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의 교회와 영성 (회고와 전망) 평택 대학교 홍성국 교수 들어가는 말 우리 앞에 21세기는 다가오고 있다. 그러기에 우리는 어떻게 20세기를 마감하면서 동시에 새로운 세기를 맞이하여야 하겠는가? 라는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신학도들이 모인 이 자리에서 그 같은 질문은 미래의 지도자들로서의 준비에 가장 적합한 질문이라고 본다. 그 이유는 그러한 질문을 통해 나의 미래적 지도자 상을 스스로 그릴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를 되돌아보며 앞으로의 목적지를 그려보는 것은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사 의식의 작용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우리는 그러한 의식적 작용을 회고와 전망이라고 한다. 무엇을 회고하며 무엇을 전망하겠는가? 에 대하여는 많은 의제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모든 의제들을 총 망라할 수 없다. 우리의 이 모임은 20세기의 마지막 종교 개혁 주간의 모임임으로 지극히 한정적인 의제에 초점을 모으려고 한다. 즉 교회의 오늘의 현 주소와 앞으로의 좌표에 대한 것이다. 이 문제를 논의함에 있어서 우리는 특히 영성이라는 문제에 국한시킬 것이다.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은 그 영성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와 영성을 다루게 될 때 우리는 종교 개혁 주간을 기념하면서 종교 개혁의 앞으로의 의미도 되 삭이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논의의 목표를 설정해놓고 그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몇 가지 선행적으로 다루어야 할 것들을 먼저 다루고 우리의 목표를 향해 발걸음을 옮겨 놓으려고 한다. 먼저 다루고자 하는 것은 어휘의 정의와 관련된 것으로 "21세기," "교회," "영성"의 의미이다. 우리는 어떤 어휘들을 사용할 때, 누구나 다 사용하기 때문에, 혹은, 편의상, 혹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어휘들이기 때문에, 사용할 수만은 없다. 의미부여를 해 줌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논의의 방향을 미리 정해줄 수 있다. 그렇다면 "21 세기"는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야 하는가? 21세기는 사회학적 의미에 있어서 어떤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고, 시간적인 개념에서 볼 때, 한 밀레니엄에서 다른 밀레니엄으로 전환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 같은 시간적 개념은 우리로 하여금 사회학적 측면에서 시간의 변환이 갖는 의미를 부여하려는 우리의 이성적이며 심리적 자극을 유발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20세기에서 21세기로 넘어간다고 해서 무엇이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달라진다면 지금 달라지고 있는 사회 현상이 변화의 과정을 계속 유지하려는 사회적 힘에 의한 과정의 연속에 의한 변화의 결과일 따름이다.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야 하는 것은 교회의 의미다. 교회라는 의미는 일반적 개념에서부터 특수 개념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어떤 종교에서든지 종교적 행위를 위하여 신도들이 모인 곳을 교회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의 관심은 기독교회 중에서도 개신 교회에 대한 것이다. 개신 교회 중에서도 복음주의 입장에 있는 교회에 대한 것이다. 이 같은 제한된 의미에서 교회에 대하여 관심을 가짐으로 우리의 논의의 범위를 제한시킬 수 있다. 우리는 제한된 범위 내에서 모든 교회들의 서로 다른 입장을 포괄적으로 다루는 것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우리가 먼저 의미를 밝혀둘 것은 영성에 관한 것이다. "영성" (spirituality)이라는 말은 신약의 어휘는 아니다. 그것은 일반 종교를 비롯한 후대의 교회에서 사용하는 어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종교나 사이비 종교 등에서 말하는 영성에 대하여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신약에서는 "영성"이라는 명사형을 사용한 곳이 없고 "영적" (spiritual)이라는 어휘를 사용한다. 그 같은 신약적 용어를 근거로 해서 교회에서 사용한 "영성"은 데이빗 파이프 (David Fyffe)에 따르면 "영성은 그리스도인의 본질적 성품으로서 예수님의 성령이 개인을 소유하고 있음을 포함한다. 