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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베니스에서의 죽음 Morte a Venezia, 1971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4. 11:00

 

 

 

 

아폴론-디오니소스적 경계에서의 죽음

 

 

 

스크린 위로 말러의 교향곡 제5번의 4악장 아다지에토가 흐른다. 어둠이 밀려나면, 낭만주의 화가 윌리엄 터너의 <Fingal's cave>(1832)와 닮은 증기선과 풍경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터너의 작품은 자연을 바라보는 시각의 정확성보다는 넘칠 듯 한 감성으로 대상을 표현했다는 점에서, 화가의 내면과 심리를 알 수 있는 투사물이 된다. <베니스에서의 죽음>(1971)의 오프닝 시퀀스는 터너가 그러했듯이 가감 없는 사실 그대로의 풍경보다는 상상의 이미지처럼 몽환적이다. 이러한 낭만주의의 감수성은 뒤를 잇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개인의 직관과 찰나의 인상으로 사물을 표현하는데 기반이 된다.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은 정교한 비례와 안정보다 경험과 감정을 중요시하였고, 이러한 시각은 ‘내면의 목소리’가 되어 화폭에 나타났다. 비스콘티가 <베니스에서의 죽음>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것 역시, ‘외부세계에서 내면세계로’ 끌어갔던 그들의 화풍과 크게 다르지 않다. 사실상 그가 카메라로 담으려했던 것은 한 중년의 죽음 그대로가 아니라, 죽어가는 노인의 내면 혹은 심상이기 때문이다.

 

 

 

베니스의 불온한 기운

 

병든 그의 심상은 영화 속 베니스라는 장소에서 드러난다. 구스타프는 휴양을 위해 홀로 독일에서 베니스를 찾아왔다. 그는 울렁이는 바다를 건너 베니스로 들어왔지만, 영화 내내 베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제목 그대로, 구스타프는 ‘베니스에서의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다. 구스타프가 호텔에 도착한 뒤부터 매일 보는 신문에도 불구하고 베니스의 시공간은 정지된 것 같이 보인다. 지리학적으로 섬은 대륙과의 단절의 의미하고, 비잔틴 양식의 건축물은 이질감을 자아내어 동시대성의 흐름을 파악하기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파악하기 힘든 시공간, 여행지의 낯선 느낌과 혼자라는 적막함에서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한다. 영화 초반부터 그는 타인과의 접촉을 꺼려하고, 시큰둥하거나 불만족스러운 반응을 한다. 그가 먼저 타인에게 대화를 요청할 때도, 사교적인 내용이 아니라 자신과 관련된 모호한 사건에 대한 질문을 한다. 검은 곤돌라, 관 같은 수트케이스, 치루지 않은 뱃삯과 곤돌리에의 알아듣지 못하는 말은 그가 베니스에 도착했을 때부터 느꼈던 불길한 증후였다. 마치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생生의 강에서 죽음의 땅으로 건너 온 것이다. 그에게 베니스는 휴양의 장소가 아니라 불안하고 의심스러운 장소로 먼저 다가온다.

 

 

 

타지오에 의한 세 가지 전환

 

