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노모는 해냈다. 난 그래서 노모를 좋아한다. 누구도 쉽게 생각하지 못한 것을 또 어렵게만도 생각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려준 개척자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는 개척자를 좋아한다. 노모 히데오라는 선수를 떠올릴 때 가장 어울리는 키워드가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봤다. 시간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봤는데 역시 그에게 가장 잘 어울리는 키워드는 개척, 그리고 도전의 두 가지였다. 어린 시절부터 그는 자신을 속박하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사고방식으로 무언가를 개척하려 노력했고 그 개척정신은 그의 끝없는 도전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노모의 개척과 도전이 반드시 성공했고 화려한 조명을 받는 꽃길만 걸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뭔가 알 수 없는 아쉬움, 약 2% 부족한 아쉬움이 진하게 배어 나오는 선수, 알 수 없는 애틋함이 드는 선수가 바로 노모이다.
2류였기에 꽃피울 수 있었던 개척인생
노모 히데오는 어린 시절부터 스타급 플레이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명문고를 졸업한 것도 아니었고 다른 스타 플레이어들처럼 고시엔 대회에서 전국적인 주목을 받으며 프로팀의 뜨거운 러브콜을 받지도 못했다. 그가 다니던 학교는 무명 중의 무명인 세이죠우 공업이었고 고시엔 본선에 출전하지도 못했다. 고교 졸업 이후엔 프로에 바로 직행하지 못했고 사회인 야구단에 입단하여 야구를 계속 할 수 있었다.
무명 중의 무명인 고교를 졸업하였고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긴 하였으나 고시엔에 출전조차 못해본 이 어린 투수, 게다가 투구폼도 너무 이상한 이런 투수를 스카우트하겠다는 구단은 많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노모는 사회인 야구단에 입단하게 되었고 그 곳에서 자신의 인생을 바꿀 크나큰 무기 하나를 연마하게 된다. 노모하면 생각나는 바로 그 유명한 포크볼이다.
노모가 일본야구계에서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1988 서울 올림픽이었다. 당시 노모는 현 야쿠르트 스왈로즈의 감독 겸 선수인 일본 역대 최고의 포수 후루타와 배터리를 이루며 팀의 에이스로 활약하였고 노모의 활약에 힘입어 일본은 은메달을 차지하게 된다. 그리고 이어지는 프로팀의 러브콜. 여기에서 노모는 또다시 그다운, 그만이 뛸 수 있는 팀에 입단하게 된다.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인기 없기로 유명한 구단인 퍼시픽리그의 긴데츠 버팔로즈였다.
여기에서 잠깐 일본 프로야구 팬의 분포도를 간략하게나마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일본 프로야구는 양대 리그로 운영된다. 요미우리가 속해있는 센트럴리그와 이승엽 선수가 뛰었던 지바 롯데 마린스는 퍼시픽 리그 소속이다. 이 중 일본팬들의 대부분, 진짜 거의 대부분은 센트럴리그의 팬이라고 보면 되고 그 센트럴리그 팬의 상당수는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팬이다. 그리고 나머지가 안티교진(anti 巨人)이라 볼 수 있는데 그들을 대표하는 팀은 오사카의 한신 타이거즈, 나고야의 주니치 드래곤즈 등이다. 즉, 요미우리와 한신, 주니치를 제외한 거의 대부분의 팀은 성적과 관계없이 큰 인기몰이를 하지 못하고 봐도 무방하다. 그나마 센트럴리그에 있는 팀은 지역 팬들에게라도 인기가 있지만 퍼시픽리그 팀은 지역주민들에게조차 외면 받는 경우가 많다. 노모가 뛰었던 긴데츠 역시 그런 팀이었다. 오사카를 상징하는 팀은 한신 타이거즈라고 생각하여도 긴데츠를 대표 팀으로 보는 팬들은 많지 않다.
노모가 만일 요미우리 같은 최고 명문구단에 입단하였다면 어땠을까? 아마 그의 이상한 투구폼부터 당장 수정했을지도 모른다. 만일 그랬다면 MLB 역사에 길이 남을 토네이도 열풍 또한 없었을 것이다. 노모는 입단 첫해부터 엄청난 돌풍을 일으켰다. 입단 첫해인 1990년의 성적은 18승, 탈삼진 287개로 다승왕, 탈삼진왕을 차지하였고 이에 신인왕과 MVP, 게다가 일본 최고의 투수에게 부여되는 사와무라상까지 휩쓸게 된다. 그러나 이는 이후에 있을 엄청난 활약의 예고편에 불과했다. 두 번째 해인 1991년에도 17승, 1992년엔 18승, 1993년엔 또 18승을 기록하게 된다. 노모는 신인 때부터 입단 4년차까지 다승과 탈삼진을 동시에 석권하는 사상 초유의 대활약을 펼쳤던 것이다.
