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말론과 핵문제
베드로후서 3장을 중심으로
Ⅰ. 서론
한국교회는 지난 몇년 전까지 소위 시한부 종말론에 관한 논쟁으로 홍역을 치른 바 있다. 특정한 날을 주의 재림의 날로 정해 놓고 큰 물의를 빚었었다. 그 특정한 날을 재림의 날로 여긴 근거는 성경의 해석으로부터 나왔거나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직접적인 계시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예언 아닌 예언은 공수표로 돌아가 버리고, 시한부 종말론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아닌 지도자는 사기 혐의로 투옥되는 사태에 이르렀다. 이 시한부 종말론 운동은 사실 특정 집단에게만 한정된 현상이 아니었고 한국교회 전체가 직접, 간접으로 참여한 것이었고 이 과정에서 한국교회가 양적인 성장을 이루는 데에 조금은 공헌하는 듯보였다. 그러나 이 운동이 공수표로 끝나는 바람에 그 부정적인 여파는 시한부 종말론을 명시적으로 설교하던 교회 뿐 아니라 한국교회 전반에 걸쳐 미치게 되었고, 작금의 한국교회가 살아 있는 메세지와 잇슈를 잃은 채
침체상태에 빠지도록 하는데 공헌하였다.
그후 한국교회에는 종말론을 강조하는 설교를 찾아 보기 힘들게 되었고 종말론은 한국교회의 신학과 삶에 있어서 뒷전으로 물러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현상임이 틀림없다. 왜냐하면 종말론적 환상은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의 핵심이었고, 초대 기독교교회를 탄생시킨 원동력이었으며 2천년 기독교교회의 근저에 깔려 있는 추진력이기 때문이다. 특별한 날을 재림의 시기로 설교하는 등 왜곡된 종말론이 성행한다고 해서 성서적이고 건전한 종말론을 아예 포기하는 것은 결국 기독교가 기독교이기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종말론은 신학의 여러 논제를 뒤에 잠깐 논하는 에필로그와 같은 것이 아니라, 신학과 신앙의 모든 잇슈들과 밀접하게 연관된 논제이며, 기독교 변증학이나 기독교 세계관의 정립에 있어 없어서는 안될 아킬레스건이기 때문이다. 종말론을 빼고는 기독교 신학은 무너질 수밖에 없으며, 기독교인의 삶의 의미와
소망도 사라지게 될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한국교회는 성서적인 건전한 종말론의 메세지를 회복하고 활력있게 그것을 전해야 할 것이다.
이 글의 목적은 이러한 견지에서 건전한 종말론을 향한 전망을 제시하는데에 있다. 특히 최근의 북한 핵문제가 남한 국민들 뿐 아니라 주변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위기감을 형성하고 있는데, 이것을 기독교인으로서 종말론적인 차원에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전망을 제시하는 것도 이 글의 목표이다. 이를 위해서 이 글은 베드로후서 3장의 본문을 중심으로 해서 이 본문이 주는 교훈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먼저 이 글은 재림의 시기에 대해서, 다음에는 재림의 양태에 대해서 본문이 무엇을 말하는가를 살펴보고, 종말론이 기독교인에게 가지는 실존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탐구한 후에 역사의 주인되시는 주권자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신앙이 창조나 구원의 문제뿐 아니라 종말론에서도 가장 핵심이 되어야 함을 밝히게 될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글은 핵전쟁의 위기 앞에 서 있는 기독교인의 각성과 소망과 확신의 이유를 천명함으로써 마치게 될 것이다.
Ⅱ. 재림의 시기
신약성경이 쓰여지던 초대교회 당시에는 그 세대가 끝나기 전에 주님이 다시오실 것이라는 신념이 확산되어 있었다. 그런데 세대가 지나가도 주님 이 재림하지 않게 되자 교회 내에는 많은 실망과 좌절이 생겨났다. 이 상황이 베드로후서가 쓰여지게 된 이유였다. 당시에 많은 기롱하는 자들이 나와서 주의 강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뇨. 조상들이 잔 후로부터 만물이 처음 창조 때와 같이 그냥 있다(4절)고 하면서 재림 자체를 부정 하게 되었다. 특정한 날이 주의 재림의 날이라고 하는 것도 문제이나, 재림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더욱 사악한 문제이다.
