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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10개의 산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8. 06:36

 




밥 베이츠와 브래드퍼드 워시번.

그들은 대단한 모험 정신과 젊음으로 마운트 루카니아의 정상에 올랐지만 그 후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길고 긴 하산이야말로 진정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자 넘어야 할 산에 다름 아니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오지에서 160km에 이르는 필사의 탈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 캐나다에서 가장 험하고 위협적인 산의 정상에 ‘최초로’ 비행기 착륙을 시도한 그들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알파인 등반 기술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한 워시번과 하버드대 출신의 베이츠는 거대한 빙하에 둘러싸인 마운트 루카니아를 도보로 접근할 경우 짐의 수송비가 엄청날 것을 고려해 경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천둥과 폭풍이 밤새 폭우를 몰고 와 발로 밟아서 다진 짧은 활주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더 심각한 것은 착륙 중에 왼쪽 날개 받침대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팀워크와 컨디션을 다진 두 젊은이가 도전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베이츠와 워시번은 3,000m가 넘는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경비행기에 실린 식량과 연료, 장비를 썰매에 실어 날랐다. 6월 25일, 하산을 위해 정상을 출발한 그들의 썰매가 구조대에 발견된 것은 무려 2개월 후인 7월 19일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오래 마운트 루카니아에 머물게 했을까. 혈기왕성한 두 젊은이는 뿌리칠 수 없는 루카니아의 유혹에 넘어가 2개월 동안 무려 4개의 하산 루트를 개척했다. 다시 말해 그 2개월 동안 등산과 하산을 무려 8번이나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40여 년 동안 보스턴 과학박물관장을 역임한 워시번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에베레스트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사실
높이 5,226m의 마운트 루카니아는 캐나다에서 세 번째로 높은 산이다. 1897년 이탈리아의 아브루치 공이 세인트 엘리어스 정상에서 이 산을 처음으로 발견하고, 자신이 타고 대서양을 건너온 배 ‘루카니아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둥근 돔형의 정상이 있는 마운트 카스는 특별나게 빼어난 산은 아니다.

해발 2,300m에 불과하고 살베센 산맥이라고 불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산군의 최고봉일 뿐이다. 하지만 세계의 오지라는 고립성 외에도 인류 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특별함을 지닌 산이다. 탐험가이자 사진가, 영화배우이던 덩컨 카스는 한때 남대서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사우스조지아’를 일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백52개의 빙하 탐사와 지도 작업을 위해 4개의 탐험대를 이끌었고 포경 산업의 말로를 기록으로 남겼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마운트 카스에는 좀처럼 도전하지 않았다. 악천후로 등정에 실패한 후 그는 영국의 서식스에 있는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브라이언 데이비슨과 스티븐 베너블스가 마운트 카스를 초등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0년의 일이다. 카스가 충고한 대로 두 사람은 얼음 동굴을 만들어 베이스캠프를 차렸고, 텐트를 한 동씩 이동하며 천천히 고도를 높여갔다. 데이비슨과 베너블스는 등정을 시작한 지 50여 일 만에 리지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그 땅을 밟은 최초의 사람들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얼음 동굴에서 스키로 21km를 이동하고 1,200m를 등반한 뒤라서 무척 피곤했지만 두 사람은 야간 하산을 강행해 텐트로 돌아왔다. 마운트 카스의 산 증인이자 살베센 산군의 하나일 뿐인 이 봉우리에 ‘카스’라는 이름을 선사한 덩컨 카스의 조언을 끝까지 따른 것이다.


1988년 미국, 캐나다, 영국 3개국의 4명으로 구성된 작은 등반대가 꾸려졌다.