성령의 복스러운 임재는 도덕적 직관과 승리를 증진시키고 하나님의 심오한 신비에 대한 지식을 증가시킨다. 그리고 다른 사람과 하나님을 향한 사랑이 친절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나타나게 한다." 위에서 밝힌 의미에 따라서 지금까지의 복음주의적 교회의 영성에 대한 회고와 함께 앞으로의 전망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그 노력의 일환으로 1. 현재의 사회 현상과 교회의 영성에 대하여 2. 사회에 대한 미래적 예견과 교회가 지향할 영성에 대하여 논의하고자 한다. 1. 회고: 현재의 사회 현상과 교회의 영성 1.1 세속주의 현상 종교의 문제와 관련지어 현재의 사회 현상을 논할 때 가장 두드러지게 언급되어지는 사회적 현상을 세속화에 의한 세속주의 현상이라고 한다. 그런데 세속화 현상은 버거에 의하면 산업자본 주의에 의한 범 세계적인 현상이다. "창조적 파괴력"으로서의 산업 자본주의 혁명의 물결의 파장은 사회 제반 구조 속에서 조용한 혁명을 이루어 가고 있다. 그 혁명은 우리 자신들이 처해 있는 이 사회 속에서 직접 경험하고 있고 그것은 다음과 같은 혁명을 가져오고 있음을 우리는 안다. 자본주의가 들어옴으로 민주적 자유 시장경제 원리가 도입되어 정치적 혁명을 이루고 있다. 자본의 투자에 의한 기술발전과 혁신이 이루어 졌고, 그로 말미암는 다량 생산과 그에 따른 이익의 증대, 잉여 자산 분배의 증가, 가격 파괴, 물질 소유능력이 향상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시장 경제 원리는 사람들에게 경쟁 심리를 창조하고 있다. 사회 문화적 제도들이 변혁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자본주의의 혁명은 우리 사회의 전통적 사회 구조를 변화시킴은 물론 사회 구성원의 문화적 활동에 대한 대 변혁을 가져오고 있다. 예를 들면, 이전에는 모델, 가수, 운동 선수, 배우들은 아주 천한 직업인으로 여겨져서 사회로부터 큰 관심과 자라나는 어린애들에게 있어 장래 직업인으로서의 표상이 되지 못하였으나 이제는 그 양상이 전혀 달라 졌다는 실상은 이 사회에서의 문화적 활동이 어떻게 변혁을 이루어졌는지 말해주는 하나의 단서이다. 사회 문화적 변혁의 양상으로 나타나는 또 다른 예는 가족 제도의 변혁이라는 것이다. 대가족 제도에서 소가족 제도로 바뀌고 있으며, 여권 신장은 현격하게 우리 사회에 자리 잡고 있다. 사회 문화적 제도의 변혁으로서 도시화와 사회의 유동성을 들 수 있다. 도시화는 여러 방면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예를 들면 교통 수단의 효율화, 은행 제도를 통한 서비스 기능의 신장, 정치 제도의 관료화--카리스마적 권위의 이탈과 기술 관료형으로의 변이를 말할 수 있다--의 현상은 가속화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도시화의 급진전은 사회의 유동성 다시 말하면 지역적 유동(이 결과로 사회 심리적 뿌리가 없어지는 현상 초래하게 됨)과 계층적 유동(경제적 성취에 따라 낮은 계층에서 높은 계층으로의 유동현상)이라는 현상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그 한 예로 이전에 농경지를 가지고 농업에 종사하며 도시화의 혜택을 별로 누리지 못하던 농민들이 그 지역이 도시화됨으로 토지 값이 뛰어 올라 갑자기 대 부호가 됨으로 그들의 이전의 계층적 삶의 양상이 갑자기 변화되는 현상을 말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교육 제도의 변혁을 들 수 있다. 이전에는 특수층 사람들만이 받던 대학 교육의 혜택을 이제는 수학 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베풀어지고 있으며 그러한 교육은 실용적 차원에서 경제적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이같이 사회 전반에 걸쳐 변혁을 가져다 준 자본주의는 우리 사회에 물질적 가치관을 형성시키고 있다. 그 이유는 자본주의는 많은 사람들에게 부를 안겨다 주었을 뿐 아니라 물질적 삶의 척도를 향상시켰다. 또한 자본주의는 물질의 소유 능력을 향상시키고 있다. 물질의 소유 능력은 결국 다량 생산에 의한 그리고 돈의 소유에 의한 엄청난 구매력에 의하여 가능해 진다. 물질의 소유 능력은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사회 내에서의 획득적 지위를 향상시키고, 획득적 지위의 향상은 그에 따른 마땅한 대우 내지는 대접을 받게 하므로 우리의 물질적 성공이라는 성공의 척도를 창출하게 되었고 그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리고 있다. 그렇게 되어 물질주의 화 되나간다. 이같이 물질주의화 되 나가는 우리 사회에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들은 어떠한가? 첫째로, 물질주의적 세계관의 형성이다. 우리 주위에서 보았던 공직자들의 부정 부패, 각종 비리, 대형 참사, 또는 패륜적 행위 등은 그 밑바탕에는 돈이라고 하는 물질적 성공에 대한 가치가 얼마나 사회 전반에 걸쳐 뿌리깊이 내리고 있는가 반영해 주는 구체적인 실례들이다. 