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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달라져야 한다

명호경영컨설턴트 2019. 2. 13. 06:39

 달라져야 한다


 

 

장학일 목사의 교회 변혁을 위한 7가지 메시지



달라져야 한다



밴드 목회 연구원 펴냄


1장 움직이는 성전

교회가 죽었나?
한국 갤럽이 1년 전인 1997년 우리나라 성인남녀를 대상으로 종교에 관해 조사해본 결과 한국민의 약16.2%, 숫자로 환산하면 370만명이라는 사람들이 개종을 했는데, 그 중에서 지금의 종교로 개종하기 전에 가졌던 종교가 개신교라고 응답한 사람이 58.4%나 되었다. 무려 211만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개신교를 떠났다.
이것은 불교나 천주교를 떠난 사람보다 최고 7배나 많은 숫자다.

 

부끄러운 우리모습
어떤 교회 목사님이 은퇴하시면서 후임 목사님을 초빙하게 되었다. 아직 은퇴할 나이가 아니신데도 굳이 은퇴하신다고 하여 교계에서 존경 어린 소문이 많이 들렸다. 그런데 얼마 뒤에 그 목사님이 후임자를 선정하시면서 후임자에게 3억을 요구했다는 뒷소문이 들렸다. 얼마 뒤 그 분을 우연히 만날 기회가 있어 소문의 진의를 확인해 보았더니 사실이었다. 그래서 능청스럽게 물었다.
"아니 왜 그렇게 많이 요구하셨어요?"
그랬더니 그 분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그 돈은 교회 건축할 때 내가 교회에 헌금한 액수여"
웃기고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왔지만 그래도 한 마디 했다.
"아니 그러면 헌금한 성도들 돈도 돌려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왜 목사님만 받아요??"

우리 교회 전도사로 있던 분이 개척하기 위해 개척지를 알아보면서 겪은 일이다.
교회당 이전 광고를 보고 찾아가 시설에 대한 비용을 이야기 하길래 주기로 하고 계약을 했는데, 잔금 치르기로 한 날을 며칠 앞두고 그 교회 목사한테 전화가 왔다. 내용이 무엇이었는가? 교인이 20명쯤 되는데 두당(?) 100만원을 내라는 거였다. 알아보니 개척해서 친척들 데려다가 교인들 부풀려 놓고 팔아치우는 전문적인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고 한다..

 

잘못된 신앙
무엇 때문에 이런 일들이 야기되는가?
바로 건물 신앙에서 비롯된 것이다.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이같이 말씀하시되 너희 길과 행위를 바르게 하라 그리하면 내가 너희로 이곳에 거하게 하리라. 너희는 이것이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여호와의 전이라 하는 거짓말을 믿지 말라"
이 말씀은 성전에 예배드리러 가는 백성들에게 예레미야를 통해 하나님이 경고하신 말씀이다.
사는 건 개판 오분 전이면서 성전은 왜 찾냐 이거다.
삶이 없는 성전은 거짓이다.
성경에서 3은 완전한 숫자를 의미한다. 얼마나 중요한지 이 말씀을 하나님께서는 3번이나 하셨다. 다시 말해 삶이 따르지 않는 예배는 내가 절대 받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의지인 것이다.

"너희가 만일 길과 행위를 참으로 바르게 하여 이웃들 사이에 공의를 행하며 이방인과 고아와 과부를 압제하지 말며 무죄한 자의 피를 이곳에서 흘리지 아니하며 다른 신들을 쫓아 스스로 해하지 아니하면" (7:6)
이웃들 사이에 의로운 자로 인정받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법 아래 움직이라는 뜻이다.

어느 군대에 사병 둘이 들어왔는데 둘다 크리스찬이었다.
전입 온 첫 주일 교회 가려는데 고참들이 전투 체육해야 한다면서 못 가게 했더니 하나는 꼭 가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분위기를 망치더니 고참들한테 찍혀 내내 군생활이 편치 않았고, 다른 하나는 '믿지 않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게 진짜 크리스찬이지요' 하는 바람에 무지 이쁨 받으며 내부반 생활을 하게 되었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교회 나가지 않던 이 신병에게 아주 괴로운 일이 닥쳤다. 그는 기도해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에 이번 주일은 교회에 가겠노라고 고참들에게 말했더니, 고참들은 까르르 웃으며 대박에 이렇게 말했단다.
"넌 가까잖아"

사람들은 공의가 아니면서도 자신들에게 동조해 주기를 원한다. 그러나 명심하라. 공의가 아닌 일을 동조해주면 겉으로는 좋아하는 척해도 절대로 그 사람을 인정하지는 않는다.

 

성막--움직이는 성전
원래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성전이 없었다.
다만 그들이 출애굽하여 시내산에서 십계명을 받고 난 다음 하나님께서 성막지을 것을 명하셨다. 특히 출애굽기 25장에서 27장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직접적으로 상징하는 언약궤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는데 매우 중요한 구절을 보자.
"그들은 조각목으로 궤를 짓되..그 네 발에 달되 이편에 두 고리요, 저편에 두 고리며 조각목으로 채를 만들고 금으로 싸고 그 채를 궤 양편 고리에 꿰어서 궤를 매게 하며" (출25:10~14)

특징적인 것은 언약궤에 채를 꿴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움직이는 하나님, 즉 이스라엘 백성이 가는 곳 어디나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의미한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있어 하나님은 한 곳에 머물며 백성으로 하여금 그곳을 찾아와 경배하게 하시는 그런 권위적인 하나님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교회 본래의 모습, 성막의 모습이다.


건물--정지상태의 성전
따라서 다윗이 성전을 짓고자 할 때도 하나님은 단호하셨다.
"이스라엘 어느 사사에게 내가 말하기를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위하여 백향목 집을 건축하지 아니하였느냐고 말하였느냐"(대상17:6)
내가 언제 집 지어 나를 두라고 했느냐고 다윗을 질책하시는 말씀이다.

법궤가 아비나답의 집과 오벳에돔의 집에 있을 때 하나님은 그곳에 함께 하셨다. 그분은 진정으로 섬기려고 한다면 네가 서 있는 자리, 백성이 머무는 삶의 자리에서 나를 섬기라는 것이다. 다윗시대까지 하나님과 동행하던 이스라엘 백성이 급격한 타락은 이러한 성전 신앙이 생겨나면서부터 시작된다.

 

건물 신앙--이스라엘의 타락과 멸망의 길
"네가 이제 이 전을 건축하니 네가 만일 내 법도를 따르며 내 율례를 행하며 나의 모든 계명을 지켜 그대로 행하면 내가 네 아비 다윗에게 한 말을 네게 확실히 이룰 것이요 내가 또한 이스라엘 자손 가운데 거하며 내 백성 이스라엘을 버리지 아니하리라 하셨더라"
정지된 성전 건축을 반대하신 하나님의 지극히 공의로우신 태도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나님은 우선 "네가"라고 부르시며 성전을 건축한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님을 보여주신다. 또한 단서를 달아, 내 법도와 계명을 잘 지키는 한에서만 그 성전을 인정하겠다는 말씀을 하신다. 한마디로 건물에만 가둬두고 말씀을 무시하면 너희를 버리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신 것이다.