그들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난이도가 높은 신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등반대를 위해 짐을 운반해주고 길 안내도 해주는 사람. 히말라야 고산에 사는 티베트계 네팔인을 통칭하기도 한다)도 고용하지 않았고 산소통도 사용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그들을 보고 무모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거벽과 걸리(Gully), 오버행(Overhang)의 얼음 절벽이 줄줄이 도열해 있는 미답의 캉슝 페이스에 신 루트를 개척해냈다. 로버트 앤더슨, 폴 티어, 스티븐 베너블스, 에드 웹스터가 바로 세계 최고봉 등정을 이끈 위대한 탐험가들이다. 그들은 에베레스트에 고난도 루트를 개척한 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등반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 루트를 개척한 ‘캉슝 페이스’는 1983년 초등된 이래 그때까지 재등되지 않을 만큼 악명 높은 루트였다. 1988년 등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들 역시 등정 성공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성과 불가능이 그들의 모험심을 더 자극했으리라. 4월 3일, 카마 계곡에서 출발한 4명의 모험가가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악천후와 건강 문제로 베이스캠프에 머무른 시간만 해도 20여 일에 달했다. 그만큼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던 것이다. 밤에 눈사태가 일어나는 등 공포에 질린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들은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5월 8일, 개척 루트의 1차 목표 지점인 사우스콜까지 400m가 남았지만 그들은 11시간 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산소 결핍으로 의식이 혼미해졌지만 정상까지 불과 900m밖에 남지 않았기에 고통의 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된 강행군은 30여 시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상에서 포즈를 취한 탐험대 뒤로, 동쪽으로 부탄까지 쭉 뻗어가면서 도열한 봉우리들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20세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고, 그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도전이자 모험의 순간이다.

흥미로운 사실
에베레스트만큼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는 산도 드물다. 인도의 퇴역한 측량 국장인 조지 에버리스트 경의 공적을 기려 '에베레스트'라고 명명했지만 힌두어를 사용하는 네팔인은 '사가르마타', 티베트인은 '초모룽마'라고 부른다.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 근처의 암벽은 아직도 해마다 5cm씩 상승하고 있다.


 




1966년 존 할린 2세는 아이거 북벽 직등 루트를 개척 등반하다가 로프가 끊어지는 바람에 1,500m 아래로 추락해 사망했다. 당시 아홉 살이던 존 할린 3세는 그로부터 40년이 지난 2005년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바로 그곳, 알프스에서 가장 위험하기로 악명 높은 아이거 북벽에 도전했다. 아이거는 묀히나 융프라우같이 우아한 품격이나 고귀한 자태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나 이 산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 움푹 파인 북서벽, 푸른 초원 위로 솟아오른 북벽은 쳐다보기만 해도 넋을 빼앗길 정도로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 1930년대부터 유럽의 노련한 등반가들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이 북벽에 도전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이거 북벽은 용기와 모험심, 등반 기술을 검증받는 경연장이었던 셈이다. 존 할린 3세가 선택한 루트 역시 아버지가 선택했던 아이거 북벽 ‘신들의 트래버스’였다. 얼음과 마른 바위가 불규칙하게 섞여 있으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이 루트에서 순간의 사소한 부주의로 수십 명의 등반가가 추락사했다. 2005년 9월 23일,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아이거 등반에 도전한 존 할린 3세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영광으로 그에게 되돌아왔다.

 

 


흥미로운 사실
‘도깨비’를 뜻하는 ‘Ogre’에서 유래된 아이거는 ‘수도사’라는 뜻의 묀히, ‘처녀’라는 뜻의 융프라우와 함께 알프스의 3대 연봉으로 불린다. 융프라우요흐 역까지 올라가는 철도는 아이거 북벽 속을 나선형으로 관통하는데, 1896년부터 1912년에 이르는 공사 기간 중 저임금의 이탈리아 노동자 30명이 희생됐다.





노르웨이 로포텐 군도 최남단에 위치한 보가칼렌은 북유럽 신화에 나오는 ‘칼렌’이라는 트롤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트롤은 동굴이나 지하에 사는 초자연적인 괴물로 거인이나 난장이로 묘사된다. 한때 이 지방 사람들은 보가칼렌을 세계 최고봉으로 생각했다. 세계에서 가장 풍부한 대구 어장이 있고, 대부분이 어부인 이곳 사람들에게 보가칼렌을 오른다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일이었다. 어부들은 해수면에서 우뚝 솟아 있는 이 거대한 화강암 기둥을 향해 모자를 벗어 경의를 표하곤 했다. 기록으로 남겨진 로포텐 최초의 등반가는 마르틴 에크롤과 앙엘 요하네센이다. 1889년 맑게 갠 여름날, 당시까지만 해도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던 이 거대한 화강암 피라미드의 남벽을 두 사람은 마침내 초등했다. 그들이 걸리를 통과할 때 그 안에 눈이 쌓여 있는지, 또 산비탈의 바위를 힘겹게 올라갔는지는 기록에 남아 있지 않다. 현재 알려져 있는 것은 그들이 서쪽 리지의 칼날같이 좁고 날카로운 바위 능선에 도달했고, 그 위에서 말 등에 올라탄 자세로 정상을 향해 전진했다는 사실이다. 그로부터 50년 뒤, 아르네 란데르스 헨은 정상의 케른(Cairn, 자신의 흔적을 남기기 위해 쌓아 올린 돌무더기) 사이에 끼워져 있던 에크롤의 명함을 발견했다. 1889년에 에크롤이 보가칼렌을 초등했다는 결정적인 증거물이었다. 로포텐에는 수백 개의 산이 있다. 이 산들은 며칠간 걸어서, 또는 수많은 피오르를 헤쳐 나가야 도달할 수 있다. 아직도 초등이나 재등만 허락한 산들도 많다. 하지만 보가칼렌은 다르다. 이 산은 번잡한 어촌과 가까이 있고 꽤 유명한 탓에 항상 사람들로 붐빈다. 또한 돔형의 절벽들이 유럽에서는 보기 드문 양질의 화강암 암벽이어서 등반가들의 천국으로 여겨지고 있다.



