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방과 소통. 친환경적인 한옥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는 장점이다. 하지만 21세기형 한옥은 ‘소통’만큼이나 개인의 사생활이 보호되는 ‘가림’의 공간이 필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서울 계동 이해성·이난희 부부의 주택은 한옥이 놓치기 쉬운 가족 개개인의 공간을 잘 구현했다. ‘ㅁ’ 자형에 걸친 10여 개의 문을 열면 소통의 공간이, 문을 닫으면 독립된 공간으로 변신한다. 각 방에서 마당이나 출입문을 이용하기도 쉬워 개인생활이 중요한 성년의 자녀들과 생활하기에도 안성맞춤이다. 소통과 가림을 아우르는 계동 한옥은 자연을 닮았으면서도 살기에도 편한 공간이다.
“너희 집 망한 거 아니야?"
지난해 9월 경기도 부천 중동의 161㎡ 아파트를 버리고(?) 북촌 계동으로 입성한 이해성·이난희 부부. 아파트촌을 벗어나 한옥촌으로 간다고 하니 딸아이 친구들이 걱정스럽게 던진 말이다. 이들 부부가 삶의 터전을 바꾼 이유는 그저 조용히 쉴 수 있는 편안한 집과 작은 마당을 갖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불만이 많았죠. 집다운 느낌이 별로 없었거든요. 획일적인 아파트 커뮤니티도 마음에 들지 않았고요. 대신 나만의 마당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걸레를 빨고 나면 물을 휘익~ 시원하게 버릴 수 있는 공간 말이죠.”
한옥은 흙, 나무, 종이로 만들어지는 자연의 선물이다. 여기에 보태지는 게 있다면 사람의 노력과 시간 정도. 한옥은 온갖 화학재료가 난무하는 현대건축의 맹점을 잘도 비켜간다. 스스로를 팽창시키거나 수축시키는 또는 바람을 통과시키는 건축 재료 덕분에 사람 살기에 딱 좋다.
건축 재료뿐만 아니라 공간구조 역시 자연친화적이다. 대청마루와 툇마루가 있어 안과 밖을 연결하는 중간공간이 오롯이 살아 있다. 안에 있어도 밖을 바라볼 수 있고, 밖에 있어도 안과 통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1 한옥은 안과 밖의 구분이 따로 없다. 볕이 따뜻한 날 문을 열어두면 마당의 풍경이 오롯이 집안으로 들어온다.
2 소박한 조명은 화려한 샹들리에보다 은은한 빛을 뿜어낸다.
3 손바닥 마당’에는 아담한 화분이 놓여있다. 봄이면 꽃나무들이 저마다 아름다운 색감을 뽐내는 공간이다.
4 한옥생활은 마당을 가로질러 이동할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실용만점인 고무신은 가족과 손님들을 위한 필수품이다.
여성조선
기획=문영애 기자
진행=박지현(프리랜서)
사진=문지연
촬영협조=북촌HRC(02-742-5042)
1 아들방 후원에 꾸며진 물고기 벽화. 항시 집을 안전하게 지킨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2 계동 한옥에서 제일 넓은 아들방. 대문에서 가까워 친구들이 하룻밤 자고 가도 식구들이 모를 정도. 한옥에 이사오면서 개인생활을 최대한 보장해달라는 요구(?)를 수용해 설계했다.
3 대문에 들어서면 바로 눈에 띄는 와편 벽화. 대청마루에 앉아 바라보면 마치 산수를 집안에서 감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문짝 하나로 개방과 가림의 미학을 실현하다
소통을 중시하는 한옥은 개인의 프라이버시를 보호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의견이 많았다. 계동 한옥은 그런 인식을 바꾸기에 충분하다. 설계를 맡은 북촌HRC의 김장권 대표의 말이다.
“한옥의 개방성은 주거공간으로 이용하기엔 아쉬움이 있어요. 옛날 한옥은 안채, 사랑채, 별채를 각각 독립된 건물로 사용했기 때문에 사생활이 가능했죠. 하지만 도시형 한옥은 대지의 한계상 한 지붕으로 만드는 경우가 많아요. 당연히 개인의 생활이 많이 노출될 수밖에 없죠. 계동 한옥은 이러한 단점을 최대한 줄였어요. 가림과 단절의 미학으로 만든 집이랄까요?”