그러나 솔로몬 이후 이런 하나님의 우려대로 이스라엘은 건물 신앙에 주저앉고 만다. 그 시초로 이스라엘의 분열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분열이 일어나 북이스라엘로 떨어져 나온 여로보암은 바로 우상 숭배의 길로 떨어져 나간다. 이유는 바로 건물 신앙이다. 여로보암은 예루살렘 성전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성전이 아니면 예배를 못드린다는 두려움에 빠지고 결국 우상을 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성전이 크다고 하나님이 계시는 것이 아니다.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나니" (행7:48)


건물 신앙의 결과
건물 신앙을 가진 북이스라엘과 유다 왕국의 공통된 특징은 바로 우상숭배였다. 우상숭배가 무엇인가? 한 마디로 가치관이다.
세상적 가치관을 갖게 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막신앙-- 행동하는 신앙
성막신앙은 한마디로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교회라는 것이다. 성막 신앙의 대표자 예수님을 보자.
"성전 안에서 소와 양과 비둘기파는 사람들과 ..다 성전에서 내어쫓으시고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시고" (요2:14,15)
형식만 남은 빈껍데기 건물 신앙에 대한 응징을 보여주신 것이다.
불의를 보고 눈 감지 않고 가난한 자, 소외된 자의 편에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에 참예하는 자, 그들이 바로 성막이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자들이다.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라.."
라고 말씀하시는 주님께, 마태복음 7장 22절에 뭐라고 사람들이 답하는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도 하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도 쫓아내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하다.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얼마 전 목사님들만 100분 정도 모시고 세미나를 하면서 이런 숙제를 내준 적이 있었다. "세미나 기간 3박 4일 동안 그리스도인으로써 선한 일 한가지씩 실천해 보십시오." 세미나 마칠 즈음 한 목사님께 무엇을 실천했는지 확인을 해보았다. "저는 저녁 식사시간에 옆 사람 밥을 타다 드렸습니다."
내가 물었다.
"전에도 그렇게 해준 적이 있었습니까?"
"아니요, 처음입니다."
"기분이 어떠셨습니까?"
"너무 기뻤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의자를 정리하셨고, 어떤 분은 잠자리 정돈을 도맡아 이부자리를 개고, 방청소나 샤워실 청소를 하신 분도 있었다.
어떤 목사님은 산책을 나가셨다가 숙제 생각이 나서 산책길을 청소하셨다.
짧은 시간 동안이지만 100명이 주를 위해 선한 일을 하니까 거기가 천국이었다.
장소를 빌려준 수양관 직원들이 깜짝 놀란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기독교인만 변화되어도 가정이 변하고 사회가 변해 주의 나라가 되는 것이다.
얼마든지 예수 이름으로 선지자, 목사 노릇할 수 있다.
그러나 건물신앙만 있는 자들을 주님은 알지 못하신다.

 

우리가 거룩한 성전이다
우리 교인들은 성경공부 하면서 성전으로서의 삶을 실천하도록 훈련받는다.
우리는 그것을 숙제라고 부르는데, 그 숙제를 하면서 많은 역사가 일어난다.
한 분은 이런 고백을 했다.
전철을 타려다가 장애인이 계단을 내려가지 못하고 있길래 숙제 생각이 나서 그분을 업어다가 주었단다. 그런데 전철 안에 들어가며 매우 고마워하는 그분을 바라보니 기쁨보다는 아픔이 밀려와서 고개를 들 수가 없더란다. 무엇 때문에 선한 일을 하나? 숙제 때문에? 예수 믿는 사람이면 당연히 이렇게 살아야 할 것을..!
그는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이 들어 울고 말았다.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는 어디인가?
천국인가? 아니면 세상 권세 아래인가?

 

2장 어린아이의 일을 버려라

알고도 못 고치는 이유--내 속에 있는 어린아이 때문
참된 신앙이 성막 신앙에 있는 줄은 알지만 막상 실천하기는 어렵다.
왜냐면 아직도 성장하지 않은 어린아이의 인격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와 에베소서에서 어른들을 향해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히브리서 기자도 5:13절에서 어른 교인들을 서슴없이 어린아이라고 한다.
몸은 어른인데 인격이 아이인 사람들로 인해 교회가 병들고 개인은 영적 성장이 어렵기만 하다.

 

어른 아이
내 속에 어린아이를 몰아내면 성화가 이루어진다. 성화가 무엇인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는 것(엡4:15)" "거룩하게 되는 것(레19:2)" "그리스도의 초보를 버리는 것(히6:1)" 등이다.
놀랍게도 사도 바울도 고리도 교회와 에베소 교회에서 어린아이를 보았고 이것을 버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말하는 어린아이는 어떠한 것인가?
"내가 어렸을 때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 같고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가 장성한 사람이 되어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노라"

바울이 말하는 세가지 차원의 어린아이는 이것이다.
첫째는 말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의 말은 어떠한가? 그 가장 핵심은 상대편을 배려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기 감정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런데 만약 생김새는 어른인데 그가 자기 감정을 생각 없이 그대로 내뱉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는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자가 될 것이다. 그 말을 보면 그 사람의 성숙여부가 판단되는 것이다.
둘째는 깨닫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는 깨닫는 것이 부족하다. 이것은 학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잘못된 일에 대한 자각, 회개가 부족하다는 뜻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들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이다.
셋째로 생각하는 것이 어린아이와 같다는 것은 모든 것이 자기 중심적이라는 것이다. 모든 판단의 기준이 바로 자기 자신이다.
어린아이를 기르다보면 때때로 그들의 잔인성에 놀란다. 무자비할 정도로 친구를 괴롭히면서도 죄의식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즐긴다. 그것은 바로 그들의 생각이 어리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 세가지 "어린아이"를 버렸다고 했다.
버린다는 것은 희랍어로 "카타르게오"인데, 이 말은 매우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 위해서는 강한 의지와 노력이 아니고는 안된다는 뜻이다.

 

어린아이로 키우는 부모들
나는 영국 왕실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들의 자식 교육은 본받을만하다. 찰스 황태자, 비록 그는 다이애나와 이혼하여 오점을 남겼지만 그가 호주에서 유학생활을 할 때 그는 왕실과 국가의 도움을 전혀 받지 않고 고학으로 학교를 마쳤었다.
이것이 바로 어린아이를 버리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고난과 인내만이 어린아이를 버릴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열등감 콤플렉스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문제1- 끊이지 않는 시기와 분쟁
어린아이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들은 편가르기를 좋아한다. 왜냐면 자신의 존재를 편을 통해서 확인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속한 곳에 새로운 구성원이 들어오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 "어렵게 마음 열고 친해졌는데 새로운 사람 들어와서 분위기 망친다"고 말하는 사람, 그것은 바로 성숙하지 못한 어린아이임을 말하는 것이다. 이런 사람이 있으면 분위기를 망치는 게 아니라 자신과 교회를 망친다.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문제2- 억제할 수 없는 욕망
"이는 우리가 이제부터 어린아이가 되지 아니하여 사람의 궤술과 간사한 유혹에 빠져 모든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치 않게 하려 함이라" (엡4:14)
어린아이일수록 욕망에 강하고 이성에 약하다.
그래서 과자 사줄게 하고 꼬시면 넘어가는 것이다. 세상의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들이 유혹하면 너무 쉽게 그리스도인의 본분을 망각해버리는 사람들, 장사를 하면서 남들과 똑같이 상술부리는 사람들은 아직도 어린아이이다.
명심하라. 배우자가 마음에 안 들고 고칠게 많다고 생각되는 사람은 단연코 어린아이임이 드러나는 사람이다. 성숙한 어른은 상대방을 탓하지 않는다. 자신을 돌아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다.
자주 짜증내고 식구들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고 가는가? 그러면 당신은 분명 어른 아이다.