1961년 7월, 20세기의 위대한 등반가 중 한 명으로 꼽히는 발터 보나티와 그의 일행은 몽블랑 중앙 필라 등정을 앞두고 있었다. 멋지게 수직의 직벽을 이루는 이 루트는 당시의 등반 기술이 구사해낼 수 있는 최고 수준의 난이도를 지닌 곳으로 야심찬 클라이머들에게는 늘 도전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갑자기 몰아친 폭풍설 때문에 이틀간 고소에 갇힌 대원들의 몽블랑 정상을 향한 의지와 투지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장비와 텐트, 식량이 모두 눈 속에 파묻혔고, 결국 보나티는 철수를 결정했다. 그것만이 살아서 돌아갈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이었다. 필라 구간을 로프에 의지하며 하강하는 데만 꼬박 하루가 걸렸다. 보나티는 허리까지 올라온 눈을 헤치며 오직 본능과 직감에 의지해 대원들을 프레니 빙하까지 안착시켰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나티의 오랜 파트너인 콜망이 첫 번째로 하산을 포기했다. 대원들은 그를 혼자 남겨둘 수 없어 로프에 묶고서 끌고 갔지만, 눈 속에 빠지면서 상황이 더 악화되자 그를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이는 시작에 불과했다. 알프스 서부 빙하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구간을 통과하는 과정에서 4명이 희생되고 3명만이 살아서 돌아왔다. 하지만 보나티의 초인적인 추진력과 용기, 루트 파인딩 기술이 없었다면 단 한 명도 생존하지 못했을 것이다. ‘죽음의 필라’에서 살아남은 발터 보나티 자체가 신화가 되었음은 물론이다. 보나티가 오르지 못하고 남겨둔 필라의 마지막 부분은 몇 주일 후 영국과 유고슬라비아의 합동 등반대가 초등했다. 그 후로 수많은 모험가에 의해 몽블랑의 신화는 벗겨졌지만, 등반가들은 여전히 이 루트를 오를 때마다 긴장감을 늦추지 않는다. 고도를 높일수록 탈출로가 제한되는 데다 알프스의 악명 높은 폭풍과 변덕스러운 날씨 탓에 언제 생존을 담보할 수 없는 고립된 장소로 변할지 모르는 곳이 바로 몽블랑인 까닭이다.


 

흥미로운 사실
몽블랑은 알프스뿐만 아니라 서유럽의 최고봉으로, 1786년 이 산이 초등된 것을 계기로 근대 알피니즘(Alpinism, 스포츠 등산)이 시작되었다. 스위스의 부유한 과학자 베네딕트 드 소쉬르가 몽블랑의 초등자에게 현상금을 건 것이 등정의 계기가 되긴 했지만, 이후 알프스 등반은 전 유럽에 유행했다.