그러한 구스타프에게 베니스가 휴양지로 의미 작용되는 시점은 타지오를 본 이후부터다. 이 때 영화에서 처음으로, 모네의 그림과 같이 태양이 내리쬐는 해변이 등장한다. 하지만 찬란한 햇살이 가득한 해변과 역병이 도는 골목길에서 그의 시선은 서성인다. 이성의 아폴론과 관능의 디오니소스적 세계를 담고 있는 이 공간에서, 그의 내면이 충돌하기 때문이다. 충돌은 내러티브가 아닌 구스타프의 감정의 흐름에서 발생한다. 이처럼 타지오는 희열을 느끼게 해주는 존재인 동시에 그에게 과거의 악몽을 떠오르게 하는 존재다. 영화 초반, 구스타프가 타지오를 바라볼 때마다 친구와 예술에 대한 가치관 논쟁을 했던 플래쉬백이 등장한다. 구스타프는 미와 순수의 창조는 정신적인 행위라고 믿는 이상주의자다. 그는 지혜와 진실, 도덕으로 감각을 지배 했을 때에만 비로소 정신에 도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음악은 실패했고 이 믿음은 처참히 패배했다. <비극의 탄생>에서 니체는 그리스 예술에서 대립되는 두 가지 예술적 충동을 아폴론적 예술과 디오니소스적 예술로 나눈다. 조형예술로 대표되는 아폴론적 예술이 꿈으로서 법과 질서, 이성을 상징한다면, 음악으로 대표되는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도취로서 본능과 충동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폴론적 예술은 엄격한 형식미를 갖춘 고전주의를, 디오니소스적 예술은 역동적 창조성을 갖춘 낭만주의를 대표한다. 니체의 분류에 따르자면 구스타프는 아폴론적 예술가이며, 자신의 예술관과 관련해 자기 스스로 도덕적 규제와 구속을 시킨 인물이다. 그러나 타지오와의 만남은 그의 예술적 가치관을 전복시켰다. 타지오는 구스타프에게 이상적 구현이며 관음증적 판타지의 대상과는 독립적으로 상징적인 가치인 것이다. 그렇기에 그가 타지오에게 느끼는 감정은 소아애호증의 대상을 벗어나 이데아의 실제를 가늠하게 한다.

 

이렇게 타지오에 의한 플래쉬백은 구스타프의 예술관을 전복 시켰을 뿐 아니라, 그의 성애의 대상마저 치환시킨다. 현재와 과거를 잇는 ‘에스메랄다’와 ‘엘리제를 위하여’는 구스타프의 성적 정체성을 확인시켜주는 연결고리가 되기 때문이다. 타지오가 연주한 ‘엘리제를 위하여’ 는 구스타프가 과거에 찾아갔던 창녀의 연주와 이어진다. 창녀의 이름은 에스메랄다로 어린 소녀이며, 주위는 온통 들라쿠르아의 그림을 닮은 오리엔탈리즘 스타일이다. 충동과 쾌락을 느끼게 하는 이국적인 분위기 속에서 구스타프는 도덕적 신념을 버리고 관계를 맺는다. 그러나 그에게 남은 것은 타락과 수치심뿐이다. 베니스에 오기 전 까지 그는 유혹의 ‘손을 뿌리’치는 절제하는 인물이었다. 그러나 창녀의 이름과 같은 ‘에스메랄다’호를 타고 베니스에 들어선 그는, 소녀가 아닌 소년에 매혹된다. 떠나보낸 ‘에스메랄다’와 대조적으로, 구스타프는 타지오를 향하여 닿을 수 없는 ‘손을 뻗’는다.

 

타지오의 순수와 미는 구스타프가 여태껏 지탱하고 있었던 가치관을 흔들어 놓고, 그가 그토록 혐오했던 디오니소스적 관능에 젖어들게 한다. 구스타프는 타지오를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환희에 도취되자, 자신의 도덕적 타락을 용납할 수 없게 된다. 이렇게 자신의 의지와 도덕이 감각 앞에 무너지자, 당혹감과 혼란을 느끼고 재빨리 베니스를 떠나려 한다. 그의 절제와 이상이 타락되는 것이 두려워 도망가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타지오의 존재는 구스타프의 청교도적 이상을 소멸시켜 줄만큼 그에게 기쁨 이상이었고, 이때부터 그는 감각에 몸을 내맡긴다. 아폴론적 예술가였던 구스타프가 디오니소스적 예술가로 전환되는 순간이다. 이제 그에게 도덕과 품위는 거추장스러워 졌을 뿐이다. 구스타프는 가면과 같은 화장을 하고 금지된 욕망의 골목길에 들어선다.