어린아이가 일으키는 문제3- 그리스도의 도의 초보를 쫓음
히브리서 기자는 그리스도의 초보를 지니고 있는 사람이 바로 어린아이라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 도의 초보를 버리고 죽은 행실을 회개함과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세례들과 안수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관한 교훈의 터를 다시 닦지 말고 완전한데 나아갈 찌니라"(히6:1~2)
그리스도 도의 초보가 무엇인가? 그것은 첫째, 죽은 행실에 대한 회개를 맨날 반복하는 것이요, 둘째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 다람쥐 챗바퀴 돌 듯 제자리 맴도는 것이며, 셋째는 늘상 세례나 안수, 부활같은 문제로 싸우기만 하는 것을 의미한다.

"때가 오래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될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가 무엇인지 누구에게 가르침을 받아야 할 것이니.." (히5:12)
한국교회가 제일 좋아하는 게 뭐냐면 바로 이단 만들기다. 남의 교회보고 이단이니 삼단이니 하며 자기는 돌아보지 않는 것, 종말론 운운하며 산 속에만 박혀있는 것, 이것이 어린아이란 말이다.

 

사랑만이 희망이다
사도 바울은 어린아이를 버리는 가장 큰 방법이 사랑이라고 가르친다.
우리가 어린아이로 머물러 있다면 결코 우리는 사랑을 이해할 수 없다. 고린도 전서 13장을 보라. 내가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대게 사랑이 아니라 집착인 경우가 많다. 어린 시절 결핍에 대한 집착은 결코 사랑이 아니다. 자기 중심적 고집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집착하게 되면 "오래 참지 못하고, 온유하지 못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며, 자랑하는 자가 되며 교만한 자"가 된다.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라. 그러면 사랑과 행복을 발견하게 된다.

 

함께 함으로 극복하자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엡4:13,15)
"우리가"라고 말한다. 이것은 머리되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행하라" 그래서 "그에게까지 자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성화이며 진정한 성숙이다.
공동체 속에서 어린아이를 벗는다는 것은 그 공동체가 각 사람들 속에 있는 어린아이를 충분히 경험하게 했다는 의미이다. 어린아이가 자라면서 각 단계마다 부모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고 적절히 훈육 받으면 고착이 잘 일어나지 않는다.
고착이란 어린아이가 어느 시점에서 충분히 사랑받고 적절히 훈육받지 못했을 때, 그 나이에서 더 자라나지 못하고 머무르게 된다는 말이다.
어린아이로 고착되면 몸은 어른이 되어서도 여전히 어린아이의 행동이 남는다.
이런 고착을 풀어주기 위해서는 다시 한번 충분한 사랑과 충분한 가르침을 경험해야 한다. 그러나 현실 사회에서는 이것이 불가능하다. 도대체 누가 이 각박한 세상에서 나의 부모역할을 해주겠는가? 그러나 교회 공동체는 달라야 한다.
충분히 용납하며 말씀으로 가르치는 곳이 바로 교회가 되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없는 사랑과 공의가 공존해야 한다.
적절한 훈육
"대저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히5:13)
위의 "의의 말씀"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적절한 훈육을 의미한다.
훈육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오냐, 오냐"만 경험했기에 사리 판단 능력이 떨어진다. 사회적으로 바보가 되는 것이다.
말씀대로 가르치면 당연히 찔림이 있고 고민이 생기기 때문에 사람들의 기대와 어긋나게 된다. 그러나 기독교는 어떤 종교인가? 그것은 십자가의 능욕을 따르는 종교이다. 결코 순탄하고 낭만적이지 않다. 따라서 그러한 삶은 진정 어린아이를 벗은 사람에게만 가능한 것이다. 하늘 아버지의 유일한 아들이 왜 십자가를 지셨는지 이해한다면 우리 삶은 더 성숙해질 것이다.

 

3장 치 유

치유하시는 은혜
어린아이를 벗는다는 말의 의미는 치유함을 입었다는 표현과 같다.
이는 우리 속에 있는 상처가 응어리져 어린아이로 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을 치유하지 않고는 어린아이를 벗을 수가 없다. 삶의 여정 속에서 긁히고 찍힌 기억들이 마음의 가시밭길을 이루어 내가 자라는 것을 방해하고 험난한 가시밭길에서 자라나는 내 인격은 발육부진으로 삐뚤어지고 왜소해진다.
따라서 우리가 치유라고 표현하는 말은 마음 속 가시를 쳐내고 돌들을 걷어내는 작업이다. 그런데 이러한 일은 우리 스스로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요한 복음 9장 11절을 보자.
"예수께서 길 가실 때에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을 보신지라" (요9:1)

다른 복음서에도 소경을 고치시는 장면이 있지만 오늘 본문은 그것과 다르다.
모두다 예수님을 따라다니거나 사람들이 그들을 데려왔는데, 오늘 본문의 소경은 예수님을 부른 자가 아니다. 그저 먼저 예수님이 다가가신 것이다. 이것이 큰 은혜다. 치유하시는 예수님의 은혜가 여기서 드러나는 것이다.
그분은 우리가 원치 않아도 치유하시고자 하시는 분인 것이다.
소경은 자신의 현실에 너무나 매몰되어 있었다.
그의 관심사는 치유함 받는 것이 아니라 오늘 얼마를 구걸하고 무엇을 먹을까에 집중되어 있었다. 일상의 고민과 걱정으로 사는 평범한 걸인이기에 그의 소망은 치유가 아니라 구걸이었던 것이다.

 

인간의 어리석음
어리석은 우리의 눈으로 볼 때 상처 입은 자들은 죄인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는 동정도 배려도 없다. 오직 냉대와 질시 뿐이다.
이것 때문에 아픈 사람들은 더욱 상처를 받게 된다.
예수님을 매일 보던 제자들도 다를 것이 없었다.
"이가 소경된 것이 누구 죄입니까, 본인의 죄인가요, 부모의 죄인가요?"

우리는 우리가 정해놓은 잣대를 가지고 모든 것을 판단한다.
그래서 그 잣대를 두고 목숨을 건 논쟁을 한다. 남과 북이 갈리기도 하고 교파와 지역이 갈리기도 한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했을까?

오늘 소경은 예수님 앞에 뛰쳐나갈 수 없을 정도로 마음에 깊은 병을 앓고 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는가? 그것은 다름 아닌 하나님을 잘 섬기는 유대인들과 교회에 잘 다니는 우리 자신이다.

 

말이 주는 상처와 치유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하여 심문을 받으리니 네 말로 의롭다 함을 받고 네 말로 정죄함을 받으리라"
여기 지금 본문을 보라.
무의식적으로 제자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가?
"저게 누구의 죄입니까? 본인의 죄인가요, 부모의 죄인가요?" 하면서 계속 정죄하고 있다. 소경은 아마 평생 이 말을 들으며 살아왔을 것이다. 그의 가슴에 응어리진 이 말 한마디로 그가 얼마나 비참한 생을 살고 있는가?
제자들은 무의식적으로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누구의 죄도 아니다
"저 사람 본인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이다."
소경은 이제까지 태어나서 처음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
정말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기인 것이다. 복음이다. 치유의 은혜가 임한 것이다.
독자여! 독자에게 상처가 많은 것은 스스로가 죄를 지어 받는 형벌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치유하심을 나타내시려는 놀라운 섭리인 것이다.

 

공동체 속의 치유
한 번은 미국에 갔을 때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마침 소경이 서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갑자기 묘한 호기심이 발동했다.
소리도 안 나는 신호등인데 저 소경이 어떻게 건너갈까 궁금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를 관찰하기 시작했다. 이윽고 신호가 바뀌고, 그 소경이 어떻게 건넜을까? 너무 싱겁게도 왠 점잖은 신사 분이 그 사람의 손을 딱 잡고 "저와 같이 건넙시다"하고 데리고 가는 게 아닌가!
순간 나는 한 대 얻어맞은 듯 멍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솔직히 나는 그를 도울 생각을 못했었다.
마치 제자들처럼 자기들 궁금한 것만 알고자 했던 것이다. 남의 상처를 싸매어주고 보듬어주기 보다는 구경하기를 즐겨하는 사람..
우리 마음 속에 아직도 미운 사람이 있다면 우리는 어두움을 살고 있는 것이다.
저주하는 사람, 사람들에게 모멸감을 안겨주는 사람은 모두가 어두움에 속한 것이다. 예수가 진정 내 안에 들어와 있다면 감싸줌과 치유가 일어나는 공동체가 되는 것이다.