MLB에 불어 닥친 토네이도
노모의 미국진출에 대해 일본과 미국의 야구관계자, 팬 모두 그에게서 뛰어난 가능성을 보지 않았다. 실패한다는 의견만이 있었을 뿐이었다. 그의 성공을 점친 사람은 오로지 노모 본인과 LA 다저스의 구단주뿐이었다.
고국의 야구팬들마저도 비아냥거리던 그 어려웠던 시절. 하지만 노모가 그들의 불신과 편견을 깨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데뷔 첫해부터 마이너리그에서 적응기도 갖지 않았던 조그만 동양인 투수는 명문 다저스의 선발 마운드의 한 자리를 당당하게 꿰차고 토네이도 돌풍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꽈배기처럼 몸을 비틀어 던지는 특이한 투구폼, 어느 누구에게서도 볼 수 없었던 그 특이한 폼에서 나오는 폭포수처럼 떨어지는 포크볼에 세계최고의 야구선수들이 추풍낙엽처럼 쓰러져갔다.
1995년의 13승 6패, 방어율 2.54을 기록했다. 마이너리그도 거치지 않은 신인이 신인왕을 차지했고 사이영상 후보에까지 올랐다. 뿐만 아니라 올스타전 선발 투수로까지 활약하며 괴물 같은 거인들이 활약하는 바로 그곳에서 동양인 선수도 충분히 통할 수 있음을 증명해주었다. 야구는 더 이상 서양인들만이 잘하는 스포츠가 아님을 알려주었다.
95년 당시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게임이 있는데 노모가 17탈삼진을 기록한 무시무시한 경기이다. 당시 나의 느낌은 뭐랄까? 우리나라 프로야구에서 본 선동렬 이후에 한 명의 투수가 게임 전체를 지배하는 기막히는 원맨쇼를 보았다고 할까? 던지는 볼마다 헛스윙하며 맥없이 물러나는 MLB의 강타자들을 보며 난 전율했다. 그리고 노모라는 투수, 그 투수가 보여주는 최고의 원맨쇼를 보며 그에 대한 경외심마저 생길 수 있었다.
1996년에도 그의 활약은 거침없이 계속 되었다. 개막전 선발투수로 나와 완봉승을 거두었고 시즌 막바지엔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원정경기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하기도 했다. 참고로 콜로라도 로키스는 고지대의 희박한 공기 때문에 투수들의 무덤이라 불리는 곳이며 이 구장에서 노히트 노런을 기록한 것은 노모가 최초였다. 1996년엔 다저스 제1의 에이스로 맹활약하며 플레이오프에 진출시키기까지 했다.
노모의 활약은 1997년에도 이어졌다. 1997년엔 마이너 유망주였던 박찬호가 팀내 에이스급 투수로 급성장하여 박찬호와 함께 마운드를 이끌어나간다. 그러나 1997년 후반기에 뜻하지 않은 부상을 당하게 되었고 시즌 종료 후엔 선수생명을 거는 일대 모험을 하게 된다. 바로 팔꿈치 수술을 받게 된 것이다. 팔꿈치 수술을 받고 난 후에도 그는 투구를 계속 할 수 있었으나 이전의 위력은 전혀 없었다. 패스트볼의 위력은 말 할 것도 없었고 포크볼은 이미 수많은 타자들에게 간파 당한 상태였다. 결국 노모는 트레이드를 자청하게 되었고 다저스는 떠오르는 신예 박찬호가 충분히 노모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라 판단, 서둘러 그를 트레이드 시키게 된다. 그를 받아준 팀은 뉴욕 메츠. 이렇게 노모는 메이저리그에서 두 번째 소속팀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후 노모는 끝없는 비상과 추락을 거듭하며 보따리 장수처럼 미국 전역을 돌며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펼치게 된다.
양대리그 노히트노런의 영웅, 저니맨이 되다
다저스를 떠나 뉴욕 메츠로 둥지를 틀게 된 노모. 그러나 이때부터 그의 유랑자 야구인생이 시작된다. 부침을 거듭하는 그의 성적과 함께 소속 팀도 매년 옮기게 되었으니 1998년 메츠를 시작으로 이듬해엔 밀워키, 그 이듬해엔 디트로이트 타이거즈로 또 이듬해인 2001년엔 명문 보스턴 레드삭스에 입단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명문 보스턴 레드삭스에서 시즌을 시작하게 된 2001년. 시즌 개막 3연전 중 2차전 선발로 나서게 된 노모는 MLB 역사상 단네 번 밖에 없었던 대기록을 달성하게 된다. 바로 양대리그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한 네 번째 투수가 된 것이다. 이렇게 노모는 다시 화려하게 부활하였고 13승10패와 220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탈삼진 타이틀을 차지하게 된다. 그렇게 노모는 보스턴에서 화려하게 부활하였다.
