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마이뉴스 김태경 기자]
그러나 이런 속설을 깨뜨린 집안이 있다. 경주 최부잣집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최부잣집은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정무공 "최진립"부터 시작해 마지막 "최준"까지 12대에 걸쳐 부를 이었다. 마지막 최부자인 최준의 9대조인 "최국선" 때 부가 정착된 것이 확실하기 때문에 이 때부터 계산하면 10대를 이어왔다. 그렇다면 최부잣집이 이렇게 300년간 부를 이어온 비결은 무엇일까? 그 비밀은 바로 이 집안 가훈에 들어 있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은 하지 마라 ▲재산은 만 석 이상 지니지 마라 ▲과객을 후하게 대접하라 ▲흉년기에는 땅을 사지 마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후 3년 동안 무명옷을 입어라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악착같은 "재산늘리기"가 아니라 오히려 "나눔의 정신"에 충실했다고 할 수 있다. 요즘말로 하면 기업의 사회적 책임에 철저했던 것이다.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을 하지 마라"는 것은 양반으로서의 기본적인 교양을 갖추되 벼슬길에 나아가 당쟁에 휘말리지 말라는 뜻이다. 현대적으로는 철저한 "정경분리"로도 해석된다. 정치권과 경제계가 불법대선자금 문제로 홍역을 치르고 있고 한국경제의 근본적인 문제 가운데 하나가 "정경유착"이었다는 점에서 최부잣집의 가훈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경영학박사로 대구가톨릭대 경영학과 교수를 지낸 전진문씨는 최근 "경주 최 부잣집 300년 부의 비밀"(황금가지 )이라는 책을 펴냈다. 단지 최부잣집이라는 과거의 한 집안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현대 경영학적 관점에서 최부잣집 300년 부의 비결을 풀어 해석했다. 전씨는 <오마이뉴스>와의 전화통화에서 "지난 9일 출판 된 이 책의 반응이 상당히 좋다"며 "아마도 최 부자의 후덕 때문인 것 같다"고 겸손해 했다. 저자 전씨는 1947년 대구에서 태어나 영남대 경제학과 및 같은 대학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79년부터 2003년 8월까지 대구가톨릭대학교 경영학과의 교수로 재직했다. <회계이론>을 공저로 발간했던 전 씨는 지난해에 대구에 있는 경일약품(주)의 이사로 자리를 옮겼고 아직도 대학에서 강의를 계속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최근 저자 전씨와 이메일 인터뷰를 통해 최부잣집이 현대 한국기업들에게 시사하는 메시지를 받아봤다. 전씨는 "글로 얘기하면 되지 굳이 기사에 얼굴이 나올 필요는 없다"며 한사코 자신의 얼굴이 게재되는 것을 거부했다. 다음은 전씨와의 인터뷰 전문. - 지난 3월9일 처음 책이 출판되었는데 독자들의 반응은? "책이 나오자 언론에서 관심을 많이 가져줘 나도 놀랐다. 전국의 각 주요 신문과 방송에서 책 소개를 해주고 관심을 기울였다. 최 부자의 후덕 때문에 독자들의 반응이 제법 좋은 것 같다." (이 책을 펴낸 출판사 "황금가지" 관계자는 "출판된 지 20일 정도 지났는데 벌써 3쇄 1만부를 찍었다"고 밝혔다.) - 경주 최 부자에 관한 글이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인가? "경북 교육위원회가 펴낸 "내 고장 경상북도(역사편),1981"라는 책, 최해진(1997,1998) 교수의 논문 3편과,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고문서집성", 조용헌 교수의 "명문가 이야기(2002)" 등에서 최부잣집에 대해 언급하기는 했지만 단행본으로 나온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 경주 최 부자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 계기는? "10년 전쯤 대구에서 발간되던 계간 교양지 <나눔터>의 주간을 맡고 있을 때 한학자인 고 이수락 선생이 경주 최 부자의 가훈에 대해 기고한 글을 보고 감동을 받아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다." - 경주 최부잣집이 10대에 걸쳐 부를 이어올 수 있었던 비결을 간단히 설명하면? "이 가문에서 내려오는 독특한 철학의 표현인 가훈을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간단히 요약하면, 청백리의 후예로서 "청렴성과 근면성"을 바탕으로 부를 축적하는 과정에서의 "도덕적 정당성"이 있었고, 이웃을 생각하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사랑 정신 또는 공동체 정신"을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 "과거를 보되 진사 이상의 벼슬은 하지 말라"는 최부잣집 가훈에 대해 현대적으로 보면 "정경분리 정신"이라고 높게 평가했는데… "조선시대 진사는 벼슬이 아니고 일종의 양반 입문 자격시험이다. 즉, 학문을 하되 벼슬을 목표로 하지 말고 양반으로서의 기본 자격만 갖추라는 것이다. 벼슬을 하게 되면 당쟁에 휘말리게 되어 그 부를 오래 지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농사를 가업으로 하는 사람이면 농사만 열심히 지으면 되고 사업을 하는 사람이면 사업만 열심히 하면 될 일이지 벼슬길에 나가지 않는다는 뜻이므로 오늘날의 정경분리와 일맥상통한다고 본 것이다."