물질에 대한 강조와 중요성의 인식은 기술 습득이 곧 물질적 성공이라는 기대감 때문에 물질의 소비를 강요하게 된다. 영어 과외, 논술 과외, 무용 교습, 피아노 바이올린 성악 교습, 바둑 교습, 컴퓨터 교습, 외국 언어 문화 익히기 위한 해외 연수 기타 등등 우리의 자녀들은 어려서부터 이렇듯 교육과 기술 습득을 통한 물질적 삶에 대한 기대감을 가지며 자라가고 있다. 그러한 교육과 기술 습득을 향한 노력은 죽을힘을 들여 일구어 놓은 자산을 부모에게서 빼앗아 가도록 강요당하고 있다. 어떤 이는 집을 팔고 전세로 들어가서 그 차액으로 재정을 충당시키는 이도 있고, 어떤 이는 집을 담보로 융자를 얻어 그것으로 충당하는 사람도 있고, 노후를 위해 저축해놓은 통장을 헐어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둘째로, 이러한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사회 구성원 사이의 인간 관계에 영향을 미치고 있다. 사람들이 서로간에 상대방의 외형적 조건 또는 물질적 가치에 의해서 취급하고 취급받는 인간 추상화 현상이 일어나며, 그 같은 인간 추상화 현상은 상대적 빈곤의식 현상을 야기하고 있다. 이 같은 상대적 빈곤 의식은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그러다 보니 그러한 추구 뒤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부끄럽고 고통스러운 결과를 인지할 능력을 상실하고 비인간적 또는 비윤리적 행위를 서슴없이 저지르는 것이다. 그리고 가진 자는 더 많이 가지려고 하고, 온갖 비리를 저지르기까지 하며, 그것으로 모든 특권을 누리며 가지지 못한 자들을 멸시하며 살고 있는 것이 우리의 실상이다. 셋째로, 우리 사회에 물질주의적 세계관에 의하여 나타나는 현상은 다원화된 사회가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는 지금까지 전통적으로 사회를 지탱해오던 전통적 질서, 가치, 관습, 도덕 율, 제도 등이 그 지지력을 상실하게 되고, 전통적인 것들과 경쟁관계에 있는 것들이 하나 둘씩 고개를 들게 되고, 그러므로 모든 사회 가치가 절대적 가치체계로서의 가치가 아닌 상대적 가치로서 다른 것과 대등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다. 이렇듯 여러 가치 체계가 공존하며 어느 하나가 절대성을 주장할 수 없는 상대적 가치로 용인되는 사회가 되 가고 있다. 지금까지 우리 사회는 유교적 세계관과 인습에 의하여 사회가 유지되어 왔는데 이제 그 같은 가치 체계는 절대적 가치가 아닌 상대적인 가치로 변화되고 있다. 상대적인 가치 체계화 된 상태를 다원화된 사회라고 한다. 그렇다면 다원화된 사회에 나타나는 사회적 현상은 무엇인가? 이처럼 세속화에 의하여 다원화된 사회 내에서 나타나는 사회 심리적 요소는 무엇인가? 그러한 사회에서는 그 사회의 구성원들이 소외를 느끼게 될 것이다. 소외는 무력증, 무의미, 무가치, 주변적 외계인 의식 등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사회는 구성원에게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소외된 사회이다. 사회와 구성원 사이에 소외 현상이 있게 될 때 사회 기능의 아노미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1.2. 세속주의가 복음주의 교회에 끼치는 영향 그러면 현대화된 사회 내에서 물질주의적 세계관이 복음주의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무엇인가. 이 문제는 종교 전반에 걸친 영향을 먼저 고려하게 될 때 더욱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물질주의적 세계관은 인간의 의식 속에서 종교적 세계관 을 빼앗아 간다는 것이다. 즉 과학 기능의 발달은 인간의 숙명과 자연에 대한 두려운 의식에서 인간을 해방시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전에는 자신이 태어난 그리고 자란 고향의 토지에 대한 신성한 의식이 있어서 좀처럼 그곳을 떠나지 않았었는데 이제는 원하면 아무 때나 집도 버리고, 전답도 버리고, 땅과 산도 버리고 훌훌 떠나 도시로 몰려들고 있다. 그러므로 그 세계관은 자연의 신비와 신화에 뿌리를 둔 종교적 세계관이라는 정신적 뿌리와 사회 지리적 뿌리로부터 우리를 전혀 다른 세계로 이식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즉 종교적 사회로부터 물질주의적 세속적 사회로의 변천이다. 종교의 역할 중 하나는 사회의 전통적 가치 체계를 지탱해 줌으로 사회의 기능이 유지되도록 함으로 사회의 아노미 현상을 방지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원화된 사회에서는 정통성 유지 체계로서의 종교의 영향이 상대화되기 때문에, 단지 하나의 견해로 인정받게 되어 아노미 현상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상실된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이 같은 세속화적 또는 다원적 사회 현상이 복음주의적 기독교에 미치는 영향은 어떤 것일 가? 