이에 대한 사도 베드로의 답변은 두가지였다. 첫째,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8절)는 것이며, 둘째는 재림의 연기의 유일한 이유는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라(9절)는 것이었다. 인간의 좁고 짧은 전망으로는 더딘 것같지만 하나님의 신비한 뜻과 경륜의 전망에서 볼 때에는 더딘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요, 인간편에서 볼 때에 재림이 더디 오는 것은 회개의 기회가 된다는 뜻이다.
종말론에 있어서 재림의 시기에 관한 문제는 기독교인의 가장 큰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논제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 당연한 일일 것 이다. 그러나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는 우리 주님이 친히 천명하신 말씀이 너무도 분명하게 우뚝 서 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 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태 24:36). 재림의 시기는 성부 하나님만의 주권적인 권한에 속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존재인 천사가 모르는 일일 뿐 아니라 성자 하나님 조차도 모르는 일이라고 선언되고 있는 것이 재림의 구체적인 시기이다. 삼위일체의 영원한 신성 안에서 성자 하나님 조차도 재림의 시기에 관한 문제에 관하여는 성부 하나님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재림의 특정한 시기는 성경에도 계시되어 있지 않다고 보는 것이 논리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특정한 날이 재림의 시기라고 주장하는 것은, 천사도 모르고 예수님
도 모르지만 나는 특별한 성경의 영해의 능력이 있거나 특별한 계시의 능력이 있어서 안다고 주장하는 신성모독적인 처사라고 아니할 수 없다.
8절에서 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씀도 재림의 시기에 관해 하나님의 주권을 선언하고 있는 것이며, 10절에 있는 것처럼 성경에 계속해서 나오는 재림의 시기에 관한 사상은 재림이 도적같이 온다는 것이다. 어떤이는 재림이 회개치 않은 자에게는 도적같이 오지만 회개한 자신에게는 하나님이 도적의 방문시기를 알려주었다고 주장하지만,
이것은 성경을 억지로 혹은 교묘하게 풀거나(16절) 미혹에 이끌린 무법한자(17절)의 예라고 하겠다. 기독교인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림이 온다는 것이지 언제 온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2천년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재림의 날을 설정하는 일은 수없이 있어 왔다. 그리고 그때마다 그날은 몇십년 혹은 몇 백년이 아닌 몇 년후 혹은 몇달 후의 날을 설정하는것이 보통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한국교회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백년 남짓한 한국교회사에 수많은 재림의 날이 예언되었고 빗나갔었다. 문제는 천년 전에도 그 당시가 재림의 때라고 했고, 오백년 전에도 그 당시가 재림의 때라고 주장했으며, 지금도 지금이 재림의 때라고 선언하는 데에 있다. 그러한 주장의 근거는 하나님의 직통 계시의 일부 경우를 제외하면 모두 성경의 해석-오해-으로부터 나왔다고 주장된다.
한 예를 들면 마지막 때에는 많은 사람이 빨리 왕래한다는 말씀(다니엘 12:4)을 가지고 지금이야말로 재림의 때라고 단언한다. 그러나 이 귀절은 주의 재림을 향한 역사의 방향을 우리에게 제시해주지만 언젠가 재림의 때라는 데에 대해서는 일체 함구하고 있다는 것을 한번만 더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다. 이 귀절을 놓고 바퀴가 발명된 때에는 그 때가 재림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며, 자동차가 발명된 때에는 더욱 확신을 가지고 재림이 지금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을 것이며, 비행기나 우주선을 발명했을 때는 이번에야말로 틀림없는 재림의 때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귀절은 인류의 역사가 왕래가 점점 빨라지는 방향으로 나아간다는 것을 말해 주지만, 얼마나 빨리지면 종말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만약 인류가 빛에 가까운 속도로 왕래가 빨라지면 종말이 온다고 기록되 었다면, 정말 인간이 빛의 속도로 나는 우주선을 발명할 때 이제는 재림 이 왔다고 말할 수 있겠으나, 성경은 그냥 왕래가 빨라진다고 말하고 있을뿐이다. 