개인의 프라이버시가 존중되는 주거공간, 이것이 김 대표가 생각하는 인간에 대한 배려다. 몸에 좋은 집이 살기에도 좋을 수 있다는 패러다임을 구현한 셈이다.
‘ㅁ’자형 구조의 계동 한옥은 중앙 마당을 중심으로 공간을 쪽쪽이 나누어 부부와 자녀의 개인 공간을 갖추고 있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간이 네 칸의 방과 두 개의 화장실, 부엌 그리고 지하방과 별채다. 건평 99㎡(대지 198㎡)의 면적을 감안하면 꽤 효율적인 공간이 탄생한 것.
계동 한옥의 특징은 대학교 2, 4학년에 재학 중인 자녀들의 사생활을 최대한 배려했다는 점이다.
“아들 방은 늦은 귀가와 친구들의 잦은 방문을 대비해 대문에서 제일 가까워요. 덕분에 밤늦게 친구들이 찾아와도 눈치 안 보고 하룻밤 잘 묵어가죠. 게다가 방 뒤편엔 아담한 개인 후원까지 있어 삼겹살을 구워 먹을 수도 있어요.”
반면 왼쪽 끄트머리에 마련된 딸의 방은 그 성격이 사뭇 다르다. 양쪽 벽면이 모두 수납공간으로 채워져 있다. 옷가지와 소품이 많은 딸의 특성상 벽면이 모두 벽장이다. 또 화장실이나 부엌과 가까워 가볍게 차를 마시거나 잦은 샤워를 하기에 편리하다.
아들과 딸의 공간 사이에는 부엌과 대청마루(거실), 부부의 공간이 차례로 들어서 있다. 그리고 모든 공간은 긴 통로로 연결된다. 문을 열면 가족의 소통 공간이 되고, 문을 닫으면 개인 공간이 된다. 이난희 씨와 딸이 손수 황토로 마감한 마당을 중심으로 자유로운 동선이 만들어지니 소통과 가림의 고민이 해결될 수 있었다.
여성조선
기획=문영애 기자
진행=박지현(프리랜서)
사진=문지연
촬영협조=북촌HRC(02-742-5042)
1 안방과 아들방 사이에 있는 긴 복도. 사이사이 문을 열면 긴 통로가 생겨 가족간 소통의 공간이 된다. 액자를 바닥에 놓은 집주인의 센스도 엿보인다.
2 한옥이 모여 있는 계동은 동네 자체가 문화공간이다. 인근에 갤러리, 카페, 경복궁 등의 ‘특별한’ 공간이 어우러져 있기 때문이다.
한옥은 그 자체가 멋진 인테리어다
계동 한옥은 리모델링 과정을 거치면서 집주인의 니즈에 부합하는 공간으로 재탄생됐다. 특히 눈에 띈 공간이 안방에 딸린 ‘침묵의 공간’과 세를 놓고 있는 별채. 침묵의 공간은 과거 지하공간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겉으로 보기엔 평범한 문짝 같죠. 하지만 두 쪽은 수납공간이고, 나머지 두 쪽은 지하로 내려갈 수 있는 비밀통로예요. 리모델링을 하면서 아담한 방으로 개조해 혼자 있고 싶은 시간에는 이곳을 이용하죠.”
반면 별채는 이들 부부의 든든한(?) 노후대책이다. 아파트 재테크를 포기한 대신 한옥에서 작은방을 세놨으면 좋겠다는 집주인의 소망이 실현된 것. 별채는 들어가는 입구부터 본채와 별도로 되어 있는데, 화장실이 딸린 작은방은 현재 젊은이가 사용하고 있다.
침묵의 공간과 별채뿐만 아니라 계동 한옥은 개성이 드러나는 감각이 곳곳에 살아 있다. 대문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는 와편 벽화도 그중의 일부. 기왓장의 곡선을 이용해 산과 구름을 표현했는데, 하얀 바탕에 짙은 흑색의 와편이 무척 인상적이다. 대청마루에서 바라보면 마치 자연을 집안에 들인 듯한 기분이 든다. 이러한 와편 벽화는 아들방 너머 작은 후원에도 물고기 모양으로 있는데, 이는 집을 든든하게 지켜준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각 방에 마련된 문살도 마찬가지. 보통은 중심부에만 격자무늬를 두지만 이러한 문양을 위아래로 확장시켰다. 기능적인 부분은 훼손되지 않으면서 변화를 줄 수 있다는, 설계자와 집주인의 생각이 일치했기에 가능할 수 있었다.
