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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베이츠와 브래드퍼드 워시번. 그들은 대단한 모험 정신과 젊음으로 마운트 루카니아의 정상에 올랐지만 그 후 행운은 찾아오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길고 긴 하산이야말로 진정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자 넘어야 할 산에 다름 아니었다. 이 지구상에서 가장 고립된 오지에서 160km에 이르는 필사의 탈출을 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1937년 6월, 캐나다에서 가장 험하고 위협적인 산의 정상에 ‘최초로’ 비행기 착륙을 시도한 그들의 야심찬 계획은 실패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열일곱 살에 알파인 등반 기술에 관한 책을 출판하기도 한 워시번과 하버드대 출신의 베이츠는 거대한 빙하에 둘러싸인 마운트 루카니아를 도보로 접근할 경우 짐의 수송비가 엄청날 것을 고려해 경비행기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천둥과 폭풍이 밤새 폭우를 몰고 와 발로 밟아서 다진 짧은 활주로가 감쪽같이 사라졌다. 더 심각한 것은 착륙 중에 왼쪽 날개 받침대가 떨어져나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상의 팀워크와 컨디션을 다진 두 젊은이가 도전을 포기하기에는 너무 일렀다. 베이츠와 워시번은 3,000m가 넘는 봉우리를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경비행기에 실린 식량과 연료, 장비를 썰매에 실어 날랐다. 6월 25일, 하산을 위해 정상을 출발한 그들의 썰매가 구조대에 발견된 것은 무려 2개월 후인 7월 19일이다. 무엇이 그들을 그토록 오래 마운트 루카니아에 머물게 했을까. 혈기왕성한 두 젊은이는 뿌리칠 수 없는 루카니아의 유혹에 넘어가 2개월 동안 무려 4개의 하산 루트를 개척했다. 다시 말해 그 2개월 동안 등산과 하산을 무려 8번이나 반복했다는 이야기다. 40여 년 동안 보스턴 과학박물관장을 역임한 워시번은 이 경험을 바탕으로 1988년 <내셔널지오그래픽>의 에베레스트 지도를 제작하기도 했다.
둥근 돔형의 정상이 있는 마운트 카스는 특별나게 빼어난 산은 아니다. 해발 2,300m에 불과하고 살베센 산맥이라고 불리는, 세상에 잘 알려지지 않은 산군의 최고봉일 뿐이다. 하지만 세계의 오지라는 고립성 외에도 인류 문명과의 밀접한 연관성 때문에 특별함을 지닌 산이다. 탐험가이자 사진가, 영화배우이던 덩컨 카스는 한때 남대서양 포경 산업의 중심지로 유명했던 ‘사우스조지아’를 일생의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1백52개의 빙하 탐사와 지도 작업을 위해 4개의 탐험대를 이끌었고 포경 산업의 말로를 기록으로 남겼지만, 자신의 이름을 딴 마운트 카스에는 좀처럼 도전하지 않았다. 악천후로 등정에 실패한 후 그는 영국의 서식스에 있는 집에서 두문불출했다. 브라이언 데이비슨과 스티븐 베너블스가 마운트 카스를 초등한 것은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1990년의 일이다. 카스가 충고한 대로 두 사람은 얼음 동굴을 만들어 베이스캠프를 차렸고, 텐트를 한 동씩 이동하며 천천히 고도를 높여갔다. 데이비슨과 베너블스는 등정을 시작한 지 50여 일 만에 리지의 마지막 지점에 도착했다. 그 땅을 밟은 최초의 사람들로 기록되는 순간이었다. 얼음 동굴에서 스키로 21km를 이동하고 1,200m를 등반한 뒤라서 무척 피곤했지만 두 사람은 야간 하산을 강행해 텐트로 돌아왔다. 마운트 카스의 산 증인이자 살베센 산군의 하나일 뿐인 이 봉우리에 ‘카스’라는 이름을 선사한 덩컨 카스의 조언을 끝까지 따른 것이다. 1988년 미국, 캐나다, 영국 3개국의 4명으로 구성된 작은 등반대가 꾸려졌다. 그들은 세계 최고봉인 에베레스트에 난이도가 높은 신 루트를 개척하고자 했다. 셰르파(Sherpa, 히말라야 등반대를 위해 짐을 운반해주고 길 안내도 해주는 사람. 히말라야 고산에 사는 티베트계 네팔인을 통칭하기도 한다)도 고용하지 않았고 산소통도 사용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그들을 보고 무모하다고 말했다. 그러나 대원들은 거벽과 걸리(Gully), 오버행(Overhang)의 얼음 절벽이 줄줄이 도열해 있는 미답의 캉슝 페이스에 신 루트를 개척해냈다. 로버트 앤더슨, 폴 티어, 스티븐 베너블스, 에드 웹스터가 바로 세계 최고봉 등정을 이끈 위대한 탐험가들이다. 