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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6.25 전쟁 초기 3일간의 방송

명호경영컨설턴트 2008. 9. 19. 05:51
 

 
 
 
 
 
   6.25전쟁 초기 3일간의 방송  
 
 
* 한국방송 70년사에서 *
 
 
 
 
북한군이 앞세우고 서울에 들어온T34 重탱크
 중량32t, 최대시속 50km, 승무원 4명으로 인민군 전력의 핵심이었습니다.
 
 
 6월 25일 방송편성시간은
 
아침방송 5:30-8:30,
 낮방송    11:30-13:30,
         저녁방송 17:00-22:00         
 
대략 이런 순서로 진행 되었으며 간간히
뉴스와 공지사항시간을 약간씩 늘렸을 뿐이었다,
 
 이날밤부터  ( 밤에는 방송이
 없어 실질적으로는 26일첫 방송부터)
 KBS는 군관리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철원 당시 공보처장이 국방부 정훈국장에게
요청했다는 글도있고 반대로 이선근 정훈국장이 이철원
공보처장에게 통고 했다는 글도 있는데 절차상
어느쪽이 맞는지 알수는 없다.
 
군관리를 담당한 부서는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 였다.
 
 
정훈국장 이선근대령, 보도과장 김현수 대령이고
방송국 파견관은 홍천중위와 최학수 중사 등 몇 명이었다.
 
 
춘천방송과장 시절 최학수님 앞줄 가운데분
 
 이해를 돕기위해 제가 간단히 설명 드립니다.
 
홍천 중위와 최학수 중사 그리고 몇 명의 사병들이
6월 26일 방송부터 뉴스를 검열하기 시작했고
6.25전쟁기간 중 방송국직원들과 생활을 같이 하셨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홍천중위는 공보부에서 공보국장을 지내는 등
요직을 거치셨고 최학수님은 KBS에서 무대계장, 춘천방송과장,
공사직전 보도부 차장등을 역임하시다가 문화공보부로
가셔서 정년퇴임 하셨습니다.
 


뒷줄 왼쪽에서 다섯번째분이 홍천님입니다.
뒷 줄왼쪽부터 문시형, 김재연, 이홍수, 노정팔, 홍천님오른편 주태익,
이호원, 한분건너 방필주, 이규철, 이상설님인데 노정팔님 국제방송국장 시절
대공방송관련 수상자분들의 사진인 것으로 보입니다.
 
 
공보부나 방송국에서는 홍천님이나 최학수님을
흔히 홍대령, 최상사라는 애칭으로 부르기도 했습니다.
다음에 더 자세한 얘기가 있기에 오늘 설명 올렸습니다.
 
 
방송국이 군 관리하에 들어가던
6월  26일 아침 8시 신성모 국방부장관이
방송국에 직접 나와서 국민들의 동요를 진정시키는
 짤막한 담화를 방송 했는데 이때는 이미 군 파견관의
 지시에 의하여 모든 정규프램방송을 중단하고
임시편성으로 진행하는 때였다.
방송은 아침, 낮, 저녁의 구분없이
 종일방송을 하게 된다.
 
국방부장관에 이어 주한미대사인
무초도 와서 생방송으로 그의 담화를 발표한다.
 
 

주한 미국대사 무쵸님 왼쪽 분
 
주한 미국대사 중에서도 초대 대사였던
 무쵸 는 6.25동란을 통해 북괴의 불법남침이 진행된
다음날인 6월 26일 거의 독단적인 행동이라 할 수 있는
 자의적인 의사로 KBS마이크 앞에 섰다.
 딴 나라에 주재하는 대사가 이런 일을 하는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고 적침을 물리치려는 한국민의 의지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이어서 정치적인 행동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행동이었다.
 
미군의 참전이 결정되기 전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었다.
 
“우리들은 흥분속에서 24시간을 보냈습니다.
우리들은 기나긴 하룻밤을 견디어 왔습니다.
나는 오늘 아침 대한민국 국군이 그들의 자유와
위대한 독립을 방위함에 있어 그 임무를
다 하고 있다는 것을 기쁨과 영광으로
 생각 합니다,.....”
 
