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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자유와 공동체를 위한 ‘대안’은 가능한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5. 23. 22:59

자유와 공동체를 위한 ‘대안’은 가능한가

 

자본주의의 종말』 엘마 알트파터 지음 | 염정용 옮김 | 동녘 | 2007 | 364쪽 | 1만8천원
『신자유주의』 데이비드 하비 지음 | 최병두 옮김 | 한울 | 2007 | 288쪽 | 1만8천원

 

   
  Edvard Munch, Skrik,91 X 73.5cm, Oil,tempera. pastel on Cardboard, 1893.  
 

겉으로 보기에는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진단처럼 ‘역사의 종말’이 온 듯하다. 마치 자본주의가 역사의 최종 승자처럼 보이기도 한다.

 

1990년대 소·동구·중국의 붕괴 또는 전환 이후 그런 분위기는 더 커진다. 이제 더 이상의 역사적 ‘진화’는 없을 것처럼 선포된다. 치열한 경쟁에 노출된 ‘레드 오션’을 넘어 무한한 가능성을 보여주는 ‘블루 오션’이 무한정 펼쳐질 듯하다.

 

일국 시장을 넘어 세계 시장이 무한정 생명력을 발휘할 것처럼 선전된다. 지구의 한계도 기술로 또는 공학적으로 극복될 수 있을 것처럼 암시된다. 초국적 자본과 세계금융시장이 온 세상에 민주주의와 복지, 삶의 질 향상을 가져다 줄 것처럼 전망된다. 이제 자유, 경쟁, 무역, 세계화, 주식, 증권, 외환 등, 이 모든 것이 인류와 지구의 미래를 장밋빛으로 바꿔줄 것처럼 기정사실화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선 우울한 통계들이 쌓인다. ‘범지구적 빈익빈 부익부’다. 현 지구촌의 65억 인류 중 약 1/4이 하루 1달러 미만으로 살고 있고, 그 중 70%가 여성과 아이들이다. 또 약 20억 명의 전 세계 어린이 중 2억 5천만 명의 아동들이 학교도 못 가고 거의 ‘노예 노동’을 한다. 또 ‘매일’ 3만 명의 어린이들이 굶어 죽는다.

 

그리고 전 세계 농약의 80%가 후진국인 제3세계에서 사용되며, 농약중독 사고의 99%가 제3세계에서 일어난다. 세계은행의 추산에 따르더라도 전 세계적으로 7억에서 10억 명이 절대 빈곤 속에서 살며, 아프리카에서는 4명 중 1명이 영양실조에 고통 받는다. 남미에서는 8명 중 1명이 매일 밤 굶주린 채 잠자리에 든다. 아시아와 태평양 연안에서는 28%의 사람들이 자주 굶주리며, 근동 지역에서는 10명 중 1명이 충분히 음식을 먹지 못한다.


반면 상층부는 더욱 상층으로 올라간다. 데이비드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첨병인 미국에서조차 소득 상위층 1%가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0년 8% 정도에서 2000년 15%로 올랐다. 또 1970년 CEO의 소득은 노동자 30명분이었으나 2000년엔 노동자 500명분으로 늘었다. 영국도 마찬가지다. 상위 1%의 소득이 국민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1982년 6.5%에서 2000년 13%로 급증했다. 한편, 최부유국 사람 20%의 소득과 최빈국 사람 20%의 소득격차는 1960년대 30대 1에서 1990년 60대 1로 늘었고 1997년엔 74대 1로 늘었다. 게다가 갈수록 지구온난화, 이상 기후, 쓰나미, 가뭄, 홍수, 폭설, 폭우, 태풍, 허리케인, 사막화, 물 부족 등 생태계 파괴, 환경적 재앙의 징후들이 끔찍하게 다가오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가 진지하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런 것이다. 자유, 무역, 투자, 성장, 세계화 따위는 옳은데 그 ‘부작용’이 문제인 것인가, 아니면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인가? 그리고 그 문제들, 즉 앞서 나열한 통계치에 나타난 우울한 현실은 단지 기술 혁신이나 더 많은 경제 성장으로 해소될 수 있는 것인가, 아니면 그를 넘어서는 근본적 변화가 있어야 해결이 가능한 것인가?