그 영향은 세 가지 측면에서 나타난다. 첫째는 세속화 신학이라는 방법이 하나의 운동으로 등장하고 있다. 종교적 전통이 구속력을 갖지 못하게 됨으로 초월적 신관이 제거된다. 이 말은 절대 타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견해나 인간의 제도 내에 침투하셔서 역사 하시는 초자연적 역사를 이루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제거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결과는 기독교를 절대적 타자로서의 신 중심적이며 계시 중심적인 신학에서 세속 사회에서의 인본주의적 종교 기능에 초점을 맞춘 실용적 신학화로의 방향 전환을 가져온다. 둘째는, 초월자로부터의 이탈이 가져다주는 영향은 네빌 (Robert C. Neville)에 따르면 "참다운 정체성은 절대자 (the ultimate) 앞에 설 때에 찾아지는 것인데 세속주의는 절대적 존재는 없다"고 말한다. 그 결과에 대하여 그는 1) 참되며 규범적인 인간의 정체성을 가르칠 수 없다; 2) 그렇게 되면 차선의 만족은 물질주의와, 이기적인 만족과, 기술의 지배 속에서 발견된다; 3) 인간의 진정한 정체 성에 대한 물음은 물질과, 만족과 권세로 만족하는 경우에도 좌절을 겪을 것이다; 4) 생은 불확실해 진다; 5) 절망만이 가장 정직한 감정이 될 것이다. 다음, 신앙적 방법에 미쳐지는 영향으로 세속화 신학 방법에 의해 연역되거나 아니면 그 신학 방법과는 관계가 없지만 물질주의적 현실 세계에서 생존하기 위해 실용적으로 대처해야 한다는 절박감에 의해 연역되는 것 중의 하나 일 것이다. 그것은 초월적 신이 인간의 제도 내에 침투하며 일을 이루시는 초자연적 역사를 이루신다는 믿음이 자본주의 원리에 의해 대치된다는 점이다. 셋째로, 위에서 언급한 실천적 문제로 인해 파생되는 것으로 실용주의적 실리에 초점을 맞추는 자본주의 경제 원리를 도입하기 때문에 각 교회마다 자신들의 교회가 있게된 전통에서의 이탈 현상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각 교회는 서로 간에 다를 것이 없는 즉 정체성을 잃어버린 다만 무한 경쟁의 시대에서의 생존의 방법이 가장 두드러지게 부각되기 시작한다. 위에서 논의한 세 가지 형태로 나타난 복음주의 기독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기독교회를 사회 내에서의 본래의 기능을 상실한 상태로 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우리 복음주의 기독교회는 그 어느 나라의 기독교 또는 어느 시대의 기독교회들보다 그 영적 열성에 있어 다른 말로 말하면 영성을 유지하는 수단에 있어서 월등하다는 것이 일반적 평가다. 성경 공부에 대한 열성, 예배의 참석에 대한 열성, 수련회, 부흥회, 철야 기도회, 새벽 기도회, 선교적 관심, 대 교회들의 출현, 전도의 열심, 정도 이상의 헌금에 대한 열성, 교회 개척의 열성 등 너무나 많다. 이러한 모든 정황들은 오늘날의 우리 기독교회가 이 사회에서 가장 모범적인 위치에 있어야 함을 간접적으로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보고 있는 기독교와 관련된 많은 사회적 사건들과 기독교회의 성장 추세가 점차 감소 추세로 바뀌어 가고 있다는 사실은 복음주의적 기독교회에 대한 진정한 기대와는 정반대의 현상임을 들어내고 있다. 위에서 지적한 우리 일반 사회의 사회적 아노미 상태에서 기독교회는 빛과 소금의 근본적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다. 오히려 기독교회는 그 아노미적 사회 속에서 그 정체성을 잃어가며 그 사회의 세속주의적 물결에 휩쓸려 가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기독교가 이미 형성된 사회적 아노미에 대하여 역기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오히려 기독교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아노미 현상을 만들어 놓고 있다는 평가를 내릴 수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왜 그 많은 종교적 열성에도 또는 영성의 추구에도 불구하고 여기까지 왔는가?"라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과연 레이놀드 니이버가 말한 대로 종교는 [기독교회]는 이 부도덕한 사회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다고 하는 질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가? 기독교회의 영성은 힘없는 구호에 그치는 것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1.3. 