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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일제의 만행 - 일본군의 성노예[위안부] 관련 사진들

명호경영컨설턴트 2012. 11. 17. 00:14

  일제의 만행 성노예[위안부] 관련 사진들

▲ 일본군 사령부 근처에서 미 해병 순찰대에 의해 발견된 성노예[위안부]들(1945. 오키나와) 일본이 패전하고 나서 성노예[위안부]들이 얼마나 귀국했는지 알 길은 없으나 이미 상당수가 위안소에서 또는 이동 중에 죽었다는 보고가 있다. 간신히 살아남은 성노예[위안부]들은 미군 수용소에 있다가 귀국하거나 많은 어려움을 겪으면서 스스로 귀국했는데 성노예[위안부]를 했다는 자격지심에 귀향을 결심하지 못하고 현지에 정착한 사람들도 많았다.

미얀마와 중국의 국경지대에서 미군과 중국군의 보호를 받고 있는

   성노예[위안부]들(1944.08)

전쟁이 끝난 후 그대로 버려진 성노예[위안부]들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포로가 된 성노예[위안부]를 당시 연합군이 촬영한 사진이다. 4명의 성노예[위안부] 중 유일하게 임신한 모습을 하고 있는 분이 북한에 생존해 계신 것을 2000년 8월에 알게 되었다. 북한 남포시에 살고 있는 박영심(朴永心, 78세)할머니로서 북한을 방문했던 일본인 자유기고가 니시노 루미코(西野瑠美子)의 추적으로 생존 사실이 극적으로 확인됐다. 朴할머니는 아사히신문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사진에 있는 임신 여성이 바로 나" 라며 "아기는 포로 수용소에서 유산됐다" 고 확인했다.

▲ 일본군에게 학살되어 파묻기 전 성노예[위안부]들의 시체 (1944년 9월)

중국과 미얀마의 국경지대에서 발견된 구덩이에 버려진 조선인 성노예[위안부]들의 시체들이다.

위안소 내의 오락시간에 동원된 성노예[위안부]들

위안부들은 위안소에서 '하루코' '게이코' '노부코' 등의 일본식 이름을 받아서 사용했다. 군인들은 위안소를 주로 '삐야'로 불렀고 '위안소' '빵빵야'라고 부르기도 했다. 성노예[위안부]는 '삐'(중국어로 여성의 성기를 의미하는 말) 혹은 민족에 따라 '일본삐', '조선삐', '지나삐', '대만 쿠냥(처녀)' 등으로 불리웠다.

전선의 이동으로 일본군 트럭에 실려 이동중인 성노예[위안부]들
현지 성노예[위안부]와 달리 조선인 성노예[위안부]는 일본군부대가 이동할 때마다 따라 다닌 경우가 많았다.


▲ 성병 검진용 진찰대
아소우 군의관이 스스로 설계해 만들어낸 나무로 된 산부인과용 진찰대이다. 나무판 위에 올라가 오리주둥이 같은 것으로 검사를 하고 성병이 있으면 살바르산 606번 주사를 놔주었다. 이 주사를 맞으면 코에서 냄새가 나고 어질어질하며 비위가 상했다고 한다. 또 일본군은 성노예[위안부]의 성병치료와 임신방지를 이유로 수은을 강제로 먹거나 몸에 수은증기를 쏘이기도 했다는 사실이 최근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당시 수은 때문에 얼굴이 돌아간 성노예[위안부]를 목격하기도 했다고 한다.

성병 검진가는 성노예[위안부]들
위안소 설치의 목적중의 하나가 성병 예방인 만큼 위안소와 성노예[위안부]의 위생에 대한 군의 통제는 엄격했고 이와 관련된 규정도 많았다. 성병 검진은 근처 군인병원이나 따로 마련된 진료소에서 일주일에 한 번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인은 성병 검사에 합격한 성노예[위안부]만 상대할 수 있었다. 불합격한 경우는 위안소 방 앞에 천 조각을 걸어 말렸다. 흰 천은 허가하지만 위생구를 사용하라는 의미이고 분홍색은 요주의, 붉은색은 유독한 환자라는 의미였다. 검사에서 떨어지면 관리들이 싫어할 것을 염려해 자기들끼리 미리 검사하여 이상하다 싶으면 흙이나 먼지를 묻혀 군의관을 속이는 경우도 있었다.

▲ 위안소에서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들
뒤에 붙여져 있는 것이 '위안소 규정'이다 요금은 30분에 병사는 5전, 하사관 70전이며 1시간에 병사 1원(엔), 하사관 1원 50전, 30분짜리가 없는 장교는 1시간에 2원 50전이었으며 장교인 경우 자고 갈 수도 있었다.


위안소 밖까지 줄을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일본군들

어린 소녀까지 포함된 도암면 처녀회 (소화 20년 1945)

'여자정신근로령'에 의해 근로협력명령을 내려진 후 조선 각지에서 일본 경찰의 지휘로 처녀회가 조직되었다. 이들은 정신대의 이름으로 각 군수공장으로 강제 동원되었다.

위문대(慰問袋) 만들기에 동원된 한국인 부녀자들

정신대로 끌려가기 전 신사참배를 하러 가는 12∼16세의 소녀들(1944)

1944년 일왕의 칙령이 발표되자 국민학교 학생까지 담임의 권유로 인해 여자정신근로대로 끌려갔다. 사진은 일본 나고야에서 12세부터 16세까지의 조선여성이 총동원된 나고야시(市) 조선여자정신대가 군인의 인솔로 근로협력에 동원되고 있다.

상해에 처음 세워진 위안소의 외부

정문에 "성전의 승리를 위해 용사를 환영합니다. 신심을 다해 봉사하는 일본 여성의 서비스"라는 글이 보인다. 군위안소는 군이 직접 운영하거나 민간에 위임하였는데 어느 경우에나 군대의 보호 감독 및 엄격한 통제를 받았다. 성노예[위안부]로 끌려가서 낮에는 간호부 일을 하는 경우도 있었고 패전이 명확해지자 '성노예[위안부]' 사실을 숨기기 위해 성노예[위안부]들을 간호부로 위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노예[위안부]나 군간호부 모두 군대가 총괄하였다.

▲ 나무막사로 지어진 상해 육군 오락소

각 방에 위안부를 한 명씩 넣어두고 군인들을 받게 하였다. 중국에서는 이러한 위안소 형태 외에도 중국인 집이나 상가를 이용하든가 전방에서는 천막으로 급조하여 사용하였다.

[자료출처: 일본군성노예[위안부]피해자역사관/
http://www.hermuseum.go.kr/]

성노예[위안부] 숙소 모습. 서재필기념사업회 자문위원인 사진연구가 정성길(66) 씨가 그동안 ‘공개 불가’ 상태로 외국 자료실에 보존됐던 것을 미국 일본 중국에서 수집한 사진의 하나다. 이 사진은 5월 2일 열리는 ‘일제침략시대’ 특별사진전에서 처음 공개된다.

[동아일보]

 

출처 : 演好마을
글쓴이 : 靑波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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