伯顔은 1929년 함경북도 행영에서 태어났다. 행영은 면소재지의 작은 고을이지만, 조선시대 군사요지로 당시까지 큰 성곽이 남아 있었다. 남대문에 장엄한 홍예와 석조구조물이 잘 보존되어 있는 유서 깊은 고장이었다.
伯顔은 젊어서 소리꾼이었고 말을 잘 탔다. 그러나 기독교인이 된 이후로는 평생을 隱忍(은인)하며 살았던 부친처럼 친구가 별로 없이 외톨이로 살았다. 그는 청진에 있는 경성공립농업학교를 거쳐 6·25 전란 직전 南下(남하)해 한국신학대학(現 한신大)에서 신학을 공부했다. 부친의 뜻을 이어 목회자의 길을 걸으려했지만 당시 시대의 혼란상은 伯顔으로 하여금 전혀 다른 삶의 길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충남 논산 윤증고택 |
짧은 목회생활 접고 사진의 길로
伯顔이 사진과 맺은 첫 인연은 학비를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군사용 항공필름을 사진용 필름으로 절단하는 일이었다. 캄캄한 암실에서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끝까지 손의 감각으로만 작업하는 고된 일이었지만, 어쩌면 그는 여기에서 사진작업의 세밀함을 깨달았는지 모른다.
4년여의 군복무를 거쳐 복학기간 내내 우리나라 살롱사진계의 개척자이자 둘째 매형인 故정도선 선생 밑에서 조수로 일했다.
목회가 평생의 꿈이었던 伯顔은 생애 전반을 통해 신앙적인 목표와 성취를 추구했다. 결코 스스로 사진인의 길을 선택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길지 않은 목회생활을 거친 1959년, 마침내 그는 사진을 통해 이러한 꿈을 실현하기로 마음먹었고, 본격적인 사진수업이 시작되었다.
대구 달성 문씨 세거지 |
사진인으로서 그의 첫 직장은 구황실재산사무총국(現 문화재청의 전신) 사진담당이었다. 4·19 혁명 직후 어수선한 상황이었지만 그는 새벽부터 각 궁을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었다. 1962년에는 사진계에 입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식회사 학원사의 사진부장으로 발탁되었다. 학생잡지 「학원」 복간 1호부터 촬영을 담당하고, 잡지 「농원」과 「주부생활」 창간에 참여했다. 원색인쇄 초기단계인 우리나라 기술로는 사진 중심의 잡지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과감한 시도로 이런 잡지가 성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66년 삼화인쇄주식회사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옵셋인쇄의 선두주자였던 삼화인쇄에서 원고사진과 광고사진을 전담했다. 이때부터 회사에서 전속작가라는 직함으로 독자적인 사진가의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산업화 시대에 광고사진과 산업사진에 대한 수요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는 많은 화보와 도록, 홍보용 사진을 찍었다. 그러나 그의 관심은 한국문화와 거기에 담긴 한국인의 심성에 있었다. 1969년 처음으로 「한국가면 및 가면극」이라는 책을 이두현 교수와 공저로 출판했다. 그가 삼화인쇄 발행으로 출판한 「한국국립중앙박물관 명품도감」은 당시 상황으로는 상당한 부수가 팔렸다.
종묘 |
1970년대 중반 伯顔은 삼화인쇄를 나와 본격적인 전문사진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문화재관리국, 국립중앙박물관 등과 용역계약을 맺어 전국을 누비며 수많은 문화재를 촬영했다. 그는 「한국인이란 누구인가」라는 주제의식 속에 우리 문화에 잠재되어 있는 한국인의 심성을 다각도로 탐색하기 시작했다. 웃음과 해학, 멋의 문화, 자연주의 등 한국인의 내면에 스며 있는 정신과 의식에 집중했다.
그의 사진세계가 주거문화 쪽으로 좁혀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초반부터다. 집터는 사람들의 삶의 중심이고, 건축은 종합예술에 가까웠다. 이때부터 대형 출판기획인 「사원건축」, 「궁실건축」, 「중요민속자료-건축편」 등의 책이 예경출판, 중앙일보, 문화재관리국 등의 발행으로 잇따라 엮여 나왔다.
창덕궁 만월문 |
여기에는 한옥 건축의 指諭(지유)이며 한옥문화원 원장인 木壽(목수) 신영훈 선생과의 교분이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와 함께 전국에 산재한 바위, 사찰, 민가, 종가, 서원, 고궁 등을 샅샅이 훑고 다니며 그 모습을 여러 책으로 엮었다.
1990년대부터는 우리 문화의 맥을 찾기 위한 노력이 중국·일본·티베트·위구르·네팔·인도 등의 답사로 이어지면서 더욱 많은 기록과 사진을 남길 수 있다.
경남 함양 일두고택 |
묘비명은「본향을 찾아서」
伯顔은 평생 예술가연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자신이 추구하는 사진의 특성은 사실성과 기록성에 있다고 주장했으며, 사진작가보다는 「사진가」, 「전문사진가」로 불리기를 좋아했다. 그는 사진의 본질로 전달매체로서의 기능을 강조했다. 이를 위해서는 사진가가 대상을 순간적으로 포착해 정확하게 영상화할 수 있는 예민한 감각을 지녀야 한다고 했다.
『사진이란 어떻게 찍느냐보다 무엇을 찍느냐가 더 어렵다』
『피사체는 흔히 사진에 찍히는 대상을 말하지만 그 속에 포함된 느낌이 주 피사체가 된다』
충남 논산 윤증 고택 |
이는 우리나라 문화재와 가옥이 지닌 내적인 아름다움에 착안해, 그것을 어떻게 잘 드러낼 수 있을지를 끊임없이 연구하고 훈련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伯顔 자신은 실향민으로서 고난의 역사 한복판을 헤쳐 왔지만, 뜻밖에 거기에서 그가 발견한 것은 한국인의 넘치는 의연함과 여유 그리고 활력이었다. 이는 그 스스로 삶을 지탱하는 커다란 힘이 되었다.
「伯顔」은 그가 떠난 고향 행영의 성곽 이름이다. 그는 이것으로 號(호)를 삼으면서 고향을 그리워하며 산다고 했다. 그의 사진과 사진인으로서의 삶에는 무언가를 그리워하며 끊임없이 찾아 헤매던 유랑자의 흔적이 있다.
암으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그는 무거운 사진배낭을 메고 곳곳을 찾아다니며 촬영했다. 그러다가 2006년 78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가까운 사람들이 그의 비석에 「본향을 찾아서」라고 새겨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