 

 

 



페루 안데스 산맥의 몇몇 봉우리는 여전히 탐사조차 제대로 이뤄진 적이 없는 미지의 무명봉으로 남아 있다. 루트의 등반선이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아 등반 계획을 세우기가 곤란한 데다 날카로운 칼날 리지가 진로를 수시로 방해하고, 지구 중력을 무시하는 눈버섯이 아찔하게 허공에 걸려 있어 아차 하는 순간 치명적인 결과를 맞을 수도 있다. 하지만 프랑스 출신의 리오넬 테레이는 이러한 장애물을 극복하고 1965년 차카라주를 초등하는 데 성공했다. 테레이가 등반을 시작한 이래 처음으로 주목받은 것은 1947년 프랑스의 산악 가이드 루이 라슈날과 함께 아이거 북벽 재등에 성공하면서부터다. 3년 후 테레이는 가스통 레뷔파와 함께 안나푸르나 초등 팀에 참가한다. 그들은 멋지게 성공하지만 라슈날과 등반대장 모리스 에르족은 심한 동상에 걸렸다. 이때 테레이는 그들을 극진히 보살펴주며 지옥 같은 하산길을 마무리했다. 그는 1965년 그레노블의 베르코르에서 추락사할 때까지 열정적인 산악인의 삶을 살았으며, 세계 제5위 봉인 마칼루와 히말라야에서 난이도가 가장 높은 자누 초등, 알래스카 마운트 헌팅던 초등, 파타고니아 산군의 피츠로이 초등 등 15년 동안 수많은 기록을 세웠다. 테레이는 그중에서도 차카라주 초등 기록을 가장 자랑스러워했다. 수준급의 프랑스 팀과 함께한 등반 과정에서 고정 로프 없이 선등을 주도하며 정상으로 가는 길을 열었기 때문이다. 무려 6년 동안 준비한 ‘차카라주 등반 계획’은 1965년 8월 8일 차카라주 정상을 밟음으로써 현실이 됐다. 차카라주 초등 직후에 출간된 테레이의 자서전 <무상의 정복자(Conquistadors of the Useless)>에는 “정상에 서니 화살촉같이 날카로운 얼음과 바위로 중무장한 동봉이 자세히 내려다보였다. 그리고 남벽 모서리에 주름진 눈이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얼음과 눈과 바위가 전부였다. 그러나 나는 차카라주의 가장 어려운 루트를 개척한 ‘위대한 등반가(The Great Climber)’가 되었다.”


 

흥미로운 사실
차크라는 ‘경작할 수 있는 논밭’을 말하는데, 비탈진 설사면의 주름이나 나란하게 뻗은 형태를 이룬다. ‘마타라주’는 이 산의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으로 쌍둥이 정상을 말한다. 서벽의 높이는 6,211m, 동벽의 높이는 6,001m다.