 

실로암 못가의 비밀--자기 발견
"실로암 못가에 가서 씻어라"
예수님이 이 말씀을 했을 때 소경은 아무 말도 않고 실로암에 가서 씻었다. 왜?
내 마음을 치유해주는 분이었기에 내 아픔을 아는 분이었기에 무슨 말을 해도 신뢰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실로암에 가서 씻음으로 그는 눈을 뜨게 되었는데, 여기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다름 아닌 새롭게 뜬 눈으로 본 최초의 사람이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는 것이다.
자기 몰골을 보았다는 것..
세상에! 나같이 추하고 더러운 인간이 있을 수가!
항상 다른 사람만 보고 원망하던 자아를 그를 벗어버리고만 싶었을 것이다.
이것을 가리켜 우리는 반성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치유의 결과이다.
나를 발견할 때에만 나를 움켜쥐고 있던 어린아이를 버릴 수 있는 것이다.
소경을 굳이 실로암 못가로 보내신 예수님의 놀라운 의도를 보라.
우리는 소경과 같은 자들이다.
내 속에 있는 상처 때문에 나를 성장시키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만 탓하는 소경과 같은 사람인 것이다.

 

4장 성숙한 그리스도인

지혜를 구하라
야고보는 시험을 인내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임을 강조한다.
그리고는 바로 5절에서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누구든지 지혜가 부족하거든 모든 사람에게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하라. 그리하면 주시리라."
바로 지혜를 구하고 지혜의 사람이 되는 것이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모습이란 것이다. 어린아이에게는 지혜보다 맹목만이 있다. 바울도 지혜에 장성한 사람이 되라고 말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과연 세상 지식이나 없어질 관원의 지혜도 아닌 하나님의 지혜는 무엇인가?
"오직 위로부터 나온 지혜는 첫째 성결하고 다음에 화평하고 관용하고 양순하며 긍휼과 선한 열매가 가득하고 편벽과 거짓이 없나니"
이것이 바로 사도 바울이 말하는 하나님의 지혜이다.

 

용서가 길이다
우리 자신이 인격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만 한다. 십자가의 은혜는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다.
분노나 화가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은 용서 자체를 배우지 못한 경우다.
그들은 자신이 당한 대로, 용서받지 못한 대로 자신의 자녀나 배우자를 대하고 다른 사람과의 관계도 그런 식으로 가진다. 그러다 보니 다툼이 끊이질 않는다.
먼저 십자가의 용서를 경험해야만 한다.

 

페르소나를 벗고서
인간은 성장하면서 가면을 쓴다. 이것을 페르소나라고 하는데 그것을 벗어야만 진정한 개성화, 즉 성숙한 인간이 된다.
개중에는 이중적인 모습을 건드리지 않고 서로 모른 척 해주는 교회도 많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격 속에 있는 가면을 빨리 벗어버리기 원하신다.

 

성냄과 온유함의 문제
야고보서에 기록된 성숙한 그리스도인의 첫 번째 덕목은 바로 온유와 겸손이다.
성경을 가만히 보면 예수님 뿐 아니라 겸손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을 변화시켜나간 인물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사도 바울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를 쓰시기 위해 그의 교만부터 다루셨는데, 연대상 사도 바울이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한 것이 대략AD45년경으로 그가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무려 10년의 시간 흐른 후였다는 것으로 그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그 동안 그가 하나님 앞에 연단 받고 겸손해졌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대략 AD54~57년경에 씌여진 고린도 전서 15장 9절을 보자.
"나는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감당치 못할자로라"
이때 바울의 나이가 50대 후반이었는데 그는 자신이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라 고백하고 있다. 겸손을 배운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후 대략 5년 후쯤 씌여진 에베소서 3장 8절을 보자.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
이제는 그가 "사도 중 지극히 작은 자"에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로 더 겸손해진 것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그가 은퇴 전 쓴 디모데 전서에서 더한층 성숙해진 겸손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제 그는 자신을 성도라 칭하지도 않고 죄인 중 괴수라고 말하며 낮추어졌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자, 온유한 자, 겸손한 자의 모습이다.

 

혀의 위력
성숙한 그리스도인은 말을 다스리는 사람이라고 야고보서 기자는 말한다.
그가 말하는 말의 죄는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저주이다.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저주하는 말은 쉽게 말해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는 말이다.
이 말을 통해 우리는 상대를 죽이기까지 하는 것이다. 어린아이는 결코 말을 다스리지 못한다.

 

타인에 대한 관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정결하고 더러움이 없는 경건은 곧 고아와 과부를 그 환난 중에 돌아보고 또 자기를 지켜 세속에 물들지 아니하는 이것이니"
자기 확장은 세상과 관계를 맺고 살게 하신 하나님의 창조원리이다.
자기 확장의 가장 성숙한 모습은 바로 알지 못하는 사람, 성경적으로 말하면 "고아와 과부"와 같은 약자에게까지 관심과 사랑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건 바로 저 하늘에서 자신의 사랑을 확장시켜 친히 이 땅에 오신 예수께서 그렇게 하셨기 때문에 더욱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5장 성숙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이단보다 못한 공동체?
얼마 전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JMS란 종교 집단이 있었는데, 그 집단의 특징은 구성원의 대부분이 서울 대학에서 포섭되어 온 것이었다. 우리나라에서 제일 똑똑하고 공부 잘하는 사람들이 모인 대학에 모인 사람들이지만 실상은 이제 스무 살 밖에 안 되는 어린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서로를 그저 경쟁자라고만 보는 환경 속에서 사람이 그립고 따뜻함이 그리웠던 그들이라, JMS라는 써클에 가입하고 보니 사람들이 그렇게 좋고, 따뜻할 수가 없더란다. 그래서 나중에는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기에게 잘해주고 의지되던 사람들을 잃기 싫어서 나올 수가 없었다고 한다.
도대체 한국 교회가 보여주는 사랑과 애정이 어느 정도였길래 저 썩어빠진 이단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만큼 사랑 있는 집단이 없었던 것인지..
젊은 대학생들은 판단의 기준이 감정적이라 옳고 그르냐보다는 얼마나 내 마음이 더 끌리느냐에 따라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들의 그런 심리를 이용해 좀 더 많은 관심과 애정을 베풀어 그들을 현혹시키는 것이다.
성숙한 공동체에서 보여주어야 할 것이 바로 사랑이다.
교회가 이런 성숙한 만남을 가지는 곳이 되어야겠지 않은가!

 

성숙한 만남
성숙한 만남은 서로 사랑을 가지고 지적해주고 아파해 주고 기도해주는 모임 속에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 교회에서 자기 만족만을 추구하지 사람들과의 교류는 원치 않는 사람들, 필요에 의해서 사람과 관계를 가지는, 이런 사회 속에서 교회 역시 남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 어색해져 버렸다. 그러나 성숙한 만남에는 결코 이익이 개입되어서는 안 된다. 예수님께서 이익 바라고 십자가를 지셨는가?
교회는 이익을 바라는 자본주의 논리를 떠난 유일한 곳이며 이 땅에 허락된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을 잊으면 안될 것이다.