 

 

 

 

내면 혹은 심상 보여주기

 

플래쉬백에 등장하는 구체적 담론을 제외하면 <베니스에서의 죽음>에는 거의 대사가 등장하지 않는다. 특히 이상적 존재인 타지오 같은 경우, 대사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그는 유령 같은 환상적 존재처럼 보인다. 구스타프에게 타지오의 아름다움은 욕망의 대상이지만, 감히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닌 듯 묘사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오로지 바라만 본다. 이를테면 구스타프가 베인즈 호텔로 다시 되돌아와 창문을 열고 타지오를 찾은 뒤, 홀로 손을 흔들며 인사를 하는 행위가 그러하다. 다음 시퀀스에서는 타지오가 구스타프와 시선의 교환을 나누며 기둥 사이를 오고 가지만, 구스타프는 기둥만을 매만질 뿐 다가서지는 못한다. 마치 손에 닿으면 순수함이 사라질 것처럼 잡힐 듯 말듯 한, 아련한 거리만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렇듯 구스타프가 이성이 아닌 내면의 본능을 따라가자, 자연스럽게 영화는 ‘이야기하기’대신 ‘보여주기’를 택한다. 타지오에 대한 아름다움을 뒤좇으며 행복해하는 구스타프와 그의 눈에 비춰진 탐미적인 시각만이 영화를 뒤덮는다. 그리고 동시에 열풍과 역병의 모습이 서서히 드러나고, 적막하고 황량한 베니스의 풍경이 시작된다. 죽음이 감도는 베니스는 폐허와 같고, 골목길에는 부랑자들과 타고 남은 연기만이 뿌옇게 남았다. 구스타프는 역병이 있다는 것을 알고도 타지오 가족에게 알리지 않는다. 단지 상상만으로 그들에게 진실을 알리고 떠나라고 할 뿐 이다. 구스타프가 가지고 있었던 과거의 도덕적 태도는 타지오에 대한 열망 아래로 잠식 한 것이다. 그는 타지오를 바라보겠다는 일념하에 미로처럼 복잡한 골목길을 따라나선다. 모든 논리가 제거된 채, 구스타프는 오로지 시각적 욕망을 충족하는 것이다. 그렇기에 ‘바라보기’만으로 채운 시퀀스는 아련함과 애잔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카메라가 포착한 시선과 말러의 음악은 구스타프의 내면과 동일화되어 스크린으로 투사된다. 마치 낭만주의와 인상주의 화가들이 대상을 자신의 직관과 감성에 의해 표현한 것처럼, 구스타프의 심리를 시각화하는 것과 같다.

 

 

 

 

이성을 충족시키는 도취

 

구스타프의 죽음은 자의적인 ‘바라보기’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하다. 열풍으로 염색약과 화장은 흘러내리고 죽음의 기운이 그의 숨통을 조여 오지만, 그는 이데아의 현현인 타지오를 바라보며 생의 마지막을 마감하기를 원한다. 죽음에 맞닿은 구스타프의 모습과 대조되게 그가 바라보는 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젊음이다. 언급했던 니체의 아폴론/디오니소스적 예술분류로 보자면, 타지오의 육체는 조형예술인 아폴론적 이미지다. 반면에 이 영화의 제3의 캐릭터로 꼽을 수 있는 말러의 교향곡은 음악적 예술이므로 디오니소스적 정신을 담고 있다. 니체는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갈등과 결합에 의해서 완성된다고 보았다. 이런 의미에서 비스콘티는 타지오와 말러의 교향곡을 구스타프의 죽음에 결합함으로써, 이상적 예술의 환희를 위해 장식한다. 그 환희는 니체가 말했던 이성과 광기가 만나는 진리의 세계와 일맥상통하다. 다시 말해, 구스타프가 택했던 디오니소스적 정신은 충동적 광기 그 자체가 아니라, 광기를 통한 아폴론적 형상과 진리를 추구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구스타프의 죽음은 디오니소스적 충동이 몰고 간 파멸이 아니라, 이성을 충족시키는 도취이자 이상적 예술론을 위한 본능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구스타프가 죽음의 순간까지도 절대미에 대한 경의와도 같이, 타지오를 바라보며 손을 뻗는 행위로 나타난다. 그리고 그는 그토록 갈망했던 아름다움의 존재에 대한 고통과 희열을 느끼며, 아폴론-디오니소스적 경계를 나타내듯이 해변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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