터라. 이란의 팔레비나 사우디의 국왕이나.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군에 의해 쓰여 일본군에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기도 했는데, 1901년 영국으로부터 6정 수입했다.



크루프 75mm속사포
성능에 있어 일본군의 75밀리 야포를 크게 능가했다. 1차세계대전 당시에도 터키군과 독일군에 의해 쓰였다. 성능이야 뭐... 10문 정도 보유했다고 한다.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무척 놀랐다. 이런 놈이...

 
암스트롱포. 영국제로 청일전쟁에서 패한 청나라가 두고 간 것을 입수해 썼다. 메이지 유신에서도 쓰였다고 하니 참으로 유서깊은 야포라 아니 할 수 없다. 그러고 보니 어디 만화에서도 같은 이름이 나오는 것 같은데. 10문 정도 보유했다고 한다.


이렇게 정리해 놓고 보니 도대체 소총만 몇 가지야? 구경마저 다 제각각이라 군수의 통일이 쉽지 않았다. 누구는 베르당 쓰고, 누구는 마우저 쓰고, 어디선가는 엔필드가 굴러다니고. 크루프제 75mm포가 쓰였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지만 그래봐야 10문 남짓. 도대체 누가 계획한 건지 몰라도 군수체계나 전술은 전혀 고려하지 않은 마구잡이식 무기도입이라 하겠다.


무라타 18식

구경 : 6.5mm
길이 : 127.5cm
무게 : 4.05kg
총신길이 : 80cm
강선수 : 6조우선



무라타 22식

구경 : 8mm
전장 : 122cm
무게 : 4.17kg
특징 : 약실하부에 홈을판 간식전상관탄창(刊式前床管彈倉)으로 연발사격가능.
장탄수 : 5
최대사거리 : 2200m

러일전쟁 당시 사용한 일본군의 주력소총이다. 이보다 뒤에 나오는 아라사카 38년식이 저 위에 나온 마우저 1871을 바탕으로 개발된 것이고 보면 최소한 보병의 주력무장인 소총에 있어서는 대한제국군이 오히려 앞선 부분마저 있었다. 2만 2천 대한제국군 전체를 무장시키기엔 7천 정 정도라는 것이 너무 적기는 하지만 베르강 역시 무라타에 비해 떨어지는 소총이 아니었으니까. 더구나 맥심 기관총이나 크루프 속사포는 일본도 아직 보유하지 못한 것이었으니.

그러나 무기만 좋으면 뭐하는가? 이런 좋은 무기들을 보유하고 있었으면서도 결국 대한제국군은 제대로 싸움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무기력하게 해산되고, 대한제국은 끝내 1910년 일본에 합병당하게 된다. 무기가 좋으면 뭘 하는가? 싸울 수 있는 기본이 되어 있지 않은데.
 
당시 일본군의 규모가 대략 30만 정도. 반면 대한제국군은 2만 2천 남짓이었다. 그런데도 대한제국은 예산의 절반 가까이를 군대를 유지하는 데 써야 했고, 그를 위해 농민과 상인들로부터 막대한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다. 그만큼 경제적 기반이 취약한 상태에서 아무런 근본적인 대책 없이 세금만을 쥐어짜 만든 군대인 것이다. 그리고는 과중한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봉기한 농민들을 진압하는데 이 군대가 쓰였고.

한 마디로 악순환의 고리다. 군대는 필요하고, 산업기반이 취약하니 군대를 유지하려면 세금을 더 거둬들이지 않으면 안 되고, 세금을 더 거둬들이면 백성들이 반발하니 군대로 그것을 진압해야 하고... 그 과정에서 알마나 많은 무고한 농민들이 희생되었던가. 살인과 강간과 약탈에 대한 당시의 원성은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하겠다 나섰으니... 우리 조상들도 참 어지간했다는 생각이다. 나같으면 그렇게 못 했을 텐데.

그런 주제에 고종은 또 벼슬자리를 팔아 자기 개인재산을 늘리고는, 그것 가지고 일년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돈을 들여 생일잔치를 열기도 한다. 군주로서 건재함을 과시하고자 하는 정치적 목적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당장 돈이 없어 허덕거리던 대한제국의 실정을 생각한다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구나 그렇게 돈을 받고 벼슬자리를 팔면, 돈을 주고 벼슬자리를 산 관리는 어디선가 본전을 다시 챙겨야 하지 않겠는가. 세도정치나 고종이나 별반 다를 게 없는 부류들인 셈이었다.

그러한 고종의 무능과 방만함은 결국 양무호의 수입이라고 하는 최악의 뻘짓으로 드러난다. 석탄운반선으로 쓰이던 3천톤급 화물선을 대포 두 개 달아 놓고 군함이라며 국방예산의 30%에 달하는 당시돈 55만엔 - 110만원을 주고 들이다니. 저리 이리저리 소총들을 뒤섞어 놓아 주제도 않되면서 보급체계만 복잡하게 만든 고종 다운 뻘짓이었다. 그 돈이 또 어디서 났을까?

차라리 그 돈으로 서양으로부터 기계를 사들여 공장을 지었더라면 어땠을까? 공장을 지어 산업을 일으키고, 유학생을 서양 여러 나라에 보내 기술을 배워오게 했다면, 그 돈으로 군대를 기르는 것보다 과연 못했을까? 법과 제도를 일신하고 나라의 근본을 크게 바꾸어 개혁하는 데 힘을 썼다면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해산시켜버린 군대보다 그것이 그리 못한 결과를 가져왔을까? 그것이 당시 고종과 대한제국 위정자들의 한계였다.