 

죄를 고할 수 있는가
"이러므로 너희 죄를 서로 고하고..."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죄와 유혹을 고한다는 것은 상당히 어려운 문제다.
왜냐면 그 속에는 서로에 대한 큰 신뢰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죄를 고하는" 공동체는 상당히 성숙한 구성원들이 있을 때만 가능해진다. 죄는 사람의 죄책감을 반드시 수반하는 것이므로 그것을 고백할 때 비난보다는 그를 지지해주는 것이 필요하다. 왜냐면 죄의 용서와 관련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를 위로하고 다시 그와 같은 죄를 짓지 않도록 도울 뿐이다.

 

치유
치유라는 therapy는 희랍어 떼라퓨어에서 나온 말인데 그 뜻에는 "구원"이라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즉 구원을 완성해가는 성화와도 관련이 되는데, 우리가 서로의 죄를 고백하면 먼저 내적인 치유가 일어나면서, 그것이 수용되고 지지받을 때 성장이 함께 일어난다. 그리고 행동의 변화가 나타나는 것이다.

 

중보의 기도
새벽기도에 나가보면 자신의 문제로만 기도하는 분들도 있고 공동체 내의 다른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을 위해 기도하는 분들의 특징은 응답이 늦어지더라도 결코 시험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응답이 늦으면 "하나님의 다른 의도가 있으신가부다"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는데 주력하는 반면, 자신의 문제만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은 응답이 오지 않으면 금방 시험에 들곤 한다. 그들은 자신의 문제만 놓고 기도하기 때문에 자신의 뜻이 곧 하나님의 뜻이다.
성경에서는 성숙한 사람들의 기도가 바로 중보의 기도라 말하고 있으며 중보기도하는 사람을 가리켜 의인이라고 말한다. 기도의 능력자인 엘리야 역시 남을 위한 기도, 나라와 민족을 위한 기도의 능력자였다.

 

서로 포기하지 말라
진정 성숙한 공동체란 미혹하여 그리스도의 진리를 떠난 사람을 돌아서게 하는 공동체라고 소개하고 있다. 성숙한 부모는 자식이 미혹한 길에 빠졌을 때, 결코 포기하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우리가 미혹된 영혼을 사랑함으로 그들이 다시 돌이키게 되고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게되면 거기에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죄가 사랑으로 덮어짐을 다른 사람에게도 전하게 된다. 사도바울이 그랬고 어거스틴이 그랬고 지금 우리도 그래야 한다.

 

6장 경건을 연습하라

경건
경건은 희랍어로 유세베이안인데 이에 대해 칼빈은 "순결한 양심으로 하나님께 예배하는 마음"이라고 말했다.
데모데서는 경건을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으로 정의했다.
야고보 기자는 경건을 두가지로 가르치고 있는데 첫째로 경건이란 나보다 어렵고 힘들고 낮은 사람을 돌볼 줄 아는 사람이다. 교회와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찬송도 하지만 결국 그것 자체가 경건은 아니다. 그것은 경건 생활의 토대인 것이다.
둘째로 경건은 세속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다니엘은 왕의 진미로 자신이 더럽혀지는 것을 용납지 않았다. 아무리 친절한 배려라도 옳지 않은 것은 옳지 않은 것이다. 다니엘을 헐뜯고 모략하려는 자들이 그의 약점을 찾았을 때에도 아무 허물을 발견할 수 없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세속에 물들지 않은 경건인 것이다.

 

경건에 대한 연습
성령의 도우심으로 끊임없이 훈련하지 않으면 결단코 우리는 경건에 이를 수 없다. 디모데전서가 상기시켜 주는 경건의 훈련에 대해 들어보자.
"허탄하고 망령된 신화를 버리고 경건에 이르기를 연습하라" (4:7)
이 단호한 명령조를 보라.
경건은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실천해야 할 덕목인 것이다.
그것은 입술의 고백으로 되는 것도 아니고 자기를 포기하면서 훈련해야만 가능한 것이기에 오직 연습이 필요한 것이다.
이 연습이라는 말은 원어에서 보면 '굼나제'라는 말이다.
이 말은 바로 '굼나조'에서 나온 말인데, '굼나조'란 옷을 벗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이 '굼나제'에서 파생된 단어 중에 '짐네지움'이라는 말이 있는데, 바로 체육관이란 말이다. 그러니까 어원을 살펴 설명해보면 '굼나제'란 육상 선수들이 옷을 벗고 운동장에서 맹훈련을 받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내가 걸쳐 있는 모든 것을 벗어버리고, 하나님 앞에 와서 육상 선수들이 가벼운 옷입고 뛰듯 너희도 경건에 이르기를 뛰면서 연습하라 이거다.
반복하고, 반복하고, 또 반복하고...
여기 4장 8절에서는 그래서 재미있게도 이것을 육체의 연습과 비교해 놓는다.
"육체의 연습은 약간의 유익이 있으나 경건은 범사에 유익하니 금생과 내생에 약속이 있느니라"

 

경건을 방해하는 세력Ⅰ-거짓교사
우리가 알다시피 인간에게 가장 무서운 존재는 바로 인간 자신이다.
무서운 맹수도 아니고 자연재해도 아니고 오직 인간만이 인간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다. 특별히 힘있는 자들이 잘못된 사상과 신념을 전파할 때 그 해악은 더욱 크다.
"경계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으로 나는 사랑이어늘 사람들이 이에 벗어나 헛된 말에 빠져 율법의 선생이 되려 하나 자기의 말하는 것이나 자기의 확증하는 것도 깨닫지 못하는도다" (딤전1:5~7)


경건을 방해하는 세력Ⅱ-영지주의
거짓 교사를 경계할 것을 권면하던 사도바울이 경건을 방해하는 또 하나의 세력에 대해 조심할 것을 권했는데 그것이 바로 영지주의자들이다.
영지주의는 영어로 '그노티시즘'이라고 하는데 이는 말 그대로 이 땅을 부정하고 오직 영의 세계만 인정한다는 것이다. 그는 그것을 경건을 방해하는 큰 적으로 간주하여 경건에 이르는 연습 조건으로 잘못된 신화를 버리라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마게도냐로 갈 때에 너를 권하여 에베소에 머물라 한 것은 어떤 사람들을 명하여 다른 교훈을 가르치지 말며 신화와 끝없는 족보에 착념치 말게 하려 함이라 이런 것은 믿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을 이룸보다 도리어 변론을 내는 것이라." (딤전1:3~4)
무슨 말인가? 맨날 신화나 쫓아다니고 조상들을 신격화하는 가르침을 배격하라는 것이다. 그런 것들은 자기 주장만 세우게 하여 변론만 낼 뿐이란 것을 가르치는 것이다.
말씀을 실천하라
성경을 모르면 하나님의 뜻을 알 수가 없고, 설사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하더라도 자기 주관에 빠질 우려가 많다. 말씀에 대한 깊이가 깊어질수록 하나님과도 가까워진다. 하나님과 가까워지는 것이 바로 "경건"이며 성화이다.
"또 네가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의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케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하기에 온전케 하려 함이니라"
놀랍지 않은가? 성경에는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다. 이 지혜를 깨달은 사람들에게는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함"이 있다.
그러나 경건은 그것만으로 얻어지지는 않는다.
"저희가 하나님을 시인하나 행위로는 부인하니 가증한 자요 복종치 아니하는 자요 모든 선한 일을 버리는 자니라"
경건에 이르는 마지막 연습은 바로 말씀을 실천에 옮기는데 있다.
경건은 훈련이지 아는 것이 아니다.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으면 결국엔 추악하고 고집이 세서 선한 일을 할 능력이 없어질 뿐이다. 경건에 이르지 못하는 것이다.

