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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한국다기의 명인 5인전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5. 08:57
 차문화 공예연구가   신 수 길                

차생활은 우리네 삶 속에 멋과 풍요로움을 곁들여 주고 정신건강과 삶의 질을 한 차원 높여주는 문화 예술적 행위이다. 절제된 미적 안목으로 사물을 보고 자연과 합일을 하는 차생활이야말로 이 시대에 꼭 필요한 것이라고 본다. 취미생활이라고 하지만 포괄적 심미안을 요구하는 것이기도 하며 행위예술로까지 승화된 차(茶)는 자신을 돌아보게도 한다.

 

차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많은 기물들이 있어야 하지만 그 중 가장 필요로 하는 것이 찻사발과 다관세트이다. 지금여기 전시하는 다섯분은 우리나라 최고의 찻그릇을 만들고 계시는 분들이다. 가식 없는 순수한 마음으로 그릇을 만들고 예술혼으로 도자기 작업에만 전념하며 온 몸을 사르고 있다. 찻그릇에는 작가마다의 심성과 그들이 갖고 있는 역량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수수한 느낌을 주는가 하면 강렬한 느낌을 주고, 덤덤하고 졸한 맛이 있는가 하면 섬세하고 세련된 맛이 있다. 우주를 담을 수 있는 넉넉함과 자연스러운 맛이 있고 풍류를 즐길 수 있는 호탕한 멋이 있다.

 

찻그릇(茶器)은 차를 마시기 위한 용기(用器)이다. 때문에 그 쓰임(用)이 우선해야 하고, 미(美)는 쓰임새와 조화를 이루기 위한 것이어야 한다. 아무리 아름다운 찻그릇이라 해도 감상적 요소만 있다면 진열장 속의 미술품은 될지 모르지만 다기로 쓸 수는 없다. 실용의 바탕 위에 예술적 아름다움을 접목시켜야 공예미술로써의 가치를 인정받게 되고 작가 또한 예술가로 자리매김 되리라 생각한다. 
            

사기장은 각고의 노력과 끊임없는 수련을 통해 흙과 하나가 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진정한 찻그릇은 단순한 기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숙련된 기능과 욕심 없는 마음으로 예술적 혼을 불어넣을 때 훌륭한 다기가 탄생된다. 도공에 의해 태어난 찻그릇은 차인들의 손끝에서 다시 태어난다. 좋은 차인을 만나면 그릇이 갖고 있는 본성을 충분히 나타내게 되며 미의 세계로 이끌려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된다.

찻그릇을 만드는 장인은 후대에 남을 명품을 만들기 위해 끊임없는 탐구와 노력으로 최선을 다 해야 하고, 도자기를 좋아하는 이나 차인들은 찻그릇의 숨겨진 아름다움을 찾아내고 그 가치를 부여하며 예술품으로의 가치를 인정해 주어야 한다. 차가 마음이라면 찻사발은 마음을 담는 육신이다. 건강하고 아름다운 몸을 만드는 것은 미의식을 가진 사기장이 해야할 몫이고, 진정한 마음은 건강한 몸에서 참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 
물욕의 경계를 벗어난 무심은 명기를 만들게 하고 그것은 소박한 내성을 지닌 차를 잘 어울리게 하며 차인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게 한다. 우리가 가까이하는 찻그릇이 누구에게나 기쁨을 주고, 아름다움이 내재되어 있는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 언제나 보고싶고 쓰고싶은 마음이 들게 마련이다. 차인들은 이러한 찻그릇 갖기를 원하고 또한 찾아다닌다.

 

옛 우리의 찻그릇이 극히 적은 양만 전래된 것은 외세의 잦은 침략과 지독한 가난 때문이지 장인들의 미적 안목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또한 사대사상에 젖은 선비와 부호들이 학문만을 인정하고 기능공을 천대시하는 사회적 풍조에서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했던 것도 있다.
지금 우리는 과학을 앞세운 첨단의 시대를 살고 있지만 예술을 사랑하고 차생활을 즐기는 것은 이 시대와 병행해야 할 참된 멋이라고 생각한다. 장인의 길은 어느 것이나 고통과 고뇌가 따르게 마련이다. 그들은 자신과 싸워야 하는 혹독한 시련이 잊고, 각고의 노력과 좌절이 있어도, 세상 많은 이들이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그들은 모든 것을 잊고 작업을 계속할 수 있다.
여기 전시회를 갖는 다섯분의 사기장은 우리 차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고 준수한 찻그릇으로 차인들을 사로잡았다. 잠시 연장자 순으로 찾아보기로 한다.           