데이비드 하비 교수와 엘마 알트파터 교수는 이구동성으로 신자유주의 내지 자본주의 자체가 문제이며, 이것은 단지 기술 혁신이나 경제 성장으로 해결될 성질이 아니라 단호히 말한다. 물론 두 교수의 분석 틀은 다르다. 하비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등장과 역할에 초점을 맞춰 상위 계급의 권력 회복 전략이 신자유주의로 나타났다고 본다. 또 그는 기존의 ‘착근된 자유주의(케인스주의)’때까지만 해도 생산성 및 노동의 재생산을 통한 자본 축적이 핵심이었지만, 신자유주의에서는 불균등 배분, 즉 ‘탈취에 의한 축적’이 핵심이라 본다. 결국 신자유주의와 그 계급적 이해관계에 대한 강력한 저항만이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본다.


반면, 알트파터 교수는 카지노 판에서 정점을 드러내는 신자유주의보다는 자본주의의 한계에 대해 집중 분석한다. 그에 따르면, 오히려 신자유주의가 내세우는 자유 시장과 그에 기초한 정책이야말로 자본주의의 종말, 나아가 역사의 종말을 더욱 앞당길 것이라 본다. 그에 따르면, 현 시스템은 유럽의 합리주의, 자본주의 사회 형태, 화석 에너지라는 ‘삼위일체’에 의해 작동하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화석 에너지의 고갈이라는 ‘외부 충격’으로 말미암아 시스템 전체가 붕괴할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이러한 사태에 현명하게  대비하기 위해서는 더 이상 ‘자본주의의 종말’을 부정하고 은폐할 것이 아니라 솔직히 인정하고 그 바탕 위에서 ‘신빙성 있는 대안’을 만들어나가야 한다.


2005년 9월, 태풍보다 무서운 허리케인 카타리나와 리타가 미국 남부 지역을 강타했을 때 수백만의 사람들이 자기가 살던 마을을 이탈하는 장면이 온 세계로 보도됐다. 마치 격렬한 전쟁이 일어났을 때 피난민들이 목숨만이라도 구하고자 서둘러 고향을 버리고 떠나는 장면과도 같았다. 그 직전인 2004년 12월엔 인도네시아와 태국의 해변가에 초강력 쓰나미가 들이닥쳐 수많은 생명과 희망을 앗아갔다.그런데 이러한 기상 이변이나 전쟁 상황 못지않은 또 다른 ‘비상사태’가 서서히 우리에게 다가오고 있다. 그것이 바로, 화석 에너지에 기초한 자본주의 사회경제 시스템의 종말이다.


『자본주의의 종말』을 쓴 엘마 알트파터는 바로 이런 시각에서 프랜시스 후쿠야마 류의 역사의 종말 테제나 밀턴 프리드만 류의 신자유주의 테제에 정면으로 반격한다. 즉 신자유주의와 신보수주의가 시장과 자유 무역을 내세우며 ‘더 이상 나은 체제가 없다’는 식으로 역사의 종말을 말하지만, 그것은 결국 “자기기만”이라는 것이다.


한편, 정치경제학과 지리학의 결합을 시도하는 데이비드 하비도 『신자유주의: 간략한 역사』에서, 신자유주의는 마치 ‘자유’라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숭상하지만 칠레, 미국, 영국, 중국, 한국 등에서 보듯 그 실제 작동에 있어 그것은 단지 시장의 자유, 무역의 자유, 송금의 자유, 소유의 자유, 이윤의 자유, 축적의 자유만을 의미한다고 지적한다. 하비에 따르면 신자유주의는 1980년대에 영국의 대처나 미국의 레이건이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이전인 1973년경부터 세계 제2차 대전 후 시기에 “착근된 자유주의” 즉 케인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강력한 패러다임으로 부상했다. 이러한 신자유주의는 기존의 축적 방식인 “노동의 재생산에 의한 축적”이 아니라 “탈취에 의한 축적” 방식에 따라 이루어진다.


따라서 새로운 부의 창출보다는 부의 불균등한 재분배가 심화한다. 특히 신자유주의는 개방화, 탈규제화, 민영화와 상품화, 유연화, 금융화, 위기관리와 조작, 국가재정의 재분배 따위를 통해 상위 계급이 케인스주의적 ‘계급 타협’의 시기에 양보했던 자신의 권력을 회복하거나 새로 형성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추진되고 있다. 신자유주의의 현실적 관철은 다양한 국내 세력 관계의 지형 변동과 더불어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국제적 세력 관계의 지형 변동에 따라 “지리적 불균등성”을 보인다. 예컨대, 1973년 칠레의 진보적 아옌데 정권을 전복하기 위한 피노체트의 쿠데타는 미국에 의해 조종된 것이었고 그 이후의 정책들은 대체로 신자유주의를 구현하는 것이었다.