이렇게 시작한 무초대사의 강연은
북괴의 불법남침을 규탄하고 국군의 선전을 찬양 하면서
 불안에 떨고 있는 한국 사람들에게 미군의 참여를 은근히 비치는
 고무적인 내용의 고무적인 연설 이었다.
 
이날 또 특기 할 것은 문화 예술인들이
집단적으로 전쟁에 참여한 일이다.
문총비상 대책위원회라는 것이
조직된 것은 6월 26일 아침이었다.
 
고희동, 박종화, 모윤숙, 공중인 등 문화인이
주동이 되어 발족한 위원회는 즉각 행동을 개시하여
국민들에게 전의를 고취하는 선전전을 폈으며
그 선전전의 일환으로 KBS마이크를 잡고
애국시를 스스로 지어 낭송했다.
 
1948년 유엔 대표부시절 모윤숙님(앞줄 왼쪽)
 
모윤숙은 �차를 타고 아군의 주 저항선인
 미아리고개 밑에까지 가서 적과 분전하는 국군장병들을
격려 했으며 그 목매인 외침은 자즈러 들어가는
국군의 사기를 높혔다.
 
 ----중 략----
 
그들은 피난길에 오르면서도 계속
대적방송의 마이크를 잡고 적의 전의를 깎아내리고
 아군의 사기를 드 높이는 방송을 했으며 부산에서
전쟁을 잊은듯한 부화와 소란만이 판을 치는 상황 속에서도
구국의 정열을 버릴 수 없어 계속  KBS부산방송국을 통해
대적 방송을 계속 하면서 문화 예술인들의 최초의
 집단체로서 구국운동이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벌어지게 되었다.
 
 -----중 략 ----
 
 28일 새 벽 3시경 정동방송국에는
무장한 북괴 특무공작원(국군복장) 몇 명이 찾아왔다.
 이들은 먼저 사람들이 있는 지하 방공호에 들어갔다.
그곳에는 5,6명의 직원들이 있었다.
 
그 중에는 경찰관복을 입은 경찰관도 한 사람 있었다.
북괴군은 그 자리에서 경찰관을 사살하고 유유히 이들을
앞세워 현관으로 올라왔다.
 
얼마후 권총을 든 국방군 장교 한명이 현관으로 올라왔다.
 
김현수 대령이었다.
 
김대령은 정훈국장 이선근 대령에게 방송국을
처리(파괴) 하겠다고 보고하고 그 길로 헌병 한명과
 �차 운전병을 대동하고 방송국에 들어오는 길이었다.
 
그는 서울시민에게 곧 후퇴 피난하라고 방송하고
 그 직후 방송국을 파괴하려는 계획이었다고 한다.
 국방군 복장을 하 군인들이 누구인지를 묻자 김대령이라고
 말하는 순간 다발총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군사영어학교 출신인 김현수 대령은
이렇게 해서 방송국에서 산화했다.
( 주 : 김현수 대령은 국방부 정훈국 보도과장으로
그의 순직은 대령으로는 두번째이고 정훈장교로는 첫번째 였으며
준장이 추서 되었습니다 )
 
 이 때 김대령이 현관에 떨어 뜨린 권총 때문에
대한 방송협회 직원 한 사람이 또 사망했다.
 
북괴군은 김대령 시체를 덕수초등학교
언덕에 유기하고 그가 떨어뜨린 권총은 그대로 놔두고 있었다.
 방송국 사정이 궁금한 대한 방송협회 숙직원 한 사람이
 방송국 현관에 들어서다가 권총이 있길래 이것을
집어드는 순간 북괴군은 그대로 그를 사살 한 것이다.
 

중 탱크를 뒤따라 들어온 북한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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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여기 올린 사진들은 제가 이해를 돕기 위해서
여기 저기서 모은 자료 사진을 모아 올려 드린 것입니다.
되도록 많은 사진을 구해 보려고 했으나
 잘 되 지 않았습니다.
 

6.25직전의 서울 시가지 모습
 
 

개전초기 한국군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인민군 전차


탱크를 앞세우고 남으로 밀고 내려오고 있는 인민군.

 중앙청을 거쳐 남대문을 향하여 달리고 있는 인민군 탱크들.


6.25 하의 서울에서 이른바 `의용군` 끌려가는 장정들.

 
대전부루스 장사익
 
 

 

 

 

 <출처;tong.nate.com/hnj00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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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너와집나그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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