그러나 그러한 고종의 뻘짓에도 대한제국군대의 해산을 맞아 참령 박승환을 자결을 했고, 1연대 2대대와 2연대 1대대 병력들은 해산명령을 거부하고 일본군과 교전하여 최소 백 수십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내기도 한다. 그러고서도 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던 군인들은 의병에 합류하여 다시 항일전선에 뛰어들었다 하니 도대체 그 애국심이 다 어디서 나놨는가 싶다. 상대적으로 홀대받던 지방의 군대들도 또 같이 일어나 무기고를 습격하여 역시 의병에 참가했으니... 이른바 가장 격렬했던 정미의병이다.

아무튼 이런 내용을 볼 때마다 고종과 명성황후에 대한 증오가 새록새록 샘솟는다. 그들이 잘만 했다면, 당시 대한제국 - 혹은 조선의 지배층들이 제대로만 했다면, 저러한 상황에서도 나라를 지키겠다 기꺼이 목숨을 내던졌던 의기와 충심이 그리 허무하게 스러지지는 않았을 것 아닌가. 끝내는 저리 의병에 참가한 이들마저 어찌되었거나 조정에 의해 폭도로서 규정되어 일본군에 의해 토벌당하는 처지가 되었으니.




군사력이라는 건 그저 무기만 사들인다고 되는 게 아니다. 국방이라는 건 좋은 무기 사들여 무장시킨다고 되는 게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이 필요하다. 전술과 전략, 그 이전의 군수, 그리고 그 이전의 국가 자체의 튼튼한 기반이 필요하다. 산업과 경제와 정치와 사회의 근본적인 발전이 병행되고서야 무기든 군대든 의미를 갖는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어떠한 전략적 목표도 정책적 비전도 없이, 전술이 뭔지 군수가 뭔지도 모른 채 그저 무기만 사다 늘어놓은 대한제국의 몰락이 그것을 말해준다. 어쩌면 그러한 점이야 말로 개항 이후 일본은 근대화에 성공하고, 조선은 끝내 근대화에 실패하고 멸망해버린 이유일 것이다.

지금도 우리는 경계해야 한다. 국가전략이란 무엇인가. 국가의 외교적 정치적 전략과 목표는 무엇이며 그것을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저 단기적인 성과에만 급급할 것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보고 일관되고 꾸준한 계획수립과 실천이야 말로 진정으로 우리를 강대국에 이르게 할 것이니.

먼저 산업을 일으키고, 기술을 배워 발전시키고, 사회 전반의 모순과 부조리를 일신했을 때만이 비로소 부국강병의 길에 이르는 것이다. 세금을 쥐어짜 군대만 강하게 한다고, 징병제로 병력을 늘리고 최신 무기로 군대를 무장시킨다고, 부국강병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개항하고 불과 십 수 년이 지나고 스스로 총을 설계하고 생산할 수 있었던 일본에 비해, 총을 만든다 대포를 만든다 요란하기만 했지 하는 것 없이 실속이 없던 대한제국의 모습은 그래서 무척 비교가 된다.

물론 일본과 대한제국은 상황이 다르다. 일본의 간섭에, 청의 간섭에, 러시아의 간섭에, 무얼 하나 하려 해도 도대체 뜻대로 할 수 있는 것이 무척 제한되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일본과 청이 함께 물러났을 때, 청일전쟁 이후 삼국간섭으로 일본이 잠시 주춤거리고 있을 때, 대한제국에게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러나 그 시기를 고종을 비롯한 대한제국의 위정자들은 헛되이 보내 버렸고, 그 결과 그 많은 돈을 들여 길러낸 군대마저 제대로 써보지 못하고 해산당한 채 끝내는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다. 국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지만, 그들이 진정으로 지키고자 했던 것은 그들 스스로의 기득권일 뿐, 조선 - 대한제국과 백성들은 아니었기에, 그들이 했다고 하는 노력도 고작 강대국에 기대 그들의 온정을 구하는 것 뿐이었다. 

다시 말하지만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전술과 전략으로 한다. 그리고 전술과 전략은 그 나라, 그 사회가 갖고 있는 기초체력에서 나온다. 산업과 경제, 정치, 외교, 인문, 가치 등등등등... 어느 한 가지도 소홀히 할 수 없고, 한찮다 여길 수 있는 것도 없다. 무기란 그저 거들 뿐. 군대 역시 그저 거들 뿐이다. 손자도 그러지 않았던가. "전쟁이란 싸워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겨놓고 싸우는 것"이라고. 대한제국은 이미 모든 것에서 진 상태에서 그저 결과로서 일본에 병합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어쩌면 고종이 저항을 포기하고 순순히 합병에 동의한 것은 그나마 업적이라 할 수 있을런지도 모르겠다. 이미 진 싸움 더 이상 찌질찌질 붙잡고 늘어지지 않고 순순히 포기함으로써 압도적인 일본과의 전쟁에서 자칫 희생당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나마 구했으니. 그 정도가 대한제국 황제 고종이 할 수 있는 전부였겠지.

역사를 만들어가는 것은 대중이지만 역사를 이끌어가는 것은 지배층들이다. 특히 가치를 생산하고 가치를 제시하며 가치를 실현하는 이들. 정치인이나 지식인들. 그들이 올바른 가치를 생산하고 그 가치를 제시하며 그 가치를 실현하려 할 때 미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간다. 그때 우리는 그러지 못해서 망했다. 그럼 지금은 어떠할까?

문득 어느 대한제국 군인의 모자와 견장이 먹먹해져 온다. 마땅히 지켜야 할 나라를 갖지 못했고, 끝내 나라를 지켜내지 못한 저 분들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무엇으로 저 분들의 아픔을 달래주어야 할까? 무엇이 저분들의 한을 조금이나마 달래줄 수 있을까? 100년이 지나고도 그 답이 쉽사리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 참으로 애닲다.

출처 : P.G.L 착실이의 필리핀 라이프
글쓴이 : 착실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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