현재의 현상의 본질적 원인으로서의 영성의 문제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교회의 현상 즉 죽어가고 있는 실상의 배경으로써 사회의 자본주의의 혁명적 세력에 의한 세속 주의를 지목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외형적 현상에만 책임을 전가할 수 없다. 왜, 그러한 사회적 세력에 떠밀려 내려가야 하는가? 라는 질문을 하게된다. 가장 고매한 영성을 추구하고 또 그것을 가지고 있다고 하지만 실은 현재의 복음주의 교회에 나타나고 있는 영성은 교회 안에서의 그것과 교회 밖에서의 그것이 양립하는 이중적인 그것이다. 그것은 뒤틀려 있는 영성이며 그 같은 영성은 세속주의를 극복할 수 없는 영적, 정신적, 윤리적 힘이 결여돼 있는 본질적 품성에 의한 것이다. 이미 지적하였듯이 물질주의적 세속화의 영향은 초월적 하나님을 인본주의적 세계관으로 또는 물질주의적 실용주의로 대치시켰다는 사실을 상기하면서, 우리는 "하나님은 거룩하다는 전통적인 신관이 상실되고 있다는 사실은 이제 복음주의 세계 어디에서나 나타나고 있다"는 데이빗 웰스 (David Wells)의 지적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 같은 거룩의 상실은 기독론의 상실과 아울러 구원론은 물론 기독교의 윤리의 상실로 이어지며, 그 결과는 기독교의 정체성과 역할을 잃은 아노미 현상의 초래라는 것이다. 이러한 아노미 상태의 결과는 기독교가 사회의 악을 치유하며 선도하는 기능을 잃어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현대 한국 교회의 영적 주소다. 2. 전망: 미래에 대한 예견과 교회가 지향해야할 영성 2.1. 미래적 예견 미래에 어떠한 일이 구체적으로 일어날 것이라고 예언하는 것은 정말 불가능하다. 그러나 구체적 언급 없이 어떤 사회적 현상을 사회학적 이론에 근거하여 이러한 일이 있을 것이다 라고 예견하는 정도는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러기에 많은 사회학자들이 그러한 입장에서 미래를 예견하고 있다. 그러한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예견은 거의 같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자본주의의 혁명에 의한 전통적 가치 체계의 붕괴의 계속, 물질주의의 더욱 급속한 확산, 지식 사회의 도래, 카리스마적 지도력의 불필요성 그리고 경영적 경쟁 체재의 심화가 예견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미래적 사회적 현상은 한 마디로 세속주의의 심화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세속주의의 심화와 종교와의 연관성에 대하여 많은 학자들이 연구하면서 미래적 예견들을 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적인 예견은 첫째, 세속주의에 의한 종교의 퇴색과 전통적인 종교적 영성으로부터의 이탈 현상 등이다. 이러한 현상의 지속은 종교 특히 기독교, 그 중에서도 복음주의적 교회의 현대적 의미에 있어서 "애굽의 종살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 같은 맥락에서 하비 콕스의 세계 성령 운동의 교회들이 빠져들어 갈 위험에 대하여 지적하고 있는 것은 놀라운 통찰력이다. 그는 성령 운동 교회는 가장 강하게 체험에 대하여 말하지만 성령 운동이 세속적 가치가운데서 물질의 축복과 건강 추구 신학을 수용하는 위험에 직면해 있다고 비판한다. "교리로 무장한 사람은 체험으로 무장한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고 주장할 정도의 성령 체험에 대하여 강하게 주장하던 사람들도 결국 물질주의의 힘에 굴복하고 있다는 지적은 가볍게 넘어갈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말은 체험에 대하여 거의 말하지 않는 오늘의 복음주의 교회들이 본질적 변화 없이는 물질주의에 더 깊이 빠져들어 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지적이기도 하다. 물질주의와 현실적 만족을 추구하는 교회는 필연적으로 종말관이 약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앞으로의 교회는 더욱더 예수님의 재림에 대한 소망이 더욱 소멸할 것이다. 그들의 공통적 예견의 두 번째는, 종교가 사회 내의 객관적 실체에서 주관적 실체로의 전환이 일어날 것이라는 점이다. 이 점은 일찍이 룩크만이 지적한 것과 같은 의미에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사회 전 영역에서 세속주의의 영향이 점증하기 때문에 종교는 마찰을 피하면서 생존하기 위한 활로로써 사회 전 영역에서 이탈하여 개인의 영역으로 이전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복음주의 교회의 사회적 역할과 기능을 퇴색시키며 개인의 심리 치유적 종교로의 변질로 이어질 것이다. 최근에 교회들마다 치유 목회에 대하여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러한 현상의 반증이기도하다. 