 

도천 천한봉 선생은 우리 찻사발문화의 선구자이며 살아 있는 증인이다. 일본에서 태어난 그는(1933.3.15생) 해방과 함께 고국, 문경으로 돌아왔다. 갑작스런 부친의 작고로 가장이 되었고 가족 생계를 위해 14세 어린 나이로 도자기에 입문했다. 처음에는 허드렛일을 시작으로 차츰 일을 배워갔고 18세 때에는 우수한 기능공이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일어나 징병되어갔다.

본격적인 생활자기 제작은 6년 간의 군 생활을 마친 1956년부터였다. 찻사발은 일반인들이 관심을 보이지 않던 1968년 "조령요"에서부터 만들었고 이것들은 전량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이어서 선생은 1972년 문경요(聞慶窯)”를 설립하고 찻사발을 만들기 시작해 칠순을 넘긴 오늘에 이르기까지 줄곧 전통 찻사발만을 고집하고 있다. 그래서 차를 좋아하는 이는 누구나 그의 찻그릇 한 벌을 갖고싶어 한다.

그는 젊은이 못지 않은 작업열로 전래되는 우리의 옛 찻그릇을 모두 재연하고 있으며 만들어진 작품들은 하나같이 꾸밈이 없고 편한 느낌을 준다. 따스한 봄날 활짝 핀 꽃잎 같기도 하고 가을 단풍처럼 곱기도 한 홍엽오기다완, 선생의 인품이 물씬 풍기는 정호다완, 자연스럽고 힘찬 빗금에 가을하늘 때늦은 구름빛 같은 김해다완 등은 찻사발의 발색을 여지없이 보여주는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겠다.

그는 누구에게도 친절하다. 후배 도공들에게도 관대하고, 너그럽고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장인의 숨결과 넉넉함이 배어 있는 인품으로 오늘에 이르렀고, 1995년에는 대한민국 도예명장을 지정 받았다. 그릇을 잘 만들고 못 만들고를 떠나, 우리나라 찻그릇 문화를 이끌어 왔기에 우리가 모셔야 할 기둥과 같은 존재이다.
선생은 오로지 작업에만 열중하며 완벽한 전통 찻사발 재연을 위해 심혈을 기울였고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며 한국 차문화에 큰 획을 그었다.

 

백산 김정옥 선생은 이곳 문경에서 우리 전통도자기의 맥을 7대째 이어오고 있다. 그리고 아들 경식군이 8대를 이어간다. 200여년의 도자기가문 전통이 기능과 함께 이어져 오늘의 그를 있게 했다. 1958년 18세 때부터 선친을 도우며 도자기 일을 시작하여 1982년에 “영남요(嶺南窯)“를 열어 지금에 이르렀다. 1991년에는 “도예명장”으로 선정되었고 96년에는 “중요무형문화재 105호 사기장”으로 지정 받았다. 무형 문화재 지정은 자신만의 자랑이 아니다. 도자기를 좋아하는 모든 이와 도예인, 나아가 도자왕국인 우리나라 전체의 영광이다. 
영남의 관문이라고 하는 문경에는 이름 난 도예가 들이 많이 있다. 그것은 문경의 여러 명소와 유적보다도 차인들에게는 으뜸가는 자랑거리일 것이다. 또 전통가마만을 고집하며 장작불로 전통 그릇을 만들고 있다. 예로부터 이곳은 민요백자가 이어져온 대표적인 곳으로 막사기(민요사기, 지방사기)가 유명하다. 그는 이곳에서 도자기 혼을 불어넣은 것이다.

 

선생의 작품에는 서민적인 정취가 물씬 느껴지게 한다. 민요지의 막사기를 재현하며 만든 그릇은 대중적인 소박함과 순박한 아름다움이 배어나는 그릇이다. 특히 청화백자의 포도 문양은 선친(先親) 때부터 백자에 그려오던 것으로 이 시대의 상표 같은 느낌을 준다. 그는 추상적 의미가 짙고 초화문(草花紋) 같기도 한 포도 알과 줄기를 일필휘지로 단숨에 그어 덴다. 청화백자 다기세트는 푸른빛이 감도는 백자 특유의 빛깔과 고풍스런 형태로 단아하고, 덤벙분청 다완은 질박스런 맛에 천진스러운 추상미로 인정(人情)을 끌게 한다. 계룡산다완, 정호다완은 선생의 열정이 그대로 담겨져 있고 꾸밈이 없는 친숙함으로 그의 대표작들이다.