왕래가 빨라지는 과정에서 지금이 마지막 단계인지 아니면 아직 초보적인 시작 단계인지 우리는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예는 그외에도 무수히 많다. 말세에는 처처에 전쟁의 소식이 있다고 되어 있는데, 역사상 이 경우에 가장 가까운 시기가 있었다면 그것은 제1차, 제2차 세계대전의 시기이지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한 때는 이스라엘이 건국된 지 한 세대가 지나면 말세가 온다고 하여 이스라엘이 건국한 1948년에서 40년을 더하여 1988년이 말세라고 했으나 이것이 빗나가자, 한 세대는 40년이 아니라 50년이므로 1998년이 말세라고 주장하기 에 이르렀다. 유럽공동체가 회원국이 9개국일 때에는 용의 열개의 뿔의 상징을 들고 나와서 유럽공동체의 10개국이 될때 종말이 온다고 했으나 지금은 12개국이 된 상태이다. 공산주의가 말세를 가져 올 어떤 사건으로 얘기됐었으나 지금은 공산주의가 거의 완전히 몰락된 상태이다. 그외 에도 수많은 종류의 이러한 사례들은, 주님이 재림의 시기는 인간 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가리워져 있다고 함으로써 원천적이고 범주적으로 불가능 했던 일을 가지고 논하는 것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하나의 난센스요 스캔들에 불과하다. 이러한 일들은 본문 16절에 있는 대로 무지 때문에 생긴 일이며, 17절에 있는 대로 무지는 자신의 욕망과 악의에 의해 미혹되었기 때문이다. 학력고사를 잘못 치룬 학생이 이번에도 시험지 유출사고로 인해 시험 자체가 무효로 되었으면하고 바라는 경우처럼 기독교인이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역사에 대해 그런 태도를 갖는 것은 경건하지 못한 일이다.
재림의 시기에 관하여 8절은 커다란 교훈을 주고 있다. 재림이란 주의 나라가 임하는 것인데, 주의 나라가 임하는 시간은 산술적인 시간보다는 실존적인 시간이 중요하다고 암시하고 있다. 산술적으로는 어찌됐건 우리가 초대교회 교인들보다 재림에 더욱 가까이 있다. 그러나 실존적인 의미에서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보다도 초대교회의 기독교인들에게 더욱 가까이 있는 것이다. 우리는 실존적 차원에서 하늘나라가 오늘 임한것처럼 살아야한다. 나의 마음과 인격 속에, 나의 가정과 교회와 국가 안에 주님의 뜻이 이루어 질 때 하늘나라는 우리에게 가까이 온 것이다. 물론 객관적이고 역사적인 차원에서 재림이 온다는 차원을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그것이 언제 올 것이냐는 처음부터 우리의 한계밖에 있는 일이므로 우리는 긴박감 속에서 살지만은 꼭 임박했다고 믿어야 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재림의 날이 오늘인것처럼 산다. 그러나 아무도 그날이 오늘이라고 선언할 수 있는 자는 성부 하나님 밖에는 아무도 없다.
Ⅲ. 재림의 양태
재림의 시기와 함께 기독교인의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 일으키는 것은 재림의 양태이다. 주의 재림시에는 지구에 대변혁이나 파멸이 올 것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대변혁의 양상은 어떠할 것이냐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핵전쟁이나 기상이변에 의해 이루어 질 것인지 혹은 혜성의 지구 충돌에 의해 일어날 것이냐에 대한 논란이다. 또한 재림시에 소위 휴거가 있
게 될 것인지 아닌지, 있다면 주님의 재림전에 있을 것인지 혹은 후에 있을 것인지 등에 관한 예상과 예측들이다.
최근에는 컴퓨터의 급속한 발전으로 인해 계시록에 나오는 짐승의 숫자인 666과 관련하여 많은 시나리오들이 그려지고 있으며, 냉전체제하에서의 핵무기의 거대한 축적으로 인해 핵전쟁에 의한 인류의 파멸에 대한 공포가 높아지고 있다. 특히 핵전쟁과 관련하여 본문 10절이 커다란 관심의 초점이 되고있다.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라고 10절은 기록하고 있다. 12절은 다시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체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라고 쓰고 있다. 이 귀절들은 특히 소위스타 워즈(star wars)와 관련하여 미사일로 쏘아 올린 핵탄두를 인공위성으로부터 레이저 광선으로 요격하여 공중에서 핵폭발이 있게 될 상황을 극적으로 묘사한 것으로 여겨져서 더욱 큰 관심을 끌게 되었다.