2002년. 다저스의 마운드를 책임지던 박찬호는 텍사스 레인저스와 거액의 계약을 맺고 떠나게 되었고 다저스는 박찬호의 공백을 메워줄 투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보스턴에서 화려하게 부활한 노모를 다시 부르게 된다. 옛 친정팀으로 복귀한 노모는 2년 동안 대단히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모두의 기대에 부응하는 듯 했다. 2년 연속으로 16승을 거두었고 3점대 초반의 방어율을 기록하며 다저스의 에이스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러나 포크볼 투수의 치명적인 약점을 그 역시도 피해갈 수 없었다. 오랜 세월 포크볼을 던지다 보니 어깨가 망가질대로 망가진 것이다. 결국 2003시즌 종료 후 어깨수술을 받게 되었고 수술을 받은 후엔 전혀 예전의 위력을 찾지 못했다. 그렇게 망가진 2004년을 보낸 노모. 다저스는 미련 없이 그를 방출하였고 노모는 야구인생을 그만 둘 기로에 처해 있었다.
까마득한 후배인 이치로가 전 미국을 휩쓸며 이치로 열풍을 일으켰고 마츠이는 악의 제국 양키스의 일원으로 메이저리그 정상을 넘보던 그 때. 이치로와 마츠이에게 메이저리그란 정글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처음으로 제시해 준 일본 야구의 신기원을 이룩한 노모는 이제 또 다른 갈림길을 만나게 된 것이었다.
영웅(英雄)의 시대는 스스로에 의해서만 마감된다.
2004 시즌후 방출된 노모는 6번째 팀을 찾게 되었다. MLB의 가장 젊은 팀이며 가장 인기 없는 팀 중의 하나이고 성적도 항상 최하위권에 머무는 템파베이 데블레이스에 입단하게 된 것이다. 7번의 유랑생활과 6벌의 유니폼을 갈아입은 남자. 데뷔 첫해 미국 전역에 불었던 토네이도의 광풍을 기억하는 팬들은 그들의 영웅인 노모 히데오가 이렇게까지 파란만장한 야구인생을 펼칠 것이라 예상치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템파베이에 입단한 노모는 그의 전성기를 완전히 지난 느낌이었다. 5승 8패, 방어율7.24의 지극히 부진한 성적만을 남긴 채 시즌 중반에 퇴출 통보를 받게 된다. 다시 뉴욕 양키스의 마이너리그에서 뛰었고 2006년엔 시카고 화이트 삭스의 마이너 팀과 계약을 맺었으나 빅리그에 진출하진 못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모는 엄연한 현역이다. 베네수엘라 리그에서 그는 다시 한번 MLB의 문을 노크하고 있다. 비록 모든 이들이 더 이상 빅리그의 무대에서 노모의 모습을 볼 수 없을 것이라고 단언하고 있긴해도 말이다.
집착. 11년간 MLB 무대에서 뛰며 무려 123승이나 거두었고 신인왕 타이틀까지 받은 노모에게 그 나이에 더 이상 바랄 것이 또 뭐가 남았기에 그토록 MLB에 집착하는지 비판할 수도 있다. 혹은 미련, 과욕, 추한 욕심이란 말을 붙이면서 그를 비난할 수도 있다. 하지만 더 이상 바랄 것도 없는 나이에 그만한 기록을 세운 그가 지금도 빅리그의 문을 두들기고 있는 모습을 보며 꼭 집착이란 표현만으로 쓸 수 있을까?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야구에 대한 사랑과 정열이라고 부른다면 지나치게 윤색한 표현일까?
히데오. 한자로 쓰면 英雄. 그는 틀림없이 영웅이다. 동양인 최초로 메이저리그에서 성공하였기에 영웅이고 후배들에게 성공할 수 있다는 신념을 심어주었기에 그는 영웅이다. 그가 있었기에 한국과 일본의 수많은 야구 꿈나무들이 MLB 무대에 오르는 꿈을 안고 지금도 구슬땀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그들에게 분명한 목표의식을 갖게 한 그는 틀림없이 영웅이다. 그리고 영웅의 시대는 그 스스로만이 끝낼 수 있는 것이다. 그가 지금도 MLB를 떠나지 못하는 모습을 보며 미련, 집착, 과욕 등의 영웅과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를 써가면서 그를 비난해선 안된다. 우리는 분명히 기억한다. 노모 그대는 개척자였다고. 그대는 훌륭한 야구선수였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