세 번째 공통적 예견은 로저 핑크와 로드니 스타크가 지적한 것과 맥을 같이 하는 것으로 데로 교회들은 "교회를 이끌어 나가는데 이기고 지느냐가 문제일 뿐이다"라는 경쟁적 기업화의 발빠른 움직임이다. 다른 말로 말하면 "미국내의 종교를 포함한 모든 것은 흥미와 유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정도래야 성공한다"는 애버리 둘레스의 현상 인식과 유사한 과정을 거칠 것이다. 이는 또 다른 말로 말하면 기독교의 마켓팅 혁명에 의한 경영 체제로의 본격적 진입을 의미한다. 전통적으로 교회들이 받아들여 왔던 초월적 신관의 배척과 실용주의적 신앙 행위가 세속주의와 맞물려 가면서 전통적인 교리 체계도 역시 그 유효성을 점점 상실하게 됨으로 그들이 공통적으로 예견하는 네 번째 미래적 현상은 그러한 세속주의에 대항하는 새로운 종교 운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제임스 리차드슨 (James Richardson)은 이 같은 세속화의 현상을 "종교적 부흥과 개혁을 유발하는 자기 제한적 과정이다. 그것은 전통적 종교의 세속화는 현재의 종교적 개혁의 뒤에서 그것을 주도하는 힘이라는 것이다. 어떤 특정한 종교가 퇴색하면서, 그 결과로 새로운 통로에 온 힘을 쏟아 붓게 한다"고 말한다. 위의 네 번째 예견과 맞물려 있는 다섯 번째 공통적 예견은 전통적인 가치 체계를 부인하면서 성장기를 거친 소위 x 세대들이 중년으로 접어들면서 영적인 갈증 즉 삶의 의미에 대한 갈증을 하게 될 때 한번 포기한 (그들에게 삶의 의미를 제공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판단하였기에) 전통적 기독교로의 복귀보다는 자신들이 자유롭게 선택적으로 어떤 곳에서든지 신성한 것이 있다고 판단되어지며, 그곳에서 영적 만족을 얻을 수 있다고 느껴지면 그곳으로 아무런 구애 없이 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단, 사교, 및 이상한 영성의 등장과 그것의 확산이다. 2.2. 복음주의 교회가 지향해야 할 영성 21세기를 맞는 복음주의의 입장에 있는 신학도, 신학 교수, 목회자, 평신도들이 위에서 밝힌 사회적 전망 하에서 어떠한 영성을 가져야 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이제 우리가 대답해야 할 마지막 과제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우리는 최근에 복음주의 신학자인 한 사람인 데이빗 웰스 (David Wells)의 세속주의적으로 변천하는 미국 사회 내에서 미국 복음주의 교회들이 취해야 할 신학적 과제는 무엇일가?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거룩의 신학을 되 찾아야 한다고 강변한 점에 주목해야 할 것이다: "만일 복음주의 교회가 거룩한 하나님 앞에서 사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지식을 발견할 수 없다면, 만일 교회의 예배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성과 공명하는 세상 안에서의 목적과 그것의 심오성과 불굴성을 다시 배울 수 없다면. . . 신학은 교회의 삶 속에 자리를 차지할 공간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역도 마찬가지다. 만일 교회가 하나님 중심에 다시 초점을 맞춤으로 신학이 들어갈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리고 교회가 하나님의 충만함을 의존하면, 그 도덕적 힘을 그 안에서 발견한다면 교회는 현대성 중에 침전하는 세상을 향하여 무엇인가 할 말을 갖게 될 것이다." 그의 말은 다가올 미래에 복음주의의 우산 하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중심 즉 하나님의 거룩이 요구하는 절대적 명령에 순복하는 구체적 표현이 있어야 함을 뜻한다. 그것은 신학적 과제는 물론, 교회의 신앙적 훈련,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정립,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이 거룩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세속주의에서 하나님 중심으로의 변천과 그에 따르는 모든 삶의 방향 전환이 복음주의의 교회들이 지향해야 할 영성이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한 거룩성에 근거한 영성은 바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명령이다. 그래서 베드로는 구약을 인용하면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하라" (벧전 1:16)고 명한다. 우리가 아는 대로 하나님의 거룩성은 구약의 율법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구약에서의 인류의 역사와 이스라엘의 역사를 통하여 계시된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분명한 경계선은 바로 하나님의 초월성을 유효하게 하는 하나님의 본질 중의 하나인 하나님의 거룩에 있었다. 