""만 석 이상을 하지 말라"는 가훈은 참으로 절묘한 원리를 담고 있다. 이 말은 생산을 만 석 이상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1년의 소작료를 만 석 이상 받지 말라는 뜻이다. (소작료를 만 석으로 한정지으면)최 부자의 땅이 자꾸 넓어질수록 개별 소작인들의 부담은 줄어들기 때문에 그들의 형편이 좋아진다. 이렇게 "적정한 수준"에서 만족함으로써 소작인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와 협조를 얻을 수 있었기에 최부잣집이 오래 버틸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 한마디로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자는 말씀이군요. "오늘날 거의 모든 기업이 "극대 이윤"을 추구하지만 이렇게 해서는 구성원들의 만족을 이끌어내기가 어렵다. 보다 긴 시간으로 보면 어느 것이 더 많은 이윤이 되는지는 생각해볼 문제다. 즉, 해마다 1만석씩 거둬 300년을 버티면 총 수입이 300만석이다. 만약 욕심을 부려 한 해 2만석씩 거둬들여 100년을 갔다 해도 결국 총 수입은 200만석에 불과해 "소탐대실"이 되고 만다." - "흉년에 땅을 사지 말라"는 가훈도 있던데… 요즘처럼 인수·합병이 활발한 현대 자본주의에서 기업이 싸게 나올 때 사는 것을 합리적인 경영활동으로 본다. "물론 오늘날의 기업은 상대방의 약점을 최대한 이용하여 전략적으로 인수·합병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인수·합병 당하는 많은 구성원들에게 엄청난 고통이 따르게 되고, 또 거꾸로 공격을 받게 될 수도 있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특히 과거의 농업중심 사회에서는 "흉년에 땅을 사는 일"은 나중에 원한을 사게 될 수 있다. 흉년이 들면 땅을 팔려고 내놓은 사람이 많아 재산을 증식하기가 쉬웠다. 그러나 최 부자는 남의 약점을 이용해 재산을 늘리지 않아 이웃 백성들로부터 미움을 사지 않았던 것이다." - "사방 백 리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가훈은 요즘말로 하면 역시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사방 백 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말은 오늘날의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한 것이다. 어떤 사업이라도 종업원, 지역사회, 국가의 구성원의 협조 없이는 이룰 수 없기에 지역주민을 위해 베푼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하기는 쉽지않다. "백 리"라고 한 것은 당시 도보로 하루에 왕복할 수 있는 거리가 그쯤 되었고, 또 최 부자의 땅이 그 정도까지 군데 군데 있었기 때문으로 본다. 최 부자는 이 범위 내에 있는 사람들을 공동체로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마름은 부재지주들이 재산을 관리하기 위해 둔 중간 관리자다. 그런데 이 마름에게 상당한 권한을 부여해줬기 때문에 마름의 횡포는 극심했다. 그런데 최 부자의 경우 재지(在地) 지주로서 그 지방에서 같이 살면서 직접 관리해 마름의 횡포가 없었다는 점에서 소작인들의 호응을 받았다." - 최부잣집에서는 노비에게도 제사를 지내줬다고 하는데… "최 부자의 가문을 일으켜 세운 정무공 최진립(1568~1636) 장군의 노복으로 "옥동"과 "기별"이란 사람이 죽을 때까지 주인을 위해 충성을 바쳤기에 후손들이 오늘날까지도 제사를 지내주고 <충노불망비>(忠奴不忘碑)를 세워줬다. 조선시대의 상황으로 보아 노비에게 제사를 지내주는 것은 참으로 파격적인 일로 부하 사랑이 극진했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주인이 노비를 인간적으로 대해줌으로써 하인은 더욱 주인을 따르고 최선을 다하여 가업이 더욱 번창했으리라고 생각된다." - 최부잣집은 일제 시대 독립운동 자금도 지원했다는데…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은 일제 시대에 부산의 지사 기업인 백산 안희제가 세운 백산상회에 출자하고 사장으로 취임해 이 회사를 근거로 상해로 독립자금을 보냈다. 이 일로 최준은 두 번에 걸쳐 일경에 잡혀가 고초를 당했다. 최준은 해방 된 뒤 남은 재산을 모두 털어 현재 영남대의 전신인 민립 대구대학을 설립했다." - 조선 말에 보면 경주 최 부자를 비롯해 각 도마다 1만석 이상의 유명한 부자들이 있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조선시대에 1만석 이상의 부자들은 여럿이 있었지만 오래 지킨 사람은 드물다. 조선 말에 서양 문물이 들어오고 새로운 산업이 몰려오면서 갑작스럽게 큰 부자가 된 사람들은 많이 있다. 그러나 대체로 몇 대 가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인 걸로 알고 있다." - 최부잣집 후손 가운데 현재 살아 있는 마지막 인물은 누구인가? "마지막 최 부자인 최준의 손자이자 주손인 최염 선생(72)이 현재 경기도 용인 수지에 살고 있으며 아들인 최성길씨는 지금 판사로 재직중이다." - 경주 최 부자 말고 혹시 한국 역사상 기록할 만한 또는 존경할 만한 부자가 있나? "남강 이승훈 선생, 백산 안희제선생과 유한양행의 유일한 선생도 참으로 존경할 만한 부자다." - 결론적으로 최 부자의 300년 부의 비밀을 요즘 현대적으로 설명하면 "윤리경영"이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 "윤리경영"이야말로 기업을 오래 지키는 비결이라 말할 수 있다. 최 부잣집은 조상의 훌륭한 가훈을 받들며 300년 동안 부를 지켜오다가 마지막에는 참으로 가치 있는 일(대학교 설립)에 전 재산을 기쁘게 버리고 빈손으로 돌아가 평범한 시민이 된 것은 아주 훌륭하다." /김태경 기자 (gauzari@ohmynews.com) |
출처 : 가을하늘의 자그마한 보금자리
글쓴이 : 가을하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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