종말론에 관한 사항은 기독교 신학의 여러 논제들 중에 가장 어렵고 애매한 부분이다. 종말에 관한 성경의 예언은 가장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용어들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가 지금 컴퓨터라든가 핵전쟁을 성경에 투영하여 해석하고는 있지만, 성경은 결코 핵이나 컴퓨터라는 명시적인 용어를 쓰고 있지 않다는 데에 문제의 어려움이 있다. 예언이라는 것이 원래 그러한 성격을 지니고 있어서 막상 예언된 사건이 일어나야 그 예언의 뜻이 분명히 밝혀지게 마련이고, 어차피 이런식으로 밖에는 종말에 관해 논할 길이 인간에게는 없으며, 기독교인이 종말에 관해 생각하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감안할 때, 본문 10절과 12절을 핵전쟁과 관련시켜 해석해 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 하겠다.그러나 이러한 종말에 관한 예언의 해석은 그렇게 될 가능성을 논할 수는 있으나 누구도 단정적인 확신을 가지고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수많은 단정적인 해석이 틀려왔으며, 이번의 해석이라고 꼭 맞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본문 10절과 12절이 핵전쟁에 의한 인류의 파멸을 예언하고 있다고 단정적으로 해석할 수 없는 것은 그 귀절들이 다른 방향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길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에 더욱 그러하다. 최근에 우리는 목성에 몇개의 혜성들이 충돌하는 장면을 뉴스를 통해 보았다. 목성이 태양계에 가장 큰 혹성이기 때문에 그 수 차례의 충돌을 견디어 냈지, 만약 그 혜성들이 지구에 충돌했더라면 지구는 산산조각이 나서 흔적도 찾아 볼 수 없었을 것이라고 우리는 듣고 있다. 실제로 지구에는 혜성이 충돌한 흔적이 많이 있으며, 공룡시대를 마감하게하고 공룡들을 일시에 전멸시킨 사건은 커다란 혜성의 지구충돌일 것이라는 것이 가장 지배적인 의견이다. 그러므로 10절과 12절이 묘사하는 사건이 핵전쟁일 수 있는 가능성은 분명히 존재하지만, 그것이 다라고 단정한다는 것은 우리의 오만이라고 할 수 있다. 10절과 12절은 혜성충돌에 의한 지구파멸을 생각해 보아도 아주 극적으로 들어맞는 귀절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재림의 양태에 관하여 일반적인 힌트를 많이 주고 있지만 어떤 사건을 확정적으로 지시하고 있지는 않다. 성경은 종말이 자연과정에 의해 일어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직접적인 개입에 의해 획기적으로 일어날 것으로 묘사한다. 그러나 주의 재림에 의해 오게 될 새 하늘과 새 땅은 재생이지 창조의 파멸이나 재창조로 그리고 있지는 않다. 성경은 재림이나 종말사건이 전쟁이나 부모에 대한 거역 등의 상징으로 대변되는 인간의 도덕적 부패와 탐욕에 의해 야기될 것으로 그리고 있는 반면 지진이나 기근과 같은 상징으로 대변되는 자연적인 재앙에 의해 올 것으로도 묘사한다. 핵전쟁은 전자에 해당되는 것이며 혜성의 충돌은 후자에 해당된다. 환경오염과 자연파괴에 의한 오존층의 파괴에 의한 종말을 그리는 것은 전자와 후자가 결합된 경우이다. 성경은 인류가 지식이 증가하고 왕래가 빨라지는 등 물질적인 풍요를 향해 가는 것처럼 보이나, 결국은 인류의 탐욕과 교만과 부패로 인해 전쟁이나 환경파괴와 같은 파멸의 길을 가게 될 가능성을 그리고 있다. 인류의 이러한 죄는 결국 대지진이나 혜성충돌과 같은 대변혁과 재앙에 의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될 것을 성경은 말한다. 그러나 예상되는 이러한 일반적인 방향성을 넘어서서 단정적으로 어 떤 사건을 설교하는 것은 결국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에 득보다는 실이 더 많은 일이다.
재림의 시기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재림이 올 것이라는 것이 일차적인 것이며, 재림이 어떻게 올 것이냐하는 문제는 하나의 해석에 불과하다는 단서를 꼭 붙여서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 기독교 신학계는 아직도 종말이 인류의 상황이 점점 좋아지다가 올 것인지, 점점 나빠지다가 최악의 상태에 올 것인지 조차도 확정하지 못하고 있다. 전자가 후천년설이고 후 자가 전천년설의 전망이나, 이에 대해서는 신학계의 의견이 갈리고 있는 것이다. 그만큼 종말에 관한 예언은 억지로 혹은 교묘하게(16절) 풀어서 는 안되는 것이며, 우리는 항상 피조물로서의 한계를 인식하는 겸손을 지녀야 한다. 중요한 것은 종말에 관한 메세지가 오늘을 사는 기독교인에게 주는 의미를 생각하고, 어떻게 주의 재림을 준비할 것이냐하는 문제이다.