그 거룩은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는, 모든 영광이 있게 하는, 가장 선하게 하는, 모든 것을 겸손케 하는, 그리고 모든 존재의 의미를 제한적으로 밝혀주는 본질 자체였다. 우리는 또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통해 하나님의 거룩이 이 땅에서 실현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베인즈 에트킨슨(Baines Attkinson)은 "거룩은 예수님의 사역과 삶의 본질이었다"고 하였다. 예수님의 거룩은 그의 모든 영적, 도덕적 완전, 죄와 모든 유혹에 대한 승리 그리고 이 세상에서의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며, 역할을 감당하게 하는 능력이었다. 한 마디로 말하면 그의 거룩은 그의 영성의 본질이었다. 그의 거룩성은 하나님과의 동행에서 유지되었으며 그것으로부터 그의 모든 능력이 유출되었다.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는 예수님의 선언 속에 위의 모든 사실이 함축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그의 거룩성은 그 후의 모든 교회들의 삶과 사역 속에 실현되도록 요구되었다(참, 요 17:15-21). 복음서에서의 그 같은 예수님의 요구는 계속 다른 신약의 기자들에 의하여서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예, 롬 6:19 ; 히 12:14 ; 약 4:8 ; 벧전 1:16). 또한 이방 세계를 변화시킨 바울이 전한 복음은 하나님의 세상과 구별된 거룩한 존재와 거룩성의 요구에 의해서 예수의 역사적 사건이 의미를 갖게 되었다는 사실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점은 우리의 영성의 방향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의미를 제공해준다. 즉 구속 공동체의 삶과 사역의 방향이 어디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할지를 말해주는 단서가 된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에 의하여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왜 예수님이 거룩에 대하여 그렇게 명령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이유를 제공해 준다. 이러한 거룩의 명령이 이행되지 않을 때 웨슬레의 말을 빌리면 교회는 "어떠한 부흥도 기대하지 말라 그리고 완전을 지향하지 않고는 모든 신자들은 냉냉해지며 죽어 갈 것이다; 그리고 단지 경박해지며, 잡담하며, 험담을 지어 낼 것이다, 그렇게 되면 곧 그들의 영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모든 것이 파괴 될 것이다"라고 이미 경고하였다. 포싸이쓰 (P. T. Forsyth) 는 하나님의 거룩이 빠져 버린 교회의 모습이 우리의 현상과 같다는 점을 이미 다음과 같이 시사하고 있다: "하나님의 거룩과 이탈 될 때, 죄는 자기-패배의 행위로 나타나며; 은혜는 그저 알맹이 없는 말일뿐이며; 우리의 복음은 사람이 지어낸 교리와 다를 바가 없으며; 우리의 공중 도덕은 개인들이 이익을 위해 경쟁하기 위해 서로 나눠 갖는 규칙들의 집합에 지나지 않으며; 우리의 예배는 그저 즐기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 .죄는 하나님의 거룩에 대항하는 것이며, 십자가는 하나님의 거룩이 작용한 곳이며 거룩의 승리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거룩하시다는 것을 아는 것은 삶을 있는 그대로 아는 것과, 그리스도를 있는 그대로 아는 것과, 왜 그가 오셨는지 아는 것과, 삶이 어떻게 끝맺는 것인지 아는 것의 열쇄가 된다." 그 같은 관점에서 우리 기독교회의 갱생 운동을 위해서는 포싸이스의 "우리 기독교 신학에서의 시작과 끝은 하나님의 거룩에 있다" 라는 말대로 거룩의 신학을 다시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시작돼야 한다. "과거에는 하나님의 사랑의 개념으로 교회가 충전돼 있었듯이 앞으로 우리 앞에 다가올 미래에는 하나님의 거룩의 개념으로 철저하게 사람들을 [교회를] 충전시켜야 할 것이다"라 권고에 귀를 기우려야 한다.라는 포싸이스의 말대로 거룩의 신학을 다시 재구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같은 거룩의 신학의 발견만으로는 우리의 영성을 정립하는데 부족하다는 점을 지적해야만 한다. 그것은 자칫 형이상학적 논의 정도로만 끝나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성이 없는 영성은 온전한 영성이 될 수 없다. 영성은 계시에 근거한 신학적 작업과 동시에 우리의 삶에 현장 속에서 경험적으로 그 의미가 명료하게 제시돼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속의 물결을 거슬러 올라가는 생명력을 존재론적으로 유발시키는 체험이어야 한다. 