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의 시인 으젠 앗제 / 프랑스 / 1857~1927
- 고독의 늪에서 가슴으로 셔터를 누른 가난한 사진가 -
앗제는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원점으로 인식된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활약한 작가로서
'카메라의 시인'이라 불릴만큼 그의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인
데다가 사진마다 시적 정감이 풍긴다.
185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뱃사람의 잔심부름이며 스무살 때는
떠돌이 극단의 배우로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삶의 밑바닥
생활로 어둡고 고달픈 청춘을 다 보냈다.
정상적이지 못한 생활형편으로 인해 열 살 연상인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는 등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흔 살이
갓 넘었을 때 파리로 와 사진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광학렌즈가 달린 낡은 카메라를 마련하여 파리 시내를 두루 다니면서 촬영해다가
화가들에게 팔았다. 달리 돈벌이 할 것이 없었던 그는 죽을때 까지 그렇게 연명해갔다.
그의 사진은 화가들이 정확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료로 쓰였는데,
그는 파리의 몽빠르나스의 빈민아파트에서 '화가를 위한 자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라져가는 파리 시내의 건물과 많은 장소를 찍었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정부의 기록보관소가 그의 사진들을 사 주었다.
앗제는 한 편생을 세상과 떨어져 고독하게 살았다.
우울증과 자폐증으로 여러사람 앞에선 주눅이 들어 뒷전에서 혼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런 앗제를 발견한 것은 미국의 화가이며 사진가인 만 레이였다.
앗제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926년 그는 앗제의 사진 넉 점을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에 실어 주었고, 그의 조수인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 애보트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었고, 앗제가 남긴 2천 여장의 원판과 1만 여장의 사진들을
찾아내어 1968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영구 보존하게 되었다.
생전에는 그렇게도 불운하게 살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그가 오늘날에 와서는 사진의
역사에 업적을 남긴 대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에 와서야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세기를 걸쳐 넘어오는 전환기의 사진가로서 지난 세기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 세기가 헤쳐나갈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룩한 사진의 업적은 예술을 표방하던 살롱 사진가들에 의해서 등한시 되었던
사진의 기본인 기록성을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기록성만으로도 예술성을 살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를 가치있는 자료로서 기록했고, 자신의 밑바닥 인생도 기록함으로써
그의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에 귀결된다. 그러나 흔히들 앗제의 사진을 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사진은 현실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현실에 숨어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내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에 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상에 정서적 반응의 기질 탓이다. 그는 현실에 접근할 때 머리 보다도 가슴을
앞세우는 사진가이다. 그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생활감정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쌓이기 마련인 앙금을 가슴으로 느꼈다.
현실속에서 삶의 진실을 느낀 것이다. 이런 느낌을 통해 대상과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사진은 자연 분위기 조성이 주종을 이루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가 화면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화음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앗제의 파리 사진에는 파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공기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생활감정의 교감이 바로 높이
승화된 시적인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사진을 찍은 것은 예술
사진의 표방이 아닌 밥벌이로 기록한 것들에 불과하다. 예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단순한
기록만으로도 위대한 예술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상과 깊은 내면적 공감을 이루
었느냐는 것이다. 앗제의 경우 의도하거나 뚜렷한 자신의 의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가 깊이 빠져 있던 고독의 늪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만남의 욕구가 사진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감수성과 민감한 직관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타고난 예술적인 재능이 모진 고생과 시달림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외, 그리고 거리의 전면이 아닌 뒷골목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서,
어디든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문 밖에서 서성거리며 사진을 찍었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 시간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이었고, 사진에 등장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있었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웃 뿐이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숫기가 없어서 안심하고 마음을 놓을 만큼 만만한 사람들 앞이
아니면 셔터를 누르지도 못했다. 이렇듯 은밀하고도 호젓하게 혼자서 떠돌던 그는
대상과의 비밀스러운 내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찍는 일이 그의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었지만 심리적으로 자신을 대상에 드러내는, 모든 것과의 단절속에서
오직 하나뿐인 만남의 통로가 무의식 중에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기구원의 방편이기도 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닫혀있던 세상으로의 출구가 열리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은 시간적이라기 보다는 공간적이다.
유동하는 시간보다는 정지된 공간속에서 정신적 안정감을 맛볼 수 있다.
고요가 쌓이는 공간, 막연한 기대와 여운이 짙게 깔려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이 빠져버린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생활 감정인, 다름 아닌 인간의 체취인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예감으로서의 숨결이 화면속에 나타나 있다.
- 고독의 늪에서 가슴으로 셔터를 누른 가난한 사진가 -
앗제는 스티글리츠와 더불어 현대사진의 원점으로 인식된다.
그는 19세기에서 20세기에 걸쳐 활약한 작가로서
'카메라의 시인'이라 불릴만큼 그의 생애가 다분히 전설적인
데다가 사진마다 시적 정감이 풍긴다.
1856년 프랑스의 항구도시인 보르도에서 태어난 그는
일찌기 부모를 여의고 뱃사람의 잔심부름이며 스무살 때는
떠돌이 극단의 배우로 언제나 가난에 허덕이는 삶의 밑바닥
생활로 어둡고 고달픈 청춘을 다 보냈다.
정상적이지 못한 생활형편으로 인해 열 살 연상인 과부와
동거생활을 하는 등 불우한 나날을 보내다가 마흔 살이
갓 넘었을 때 파리로 와 사진가로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그는 광학렌즈가 달린 낡은 카메라를 마련하여 파리 시내를 두루 다니면서 촬영해다가
화가들에게 팔았다. 달리 돈벌이 할 것이 없었던 그는 죽을때 까지 그렇게 연명해갔다.
