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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고려 장군이 내시가 된 까닭은?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8. 17. 07:56
  • 전장을 호령하는 장군과 궁궐 깊숙한 곳에서 왕명을 받드는 내시(內侍)는 아무래도 어울리지 않는다. 그러나 고려 때는 장군 출신도 종종 내시로 임명됐다. 어찌된 일이었을까?

    고려의 내시는 거세된 남성 즉 환관(宦官)이 아닌 일반 관리 가운데 임명됐다. 더구나 내시는 국왕을 가까이에서 수행하다보니 상당한 정치적 후광을 지녔다. 조선시대와는 달리 고려 때 내시는 정치 엘리트 집단이었던 셈이다.

    고려 중기까지만해도 내시가 될 수 있는 자격은 문반 관료에게만 있었다. 그러나 ’무신의 난’ 이후 사정이 달라졌다. 실권을 잡은 무신들은 무반도 내시를 겸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구했다.

    고려사절요 명종16년(1186) 10월 기사는 ’장군 차약송 등 43인을 내시원(內侍院)과 다방(茶房)에 겸하여 속하게 했다’고 적고 ’이에 앞서 중방이 아뢰기를 “경인년 이래 무관은 모두 문관을 겸하였으나 내시와 다방만은 겸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겸속을 허락하십시오”라기에 이런 명이 있었다. 무관이 (내시를) 겸속함은 이로부터 시작됐다’라고 전한다.

    대전대 김보광 교수는 27일 성신여대에서 개최되는 제67회 한국중세사학회 학술회의에서 ’고려 무신집권기 내시의 운영과 특징’을 발표한다. 그동안 고려 내시를 주제로 한 논문은 적지않게 발표됐으나 무신집권기의 내시연구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김 교수는 무신집권기 내시에 임명된 133명의 출신을 분석한 결과 명종 대에 11명, 신종 대에 1명, 고종 대 5명, 원종 대 2명 등 모두 19명이 무반 출신임을 밝혔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경대승(1154-1183) 집권기에는 무반이 내시에 임명된 사례가 보이지 않는 것.

    김 교수는 “경대승은 복고지지(復古之志)를 품고 무신정변이나 기존의 무신집정에 반대했다”며 “이에 따라 기존의 법제에 어긋나는 무신의 내시 임명은 이루어지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고 추측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무신 권력자는 내시를 임명하는데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2월에 충주판관 최효기가 충헌의 총애하는 첩을 통해 금으로 장식한 서대를 뇌물로 바치니, 충헌이 기뻐하여 불러들여 내시에 속하게 했다(고려사절요 신종5년 2월)’

    ’원종 5년에 장원으로 급제하고 해양부녹사로 임명되었다가 전첨을 더하였다. 해양공 김준이 중하게 여겨 내시에 속하게 하고 정방에 들였다(고려사 김주정 전)’

    무신정권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던 최씨 집권기에는 국왕이 집권자의 눈치를 살피거나 그를 위해 내시를 운영한 경우도 있었다.

    ’급제 최이가 쌍송시로 부(賦)를 지으니 양제와 문사들이 모두 화답했다. 최충헌이 차례를 매기게 하니, 정공분의 시가 1등이었다. 최충헌이 그 시를 아뢰니 왕이 정공분을 불러 내시에 속하게 했다(고려사절요 희종 원년 5월)’

    김 교수는 “내시 임명과 관련한 최씨들의 간섭은 ’목우인(木偶人)’으로까지 표현된 당시 국왕과 집정자와의 관계를 설명하는 하나의 실례”라고 설명했다.

    한편 27일 열리는 한국중세사학회 학술회의에서는 ’고려 무인정권기 신의군 연구(강재광ㆍ우송대)’, ’고려 강도시대의 보살신앙과 보문사(김창현ㆍ성신여대)’, ’여말선초 이행의 현실인식과 정치활동(김도형ㆍ부산대)’ 등의 논문이 함께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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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배성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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