 

경건의 능력
로마 시대에 트라얀 황제가 기독교에 대한 조사를 지시했다.
당시 기독교에 대한 비방이 난무하던 때라 그 진위를 따져 기독교를 탄압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조사 책임을 맡은 뜨리니누스라는 사람이 조사를 마치고 간략하게 세 가지로 보고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첫째, 그들은 결코 도적질을 하지 않습니다.
둘째, 그들은 결코 간음도 하지 않습니다.
셋째, 그들은 결코 부채에 깨끗했습니다.
이 세가지 보고를 보고 트라얀 황제는 기도교인들을 박해하려는 자신의 생각을 고쳤다. 이것이 바로 경건이다.
로마의 콘스탄트 황제가 기독교를 공인하게 된 근본 원인도 이것이다.
그들의 삶이 바르고 성 윤리가 깨끗하기에 기독교를 국교로 삼으면 나라의 도덕과 윤리가 서겠구나 하는 생각에서 기독교를 국교로 승인하게 된 것이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
교회에 몇 명 모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세상을 이길 만한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7장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속죄의 제사Ⅰ--제사장의 속죄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에 우리 죄를 용서해줄 방법을 만드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하나님이 친히 제정하신 그 법은 두가지로 나뉘는데 하나는 윤리법이며, 또 하나는 의식법으로 이것은 제사법이라고도 한다. 이 제사법에서 하나님이 우리 죄를 용서하시기 위해 제정해 준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속죄의 제사이다.
레위기 4장 1절부터 7절을 보라.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일러 가라사대 이스라엘 자손에게 고하여 이르라 누구든지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였으되 만일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이 범죄하여 백성으로 죄얼을 입게 하였으면 그 범한 죄를 인하여 흠 없는 수송아지로 속죄 제물을 삼아 여호와께 드릴지니 곧 그 수송아지를 회막문 여호와 앞으로 끌어다가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기름 부음을 받은 제사장은 그 수송아지의 피를 가지고 회막에 들어가서 그 제사장이 손가락에 그 피를 찍어 여호와 앞 곧 성소 장 앞에 일곱 번 뿌릴 것이며 제사장은 또 그 피를 여호와 앞 곧 회막 안 향단 뿔에 바르고 그 송아지의 피 전부를 회막문 앞 번제단 밑에 쏟을 것이며"

제사장이 죄를 범하면 먼저 흠 없는 수송아지를 제물로 골라 자기 죄를 고하고 머리에다 안수를 하여 죄를 전가하는 의식을 행하고 나면 그 수송아지를 데리고 가서 잡는데 잡는 순간 피를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다 뽑아버린다. 그리고 나서 이 피를 전부 다 가지고 성소로 들어가는데 제사장은 손가락에 피를 찍어 성소 앞에 일곱 번 뿌리고 향단 뿔에 바르고 나머지는 피 전부를 번제단 밑에 쏟아버리는 것이다.
이것으로 하나님과 나의 단절되었던 관계가 회복되는데 이것을 바로 속죄의 제사라고 부른다. 제사장이 죄를 사함 받지 않고는 결코 다른 사람을 위한 속죄 제사도 드릴 수 없기에 매우 중요하며 만약 이 때 제사장의 자기의 죄얼을 입고 용서받지 않은채 그대로 가버리면 모든 백성들의 그냥 그 죄의 흐름으로 젖어가버려 그 죄의 얼을 입어버리고 마는 것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목사가 영적으로 맑지 않으면 교인들도 혼탁해진다.

 

불사름의 의미
피뿌림을 하고 나면 그 고깃덩이를 처리하는데 하다못해 그 창자며 똥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모조리 성소 바깥에서 싹 태워서 드린다.
"또 그 속죄 제물 된 수송아지의 모든 기름을 취할지니 곧 내장에 덮인 기름과 내장에 붙은 모든 기름과 두 콩팥과 그 위의 기름 곧 허리 근방에 있는 것과 간에 덮인 꺼풀을 콩팥과 함께 취하되 화목제 희생의 소에게서 취함 같이 할 것이요 제사장은 그것을 번제단 위에 불사를 것이며 그 수송아지의 가죽과 그 모든 고기와 그 머리와 다리와 내장과 똥 곧 그 송아지의 전체를 진 바깥 재 버리는 곳인 정결한 곳으로 가져다가 불로 나무 위에 사르되 곧 재 버리는 곳에서 사를지니라"

하나도 남김 없이 피는 전부 쏟아 성소에 가지고 들어가 하나님과 관계를 정결히 하는 예식을 행하고 고깃덩이는 밖에서 불에 태워 전부 드린다.
이 예식을 잘 기억하라.
 

속죄의 제사Ⅱ--회중의 속죄
"만일 이스라엘 온 회중이 여호와의 금령 중 하나라도 그릇 범하여 허물이 있으나 스스로 깨닫지 못하다가 그 범한 죄를 깨달으면 회중은 수송아지를 속죄제로 드릴지니 그것을 회막 앞으로 끌어다가 회중의 장로들이 여호와 앞에서 그 수송아지 머리에 안수하고 그것을 여호와 앞에서 잡을 것이요"

여기의 회중은 백성의 상류층, 지금으로 말하면 관원, 즉 공무원들 중산계층인을 말한다. 그리고 그 뒤에 27절에 서민들의 죄에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그들이 죄를 지면 흠없는 염소를 끌고와 제사장이 그 머리에 안수하며 이 죄를 네가 질지어다, 네가 질지어다, 네가 질지어다 하며 죄를 전가시켜 바깥에서 염소를 잡는다. 잡으면 피가 쏟아지는데 이 피도 남기면 안된다. 한방울도 남김 없이 전부 다 쏟아야 하며 그 피로 제사장이 성소에 들어가 제사법과 똑같이 예식을 행하고 육체는 성문 밖에서 불에 전부 태워버린다.
피뿌림의 이 제사가 없으면 하나님께 나의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었다.

당시 구약의 속죄의식은 매우 중요했다.
일단 제물을 끌고 오면 제사장은 제물부터 검사를 해야했는데 흠이 있으면 제사장이 이야기를 한다.
"못 들어갑니다."
"왜 못 들어갑니까?"
"흠이 있어서 못 들어갑니다."
"그러면 내가 죄를 용서받을 길이 없단말요, 하나님의 진노에서 벗어날 길이없소!"
"그래도 하나님의 기준에 미달되는 것은 안됩니다. 못 들어가요."
그럼 열 번이라도 되돌아가야 한다. 따라서 제사장이 마음이 좋아 죄 지은 사람들의 형편과 사정을 보아주다가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저주를 받는 일이 많았다. 이것은 헛된 제사요 하나님이 열납치 않으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도해도 응답이 안되고 교회 부흥도 되지 않는 것이다.


속죄의 제사Ⅲ--대속죄일
이제껏의 이야기는 개인이 수시로 짓는 죄에 대한 속죄법이었고 레위기 16장에서는 민족과 국가, 이스라엘 백성 전체가 짓는 죄에 대해 회개하는 대 속죄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일년에 한 번씩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법궤가 있는 지성소에서 행해졌다. 이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초긴장에 들어간다.
왜인고하면 지성소에 들어갈 때, 대제사장은 자기 자신과 민족의 운명을 결정짓는 생사의 기로에 서기 때문이다. 생명이냐, 사망이냐, 축복이냐, 저주이냐가 그 제사를 통해 결정된다.
대제사장에 대속죄 제사를 드리고 나오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래서 마구 춤을 추고 기뻐하며 감사한다. 이 나라에서 죄와 저주가 물러가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의 자리가 벗어지고 하나님의 영광과 축복이 이 땅 위에 임하기 때문이다. 그게 좋아서 감격의 찬양을 하며 좋아서 춤을 춘다.