진지하고 우직한 작업열과 대물림 되어온 가문의 혈통에서 수더분한 형태미가 만들어지고, 청초한 조선 아낙의 말쑥함이 무명옷 같은 그의 백자에 배어있다. 오늘도 선생은 조선시대의 민요백자와 분청사기에 맥을 잇는데 아들과 함께 최선을 다하며 땀을 흘리고 있다.     

 

원당 길성 선생의 작품세계는 활달하고 대담한 작품이 많은가 하면,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실험적 작품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꾸밈없는 단백한 찻그릇으로 일관하고 있다. 많은 시간을 찻사발에 할애했고 흙에 집착했으며 흙을 따라 다녔다. 그는 예술적 재능이 많아 서양화를 전공했고 일간지 미술기자도 지냈다.

도자기는 1976년부터 공부했고, 직장을 접고 79년 경주에 “영지요”를 열면서 본격적인 분청작업을 시작했다. 1988년에는 청, 백자를 위해 작업장을 경기도 광주로 옮겨 길성요(吉星窯)를 설립했고, 민요백자 재현을 위해 충북 단양에 가마를 열기도 했으며, 2002년5월에는 정호다완의 꿈을 안고 경남 하동에 다시 가마를 열었다.

30년 가까운 작도기간 중 웅천사발이라고 하는 정호다완에 가장 많은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그는 지금 막내딸 기정씨와 함께 끊임없는 실험과 노력으로 정호다완의 풀지 못한 비밀을 풀어내고 있다. 정호다완은 우리 것이지만 모진 가난과 선조들의 미의식 부족으로 보존하지 못해 우리 곁에는 이렇다할 실물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다완을 재현하려는 선생의 신념은 대단하다.

다완은 무엇보다 흙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차는 하나이지만 그 품종에 따라 맛과 향이 틀리듯이 찻사발도 흙으로 만들지만 흙의 질에 따라 도자기 분위기는 천차만별을 보이게 된다. 물론 좋은 흙이 있다고 해도 숙련된 사기장이 없다면 그릇다운 찻사발은 나올 수가 없다. 참된 그릇은 흙과 내가 하나가 되어야 하고 작가의 숙련된 미의식으로 볼거리를 만들어 주어야 하며 불과 바람의 조화를 타야 한다. 하동 흙으로 만든 이 사발은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정호다완에 가장 근접한 그릇이다. 태토에서 우러나오는 은은한 비파색과 엷은 황색바탕에 흰빛을 띈 찻사발은 지금까지 누구도 근접하지 못한 부분이다.
여기 전시되고 있는 찻사발들을 보고 있노라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작품 속으로 빠져들고 만다. 절제되고 시원스런 죽절굽과 유약이 터지고 말린 매화피, 손맛이나는 자연스런 물레선, 고임터에서 회돌이쳐 올라오는 내면의 넉넉함, 그리고 당당한 몸통은 진정한 찻사발의 왕좌다운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우송 김대희 선생은 말이 없는 분이다. 다만 도자기를 통해 작품이 대신 말을 할 따름이다. 그는 1983년 8월 이곳 신둔초등학교 뒤에 “우송움막을 짓고 도자기를 빚으며 부인과 두 딸이 함께 살아간다. 1968년 고교3년(도예과) 때부터 도자기를 시작한 그는 69년 스승 고영재 선생을 만나면서 탁월한 기능과 흙, 불의 감각을 배우게 되었다. 여주, 이천에서 도자기를 하며 어려운 생활을 전전하면서도 손에서 흙은 놓지 않았고, 도자기 전 과정을 총괄하는 대장도 했다. 본격적인 찻그릇 제작은 1979년부터이다. 전남 보림사 진담스님과의 인연으로 차를 알게되었고 그로 인해 기능에 맞고 아름다운 찻그릇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세련된 아름다움과 경쾌함이 어우러진 귀족적인 성향으로 차인들을 사로잡고 있다. 미려한 작품은 맑은 물로 신령스런 차를 우리는 청순한 차인의 마음처럼 작가의 마음을 담고 태어나는 것이다. 선생의 작품은 황금비를 무색하게 하는 균형과 전체적인 조형미는 작가의 타고난 예술적 감각을 보여주고 있다. 일반도예가 들이 물대의 기본적인 실용미를 찾을 때 그는 파격적인 변형으로 새롭게 안정시키고 전래적인 구연부와 뚜껑은 넉넉함에서 정교함으로 일관했다.  