Ⅳ. 종말론과 기독교인의 삶
성경에 기록된 종말에 관한 예언중에서 기독교인의 윤리적 순결과 헌신을 향한 권고와 관련되지 않은 귀절은 거의 없다. 종말에 관한 예언은 모두 종말에 심판이 있음으로 경성하여 깨어서 윤리적으로 흠없이 살 것을 경고하거나, 환난과 핍박 중에서도 주의 재림을 바라보며 소망가운데 거룩한 삶의 태도를 굳세게 지킬 것을 권고하는 것들이다. 예언이란 우리가
말씀에 순종하면 하나님이 자신의 진노를 거둘 것이며, 계속 죄 가운데 거하면 이러 이러한 진노의 심판이 있게 될 것이라는 일종의 언약이다. 우리가 어떻게 이 말씀에 반응할 것이냐에는 상관없이 이러한 일이 이러한 때에 일어날 것이라는 일종의 순수한 점치는 행위는 예언이 아니다. 본문 10절과 11절에서도 그 날에는 이렇게 될 것인데,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간절히 사모하라고 권고하고 있다. 14절에서도 이와 같은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면서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고 권면하고 있다. 재림에 관한 최대의 강조점은 재림의 시기나 양태가 아니라, 재림을 바라보면서 윤리적인 순결을 지키라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세지를 요약하는 마태복음 4장 17절도 역시 천국이 지금 가까왔느니라가 아니라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왔느니라였다.
초대교회에서 기대했던 것보다 재림이 지연된 이유와 그 후 2천년 동안 재림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유는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기(9절)때문이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에 대해 성경의 일관된 해석은 회개의 기회를 주시기 위함이다(요엘 2:12~13; 요나 4:2; 로마2:4). 또한 종말에 관한 성경의 메세지는 기본적으로 소망 을 주기 위함이지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은 죄인에 대한 심판의 경고와 의인에 대한 소망의 위로를 함께 담고 있으나, 항상 후자가 전자 보다 승하다. 어차피 인류의 역사는 무의미와 허무와 대결과 죄악으로 물들어 있다. 재림에 대한 성경의 메세지는 이러한 상황속에서 새 하늘과 새 땅에 대한 소망의 복된 소식인 것이다. 어둡고 부정적인 것 보다는 밝고 긍적적인 것이 항상 일차적인데, 오늘날 교회의 종말에 관한 메세지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13절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의 거하는 바 새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윤리적인 순결이나 도덕적인 공의의 문제가 종말론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음을 살펴 보았는데, 윤리나 도덕이란 항상 인간 편에서의 자유로운 반응이 논리적으로 전제되어 있다. 인류의 역사는 인간의 반응에 따라서 좌로 갈 수도 있고 우로 갈수도 있는 가능성이 둘 다 항상 열려 있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입장임을 주지해야 한다. 즉 역사는 개방되어 있다는 것이다. 핵전쟁의 위협이 상존하고 있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며, 따라서 인류가 회개하지 않으면 핵전쟁으로 파멸할 가능성은 직접적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주인이신 인류의 역사에는 인류가 회개하고 화해하며 핵무기를 모두 제거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열려 있는것이다. 그 가능성이 아무리 희박해 보인다 할찌라도 말이다. 인류가 이대로 자원을 낭비하고 환경을 오염시키면 생태계의 파괴로 인해 지구의 모든 생물과 함께 인류는 멸망할 수밖에 없는 길을 인류는 이미 들어섰다. 그러나 인류가 그 길을 돌이켜 각성하고 창의력을 발휘하여 새로운 에너지원을 만들어내고 다함께 힘을 합쳐서 노력하면 지구와 인류를 구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것이다.
이 점이 현재 교회가 이 세상에 전해야 할 메세지의 핵심이 되어야 한다. 이기적인 시한부 종말론 등으로 고립주의에 빠져서도 안되며, 이데 대한 냉소적인 반응으로 재림 자체를 부정하고 부도덕과 쾌락주의에 빠져서도 안된다. 건전한 종말론과 우리에게 주는 교훈과 교회가 세상에 주어야 할 교훈은 바로 이러한 개방된 역사관이다.