기원전 2세기에 알렉산드리아의 프톨레마이오스가 ‘달의 산들(Mountains of the Moon)’이라는 산군이 아프리카에 존재한다고 주장한 이래로 많은 지리학자들이 아프리카 중심부에 있다는, 만년설을 이고 있는 루웬조리의 신비스러운 산들을 찾아 해맸다. 당시 그 누구도 그 ‘달의 산들’에 도전하려고 하지 않았지만 아브루치 공만은 예외였다. 1906년 4월 16일, 아브루치 등반대가 나폴리를 떠날 때까지도 이 산에 대해서는 별로 알려진 바가 없었다. 아브루치 공을 포함한 11명의 이탈리아 탐험대는 45일 만에 해발 3,798m의 오버행 밑에 조망이 좋은 베이스캠프를 만들었다. 그날 아브루치 공은 뜻밖에도 시야가 확 트이며 주변을 정확하게 조망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구름이 잠시 걷히자 그 누구도 보지 못한 광경이 펼쳐지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루웬조리는 단일 능선에 하나의 봉이 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산들이 복잡하게 산군을 형성하면서 얽혀 있었던 것이다. 깊게 파인 협곡과 지금은 사라진 빙하의 흔적들에 의해 여러 산으로 분리되어 있었고, 멀리 서쪽으로 가장 높은 산이 펼쳐져 있었다. 이튿날 그는 영국의 경쟁자들에게 초등의 영예를 뺏길세라 등반을 서둘렀다. 베이스캠프를 출발한 지 이틀 후인 5월 18일, 숲을 벗어나 정상으로 이어지는 눈 덮인 리지에 도착했다. 수많은 등반 경력을 자랑하는 베테랑으로 북극점에 가장 가까이 도달한 기록도 갖고 있는 아브루치 공이 가파른 빙벽에서 선등을 하며 신비의 세계를 개척해나갔다. 그는 피켈로 얼음을 깎아서 발판을 만들었고, 오버행에 구멍을 파서 넘어갔다. 곧 정상이 나타났다. 드디어 초등에 성공한 것이다. 대원들이 모두 정상에 모이자 이탈리아 국기를 펴들었다. 아브루치 공은 이 봉우리의 이름을 이탈리아 여왕의 이름을 따 ‘마르게리타’라고 지었다. 마르게리타 여왕은 아브루치 공의 숙모로서 열렬한 등반 애호가였다. 마르게리타는 아브루치 탐험대의 최고 하이라이트였다. 하지만 그것이 끝은 아니었다. 다음 몇 주간 14개의 봉을 더 등정하면서 주변 지역을 탐사했다. 또한 부주쿠 계곡을 발견했는데 마르게리타로 올라가는 가장 빠른 직등 루트임이 밝혀졌다. 최근까지도 이 루트는 ‘달의 산들’의 최고봉에 올라가는 가장 무난한 정통 루트로 이용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
루웬조리 산군에서는 독특하고 다양한 생태계의 모습을 접할 수 있다. 이 지역에서만 서식하는 나무너구리 같은 토종이 여럿 발견되고 있다. 토종은 식물군에서 더 많이 발견되는데, 블랙베리, 돌나물 같은 것들이 있다. 아브루치 공의 보고서에는 접근로에 있는 숲의 나무들이 우스꽝스럽게 뒤틀려 있고 중병에 걸린 듯 기괴한 형태로 부풀어 있었다고 표현됐지만, 이슬 내린 밝은 아침에 보면 너무나 고혹적이다. 1979년 밀턴 오보테가 독재자 이디 아민을 내쫓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다. 그 후로 루웬조리 인구가 급감해 마르게리타를 찾는 등반대가 셰르파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살레시아 출신의 선교사 알베르토 데 아고스티니에게 몬테 사르미엔토는 필생의 연구 대상이었다. 40년 이상을 측량과 지도 제작, 촬영, 등반 등을 통해 파타고니아의 넓이와 높이, 깊이를 탐사한 그는 1956년 73세의 나이에 몬테 사르미엔토 등정에 재도전해 정상을 밟았다. 1582년 스페인 선장 사르미엔토 데 감보아(산의 이름은 여기에서 유래됐다)가 마젤란 해협에 만든 4백 명 규모의 식민지에 선교사이던 아고스티니가 도착한 것은 1911년의 일로, 그는 인디언 원주민에게 남다른 관심과 애정을 쏟는 동시에 몬테 사르미엔토 탐사 활동을 열정적으로 해나갔다. 1913년 몬테 사르미엔토의 쌍둥이 정상 북벽 밑에 있는 빙하의 고원 지대까지 진출했지만 등정에 실패한 그는 43년 후인 1956년 마침내 돔형의 북쪽 정상에 올랐다. 아고스티니 이후로 많은 탐험가들이 이 험준한 산을 등반했지만 2개의 쌍둥이 정상을 모두 밟은 이는 아직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비글호의 선원들을 그토록 강하게 유혹했고, 아고스티니에게 특별한 경험을 안겨준 몬테 사르미엔토는 여전히 종잡을 수 없는 ‘신비의 산’으로 남아 있다.



한때 거대한 화산의 칼데라였던 볼스 피라미드는 바다 한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선바위다.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642km 지점의 태즈먼 해상에 해발 562m 높이로 솟아 있다. 이 선바위에 접근하려면 로드호 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배가 볼스 피라미드에 바짝 접근했을 때 조개와 성게로 잔뜩 덮여 미끌거리는 바위 위로 뛰어내려야 한다. 이때 거센 파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1965년까지 여섯 팀의 등반대가 이 바위에 상륙해 등반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73년 키스 벨과 그렉 모티머는 두 번의 비박(Bivouac, 등반 중 악천후나 사고 등으로 천막이나 산장을 이용하지 않고 노숙하는 것)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그때 멀리서 새털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산을 방해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하지만 그들은 볼스 피라미드를 꼭 횡단하고 싶었고, 어려운 바위 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또 한 번의 비박을 강행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일까. 사이클론이 덮쳐 며칠간 꼼짝하지 못하게 된 두 사람은 위험천만한 하강을 거듭한 끝에 해발 60m 지점의 동굴에 도착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구조 보트가 몇 차례 왔지만 높은 파도 때문에 접안을 못하자, 결국 바다로 다이빙하여 보트가 대기하고 있는 지점까지 헤엄쳐 탈출했다. 며칠간의 추위와 갈증으로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멋진 탈출이었다.

 

 

 

 

<출처;nate.com/네이트 우수 블로그 왕관이예요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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