우송은 공부하기를 좋아하여 마흔이 넘은 나이에 대학을 다녔고 많은 것을 책에서 얻는다. 형태에 대한 구상도 기본적인 것은 책에서 얻고 작업 과정에서 조형과 기능에 맞게 고정시켜간다고 한다. 그는 다양한 찻그릇을 만든다. 찻그릇도 기호성이 있기에 차인들의 취향에 맞게 만들어 선택의 여유를 준다. 청자, 백자, 분청 등 전통에 기본을 두지만 조형성이나 실용성에는 고정관념을 버린 작가이다.
몇몇 도예가 들이 그의 그릇을 모방한다. 아무리 모방이 탁월하다해도 본 작품을 능가할 수는 없다. 모방은 창조의 모태이다. 모방에서 머물지 말고 그를 뛰어넘어 한 차원 높은 도자기로 향상되어 가야 하는데 개으르고 편한 생각으로 대부분 거기서 머물고 만다.
우송은 “어렵게 만들고 어렵게 배우라” “흙을 아끼라”는 고영재 선생님의 가르침을 아직도 잊지 않고 가슴에 담고있다. 그는 우직스런 고집으로 찻그릇은 찻그릇다워야 한다며 오늘도 흙의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는다. 
 
문경 주흘산 자락에 자리잡고 있는 월파 이정환은 외모에서 풍기는 친근감으로 누구나 편하게 다가간다. 문경에서 태어난 그는 한눈에 장인임을 알아볼 수 있으며 도를 닦는 수행자 같은 느낌이 든다. 18세 때(1971년) 도자기를 하는 친구집에 갔다가 그 친구가 하는 것을 보고 도자기와 인연을 맺었다. 1973년에는 일본인이 관계하는 김해 “가락요”에서 우리의 전통다완을 재현하는 일을 했고 또 일본으로 건너가 우리의 전통가마를 박고 그릇을 만들어 구워 보이고 오기도 했다. 국도변 영남요 건너편에 자리잡고 있는 지금의 주흘요(主屹窯)”는 1991년에 그가 설립한 곳이다.

월파는 기본적인 것에 충실하다. 도공은 기능과 재주를 익히기 전에 흙을 대하는 마음과 자연의 순리를 배워야 된다고 한다. 욕심 없는 마음으로 그릇을 만들어야 하는 것은 장인의 본질이다. 그는 또 강한 내공이 있어야 당당한 찻사발을 만들 수 있으며, 그 기운은 단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고 수련의 연륜이 말해 준다고 한다. 이러한 것들이 쌓여져 조선 예술의 기본적인 선(線)을 낳으며 소박한 찻사발을 만드는 것이다. 그가 일을 시작할 때는, 수도자와 같은 마음으로 작품에 대한 생각을 면밀히 하고 욕심이 떠난 상태에서 작업을 시작한다. 물욕이 살아 있으면 언제나 그릇을 망치게 되고 마음은 상하게 마련이다.

 

덥수룩한 수염을 알맞게 기른 월파는 찻사발을 온몸으로 만든다. 말로 하는 것보다 작품으로 보여주기를 좋아해서, 우리 전통 찻그릇에 대한 자기 그릇을 비교 분석하는 공부를 많이 한다. 그는 사발의 본질을 꿰뚫어보는 혜안(慧眼)으로 흙을 다스리고 산화와 환원불을 넘나들며 숨겨진 흙의 본성을 이끌어 내며 장작불의 특성을 마음껏 살려낸다.
특히 이라보(伊羅保) 계통의 다완은 기능적 차원을 떠나 경지에 이른 것 같다. 손끝으로 감아지는 물래선은 전으로 이어지고, 춤을 추는 듯한 사발의 전은 잘 만들어야겠다는 작가의 마음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굳이 다른 수식어를 붙이지 않는다 해도 자연스러움은 부인할 수가 없다. 질박스런 굽은 기교를 벗어난 작가의 순수성에서 형성되는 무위이며 자연인 것이다. 이러한 예술적 감각은 기능의 한계를 떠나 천성으로 타고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 자리를 찾아주신 차인들과, 찻그릇을 좋아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감사함을 전하며, 잎차 다기와 다구들은 우리의 명칭이 보편화되어 있지만 찻사발은 대중적 검증이 된 것이 없다. 일본이 붙인 한자음을 그대로 쓰게 된 점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앞으로 적절한 우리 찻사발 이름이 생겨나기를 바라며 적은 힘이나마 이것에 대한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을 것을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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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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