1 마당을 중심으로 ‘ㅁ’자형인 계동 한옥은 개인의 사생활이 최대한 보장되도록 설계됐다. 특히 성년의 자녀들과 함께 생활하기에도 무리가 없다.
2 아들방 뒤편에는 아담한 후원이 있다. 대학생 아들이 친구들과 담배를 피우거나 삼겹살을 구워 먹으면서 술 한잔 할 수 있는 아지트다.
3 딸의 방은 벽장이 모두 수납장이다. 벽장 크기에 따라 옷과 소품, 액세서리 등을 따로 수납할 수 있어 실용적이다.
4 푹신한 보료와 고가구가 어우러진 남편방. 혼자 책을 보거나 휴식을 취할 때 자주 이용한다.
사람의 생활패턴을 변화시킨다
이 부부는 한옥에 살면서 ‘무료’로 누리는 것들이 많다. 우선 창살로 떨어지는 따뜻한 햇살이며 처마에 떨어지는 빗물, 그리고 사시사철 한옥이 만들어내는 정겨운 정취가 그렇다. 무엇보다 몸이 편하다. 아파트에 살 때는 공기가 무척 건조했는데 한옥으로 옮기면서는 호흡이 훨씬 편해졌다. 그 덕분에 지난여름에는 바람이 온 집안을 넘실거려 에어컨이 필요 없었다. 관리비도 생각보다 많이 들지 않는다고. 중동 아파트에 살았을 때는 관리비만 한달에 30만~40만원이었지만 한옥에서는 여름철엔 10만원, 겨울철엔 30만원 내외면 족하단다.
이난희 주부는 한옥에 살면서 식구들이 많이 여유롭고 유해졌다고 말한다. 게다가 무척이나 단정(?)해졌단다.
“아파트에서는 대문만 닫으면 밀폐된 공간이니까 옷도 대충 입고 있잖아요. 그런데 한옥은 달라요. 방이나 대청에 있다가도 마당을 통할 일이 많으니까 항상 웬만한 옷은 입고 있는 편이죠. 따뜻한 스웨터를 입거나 카디건을 걸치니까 가까운 곳에 나갈 때도 편하고요. 자연히 사람이 단정해지더라고요(웃음).”
주부로서 만끽하는 즐거움은 또 있다. 인테리어에 덜 신경 쓰고 남은 시간은 홀로 산책을 즐긴다.
“아파트에 살면 커튼을 달거나 각종 가구를 들이는 등의 수고로움이 만만치 않아요. 그런데 한옥은 굳이 장롱이나 침대가 필요 없어요. 웬만한 잡동사니는 벽장에 넣고 인테리어는 집 자체가 해결해주니까요. 서까래나 문살만으로도 무척 멋스럽거든요.”
북촌에 보금자리를 틀면서 문화적인 향유는 기본 사항이 됐다. 워낙 주변에 문화적인 공간이 넘쳐나니 당연한 변화다. 삼청동과 경복궁 그리고 북촌 한옥마을에 갤러리, 카페, 산책로 등이 많아서다. 세종문화회관까지 걸어가 음악 감상을 하거나 경복궁 은행을 따면서 보내는 여유만만한 생활은 이난희 주부만의 ‘특권’이다.
“보통 한옥은 몸에 좋은 주택이라고 하잖아요. 물론 그 말도 맞아요. 하지만 정확히 표현하면 몸에 좋기도 하고 살기에도 편한 곳이에요. 주변에서 한옥에 사니까 불편한 점은 없느냐고 묻곤 하는데 주차하는 것 빼고는 정말 없거든요(웃음).”
요즘 이씨는 그렇게 갖고 싶었던 마당에서 그녀만의 ‘작업’을 한창 실행 중이다. 술 애호가인 그녀는 아파트에선 엄두도 못 냈던 청주 빚기에 푹 빠져 있다. 마당 한쪽에는 청주 전용 항아리도 한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혼자 저녁을 먹거나 지인들이 찾아오면 술독의 뚜껑을 여는데, 그러면 구수한 술 향기에 두 시간은 행복해진단다. 어디 두 시간뿐일까. 계동 한옥으로 보금자리를 옮기면서 그녀는, 아니 이들 가족은 앞으로 적어도 20년은 행복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여성조선
기획=문영애 기자
진행=박지현(프리랜서)
사진=문지연
촬영협조=북촌HRC(02-742-5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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