1980년대 이후 영국이나 미국에서는 밀턴 프리드만 등 ‘시카고학파’가 중심이 되어 ‘공급(=기업) 중심의 경제’를 자국뿐만 아니라 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범지구적으로 강요하기 시작했고, 1990년대에 와서 소·동구 등의 전환기 국가에서는 물론 1996~7년경 아시아 외환위기, 2001년 9·11 사태를 계기로, 아프간 및 이라크 침공 이후 ‘구조조정’ 과정에서 신자유주의가 모든 국정 지표의 핵심이 된다. 한국에서는 이른바 문민정부 이후 ‘기업하기 좋은 나라’가 새로운 국정지표로 부상했다. 이것은 한편으로 상대적 진보 세력(엄밀한 의미에서 대체로 자유주의 세력)이 가진 ‘레드 콤플렉스’와 ‘눈치 보기’를 드러내는 것이었지만, 다른 편에서는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새로운 전략이라는 차원에서 객관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신자유주의와 더불어 고조되는 자본주의의 위기, 이와 연결된 지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전망은 무엇인가.


알트파터는 페르낭 브로델의 논지에 따라, 자본주의의 종말은 ‘외부의 격심한 충격’과 더불어 ‘신빙성 있는 대안’이 결합해야 한다는 주장에 동의하면서도 ‘내부의 모순’이 초래하는 동력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본다. 특히 유럽 합리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 사회 형태는 심각한 자기모순을 만들고 있다.

예컨대, 1974년 일본은 세계적 ‘오일 쇼크’ 속에서 인도네시아의 아체 지역(수마트라 섬 북단)에 묻힌 천연가스를 개발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에 318억 엔의 ‘공적개발원조’를 제공했다. 그 돈으로 건설된 천연가스 개발 공장은 그곳에 살던 사람들을 쫓아냈고, 채굴 현장과 정제 공장에서 나온 폐수와 배기가스 때문에 바다, 강, 논, 양식장이 오염되었다. 그로부터 2년 뒤, 자신들의 땅에서 내몰린 아체 사람들이 인도네시아로부터 독립을 호소하며 무장투쟁을 일으켰고 인도네시아 정부는 수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 유괴, 고문했다(다나카 유 외, 『세계에서 빈곤을 없애는 30가지 방법』, 알마, 2007). 설상가상으로, 2004년 크리스마스 무렵, 아체 지역은 지진과 쓰나미로 말미암아 무려 8만여 명의 주민들이 죽거나 고통을 당했다. 요컨대, 시장의 승리, 경제의 승리는 마침내 자연의 파괴, 사회의 파괴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제 기이한 역설이 일어난다. 자연의 파괴는 쓰나미 현상이나 지구 온난화와 같이 ‘자연의 역습’을 초래하기도 하고 이어 ‘자연의 한계’를 더욱 앞당기기도 한다. 예컨대, 철광석 등 다른 원료도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석유와 같은 화석 에너지의 종말이 바로 그것이다.


다른 편에서 ‘사회의 파괴’는 그 동안 대안처럼 보이던 국가 복지 체제의 환상을 갈수록 깨는 데 일조하며 나중엔 빈곤의 세계화, 불평등의 세계화, 불안의 세계화를 초래함으로써 마침내 ‘저항의 세계화’까지 불러내고야 만다. 게다가 “주주 자본주의나 카지노 자본주의에서는 투기거품의 낙원을 좇아 올라가는 경향이 심해지지만, 경기 침체의 심연으로 추락하는 경향 역시 높아진다.”