Ⅴ. 종말론과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
전능하신 천부 하나님이 우주를 창조하셨고, 그분이 우주와 인류의 역사를 보존하시며 주관하시고, 그분이 우주의 역사를 완성하신 것이라는 사상은 기독교세계관의 핵심이다. 이 전능하신 하나님이라는 신관은 기독교 신학의 창조론이나 신론이나 구원론등에서 가장 핵심적으로 중요한 관념일 뿐 아니라 종말론에서 더욱 필요하고도 요청되는 개념이다. 그런데
교회내의 일부 종말론의 경우에는 마치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 사탄이 주인인 것 같은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은 유감이다. 그러한 종말론에서는 하나님은 온데 간데 없고 사탄만이 인간의 역사를 좌지우지하 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은 기독교세계관과는 가장 정반대가 되는 이원론적인 세계관과 오히려 가까운 것이다. 본문 5절도 말세에 기롱하는 자들은 하늘이 옛적부터 있는 것과 땅이 물에서 나와 물로 성립한 것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함이로다라고 말함으로써 종말론에 관련하여 창조주요 보존주요 완성주 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을 선포 하고 있다. 인간은 지구나 인류가 생존하고 있는 것을 너무도 당연시한 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나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며 기적에 해당된다고 보아야 한다.
인간이라는 유기체가 지구상에서 생존해 나가는 데에 있어서 우주나 지구의 수많은 조건들 중에서 하나라도 삐끗 하면 인류는 멸망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핵문제를 굉장하게 얘기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도 지구가 멸망할 수 있는 이유는 수없이 많다. 셀 수 없는 혜성들이 우주를 떠돌고 있으며 수많은 별들이 오늘도 태어났다가 죽어가고 있다. 지구의 자전이나 공전의 궤도가 1도만이라도 오차가 나면 인류는 타 죽거나 얼어 죽는다. 인류가 오늘날까지 살아 있는 유일한 이유는 오직 전능하시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나님 때문이다. 오직 이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는 것이 기독교인이다. 이 하나님에 대한 계시와 신앙이 우리가 기독교인이 된 핵심적인 이유이며, 이 하나님에 대한 전망은 역시 기독교 종말론의 근저에 깔린 기초이다. 종말을 얘기하며 주의 재림을 선포하는 기독교인은 주님이 언제 어떻게 오시느냐 하는 것에 대한 어떤 이론과 억측을 설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이 전능하신 하나님, 역사의 주인 되시는 인자하신 하나님을 선포하는 것이다.
Ⅵ. 결론:종말론과 핵문제
우리는 핵문제가 인류의 파멸을 가져올 수 있는 위협적인 문제임을 살펴 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가 안고 있는 유일한 문제는 아니며, 베드로 후서 3장 10절이 꼭 핵전쟁을 말한다고 확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는 것을 보았다. 냉전체제 하에서는 핵전쟁에 대한 공포가 인류의 간담을 서늘하게 해왔으나 지금은 심리적인 공포심이 감소한 느낌이 든다. 그러나 이 위협은 결코 사라진 것은 아니다. 구 소련은 3만개 이상의 핵탄두를 만들 만한 플루토늄을 보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인간의 미래는 개방되어 있으며, 핵문제의 위협이 현실화될 것이냐 하는 문제도 인류의 반응에 개방되어 있다고 해야 함도 살펴 보았다.
최근의 북한의 핵문제는 지구의 파멸과 관련시켜 생각하기 보다는 한 나라의 생존문제와 관련된 문제이다. 핵폭탄 몇 개로 지구가 파멸되지는 않는다. 물론 북한의 핵개발이 연쇄적인 반응을 일으켜서 핵전쟁의 성격이 세계대전의 기폭제가 될 수도 있다. 어떤 일이라도 일어날 수 있는 인과 관계의 요인들은 무수히 많다. 그러나 일어나지 않을 수 있는 요인들도 항상 없지는 않다. 핵문제가 아니라도 인류의 멸망을 가져올 수 있는 요인 들은 많다. 그 가운데서 우리 기독교인은 오직 살아계신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고 소망하며, 열려진 역사 앞에서 하나님이 맡기신 책임을 다하기 위해 헌신하면서 주 앞에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쓴다. 우리는 오직 소망 가운데 기다리며 기도한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
이상배/침례신학대학교 교수
출처 :예수가좋다오 원문보기 글쓴이 : (일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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