이 대속죄의 제물은 염소인데 두 마리를 준비한다.
그런 다음 하나를 제비 뽑아 거기다 이스라엘 모든 백성의 죄를 전가하고 이 염소는 잡아 그 피를 대제사장이 가지고 들어가 자기 민족의 모든 죄를 고한다.
나머지 한 마리는 지성소 안의 의식이 끝난 후 이스라엘 백성에게 데려다가 모든 그들의 잘못된 것들과 불평스러운 것들을 가져다 염소에 퍼붓는데, 이때 그들은 염소를 마구 때리고 침 뱉고 입에 담지 못할 욕을 해댄다. 그리고 나서 이 염소에게 안수까지 하여 죄를 뒤집어 씌워 광야로 보내는 것이다.
이 염소를 끌어다가 아사셀, 즉 악한 영, 사탄의 왕에게 끌어다 내주는 것인데, 그러면 이 염소는 아무도 없는 광야에 가서 맹수에게 잡혀 먹든지 낭떠러지에 떨어지든지 하여 속죄의 모든 제사를 마치는 것이다.

이렇게 모든 제사 의식을 살펴보면 종류에 관계없이 몇가지 공통점이 있는데, 첫째는 죄사함을 위한 제물이고 둘째는 피 뿌림이며 마지막은 육체를 성문 밖에 불사른다는 것이다. 이 세가지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히브리서는 바로 이런 점을 주목해 씌여진 말씀인데, 이제 우리는 히브리서를 살펴보도록 하자.

 

대제사장 되신 예수님
"그러므로 저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심이 마땅하도다 이는 하나님의 일에 자비하고 충성된 대제사장이 되어 백성의 죄를 구속하려 하심이라" (히2:17)
예수그리스도는 먼저 대제사장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입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의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히3:1)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있으니 승천하신 자 곧 하나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히4:14)

이 대제사장이 무엇 하는 사람인가? 바로 모든 백성의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속죄 제사를 위해 오신 것이다.
15절을 보자.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구약에 대속죄제사를 위해 대제사장이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는 조건이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바로 죄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예수님은 처음부터 죄가 없으셨기에 자기를 위한 제사가 필요치 않으셨다. 그래서 하나님의 보좌 곧 그 지성소에 우릴 대신해 들어가실 수 있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 뿐인 것이다.
세상에서 뽑은 대제사장은 사람인고로 죄가 있어 속죄제사를 드려야 했기에, 5장 1절에서 "대제사장마다 사람 가운데서 취한 자이므로 하나님께 속한 일에 사람을 위하여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게 하나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백성을 위해 속죄죄를 드리는 그 역시 죄인이었기 때문에 속죄제를 드려야 했으나 그는 매우 존귀한 자였고 그러기에 또한 성경은 그가, "이 존귀는 아무나 스스로 취하지 못하고 오직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라야 할 것이니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의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대 제사장으로 오실 때, "또한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 대제사장 되심도 스스로 영광을 취하심이 아니요 오직 말씀하신 이가 저더러 이르시되 너는 내 아들이니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고" 즉, 하나님의 임명을 받아 왔음을 증거한다.

 

영원한 지성소에 들어가신 예수님
6장 20절을 보라.
"그리로 앞서 가신 예수께서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히 대제사장이 되어 우리를 위하여 들어가셨느니라"
대 제사장은 어디로 들어가는 사람인가?
그는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이다.
백성의 모든 죄를 위한 속죄 제사를 위해 지성소에 들어가는 사람인데, 우리 예수님께서 우릴 위해 영원한 대제사장이 되시어 들어가셨다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다. 그분이 들어가신 지성소는 어디인가?
바로 하늘 지성소 곧 현재 천국 지성소에서 지금도 나를 위해 속죄제사를 드리고 계신 것이다. 나의 모든 죄를 다 씻겨주고 계신 영원하신 대제사장,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며 이것이 바로 진리이다.
얼마나 놀라운 비밀인가?

 

왜 예수 그리스도의 피인가
7장으로 넘어가자. 26절, 27절에,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속죄 제사가 필요 없기 때문에 단 한 번 당신이 인류를 위해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심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려주신 것이다.

더 중요한 그 다음 말을 보자.
"이제 하는 말의 중요한 것은 이러한 대제사장이 우리에게 있는 것이라 그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셨으니 성소와 참 장막에 부리는 자라 이 장막은 주께서 베푸신 것이요 사람이 한 것이 아니니라 대제사장마다 예물과 제사 드림을 위하여 세운 자니 이러므로 저도 무슨 드릴 것이 있어야 할지니라" (8:1~3)

구약에서 속죄 제사를 드리려면 예물이 필요하지 않았는가? 대 제사장은 속죄제물이 있어야하기 마련이다. 예수님도 대제사장이 되시어 제사를 드리시려면 당연히 제물이 있어야 한다. 4절을 보라.
"예수께서 만일 땅에 계셨더면 제사장이 되지 아니하셨을 것이니 이는 율법을 좇아 예물을 드리는 제사장이 있음이라"

그러니까 예수님은 하늘나라 대제사장이라 말씀하는 것이다.
그래서 5절에 "저희가 섬기는 것은 하늘에 있는 것의 모형과 그림자"라 말하는 것이다.
아무튼 "첫 언약에도 섬기는 예법과 세상에 속한 성소가 있더라"(9:1) 라는 말씀처럼 수시로 내 죄가 생각나면 제사장이 들어가 제물을 드리고 속죄 제사를 드렸으며, 다음 3절에 가서, "또 둘째 휘장 뒤에 있는 장막을 지성소라" 그 곳에서는 이스라엘 모든 죄를 속하는 제사를 드리는데, 6절,7절에

"이 모든 것을 이같이 예비하였으니 제사장들이 항상 첫 장막에 들어가 섬기는 예를 행하고 오직 둘째 장막은 대제사장이 홀로 일년 일차씩 들어가되 피 없이는 아니하나니 이 피는 자기와 백성의 허물을 위하여 드리는 것이라"
고 하니, 즉 피뿌림의 제사가 없이는 절대로 우리 죄가 사하여지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서 이 피는 무엇을 상징하느냐? 그것은 바로 생명, 즉 생명을 대신해서 바침을 의미하는 것이다.
바로 그 피 값이 있음에 자기 죄가 용서되고 백성의 모든 죄가 용서받는 것이다.
9절,10절을 보자.

"이 장막은 현재까지의 비유니 이에 의지하여 드리는 예물과 제사가 섬기는 자로 그 양심상으로 온전케 할 수 없나니 이런 것은 먹고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함께 육체의 예법만 되어 개혁할 때까지 맡겨 둔 것이니라"
그러니까 수송아지나, 수염소나 암염소, 어린양으로 속죄의 제사를 드린 행위는 개혁할 때까지만 허용되었던 것인데, 이 개혁은 누가 이루셨는가?
말라기서 3장 1절로 6절에 보면 예수를 세상을 개혁하러 오시는 자라고 표현함으로써 그분이 오심으로 말미암아 제물을 직접 바치는 제사가 폐해짐을 증거하고 있다.
예수의 대속하심으로 이제는 양이나 염소 송아지 따위가 필요 없어진 것이다.
제사법은 예수님의 개혁 이전까지만 맡겨주신 것으로, 11절을 보라.