그 체험은 속 사람의 부패성을 본성적으로 변혁시키는 그래서 "하나님이 거룩한 것처럼 우리도 거룩해져서" (벧전 1:16) 하나님이 세상을 이기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을 이기는 능력을 갖게 하는 것이어야 한다. 거룩의 신학에 근거한 체험적 거룩의 삶은 금욕주의적인 것도 아니요, 폐쇄적인 것도 아님은 물론 그렇다고 몰입주의적인 것도 아니다. 그것은 세속주의를 저항하는 영적이며 정신적인 에너지를 제공한다. 그것은 세상에 대한 교회의 책임을 깊이 통감한다. 세상에 대한 책임은 하나님의 거룩이 세상의 종말과 심판이라는 세계관 속에서 정의된다. 거룩한 기독 공동체는 분명 세상 안에 있지만 세상에 속한 공동체가 아니기 때문에 세상과의 차별을 정의해 준다. 그리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요구가 무엇인지 보여주며 모범을 보이기 때문에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유효하게 한다. 그렇게 구별될 때에 교회는 선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이다. 선교의 사명은 영적, 도덕적, 사회적 질병에 대한 치유라는 사역과 관련돼있다. 그것은 결국은 교회의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는 것이며 그 일을 위한 희생적 삶과 고난에 동참하는 삶을 포함하고 있다. 그러한 삶은 아무런 소망 없이 무한정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목표와 한정적인 시간 속에서 이루어진다. 바로 그리스도의 재림과 함께하는 종말이라는 한정적 시간이다. 이 같은 거룩에 입각한 영성은 교회가 가져야할 몰트만적 소망에 근거한 현세 지햐억 미래의 이상향을 건설하는 방향으로 정립되 영성을 배격한다. 몰트만이 그의 책에서 제기한 "출애굽 교회"(the Exodus Church)는 새롭게 정의되어야 한다. 출애굽한 교회는 분명 구약의 출애굽 사건을 역사적 유비로 하여 앞으로의 교회가 가야할 방향에 대한 유비적 제시라고 할 때 우리는 출애굽의 사건 속에 나타난 유비의 부분을 명확하게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애굽에서 종살이하고 있는 백성들은 혈통적으로 애굽인들과 다르다. 그들은 아브라함의 후손들로서 선택받은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하나님의 섭리가 개재되었다. 두 민족 사이에는 본질적 구별이 있었다. 그들이 애굽에서 종살이하는 상황에서 그들을 출애굽시키는 것은 단순한 인간의 노력에 의해서 이룩되어질 이상향의 건설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작에 의해서 그리고 하나님의 거룩을 친히 경험한 그리고 그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애굽이라는 문화로부터의 구별이다. 그 같은 맥락에서 우리가 출애굽의 역사적 유비를 도입하여 출애굽 교회라고 한다면 세속주의 문화로부터의 교회의 분리(거룩의 체험)와 그 분리된 교회를 통한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 그리고 거룩의 과시하는 교회라고 정의하여야 한다. 이러한 유비는 위에서 논의한 거룩의 신학을 중심 축으로 한 거룩의 체험을 토대로 한 영성과 맥락을 같이 하는 것이 된다. 여기에 21세기를 맞는 한국 교회의 영성의 방향이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나가는 말 우리는 지금까지 한국 복음주의 교회가 어떻게 자본주의로 인한 세속주의의 영향을 받게 되었는가 보았다. 교회의 제반 현상은 세속주의의 영향을 극복하고 빛과 소금의 직분을 감당하지 못하며, 오히려 교회는 그러한 사회적 힘에 의하여 그 정체성과 역할을 잃고 뒤틀려진 영성을 들어내 놓고 있다는 사실을 회고하였다. 그 뒤틀려진 영성은 초월적 신관 즉 하나님의 거룩의 상실에 이은 물질주의적 영성의 발달에 의해서 야기된 것이라는 점도 지적하였다. 그리고 앞으로 다가올 미래에 대한 전망을 통하여 사회는 그 세속주의적 힘이 더 심화되고 넓혀질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그러한 전망은 앞으로의 교회의 정체성과 역할에 대하여 더욱 어둡게 만들게 될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더욱 앞으로의 전망을 어둡게 하는 것은 일반적 종교 현상이 더욱더 전통적 가치를 잃는 가운데 전혀 새로운 영적 가치와 경험을 추구하는 세대가 올 것이라는 점도 전망하였다. 이러한 전망 가운데서 앞으로 복음주의 교회가 취해야 할 영성은 출애굽을 역사적 유비로 삼아 출애굽 교회가 지향해야 할 영성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거룩의 재정립과 거룩의 실천적 경험이라고 제안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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