   
 

하루에 1달러 미만으로 생활하는 인구의 비율을 나타내는 세계 지도. 출처: 위키 미디어

 
 
나아가 글로벌 자본주의의 높은 수익률을 보장하기 위해 국가는 감세정책과 같이 하층에겐 불리하고 상층에겐 유리한 재분배 정책들을 강행하는데, “이 때문에 하위 계층도 자기 자신의 부담을 덜기 위해 금융 시장의 글로벌 메커니즘에 자극을 받아 남들의 이익을 탈취하는 데 관심을 갖게 된다.” 이것은 하위 계층이 가진 ‘존재를 배반한 의식’(홍세화)의 단면을 보여 준다. 그 바탕에는 한편에서는 시장과 자본의 위력이, 다른 편에서는 그에 굴복한 사람들의 내면화가 있다. “시장의 결속력은 너무나 엄청나기 때문에, 공식적인 자본주의 시장 경제에서 배제되는 사람들조차 시장 경제의 원리에 ‘걸려들고’, 등가성과 교환성의 사고 패턴과 행동 논리에 사로잡혀 있다.”는 지적은 그래서 타당하다. 그리하여 “국내의 계급투쟁은 식민지에서의 제국주의적 탈취 정책을 통해 무마될 수 있다.”는 세실 로드의 통찰을 곱씹어 봐야 한다.

 

요컨대, 글로벌 금융 시장의 위기, 조직화된 범죄, 돈세탁, 부패, 사기, 사회 양극화, 새로운 제국의 탄생 등 암울한 측면은 현대 자본주의의 내적 모순들이 첨예화되는 것을 보여주는 징후들이다. 데이비드 하비 교수도 신자유주의화는 부의 창출보다는 ‘탈취에 의한 축적’(민영화 및 상품화, 금융화, 위기 관리 및 조작, 국가 재분배)을 꾀하는 경향이 있어 자본축적 고양에는 별 다른 업적을 못 내고 있다고 본다. 불행히도 이와 연관하여 체제의 응집력을 위해 필요한 “도덕적 자산들이 약화”되며 “체제의 원동력이 둔화”(엘마 알트파터)된다. 이제 불안정이라는 ‘외부의 충격’이 추가되면 자본주의 체제는 파국을 향해 치달을 수밖에 없다. 바로 그 외부 충격은 알트파터에 따르면 ‘석유 시대의 종말’에서 온다.


데이비드 하비 교수는 행동주의적 대안과 이론주의적 대안이 있음을 지적하면서도 본인은 후자의 입장에 방점을 두고 있다. 물론 “다른 경로를 택한 사람들 간 대화를 통해 집단적 이해를 심화시키고 더욱 적합한 활동 노선을 정하는 것이 과제”임은 분명하다. 그는 ‘탈취에 의한 축적’에 저항하는 운동의 전형적 사례로 멕시코의 사파티스타 반란을 든다. 이는 전위주의 회피와 정당 거부, 권력 장악 거부 등에서 참신한 측면을 드러냄에도 신자유주의적 착취(탈취)나 계급 권력의 복원과 같은 거시정치적 역동성 문제, 계급투쟁의 문제는 여전히 미결이라 평가한다. “국민의 다수는 압도적이고 계속 증대하는 상위 계급 권력에 의해 규정되는 역사적·지리적 궤적에서 물러나거나 계급의 입장에서 이에 대응해야”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요컨대, 하비 교수는 인종, 성, 종족, 지역, 계급 등 다양한 차원을 아우르는 계급투쟁과 함께 자기결정권 또는 주권 회복과 같은 권리투쟁, 그리고 도덕적 반감을 넘어선 문화투쟁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하여 민주적 거버넌스의 구축 및 정치·경제·문화적 평등과 정의의 실현을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새로운 세상이 열린다.


이제 우리는 폭 좁은 ‘생존 경쟁’ 또는 ‘이익 추구’의 시각에서 벗어나 ‘인류의 생존’ 그 자체를 걱정해야 한다. 역설적이게도 ‘경제 성장’을 통해 인류의 행복을 구가하겠다는 발상은 “기름이 떨어지자마자” 끝장이 날 것이다. 알트파터 식의 ‘신빙성 있는 대안’ 모색이나 하비 식의 ‘(참된) 자유의 전망’에 관한 구체적 논의와 진성성 있는 실천이 절실하다. 과연 우리들 풀뿌리 민중은 시장의 논리나 국가의 논리를 넘어 자율, 자유, 자립, 자치, 자조, 평등, 평화, 공동체를 위한 ‘신뢰할만한 대안’을 창조할 수 있을 것인가.

 

 

출처:교수신문 강수돌 / 고려대·경영학

출처 : 나루터의 재미있는 경영이야기
글쓴이 : 나루지기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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