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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최초의 한국철도는 어떻게 생겼을까?

명호경영컨설턴트 2011. 1. 3. 14:47

 

 

 

 

 

첫 번째, 궁금했던 경인철도 최초 개통구간은 ‘인천~노량진’ 이나 ‘제물포~노량진’ 모두 맞다.
당시 통용되었던 승차권을 보면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다. 역명이 한문은 인천(仁川)이지만 영문은 제물포(Chemulpo)로 표기되었기 때문이다.
1883년 1월 제물포항(인천항)이 개항되면서 인천과 제물포라는 지명이 함께 사용되었고, 당시에는 오늘날의 제물포역(1960년대 초 개설)은 존재하지 않아 ‘인천~노량진’이나 ‘제물포~노량진’은 모두 인천~노량진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제물포역이 별도로 있기 때문에 당시 인천을 가리키는 제물포를 오늘날의 제물포로 오해할 소지가 많아 최초의 경인철도는 ‘인천~노량진’간으로 통일해야 할 필요가 있다.
개통 당시 승차권의 역명표기를 보면 재미있는 사실들이 숨어 있다. 영문으로 표기할 때 특이하게 불리는 것들이 있는데, 축현(杻峴)은 순수한 우리말로는 ‘싸리杻’자와 ‘고개峴’자를 써서 ‘싸릿재’이며 영문표기는 ‘Saalijy’였다. 우각동(牛角洞)은 ‘소牛’자와 ‘뿔角’자로 ‘소뿔’이며 영문표기는 ‘Sopple’이었으며, 노량진은 당시의 ‘노들나룻터’로 불려 영문표기는 ‘Nodd’로 되어 있어 승차권에서 당시 지명의 유래를 엿볼 수 있다.

 

 

두 번째, 궁금했던 왜 경인철도는 서울 아닌 노량진까지 개통했을까? 본래 경인철도는 인천에서 서울까지 설계되었지만 1899년 여름 심한 장마와 홍수로 인해 한강철교 건설공사가 지연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한강이남 공사완료 구간인 인천~노량진 간을 우선 임시 개통하여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강철교는 이듬해 7월 5일 준공되었고, 1900년 7월 8일부터는 경인철도가 완전 개통되어 인천에서 서울까지 영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세 번째, 기공식 장소 문제다. 1896년 3월 29일 한국정부는 미국인 James R. Morse에게 경인철도 부설을 특허하는 조건 중에 1년 이내에 착공할 것을 명시하였다. 때문에 1897년 3월 29일 이전에 착공을 해야 했지만, 최초 설계했던 인천역 위치(답동)의 철도부지 예정지였던 땅의 소유자가 일본인 口平吾등과 2명의 지주로 되어 있어 협상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시발역인 인천역의 위치가 확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역 위치가 확정된 우각동역 부지에서 기공식을 거행할 수밖에 없었다. 토지협상의 지연으로 공사가 중단되는 사태에 이르자 만석 동쪽 땅을 소유한 독일인 Wolter(세창양행 지배인)와 영국인 Stripling(초대 인천해관 세무사), 그리고 일본인 2명이 선로를 만석동쪽으로 변경할 경우 선로 부지를 무상으로 정부에 양여 할 의사를 밝혀 협상을 거부했던 최초 예정지의 지주가 협상에 응할 뜻을 보였지만, 공사기간 때문에 최초 예정노선을 취소하고 현재의 인천역 쪽으로 노선을 변경하게 되었다.

 

 

네 번째, 서울역과 남대문역은 동일한 역일까? 흔히 남대문 역을 옛 서울역으로 알고 있지만 앞의 승차권에서 보듯이 ‘남대문(南大門 : South gate)역’과 ‘경성(京城 : Seoul)역’이 별도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서대문구 합동에 서대문역이 있었으며, 서대문역이 경성(Seoul)역으로 불리었다. 서대문역은1900년 7월 8일 경인철도 전 구간 개통과 함께 영업을 시작하였지만, 1919년 3월 31일 폐지되었다.
이때부터 서울은 남대문역이 유일한 기차역이 되었으며, 1923년 1월 1일 경성역으로 개명되었고, 1925년 10월 25일에 현재의 구 서울역사가 신축 준공되었다. 경성역은 1946년 11월 1일 ‘서울역’으로 개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출처 : 기차여행과 철도사랑 이야기
글쓴이 : 반가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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