"그리스도께서 장래 좋은 일의 대제사장으로 오사 손으로 짓지 아니한, 곧 이 창조에 속하지 아니한 더 크고 온전한 장막으로 말미암아"
무슨 말인가 하면, 천국 장막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그리스도와 같은 대속의 신은 없다. 그가 친히 피흘리심으로 그 피로 우리 죄를 씻어주셨고 지금도 씻고 계신 것이다.
13절,14절을 보라.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로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케 하여 거룩케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으로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못하겠느뇨"

예수 그리스도의 피만이 우리를 정결케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우리의 양심도 생활도 깨끗케 하실 수 있다. 오직 천하 인간에게 구원을 이룰 만한 다른 이름을 준 적이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으로 가능한 것이다. 그래서 18절에 보니까, "이러므로 첫 언약도 피 없이 세운 것이 아니니"라는 말씀으로 그의 피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변화된 신분
19절을 다시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예수의 피를 믿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은 우리 믿는 자들은 이제 제사장의 신분을 얻게 되었다. 이 얼마나 엄청난 축복인가?
그런데 조심할 것이 하나 있다.
만인 제사장이라고 해서 목사나 평신도나 구분이 없다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에게 맡겨진 직무는 다 다르다. 그럼 예수님의 피는 우리에게 어떤 제사장의 직무를 주신 것인가? 바로 우리 스스로 내 죄를 고함으로 속죄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신분을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죄를 짓는다고 목사에게 죄를 고하여 대신 용서함 받거나 하지 않는 것이다. 그냥 예수의 피를 의지하고 직고하면 된다.
베드로는 이것을 왕 같은 제사장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성소와 지성소
다시 19절을 보면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이라고 되어 있는데, 그러면 이 성소가 어디 있는 것인가?
바로 하늘의 성소이다.
그래서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다.
이 지성소는 아무나 못들어 간다.
오직 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데, 알다시피 피를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바로 예수의 피가 우리가 가지고 들어갈 피인 것이다.
예수 피를 가진 자만이 성소인 천국에 가는 것이다. 주여 내가 예수의 피를 의지합니다, 내가 그 피를 가졌습니다, 그럴때만 천국 문이 활짝 열린다는 말이다.
이 때문에 감사가 나오고 은혜를 입는다고 말하는 것이다.
돌로 맞아 죽는 스데반과 사도 바울이 왜 맞으면서도 기뻐하는가?
바로 이 지성소를 보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히브리서 20절을 보자.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롭고 산 길이요 휘장은 곧 저의 육체니라"

구약에 성소와 지성소를 보았었다. 지성소는 대제사장만 1년에 딱 한 번 들어가는 곳으로 우리 같은 제사장은 들어갈 수 없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면서 이것을 쫘악 찢어버리셨다. 아주 갈라놓으심으로 이제 성소와 지성소의 구분이 없어지고 일반 제사장된 우리도 지성소에 들어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제 자신 있게 찬송가를 부르라.
"천국은 내 것일세, 천국은 내 것일세, 구세주의 보혈로써 천국은 내 것일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Ⅰ--선한 삶
히브리서 13장 11절을 보라.
"이는 죄를 위한 짐승의 피는 대제사장이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고 그 육체는 영문 밖에서 불사름이니라"
이건 구약의 말씀이다.
구약에서 백성의 죄를 짐승의 피로 사하기 때문에 그 피를 다 발라 우리를 정결케 하고 육체는 불살랐다. 그런데 불사르기 전에 제물의 피는 싹 뽑았다.
예수님의 죽음도 이와 꼭 같이 이루어졌다.
예수님이 그냥 얻어 맞아 죽거나 심장마비사 하지 않은 이유가 여기 있다.
여섯 시간 동안 십자가에 달리셔서 피를 줄줄 흘린 후에야 죽으셨다.
왜? 그것 바로 피가 한 방울도 남지 않아야 제사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모든 피를 전부 가지고 성소에 들어가야 하기 때문에 물과 피를 모두 쏟기까지 죽지 않으시고 매달려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육체는 어떻게 되었나?
예루살렘 성 밖에 던져 버려졌다.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히13:12)
이제 다 이루셨다. 육체의 제물이란 것이 영문 밖에서 불태워 없어져야 하듯이 우리 예수님도 영문 밖에 버려진 것이다.

이제는 예수님의 피 공로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제사장이 되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13절을 보자.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
답은 간단하다.
제사장으로 사는 것은 자기를 자랑하거나 다른 사람을 무시하는 삶이 아니라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나가는 삶"이다.
고난을 지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를 따르는 삶인 것이다.
베드로 전서 2장 20절,21절을 보자.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 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는 것, 이것이 능욕이다.
우리가 예수를 믿고 천국의 백성이 되었으면 이제 선한 일을 위해 능욕을 져야 한다. 베드로는 이에 대해 3장 16,17절로 더욱 단호하게 말한다.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받는 것보다 나으니라"

4장 13잘,14절 말씀을 보라.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너희가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욕을 받으면 복 있는 자로다 영광의 영 곧 하나님의 영이 너희 위에 계심이라"
니가 착하면 얼마나 착해, 자기가 의로우면 얼마나 의롭다고! 라고 말하는 손가락질과 멸시가 우리에게 당연한 것이다. 그래야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십자가의 능욕으로 그의 발자취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이다.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Ⅱ-입술의 열매
"이러므로 우리가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미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이는 그 이름을 증거하는 입술의 열매니라" (히13:15)
하나님의 제사장은 입술로 찬미의 제사를 드리는 자이다.
제사를 드려야 한다. 교회에서 뿐만 아니라 세상에서도 입술로 찬미의 제사를 드려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찬미가 무엇인가?
말씀을 보자.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돌이켜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4)
바로 감사하는 말, 원망하지 않고 저주하지 않는 것, 이것이 하나님께 드릴 제사장의 참된 제사인 것이다.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Ⅲ--함께 하는 삶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눠 주기를 잊지 말라 이같은 제사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느니라" (히13:16)
선행은 하나님께 제사장이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다.
예수는 믿는데, 교회는 나오는데, 함께 하기를 거부하는 자, 나눠주지 않는 자, 이러한 사람은 합당한 제사를 드리고 있지 않은 것이다.
교회만 와서 형식적인 예배만 드리고 영문 밖으로 나가지 않는 삶, 여기에 예수님없다. 예수님은 우는 자와 함께 울고, 고통당하는 자와 함께 고통당하셨는데, 이제 교회는 타락해서 나 밖에 모르는 이기주의자로 전락한다면, "궁핍한 자의 부르짖을 때 건지며(시72:12)" "가난한 자의 요새시며 궁핍한 자의 환난날에 산성(사25:4)"이시며 "고난 당하는 자의 부르짖음에 잊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시9:12)"께서 그들을 권면하사, "나더라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영문 밖으로 아무도 나가려고 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는 커지는데 세상은 점점 작아진다. 이제 우리 가운데 철저한 그리스도인들이 나오기를 소망한다.
그래야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기 때문이다..
누가 복음 4장 18절, 19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성령이 임한 우리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
가난한 자는 이미 복음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준비가 된 자라고 주님은 말씀하신다. 마태복음 11장 25,26절을 보면,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라고 말씀하신다.
또 고린도 교회를 보고 사도 바울이 하는 말을 들어보라.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 있는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우리 기독교의 복음은 영문 밖으로 나가는 복음이다.
어렵게 산다고 남의 도움 받으려 말라. 도와주려고 노력하는 사람이 되라. 그렇게 되면 주님이 채워서 돕도록 공급해주신다.
왜 배우는가?
왜 돈을 버는가?
왜 건강하려 하는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이웃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하여 실천하기 위함이다.
교회에서 우리끼리 잔뜩 먹고, 친교하고 그냥 헤어진다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상관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교회 안에서만 부둥켜안고 기도하고 방언하지 말고 영문 밖으로 나가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



출처 : 창골산 봉서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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