그의 사진은 화가들이 정확히 그림을 그리기 위한 자료로 쓰였는데,
그는 파리의 몽빠르나스의 빈민아파트에서 '화가를 위한 자료'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라져가는 파리 시내의 건물과 많은 장소를 찍었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정부의 기록보관소가 그의 사진들을 사 주었다.
앗제는 한 편생을 세상과 떨어져 고독하게 살았다.
우울증과 자폐증으로 여러사람 앞에선 주눅이 들어 뒷전에서 혼자서만 시간을 보냈다.
이런 앗제를 발견한 것은 미국의 화가이며 사진가인 만 레이였다.
앗제가 사망하기 일 년 전인 1926년 그는 앗제의 사진 넉 점을 초현실주의자들의
기관지에 실어 주었고, 그의 조수인 미국의 여류 사진작가 애보트에게 그를 소개했다.
그것이 그와의 마지막이 되었고, 앗제가 남긴 2천 여장의 원판과 1만 여장의 사진들을
찾아내어 1968년 뉴욕 현대미술관이 영구 보존하게 되었다.
생전에는 그렇게도 불운하게 살다가 이름없이 죽어간 그가 오늘날에 와서는 사진의
역사에 업적을 남긴 대가로 떠받들어지고 있다. 그의 사진이 오늘날에 와서야 높이
평가를 받고 있는 이유는 세기를 걸쳐 넘어오는 전환기의 사진가로서 지난 세기의
잔재를 말끔히 청산하고 새 세기가 헤쳐나갈 새로운 길을 열어 놓았기 때문이다.
그가 이룩한 사진의 업적은 예술을 표방하던 살롱 사진가들에 의해서 등한시 되었던
사진의 기본인 기록성을 원점으로 돌려놓았고, 기록성만으로도 예술성을 살릴 수
있다는 본보기를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파리 시내를 가치있는 자료로서 기록했고, 자신의 밑바닥 인생도 기록함으로써
그의 사진의 가치는 기록성에 귀결된다. 그러나 흔히들 앗제의 사진을 시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의 사진은 현실속에 깃들어 있으면서도 현실에 숨어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내기 때문이다. 그가 현실에 있는 시의 세계를 찾아 낼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대상에 정서적 반응의 기질 탓이다. 그는 현실에 접근할 때 머리 보다도 가슴을
앞세우는 사진가이다. 그의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은 생활감정의 공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사람이 사는 곳이면 쌓이기 마련인 앙금을 가슴으로 느꼈다.
현실속에서 삶의 진실을 느낀 것이다. 이런 느낌을 통해 대상과 조화로운 관계가
이루어지면서 사진은 자연 분위기 조성이 주종을 이루는 쪽으로 기울어진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 등장하는 사물들은 모두가 화면속에서 한데 어우러져 화음과
같은 분위기를 자아내는 것이다.
앗제의 파리 사진에는 파리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와 공기감이 깃들어 있다.
그리하여 신비롭고 환상적인 느낌마저 든다. 이러한 생활감정의 교감이 바로 높이
승화된 시적인 경지를 이루는 것이다. 그런데 그가 이러한 사진을 찍은 것은 예술
사진의 표방이 아닌 밥벌이로 기록한 것들에 불과하다. 예술에는 아랑곳하지 않은단순한
기록만으로도 위대한 예술가로서 평가받을 수 있다는 것은 기적과도 같은 일이다.
여기서 우리는 사진을 찍을 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대상과 깊은 내면적 공감을 이루
었느냐는 것이다. 앗제의 경우 의도하거나 뚜렷한 자신의 의견이 있어서라기 보다는
그가 깊이 빠져 있던 고독의 늪에서 무엇인가에 대한 간절한 만남의 욕구가 사진을
통해 독자들과 공감을 이루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경지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천성적인 감수성과 민감한 직관력이 바탕이 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즉 타고난 예술적인 재능이 모진 고생과 시달림으로 인해 더욱 심화되었던 것이다.
그는 옥외, 그리고 거리의 전면이 아닌 뒷골목이나 사람들의 발길이 뜸한 곳에서,
어디든 감히 문을 열고 들어갈 엄두를 못내고 문 밖에서 서성거리며 사진을 찍었으며
사람들의 눈길을 피해서 사진을 찍었다.
촬영 시간도 사람들이 잘 다니지 않는 이른 아침이나 저녁 시간이었고, 사진에 등장
하는 사람은 거의 없으며 있었다고 해도 자신과 같은 처지의 이웃 뿐이다.
그는 매우 여리고 숫기가 없어서 안심하고 마음을 놓을 만큼 만만한 사람들 앞이
아니면 셔터를 누르지도 못했다. 이렇듯 은밀하고도 호젓하게 혼자서 떠돌던 그는
대상과의 비밀스러운 내통을 카메라에 담았다. 사진을 찍는 일이 그의 유일한 밥벌이
수단이었지만 심리적으로 자신을 대상에 드러내는, 모든 것과의 단절속에서
오직 하나뿐인 만남의 통로가 무의식 중에 사진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사진은 생계 수단이기도 했지만 자기구원의 방편이기도 했다.
셔터를 누르는 순간 닫혀있던 세상으로의 출구가 열리는 것이었다.
그의 사진은 시간적이라기 보다는 공간적이다.
유동하는 시간보다는 정지된 공간속에서 정신적 안정감을 맛볼 수 있다.
고요가 쌓이는 공간, 막연한 기대와 여운이 짙게 깔려있는 공간이다.
사람이 거의 등장하지 않지만 사람이 빠져버린 빈 공간을 채우고 있는 것은
인간의 생활 감정인, 다름 아닌 인간의 체취인 것이다.
앞으로 나타날 예감으로서의 숨결이 화면속에 나타나 있다.
출처 : Joyful의 뜰
글쓴이 : Joyful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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