그들은 에베레스트에 고난도 루트를 개척한 팀 중에서 가장 규모가 작은 등반대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이 신 루트를 개척한 ‘캉슝 페이스’는 1983년 초등된 이래 그때까지 재등되지 않을 만큼 악명 높은 루트였다. 1988년 등반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서 그들 역시 등정 성공 확률이 거의 제로에 가깝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그러나 이런 불확실성과 불가능이 그들의 모험심을 더 자극했으리라. 4월 3일, 카마 계곡에서 출발한 4명의 모험가가 등정에 성공하기까지 악천후와 건강 문제로 베이스캠프에 머무른 시간만 해도 20여 일에 달했다. 그만큼 험난하고 고된 여정이었던 것이다. 밤에 눈사태가 일어나는 등 공포에 질린 적도 여러 번 있었지만 그들은 애써 낙관적으로 생각했다. 5월 8일, 개척 루트의 1차 목표 지점인 사우스콜까지 400m가 남았지만 그들은 11시간 만에 그곳에 도착했다. 산소 결핍으로 의식이 혼미해졌지만 정상까지 불과 900m밖에 남지 않았기에 고통의 순간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튿날 아침부터 시작된 강행군은 30여 시간 만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정상에서 포즈를 취한 탐험대 뒤로, 동쪽으로 부탄까지 쭉 뻗어가면서 도열한 봉우리들이 보인다. 우리에게는 20세기의 가장 드라마틱한 순간이고, 그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도전이자 모험의 순간이다. |
그러나 이 산의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 움푹 파인 북서벽, 푸른 초원 위로 솟아오른 북벽은 쳐다보기만 해도 넋을 빼앗길 정도로 압도적인 매력이 있다. 1930년대부터 유럽의 노련한 등반가들이 위험하기 그지없는 이 북벽에 도전하기 위해 몰려들었다. 아이거 북벽은 용기와 모험심, 등반 기술을 검증받는 경연장이었던 셈이다. 존 할린 3세가 선택한 루트 역시 아버지가 선택했던 아이거 북벽 ‘신들의 트래버스’였다. 얼음과 마른 바위가 불규칙하게 섞여 있으며 현기증이 날 정도로 아찔한 이 루트에서 순간의 사소한 부주의로 수십 명의 등반가가 추락사했다. 2005년 9월 23일, 아버지의 흔적을 찾아 아이거 등반에 도전한 존 할린 3세는 정상으로 이어지는 설원에 모습을 드러냈다. 긴장과 죽음에 대한 공포는 아버지에 대한 존경심과 함께 영광으로 그에게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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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때 거대한 화산의 칼데라였던 볼스 피라미드는 바다 한가운데 불쑥 튀어나온 선바위다. 시드니에서 북동쪽으로 642km 지점의 태즈먼 해상에 해발 562m 높이로 솟아 있다. 이 선바위에 접근하려면 로드호 섬에서 배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배가 볼스 피라미드에 바짝 접근했을 때 조개와 성게로 잔뜩 덮여 미끌거리는 바위 위로 뛰어내려야 한다. 이때 거센 파도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1965년까지 여섯 팀의 등반대가 이 바위에 상륙해 등반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했다. 1973년 키스 벨과 그렉 모티머는 두 번의 비박(Bivouac, 등반 중 악천후나 사고 등으로 천막이나 산장을 이용하지 않고 노숙하는 것) 끝에 드디어 정상에 올랐다. 그때 멀리서 새털구름이 몰려오는 것이 보였다. 하산을 방해하는 반갑지 않은 손님이다. 하지만 그들은 볼스 피라미드를 꼭 횡단하고 싶었고, 어려운 바위 지대를 통과하기 위해 또 한 번의 비박을 강행했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 것일까. 사이클론이 덮쳐 며칠간 꼼짝하지 못하게 된 두 사람은 위험천만한 하강을 거듭한 끝에 해발 60m 지점의 동굴에 도착했다. 그들을 구출하기 위해 구조 보트가 몇 차례 왔지만 높은 파도 때문에 접안을 못하자, 결국 바다로 다이빙하여 보트가 대기하고 있는 지점까지 헤엄쳐 탈출했다. 며칠간의 추위와 갈증으로 거의 탈진 상태였지만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멋진 탈출이었다. |
<출처;nate.com/justinKI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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